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회하유역의 슬픈 역사
1975년 8월 태풍이 하남(河南, Henan)성 주마점(駐馬店, Zhumadian)시를 강타했다. 광풍이 몰아치면서 하늘 뚫린 듯 단 사흘 만에 530밀리미터의 폭우가 쏟아졌다. 높이 116.34미터의 판교댐은 저수지를 가득 채운 5,083입방미터의 물을 막고 있었다. 한계치를 훨씬 웃도는 양이었다.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판교댐의 수문은 1천에 한 번 일어날 확률의 큰 홍수를 대비해 설계되었지만, 판교댐은 급속한 방류 과정에서 무력하게 무너졌다. 높이 109.7 미터의 석만탄댐 역시 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하남성 지방정부는 직접적인 인명피해를 2만 6천 명으로 집계했다. 최근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23만 명이 사망하고 수백 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대재난이었다. 이 대형참사는 과연 “천재(天災)였을까? 아니면 인재(人災)였을까?”(문혁춘추 24회 5)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선 회하(淮河)유역의 슬픈 역사를 되짚어 보자. 전통적으로 회수(淮水)라 불렸던 회하(淮河)는 황하와 장강의 사이에서 서에서 동으로 하남, 안휘, 강소 3성(省)을 관통해 1천 킬로미터 이상 흘러가는 큰 강이다. 예로부터 황하(黃河), 장강(長江), 회수(淮水), 제수(濟水)이 사독(四瀆, 네 개의 하천)이라 불렸던 중국의 4대강이다. 호북성과 산동성까지 포함하는 회하유역은 27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남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보다 5만 평방킬로미터나 더 넓은 지역이다.
▲ 회하유역의 지도. 하남, 안휘, 강소에 이르는 1000킬로미터 이상의 방대한 지역으로 푸른색 사각형이 그 중심지역. 회수로 흘러드는 수많은 지류가 실핏줄처럼 얽힌다.
회하유역은 서부와 남동부에 고원지대를 제외하면 드넓은 평원이 동쪽으로 펼쳐진다. 황하에 쓸려 와서 겹겹으로 쌓인 비옥한 충적토의 대지 위에 크고 작은 물줄기가 거미줄처럼 얽혀 회하로 흘러든다. 북중국의 건조한 한랭전선과 남중국의 온난·다습한 몬순이 만나는 중간지점으로 일기변화가 심하다. 12세기까지 회수(淮水=회하)의 물은 직접 황해(黃海) 바다로 흘러갔다. 1194년 황하가 남쪽으로 물길을 트면서 강물에 쓸려온 모래진흙이 회수 하구(河口)를 막아버렸고, 덕분에 회수는 하류에서 두 개의 큰 호수에 모였다가 장강 하류로 합류하게 되었다. 1850년대 중엽 황하가 다시금 북쪽으로 물길을 틀면서 회하유역은 또 한 번 큰 환경대란을 경험했다. 황하가 빨아들였던 지류들이 물길을 틀어 회수로 흐르게 된 까닭이었다.
회하유역은 잦은 홍수와 범람이 끊이지 않았으나 가장 큰 재난은 20세기 중일전쟁 과정에서 발생했다. 1938년 6월이었다. 장개석 지휘 하의 국민당군은 하남성 정주 부근에서 황하의 제방을 폭파해 동남쪽으로 새로운 물길을 텄다. 북동부 지역을 이미 점령한 일본군의 서진(西進)을 막기 위한 처절한 수공(水攻)이었다. 당시 국민당군은 일본군의 폭격 때문에 제방이 파괴되었다고 선전했지만······. 항일전쟁의 대의명문 아래 지역인민을 희생시키는 냉혹한 군사전략일 뿐이었다.
2. 땅 위로 흐르는 강
황하는 땅보다 높은 곳으로 흐르는 강이다. 강바닥의 높이가 인근의 지표면 보다 높다. 20년 전 나는 산동 반도를 여행하던 중, 황하의 광경을 직접 보기 위해 삭풍 몰아치는 평원으로 갔던 경험이 있다. 실제로 황하를 보기 위해선 언덕을 오르듯 비스듬한 경사면을 꽤나 올라야만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제방에 올라 강물을 내려다보는 순간, 나는 멀리 보이는 지표면이 강둑보다 훨씬 낮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고대부터 인류가 황하의 범람을 막기 위해 주변에 지속적으로 제방을 쌓아 올렸기 때문이었다. 강물에 섞여 흘러온 모래진흙이 계속 제방 안쪽으로 쌓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둑을 더 높이 쌓아올려야만 했다. 그 결과 황하는 땅위로 흐르는 강물이 되었다. 1961년 모택동과 인터뷰를 했던 미국의 언론인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 1905-1972) 역시 황하의 강바닥이 인근 땅보다 6-7미터 더 높다고 기록한 바 있다.
▲ 2009년 산동의 황화를 촬영한 이 사진을 보면, 강의 수면이 인근 지역의 지면보다 높다.
강을 자연이라 여긴다면 나이브한 생각이다. 자연 상태의 하천은 해마다 범람하며, 지형을 따라 제멋대로 움직이다 하류에선 넓은 델타를 이루며 바다로 흘러간다. 그런 자연 상태의 하천과 농경발생 이후의 관리된 하천과는 전혀 다른 물길이다. 신석기 농업혁명 이후 인류는 하천을 인위적으로 관리해 왔다. 물길 주변에 제방을 쌓고 강변의 비옥한 충적토에는 농지를 개간했다. 인류 4대의 문명은 모두 그러한 대규모 치수 과정을 통해 생겨났다. 강변을 따라 형성된 다수 촌락의 농민들이 함께 모여 제방을 쌓고 토사를 긁어냈다. 그런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효율적인 리더십과 대규모 인력동원이 필수적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여전히 고대의 전제군주제는 바로 그런 대규모 수자원 관리의 필요 때문에 생겨난 리더십이라 설명한다.
강이란 인류가 필요에 따라 자연을 개조해서 만든 인공의 수로(水路)이자 환경적 인프라(environmental infrastructure)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요구하는 “강의 재자연화”는 실현불가능한 정치적 구호일 뿐이다. 강은 인공적으로 개조되고 정비되고 관리될 수밖에 없다. 강변의 녹화를 위해 자연친화적 수자원관리는 필수적이지만, 댐과 보의 건설, 준설 및 제방 사업 자체를 전면 부정하는 태도는 오히려 반문명적이다.
▲ 황하의 뢰스(loess) 퇴적물 지대는 비옥한 농토로 활용되어 고대 중국의 황하문명의 발상지가 되었으나 이후 지속되는 산림벌채와 지력고갈로 황폐화되었다. https://arnenaessproject.org/anp/loess-plateau/
1938년 국민당군은 땅위로 흐르는 황하의 제방을 파괴하기로 결정한다. 작전지로는 정주 부근 화원구(花園口)가 선택되었다. 일단 강둑이 폭파되자 황하의 누런 물이 서서히 인근마을을 향해 흘러나왔다. 아직 여름 장마로 물이 불진 않았으나 국민당군은 군사작전의 기밀 유지를 위해 인근 농민들에게도 사전 통보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느린 유속의 누런 강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자 인근지대는 곧이어 대홍수에 휩싸였다.
하남은 인구밀도가 조밀한 북중국 중원의 농업중심지이다. 황하를 따라 크고 작은 촌락과 농지가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황하의 범람으로 수백만의 농민들은 피해를 입었다. 손수레와 소달구지에 곡식과 농기구를 챙겨서 고향을 뜬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침수되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기근으로 희생당했다. 일본군을 동부전선에 묶어두고 하남성 정주(鄭州)의 철로를 지킬 수 있었다 해도 민간의 피해는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무엇보다 황하의 수리관리의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계속 되는 홍수의 피해는 중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수십만이 홍수에 쓸려가 죽고, 수백만이 터전을 잃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환경파괴, 교통두절, 식량부족으로 1942-43년 사이 화하유역엔 무려 2백만 명이 아사하는 대기근이 발생했다. 중일전쟁 당시 하남 인구의 43프로에 달하는 1천 4백 50만의 인구가 피난민으로 전락했다. 수천 년 강물과의 투쟁을 통해 건조된 황하의 제방을 파괴한 군사작전이 부른 재앙이었다.
▲ 보트를 타고 홍수를 피해 떠나는 하남의 민초들 (Micah S. Muscolino, The Ecology of War in China, p.67)
3. "회하를 개발하라!"
중국정부 홈페이지에 게재된 공식 기록에 따르면, 회하유역의 치수사업은 1950년 최고영도자 모택동의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 1950년 7월과 8월 회하유역에는 대규모 홍수와 침수피해가 발생한다. 하남성과 안휘성에서 1천 3백만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4천만 무(畝=667평방미터)가 넘는 방대한 토지가 수몰되었다. 물난리를 피해 나무 위로 올라간 사람들과 독사에 물려 죽는 사람들 등등. 실시간으로 현장의 참상을 전하는 전보를 읽으며 비분강개한 모택동은 1950년 7월 20일 1년의 시한을 걸고 회하유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대책을 세우라 지시한다.
▲ 화하유역 개발에 동원된 민공들 (http://www.gov.cn/test/2009-08/03/content_1382280.htm)
이에 1950년 10월 14일 중공정부는 “회하의 치리(治理)에 관한 결정”을 반포하고, 1950년 11월 회하유역에서 제1차 회하 치리사업이 개시되어 이듬해 7월 하순까지 일사분란하게 전개된다. 수십만의 민공(民工)과 전문기술인력이 현장에 투입되어 저수지 개발, 제방복원, 준설 및 농지의 수로 건설이 진행되었다. 1951년 겨울 제2차 치리사업이 시작되어 이듬해 7월까지 전개되었다. 1953년엔 다시 새로운 치리사업이 개시되어 8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1957년 겨울까지 정부는 12억 원 이상을 투입해서 175개의 물길을 열고, 9개의 저주지를 건설해 316 입방미터의 수량을 확보했으며, 4,600킬로미터에 달하는 제방공사를 완수했다.
과연 1950년대 회하유역의 개발이 중국정부의 선전처럼 아름다운 성취였을까? 대약진 운동 당시 국가폭력을 고발한 언론인 출신 양지승(楊繼繩, 1940- )의 증언에 따르면, 1959년 11월부터 1960년 초까지 진행된 화원구 댐 건설에는 무려 13만 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지만, 완성 후 곧 설계의 문제점이 드러나 댐을 폭파해야만 했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공사에 동원된 수많은 민공들은 굶주림과 가혹행위를 내몰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결국 중국정부가 칭송하는 회하유역 치수사업의 성과는 대규모 민간노동력의 군대식 동원과 관료집단의 성과주의가 빚어낸 성급한 결실이었다.
▲ 화하유역 개발에 동원된 민공들 (http://www.gov.cn/test/2009-08/03/content_1382280.htm)
판교댐과 석만탄댐의 붕괴가 바로 그 점을 방증(傍證)한다. 이 두 댐의 건설과정을 둘러싸고 전개된 수자원공학자와 정부관료 사이의 웃지못할 신경전은 다음 회에 다루기로 한다. 대약진의 불합리와 모순을 증거하는 매우 중요한 사례이므로. <계속>
송재윤 / 객원 칼럼니스트(맥매스터 대학 교수)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