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국법으로는 양반의 직업이 공무원으로만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 급제 못하면 돈 한 푼 벌 곳이 당연히 없었답니다. 본의 아니게 무능한 양반이 많을 때였습니다.
책만 읽다가 돈 한 푼 못 벌고 관청에 빚까지 진 무능한 양반님, 그래서 그 쓸모없는 양반계급을 팔테니 누구든 내 빚 좀 갚아 달라는 그 양반에게...
평생 양반들에게 눌리어 살던 어떤 돈 많은 평민 부자가 선뜻 나섰고, 그 부자가 나중에 딴 소리 할까 봐 군수가 증인이 되어 증서를 작성해 주는 장면이 “양반전”이라는 조선 후기의 소설에 나오는데요...
군수로서는 관청 재산의 빈 부분을 얼른 채워 놓아야 하는데, 나중에 이 부자가 변심하여 도로 내어 달라 하면 큰일이거든요. 그래서 이 일에 개입을 하는 걸로 나옵니다.
군수가 증서에다 “양반이 지켜야 할 어려운 법도와 각종 체면 차리기”에 대해서만 잔뜩 써 놓자, 부자가 “무슨 양반이 그렇게 어렵고 어려운가” 하며 좀 쉽고 좋은 것으로 써 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소설이 진행됩니다
솔직히 평민 부자는 그동안 큰소리 치는 양반만 보았지, 양반들이 집 안에서 그렇게 복잡한 법도를 다 실천하고 있는지는 몰랐거든요. 그래서 다시 써 달라 한 것이랍니다.
군수가 그 말에 따라 이번에는 놀부의 심술보다 훨씬 더 심한, “양반의 많은 특권과 횡포”에 대해서 잔뜩 써 주는데, 부자가 그걸 보고서는 “양반이란 게 알고 보니 순 날강도였구나” 라면서 양반계급을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 그 유명한 “양반전”의 줄거리이지요
이래저래 양반이란 것이 별로 보탬이 안 되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린 부자는 그냥 평민으로 주저앉아 버리고, 본래의 그 양반은 다시 양반으로 복귀되었다는 이야기랍니다.
이것이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 줄거리인데, 복사기도 없던 시절에 계속 베껴 쓰고 또 베껴 쓰는 방법으로 이 이야기는 순식간에 대량 복사되어 전국으로 퍼졌다는군요.
작가 박지원은 이 이야기가 평민들에게 알려지면 양반들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질까 봐 순 한문으로만 글을 쓴 것인데, 박지원 뜻과는 반대로 후다닥 한글로 번역되어 엄청난 속도로 평민들에게 퍼져 나갔고 합니다. 물론 궁중에도 한문본, 언문본 모두 들어 갔겠지요.
수많은 백성들은 이 이야기로 양반의 무능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나중에 양반계급이 정말로 타파되고 말았으며, 친일파와 친러파를 비롯한 많은 개화파의 활동들에 바탕 철학을 제공해 주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 양반계급 타파 분위기가 실학파, 친일파와도 모두 연결되는 모양이군요.
정작 놀라운 사실은 양반계급 붕괴의 선봉장이 된 "양반전"의 작가 박지원은, 이 금수저 양반계급을 더욱 굳건히 지키기 위하여 "양반전"을 썼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양반전”의 서문에도, "이런 양반이 있어서는 정말 안 되겠기에 경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라고 미리 밝히고 있지요.
“실제 모델이 되었던 문제의 그 양반이 크게 불쾌해 하더라는 소식을 나중에 듣고, 아버님이 자기 뜻을 정말로 몰라 준다면서 크게 실망하더라”는 박지원 아들의 증언으로 보아, 박지원의 본 뜻은 “양반이 아무리 가난해도 양반의 기본을 잘 지켜서 양반 계급 전체의 명예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 나중에 박지원이 사또 자리에 올랐을 때 그 마을에 흉년이 들어, 정부로부터 구호 양곡을 받아 고을 사람들 전체에게 죽을 끓여 먹인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도 박지원은 맨땅에 금을 그어 양반과 쌍놈이 따로 앉아 죽을 먹게 했던 바, 박지원은 “어떤 경우에도 양반 계급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고 하네요.
참, 그리고 연암 박지원이 사또로 나아갈 즈음에 자신이 옛날 젊었을 때 쓴 양반전 같은 글들을 뒤늦게 불태워 버리려고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마침 옆에 있던 처남이 그 불을 얼른 꺼 버리는 통에 일부만 타고 말았지만 박지원은 나름대로 “다른 양반네들에게 더 이상 화를 돋구게 하지는 말자”라는 생각도 있었던 모양이지요.
그러나 복사본이 이미 대량으로 나돌고 있는 상황이라 그 때 원본이 다 타 버렸다고 해도 세상의 여론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었을 겁니다. 이미 박지원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박지원의 본래 생각과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양반제도의 불필요성에 대하여 공감대를 이루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아.. 글을 쓴 사람의 생각과 글을 읽는 사람이 생각이 어찌 이토록 정반대로 치달릴 수가 있을까요? 참으로 신기하고 신기한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현재까지도 실학파의 대표로 칭송받고 있는 연암 박지원의 많은 저서들이 손자 박규수(나중에 평안감사까지 오름)의 집에서 많은 김옥균, 박영효, 유대치 등 당시 젊은 친구들에 의해 회람되었다고 하네요.
"청나라 오랑캐라도 배울 것은 배우자"라는 북학파의 이 참신하고 실용적인 논리는 "쪽발이 왜놈들이라도 배울 것은 배우자"라는 개화파 또는 친일파의 논리로 발전되었다고 합니다.
박지원의 팬클럽이었던 박규수 친구와 그 후배들이 대부분 개화파 겸 친일파가 되는데. 그것도 “오로지 친일만이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는 확실한 의지의 친일파”가 되지요.
우리나라의 부패와 사분오열된 여론의 빈틈을 대충 이용하여 일본은 그다지 큰 힘도 기울이지 않고 “정처없이 표류하는 조선”을 삼킬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 쪽의 평가는 “고종 임금도 민비도 나라 망하는 데에 큰 책임이 없고 오로지 몇 명의 친일파만 나라를 팔아 넘긴 매국노라고 몽땅 뒤집어 씌우자”라고 거의 결론이 난 실정이지요. 덕분에 당시의 무능한 임금과 많은 탐관오리들은 매국노 논쟁에서 쏘옥 빠져 버렸는데, 그 분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복이 참 많은 분들입니다.
안빈낙도를 양반의 최고 미덕으로 알고 양반이 돈을 만지면 안 된다던 연암 박지원...
국법으로 금지된 양반의 상업 행위를 "실험용"으로 해 본다면서 "허생"을 앞세워 똑똑한 양반들이 매점매석이라는 기발한 방법으로 벼락부자 되는 경로를 소상히 보여 주면서 자본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적나라하게 다 공개해 버렸던 조선의 젊은 천재 연암 박지원...
시대의 천재 박지원은 40대 늦은 나이에 반골 기질 팍 죽이고 보통 양반들의 문체로 글 하나 써 올리는 걸로 임금에게 올리는 반성문을 대신하고 작은 마을의 사또로 발령받아 나가면서 “옛날 내가 썼던 글 중에는 옛날 고약한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났던 시절에 어린 마음에 욱하는 마음에서 끄적거린 글도 많아서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라면서 몽땅 태워 버리려 했던 분이기도 합니다 .
그래서 그를 다시 자세히 보면 그는 사실 금수저 양반계급의 철저한 수호론자였지만 백성들에게는 계급타파라는 엄청난 크기의 촛불을 쥐어 준 양반이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역시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개화파와 친일파의 우상으로 떠올라 버렸지요,
그리고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원조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 훨씬 먼저 자본주의의 약점을 간파한 연암 박지원에 대하여 “정말 능력 있고 자격 있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논문만 잘 써 주면 세계 공산주의의 원조로 추앙받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을 연구한다는 것. 자세히 알면 알수록 더욱 혼란에 빠지는 것이 인간 연구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말을 남들이 들을 때에, 내가 원하는 방향 그대로 듣고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도 좀 주의하시기 바라면서 오늘의 글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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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황재순. 문학박사. 인천에서 교장과 장학사를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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