삼시세끼란 TV예능에서 유해진과 차승원이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가는걸 보았다.지금은 노고단 정산부근 까지 차로 올라갈 수있는것으로 안다. 그러나 내가 친구들과 지리산을 갔을때는 노고단까지도 걸어 올라야 했다. 20대 초반 설악산을 다녀오고 나서 우리는 지리산을 오르기로 결심했다. 남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인 지리산을 안가보고 어찌 산사나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설악산처럼 자주 찾지 않아서인지 (처음이자 마지막) 지리산에 대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우리는 남원에 새벽 4시쯤 도착했다. 우리의 계획은 화엄사를 출발 진주로 떨어지는 종주코스였다. 화엄사 출발 노고단, 세석평전, 천왕봉, 진주로 하산하는 2박3일 코스였다. 남원에서 화엄사까지 가는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은 6시 쯤이었다. 우리는 대합실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는 무척 힘이 들었다. 산에 아직 몸이 적응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너무 길어서인지 더운 여름이어서인지 하여간 힘들었단 기억뿐이다. 노고단에서 1박, 세석평전에서 1박을 했다. 지금 세석평전은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비박을 할 만한 장소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갔을 때는 나무가 없고 말대로 평평하고 아주 넓은 뜰처럼 보였다. 세석평전에서 하룻밤을 잔 뒤 우리는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을 향했다. 지리산은 운해가 유명하다. 산이 높다보니 구름보다 높은 봉우리에서 구름을 바라볼 수 있다. 운해란 말과 같이 구름이 바다처럼 펼쳐져있고, 봉우리가 듬성듬성 섬처럼 피어 있었다. 가장 인상에 남는 지리산 풍경이었다. 천왕봉에 오후2시 쯤 도착했을 때 나는 발이 풀려 쓰러질것만 같았다. 지리산은 너무 크고 힘들었다. 지루하고 지리지리했다. 우리는 진주로 하산해 남강에 있는 논개가 산화했던 촉록루를 구경했다. 지금도 누가 물으면 "나도 지리산을 다녀왔지"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러나 너무 먼 추억이고 잘 기억도 없다. 나는 다시 한번 지리산을 가보려 계획하고 있다. 종주등반은 무리일것 같고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코스를 다녀 올까 생각중이다. 그러나 이 코스도 약11㎞ 정도 되는 코스라 홀로 산행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나이가 한살이라도 더 젊을 때 올라가야 할텐데 마음만 굴뚝같다. 지금은 혼자서 산에 다니는 경우가 많지만 젏었을 땐 친구들, 직원들과 함께 산을 다녔다. 대둔산도 기억에 남는다. 2023년 2월경 대둔산을 혼자 다시 찾았었다. 옛기억을 되살리며 개척탑이 설치되어 있는 마천대를 향했다. 대둔산은 뭐니뭐니해도 흔들다리(금강구름다리)와 삼선계단이 백미다. 20대에 갔을때는 케이블카도, 흔들다리도, 삼선계단도 없었다. 지금은 케이블카가 있어 손쉽게 대둔산의 절경을 구경 할 수 있다. 대둔산 흔들다리를 건넌적은 없다. 흔들다리를 건너면 차가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하산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엔 삼선계단을 올랐다. 깍아지른 봉우리를 약60도정도 되는 다리로 연결해 놓았다. 아찔하고 짜릿했다. 한번 삼선계단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벗어날 수 없는 일방통행길이다. 앞서가던 아주머니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중간쯤에서 얼어 붙다. 나는 "아래를 보지마시고 한발한발 걸음을 옮기세요" 하며 용기를 북돋았다. 이 계단을 오르기 전에 내가 올라갈수 있을지 잘 생각해보고 첫발을 내딛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삼선계단에서 뒤를 돌아 주위 풍경을 바라보았다. 기암괴석이 우뚝하고 첩첩으로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호남의 소금강이란 말이 헛투르지 않았다. 젊은날 대둔산의 추억은 눈물이다. 친구들과 같이 대둔산에 갔을 때 나는 우울감에 빠져있었다. 그 때도 나혼자 사랑에 빠져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나를 본체만체 하는데 혼자 그녀의 집을 찾아가 서너시간 서성인적도 많았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은시간까지 그녀의 창문에 불이 켜지지 않지 언제 그녀가 집에 들어오는가, 나는 약속도 기약도 없는 가을밤을 그녀의 창문을 쳐다보며 어슬렁거리며 혼자 영화를 찍었다. 물론 한번쯤은 그녀에게 다가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표현을 했을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나는 나의 연민에 빠져 깊은 수렁속을 헤메고 있었다. 그런시기에 대둔산을 친구들과 찾았다. 나는 대둔산 하산후 음식점에서 막걸리를 들이부으며 엉엉 울었다. 친구들이 무슨일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 여자가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했다. 친구녀석들은 "야, 이 미친놈아, 네가 말도 안했는데 그 여자가 네마음을 알겠냐"고 하며 낄낄거렸다. 그 놈들은 사랑의 쓰디쓴맛을 아직 알질 못했다. 직원들과 같이 운악산에 갔던 때도 생각난다. 운악산은 경기 5악(화학,관악,감악,송악,운악산)으로 불리는 산이다. 악자가 붙은 산은 어느 산이든 험한산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서울 인근에 있는 산이니 쉽게 다녀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점에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산악회를 조직해서 근교산을 조금씩 다녀보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우리는 운악산을 가기로 했다. 젊은 직원 6~7명이 함께 운악산을 올랐다. 산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험해졌다. 봉우리가 가팔라 쇠로된 발판이 놓여 있었다. 산을 자주 다닌 사람도 있었지만 산이 처음인 사람도 있었다. 산행길이 너무 험악해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산길은 빨리 어두워지고 준비가 없던 우리들은 헤드랜턴 하나만을 의지해서 조심조심 하산을 했다. 길을 조금만 잘못 디뎌도 절벽으로 떨어질것만 같았다. 마침내 마을로 접어들었을때는 아주 컴컴한 밤이 되어 있었다. 운악산에서 도시로 나가는 버스는 운행이 끝나버렸다. 우리는 모두 근처 민박집에서 예정이 없던 하룻밤을 묵을수 밖에 없었다. 월요일 영업을 하기 위해선 금고를 열어야 했다. 그러나 출납업무를 맡고 있던 내가 영업시간에 맞춰 출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큰일이었다. 비상연락을 하여 대리에게 연락을 취했고 아침일찍 다른지점에 보관하던 예비열쇠를 가지고 금고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직원 7명이 빠져 버렸으니 업무가 마비될 판이었다. 우리가 지점에 도착한 시간은 12정도 였다. 손님이 바글바글했다. 우리 모두는 시말서를 썼다. 시말서가 문제가 아니라 잘못했으면 뉴스에도 나올뻔한 사건이었다. 이런 모든일이 지금은 추억이 되었다. 아직도 나는 산에 다니고 있다. 비록 지금은 주로 혼자서 산을 찾고 있지만, 젊은시절 산행들이 나를 계속해서 산으로 이끌고 있다. 추억에 취하고, 아름다움에 취한채 나는 오늘도 내일도 산에 오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