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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양(豫讓),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은 의인…원수마저 감동시켰다
《사기》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보면 예양(豫讓)이란 이름이 나온다. 그는 진(晉)나라 사람으로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섬긴 일이 있지만 이 두 사람은 예양을 그다지 예우하지 않았다. 마음이 상한 예양은 그들을 떠나 지백(智伯)이란 자를 섬기게 됐다. 지백은 진나라 육경의 한 명으로 세력이 강성하고 교만한 성품이었으나 예양은 극진히 예우했다.
그런 지백이 범씨와 중항씨를 제거하고 조양자(趙襄子)를 공격했는데,오히려 한나라 · 위나라와 연합한 조양자에게 패해 땅은 셋으로 공중분해되고 후손까지 끊어졌다. 이 정도로 분이 풀리지 않은 조양자는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술잔으로 쓰며 설움을 분풀이했다.
이 와중에 살아남은 예양은 자신의 진가를 알아준 지백을 위해 원수를 갚아 영혼이 부끄럽지 않게 하겠노라고 다짐하며 산속으로 달아나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죄를 저질러 죄수의 몸으로 궁궐로 들어가 화장실의 벽 바르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비수를 품고 있다가 조양자를 찔러 죽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조양자도 보통이 아니었다.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내막을 알아보니 바로 예양이 몸에 비수를 품고 자신을 죽일 기회를 노린다는 것이었다. 그를 붙잡아오게 해 문초하자 예양은 죽은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랬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주위에 있던 자들이 그의 목을 베려고 하자 조양자는 그를 의로운 사람이자 천하의 현인이라며 풀어주었다.
예양은 얼마 뒤 몸에 옻칠을 한 문둥이로 분장하고 숯가루를 먹어 목소리까지 바꾸어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한 채 시장을 돌아다니며 구걸했다. 그의 아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어느 날 예양이 오랜 친구를 찾아가니 그 친구만은 예양을 알아보고는 "아까운 재능을 썩히지 말고 조양자의 신하가 된다면 분명 대우를 받을 것"이라며 "정 그를 죽이고자 한다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을 텐데 왜 이런 추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느냐"고 충고했다. 그러나 예양은 친구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조양자가 측근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외출해 다리를 건너려 할 때 말이 갑자기 놀랐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예양이란 자가 다리 밑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니나 다를까,아랫사람들을 시켜 찾도록 하니 숨어 있던 예양이 나타났다.
조양자는 예양을 호되게 꾸짖으며 "왜 범씨와 중항씨를 섬겼다가 지백에게 몸을 맡기고,지백이 그들을 멸망시킬 때는 가만히 있더니 죽은 지백을 위해 이토록 끈질기게 원수를 갚으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예양은 "범씨와 중항씨를 섬긴 일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이 나를 보통 사람으로 대접했으므로 나도 그에 맞게 처신했다. 그러나 지백은 나를 한 나라의 걸출한 선비로 예우했기 때문에 그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다"고 말했다. 조양자는 예양의 진심을 알았으니 더 이상 용서해주는 일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병사들에게 그를 포위하게 했다.
그러자 예양은 자신이 지난번 암살하려 했을 때 용서해준 일에 감사하면서 조양자의 옷이라도 칼로 베어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게 해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조양자는 그의 의로운 기상에 크게 감탄하고는 사람을 시켜 자기 옷을 예양에게 가져다 주도록 했다. 예양은 칼을 뽑아 세 번을 뛰어올라 그 옷을 베어버리고는 칼에 엎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던 날 '조나라의 뜻있는 선비들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모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고 사마천은 기록하고 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고 했던 그의 말은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
예양에 대해 논한 글〔豫讓論〕 성호 이익(李瀷)
옛날 예양(豫讓)이 조 양자(趙襄子)에게 죽음을 당한 것을 두고 선유(先儒)들은 조 양자가 예양을 죽여서는 안 되었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양은 양자에게 반드시 원수를 갚고자 하여 다섯 차례 복수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그의 의지는 원수를 갚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양자는 그를 의롭게 생각하면서도 죽였으니, 죽이지 않으면 또한 끝내 자신이 화를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닥친 환란을 피하기 위해 의로운 선비를 차마 죽였으니, 사사로움을 좇아 도리를 저버렸던 것인가?
의리로 볼 때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겠다. 지금 만약 두 군대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하면 목숨을 걸고 사지(死地)에 들어가 상대의 장수를 베고 상대의 군주를 사로잡는 것은 모두 충성스러운 일로, 적의 충성심이 고양될수록 우리에 대한 공격은 더욱 급박해질 것이다. 그런데 다섯 걸음 내에서 적이 무기로 공격해 오는 상황에서 “저들의 충성심을 부식(扶植)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우리는 저들의 공격을 조심하며 피할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또한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군자(君子)가 권도(權道)로 대처하는 경우에는 본래 느긋할 때와 급할 때에 따라 차이가 있다. 느긋할 때에는 그래도 관용을 과시하며 용서할 수 있지만, 급할 때에는 상황 자체가 충성스러운지 어떤지를 고려할 겨를조차 없는 것이다. 양자는 예양을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 더 권면하였는데, 이러한 행동이 예양으로 하여금 죽이지 않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도록 하여 마침내 원수 갚는 행위를 그치게 할 수도 있다는 주장은 참으로 논할 가치도 없는 말이다. 오히려 예양으로 하여금 권면한 말에 더욱 분발하도록 하였으니, 나는 예양이 양자를 반드시 죽이고 난 뒤에야 그만두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양이 양자를 죽이기 위해 변소를 칠하기도 하고 다리 밑에 숨기도 하였으니, 양자가 화를 면한 것은 요행이었다. 그렇지 못해 혹시라도 화를 당했더라면, 이것이 바로 송 양공(宋襄公)이 결국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까닭인 것이다.
저 예양이라는 사람은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지만, 재주가 모자란 사람이었다. 그가 만약 천하를 움직일 만큼 지혜가 있었거나 기습을 성공할 만큼 용맹이 있었다면, 양자가 어떻게 다시 화를 모면할 수 있었겠는가.
예(禮)에 근거하면 “정당한 이유가 있어 살인을 저지른 경우에는 피살된 사람의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원수를 갚게 하지 말며, 원수를 갚으면 살인죄로 죽인다.”라고 하였고, 또 “아버지가 죄에 따라 주륙되었는데 자식이 복수를 하면, 이것은 칼날이 오가게 되는 길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양자가 지백(智伯)을 죽임에 있어 이미 도리에 위배되는 점이 없었으니, 원수를 갚는다고 칼날이 오가게 한 일개 예양에게 처벌의 법을 적용하는 것이 유독 불가할 리 있겠는가. 그러므로 양자가 예양을 죽인 것이 늦었고, 잘못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옛날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주왕(紂王)이 어질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달아난 도적과 잔당들이 심복(心腹)이 되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무왕은 개의치 않고 그들을 처단했다. 그리고 천하가 평정된 뒤에는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이 옛 기반을 회복하고자 마침내 세 감시인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는데, 주왕은 비록 무도했다지만 무경은 극악무도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음에도 주공(周公)이 주륙하였다. 무왕과 주공은 어찌하여 창을 거두고 형벌을 감하여 그들의 충효를 널리 권장함으로써 세상의 신하와 자식 된 자를 권면하는 모범으로 삼지 않았던 것인가? 주왕은 일개 사내였는데, 당시에 일개 사내를 편드는 자라면 비록 요(堯) 임금을 보고 짖는 도척(盜跖)의 개처럼 하찮은 정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모두 죄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자는 진(晉)나라의 권신(權臣)이었고, 비록 상나라와 주(周)나라의 교체기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백의 악행은 주왕과 비슷한 부류였다. 위로는 임금을 협박하고 곁으로는 열경(列卿)을 병탄하여 별다른 이유 없이 잔인하게 멸망시켰다. 그러한 지백이 죽음을 면치 못하고 멸망한 지경에 이르렀고 보면, 충성을 다하고자 했던 신하들은 돌봐 준 소소한 은혜에 감복한 잔당들에 불과할 뿐이었으니, 옛날의 이른바 살신성인(殺身成仁)했던 사람들과는 서로 아주 반대되는 부류이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저분이 일찍이 나를 국사(國士)로 대우해 주었다.”라고 하니, 이 같은 부류들이 국사가 무엇인지 알기나 했겠는가.
지과(智果)는 기미를 알았고, 지국(智國)은 환난을 염려했으며, 치자(絺疵)는 상황을 잘 살폈으니, 예양은 이와 같은 사람들에 낄 수 없다. 그는 단지 팔짱을 끼고 앉아 망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으며, 지백과 서로 마음이 통한 것이라고는 악행을 함께하여 이루어 준 것에 불과하였으니, 그의 지혜는 칭찬할 것이 못 된다. 그리고 그가 원수를 갚고자 하였을 때에 그의 행동은 또한 강도(强盜)의 하찮은 행위에 지나지 않았으니, 만약 예양의 계책이 성공하였더라면, 사신(史臣)이 “강도가 양자를 죽였다.”라고 특별히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주륙됨으로써 돌봐 준 소소한 은혜를 갚고자 했던 일개 강도를 제거한 것에 불과한 일이 되었으니, 양자에게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한편으로 또 다른 설이 있다. 지씨(智氏)와 조씨(趙氏)는 모두 진(晉)나라의 배신(陪臣)으로서 국권을 잡았던 가문이므로, 만약 진나라의 법이 제대로 시행되어 두 집안이 재판을 받았더라면 지백은 마땅히 죽어야 했을 것이니, 예양은 감히 원수를 갚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단안(斷案)을 삼을 수 있을 뿐이다.
[주]양자는 …… 권면하였는데 : 처음에 예양(豫讓)이 변소의 벽을 칠하는 죄인으로 변장하여 양자(襄子)를 죽이려고 하다가 사로잡혔는데, 양자가 죽이지 않고 “저자는 의인(義人)이니, 내가 조심하면 된다. 그리고 지백(智伯)이 죽고 후사(後嗣)가 없어 그 신하가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니, 이 사람은 천하의 현인(賢人)이다.”라고 칭찬하며 풀어 준 것을 가리킨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豫讓》
豫讓論
昔者豫讓死於襄子。先儒謂襄子不當殺。余以爲不然。豫讓必報襄子。五起而不中。其志不報將不休也。襄子義而殺之。不殺亦終不免也。爲己之患。忍殺義士。徇私而害理歟。曰其義亦不容不爾。今使兩陣對鬨。能用命入死地。斬其將獲其君。皆忠也。敵之忠愈厲。我之賊愈急。其或劒及於五步之內。而曰彼忠不可不植。我賊惟在謹避。不亦愚乎。君子處權。本有緩急。緩則猶可姱以貸之。急則其勢有不暇計其忠也。襄子非徒不殺。又從而勸之。使讓感其不殺。遂止不報。固無足言者。使其益厲乎所勸。吾見襄子之必殺後已也。廁之塗橋之伏。卽襄子之幸免。不然而或爲所陷。此宋襄所以卒爲天下笑也。彼讓者欲忠而短於才。其或智足以動天下。勇足以辦狙擊。襄子又安得而避之。據禮殺人以義者令勿讎。讎之則死。父受誅子復讎。此推刃之道也。其殺智伯。旣無害理。則獨不可加法於推刃之一讓乎。故曰襄子之殺讓。晩也非過也。何以明之。昔武王克商。雖以紂之不仁。尙有逋盜餘孼。互爲心腹。爲之致死。武王不卹也。天下旣定。紂子武庚圖復舊基。遂與三監叛。紂雖不道。在武庚未必爲鉅慝極惡之歸。而周公誅之。武王周公何不戢戈弛刑。彌奬忠孝。爲人臣子之勸哉。紂獨夫也。當是時爲獨夫左袒者。雖有區區吠堯之誠。均之爲可罪也。襄子晉之權臣。縱不可比幷於商周之際。而智伯之惡。與紂同科。上而脅君。旁呑列卿。無故而殘滅之。至不免而亡。則其願忠之臣。不過餘孼。感呴濡之恩者也已。與古所謂殺身成仁者。大相背馳。而其言則曰彼嘗遇以國士。若此類何足以知國士哉。果也知微。國也慮患。絺疵察勢。讓則不與。只拱手而坐視淪喪。其所以爲相得者。不過同惡以濟之。其智未足多也。及其欲報。又不出於劫盜細行。使讓計得行。史臣將特書曰盜殺襄子。畢竟事不遂而被戮。不過除一劫盜之懷呴濡者也。於襄子何憾焉。抑又有一說。智趙俱是陪臣之執國命者。使晉法得行而兩家就訟。則智伯當死。豫讓不敢報。以此爲斷而已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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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관지 12-6.예양론(豫讓論)-중국 명의 학자 방효유(方孝孺)
士君子立身事主(사군자입신사주) : 선비가 출세하여 임금을 섬김에
旣名知己(기명지기) : 임금이 자기를 알아주면,
則當竭盡智謀(칙당갈진지모) : 지모를 다하고
忠告善道(충고선도) : 충심으로 간하여 선한 길로 인도해서
銷患於未形(소환어미형) : 환란이 생기기 전에 없애고,
保治於未然(보치어미연) : 일이 일어나기 전에 잘 다스려,
俾身全而主安(비신전이주안) : 자신을 안전하게 하고 임금님도 평안하게 해야 한다.
生爲名臣(생위명신) : 이렇게 해야 살아서는 명망있는 신하가 되고
死爲上鬼(사위상귀) : 죽어서는 덕이 높은 귀신이 되어
垂光百世(수광백세) : 백 대에 이름을 남기고
照耀簡策(조요간책) : 역사서에 빛나게 되니
斯爲美也(사위미야) : 이것이 훌륭한 일이다.
苟遇知己(구우지기) : 임금이 자기를 알아주는데도,
不能扶危於未亂之先(불능부위어미란지선) : 난이 일어나기 전에 위험에서 구해내지 못하고
而乃捐軀殞命於旣敗之後(이내연구운명어기패지후) : 나라가 망한 후에 목숨을 바쳐 이름을 내고
釣名沽譽(조명고예) : 명예를 얻어,
眩世駭俗(현세해속) :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짓은,
由君子觀之(유군자관지) : 군자가 볼 때
皆所不取也(개소불취야) : 취할 만한 것이 못된다.
蓋嘗因而論之(개상인이논지) : 이런 면에서 논해 보겠다.
豫讓臣事智伯(예양신사지백) : 예양이 지백(智伯)의 신하가 되어 섬겼는데,
及趙襄子殺智伯(급조양자살지백) : 조양자(趙襄子)가 지백을 죽이고 난 후에야
讓爲之報讎(양위지보수) : 예양이 지백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
聲名烈烈(성명열열) : 그리하여 예양의 명성이 자자하여,
雖愚夫愚婦(수우부우부) : 비록 어리석은 백성이나 부녀자라 할지라도
莫不知其爲忠臣義士也(막불지기위충신의사야) : 그가 충신이며, 의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嗚呼(오호) : 아! 슬프다.
讓之死固忠矣(양지사고충의) : 예양이 죽은 것은 정말 충성스러운 것이었다.
惜乎處死之道(석호처사지도) : 애석하여라, 그가 죽음을 택한 방법에
有未忠者存焉(유미충자존언) : 충성스럽다고 할 수 없는 곳이 있었으니,
何也(하야) : 왜 그런가?
觀其漆身呑炭(관기칠신탄탄) : 그가 몸에 옻칠하여 문둥이가 되고 숯을 삼켰을 때
謂其友曰(위기우왈) : 그의 친구에게 말했다.
凡吾所爲者極難(범오소위자극난) : 내가 이렇게 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將以愧天下後世之爲人臣而懷二心者也(장이괴천하후세지위인신이회이심자야) : 장차 후세에 신하된 자가 두 마음을 품는 것을 부끄럽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謂非忠可乎(위비충가호) : 이것은 충(忠)이라고 할 수 있다.
及觀斬衣三躍(급관참의삼약) : 그가 참의삼약(斬衣三躍),
襄子責以不死於中行氏(양자책이불사어중행씨) : 즉 조양자가 입고 있던 옷을 세 번 발로 밟은 후에 칼로 벤 것을 본 조양자가 어찌 중행씨를 위해 죽지 않고
而獨死於智伯(이독사어지백) : 지백만을 위해 죽느냐고 책하자,
讓應曰(양응왈) : 예양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中行氏以衆人待我(중행씨이중인대아) : 중행씨는 나를 보통 사람으로 대접해 주었기에
我故以衆人報之(아고이중인보지) : 그래서 나도 보통 사람으로 보답했고
智伯以國士待我(지백이국사대아) :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로 대접해 주었기에
我故以國士報之(아고이국사보지) : 나도 국사의 절개와 지조로써 보답하는 것이다.
卽此而論(즉차이논) : 이것으로 논하면
讓有餘憾矣(양유여감의) : 예양에게 유감스러운 점이 있다.
段規之事韓康(단규지사한강) : 단규(段珪)가 한강자(韓康子)를 섬기고,
任章之事魏獻(임장지사위헌) : 임장(任章)이 위헌자(魏獻子)를 섬겼지만
未聞以國士待之也(미문이국사대지야) : 한강자나 위헌자가 그들을 국사의 예절로 대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而規也章也(이규야장야) : 그러나 단규와 임장은
力勸其主(력권기주) : 온 힘을 다해 임금에게
從智伯之請(종지백지청) : 지백의 요구대로
與之地以驕其志(여지지이교기지) : 땅을 주어 지백의 마음을 교만하게 해서
而速其亡也(이속기망야) : 빨리 망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郗疵之事智伯(치자지사지백) : 치자(郗疵)가 지백을 섬길 때도
亦未嘗以國士待之也(역미상이국사대지야) : 또한 지백이 그를 국사로 대접하지 않았지만,
而疵能察韓魏之情以諫智伯(이자능찰한위지정이간지백) : 치자는 한(韓)과 위(魏) 두 나라 실정을 살펴 지백에게 간했다.
雖不用其言(수불용기언) : 지백이 비록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아
以至滅亡(이지멸망) : 패망하였으나,
而疵之智謀忠告(이자지지모충고) : 치자의 지모와 충고는
已無愧於心也(이무괴어심야) : 마음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이다.
讓旣自謂智伯待以國士矣(양기자위지백대이국사의) : 예양이 이미 스스로 지백이 자기를 국사 대우해 주었다고 했다.
國士(국사) : 국사라면
濟國之事也(제국지사야) : 나라를 구하는 선비여야 한다.
當伯請地無厭之日(당백청지무염지일) : 지백이 다른 제후의 많은 땅을 빼앗고도 만족하지 못할 때나
縱欲荒棄之時(종욕황기지시) : 멋대로 음란하고 난폭한 짓을 할 때에,
爲讓者(위양자) : 신하된 예양은
正宜陳力就列(정의진력취열) : 당연히 그의 지위와 재능을 다해서
諄諄然而告之曰(순순연이고지왈) : 순순히 그에게 고하기를
諸侯大夫(제후대부) : 제후와 대부들이
各受分地(각수분지) : 각각 받은 땅이 있어
無相侵奪(무상침탈) : 서로 침임하여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니,
古之制也(고지제야) : 이는 옛날 법제입니다.
今無故而取地於人(금무고이취지어인) : 지금 아무런 까닭도 없이 다른 제후와 대부의 땅을 달라고 하시는데,
人不與(인불여) : 그가 땅을 주지 않으면
而吾之忿心必生(이오지분심필생) : 우리는 분노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고,
與之(여지) : 주면
則吾之驕心以起(칙오지교심이기) : 우리 마음에 교만함이 생겨나니
忿必爭(분필쟁) : 분한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싸우게 되며,
爭必敗(쟁필패) : 싸우게 되면 반드시 패하게 됩니다.
驕必傲(교필오) : 또한 교만하게 되면 반드시 방종하게 되고,
傲必亡(오필망) : 방종하게 되면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라고 간해야 했다.
諄切懇告(순절간고) : 간절히 충고했는데도
諫不從(간불종) : 간언을 듣지 않으면
再諫之(재간지) : 또 간하고,
再諫不從(재간불종) : 또 간하였는데 듣지 않으면
三諫之(삼간지) : 세 번 간했어야 했다.
三諫不從(삼간불종) : 세 번 간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移其伏劍之死(이기복검지사) : 칼에 엎드라는 죽음에 옳겨져
死於是日(사어시일) : 그 날에 죽어져야 한다.
伯雖頑冥不靈(백수완명불영) : 그러면 비록 지백이 완고하고 영민하지 못한 사람이었을지라도,
感其至誠(감기지성) : 그 지성에 감동되어
庶幾復悟(서기복오) : 깨닫게 될 것이다
和韓魏(화한위) : 한(韓)과 위(魏) 두 나라와 화해하고
釋趙圍(석조위) : 조(趙)나라의 포위를 풀어
保全智宗(보전지종) : 지백의 종묘를 보존하고
守其祭祀(수기제사) : 제사를 지켰을 것이다.
若然(약연) : 이렇게 되었더라면
則讓雖死猶生也(칙양수사유생야) : 예양이 죽더라도 살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니,
豈不勝於斬衣而死乎(기불승어참의이사호) : 어찌 칼로 옷을 베고 죽는 것 보다 낫지 않았겠는가?
讓於此時(양어차시) : 그런데 예양은 이때
曾無一語開悟主心(증무일어개오주심) : 자기가 섬기는 지백이 깨닫도록 한마디도 하지 않고,
視伯之危亡(시백지위망) : 지백이 위험에 처해 망하게 된 것을 보기만 했다.
猶越人視秦人之肥瘠也(유월인시진인지비척야) : 동남쪽에 있는 월(越)나라 사람이 서북쪽에 있는 진(秦)나라 사람의 마르고 살찐 것을 보듯,
袖手旁觀(수수방관) : 수수방관하고
坐待成敗(좌대성패) : 앉아 성패를 기다리기만 했으니,
國士之報(국사지보) : 국사의 보답이
曾若是乎(증약시호) : 어찌 이럴 수 있었는가?
智伯旣死(지백기사) : 지백이 죽은 뒤에야
而乃不勝血氣之悻悻(이내불승혈기지행행) : 혈기를 누르지 못하여
甘自附於刺客之流(감자부어자객지류) : 스스로 자객의 무리에 끼어들었으니
何足道哉(하족도재) : 어찌 올바른 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何足道哉(하족도재) : 어찌 올바른 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雖然(수연) : 비록 그러하나
以國士而論(이국사이론) : 국사의 자격으로 논해 볼 때,
豫讓固不足以當矣(예양고불족이당의) : 예양이 국사가 되기에 부족한 것은 당연하다.
彼朝爲讎敵(피조위수적) : 그러나 아침에 원수였다가
暮爲君臣(모위군신) : 저녁에 군신이 되는
靦然而自得者(전연이자득자) : 뻔뻔스럽고 의기양양해 하는 자들은
又讓之罪人也(우양지죄인야) : 또한 예양에게도 죄인이다.
噫(희) :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