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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무인정권기 1
최씨 무인정권기 : 1196년 4월 (1)
청명한 날이었다.
하늘이 맑게 개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푸른 하늘에 작은 점 같은 것이 움직이는 듯 했다.
땅 위에서는 말이 천천히 저잣거리를 걷고 있었다.
말고삐를 잡은 하인은 자기 일에 집중을 못 하고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가벼운 무장을 한 말 위의 남자는 손을 이마에 대고 그 점 같은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늘의 작은 점 같았던 그것이 땅 위로 내려오면서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보니 그것은 흰 비둘기였다.
휘파람을 부니 그 비둘기는 순순히 나선형으로 내려와 남자의 팔 위에 앉았다.
그 비둘기는 매우 순했고, 털에 윤기가 있는 것이 보통 여염집에서 기르는 것은 아닌 듯 했다.
남자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 비둘기, 이리 내놓으시오!"
천둥같은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남자는 인상을 썼다.
장신의 사내가 그 앞을 떡하니 막아서고 있었다.
의복을 보니 관인(官人)으로 보였으나 그리 높은 벼슬은 아닌 듯 했다.
하기야, 말 위의 남자는 고려 실권자의 아들.
아비와 형, 동생을 제외한다면 고려에서 그, 이지영(李至榮)을 능가할 자는 없었다.
"네가 누구건대 감히 비둘기를 내놓으라 시끄러이 떠드느냐?"
자신만만한 태도의 남자는 우렁차게 답했다.
"이 사람은 동부녹사 최충수(崔忠粹)라 하오! 그 비둘기는 내 것입니다. 귀하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 비둘기는 내 것이니 어서 돌려주시오!"
말고삐를 쥔 하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네 이놈! 고려의 녹을 먹는 자라면 이분이 누군지 모를 수 있단 말이냐! 이 나라 최고의 집정이신 이의민(李義旼) 영공의 아드님이신 이지영 장군이시다. 가지고 있던 것을 장군께 바쳐도 모자랄 판이거늘, 우연히라도 장군께 들어온 것은 모두 이분의 것이되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
최충수가 별안간 크게 웃어졌혔다.
호탕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사악함이 깃들면서도 광기도 있는, 그런 웃음이었다.
지나가던 자들이 눈이 휘둥그레지고 겁을 먹은 표정으로 슬슬 그를 피했다.
이윽고, 그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하인에게 호통을 쳤다.
"제아무리 나라의 집정이라 하나,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는 것이 천하를 다 손에 움켜쥔 자가 할 일이라더냐! 그리고 네놈은 참으로 방자하구나. 감히 천인 따위가 모시는 이의 힘을 빌어 위를 능멸하느냐! 더 이상 입을 놀리면 네놈을 들어 던지겠다."
하인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저.. 저런 놈이 있나! 뭣들 하는가! 어서 저자를 때려눕혀라!!"
별안간 검붉은 옷의 무사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부지불식간에 최충수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최충수는 처음에는 머리와 허리로 날아오는 몽둥이를 재빨리 피하고 그것을 휘두른 한두 사람을 들어 땅바닥으로 내던졌으나, 결국에는 몽둥이를 피하지 못했다.
처음에 무사들은 그를 단지 제압하려고만 하였으나, 그가 격렬히 저항하자 결국 그를 결박했다.
무사들이 묶인 그를 끌고 말 앞에 내려와 꿇어앉혔다.
그러나 최충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피와 멍으로 뒤덮였으나 그의 매서운 눈빛은 결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대낮에 감히 사병 따위가 국록을 먹는 관리를 폭행하느냐! 하늘이 굽어보시는 황제 폐하의 천하니라! 또한 제아무리 영공의 아들이라 하나, 그가 직접 잡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이 나를 포박한단 말인가!!!"
최충수가 으르렁거렸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지영은 최충수가 결코 범상치않은 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저자를 풀어주어라."
이지영이 명했다.
"하오나.. 장군..!"
이지영이 하인을 노려보았다.
하인은 냉큼 고개를 숙이더니 무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무사들은 즉시 최충수의 포박을 풀었다.
이지영은 최충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비둘기가 가볍게 날아오르더니 최충수의 어깨에 앉았다.
그리 괄괄한 자의 어깨에 그 작은 비둘기라.
어딘지 모르게 우스웠으나 이지영은 말을 움직여 뒷걸음질 치게 해 조용히 물러섰다.
최충수는 이지영을 향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절뚝거리며 조용히 무사들과 말이 비켜선 가운데 길로 걸어갔다.
그 때였다.
".....지나친 만용은 화를 부를 수도 있느니."
이지영이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최충수가 옆을 흘끗 보았다.
그러나 이지영은 별안간 말고삐를 홱 당길 뿐이었다.
히히힝.
말이 두 다리를 잠시 번쩍 들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중방(重房).
장군들이 양 갈래로 도열하여 배석하고 있었다.
상석엔 고려 제일의 실권자, 이의민(李義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기묘한 이였다.
우선 폐위된 전 왕의 뼈를 제 손으로 부러뜨려 죽여 버렸다는 점에서 기묘했다.
또한 천민 출신이었다.
자기가 원할 때는 왕조차도 가볍게 남의 손이 아닌 제 손으로 잔혹하게 죽여버릴 수 있는 인간임과 동시에, 그 큰 덩치에도 웬만한 일엔 좀처럼 나서는 법이 없었다.
말하자면 그는 권력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 산만한 곰과도 같았다.
경대승이 죽고 권력을 쥐고자 군사를 일으켜 간단하게 개경을 점령했을 때도 그랬으니 말이다.
그 때 사모(蛇矛)를 쥐고 갑옷을 입고 만월대의 선경전(宣慶殿) 앞에서 왕을 옆에 세워두고 병사들 앞에서 우렁차게 연설하던 때와 비교하면 많이 늙었지만, 그 우락부락한 반백의 거구가 조용히 입을 닫고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도 또 다른 의미로 무시무시했다.
"최근 중원의 동태가 묘하다 합니다."
상장군 길인(吉仁)이 입을 열었다.
이의민은 말없이 우락부락한 얼굴을 그에게로 돌렸다.
계속 해보라는 뜻이었다.
길인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소신이 있는 이였고, 이의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권력에 예민한 무인 집정자에게 북변의 일을 아뢰는 것은 자칫 오해를 부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좀체 아무도 아뢰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최근 금(金)이 북방 달단(達靼, 타타르 족)을 감당하지 못하여 몽고(蒙古)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합니다. 금의 국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해서."
이의민이 쉰 목소리로 말을 툭 던졌다.
"어쩌자는 것이오."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주시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무래도 군사를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랜 내부 반란과 기강 해이가 반복되어 외적을 상대하는 일에 이미 능숙하지 못한 군입니다. 신병을 징집하고 훈련을 더욱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적막이 흘렀다.
길인의 발언은 모두가 느끼던 것이었으나 아무도 감히 하지 못한 말이었다.
만일 이의민이 이 안변책(安邊策)을 사사로이 군사를 양성하고 간부들을 자신의 수하에 두어 반란을 일으키려 일부러 내놓은 주장이라 여긴다면 큰일이었다.
수십 년 교체된 무인 집정자들은 계속해서 다른 무인들의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검으로써 얻은 권좌이기에 검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또 스스로 그 검으로 만들어진 권좌에 베이거나 찔리지 않도록 항상 신경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는 것이 작금 고려 집정자의 현실.
이의민은 폭력과 공포로 자신의 권좌를 노리는 모든 이들을 짓밟는 방식을 택해왔다.
물론 물리적으로 그 자신의 인상부터가 그랬다.
대장군 우승경(于承慶)이 적막을 조심스럽게 깼다.
"...공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의민은 무감정한 시선으로 정면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이들의 생각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도 감정이 없었다.
"길장군께선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목소리는 약간 높은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듯 했다.
이의민의 삼남, 이지광(李至光)이었다.
그는 그의 형인 이지영과 더불어 쌍도자(雙刀子)라 불릴 정도로 백성들에게 악명이 높은 자였다.
빼앗고 탐하는 일을 숨 쉬는 일과 같이하는 자였다.
길인이 시선을 오른쪽의 하석으로 돌리더니, 당황하지 않고 되물었다.
"이장군께선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내게 하시는지 모르겠군."
"하, 질문은 제가 했습니다. 상장군께선 지금 스스로 군사를 기르고자 하는 뜻을 보이신 것 아닙니까? 지금 북변은 조용합니다. 금이 최근에 변방의 오랑캐들을 상대하는 것이 힘에 좀 부친 것 같긴 하나 그게 뭐 어쨌단 말입니까? 되려 상장군께서 다른 뜻을 품으신 건 아닌가 하는 말입니다."
모두가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있던 것을 이지광이 별안간 내뱉고 있었다.
장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이지광은 다 알면서도 일부러 말한 것이라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이지광에게서 시선을 거두었고 이의민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개경의 경비를 맡은 감행령장군 백존유(白存儒)가 손바닥으로 상을 치며 일어섰다.
"어찌 상장군을 의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상장군께서 한 마음으로 이 나라를 지켜온 것이 몇십 년입니까? 그대가 함부로 모욕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란 말이오!"
"그대가 나설 자리가 아니외다!"
그때껏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의민의 장남 이지순(李至純)이 나섰다.
"뭐라? 그대가 뭐라고 감히..."
"그만하시게, 백 장군!"
우승경이 다시 나서 백존유를 제지시켰다.
"하오나 어찌 길장군께 저런 언사를 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사람이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닥쳐라."
이의민이 별안간 눈을 부릅뜨며 백존유를 흘겼다.
백존유는 잠시 동안 얼어붙은 듯 멈춰 있다가 선선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순식간에 맞본 불쾌감에 대한 반응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이의민은 이번엔 두 주먹으로 상을 세게 쳤다.
굉음이 울렸고 장군들은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이런 미친 놈들이 있나. 북변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무슨 군사를 양성하자는 말이냐. 백성들이 피로함을 모르느냐? 그들을 자극하지 마라. 그놈들이 허튼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는 또 군을 일으켜야 할 게 아니냐. 그리고 길인, 너를 의심하진 않는다. 허나.."
이의민은 불같이 말을 내뱉다가 별안간 심호흡을 하는 듯 하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허나 불필요하게 군심을 동요케 하지 마라. 그대의 직위만 위험해지는 게 아니니."
돌풍같은 짧은 말을 별안간 내리친 이의민은 좌중을 잠시 노려보더니 거구를 일으켜 약간 절룩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의민의 아들들이 재빨리 일어나 그를 따랐다.
"대장군, 언제까지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겠습니까!"
백존유가 화난 목소리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우승경은 뒷짐을 지고 하늘만 올려다 볼 뿐이었다.
"이의민과 그 아들들의 전횡이 이와 같으니 머지않아 공과 재능이 있는 자들은 모두 나라가 아닌 자신의 목숨을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허나... 내 선에서 해결될 일이겠는가."
"무슨..."
우승경이 답답하다는 듯, 백존유를 돌아보았다.
"이보시게. 내가 이름만 대장군일 뿐, 무슨 힘이 있다고 내게 와서 이러시는가. 시중이신 두경승 대감이나... 영민한 최충헌 공이 아니고서야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을 능히 감당해낼 수 없네.."
"다 아시면서도 어찌 그러셨습니까?"
이지광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이의민과 그 아들들은 그의 미타산(彌陀山)에 위치한 그의 별장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수레에 오른 이의민의 양 옆으로 그의 세 아들들이 말을 타고 그를 수행하여 함께 가고 있었다.
"다 아시다니, 뭘 말이냐."
이지순이 물었다.
"형님도 참. 그러면 형님께선 모르고 계셨습니까?"
이지순은 약간 불쾌하다는 듯, 코를 킁킁거렸다.
"길인과 같은 자들에 대처하는 방법을 말하는 게 아닙니까."
이지영이 계속 낄낄대는 이지광 대신 답했다.
이지순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저들이 스스로 감히 군사를 일으키겠다는 생각을 못하도록 사전에 미리 제압을 해야 합니다. 명분만 있다면 그리 못할 것이라 생각할텐데.. 명분을 밟아 놓아야 할 것이고, 또 고려군의 수뇌인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할 적에 과연 누가 대놓고 의심을 할 수 있겠는가, 특히나 군심을 얻어야 정권을 이어나갈 수 있는 아버님같은 분이 어찌 대놓고 그리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그런 뿌리 깊은 생각을 밟아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면.... 아버님께서 직접 말씀하셔도 될 게 아닌가?"
"아버님께서도 지위와 체면이 있는데, 어찌 그러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야 입장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흠... 생각해보니 그렇군.."
이지순은 민망하다는 듯, 코를 훔쳤다.
그의 조용함은 모자람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아비와 가문을 위해 이지순이 할 줄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다만 그는 빼앗고 취하는 것에는 천부적 재능을 지녔을 따름이었다.
수레 안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의민이 아들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찌 저런 놈들에게 내 죽은 뒤 천하를 맡길 수 있겠는가..."
이의민의 굳은 표정 때문에 안 그래도 툭 튀어나온 입이 더욱 튀어나와 보였다.
수레를 가린 장막 때문에 이의민의 갈빛 피부는 거의 검게 보였다.
그가 천하를 얻은 것은 참으로 천운이었다.
"경대승(慶大升)이 그리 이른 나이에 갈 줄은 참으로 몰랐도다."
이의민이 중얼거렸다.
경대승이 그리 이른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당시엔 그는 시나브로 저승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던 처지였다.
젊은 시절 그저 천인인 불량배 출신으로 출세한 무인이었을 적에는, 경대승이 자기를 죽이려 한 자를 죽였다는 소식을 잘못 듣고 '내가 경대승을 죽이려 하였는데 누가 죽였단 말인가'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어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천운이 따르게도, 그를 죽이기 전에 경대승이 먼저 죽었고 그는 고려를 얻게 되었다.
두두리(豆豆里)가 그의 편이니 누구도 그를 막을 순 없었다.
근래 들어 그는 과연 신이 어디까지 자신의 편일지를 시험해보고자 하고 있었다.
미타산에 있는 그의 산장엔 두두리 신당이 있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그곳에 가서 기도를 드렸다.
'천하가 나의 손에 온전히 들어오게 하여 주소서... 바야흐로 왕씨의 하늘이 끝나고 이씨의 하늘이 열리려 하고 있나이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장군 이지영(李至榮)이 최충수(崔忠粹)의 집비둘기를 빼앗자, 최충수가 돌려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말이 매우 거칠었다. 이지영이 화가 나서 가동을 시켜 그를 결박하였다. 최충수가 말하기를, “장군이 직접 결박하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나를 결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지영이 그 기상을 장하게 여겨 그를 풀어주었다.
"이게 말이 되는 겝니까!"
최충수가 손바닥으로 탁상을 내리쳤다.
최충헌(崔忠獻)의 사택.
최충수, 박진재(朴晉材), 노석숭(盧碩崇), 김약진(金躍珍), 정숙첨(鄭叔瞻)이 모여 앉아 있었고, 상석에는 이들 파벌의 수장인 최충헌(崔忠獻)이 앉아 있었다.
"형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이의민 가문이 제아무리 고려 제일이라 하나, 우리 가문이 자신들의 정권에 기여한 바가 있는데 저를 이리 대한 것은 형님과 우리 최씨가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그들의 목을 베고야 말 것입니다!"
최충수의 말을 듣던 박진재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이의민과 그 아들들의 폭정과 실정이 이미 오래되어 황실과 중방, 조정과 백성이 모두 그들로부터 마음이 떠난 지 오래입니다. 외숙께서 거병하신다면 명분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옵니다."
박진재는 기민한 자였다.
물리적으로나 성품의 측면이나 모두 그러했다.
본인이 무술에 뛰어나면서 자객과 첩자들을 부렸고, 또한 꾀를 잘 냈다.
일찍부터 최충헌이 그 인재를 바라보고 끌어들여 쓰고 있던 차였다.
문신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정숙첨이 동의했다.
"문신들은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온 무신란에 이미 지쳤사옵니다. 공께서 이제 거병하시어 이의민과 그 가문을 멸하신 후에 덕을 베풀어 금상 폐하를 받들어 보좌하고 태산처럼 조정과 백성을 지키신다면 가히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무신들 중 최충헌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김약진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안변책에 관한 중방의 회의에서 이의민과 그 아들들이 공연히 상장군 길인에게 모욕을 주었고, 백존유가 분개하였습니다. 또한 우승경을 비롯한 다른 장군들도 입을 열지는 못하였으나 결코 호의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사옵니다. 이를 본다면, 만일 공께서 군사를 일으키는 경우 반드시 장수들의 호응이 있으리라고 사려되옵니다."
최충헌은 입을 열지 않고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뒤의 작은 창문을 열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였다.
날씨는 이러하거늘... 어이하여 인간사는 이다지도 편하지 못하단 말인가.
공명대업을 어찌 꿈꾸지 않겠느냐마는.. 지금이 과연 적절한 때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수가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답답했는지 최충수가 형을 재촉했다.
"형님, 어찌 이리 머뭇거리십니까! 모름지기 사내는 한 번 마음을 먹고 단호히 행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사옵니다. 이제 거병의 명을 내려주십시오! 즉시 달려가 저들을 베겠사옵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노석숭이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하였다.
"그만들 나가시지요."
별안간 나온 나가란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인 다른 이들에게, 노석숭이 빙긋 웃었다.
"지금 공께서 고민하고 계신 바를 제가 아는데, 그에 대한 답을 제가 드릴 수 있사옵니다. 그러면 공께서도 거병에 찬동하시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사안이니 여러분들께 모두 말씀드릴 수는 없을 듯합니다. 허니 나가주시지요."
최충수와 박진재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정숙첨과 김약진은 약간 의아하다는 얼굴로 방을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던 최충헌이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최충헌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듯, 시선을 최충헌에게로 향하지 않고 찻잔 위로 솟아오르는 하얀 김을 가지고 손을 놀리고 있는 노석숭에게 던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심려하는 바를 자네가 안다고 했는가."
노석숭이 그제야 주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예, 그러하옵니다."
"허면 말씀해보시게. 내가 무엇을 그리 생각하고 있는지."
"...공께서는 실은 이미 거병을 하실 마음은 확실히 품고 계실 것입니다. 다만..."
최충헌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미세하게 올라갔다.
"다만, 그 시기와 방법의 문제를 놓고 고민을 하고 계시는 것이겠지요. 명분이 서 있고 안팎의 상황이 받쳐줄 수 있음은 사실이나... 과연 언제 어떻게 그들을 처단할 것인가. 그것을 걱정하고 계시는 바가 아닙니까."
"해서, 그대는 그 답을 아는가."
"그러하옵니다."
노석숭이 잠시 뜸을 들였다.
"소리장도(笑裏藏刀)의 계책을 기본으로 하면 된다 사려되옵니다."
"소리장도라. 어인 말인가."
"말 그대로이옵니다. 소리장도, 즉 웃음 속에 칼을 숨기는 것이옵니다. 이의민에게 웃음을 보이시옵소서, 주군. 그런 연후에 적절한 상황과 때를 만들어 그들을 처단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상황과 때를... 만든다."
"우선 무엇보다도 이의민을 단번에 죽여야 하옵니다. 이의민은 현재 이씨 권력의 중추이니, 그를 소리장도의 계책을 이용하여 한 번에 처단한다면 황실과 문무를 장악하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옵니다."
"..소리장도의 상황과 때를 어찌 만들겠다는 것인가."
"...이의민은 고려 최고의 실권자. 그에게는 항상 도방의 호위가 겹겹이 따라 붙사옵니다.... 그것이 그를 처단키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옵니다. 허나 그는 두두리라는 신을 매우 섬기고 도참설을 강하게 신봉하옵니다. 해서 미타산 별장에 자주 갈 뿐 아니라 그곳만은 신성하다고 하여 호위를 약하게 하옵니다."
"허나.... 무슨 명분으로 그곳에 군사들을 들여보낸단 말인가."
"소인의 생각으로... 미타산에 군사를 들여보낼 수는 없사옵니다.“
미타산 별장의 허점을 노리자면서 군사를 들여보낼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대체 무슨 말인가.
노석숭이 주군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오나 대군을 투입하지 않고도 그를 처단할 수 있는 방법이.... 소인의 생각으로 딱 하나 있사옵니다.”
노석숭은 말을 한 번 끝낸 연후 한참 동안 다음 말을 뱉을 지 말 지를 고민하는 듯 했다.
이윽고, 그가 숨을 고르고 답을 했다.
그의 답을 들은 최충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입을 뗐다.
“그대의 말이 맞네. 호랑이를 잡으려는 자가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것이 순리겠지.”
최충헌은 묘하게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르신.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절절 끓는 가마 앞에서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 못 쓰겠군.
노인이 도자기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망치로 깨 버렸다.
산만한 사내가 그 앞에 엎드려 있었다.
사내의 인상은 부리부리했고, 입은 튀어나와 있었다.
노인은 사내에게 전혀 시선을 주고 있지 않았다.
-제발, 제발 부탁드리옵니다.. 한때는 천인도 귀족으로 만드시고, 귀족도 천인으로 만드시던 분이시라 들었사옵니다.
-영 못 쓰겠어!
노인이 웬 헛소리냐는 듯, 망치로 도자기를 세게 쳤다.
-어르신!
노인이 사내를 흘끗 보았다.
사내의 눈빛엔 절박함이 담겨져 있었다.
그 절박함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는데...
사내는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자였다.
정말이지 무엇이든....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심지어 사람을 살육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조차도 마다하지 않을 자였다.
노인은 마음 속으로 일어나는 근심을 숨기고 짐짓 무심한 어투로 다시 도자기로 시선을 돌렸다.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발 부탁드리옵니다... 달라는대로 드리겠사오니, 한 번만 저를 봐주십...
-높이 오를 것이야.
노인이 여전히 사내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사내가 어안이 벙벙한 듯,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고개를 들어 노인을 보았다.
-....예..?
-너 말이다. 높이 오를 것이야.
-저....정말이옵니까?
-허나... 오를수록 자신의 분수를 알고 순리에 부응하는 마음이 없다면 스스로의 파멸을 재촉할 뿐. 너의 상에는 대업은 없다.
-....그...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높이 오르는 데 어찌 대업을 이루지 못한다 하시옵니까?
-말 그대로니라. 높이 오르기는 하나 대업은 이룰 수 없는 상이다.
-.....정녕...정녕 저는 대업을 이룰 수 없습니까...
-....
-진정.....없는 것입니까!!
-.......없네.
-.........
-.........죽을 똥을 싸도 없어. 네가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모를까.. 그 전엔 절대 대업을 이룰 수 없으리라.
사내의 눈이 점점 벌개졌다.
욕심과 한이 뒤섞여 피눈물을 흘릴 듯 하였다.
그러나 사내는 벌떡 일어나 뒤로 홱 돌더니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제서야 노인은 부질없는 도자기 깨기를 멈추고는 천천히 일어서 멀어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았다.
-......허나 너는 욕심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니, 대업을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과 너 자신을 파멸로 이끌게 되리라....
목상(木狀)을 대하는 백의(白衣)의 이의민은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았다.
치성을 드리면 아니 될 일이 없으니.... 염려할 일이 무엇인가.
이미 고려가 내 발 아래에 있다.
-대업을 이룰 수 없으리라.
아니.
이제 용상만 가지면... 용상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게 되면... 그러면 대업을 이룰 수 있다.
한 걸음만 더 가면 용상이거늘... 누가 감히 지금의 나를 막을 것인가.
누구도 이 나를 당해낼 수 없다.
노인의 말이 틀렸음을, 내게 보여주소서...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은 사람이오.
더 큰 것을 꿈꾸고 그것을 가져야겠단 말이오.
대업 또한 나의 것이오..
천인에서 수많은 모멸과 위험의 순간들을 감내하며... 또 수많은 자들을 찌르고 베어 뒤로 하며 여기까지 온 나요...
이제 나에게 천명을 내리셔야 하는 것이 아니오.
가질 것이오,
반드시...
풀어헤친 머리에 백의 차림의 이의민은 정성을 다해 두 손을 모아 빌고, 또 절을 올렸다.
이의민의 관자놀이에 땀이 한 줄기 흘렀다.
갑자기 이의민의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이지순과 이지광이었다.
이의민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기도를 방해받음에 심기가 매우 불편한 양.
그러나 아비의 기질을 모를 리 없는 아들들이었다.
그만큼 사안이 급박했다.
“...아버님, 중방에 큰일이 난 듯 하옵니다.”
웬 호들갑이냐는 듯, 이의민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버님, 시중 대감이...”
“두경승, 그자가 기어이 일을 벌였사옵니다!”
성질 급한 이지광이 맏형의 말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아버님께서 기각하신 길인의 안변책을 재론한다 하옵니다! 이를 어찌하옵니까!”
두경승(杜景升).
최초의 무신란 때 다른 무신들과 달리 남의 재산을 탐하지 않았다.
김보당,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여러 번 병마사가 되어 북변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이의민의 집권기에 이르러 이의민과 더불어 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라 양대 권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실제 권력은 이의민에게 더 기울어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자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뜬금없이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아버님. 남과 어찌 권력을 나누겠습니까. 처음부터 두경승을 죽였어야 했사옵니다!”
이지순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분했을 때조차도 그의 말은 영 느리고 아둔하게만 들렸다.
이지영이 뒤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 호들갑을 떠실 일은 아닙니다. 우선은 전후 상황을 알아보고 그 다음에 수를 고민해야 할 것이옵니다.”
이지광은 약간 불안한 듯 했다.
“아무래도 그자도 아는 게 아니겠습니까. 군부 내에 아버님께 동조하지 않는 자들이 상당히 많지 않사옵니까. 이번을 기화로 세를 모아보자는 게 아닐지 염려되옵니다.”
“아직까지는 추측일 뿐이다.”
이지영이 동생에게 말하고는 다시 아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님, 어찌되었건 개경으로 돌아가시어 상황을 알아보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이의민이 짧은 숨을 내뱉더니 답했다.
“....최충헌. 그의 뜻은 어떠하냐. 일단 그것을 알아오너라.”
이지순과 이지광이 어이가 없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버님. 저희는 지금 두경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사옵니다.”
“지금... 진짜 문제는 두경승이 아니라 최충헌이니라. 모르느냐.”
이의민이 답답하다는 듯 묵직하게 물었다.
거기에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이지영이 차분하게 나섰다.
“아버님 말씀이 맞긴 합니다. 어차피 두경승은 이전에라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중망이 큰 인사가 아니었습니까. 아버님과 더불어 같은 반열에 올랐으나, 주로 문신들의 통솔을 맡도록 하였으니... 힘은 뺀 셈입니다. 결국 우리에 반하는 무신들의 중심에는 두경승이 아닌 최충헌이 있습니다.”
나머지 두 형제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각자 정보원을 통해 동향을 파악하기 위하여 돌아서서 황급히 사라졌다.
이의민은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이지영은 예를 갖추고 자신도 나가려 했다.
“게 서 보아라.”
아비가 그를 멈춰 세운 건 정확히 그가 일어서려던 시점이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옵니까.”
“두경승과 최충헌.. 내가 대업을 이루고자 한다면 처음부터 궁극적으로는 없애야 할 자들이었다. 이번의 사안은 오히려 한 쪽에서 내게 기회를 준 셈이다.”
“...그러하옵니다.”
이심전심.
아비와 아들의 마음이 통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으니.. 아예 이번 일을 기회로 반대 세력을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었다.
다만, 두경승만 처리할지, 아니면 최충헌까지 처리해야 할지, 양자를 일타쌍피로 처리할 수 있을지, 그것도 아니라면 결국 두경승의 의도대로 타격을 입게 될 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은 결국 최충헌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문하시중(門下侍中) 두경승의 집무실.
“대감, 과한 모험을 하시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우승경이 근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두경승은 반백의 수염을 계속 쓰다듬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백존유가 책상을 탕 하고 쳤다.
“대체 언제까지 저들의 전횡에 눈과 귀를 막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안변(安邊)하는 일은 국사의 기본입니다! 대감께서 명색이 이시중과 더불어 같은 반열에 있는 문하시중이시고 고려의 대영웅이신데, 어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까?”
우승경이 백존유를 향해 존경과 동시에 염려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한편 두경승은 두 사람의 말에 모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의민의 지속적인 철권통치로 인하여 이의민의 보좌 기구 마냥 전체가 완전히 가려지고 격하된 문신들의 분위기는 결코 좋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원의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동시에 무반들의 기류도 이상했다.
최충헌.
그자는 특히 위험했다.
평소 얼굴에 싫어하고 좋아함을 드러내는 것이 명확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말하고 행동함에 결코 흐트러짐이나 손해를 봄이 없었다.
최근 중방 회의에도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는 것이 크게 수상하기도 했다.
이런 마당에 이의민은 최근 노골적으로 용상을 향한 욕망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두경승이 무심결에 말하듯, 툭 말을 던졌다.
“...황실에서 염려가 큽니다.”
우승경과 백존유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게 무슨..”
“이시중.. 용상에 뜻을 품고 있음이 분명하오. 또한 최충헌 공은 그런 이시중을 주살하고자 모의하고 있음에 틀림없소. 그러므로 지금 상황에서는 길인의 안변책을 고리로 한 번은 이시중을 꺾어야 함과 동시에... 최충헌 공이 그 기회를 선점하여 대권을 얻고자 획책하여 혼란을 가져오는 일도 막아야 한다고 봅니다. 하여 이 사람이 노구를 이끌고 구태여 나선 것입니다.”
우승경과 백존유는 모두 말이 없었다.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이 나라는 그간 수많은 환란을 겪어왔소. 폐제(廢帝/의종) 때 처음 군사가 크게 일어난 이후 이 나라는 수많은 내란과 쟁투로 갈가리 찢겨졌소. 내우가 이미 극에 달하였는데 외환마저 목전에 있소. 이번의 안변책의 가결은 다가올 외환을 방비함과 동시에 내우 또한 해결하는 일타쌍피의 계책이 되어야 할 터. 두 분께서는 부디 이 사람을 도와 정국을 수습해 주시오.”
두경승이 결심에 찬 얼굴로 말을 마쳤다.
우승경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백존유의 표정은 무언가 이상했다.
생각이 잠긴 듯 했다.
그러나 두경승과 우승경은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최충수가 즉시 최충헌에게 말하기를, “이의민 네 부자는 진실로 나라의 도적들입니다. 제가 그들을 죽이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최충헌이 이를 어렵게 여기자 최충수가 말하기를, “제 뜻은 이미 정해졌으므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최충헌도 비로소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개경 만월대(滿月臺), 선경전(宣慶殿).
본래 이곳은 고려 위정(爲政)의 중심으로 수백 년을 자리했었으나...
중방이 조정과 군부의 중심이 된 이후로는 선경전은 마치 퇴락한 황조의 흔적과 같이 빛나되 빛나지 못했다.
그 황실의 중심에 바로 황제가 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그 황제란 이미 허명일 뿐.
대의도 명분도 그 어떤 것도 오늘날 황실과 황좌의 보존보다 우선할 수 없었다.
명종(明宗)은 맏형의 처참한 말로를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다.
한때 황제로 군림했던 자가 폐위도 모자라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일은... 그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황제의 권위의 추락과... 황실이 누란의 위기에 빠져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 고려 땅에서는 태조 이래 천손을 자처해온 고려 황실이었다.
허나 오늘날엔 그저 무인 집정자들을 받들어 작위를 바치며 최소한의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황제와 황실이었다.
명종은 무력하게 선경전의 용상에 앉아 텅 빈 정전(正殿)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경승만이 아래에 서 있었다.
"두시중... 이제 믿을 수 있는 건 그대 뿐인 듯 합니다.."
명종이 약간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염려 마시옵소서. 이번 안변책 문제를 이의민을 거꾸러뜨리는 첩경으로 삼을 것이옵니다."
명종이 인상을 썼다.
괜히 두경승만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물론 두경승 또한 진정한 의미의 근황파라 할 수는 없었다.
진정한 의미의 근황파는.... 사실 없었다.
그저 정치력이 아예 바닥에 가까운 명종이 어떻게든 정국의 동향을 파악하고 황실의 보존을 위하여 몇몇 신료들을 가끔 인견(引見)할 뿐이었다.
물론 그 몇몇 신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면서 황실을 단지 명분으로 이용할 뿐이라는 사실을, 명종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두경승 등 신료들의 존재 자체가 황실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므로 명종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어떤 이유 때문에 그 위상이 불안정하게 되는 경우, 황실의 안위와도 연계되므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히 나서지 마세요. 이의민 그자는...... 무서운 자입니다. 지금 자기 뜻에 거스르는 방향으로 정국이 흘러감에도 어이하여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지.. 과인은 두렵습니다. 어떤 함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두경승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폐하, 제가 선제적으로 주도하여 판 함정이옵니다. 함정이 불도 아니거늘, 제가 판 함정에 함정을 맞놓을 수 있겠습니까. 기선제압은 확실히 가능할 것이옵니다. 천운이 따른다면 그를 제거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명종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모든 행보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저들이 어떤 수를 쓸 지 가늠을 해보세요. 괜히 나섰다가 저들의 역공에 당하면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과인의 말을 명심하도록 하세요."
두경승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머리를 조아렸다.
"...예, 폐하."
정전을 나오면서, 두경승이 혀를 찼다.
우승경이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경승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썼다.
"황제가 저리 나약해서야...이러니 난신(亂臣)들이 날뛰는 것이오."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이 나라는 어찌 되었든 황제의 나라이니, 명분은 결국 황실에 있지 않겠습니까. 해서... 폐하께서는 재추회의에 안변책을 올리는 것을 윤허하신 것입니까?"
두경승이 나직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소. 다만 아주 오래 고민을 하신 듯 하오. 이의민의 뜻에 따라 형식적 재가만 해왔는데, 이리 독자적으로 명을 내리는 일에 두려워한 모양이오."
"헌데, 문신들은 확실히 안변책에 찬동하는 것입니까?"
"이의민이 문신들을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많이 등용한 것이 오히려 명을 재촉하는 꼴이 된 셈이지. 발언권이 생기니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하고.... 결국 불만이 생기게 되더군요. 그들은 반드시 동의할 것이오. 또한 군사들을 증강시킬 때 이의민과 최충헌, 그리고 그 일파 사람들의 사병들을 집중적으로 중앙군으로 흡수하여야 할 것이오."
우승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미 병부에서 군부로부터 권한을 넘겨받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말들이 푸르륵거렸다.
마구간에는 말똥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이의민은 직접 냄새를 맡으며 그것들을 치웠다.
‘사냥’을 하기 전에 몸을 좀 풀어둘 필요가 있었다.
푸는 것 치고는 꽤나 고된 노동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하기도 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새삼 되새겨주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잃을 것이 없었던 그 때의 정신을 잊지 않아야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제대로 살릴 수가 있었다...
"아버님, 빌미가 생겼사옵니다."
이지영이 기쁜 목소리로 달려와 말했다.
본래 그는 세련된 것을 좋아해 마구간엔 절대로 들어오지 않으려 하는 성격이었으나... 그것마저도 지금 이 순간의 그에게는 무의미한 모양이었다.
이의민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 하던 일을 했다.
계속해보라는 뜻이었다.
"군납을 맡았던 관리의 비리가 드러났사온데... 정도가 꽤 심하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자가.... 길인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옵니다."
이의민이 멈칫했다.
“....길인.”
그는 전신에 묘한 전율이 감도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나의 정치적 본능이랄까.
“더구나, 멀긴 하오나, 그자는 길인의 먼 친척이 된다 하옵니다.”
금상첨화였다.
그 일을 꼬투리삼아 길인을 끌어내어 판국을 역전시켜야 했다.
그래야 그 판을 자신에게로 가져올 수 있었고... 안변책을 주도하면서 다른 무신들의 힘을 빼앗을 수 있었다.
운이 좋다면 두경승만이 아니라 최충헌까지도...
그 비리혐의자를 국문하여 길인의 이름을 내뱉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런 연후에 안변책을 빼앗아 제 것으로 만들면서.. 종국적으로는 길인의 입에서 두경승과 최충헌의 이름이 나오면....
그러면 그것으로 정국은 정리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하늘이 그의 편이라면... 정말 그러하다면....
길인의 입에서 황제가 이를 알고 가담하였다는 말까지 나온다면......
-대충신을 살육하고자 한 황제에게선, 아니 왕씨 황조에게선 이미 천명이 떠났사옵니다!
벌써부터 신하들이 그의 자택 앞에 몰려와 엎드려 외칠 것이 눈에 선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이루는 것은 하늘이라.
이의민은 땀을 닦으며 보일락말락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 아버님!”
멀찍이서 이지순이 달려오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최충헌은 아버님의 뜻과 같이 안변책에 찬동할 것 같다는 간자들의 정보가 있었사옵니다!”
이지영이 얼굴에 더욱 화색을 띠었다.
“사실이라면 이는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
과연.
과연 천우신조였다.
이제 예상한대로 일이 흘러가주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
밤.
정자 아래에서는 문신들이 더불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문제를 왜 새삼 문신들에게 묻는단 말입니까?”
모두 한 번 잔을 부딪힌 후였다.
평장사 권절평(權節平)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사홍적(史弘績)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습니다. 이제껏 무신들이 주도해 온 정사입니다. 더구나 안변책은 국방의 일이 아닙니까. 이미 병부가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이거늘, 우리에게 이런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은 이상합니다. 이번 일을 빌미로 우리의 뜻을 떠보아 또 제거하겠다는 뜻은 아니겠습니까.”
정숙첨이 두 손을 뻗으며 문신들을 자제시켰다.
“자자, 지난 일들을 재론해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시중께서 정권을 잡은 이후로 우리 문신들이 점점 국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겠소.”
다른 문신 하나가 정숙첨에게 동의하였다.
“어차피 이리 된 일, 차제에 문신들의 영향력을 높이는 교두보로 삼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설령 떠보려는 것이라 한다 해도 중방에서 우리를 제거하려는 뜻은 아닐 듯합니다. 의견들을 말씀해 주시지요.”
“글쎄.... 내용만 보자면, 우리가 특별히 동의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문신이 두루마리를 펴들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또한 지금 관군이 유명무실해진 것은 결국 무신들의 사병이 많아져서 그렇게 된 게 아닙니까... 특히 도방 말입니다.”
도방이라는 말에 수군거리던 문신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만일 안변책이 가결되는 경우.. 물론 신병을 징집하는 것은 당연히 수반될 것이나 특히 군사력이 집중된 도방에서 인원을 차출하는 것이 효율적일 터..
그러나 이는 이의민 정권의 심부를 찌르는 일일 것이었다.
그것을 감안하고서 어느 문신이 과연 이 안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동의하지 않아야 되겠습니까.”
누군가 물었다.
다른 사람이 곤란하다는 듯 답했다.
“글쎄 말입니다. 두시중 대감께선 우리가 여기에 동의할 것을 전제로 재추회의에 이 안건을 부친 것인데... 만일 우리가 동의하지 않으면 잘못하면 균형이 깨집니다. 잘못하면 이시중 좋은 일만 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양 문하시중 모두 무신입니다. 우리 입장에선 찬성이든 반대든,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다른 문신이 회의적인 투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두시중이 집정인 이시중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또 다른 누군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범인가 이리인가의 선택에 내몰린 듯한 상황이었다.
그 때였다.
“반대하십시오.”
정자 아래에서, 확신에 찬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
이의민 같은 자는 한갓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으니, 1명의 사신만을 보내어 임금을 시해한 죄를 따져서 그 목을 베고 일족은 멸해야 했었다. 그러나 오히려 불러들여서 갑자기 벼슬을 올려주었으므로, 왕실을 능멸하고 조정의 신하들을 해치고 죽이게 하였으며, 관직과 옥살이를 팔아먹어 조정을 어지럽혔으므로 그 화가 참혹하였다.
재추와 중방의 합동회의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본래 무신들에 주도되어온 지 이미 오래인 국정이었다.
집행에 있어 중방의 결정을 구체화하고 집행하는 일에만 일정 재량을 부여받은 문신들이었다.
문신들과 무신들은 함께 모일 일이 그다지 없었다.
문무고관들은 양쪽에 낮은 계단 형식으로 3층으로 놓인 탁상 뒤에 도열하여 앉아 있었다.
무신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고, 문신들은 묘하게 긴장한 표정이었다.
상석에는 두경승과 이의민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두경승은 긴장한 기색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단정히 앉아 있는 반면, 이의민은 언제나 그렇듯 부리부리하고 짙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굳은 얼굴로 의자의 양 손잡이를 움켜쥐고 앉아 있었다.
대략 모든 사람이 자리에 앉은 듯 보이자, 두경승이 좌중을 흘끗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사람이 여러분들을 이리 불러 모은 것은, 이른바 안변책이라 하는 길인 상장군의 제안을 재론하기 위함이오."
두경승이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좌중은 조용했다.
"...내정에 관한 일은 대개 신료들에게 일임하신 주상이시나... 국방의 문제는 군주된 자로서 신료들에게 재론케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이해하라 하시었소. 허니, 오늘 회의에서는 기탄 없이 모든 분들이 자유롭게 의견들을 내 주시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누구 하나 쉬이 나서는 자가 없었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길인과 가까이 앉아 있던 노(老)장군이었다.
"최근에 병마사로 다녀온 바, 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 북변이 심상치 않음은 분명한 사실이니.. 안변책을 가결시키는 것이 국방을 위한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권절평이 이에 동조하였다.
"대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국가의 일에 어찌 정략적 이익이나 사사로운 이익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미 중방에서 부결되었음에도 주상께서 이 안을 재론하라 하신 것은 가결하라는 취지로 이해함이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수군거림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신들은 대개 권절평을 적대적인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숙첨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사홍적도 입을 열었다.
"저도 대장군과 평장사의 의견이 옳다 생각하옵니다. 상장군이 낸 제안이나 구체적인 설계와 집행이야 나라에서 하는 것이니, 상장군의 의도를 따질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무신들 중 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경승은 흡족하다는 듯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며 반대편의 우승경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신호를 보냈다.
우승경이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실은... 주상께오서 재론의 명을 내리실 적부터 병부와 중방에서 함께 안변책이 가결되었을 때 이의 구체적 집행에 대하여 이미 논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가결하여 주신다면 실행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의민이 슬쩍 고개를 돌려 우승경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러나 우승경은 이의민의 시선을 피했다.
좌중들은 수군거렸으나 여전히 별다른 반향은 없었다.
잠시 좌중들의 분위기를 보던 두경승이 이제 되었다는 듯, 여유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의견들이 없는 것 같소만. 군사의 일이 비록 중방의 일이나, 이 일은 또한 국가의 운명이 걸린 일. 어찌 가벼이 중방에서만 논할 수 있겠소이까. 이제 안변책에 대해서는 결론이 난 듯 하오.."
"제발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왜들 이러시는게요! 이제 그만 좀.....제발!"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문무를 가리지 않고 좌중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가결 선언을 하려던 두경승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두경승이 인상을 찌푸렸다.
한편, 이의민은 보일락말락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국사를 논하는 신성한 자리에서.... 이게 웬 소란이냐!"
두경승이 낮게 꾸짖었다.
문이 열리고, 더러운 백의에 여기저기 피가 묻고, 눈두덩이엔 멍이 들고 포박된 산발의 사내가 이의민의 세 아들들에게 끌려 들어왔다.
맨 앞의 이지영이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오늘 논의하는 그 일에 대해 중히 참고될 문제라 이리 하지 않을 수 없었사옵니다. 또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중대한 자리라 소인들이 장군의 신분에도 직접 이자를 끌고 왔사옵니다."
두경승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체 무슨..."
이의민이 뱀같은 미소를 띠었다.
"..일단 들어나 보시지요."
두경승이 이의민을 잠시 동안 노려보다가, 자포자기한 듯 시선을 돌려버렸다.
"......뜻대로 하시오."
이지광이 꿇어앉은 사내를 거칠게 걷어차며 소리쳤다.
"어서 아뢰어라!"
사내가 묶인 채로 다시 버둥거리며 제 자리를 찾아 간신히 앉았다.
"......저...저는 군납의 일을 맡은 관리이온데......"
백존유가 책상을 치며 고함을 쳤다.
"어서 말하라!"
"시....신이...... 신이 그만 군량과 무기를 빼돌려....."
"저..저런!"
"이런 쳐죽일 놈!!"
"저런 놈을 보았나!"
고요했던 좌중 여기저기에서 고함소리와 비난이 터져 나왔다.
"그만!"
두경승이 책상을 치며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좌중이 다시 조용해졌다.
두경승이 시선을 바로 하며 꿇어 앉혀진 죄인을 노려보았다.
"해서! 해서 어쨌다는게냐."
죄인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꺽꺽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고얀 놈. 네놈이 그런 대죄를 저지르고 여기에 와서 제 죄를 제대로 아뢰지도 못한단 말이냐. 이런 소인배에게 그런 중책을 맡겼다니... 이 나라 사직이 걱정이로다...!"
두경승은 잠시 천장을 보고 한탄했다.
"....헌데, 저자의 비리가 지금 이 논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까."
권절평이 물었다.
이지순이 씩 웃었다.
"이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그자가 대체 누구요."
"........상장군.....길인의 인척이옵니다!“
이지광이 못 참겠다는 듯, 냉큼 외쳤다.
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이번엔 무신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리는가!"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았던 우승경이 일어서 소리를 쳤다.
두경승은 경악한 표정으로 이의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이의민이 웃을 차례였다.
이의민은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이지영이 아뢰었다.
"지금 군 내부가 이토록 썩고 곪았는데 군세를 확장한다고 하여 내실이 있겠사옵니까. 도리어 병폐를 키우는 꼴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군내의 비리를 엄히 단속하여 기강을 확립하는 것이 우선이라 사려되옵니다."
이지순이 이어 아뢰었다.
"이자를 필두로.... 군내 고관들의 비리를 모두 밝혀내 엄벌해야 할 것이옵니다."
"군내에 비리가 만연한 것을 알고 있다. 너희 족속들이 연줄 있는 자들을 모두 아뢰어라."
이지광은 죄인에게 묘한 눈짓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죄인의 시선은 이씨 형제를 향해 가 있지 않았다.
이의민은 죄인을 흘끗 보고 미소를 지었으나 죄인의 시선은 이의민이 아닌, 그 바로 아래의 최충헌에게로 향해 있었다.
하지만 최충헌은 이제껏 단 한 번도 표정을 드러낸 적도, 입을 연 바도 없었다.
최충헌의 시선은 아래로 고정되어 있었다.
죄인의 시선이 멍하니 아래로 내리깔렸다.
"어허!! 뭘 하는게야? 어서 아뢰라니까!"
이지순이 그를 더욱 신경질적으로 다그쳤다.
죄인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외쳤다.
"소인의 미천한 목숨을 걸고 아룁니다...!! 다른 고관들은 아무런 상관도 없사옵니다..!!! 길인 상장군 또한 저의 인척인 것은 사실이오나.... 그분 또한 아무런 관계가 없사옵니다..!!!"
이번엔 이의민 측이 경악할 차례였다.
이씨 삼자(三子)가 놀란 얼굴로 죄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할 말을 완전히 잃었다.
이의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의민은 죄인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말을 마친 죄인은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기도 두렵다는 듯, 땅바닥에 머리를 찧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양측이 주도권을 모두 잃은 채 상황이 붕 뜨게 되자, 좌중의 소란스러움은 한층 더해 졌다.
그 때 누군가가 아뢰었다.
"어....어찌 되었건 오늘의 일은 결론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약진이 입을 열었다.
"저자를 끌어내 마땅한 처벌을 내리시옵소서. 그런 연후에 서둘러 안변책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옵니다."
두경승과 이의민은 모두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두경승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약간 갈라져 있었다.
"...군량과 무기는 군의 생명줄이고..... 군은 국가의 안보와 관련하여 그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저자는 군법에 비추어 보아도 역모에 준하는 대죄를 저지른 것이오. 저자는 죽음을 피하기 어려우니........ 데려다 참하라."
모두 아무 말이 없었고, 죄인 또한 자포자기한 듯 회의실로 들어온 군사들에 의하여 순순히 끌려갔다.
두경승은 맥이 빠진 듯, 그 말을 마치고 다시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던 이의민이 심히 분노한 듯한 콧김을 한 번 내뿜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안변책에 대해서도 이제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다. 너희들은 찬반을 밝히도록 하라."
문신들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합하여 대답하였다.
"신들은 반대이옵니다!"
문신들의 계산된 듯 신속한 반응에 무신들이 술렁였다.
백존유가 먼저 선제적으로 외쳤다.
"소장은 반대이옵니다!"
백존유가 반대라고...?
무신들은 더욱 놀랐다.
갑자기 대세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판가름하기가 어려워져버리니,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무신들이었다.
그러나 백존유조차도 반대라면...
이윽고 몇몇 무신들이 조용히 아뢰었다.
"소..장들도 반대하겠사옵니다."
"소장들도 반대이옵니다."
"소장들도........"
두경승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시선을 아예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의민의 매서운 시선은 손에 쥔 것을 잃어버린 어린 아이들처럼 어쩔 줄 모르는 채로 서 있는 아들들을 향해 가 있었다.
-못난 놈들. 대체 일을 어찌 처리한 것이야!!!
"영공, 결론이 난 듯 하옵니다."
정숙첨이 조용히 아뢰었다.
이의민은 그 뒤에도 말이 없다가 좌중들을 한 번 휘 둘러보았다.
제각기 혼란스러워 하고.... 서로 곤혹스럽다는 시선을 마주 보고 있거나...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안변책은...."
이의민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부결되었다."
*******
명종에게는 태자 이외에 일곱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출가를 했는데, 기묘하게도 자주 몰래 황제를 알현하는 것이었다.
세속의 일에 뜻을 접기는커녕 깊이 관심을 두는 승려들이었다.
명종에게는 정사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었고... 다만 황좌를 지키는 일이 제일 중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그에겐 피곤하고 버거운 일이었고... 애첩들과 아들들에게 기대고 싶은 늙은 왕이었다.
늙은 왕은 작은 황좌에 기대어 있었다.
원탁에 일곱 아들들이 두루 둘러 앉아 있었다.
"요 근래엔 옥체무탈하시옵니까."
아들 하나가 합장을 하며 물었다.
명종이 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저 그렇구나... 이 이질이라는 놈이 나아지질 않으니... 태의가 술을 하지 말라 하는데 술 없이 무슨 낙으로 살라 하는지....."
"폐하... 큰일이 났사옵니다..!"
내관이 달려와 황제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게슴츠레하게 아들들을 쳐다보던 명종이 눈을 치켜떴다.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이라 하옵니까?"
명종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두시중의 일이 실패로 돌아갔다는구나.."
"놀랄 일이옵니까. 두시중이 충직하긴 하나 술수는 이의민에 못하지 않사옵니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황실이 걱정이니라."
명종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두경승이 어찌된 것은 아니옵니다."
다른 아들이 아뢰었다.
"....아바마마께오서 두경승을 살리면 될 것이 아니옵니까."
".....무슨 말이냐? 짐이 어찌 두경승을 살릴 수 있겠느냐.. 짐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아바마마께오서 항상 써오신 방법이 있지 않사옵니까. 그것을 쓰시면 되옵니다."
"........짐이?"
"아바마마께오선 벌은 마음대로 주실 수 없으시나 상은 주실 수 있사옵니다. 그것을 활용하시면 되시옵니다."
"....상이라."
"예, 아바마마. 벌을 줄 때에도 핑계는 만들면 있는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하물며 상이겠사옵니까."
명종이 골똘히 생각을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황자의 말에 틀림이 없었다.
어차피 향후에도 이의민은 어떤 일이든 빌미 삼아 두경승을 위협할 수 있었다.
그것을 내버려 두느니...
"추밀원의 승선을 부르라."
이윽고 명종이 명했다.
*******
두경승의 자택.
"대체 일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두경승을 향해, 우승경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일이 좀 이상하게 끝맺어진 건 사실입니다. 안변책이 반대로 끝났으니, 분명 이시중이 좋아할 일입니다. 헌데 그들 무리의 눈치가 무언가 석연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문신들, 그리고 백존유의 태도는 대체 어찌된 일인지..."
한참을 말이 없던 두경승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분명 이의민이 안변책 논의의 맥을 흐트러뜨리고 군납 비리 문제를 들고 들어온 것은 길인만을 잡으려 벌인 일이 아니었으리라.
그것은 닭을 잡는 일에 소를 잡는 칼을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런 바보가 아니었다.
분명 그들 입장에서도 이번 일은 석연치 않을 터였다..
거기다 문신들과 백존유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반대의 의사를 표했다.
대체 천하의 흐름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문하시중 두경승은 황명을 받드시오!"
밖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별안간 갑자기 황명이라니?
의아한 일이었다.
두경승과 우승경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황명을 전하러 온 승선이 내관과 함께 서 있었다.
두경승은 예를 갖추고 엎드렸다.
"황명을 전하노니, 황제가 천하를 다스림에 신하의 공덕이 없다면 어찌 가능하리오. 또한 유공한 신하에게 논공행상이 없다면 그 또한 천하가 물이 막힘 없이 흐르듯 잘 되어갈 수 없느니. 하여 그간 국가의 안녕을 위해 내외를 두루 신경쓰며 안정시킨 문하시중 두경승의 공로를 더욱 높이 하여 중서령으로 봉하고 식읍을 더하니, 그대는 국가를 위하여 더욱 힘쓰라-"
두경승은 명을 받고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 승선의 옆으로 가 황명을 흘끗 보았다.
예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누구도 뭐라 할 수도, 뭐라 하지도 않았다.
두경승이 승선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시오. 내가 지금 공손히 '공이 없어 이 명을 받들지 못하겠사옵니다' 하면 그게 예에 맞을까."
승선이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가 조용히 답했다.
"..소인이 예에 밝지 못하여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사오나 그것이 본심이 아니라면 가식에 불과하겠지요."
두경승이 잠시 승선을 보더니 별안간 껄껄 웃었다.
"......바로 그렇소. 차마 하지 못할 일이지.."
그가 다시 엎드려 엄숙하게 말했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한치의 흔들림없이 사직을 지키겠사옵니다."
승선이 돌아가고, 두경승은 기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황명을 받들고 멍하니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우승경이 옆에서 걱정스럽다는 듯, 그를 부축하려고 하였으나 두경승은 이를 뿌리쳤다.
두경승이 잠시 손에 쥔 성지를 내려다보다가 이를 힘껏 바닥으로 내던졌다.
우승경이 놀라 그것을 재빨리 집어들었다.
"아니.... 대감, 이 무슨 불경한 행동이십니까..!"
두경승이 털썩 무릎을 꿇고 하늘을 보며 통곡을 했다.
".....폐하, 이 무슨 소인배같은 행태이시옵니까! 하늘이시여... 결국 이의민의 대역을 그대로 지켜만 보라고 하시는 겝니까..."
"대감..."
우승경이 두경승을 일으켜 세우려 하였으나 두경승은 또 다시 우승경을 뿌리쳤다.
"...그대는 이 성지의 의미를 모를 것이오.."
"...무슨 의미입니까?"
"..겁이 나신 게지.. 이 일을 빌미로 내가 이의민에게 어찌 될까봐... 황실이 해를 입을까 말이오!"
두경승은 성지를 움켜쥐고 한스럽다는 듯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해서 이번 일을 허물이 아닌 공으로 삼아 덮으면서 지위만 높고 힘은 없는 자리를 주어 나를 보존하고... 황실을 보존하려는 것이오...... 허나 내가 없으면 누가 저 역적을 막을 것인가..... 누가 그의 대역을 막을 것인가........누가...."
"...대감.."
"딱 한 치 앞만 보시는 폐하의 어리석음이 참으로 한스럽소이다.."
주저앉은 두경승이 고개를 저었다..
우승경은 뒤돌아서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속절없이 구름 없이 하나 맑은 청명한 봄 오후의 하늘이었다.
*******
(두경승에게) 중서령(中書令)을 덧붙여 주었는데, 옛 제도에 3품 이상은 매번 승진할 때마다 관례상 사양하는 표문(表文)을 올리고, 왕은 조서(詔書)를 내려 그것을 허락하지 않은 후에야 감사하는 표문을 올리고 관직에 올라갔다. 두경승이 혼잣말로 말하기를, “속으로는 사양하고 싶지 않으면서 남의 붓을 빌어 겉으로 사양하는 척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못할 짓이다.”라고 하였다.
"하하하하! 참으로 통쾌했소이다. 백장군께서 선뜻 '나는 반대요!' 그리 외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정숙첨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즐겁게 외쳤다.
최충헌 일파가 모여 함께 술자리를 갖고 있었다.
이미 몇 번 잔을 부딪힌 후였다.
백존유가 그들과 함께라는 것이 그 자리의 의미라면 의미.
-이의민을 주살하시겠다는 확실한 언질을 주십시오. 그러면 소장, 이제부터 온 힘을 다해 장군을 돕겠습니다.
"백존유 장군이 우리 편으로 오니, 가히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그 이로움이 더합니다. 더구나 개경의 수비를 맡은 분이 아닙니까. 분명 큰 일을 할 것입니다."
김약진이 웃으며 말했다.
"또한 박진재 장군의 수하들은 어떻습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그 죄인놈을 빼돌리고 그놈의 식솔들을 붙잡아 죄인의 입을 막지 않았습니까!"
정숙첨이 장단을 맞추듯 무릎을 치며 통쾌해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박진재는 늘 그렇듯,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노석숭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단지 이의민 일가가 장군께 의문을 품도록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 의문을 기대와 신뢰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최충수가 거칠게 술을 들이키고는 술잔을 탁 하고 소리나게 상 위에 놓았다.
"어찌 그렇게 한단 말인가."
"물론 혼담이옵니다."
노석숭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까지 무표정을 지키며 조용히 있던 최충헌이 흥미롭다는 듯, 노석숭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혼담이라."
"예, 장군. 전례를 생각해 보건대, 혼인만큼 양가의 신뢰를 단시간에 굳건히 만들 수 있는 방책이 있겠나이까."
"노석숭의 말이 옳습니다, 숙부님. 조카 향이를 그 집의 여식과 맺어주자 혼담을 넣는 것입니다."
최충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박진재가 즉시 일어나 민첩하게 방 밖으로 나갔다.
최충헌이 부채를 펴들었다.
표정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았지만, 나름 고심하는 듯한 눈치였다.
반면에 정숙첨과 김약진은 상황을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정숙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장군, 저는 이번에 두경승을 눌러놓고자 이의민을 이용한 것이라 생각했사온데... 그게 아닙니까?"
김약진도 물었다.
"어차피 종국에는 이의민을 주살하기로 뜻을 모은 게 아니었습니까...? 혹....이의민을 달리 처리하실 요량이신지요...?"
최충헌이 두 사람을 보고 빙긋 웃었다.
"장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작은 언질이라도 좀 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이 사람도 장군의 당여가 아닙니까."
"..마땅히 죽여야지요."
최충헌이 천천히 입을 뗐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리하고자 이제껏 애를 써오지 않았습니까."
노석숭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장군께서 헛수를 두는 것을 두 분께선 본 일이 있으십니까. 지금 장군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종국에는 두 분께서 이루고자 하는 일과도 일맥상통하게 되는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최충헌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우리 모두의 목숨을 건 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내 반드시 이의민, 그자를 없앨 것이오.
부채 너머, 최충헌의 눈빛이 미묘하게 날카로웠다.
*******
이의민의 미타산 별장.
아들들은 아비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신상(神像)을 마주하고 정좌한 아비의 뒤 저편에 꿇어앉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의민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들들의 모자람을 어찌 처리할 것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최충헌... 분명 그날 회의에 끌려왔던 그 죄인은 이의민이 아닌, 최충헌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설마.... 설마...... 최충헌 측에서 그자를 어떻게 한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한 것인데....
또한, 안변책의 문제는 어떤가?
분명 무언가 눈치가 이상했다.
반대를 외쳤으면서도, 이의민의 눈치를 보아 외친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결국 안변책을 기각시켰으면서도 이의민의 전략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그 모든 것이 최충헌이 꾸민 일이었다면.. 대체 그자의 의도가 뭐란 말인가?
어찌되었건 종국에는 반대로 기울도록 여론을 끈 듯 하니, 그자 또한 내 편으로 봐야 한단 말인가?
글은 몰라도 오랫동안 정국을 몸소 파란을 겪으며 헤쳐온 터라 웬만한 일 뒤의 본질은 금방 꿰뚫어보는 그였다.
그러나 그 회의의 양상은....
그 모든 일을 꾸민 자가 최충헌이라고 하여도, 종국적으로 그자의 의도가 뭔지를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최충헌..
"영공, 사람이 왔사옵니다. 개경에서 왔다 하옵니다."
이지영이 뒤를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네 이놈. 지금이 어떤 때인지 모르느냐. 아버님께서 기도를 하시는 시간이 아니냐."
집사가 화들짝 놀라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소...소...송구하옵니다. 하..하오나 워낙 급하고 중한 서신이라 하여......"
".......누구의 서신이냐."
방정맞기 그지없는 아들들이 다시 입을 열기 전, 이의민이 먼저 누르듯 묵직하게 물었다.
"예....그것이... 우봉 최씨가에서 보내온 서찰이옵니다."
이의민이 감고 있던 눈을 부릅 떴다.
이지광이 의아하다는 듯 집사로부터 봉투를 빼앗으며 그 특유의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최충헌이 보낸 것이란 말이냐? 그 능구렁이가 대체 무슨 용무로 아버님께 서찰을?"
이지순이 이지광으로부터 신경질적으로 봉투를 빼앗아 그것을 열고 그 안의 내용물을 꺼내 펼쳐 들었다.
내용을 함께 읽어 본 두 형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벼락을 맞은 듯 멍하니 시선을 교환하고 있던 형제들로부터 서찰을 빼앗아 읽어본 이지영 역시 놀란 기색이었다.
"아..아니, 이자가... 이자가 아버님께 혼담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혼담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인 지 모르겠습니다. 이제껏 아버님과 거리를 두어 온 자가 아닙니까. 별안간 혼담이라니요?"
"아버님, 그저 찢어버리고 물러가라 하십시오!"
"예, 아버님 이런 자들은...."
"물러가거라."
이의민이 우렁차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정신없이 떠들어대던 이지순과 이지광이 멈칫하더니, 예를 갖추고 조용히 물러났다.
이지영 또한 다른 형제들의 뒤를 따라 물러나려 하였으나, 일어서는 그에게 이의민은 다른 한 마디를 던졌다.
"너는 말고."
이지영이 꿇어앉았다.
이의민이 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해서, 어찌 해야 하겠느냐."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다면 수를 놓기가 어렵사옵니다."
"해서."
"수를 읽어야 수가 보인다면...일단 수를 읽는 일을 먼저 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너는 최충헌의 이번 수를 어찌 보느냐."
"......소자는 아직 무어라 판단하기가 어렵사옵니다. 해서 이번 혼담을 빌미로 그자에게 신뢰의 여지를 주어 한 번 떠 보심이 어떨까 하옵니다."
"........떠본다."
"예, 아버님. 비록 차남이긴 하나, 저들은 지금 서자도 아닌 적자를 우리에게 내보이고 있사옵니다. 한 번 길을 가게 되면 그 뒤로는 다시 되돌아갈 수 없고 양가를 하나로 합하는 것이 혼인의 의미인만큼... 저들도 가벼이 내린 결정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내 생각 또한 너와 같다. 허나.. 확실한 것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느니."
"그러하옵니다. 하오니 그를 만나보셔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이의민은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과연... 진정으로 그자가 나를 따라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겠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보기엔, 심히 믿기 어려운 자였고 또한 마음 속에 품은 것이 원대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계속 무언가 여지를 남기고 있었고, 혼인이란 상당히 큰 여지였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으로서는 일단 탐색전이 가장 시급했다.
그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그러자면 진실된 의도가 제대로 나올 법한 그런 환경이 절실히 필요했고....
그에게 일종의 '모험'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최충헌을........만나보겠다."
이의민이 무겁게 입을 뗐다.
*******
두 명의 노(老)장군들이 얼싸하게 취하여 최충헌의 집 대문 앞을 나섰다
대장군 이경유(李景儒), 최문청(崔文淸)이었다.
이경유가 웃으며 소리쳤다.
"장군이 하도 중방에도 얼굴을 안 비치시니, 이 사람은 내심 우리를 고깝게 여겨 그러시는 줄만 알았소만!"
최문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이 중방에서 미력하나마 장군을 위해 온 힘을 다했는데 말입니다."
"허허.. 그것 참 송구하게 되었사옵니다. 허나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옵니다. 대업을 위해 장군들께서 하셔야 할 일들이 많지 않겠습니까."
장군들을 부축하는 노석숭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비위를 맞추었다.
"이제 장군들께서 저를 조금만 더 도와주시면 큰 보상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허니 노여워마시고 조금만 더 도와주시지요."
두 장군들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오, 아니오! 노엽다니요. 아니외다. 그저 이런 자리를 더욱 만들어 주셨으면 하는 바램에서 해 본 말이니 오해 마시오!"
이경유가 황송해하며 말했다.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최문청은 최충헌의 아내인 송씨 부인에게 인사를 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살펴 가십시오."
송씨 부인이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두 장군이 떠나가고, 노석숭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잠깐 남았다.
최충헌 부부는 안으로 들어갔다.
"대업을 이루는데.. 저 사람들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까."
송씨 부인이 물었다.
".....너무 오래 격조했소. 격조하면 서운해지는 법. 아직은 저들의 힘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오."
"아직은...이라 하오시면...."
"끝까지 살려둘 수야 있겠소."
최충헌이 냉철하게 중얼거렸다.
"검으로 얻을 권력일진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지 않으려면 반역의 싹부터 도려내야지요."
송씨 부인은 이따금씩 남편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달리 물어볼 기회가 없을 듯한 질문이 하나 있었다...
머뭇거리던 송씨 부인이 남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장군. 향이를 이씨 가문에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충헌이 멈칫 했다.
송씨 부인이 약간 당황해하며 둘러댔다.
"족인들과의 밀담을 엿들은 것이 아니오라.... 도는 말들이 있지 않사옵니까. 헌데 사실이옵니까."
최충헌은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장군, 그 집안을 주멸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헌데 왜 향이를 그 집에 보내려고 하시는지...."
"향이와 그 집안 여식의 혼인은..."
최충헌이 부인의 말끝을 가로챘다.
"..........없을 것이오."
놀라 하는 부인을 내버려 두고, 최충헌은 자신의 별채로 걸어갔다.
별채로 돌아온 최충헌의 시선은 한층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는 자가.. 호랑이굴로 들어가야겠지.
그가 노석숭에게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네. 그건 자네가 더 잘 알 터.
-예, 아옵니다. 장군과 이의민은 원수 지간이니, 방심의 틈이 생길만큼의 신뢰가 확보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요. 허나.. 오래 신뢰를 쌓는다는 것도 완벽하게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다는 전제 하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충헌이 노석숭을 꿰뚫을 듯 바라보았다.
-.............모험을 해라.
-그러하옵니다. 단지 약간의 빈틈만 찾을 수 있다면, 그리고 장군께서 스스로 그 빈틈을 찾아 그곳을 정확히 찌르실 수만 있다면....... 대사는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남의 생명을 취하는 일이니 내 생명을 걸어야겠지.
-.......송구하옵니다.
이제 포석은 갈아 놓은 셈이었다.
과연 이의민..... 그가 덫에 걸려들 것인가.
그리고 결국 이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인가.
최충헌은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
"아바마마, 소자이옵니다. 문후를 드리러 왔사옵니다."
태자 왕영(王韺)이었다.
안에서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
스르르 문이 열렸다.
태자는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늙은 황제는 보료에 기대어 궁녀에게 안마를 받고 있었다.
태자가 예를 갖추려 하자, 황제가 궁녀를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궁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다시 스르르 열린 문 밖으로 뒷걸음질 쳐 나갔다.
수척한 얼굴의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태자가 절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그간 별고 없었느냐."
황제가 약간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별 일은 없사온데... 황제가 오래 사니 늙은 태자라 세간에서 웃으며 수군거린다 하옵니다. 아바마마께는 불경한 말이겠사오나..... 소자는 아바마마께오서 만수무강하시길 누구보다 간절히 염원하니, 좋은 말이라 생각하옵니다."
"아직도 작년 4월의 그 말이 세간에 떠도는구나... 이 아비가 오래 사니 자식이 고생이구나... 미안하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받잡기 민망하옵니다, 아바마마."
그러나 명종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약간은 남은 지존의 근엄함이 종전의 말에 약간 실렸었다는 것을, 태자는 모르는 듯 했다.
"..허나 태자야. 짐의 시대가 길어야 너의 시대가 편할 것이다."
황제가 조금 더 근엄하게 말했다.
속으로 약간 놀란 태자가 고개를 들어 아비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부황의 얼굴은 분명 더 진지했다.
"....아바마마, 그게 어인 말씀이시온지."
"비록 허울 뿐이라 하나, 그래도 명분은 아직 이 황실이 가지고 있느니라. 저들의 저 횡포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으냐... 짐을 비롯하여 너와 짐의 후대 황제들은 모두 기다리는 것이 일이 될 것이다."
"기다린다... 하오시면.."
"우리는 버티는 것이 일이다. 저들이 무너지기까지 버텨야 한다는 말이니라. 짐의 대가 오래 이어지면 태자 네가 보위를 이어 받았을 때 좀 더 수월하지 않겠느냐.."
태자는 고개를 숙였다.
과연.
부황의 말에 틀림은 없었다.
이미 상징으로 전락해버린 황제와 황실이었으나... 그래도 이 나라의 국호는 여전히 고려였고 태조께서 창업하신 그 황조였다.
적어도 그 후손으로 황조의 문을 닫는 일만은 피해야 했다.
그렇게 피하고 기다리고 버티다 보면.... 분명 변화가 올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변화의 때를 위해... 너와 나는 후대를 위한 제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황의 어느 때보다 진지하는 눈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태자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때였다.
".........최충헌이.........밀지를 내려달라 하는구나."
부황이 천천히 말했다.
놀란 태자가 고개를 들었다.
"밀지......라니요."
태자도, 부황도, 그 밀지의 내용이 무엇일지는 이미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이제 때가 온 듯 했다.
태자와 황제의 눈빛이 교차했다.
".....그래. 네 짐작이 맞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적 이의민의.......척살이니라."
*******
몇몇 사람들이 모여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문신도 있었고, 무신도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최충헌과 이의민에게 모두 반감을 품고 있다는 것.
아니, 더 나아가.... 무신 정권 자체에 반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 일을 다 알고도 찬성을 하셨습니까."
사홍적이 권절평에게 물었다.
"........그 죄인이 이의민이 황실에 반역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토설한 것 말입니까."
권절평이 무심하게 중얼거리듯 되물었다.
사홍적은 심히 놀란 듯 했다.
"아니......이보시오, 권 평장사.."
"어차피 이의민이나 최충헌이나 똑같은 자들입니다. 박진재가 그자를 끌고 와 죄를 토설케 했다지만, 그 무리가 집권하면 뭐가 달라질 것 같습니까? 되레 더 악랄한 통치가 시작될 것입니다."
"맞는 말이네."
손석(孫碩)이 동조했다.
"나 또한 지은 죄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 난세를 끝내려면 무인들이 더는 정권을 노려서는 아니돼."
"허나 군사력을 틀어쥔 그들입니다.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사홍적이 낙담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예 있는 자들 중에 나도 있네."
길인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그가 살아난 것은 순전히 그 정자에서.. 박진재와 문신들의 거래 때문이었다.
두경승과 길인을 비롯한 고위급 무신들을 살려야 반대에 동조하겠다는.
"허나 장군께선 그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움직이실 뿐, 독자적인 힘은 모자르지 않으십니까."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헌데, 그들의 음모를 다 알고도... 발설하지 않으시렵니까."
사홍적이 권절평을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물었다.
"어차피 죽고 죽이는 싸움. 이의민이 최충헌을 죽이든,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든.. 우리는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단, 최충헌 그자가 이의민을 죽이고 자신의 기반을 닦기 전에... 재빨리 그자를 없애야 할 것입니다."
권절평이 말했다.
다른 이들도 동조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석과 길인도 동의하는 듯 했다.
"오래 전부터 그자를 봐 왔지만..... 그는 이의민과는 분명 결이 다른 인물이네. 그가 만약 고려의 실권자가 된다면.... 분명 더 교묘하게, 더 오래 갈 것이야... 또한 우리에게 병력이 얼마 되지 않으니, 그자를 처치하려면 그자가 이의민을 처리한 연후여야 하네."
얼마 되지도 않는 병력을 가지고 혼란을 틈타 최충헌을 제거한다...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의 목숨을 다 걸고도 부족한 일이었다..
과연 그 일이 가능할 것인가.
그러나 가능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미 모두 암묵적으로 마음 먹은 일.
모든 이들의 갈 길이 정해지고 있었다.
*******
"장군, 장군!!"
집사가 별채로 뛰어들어왔다.
최충헌은 노석숭, 박진재와 더불어 차담을 나누던 중이었다.
집사가 비단으로 된 봉투를 박진재에게 전했다.
박진재가 봉투를 열어 그 내용물을 펼쳐 읽어보고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그들이 받아들인 것입니까."
노석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진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최충헌을 향하여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노석숭이 최충헌을 향해 그 서찰을 들어보였다.
"장군, 이제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오늘 밤, 모든 대사가 결정될 것입니다.."
최충헌은 말없이 천천히 자신의 손을 들어 그것을 응시했다.
이 손.
이 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그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이의민의 목숨을 끊어야 했다.
............그의 손으로 직접.
*******
"아버님, 최충헌이 직접 오겠다고 하옵니다. 아버님께서 미타산 별장의 군사를 최소한도만 남겨두고 모두 물리겠다고 하시니, 그자도 무사들을 대동하지 않고 가노들만 데리고 오겠다고 하였사옵니다!"
이지광이 경망스럽게 외쳤다.
"일단 그자의 행태로 보아서는, 좋은 의도이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고 싶사옵니다."
이지영이 이의민을 보며 말했다.
이의민은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최충헌을 얻는다면... 황제의 꿈을 이루는 것이 보다 수월할 터.
그러나 과연 그의 마음이 진정일 것인가.
모든 상황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좀처럼 안심하고 결론내리는 법이 없는 그였다.
더구나 최충헌과 같은 자에게는 더욱 그런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설령 그자가 진심이라 해도, 그자는 오래 살려둘 수가 없는 자다."
이의민이 걸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지영이 동조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아버님께서 황제를 끌어내리시고 화근이 될 만한 자들을 제거하실 때, 가장 먼저 없애야 할 자가 그라는 것은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옵니다."
이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 번의 기회로 천 년의 대업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가 결정되는 지금 이 때에....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대업에 가 닿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독사라도 이용하고 보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그에게는 힘이 필요했다...
힘이.
*******
여름 4월 경신 전국에서 천희절(天禧節)을 축하하였다. 태자가 하례를 받고 왕을 뵈러 갔는데, 왕이 민간에서 무슨 말을 하느냐고 묻자 태자가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웃으며 저를 노태자(老太子)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오래 사는 것도 잘못이구나.”라고 하였으므로 태자가 깜짝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다. 태자의 뜻은 왕이 장수하는 것을 칭송하려는 것이었는데, 말이 그렇게 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야심한 밤.
달이 연기 같은 구름에 가리어 그 빛만 흐릿하게 나고 있었다.
적은 수의 무리가 가마를 둘러싸고 수행하고 있었다.
가마 위에는 가벼운 복장의 최충헌이 올라 앉아 있었다.
그 가마를 메고 있는 자들은 신선주(申宣胄)와 기윤위(奇允偉)를 비롯한 호위무사들.
그러나 복식은 그저 가마꾼들의 그것과 같았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가마 위에 오른 최충헌의 표정도 그들 못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 가마를 타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만은 예외였다.
의심많은 성격의 이의민을 방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마땅했다.
가마는 미타산을 향해 부지런히 나아갔다.
오늘 밤의 일이... 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꿔 놓을 터였다.
부채를 펼쳐든 최충헌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오른손은 연신 날카로운 단검을 감추어둔 허리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폐하께서 밀지를 내리셨습니다.
바로 어제, 찾아온 내관의 말이었다.
-...폐하께오서는 내일 보제사로 행차하실 것이옵니다. 부디......부디 황실을 건드리지 말아 달라 당부하셨사옵니다..
내관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모든 일은 장군께 달렸사옵니다."
노석숭이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형님, 괜찮으시옵니까."
최충수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러나 최충헌은 답이 없었고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미타산 별장에 이르렀다.
평소 경계가 삼엄한 별장이었으나.. 숙위하는 병사들이 몇 되지 않았다.
문이 굉음을 내며 천천히 열렸다.
이의민이 가벼운 백의 차림으로 홀로 걸어 나왔다.
방금 기도를 마치고 나온 듯 했다.
그의 표정에는 망설임이나 두려워함 등이 없었다.
최충헌이 가마에서 내려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최충헌을 흘끗 훑어보는 듯하던 이의민은 뜻밖에도 편한 기색이었다.
"......다른 사람 아닌 그대가.. 이런 제안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고려 최고의 가문이옵니다. 진즉부터 마음에 품어 오던 생각이었습니다."
"하하하.. 듣기 싫은 말은 아니로군. 허나 그것은 금상을 능멸하는 말인 듯 하오."
최충헌은 말이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황실이 고려 최고의 가문이지. 어찌 천인 출신인 이 사람의 가문을 최고라 하시오."
"허면... 고려 최고의 가문으로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최충헌이 미묘하게 예리한 눈빛으로 답했다.
이의민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가 다시 풀어졌다.
그가 껄껄 웃었다.
"그게 어디 나 혼자의 힘으로 되는 일이오.."
이의민이 별안간 최충헌의 손을 꼭 쥐었다.
그의 손아귀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의민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대가 나와 함께 한다면, 내가 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고.... 그러면 내 가문도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되겠지."
최충헌은 대답 대신 비단봉투를 꺼내들어 조용히 이의민 앞에 내밀었다.
이의민은 천천히 그것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천천히 봉투를 집어들어 그 안에 든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최충헌은 그제서야 허리를 펴고 이의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편안하게 서찰로 시선을 옮긴 이의민은 최충헌의 눈빛이 어느새 바뀌어 있었으며... 그의 손이 단검을 향해 가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주 잠깐 지났을까.
쉭.
뒤에서 거대한 체구의 누군가가 단검을 이의민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이의민은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 다음, 다시 몸을 피하기 전에 최충헌이 단검으로 그의 심부를 찔렀다.
이미 칼을 뽑은 무사들이 이의민의 사저를 지키는 소수의 숙위병들을 제압한 후였다.
이의민은 굳은 표정으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천천히 무너져 주저앉았다.
최충헌은 무표정하게 그런 이의민을 부축하는 척 단검을 쥔 오른손을 이의민의 어깨에 얹고 함께 쪼그리고 앉았다.
이의민이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를 보이며 심부를 움켜쥔 손을 천천히 떼어내 최충헌의 왼손에 얹었다.
최충헌은 정면만 응시할 뿐이었다.
시간을 딱 맞추어 김약진이 이끄는 일군의 무리들이 횃불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이의민 공.."
최충헌이 천천히 왼손으로 이의민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려 버리고, 그대로 오른손에 쥔 단검을 이의민의 목에 꽂았다.
단검은 가차없이 이의민의 목을 파고들었다..
이의민의 눈동자는 어느새 생기를 잃었다.
부모가 모두 천민이었고... 특히 아비는 소금장수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수박(手搏)을 잘해 의종의 총애를 얻었고, 무신정변에서 많은 문신들을 죽이고 출세를 하였다.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외치며 거병하자, 폐왕 의종을 살해하였다.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였고, 경대승 사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성격이 거칠어 문하시중에 올랐음에도 두경승보다 반열이 아래라는 이유로 공석에서 욕을 퍼붓기도 하였다.
가장 아래에서 태어나 가장 위를 꿈꾸었던 그는 이렇게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사후 출범한 최충헌의 최씨 가문은 4대를 내리 집권하여 60여 년을 지속하게 되어 한국사에 전무후무한 장기의 세속 무인집정을 맡게 된다.
******
"보고드리옵니다! 최충헌 장군께서... 성공하셨다 하옵니다!!"
전령이 어찌나 빠르게 달려왔던지 헉헉거리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였다.
여러 군들을 이끌고 황궁 밖에 주둔 중이던 이경유, 최문청, 차약송, 백존유 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듣던 중 다행이올시다."
이경유가 책상을 치며 외쳤다.
"역적이 그리 단숨에 갈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백존유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장군께서 이미 노석숭으로 하여금 이의민의 머리를 가지고 저자거리에 가서 효시토록 하셨답니다."
장군 한휴(韓休)가 백존유에게 말했다.
"이제는 그 잔당들을 속히 잡아들여야 하옵니다. 지금 이의민의 아들들은 보제사로 폐하를 따라 갔으니, 화근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백존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유, 최문청, 차약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도성수비를 맡고 있사오니 이미 도성은 점령된 것이나 마찬가지이옵니다. 다만 우리가 폐하를 모시는 것이 시급하고, 그 역적놈들이 그 아비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찌 나올 지 모르니... 대장군들께서는 속히 저희들을 보제사로 파견하시지요."
세 고위 원로 장군들이 서로 동의의 눈빛을 교환했다.
차약송이 백존유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또 다른 전령이 막사로 들어와 차약송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최충헌 장군이 그 아우로 하여금 폐하의 밀명을 받들고 먼저 이곳으로 오도록 하였는데, 지금 도착하였다 합니다. 그 밀명을 받들어 백존유 장군과 한휴 장군, 두 분께서 보제사로 가시면 될 듯 하오."
두 장군이 예를 갖추었다.
******
"장군, 장군! 큰일이 났사옵니다!!"
술을 마시던 이지순과 이지광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전령에게 화를 냈다.
"네 이놈!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 여기는 절이 아니더냐! 만약 우리가 술을 마시는 것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영공께서 살해당하셨사옵고....반란이 일어났사옵니다!!!"
땡그랑.
두 사람이 잔을 동시에 떨어뜨렸다.
누가..살해당했다고?
이지광은 평소의 경망스러움을 잃고 멍하니 전령을 쳐다보고만 있었고, 이지순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버님께서....?"
"그러하옵니다..!! 이미 최충헌의 세력들이 도성 이곳저곳을 모두 점령학 있사옵니다!!"
"이런...! 하필 둘째 형님도 안 계시는 이 마당에...."
이지광이 분개했다.
이지순은 매우 당황한 듯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최충헌을 믿으면 아니 되는 것이었는데...
이번만큼은 아들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아비의 죽음을 들었음에도 두 형제의 마음은 순식간에 가라앉지 않았다.
아비는 항상 그들을 모자라다며 꾸짖기만 하였고... 또 그런 아비의 태도에 서운해 더욱 엇나간 면도 있는 아들들이었다.
그러나 또한 아비가 권력을 이어나가지 못하면 살아날 수 없는 아들들이었다.
이지광이 천천히 이지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단 싸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형님."
".......뭐라..?"
".....주상을 끼고 도망치기에는 무리입니다. 도성을 빠져나가기도 힘들 것입니다. 일단 군을 이끌고 저들과 싸우다가 여의치 않으면 해주로 도망가면 될 것입니다."
이지순 역시도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동생의 말을 듣기만 하다가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꿇어 앉은 전령에게 명을 내렸다.
"너는 어서 장군 이지영에게로 가서 우리의 계획을 전하거라!"
******
명종은 구부정하게 앉아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는 부처의 상을 무기력한 표정으로 대하고 있었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렸다.
쇳소리, 발소리, 그리고... 간간히 들려오는 비명소리들..
명종은 그 소리가 너무나 끔찍하게만 들렸다.
정씨가와 경대승의 엎치락뒤치락하던 다툼... 그리고 이의민의 폭정...
이런 일이 언제까지 계속되리런가..
이 사직이... 또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구나.. 헌데 하늘의 명을 받아 황위에 있다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아무 것도...
"폐하, 폐하!"
상궁이 들어와 황망하게 외쳤다.
"신성한 절에서 웬 소란들인가.."
"지금 문 앞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사옵니다! 궁인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사옵니다.. 이를 어찌해야 하옵니까!"
명종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일이 정말로... 그리 되었구나..
이의민이 오늘 밤 살아 남았다면... 그 밀지 때문에 형님과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을..
그래도 살아나겠구나..
명종은 무언가가 차올라 눈 앞에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폐하..어찌 해야 하올지...."
"......궁인들을 대웅전으로 모두 모이라 하거라. 괜히 싸움에 말려들지 말고.. 최충헌의 군대는 황실과 궁인들을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야.. 내일 아침쯤에는 이미 황궁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예...예, 폐하!"
상궁은 황급히 다시 문을 닫고 사라졌다.
*******
안서도호부.
이지영은 태수와 더불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태수 허대원이 술을 마시다가 얼싸하게 취한 이지영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 장군, 하온데 제가 듣기로는..."
"........뭐냐?"
"......제가 듣기로는... 좋지 않사옵니다. 상황이 말이옵니다.... 하온데, 이러고 계셔도 되는 것이옵니까."
이지영이 술잔을 탁 하고 놓았다.
"그만하면 되었어.. 나도 말이야.. 그만하면 아버님께 할만큼 한 게 아닌가. 아버님께서 미타산에 틀어박혀 계실 때만이라도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좀 해야 하지 않겠나."
"하오나..하오나, 장군. 그런 때일수록 영공 곁에 계셔야..."
이지영이 손사래를 휘휘 쳤다.
"시끄럽네, 시끄러워.. 아버님께서도 오늘 밤엔 미타산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어. 내 오늘은 거친 아버님도 모자란 형님과 동생도 모두 잊고 한 잔 할 것이야.. 다리를 놓는 일은 어떤가. 잘 되어 가고 있는가?"
허대원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소..송구하옵니다.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가중되는 일인지라..."
"뭐라? 나라의 명이거늘, 제까짓 놈들이 뭐라고 감히 나라의 명을 어긴단 말이냐. 가서 감독하는 자들을 재촉하라!"
"예..예, 장군.."
홀로 남은 이지영은 상 위에 놓인 꽃병 속의 꽃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그것을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만들어진 꽃이었다.
만들어진 꽃... 만들어진 꽃이라.....
꽃을 이리저리 볼 수록 도리어 만들어진 것이란 것만 더 부각되어 보일 뿐이었다.
천한 것을 천하지 않게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 보아야 결국 천한 밑천만 드러나 보일 뿐....
그 조화의 이치가 바로 인간의 이치와 다름이 없었다..
이지영이 별안간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큭큭거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 때였다.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대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쇳소리와 발소리,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지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화를 머리에 꽂고 술을 들이켰다.
그 발소리와 부서지는 소리는 점점 그에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결국 그가 있는 방문이 부서졌다.
얼굴과 갑옷에 피가 흥건한 한휴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들고 병사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이지영은 삐딱한 시선으로 한휴와 군사들을 흘끗 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 술을 다시 따랐다.
술이 넘쳤다.
"역적 이지영은 황명을 받들라!"
한휴가 우렁차게 외쳤다.
그러나 이지영은 관심이 없다는 듯, 넘치게 따른 술을 비우고 멍하니 그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천하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괴롭혔으니, 이제 황명을 받들어 너를 처단한다!"
이지영은 바닥에 드리워진 한휴의 검 그림자를 잠깐 동안 보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미 끝이 정해져 있었던 호시절이었다.. 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최충헌이 처음 찾아오겠다고 했을 때, 그는 어딘가 이미 예감을 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의심 많은 아비였으나 조금만 더 뻗으면 닿을 것 같던 용상에 눈이 멀어 본인의 의심의 칼날이 얼마나 무디어졌는지도 모르는 아비였다..
이지영은 빈 잔 속에 일그러져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씩 웃었다.
******
1196년 4월, 최충헌이 이의민을 척살하고 새로운 집정자가 되었다.
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에 이어 여섯 번째 집정자였다.
그러나 최충헌은 이전의 다른 집정자들과 달리 오랜 세월 동안 정권을 이어 갔고, 후일 그 정권을 아들 최우(崔瑀)에게 물려주게 된다.
******
여름 4월 무오 장군(將軍)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李義旼)을 살해하였다.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이루는 것은 하늘이라...
...최충헌은 그 말을 곱씹어보는 중이었다.
그는 선경전 앞에 홀로 서 있었다.
의외로, 그는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다만 칼을 차고 있었다.
이미 세상은 그의 손에 떨어졌다는 것처럼.
해가 뜨고 있었다.
붉은 빛이 궐문 뒤에서 후광처럼 하늘에 뻗치고 있었다.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한 집정에서 다른 집정으로.
그게 작금 고려 정치의 순환 원리.
그러나 이제는 그 고리를 끊어야만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황실, 조정, 군부에서 그에게 반할 만한 자들의 싹을 모두 잘라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야만 했다.
이미 이빨과 기운이 모두 빠져버려 하늘에서 낙하해버린 용과 같이 된 지가 오래인 황실이었다.
우선 황실부터 확실히 제압하고 장악해야만 했다.
그런 뒤에 조정과 군부를 순차적으로 장악해야 했다.
적들이 움직임을 읽을 틈을 주지 않고 서둘러 그들을 몰아붙여야 이런 취약한 순간에 그의 집권 기반이 안정될 수 있었다.
"장군, 폐하께오서 어서 들어오셨으면 하신다고.."
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열고 나온 내관이 주뼛거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궐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최충헌이 뒤를 흘끗 보았다.
내관은 새로운 집정자를 어찌 대해야 할 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
"알았다."
내관이 뒤를 돌아 문을 열자 최충헌이 상당히 빠른, 그러면서도 확신에 찬 걸음으로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명종은 보좌에 기대어 무기력한 태도로 서 있었다.
그의 초점 잃은 시선이 고개를 돌려 최충헌에게로 향했다.
직전의 집정이었던 이의민조차 그닥 볼 일이 없었던 왕이었다.
하물며 장군 중의 하나였던 최충헌을 볼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왕은 내심 새로운 집정인 최충헌이라는 자가 누군가,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들어온 최충헌이라는 자의 첫인상은 뭐랄까, 미묘했다.
무인이라기보다는 문인같다는 인상을 처음에 강하게 줌과 동시에, 계속 보고 있노라면 또한 무인의 기질도 상당히 강하게 엿보였다.
더구나.... 그 표정에서 쉽게 무언가를 읽어낼 수 없었다.
"....폐하, 장군 최충헌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그 때 내관의 약간 황망함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종은 그제서야 자신이 생각에 빠져 내관이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최충헌의 알현을 알려왔음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아, 미안합니다.. 과인이 몸이 성치 않아 그런지...이 가끔 이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왕이 어색하게 웃으며 집정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미 정전에선 모든 의자와 책상이 치워진 지가 오래였다.
그것들이 있던 자리에는 먼지만 켜켜이 쌓이게 된 지 긴 시간이 흘렀다.
오늘 최충헌이 왕을 알현하는 자리에는 옥좌를 정면으로 마주보는 자리에 책상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최충헌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살짝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왕은 내심의 두려움을 피하며 최충헌의 말을 기다렸다.
이따금씩 선경전에... 심지어 침전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곤 하던 이의민과는 다른 의미로, 아니, 이의민보다 더욱 무서운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패에는 익숙했으나 침묵엔 익숙하지 못한 왕이었다...
그 때였다.
"......폐하, 역적이 이제 척살되었사오니 하늘이 아직 고려를 버리지 않았음이옵니다."
최충헌이 짧고 굵게 한 마디를 던졌다.
멍하니 있던 왕이 황급히 답을 했다.
"....아아, 그대의 말이 옳습니다... 그대가 이리 큰 공을 세웠으니 짐은 그대에게 공신의 작위와 많은 식읍을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최충헌은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최충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오나, 아직 역적의 무리가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옵니다. 이의민의 아들들을 비롯한 인척들, 그를 따르던 자들이 아직 잔존해 있사옵니다. 따라서, 폐하께오서는 신으로 하여금 그들을 주멸하고 더불어 그들의 삼족을 이멸토록 하시옵소서."
아아.
역시 그러하였구나.
명종은 그제서야 최충헌이 그냥 들어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당연히 형식적으로 황명을 받들어 역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얻으려 들어온 것일텐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새삼 최충헌이라는 자가 지닌 어떤 강렬한 분위기 때문인지, 왕은 그것을 잊고 있었다.
"....오오, 물론입니다. 그리하세요."
최충헌은 대답을 기다린 적이 없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듯 하더니 망설임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선경전을 나갔다.
내관이 그제서야 숨을 크게 쉬었다.
"....폐하, 저 사람은... 참으로 무서운 사람인 듯 하옵니다."
명종은 최충헌이 남기고 간 빈 자리를 내려다보며 침을 삼켰다.
과연 그러했다.
*******
개경의 저잣거리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어떤 사람은 이의민의 병사들이었고, 어떤 사람은 최충헌의 병사들이었다.
여기저기 그 병사들의 가족들이 통곡하고, 아비 잃은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죽으면 다 똑같이 인사(人事)의 홍진(紅塵)에 휩쓸려 안타깝게 가 버린 생명들인 것을...
그 가운데를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중은 생각했다.
이 난세가 과연 언제 끝날 것인가...
물론 지금의 이 싸움에서는 한 쪽이 이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일방이 이겨 천하를 얻으면 그것으로 난세가 끝난 것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이른바 난신(亂臣)이라는 말이 왜 생겼을까.
더구나... 작금의 일들을 보건대, 이 난신은 더욱 교묘하게 심지어 그 이전의 모든 난신들을 뛰어넘어 오래 가겠구나...
그는 생각했다.
나뉘어져도 난세, 합하여져도 난세라면... 이 백성들은 과연 어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승립 아래로 남몰래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세속의 일은 세속의 일대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다스리고,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어 나가는 것이었다.
이지순과 이지광의 임시 막사 주변에는 부상 당한 사병들의 신음소리가 가득했다.
그러나 정작 그 둘은 자신들이 살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
"형님,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미 지영 형님도 죽어버렸다 하고.... 우리는 이미 패한 지 오래입니다..!"
그 능청스러움을 모두 잃은 채, 비굴함만 얼굴에 가득한 이지광이었다.
이지순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두 형제의 갑옷과 얼굴에는 모두 피가 흥건했고, 머리는 어느 새 산발이 되어 상투가 망가져 있었다.
쌍도자라는 이름은 결코 끝까지 허명이 아니었다.
".......최충헌에게 항복하는 것이 어떠냐."
구석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널브러져 있던 이지순이 멍하게 묻듯 말했다.
이지광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예? 지금 뭐라.....하셨습니까?"
이지순이 멍한 시선을 그대로 돌려 아우에게 던졌다.
"...최충헌에게 항복을 하자는 말이다. 못 들었느냐."
".....하오나..하오나 그자는 아버님과 지영 형님의 원수입니다! 어찌 그자에게 항복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지광이 바닥에 주먹을 꽂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이지순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원수를 갚을 수 없다면......잊어야 한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일단 항복하여 우리의 일신을 보존한다면..... 어찌 후일이 없겠느냐. 후일만 있다면... 언제든 다시 뒤집을 수가 있다."
그 말에 이지광의 주먹에 힘이 풀렸다.
정말.......그러한가.
그러한 것인가.. 그리 할 수 밖에 없단 말인가....
그러나....그러나 어찌되었건 지금의 이 패배, 하룻밤에 천하를 도둑맞은 이 일은 자명해진 것이었다..
이지광은 고개를 푹 수그렸고, 이지순은 멍한 시선을 다시 하늘을 향해 던져 보았다.
그 때였다.
검은 복장에 복면을 쓴 사내가 이리저리 살피며 막사로 들어왔다.
두 형제는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네 이놈....! 너는 누구나..!!"
검을 든 이지광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내는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소인은 박진재 장군의 영을 받고 왔사옵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박진재....?
박진재라면.... 형제가 기억을 곱씹어 보았다.
"...박진재는 최충헌의 옆에 붙어 있는 자가 아니냐. 헌데... 그자의 수하라고?"
이지순이 물었다.
"예."
"헌데.....네놈이 어찌하여 이곳에 왔단 말이냐."
".....항복을 권유하라는 명을 받들고 온 것이옵니다."
항복이라는 두 글자에 형제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최충헌의 수하인 박진재의 명을 받고 왔다면... 결국 최충헌의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최충헌이 그들을 살려줄 의사가 있다는 의미일까.
내심에서 묘한 기대가 싹트기 시작한 그들이었다.
".....허..허면, 항복을 하면, 그 다음에는..?"
이지광이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그래. 항복을 하면, 그러면 최장군께서 우리를 살려주신다더냐?"
이지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물론이옵니다. 바로 그것을 전해드리려고 소인이 이곳에 온 것이옵니다. 최충헌 장군께서는 장군들께서 단신으로 인은관(仁恩館)으로 오시어 항복하기를 바라고 계시옵니다. 그렇게만 하신다면 그 이전만은 못해도 벼슬과 부를 보장하시겠다, 그리 장담하시었사옵니다."
목숨만 부지해도 다행인 상황인데....
...벼슬과 부까지....
아니, 이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최충헌이 왜 우리를 살려둔단 말인가......?
그러나 수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 의심하실 수도 있을 것이라 하셨사옵니다. 비록 역적의 자식들이나, 다른 무리들은 모두 주멸하여도 그간 국가에의 공을 생각하여 일단 유배를 다녀온 뒤 다시 그 벼슬과 부를 돌려줄 것이라 그리 말씀하셨사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을 걸고 지킬 것이라 그리 말씀하셨사옵니다."
.....모든 것을 걸고...
말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최충헌에게 무엇을 더 담보하라 하랴..
어차피 믿을 구석이라고는 그의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없었다.
이대로 투항하지 않아도 죽을 것이고, 투항한다면 적어도 살 가능성이 있다면...
형제가 시선을 교환했다.
"..........가서 최충헌 장군께 전하여라..... 우리 형제가 투항할 것이라 전하거라."
*******
집사가 급히 들어와 권절평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권절평의 눈이 크게 띄였다.
".....결국..."
주위에는 그의 아들인 권준과 더불어 손석, 그리고 손석의 아들인 손홍윤이 둘러 앉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길인, 사홍적, 우승경 등이 자리해 있었다.
일이 결국 그리 되었단 말인가.
이의민이 어떤 자였는가..
천인 출신으로 결국 그 자리에까지 올라 아들들과 더불어 십수 년을 고려를 호령하더니... 하룻밤만에 그리 허무하게 가 버리다니...
그가 어떻게 죽었어도 믿기 힘들었겠지만, 더구나 하룻밤의 방심으로 인하여 그렇게 쉽게 천하를 빼앗기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예상은 했어도,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지니 마음이 어지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결국 다시 난세요."
손석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소이다."
길인도 동의했다.
"무인들끼리 정권을 빼앗고 빼앗기고, 하는 이런 일들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겠소이까. 이 나라는 태조께서 개국하신 이후로, 줄곧 황실의 나라였소이다. 물론 어리석은 황제도 없었다고 할 순 없었으나... 적어도 신하가 황제를 핍박하여 국가를 운영하고, 또 다른 자가 무도하게 그것을 빼앗는 그런 일은 멈춰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권준이 아비를 보며 말했다.
"백성들이 너무 오랫동안 국내의 환란에 지쳤사옵니다. 수많은 민란들이 왜 일어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사옵니다."
"......결국엔 정권을 폐하께로 다시 돌려야 합니다."
손홍윤이 말했다.
다른 이들은 이에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결국 결론은 하나 뿐인가...
권절평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무겁게 내리깔린 침묵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가문의 명운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수십 년 내려온 무인들의 천하였다.
"...군사들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권준이 여러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손석과 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충헌의 사람들이 모든 것을 빠르게 장악해나가고 있어요. 이미 우리가 지닌 병권은 의미가 없게 되었소이다."
우승경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중서령 대감께선 요즘 어떠십니까. 몸이 편치 않으시다 들었습니다."
사홍적이 우승경에게 물었다.
"제가 가끔 찾아보곤 하는데.... 마음의 병이시지요. 지난 번의 그 일이 잘 되지 못한 이후로 계속 몸이 편치 않으셨습니다."
"큰일이군요. 고려 제일의 용장이신 중서령께서.... 우리가 믿을 분은 그분 뿐인데.."
누군가가 말했다.
"어찌 되었건 일을 도모해야 할 터인데.... 수족을 다 잘린 셈이니......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힘만 있었어도.. 지금이 바로 적기인데 말입니다."
손홍윤의 말에 모두 동의한다는 듯, 방에는 무거운 침묵이 다시금 깔렸다.
*******
최충헌의 자택.
회의실에는 문무의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기존의 측근들인 최충수, 박진재, 노석숭, 정숙첨, 김약진이 한 쪽에 자리했다.
그 옆으로 군부의 지지세력인 이경유, 최문청, 차약송, 기홍수, 백존유가 자리했다.
다른 편에는 정숙첨을 비롯한 소수의 문신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략 모든 이들이 자리에 앉은 것처럼 보이자, 최충수가 나섰다.
"우선 경축을 해야 할 것 같소이다. 우리가 오늘날 이리 크게 잘 된 것은 무엇보다 난신 이의민을 처단하였기 때문이오."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미소를 주고 받았다.
"이제는 우리가 이 나라를 운영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형님께서는 홀로 행패부리듯 정치를 한 이의민과 달리, 문무를 아울러 널리 인재를 굽어보시고 그들에게 국사를 맡기고자 한다 하셨소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요."
최충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여, 우선 새 인물을 기용하였소. 금의(琴儀) 공, 어서오시오."
정결하고 우아한 인상의 학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태자소부(太子少傅) 금의라 하옵니다. 잘 부탁드리겠사옵니다."
모든 이들이 좋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최충수가 씩 웃어보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금의 공을 비롯한 문신들은 우리 무신들과 더불어 앞으로 형님과 내가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 큰 역할을 해주시길 바라오."
그가 자리에 앉았다.
정숙첨이 질문을 했다.
"헌데, 저는 그저 상견례차 모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영공께오서 국정을 쇄신할 방안을 마련하라 하셨다면서요?"
기홍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오이다. 아무래도 이전의 집정과는 달리 널리 의견을 구한 뒤 안을 만들어 폐하께 올리실 작정이신 듯 하오."
차약송은 그런 최충헌의 뜻이 송구한 모양이었다.
"허...허나, 어찌되었건 국정의 방향을 제시할 것은 영공이지 우리가 아니지 않소이까..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뭐, 난신과는 격이 다른 분이 아닙니까. 명이 내려왔으니, 마땅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박진재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나 주위의 다른 측근과 신료들은 수군거리고 있었다.
"흐음... 다른 것은 몰라도, 일단 황실을 쇄신하는 게 우선일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경유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금의가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이 나라의 통치의 근간은 무엇보다 유학입니다. 헌데 폐하께서는 연경궁이 전소된 후 복구되었음에도 그곳이 불길하다는 도사들의 말을 믿고서는 환궁하지 않고 계십니다. 여러 궁을 옮겨 다니시니, 써야 할 관원들의 수가 너무 많아졌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정숙첨이 말도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폐하께서는 심약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시지요.. 황자들이 중으로 출가하여 세속을 버려야 함에도 계속 인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도교와 불교를 너무 좋아하십니다.."
"확실히, 황실을 먼저 정리하자는 건의를 해야겠습니다.."
신료들의 논의가 이어졌다.
*******
".....박진재라."
"예, 영공."
최충헌이 새삼 의아하다는 듯, 부채를 펼쳐들고는 보일락말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석숭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너무 선뜻 국사를 조정과 군부에서 알아서 논의해보라는 영공의 뜻을 받아들여 새삼 놀랐사옵니다. 하옵고..."
최충헌이 시선을 노석숭에게 돌렸다.
노석숭이 고개를 숙였다.
".......최충수 장군께오서... 조금 앞서 나가신 감이 없지 않사옵니다. 계속해 영공과 그 자신을 동일한 반열에 두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사옵니다. 나오면서 문무를 가릴 것 없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최충헌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아우야 그리 생각할만하지. 결국 목숨을 거둔 것은 나이지만 먼저 뒤에서 그를 찌르고자 덤벼든 것이 저이니 말일세. 허나 박진재라..."
"경계할 필요가 있겠사옵니다. 훗날 무슨 일을 벌일 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최충헌이 별안간 껄껄 웃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다시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놔두게. 아직은 그 심중을 짐작하기 어려우니. 증좌가 명확할 때 한 번에 일을 끝내야 할 걸세."
"예, 영공. 명심하겠사옵니다."
"....회의에서 황실의 이야기가 나왔다고."
"예. 금상께서 도교와 불교에 너무 빠져 계신다는 이야기가 나왔사옵니다. 하여 폐하로 하여금 연경궁으로 돌아가시게 하면서 황실과 연결된 이런저런 관행들을 폐기하자는 안이 나왔사옵니다."
최충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상은 그 주위에 가지가 너무 많아. 금상 본인이야 나약하기 그지 없는 자이지만 이리저리 덩굴처럼 뻗어나간 가지들이 금상의 진정한 면모를 가리고 있는 게지... 그 가지를 쳐내는 것이 선결되어야 하네."
"바로 보셨사옵니다. 폐하를 환궁시키면서 그 출가한 왕자들을 비롯해 금상 주위의 승려와 도사들을 모조리 제거하여야 하옵니다."
"권절평 등의 동태는."
"아직까지는 구체적 움직임은 없사오나....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자들을 늘리고 있사오니, 곧 무언가 빌미가 생길 것이옵니다."
"그 틈을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야."
"예."
노석숭이 머리를 조아렸다.
*******
이의민(李義旼)은 본래 노예의 미천한 신분으로 주제에 넘게 의종(毅宗)의 친밀한 사랑을 받아 여러 번 승진하여 현달하게 되었으니 은총이 지극하였는데도 감히 큰일을 행하여 그 흉역한 죄가 위로 하늘에까지 통하였으니 진실로 용서할 여지가 없다. 다만 애석한 것은, 의종이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긴 것이다. 몸소 대역(大逆)을 범하고서도 〈자기 집〉 창문 아래에서 죽을 수 있었다는 말을 전에 들어보지 못하였으니, 제 몸이 도륙되고 족속이 멸망된 일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하늘의 그물[天網]이 넓고 넓어서, 성긴듯하지만 빠뜨리지는 않는다는 말이 믿을 만하다.
...(중략)...최충헌(崔忠獻) 등이 청하여, 지후(祗候) 한광연(韓光衍)을 경주(慶州)로 보내 이의민(李義旼)의 삼족(三族)을 도륙하고 사신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보내 그 노예 및 붙좇은 자들을 주륙하며, 그의 사위 이현필(李賢弼)을 원주(原州)로 유배하도록 하였다.
중서령 두경승(杜景升)의 집.
우승경은 지난날 이의민을 제거하고자 한 일의 실패 후 계속 몸져 누워 있었던 두경승의 곁에 앉아 걱정스럽게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경승의 얼굴에는 주름이 더 생긴 듯 했고, 낯빛이 어두웠으며 눈두덩이가 푹 꺼져 있었다.
게다가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예전의 그 강골의 체격은 모두 사라져버린 듯 했다.
마치 꺼져 가는 듯한 불씨를 보는 느낌이었다.
'중서령 대감마저 가시면 폐하의 흉중에 가득한 수심을 어찌 할 것이며 이 나라 종묘사직은 또 어찌할 것인가..'
'부디 그대가 자주 중서령의 자택에 찾아주시오. 또한 짐이 따로 은밀히 어의를 보내겠소..'
명종의 심려 또한 최근 부쩍 늘었다.
집권한 최충헌이 칼날을 겨누기로 한 최초의 대상이 바로 황실이 된 듯 했기 때문이었다.
출가한 왕자들은 모조리 지방의 사찰로 내쳐져 그곳에서 돌아올 수 없게 하였고, 명종을 긴 세월 모셔온 환관들도 여지 없이 궐 밖으로 내쳐졌다.
최근의 궐내 분위기는 부쩍 긴장감이 올라가 있었다...
두경승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마침내 활짝 열렸다.
그의 시선이 옆에 앉아 있던 우승경에게로 향했다.
우승경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두경승의 손을 어루잡았다.
"대...대감..! 이 사람을 알아보시겠습니까...?"
두경승이 아주 천천히,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일으키고자 했다.
우승경이 조심히 그를 일으켜 앉게 하였다.
두경승의 눈빛은 아직 또렷했다.
".....그대가 우승선(右承宣, 중추원의 정3품 관직. 왕명출납 담당)으로 봉해졌다는 소식은 들었네."
"허울 뿐인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실질적으로 왕명을 쥐고 흔드는 것은 좌승선이 된 최충헌입니다.. 처음부터 다 가지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부리는 기본적인 술책이 아니겠습니까."
두경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의민이 집권하던 시절의 나와 같이 말일세."
"폐하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폐하께선 최충헌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십니다. 게다가 그의 칼날이 지금 황궁을 향해 있으니..."
"...폐하를 통제해야 정통성을 다질 수 있으니, 놀랄 일은 아니네만.. 어쨌든, 자네의 역할이 이제부턴 중요하게 되었네."
두경승이 오른손으로 우승경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어인 말씀이십니까..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아무렴, 야인으로 있는 것보다야 훨씬 좋은 조건이 아닌가. 하늘은 가장 이루기 어려울 것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십분 활용할 줄 아는 자에게 기회를 주는 법이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승선의 지위를 활용하라는 말씀이시군요."
두경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유야 어찌되었건, 폐하를 모시던 자들이 모두 내쳐지는 상황에서 자네가 승선을 맡아 폐하의 지근거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네. 폐하께서 기운을 차리시도록 돕고 우국지사들과 더불어 나 대신 대업을 이루게."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대감께서 기운을 차리셔야..."
두경승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의 때는 이제 거의 다 되었네.. 지금 황궁에 겨눈 그의 칼날은 단지 경고일 뿐이네. 황실은 이용가치가 충분하고, 아직까지 신하가 보위를 찬탈하는 일까지는 도모하기 어려운 때일세. 허나... 그의 다음 번 칼날은 아주 매서울 것이야....."
"예...?"
".....군부 말일세. 이제 그는 군부를 정리하려 들 것이야.. 나와 같은 반대 세력은 물론이거니와 이번 정변에 참여했던 자들 중 일부 또한 그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야...."
"대감..."
두경승이 쓰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리석은 자들일세.. 이런 난세에....... 병법과 군략을 공부하였다는 자들이 어찌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이치가 잘 먹혀들 시기인 것을 그리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이리 가도 죽고 저리 가도 죽을 것이라면 차라리 충신의 길을 택하고 죽을 것을..."
*******
인은관(仁恩館).
대문이 음산한 소음을 내며 천천히 열렸다.
만신창이에 산발이 된 이지순과 이지광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까마귀가 기분 나쁘게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리며 돌면서 까악거리고 있었다.
인은관 앞은 조용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마음을 거의 전부 채울 무렵, 천천히 인은관의 문이 열리더니, 갑옷 차림의 최충헌이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오고, 이경유와 최문청 그리고 최충수 등 무장들과 측근들이 그 뒤를 따랐다.
높은 계단 위의 최충헌은 감정이라고는 없는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깐 동안 계단 아래의 두 형제는 속이 뒤집히는듯한 기분을 느꼈고, 동시에 오한이 드는 것 같이 소름이 끼쳤다.
그런 후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깨달았다.
형이 먼저 털썩 무릎을 꿇었고, 동생이 그 뒤를 이었다.
그들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위를 보았다.
"이...이보시오, 최충헌 장군... 아니 최충헌 공. 지난날 우리가 함께 서로 믿으며 중방에서 국사를 논하던 일을 잊으셨소..? 부디 그때의 일을 기억해시오."
최충헌이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나왔다.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 오늘 내가 경들을 용서한다고 하더라도, 경들은 과연 나를 믿을 수 있겠는가..? 또한 나는 경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나아가 국가의 심판이 어찌 경들을 용서할 수 있겠나?"
이지순이 천천히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별안간 무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에워쌌다.
이지순은 비교적 평온한 얼굴로 최충헌을 노려보았다.
"...지금의 그대는 과거에 우리 가문이 그대를 중용하였기 때문에 그 힘을 바탕으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오! 그렇다면 그대는 우리 가문이 빚을 진 것이 아닌가? 그대는 이런 식으로 빚을 갚는가? 어찌 사마의가 왕릉을 대하듯 우리를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최충헌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는 척을 했다.
"......나는 경에게 빚을 지면 졌지, 국가에게 빚을 지지는 않겠소."
그 말에 이지순은 한동안 멍하니 최충헌을 바라보더니,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쾌활한 성격이었던 막내 아우보다 훨씬 광기가 넘치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또한 허망한 듯한.. 어이가 없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끌고 가라!"
주위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완전히 낙담한 듯 실성한 막내 동생과 완전히 실성한 듯 웃어제끼는 형은 그렇게 끌려갔다.
"영공, 이미 가구소(街衢所/고려시대에 죄인을 잡아가두는 일을 담당하던 관부)에 끌려간 죄인들이 저 형제의 반역죄를 토설하였습니다. 저들을 비롯해 관련자들에게 마땅한 형을 내린 후, 이의민 가에 대한 일은 이쯤에서 정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최충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한 피는 반드시 필요한 법이었으나... 과도하게 피를 흘려서도 아니 되는 법.
그것이 권력을 지키고 다지는 법도 중의 하나였다.
"하옵고 황궁의 일도 정리가 되어 가는 듯 하오나... 최충수 장군께오서 좀 과격하게 다루신 듯 하여 걱정이 약간 되는 것도 사실이옵니다."
뒷짐을 지고 텅 빈 인은전의 넓은 마당을 바라보던 최충헌이 흘끗 옆을 보았다.
"그대가 적절한 시점에 개입하여 아우를 제어하시게."
"물론이옵니다, 영공."
노석숭이 머리를 조아리고, 최충헌은 다시 시선을 너른 하늘로 옮겼다.
모든 일에는 완급이라는 것이 필요한 법이거늘...
아우는 그 성정이 불과 같아 한 번 타오르면 모든 것을 태워버려 잿더미로 만드는 식으로 장악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본성을 가졌다.
그런 위험한 본성이, 언젠가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불안정한 정권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었다.
...그런 불안정함을 어느 정도 안정화시키지 않아 폭주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황궁의 일은 그즈음에서 정리할 때가 되었다.
어차피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오랜 세월 여러 무인 집정자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 얕은 수만 는 금상을 확실히 휘어잡기 위한 경고성 숙청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의 주위에서 껄껄 웃고 있는 저 늙은 범과 독수리들..
오히려 저자들이야말로 정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자들이었고, 군부를 확실히 장악하지 않는다면 그의 정권의 불안정성은 한결 커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검에 피를 묻혀야 할 순간은 이제까지가 아닌, 이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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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절평과 손석이 황제의 침소에 들었다.
궁인들의 안마를 받던 명종이 손사래를 치며 여인들을 내보냈다.
두 사람은 다소 민망해하는 눈치를 공유하며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았다.
"어서오시오들..."
"저...폐하.."
손석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려 하자, 왕은 점잖게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으나.. 그대가 이해해주시구려. 근래 들어 근심과 병증이 날로 심해져 이리 하지 않으면 심중에 안정을 얻기가 힘드오,"
두 사람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폐하, 신들이 오늘 침전에 든 까닭은... 종래에 대업을 이루고자 함을 아뢰기 위해서이옵니다."
권절평이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바로 아뢰었고, 손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명종이 눈을 크게 뜨며 별안간 몸을 일으켜 앉았다.
"뭐...뭐라 하였소.. 지금?"
손석이 엎드려 고개를 깊이 숙였다.
"폐하, 지난 수십 년 간 무인들이 국정을 제 손에 쥐고 서로 다투느라 황실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가 되었나이다. 신 등은 우국지사들과 힘을 합하여 작금의 난신을 주벌하고 폐하께 국가의 대권을 온전히 돌려드리고자 하옵니다."
명종은 침을 삼키고는, 허 하고 한숨을 내쉬며 보료에 손을 얹었다.
"이보시오들.. 형세를 분명히 알고나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지금 최충헌의 기세가 이미 하늘을 찌르고 땅을 뒤덮었는데, 그대들이 무슨 재간으로 결단을 하겠다는 것인가?"
"본래 가장 강해보이는 때가 또한 가장 약한 때라 하였사옵니다. 그들이 더욱 뿌리를 박기 전에 먼저 선제적으로 타격을 해야 무인정권이 근본적으로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되옵니다. 폐하께오서 밀지를 내리시면..."
왕이 다시 한 번 손을 들었다.
왕답지 않게 단호한 의사표현이었다.
"그대들은 어찌 가문의 명운을 걸고 되지 않을 일을 애써 당장 이루려 하는가. 되지 않을 일이 되게 되려면 모든 이치가 자연스럽게 바뀌기를 기다려야 옳거늘, 어찌 섵부른 시도에 가문과 황실의 명운을 걸려 하는가. 짐은 그대들의 뜻에 찬동하기 어렵소이다."
"폐하, 가장 어려워보이는 일이 사실은 가장 쉬운 일일 수도 있사옵니다. 이제 폐하께서 그 옳음을 저희에게 내리신다면, 우국지사들이 어찌 멀리 있겠사옵니까."
"그대들은 나라의 대신이며 장군인데, 어찌 일의 시비만 생각하고 가능과 불가능은 생각지 않는가. 적절한 시점이 아니라면 당장의 분함은 참아야 한다는 간단한 이치를 그대들은 정녕 모르는가?"
왕의 간곡한 만류에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중서령 대감의 말이 옳았소이다.. 폐하께서는 그 심약함이 극에 달하시었소."
권절평이 손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손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폐하께서 밀지를 내리지 않으신다면 지금은 우리의 뜻을 따르는 이들도 곧 반대하게 될 수도 있소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당장은 거사가 불가능하겠구려.."
두 사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저만치에서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을,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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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崔忠獻)은 내시 호부시랑(內侍 戶部侍郞) 이상돈(李尙敦), 군기소감(軍器少監) 이분(李芬), 지후(祗候) 원춘(元偆) 등 50여 명이 세력을 등에 업고 승진하여 내시가 된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왕에게 아뢰어 이들을 내쫓았다. 또 왕자로서 승려인 소군(小君) 홍기(洪機)·홍추(洪樞)·홍규(洪規)·홍균(洪鈞)·홍각(洪覺)·홍이(洪貽) 등이 대궐에 있으면서 정사에 관여한다고 왕에게 아뢰어 본사(本寺)로 돌려보냈다. 또 총애 받던 승려 운미(雲美)·존도(存道)가 왕궁을 출입하자 신료들이 많이 아부한다고 하여, 아울러 내쫓았다. 이 해(1196)에 〈최충헌은〉 좌승선(左承宣)으로 임명되고, 조금 뒤에 지어사대사(尋知御史臺事)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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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야망 1 : 프롤로그
-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34년 전, 서기 1275년, 고려의 왕도 개경에서 태자가 태어났다. 이름은 왕원이었고 아버지는 한국사에서 최초로 '충성할 충'자로 시작되는 굴욕적인 시호를 받은 '충렬왕'이었고 어머니는 한국사 최초의 몽골왕후였던 장목왕후(제국대장공주)였다.
- 당시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었다. 세자가 태어나기 5년전에 드디어 100여년에 걸친 고려무인정권이 몽골의 압력에 의해 붕괴되고 드디어 다시 고려의 황제가 나라의 주인으로 복귀했다.
- 그러나 고려는 황제가 실권을 되찾은 대신 나라 전체가 당시 세계를 제패하던 대몽골제국의 속국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황제의 나라' 고려는 모든 칭호가 격하되었고 충렬왕 자신도 더 이상 황제의 칭호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 이에 반발하여 세자가 태어나기 2년전까지만 해도 고려의 마지막 자존심의 상징이던 '삼별초'라는 존재가 당시 고려 조정을 '허수아비'라 규정하고 강화도, 진도, 제주도 등 한반도의 가장 큰 3개의 섬들을 누비며 '황제'를 내세우고 종횡무진 활약했다. 이들의 활약상은 바다의 신화가 되었으며 일본과도 긴밀히 협력해 한때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일부 땅을 수복하는 등 강성했으나 결국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 충렬왕의 아버지였던 원종은 고려의 집권자 최충헌이 죽은 해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아버지 고종이 최씨정권의 허수아비로 놀림감이 되는 모습을 허다하게 보아왔다. 이런 그는 무인들에 대한 원한에 사무쳐 결국 당시 고려의 원수이던 몽골에까지 손을 뻗혀 당시 중국의 송나라를 토벌하러 갔던 쿠빌라이에게까지 찾아가 충성을 맹세하고 화친을 청했다.
- 충렬왕 자신도 물론 아버지 원종이 최씨정권을 종식시켰음에도 이후 유경, 김(인)준, 임연, 임유무 등의 무인들에게 계속 시달리는 꼴을 보아왔기 때문에 역시 무인들에 대한 원한이 적지 않았다. 또한 아버지 원종으로부터도 권력을 위해서는 때로 나라의 수치와 자존심도 흥정해야 한다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충렬왕 왕거는 아버지보다 한술 더 떠서 쿠빌라이를 찾아가 그의 딸과 결혼하고 변발을 자청하는 등, 철저하게 몽골에게 복속하는 대신 고려에서만큼은 왕 노릇을 제대로 하기를 기대했다.
- 그러나 충렬왕의 이러한 계산의 댓가는 혹독했다. 그동안 반세기가 넘도록 끈질기게 저항하던 유일한 강적 고려가 스스로 굴욕을 청하자 몽골제국은 그동안의 피의 댓가를 한꺼번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274년에 시작된 일본원정으로 결국 실패할 전쟁을 위해 수많은 고려인들이 희생되었고 이러한 무능하고 굴욕적인 왕을 둔 고려의 신민들은 한없이 이를 원망했다.
-고려의 고난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결국 왕원 세자의 친어머니인 몽골인 장목왕후는 고려에 들어오자 사실상 자신이 고려의 왕인 것 처럼 행동했고, 충렬왕은 무슨 종처럼 부리기 시작했다. 충렬왕의 신하들이나 총애하던 여자들을 구타하는 것은 기본이요, 심지어 충렬왕 자신도 몽둥이로 개패 듯이 패는 등 망신을 주기가 십상이었다. 충렬왕은 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던 것이었다.
- 실의에 빠진 충렬왕은 급기야 주변에 간신들과 미인들을 가득 두어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했고 이로 인해 더더욱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피폐해져 갔다.
- 어린 세자 왕원은 이러한 사실들을 접하며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매우 총명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비록 그가 생각하기에도 어머니 장목왕후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면이 있어도 결국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였고 그 자신도 칭기스칸과 쿠빌라이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총명한 세자는 대신 예의를 갖추어 어머니에게 시시비비를 가려 말했고 역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이후 장목왕후는 지나친 행동을 삼가하게 된다.
- 그러나 왕원이 아버지 충렬왕에게 간하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비록 겉으로는 몽골에게 충성하는 속국의 왕에 불과했지만 장목왕후가 자신이 아끼는 이들을 개처럼 취급하는 것을 목격한 충렬왕은 개인적으로 장목왕후를 매우 싫어하게 되었고 나아가 그녀의 소생인 세자가 자신의 아들임에도 장목왕후의 연장선상에서 은근히 경계하게 되었다. 어린 세자의 충정어린 간언이 도리어 역효과를 자아내게 된 것이었다.
- 1287년 당시 13세가 된 세자 왕원은 난생 처음으로 어머니 장목왕후를 따라 원나라의 황도 대도(현재의 북경)로 갔다. 말로만 듣던 외할아버지 쿠빌라이칸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 어린 왕원의 눈에는 대도의 모습은 장관, 그 자체였다. 당시 온 세계의 모든 것들이 이곳에 모여들었으며 좁았던 고려와는 비교가 안되는 가히 천하의 중심이었던 것이었다.
- 그리고 대칸 쿠빌라이를 만났다. 칭기스칸의 손자로서 역시 그 자신도 어릴 적 칭기스칸의 무릎 위에서 재롱을 떤 바 있는 쿠빌라이는 이제 자신의 손자인 고려세자가 자신을 찾아오자 어느덧 인자한 할아버지가 되어 역시 세자를 무릎위에 올려놓고 그의 재롱을 즐기고 있었다.
"이지르부카(왕원의 몽골식 이름)야, 너는 칭기스칸의 후예임을 잊지 말거라. 너의 반쪽은 고려인이지만 고려 역시 그 근원을 올라가면 우리의 선조 고구려와 만난단다. 고구려의 후예답게 고려는 우리 몽골과 형제의 실력을 겨뤘고 결국 스스로 동생임을 인정한 것이란다. 이지르부카야, 그럼으로 고려는 몽골의 형제국이다. 너는 그 두 형제를 이어주는 다리라는 말이다. 껄껄껄."
- 이지르부카는 때로는 대도를 구경하며 다녔는데 적지않은 고려인들도 보았다. 몽골제국은 그 신분계층을 4개로 나누었는데 그 첫번째는 몽골인이요, 두번째는 색목인(아라비아, 서역인, 서양인 등), 세번째는 북중국인과 만주인, 마지막 네번째는 가장 천시했던 남중국인이었다. 고려인은 사실상 몽골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는데 이로 인해 개판이던 고려보다는 살기좋은 대도로 모여드는 고려인들이 많았다. 쿠빌라이는 고려인의 뿌리가 몽골인과 같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쿠빌라이의 소개로 세자는 많은 외국인들과도 만났는데 그 중에 마르코 폴로라는 이도 있었다. 그로부터 세계의 모든 희귀한 이야기들을 들을수가 있었다.
- 그러나 왕원은 신하들의 권유로 대도의 많은 고려인들을 만났고 고려의 세자로서 먼저 자신이 고려인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세계에 꽉 막힌 고려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고려와 몽골의 양쪽을 이어주는 '열린 고려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열린 고려인' - 그것은 앞으로 세자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한마디로 함축해주는 코드였던 것이다.
- 장차 고려의 왕위를 이을 세자이자 쿠빌라이의 외손자이던 왕원은 대도에 머물며 좀더 넒은 세상을 경험했고 아울러 고려인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춘기의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보낸 왕원은 간간히 고려를 왕래했으나 아버지인 고려왕과 어머니의 암투가 계속되던 고려에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는 생활을 한 7년간 계속하게 된다.
- 이 기간 동안 세자는 이종사촌이던 테무르 등을 비롯해 많은 권력자들과 친분을 쌓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고려왕은 자신의 심복들을 은밀히 파견해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게 하는 한편, 테무르와 그 아버지인 칭김의 부하들의 환심을 사두어 만약을 대비하려 했다. 부인인 장목왕후와의 불화가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씨앗인 세자에게 결코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고려왕이 이 같은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그의 고려인 수하들의 영향력도 컸다. 특히 가장 총애하던 후궁 무비는 그동안 막강한 세력을 쌓아놓았는데 이에는 경왕(충렬왕의 고려식 시호)의 묵인이 컸다. 무비는 사실상 고려의 모든 힘을 동원해 장목왕후를 은근히 압박했는데, 이에 반발한 왕후는 아들 세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서한을 보내 쿠빌라이칸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세자는 장차 집안의 분란을 우려해 이를 묵살했으나 경왕의 수하들이 이 사실을 알고 경왕에게 알렸다.
- 경왕은 장차 아들인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어미를 위한 복수를 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의 정치가 거의 모두 실패했다는 자괴적 열등감으로 인해 경왕은 아들마저 자신을 핍박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이는 곧 자신이 먼저 선수를 써서 아들이기 이전에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인 세자를 제거해야 겠다는 병적인 집착증으로 발전된다. 권력 앞에 부자지간이라는 천륜마저 벗어던진 것이었다.
- 그러나 쿠빌라이의 외손자인 세자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경왕은 먼저 대도에 있는 세자로 하여금 권력자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래서 이미 있던 세자의 측근들마저 자신의 그것들로 바꾸어 세자에 대한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았다.
- 이러한 경왕의 행동은 그러나 곧 원제국 황실에 그 소문이 퍼져 원나라 황족들은 고려왕의 경박함을 조롱했고 아들인 세자의 등 뒤에서는 세자를 향한 비웃음을 퍼부었다. 자존심이 강했던 세자는 특유의 인내력으로 이를 애써 무시했으나 속으로는 갈갈이 찢어지는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본국 고려로는 무비 일당이 세자에 대한 소문을 과장하여 경왕에게 보고했기 때문에 경왕의 세자에 대한 오해는 더해갔다.
- 한번은 장차 원제국의 후계자가 될 테무르와도 이 사실을 가지고 대판 싸운 적이 있었다. 테무르는 경왕이 아들을 핍박하는 사실을 가지고 세자를 조롱했다.
"이지르부카, 네 고려 아비는 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며? 쯧쯧...역시 고려인들은 형제라지만 좁은 땅에 있어서 그런지 정말 형편없는 인간들만 모였나봐...쿠빌라이칸의 피를 반이라도 받은 넌 제발 네 아비를 닮지 말아라...킥킥."
이는 세자의 아비인 경왕이 몽골 피는 한 방울도 없으면서 몽골인 흉내를 내는 것을 빗댄 말이기도 했다. 아무리 왕과 사이가 안 좋았지만 세자는 테무르가 아비를 욕하는 것을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테무르, 그게 무슨 말이냐? 그건 아바마마가 잘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나와 아바마마를 이간질하려고 하는 것이란다. 그런 쓸데없는 소문에 네 귀가 얇아지면 장차 이 거대한 제국을 어찌 이끌어 가려고 하냐?"
"뭐야? 아무리 사촌지간이지만 넌 소국 고려의 세자이고 난 장차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인 이 원나라의 대칸이 될 사람인데 감히 나에게 그런 막말을 해?"
테무르는 이성을 잃은 나머지 그만 주위의 수하들을 시켜 세자의 옷을 벗기고 직접 채찍질을 했다. 이는 곧 알려져 테무르는 할아버지 쿠빌라이의 큰 꾸지람을 받았고 이들은 서로 화해했으나 그 앙금은 장차 서로에 대한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 그러던 서기 1294년, 세자와 어미 장목왕후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쿠빌라이칸이 죽었다. 이는 곧 고려의 경왕에게는 희소식 중에 희소식이었다. 후계자인 칭김과 테무르에게 경왕은 그동안 많은 공을 들였기 때문에 장목왕후가 예전처럼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테무르는 겉으로는 세자를 위하는 척 하면서 원나라 황족과의 결혼을 권유했다. 상대는 원나라 진왕 감마라의 딸 보다시리였다. 이는 은근히 경왕이 테무르를 구워삶아 이루어진 것으로 세자는 폭넒은 친교를 통해 이것이 자신을 이용한 정략적인 결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감마라는 아버지인 경왕과 막역한 사이였고 보다시리는 매우 거세고 질투심이 많은 여자였다. 게다가 이미 세자는 고려와 원나라에 이미 결혼한 여인들이 있었다. 특히 원나라에는 야속진이라는 몽골 여자를 각별히 총애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황족여인을 맞아들이는 것에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 그러나 세자는 자신이 이 혼인을 거부하면 원나라와 고려 양쪽에서의 입지가 크게 불리해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마지못해 혼인을 하게 되었다. 보다시리 역시 남편 세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세자에 대한 모든 불평사항을 아버지 감마라에게 알렸으며 경왕은 이런 경로를 통해 세자에 대한 약점을 모으기 시작했다.
- 이러한 와중인 서기 1297년 당시 대도에 있던 세자는 어머니 장목왕후의 죽음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해들었다. 병들어 죽었다고 했으나 의심스러운 소문은 삽시간에 황도를 파고들었다. 이제 아버지인 경왕과 '장'으로 이름을 바꾼 세자 왕장의 오랜 투쟁은 바야흐로 막이 오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 서기 1297년 어머니 장목왕후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제 23세의 고려 세자 왕장의 눈앞은 까마득했다.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가 죽고 이제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대칸 테무르와 역시 이미 아들로 취급 안하고 정적으로만 다루는 아버지 경왕 사이에 끼여서 그 자신이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것이었다.
- 게다가 새로 얻은 아내 보다시리 또한 내부의 적이라고 할 정도로 세자의 앞날은 위태하기 짝이 없었다. 고려에도 부인들이 있었으나 실질적인 도움은 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고려로 돌아갔다가는 명색이 아비인 경왕에게 어떠한 곤욕을 당할 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 세자는 이럴때일수록 정신을 번쩍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선 경왕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극비리에 마련해둔 몽골 황족들의 인맥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여기에는 몽골 최고의 장군 바얀, 후일 카이산칸이 되는 카이산, 그리고 다라칸 등의 인물들이 역시 테무르대칸 몰래 쿠빌라이의 외손자인 왕장을 돕고 있었다.
- 바얀과 카이산은 몽골 제국의 최대의 반란이었던 카이두의 난을 평정한 공이 있어 테무르칸이라도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제국의 거물들이었다. 특히 카이산은 테무르칸의 조카로 아직 소년에 불과했지만 뛰어난 용맹과 지략의 소유자였다. 카이산은 대도에 있는 이지르부카 왕장과 자주 만나며 세자의 딱한 처지를 동정했다.
- 세자는 자신의 정적들의 눈과 귀를 피해 역으로 고려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자주 카이산과 회동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둘다 변장을 해 장차 자신들의 포부를 천명하며 울분을 달랬다. 카이산은 삼촌뻘인 세자에게 깎듯이 예를 다했다.
"저의 작은아버지 대칸은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내심 저를 매우 두려워하고 계십니다. 제가 비록 카이두의 반란을 진압한 공이 있다하나 오히려 그것이 더욱 테무르 대칸을 두렵게 하는 모양입니다. 삼촌께서도 역시 부왕의 의심을 받고 게다가 모후께서도 돌아가셨으니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세자는 고려의 술을 들이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이 세자이지 이미 아바마마에게서도 버림받은 몸이고 사방에 적이 있어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었네그려. 게다가 대칸과 아바마마는 나보고 빨리 고려로 돌아오라고 하는데 물론 빨리 어마마마의 시신을 수습하고 싶지만 자칫 개죽음을 당할 수가 있으니 이 어찌 대장부의 한이 아니겠는가?"
카이산은 분노의 표정을 띠며 진심으로 세자의 처지를 동정했다.
"삼촌의 처는 다름아닌 저의 큰아버지 감마라 진왕의 딸이 아닙니까? 혈육끼리 서로 도와야 하는 것이 할아버지 칭기스칸의 뜻이거늘...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니 이것이 어찌 진정한 인간의 세상이겠습니까? 제가 만약 장차 대칸이 된다면 이러한 것들을 모두 바로잡을 것입니다!"
- 세자는 마침내 의기투합한 카이산과 묘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세자는 카이산과 카이두 정벌 때 친분을 쌓은 바얀을 직접 만났다. 그리고 전후 사정을 설명한 다음 바얀이 어머니 장목왕후의 죽음을 규명하는 데 카이산과 더불어 대칸의 허락을 받도록 힘써줄 것을 부탁했다. 바얀의 위치로 보아 그가 강력하게 세자의 귀국을 돕는다면 아무러한 대칸도 이를 함부로 꺾지를 못하기 때문이었다.
- 바얀은 같이 생사를 함께 한 젊은 영웅 카이산의 부탁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함께 입궐해 대칸을 만났다.
"대칸, 쿠빌라이 대칸의 따님이신 장목왕후가 고려에서 급사했다고 하는데 일단 그 진위를 좀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미 경왕과 한통속이었던 테무르칸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아 그거야 나의 이모부이신 경왕께서 다 알아서 처리할 것을 뭐 그리 호들갑이시요?"
"정황이 하도 수상하여 드리는 말씀이고 또 고려의 세자가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하여 만일의 조치를 취하기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테무르칸은 화를 버럭 내며 소리쳤다.
"도대체 자기의 아비를 그렇게도 못 믿는 이지르 부카는 과연 어떠한 위인이라는 말이요? 이미 큰아버지 감마라의 딸과 정혼했으면 그만하면 황족 대우를 받고도 남음인데 뭘 그리 못 미더워 나를 이렇게 짜증나게 하는 것이요?"
그러자 카이산이 날카로운 눈으로 대칸을 쏘아보며 한마디했다.
"장목왕후의 아드님이신 세자께서 의혹을 제기하시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 우리 원나라와 고려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대한 문제이오니 대칸께서는 가벼이 넘기지 마옵소서."
- 가뜩이나 장차 정치적 라이벌로 의식한 카이산이 정면승부를 걸며 도전해오자 테무르 대칸은 자신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게다가 암묵적으로 카이산의 발언에 동조하듯 바얀 또한 대칸을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바얀 때문이라도 대칸은 경솔하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좋소. 일단 고려의 세자를 들라하시오. 단, 그대들은 빠지고 세자만 오게 하란 말이오. 독대를 하겠소."
- 다음날 세자는 황궁으로 들어가 대칸을 만났다. 세자를 보자 대칸은 다짜고짜 물었다.
"만약 이번에 고려로 들어가 그대의 모후의 죽음이 주변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어찌 하겠는가? 그대로 인해 어제 짐의 심기가 매우 불편했으니 말이다."
- 세자는 자신을 노려보며 비웃는 대칸의 의중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떻게 하든 자신을 엮어 골칫거리를 제거코자 하는 대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자는 생각해둔 것이 있는 듯 명쾌하게 대답했다.
"함부로 아비를 의심한 죄, 그리고 국왕을 불경하게 한 죄. 마땅히 아바마마의 처분에 맡기겠나이다."
"흐흠, 그래?"
- 대칸은 경왕이 세자를 고려에서 만나면 십중팔구 제거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들은 바가 있었다. 또한 자신의 위협이 되고 있는 카이산과 절친한 세자를 제거한다면 자신에게도 하등 손해볼 것이 없는 장사였던 것이다.
- 이윽고 대칸은 그동안 세자가 대도에서 양성한 고려인 용사들과 카이산의 군사까지 대동하고 고려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물론 여기에는 카이산 자신도 세자를 보위한다는 명분으로 같이 고려로 향했다.
- 대칸은 이참에 카이산 마저도 고려에서 불귀의 객으로 만들기 위해 비밀지령을 고려의 경왕에게 전하기에 이른다. 과연 세자는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의 비밀을 풀고 도사리는 음모를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오직 하늘만이 알 뿐이었다. 어쨌든 고려세자 왕장의 험난한 여정은 호랑이굴인 고려로 향하고 있었다.
- 고려의 세자 왕장이 황족인 카이산 등 몽골과 고려의 용사들을 대동하고 귀국한다는 소식을 들은 고려의 경왕은 이때야말로 장차 후환인 자신의 아들과 테무르칸의 사주를 받아 카이산 마저 한꺼번에 없앨 묘안을 이미 오래전부터 마련해두고 있었다. 이는 정상인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처사였지만 자신의 왕위와 관련된 일인 이상 경왕은 천륜을 아예 지워버린지 오래였다.
- 다만 테무르칸이 보낸 밀지에서도 그랬듯이 세자 왕장을 섣불리 죽여버린다면 원나라의 황족 일부도 크게 반발할 것이기 때문에 은밀히 없애야만 했고 이는 카이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단 경왕이 생각해낸 것은 일찌기 몽골과 고려의 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몽골사신 저고여 살해사건을 흉내내 세자 일행이 고려의 국경을 넘어오기 전에 고려인들을 여진족으로 위장시켜 그들을 제거하려 했다.
- 겉으로는 여진족의 도적 떼로 위장해 세자 일행을 제거하려 했으나 이는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갔다. 우선 경왕은 세자를 호위하고 있던 카이산의 실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 몽골제국을 누비며 천하의 무예 실력을 뽐내던 카이산의 신출귀몰한 칼솜씨와 활 솜씨 아래 경왕의 애첩인 무비가 뽑았다던 고려 최정예 암살단들의 목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던 것이다.
- 첫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경왕은 서경(평양)에 도착한 세자 일행에게 미인들을 붙여 몰래 독살하려 했다. 서경에서 뜻밖의 환대를 받은 세자 일행은 당연히 이를 의심 했지만 서경의 태수가 먼저 술을 먼저 마시는 것을 보고 따라 마시기에 이르렀다.
-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술에는 얼음이 있었는데 태수가 마실 때는 얼음이 녹지 않아 독이 스며들지 않았으나 막상 세자와 카이산이 마실 즈음에는 얼음이 녹아 이들은 그만 맹독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이들은 데리고 온 수하들이 업고 산중으로 달아나 가까스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수하들 중에는 이 같은 위험을 염두에 두고 해독전문의 명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정해진 경로로 가면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자 일행은 위장을 하고 낮에는 숨어서 자고 밤에만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왕도인 개경에 다다랐다. 세자 일행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경왕은 대노하며 군사를 풀어 보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세자 일행은 일단 개경 밖에 있는 세자의 고려인 장인 평양군 조인규의 별장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조인규는 세자의 아내 조비의 아버지였다.
- 다음 날, 왕궁에 입궐한 조인규는 경왕에게 세자가 자신의 처소에 있음을 알렸다. 이미 세자가 도착한 사실이 기정 사실화 되자 아무러한 경왕도 더 이상 세자를 비밀리에 제거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었지만 일단 세자가 모후인 장목왕후의 문상을 가는 것을 허락했다.
- 세자는 문상을 위해 왕궁으로 입궁했지만 이미 경왕의 주위에는 궁인 무비를 비롯해 온통 세자를 음해하려는 세력들로 포진되어 있었다. 세자는 일단 부왕인 경왕에게 인사를 올렸으나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 경왕의 냉대였다.
"불효막심한 놈. 어미가 죽었으면 한걸음에 달려와야지 두 달이나 끌다가 마지못해 오다니... 네가 정녕 그러고도 세자더냐? 오기 싫어서 억지로 온 것이 아니더냐? 네 어미가 지하에서 이런 꼴을 보면 얼마나 노여워하시겠느냐?"
그러자 주위에서 세자를 향한 조소와 야유가 쏟아졌다. 세자는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돌아서 나갔다. 그러자 무비의 가시돋 친 한마디가 세자의 등 뒤에 꼬쳤다.
"허기야 몽골인의 피가 반이나 들어있으니 모전 자전이겠지요...호호호."
세자는 당장 무비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갈기갈기 찢여죽이고 싶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 처소로 돌아온 세자는 장목 왕후의 죽음에 대해 주변 인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선 왕후를 모시던 시녀들을 추궁해 죽음 당시 상황을 물어봤으나 모두 자연사했다는 답변만을 앵무새처럼 했다. 주변 인물들을 탐문해 봐도 돌아오는 것은 모르겠다거나 그냥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하나마나한 대답이었다. 경왕과 무비의 입단속은 그만큼 철저하고 집요했다.
- 그러나 아직도 왠지 왕후의 죽음이 석연치 않았던 세자는 대담하게도 의심이 가는 무비의 처소로 잠입해 비밀 서찰들을 훔쳐 오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당시 고려의 최고 권력을 가지고 있던 무비의 처소는 수백 명의 호위 무사들이 24시간 철통같은 경호를 하고 있었다.
- 세자는 카이산과 머리를 맞대고 숙의를 한 끝에 무비의 처소에 불을 지르고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사람을 들여보내 중요 서찰을 빼앗아 온다는 방법을 생각 해 내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계획은 세자가 왕궁의 눈을 의식해 일체 말로써가 아닌 카이산과 몽골어로 필담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 그러나 발상은 좋았으나 막상 이를 실행할 사람이 마땅하지가 않았다. 고려사람은 일단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세자가 데리고 온 일행 중 누군가가 이를 실천에 옮겨야만 했지만 그 누구도 자원해서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에 카이산 자신이 나서겠다고 했으나 모인 일행 중에 천천히 일어나는 한 여인이 있었다.
"세자마마 신첩이 한번 나서보겠나이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는데 그녀는 다름 아닌 세자가 대도에서 얻은 애첩 야속진이었다.
- 야속진은 몽골인으로 세자가 일찌기 대도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을 때 날렵한 무사로 처음 만난 여인이었다. 특히 자객으로 비밀임무를 수행하는데 능해 세자가 그를 총애하다가 이윽고 눈이 맞아 세자의 여인이 된 것이었다.
"야속진..."
- 세자는 자신의 애첩인 야속진에게 그 위험천만한 임무를 맡기는 것을 당연히 내심 반대했으나 이미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른 대안이 없었다.
"세자마마, 신첩의 몸은 곧 마마의 것이옵니다. 세자마마가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해 아낌없이 바칠 것이오니 심려마시옵소서. 이 야속진이 언제 안되는 일에 나선 적이 있사옵니까?"
-야속진의 어조는 단호했다. 사랑하는 이를 이용해 아버지의 애첩을 친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세자는 한없는 비애를 느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세자는 이미 어미의 원수를 갚는 것 이상의 더 큰 목표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경왕의 애첩 무비의 처소에 잠입해 불을 지르려던 계획은 카이산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 했으나 카이산 자신이 장차 대원제국의 유력한 후계자였고 귀한 몸이시기 때문에 여차 무슨 화를 당할 수도 있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유력한 후보로 바로 세자 자신의 애첩이던 야속진이 나서게 된 것이었다.
- 이튿날 밤, 야속진은 일단의 용사들을 거느리고 무비의 거처로 향했다. 무비의 거처는 다름 아닌 궁궐 안이었으나 특히 많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그녀였기에 경비는 특별히 궁궐 다른 어느 곳보다도 삼엄했다.
- 일단 야속진은 양동작전을 써서 무비의 처소 근처에서 수하들을 시켜 칼싸움을 벌이게 하였다. 처소 바로 지척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무비의 경비군들도 소수정예만 남긴 다음에 그쪽으로 몰려가 싸움에 가담했다.
- 그틈을 노리고 야속진은 복면을 한채 불씨를 살려 지체 없이 무비의 처소로 불을 던졌다. 불은 삽시간에 처소를 에워쌌고 경비병들이 불길을 쳐다보며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야속진 이하 용사들은 그들을 손쉽게 처단할 수 있었다.
- 그러나 다른 곳에 있던 궁궐 견룡들까지 우르르 몰려오기 전에 모든 것은 전광석화처럼 빨리 처리되어야 했다. 그래서 불길이 처소 안으로 더 번지기 전에 야속진은 재빨리 무비의 침전 안으로 잠입했다.
- 시녀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일어난 무비는 재빨리 뒷문으로 도망친 지 오래였다. 이미 무비를 모시던 시녀 중 한 명을 매수해두었던 세자는 침전의 구조를 야속진에게 건네주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무비가 머물던 침소에 들어가 중요서류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짧은 와중에도 화마는 인정사정없이 퍼져 처소를 삼키고 있었다.
- 야속진이 불길을 가까스로 뚫고 나왔을 때 이미 궁궐 안은 발칵 뒤집어져 있었다. 용사들은 이미 수백의 견룡군들에게 둘러싸여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야속진도 이들과 합류해 싸우려 했으나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용사들의 만류로 하는 수 없이 사지를 간신히 벗어 나는데 성공했다. 대신 용사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밤 사이 무비의 처소에 자객들이 침입해 불을 지르고 처소가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경왕은 대노하여 즉시 범인을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분노에 치를 떨던 무비의 강압으로 왕은 전 대신들을 모두 불러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무비도 경왕과 나란히 자리를 같이 했다.
- 한참 대책이 논의되던 중, 갑자기 세자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가 웅성되며 이를모를 긴장감이 조성되자 세자는 한마디로 좌중을 제압했다.
"누가 어마마마를 시해했는지 알아냈습니다."
- 경왕과 무비는 일순간 섬찟했으나 평정을 되찾았다. 경왕은 시치미를 떼고 누구냐고 묻자 세자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바로 무비와 그 일당들입니다."
"뭐라고?"
무비는 외마디 비명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경왕도 당황하며 진정하라고 만류했으나 무비는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전하, 세자가 드디어 미쳤나봅니다. 전하께 온 충성을 다 하는 소첩을 모함하다니요...?"
- 그러자 세자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일단의 서찰을 꺼내들었다.
"이 서찰들에는 무비가 어마마마를 독살시키기 위한 일단의 음모들이 적혀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비의 필적입니다. 이 서찰들이면 무비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 그러자 무비를 추종하던 대신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크게 웃었다. 경비가 삼엄했던 무비의 처소를 어떻게 세자가 뚫고서 들어갔다는 말인가? 경왕과 무비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자, 도대체 넌 어떤 근거로 무비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거냐? 그 서찰이 무비의 것이라는 무슨 증좌라도 있느냐?"
- 그도 그럴것이 무비를 비롯해 그 누구도 야속진이 불길을 뚫고 들어가 그 짧은 시간에 무비의 극비서류들을 손안에 넣었으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비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 서류들이 불에 전부 타 버려 자신의 증거들이 깡그리 없어진 것이 잘된 일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어이없음은 그 누구보다도 더했다.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권신들의 모든 서류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경위야 어찌되었던 간에 이 서류의 필적이 무비라는 것이 확인된다면 무비는 죽음으로써 그 죄를 갚아야 할 것입니다."
"호호호...세자의 장난이 정말 도가 지나치군요. 만약 세자의 장난이 거짓이라면 뭘로 그 죄값을 치룰 건가요?"
"이미 원나라의 대칸 앞에서 맹세했듯이 모든 것은 아바마마이신 전하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흠...그 말에 한치의 거짓이 없으렸다...?"
- 그러자 아버지 경왕의 눈빛에는 돌연 살기가 돌았다. 이런 모습을 세자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비탄한 심정으로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좋다. 그렇다면 그 서찰들을 대도에 보내 그 진위를 확인해보자."
"이미 보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사본에 불과합니다. 진본은 소자 휘하의 용사들이 이미 대도로 가지고 갔습니다. 이미 대칸에게도 소식이 갔기 때문에 아무리 늦어도 3일 안으로 회신이 올 것입니다."
- 세자의 수하들에 의해 신속히 대도로 전달된 무비의 서찰들은 테무르칸과 세자를 옹호하는 대신들의 입회하에 공식적으로 감정을 받았고 그 결과는 무비의 진본임이 확인되었다. 이 서찰들이 먼저 바얀과 다란칸 등 세자파들에 전해졌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된 것이였지, 만약 테무르칸에게 먼저 전달되었더라면 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위조해 그 죄를 세자와 카이산에게 뒤집어씌웠을 것이다.
- 결과가 무비의 것임이 드러나자 이는 원나라 조정에 일대 파란을 몰고왔다. 감히 속국의 일개 애첩이 쿠빌라이칸의 딸을 죽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바얀과 다란칸은 거세게 칸에게 항의했고 아무러한 테무르칸도 이러한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테무르칸은 분함을 감출 수 없었으나 먼저 원나라 대칸으로서의 기본임무를 실행해야 했다.
- 즉시 이번에는 바얀을 비롯해 몽골의 정식 사신이 고려 조정에 파견되었다. 이 모든 것이 세자가 약속한 3일 이내에 이루어졌다. 고려에 파견되었던 모든 다루가치들을 대동한 바얀은 세자와 카이산을 대동하고 일단 무비의 일당들을 모두 색출해 포승줄에 묶어 경왕 앞으로 데려왔다.
"대칸의 황명으로 대원제국의 황족이자 고려의 왕후를 시해한 천하의 악당들을 잡아 처단하려 합니다. 왕께서는 나서지 마시오."
- 바얀의 이 한마디에 고려의 조정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한 경왕은 그저 사색이 된 체 얼어붙어 있었다. 귀신에 홀린 듯 얼이 빠져버린 무비는 갑자기 발악을 하며 경왕에게 애원했다.
"마마,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이건 모함입니다. 왜 이리 침묵하시나이까? 전하의 명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옵니까? 이제와서 이러시면 소첩보고 그냥 죽으라는 것이옵니까? 너무나 원통하옵니다. 살려주시어여 전하, 전하...!"
- 그러자 바얀의 발길질이 사정없이 무비의 안면을 강타했다. 무비가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혼절하자 바얀은 싸늘하게 경왕을 노려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왕에 대한 처분은 이후에 대칸께서 다시 내리실 것이니 그동안 근신하고 있으시요."
- 이리하여 무비를 비롯해 그 일당이었던 환관 도성기, 최세연, 전숙, 방종저, 중랑장 김근 등이 시해혐의로 처형되기에 이르고 그 도당 40여명을 귀양에 처해졌다. 무비의 일당들은 바로 경왕 자신의 지지기반이기도 했기 때문에 경왕 자신의 타격도 엄청났다. 세자는 마침내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내고 어미의 원수를 갚게 된 것이었다.
- 고려 경왕(충렬왕)의 지지기반이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 암살사건으로 인해 순식간에 붕괴되자 경왕은 싫든 좋든 은신하며 이를 갈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더구나 자신이 총애하던 애첩 무비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친아들에 의해 살해되자 이미 천륜을 사실상 끊은지 오래되었지만 세자에 대한 원한은 이제 뼈에 사무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이제는 누가 보더라도 더 이상 부자지간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 무엇보다도 기가막힌 것은 고려 조정의 대신들이었다. 무비 일당의 일망타진전까지만 해도 경왕 이하 무비의 일당들에게 온갖 아첨과 아양을 떨던 이들이었지만 눈앞에서 대세가 순식간에 역전되자 언제 그랬냐는듯이 경왕을 냉대하며 순식간에 뒷방 늙은이 취급을 했다. 유유상종이라고 경왕과 무비 일당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치모리배들만 거둔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고립무원의 신세가 된 경왕은 바얀 등에 의해 사실상 궁궐에 연금상태가 되어 테무르칸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던 것이다.
- 모후인 장목왕후의 죽음에 대한 원한을 푼 세자는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미 모든 날개가 잘린 아버지 경왕이었지만 자신의 세력이 전무했던 고려에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 위험천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산의 생각은 달랐다.
"형님, 이참에 아예 형님이 경왕을 갈아치우고 고려의 새 왕이 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형님이 고려왕이 되면 장차 저한테도 든든한 기반이 될터이고 제가 제위에 오르면 다시 형님을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이니 서로에게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세자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은 때와 절차가 있는 법이다. 이미 아버지인 경왕은 나를 철천지 원수로 대하고 있어 내가 고려에 남아 있는다면 무슨 화를 당할 지 그건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건 이미 우리가 고려로 오는 길에 겪은 바가 있지 않더냐? 더군다나 내가 빨리 고려의 왕위를 차지하면 세상에서는 나를 보고 아버지를 쫒아내고 왕이 된 천하의 패륜아라 손가락질할 것이다. 이미 고려는 유교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속사정이 어떻든 일단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만 보고 쉽게 나를 매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단 대도로 돌아가 모든 절차를 밟아 당당하게 고려의 왕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이제 허울뿐인 경왕에 비해 테무르칸은 엄연히 대칸입니다. 오히려 대도로 가는 것이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나에게 대도는 고려보다 더 친숙한 곳이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있다. 테무르칸이 또 무슨 수작질을 부릴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돌아가서 원나라의 큰 힘을 이용해 고려왕이 되는 것이 상책이다."
이렇게 해서 세자는 카이산과 함께 대도로 돌아왔다. 고려에서 대도로 가는 긴 여정의 어느날 밤, 세자는 야속진과 은밀히 밀회를 즐긴다.
"야속진...그대가 몸을 던져 악당들의 음모를 파헤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요. 그대는 나에게 모든 것이오. "
"세자 전하...당연히 신첩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옵니다. 그런 말씀은 저를 몸둘 바를 못하게 합니다."
"하하 여전사인 그대한테 이런 여인의 풍모를 보니 한껏 더욱 그대가 사랑스럽구려. 나는 고려에도 부인들이 많지만 그대야말로 나의 진정한 아내요."
"세자님의 어머니 일에서도 보셨듯이 너무 한쪽만 편애하면 반드시 큰 사단이 나게 되어있사옵니다. 부디 경계하옵소서."
"으음...보다시리 말이요? 비록 권세가인 진왕 감마라의 딸이라 자의반타의반으로 혼인했지만 여자가 너무 기가 사나워 나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소."
"그래도 앞으로 세자마마의 앞날에 큰 도움이 될 부인이시오니 지혜롭게 대처하옵소서."
"그대의 현명함 또한 그대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드는구려. 이리 오시오..."
그들은 대도에 도착할 때까지 연인으로서의 운우의 정을 마음껏 나누었다.
자신의 계획이 보기좋게 수포로 돌아가자 테무르칸 역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려의 경왕은 확실히 몰락했지만 테무르칸 자신의 위신도 상당히 구겨진 셈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권위가 깎인다는 것은 대원제국의 대칸으로서 치명적이었다. 또한 바얀과 다란칸 등의 세력가들이 카이산을 중심으로 세를 결집하게 되어 결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쿠빌라이칸의 딸을 죽인 것은 무비 일당이었으나 경왕이 연관되지 않았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었기에 그에 대한 조치도 빨리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왕의 무죄 여부에 대한 토를 다는 것은 아무러한 대칸이라해도 쿠빌라이칸에 대한 신성모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테무르칸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반대파에게 모든 것을 순순히 내어주기도 뭣해 테무르칸은 이런 말들을 했다.
"경왕이 악당들과 연관되었다는 점은 분명하기에 그 자를 그냥 고려의 왕위에 놔둘수는 없다는 것은 짐도 잘 알고 있소. 허나 매사는 시기를 잘 타야하는 법이요. 그래도 경왕은 명색이 왕인데 성급하게 끌어내리면 고려의 반발을 살 수도 있으니 좀 더 신중하게 이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오. 일단 경왕을 대도로 불러 소명의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떻겠소?"
- 그러나 테무르칸의 이런 제안은 이미 격앙된 원나라 조정을 설득하기에는 태부족이었다. 바얀이 이 분위기를 대신해 말을 전했다.
"대칸. 지금 쿠빌라이의 영령이 하늘에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대칸의 할아버지인 쿠빌라이칸 말입니다. 대칸께서도 고모가 되시는 고려왕후가 악당들에게 암살당해서 이제야 우리는 원한을 풀고 하늘에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지금 고려왕이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이라 할 수도 있는데 이 이상 시간 끌것이 뭐가 있습니까? 고려의 민심요? 고려왕은 이미 인심을 잃은지 오래입니다. 지난날 고려왕이 저지른 그 수많은 어리석음을 대칸께서는 진정 못 들으신 겁니까? 더구나 설사 일부의 반발이 있다해도 우리에게는 쿠빌라이칸의 위대한 피를 이어받은 이지부르카 세자마마가 계십니다. 경왕의 핏줄이기도 하구요.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장 고려왕의 폐위조서를 내리십시오."
- 테무르칸 입장에서는 바얀의 직설적인 언사 못지 않게 세자가 고려왕이 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못마땅했으나 이제 와서 별다른 도리는 없었다. 이 모든 대세를 부정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테무르칸은 속으로 분을 삭이며 마지못해 당장 경왕의 폐위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따로 사람을 고려로 보내 경왕으로 하여금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모양새가 좋고 대도로 와서 같이 후일을 도모해보자는 밀지를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경왕 역시 이를 악물로 대칸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로서 1298년 정월 경왕은 태상왕으로 물러남으로써 왕위에서 물러나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충선왕'이다, 이제 단순히 고려왕이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한 그의 활약이 막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 1298년 정월, 아버지 경왕을 태상왕으로 물러나게 하고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선왕(충선왕)은 즉위교서에 30여개에 달하는 개혁안을 선포해 고려를 새롭게 바꾸려는 의지를 강력히 표명했다. 아버지 경왕이 즉위했던 25여년 동안 나라가 아주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선왕은 어렸을때부터 고려가 심각하게 망해가고 있었다는 느낌을 강력히 받았었고 어머니 제국대장공주 역시 이제 자신의 나라이기도 했던 고려에 대한 걱정이 심해 자주 경왕에게 간언했지만 그때마다 심각한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대륙을 향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일단 이제 자신의 나라가 된 고려를 일신해야만 했다. 이런 선왕의 개혁의지와 실행은 그간 경왕의 무능한 통치에 지쳐있던 고려 신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고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 이런 선왕의 일련의 개혁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대도에서 선왕과 같이 귀국한 계국대장공주 보다시리가 새로운 불씨로 피어오르게 된다. 보다시리는 매우 거칠고 사나운 성격의 여인으로, 선왕이 대도에 머물렀을때 자신의 신변안전 차원에서 정략적으로 결혼한 상대였다. 진왕 감마라의 딸이었기 때문에 이 혼인을 통해 선왕은 원 왕실의 부마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왕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대칸 테무르도 함부로 선왕을 건드리지 못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당시 진왕 감마라의 위세가 막강했기 때문이다.
- 보다시리 또한 선왕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일단 자신에게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배필 자체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외가 소원하게 되자 자연 둘 사이에 소생이 있었을 리가 없었다. 선왕은 자신과 야속진 사이에 관계는 극비리에 부쳐 보다시리가 아직 이를 눈치채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려로 오자 공식적으로 세자빈으로 있던 조비를 가장 먼저 핍박하기 시작했다.
- 조비는 조인규의 딸로 선왕이 어미의 죽음을 파헤치러 개경으로 향할 때도 많은 도움을 줬던 가문의 여식이었다. 선왕 또한 야속진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조비에 대해 겉으로 엄청난 애정을 쏟았는데 이것이 계국공주의 눈에 딱 걸린 것이었다. 자신 또한 선왕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다른 여자와의 사랑도 용납할 수 없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계국공주는 자신 가문의 배경을 내세워 선왕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마, 아직도 조비가 세자빈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랍니까?"
"그대와 혼인하기 전부터 이미 세자빈으로 책봉된 현숙한 여인이요.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이오?"
"당장 조비를 폐위하시고 제가 당연히 고려의 정식 왕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다시리, 그대가 고려의 풍습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여기 고려에는 왕비 책봉에 대한 나름 절차와 예법이 있다오. 그런 과정을 거쳐 그대를 고려의 정식 왕후로 책봉할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제가 고려의 왕후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하지만 지금 제가 요구하는 것은 당장 조비를 사가로 내보내 처분을 기다리라는 것이옵니다. 조비가 저와 한 지붕에서 마주치는 꼴은 싫습니다."
이렇게까지 나오자 아무러한 선왕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대는 이제 고려의 왕후가 될 몸인데 어찌 이리 무례하단 말이오? 경솔히 행동하지 마시오."
"지금 전하는 누구 덕분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나요?"
어느덧 공주의 눈에는 시뻘건 핏발이 솟구쳤다. 선왕은 속으로 오한을 느꼈다.
"전하가 대도에서 대칸의 눈밖에 나 매일매일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을때 누가 전하를 보호해주었습니까? 바로 저의 아비인 진왕감마라칸이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의 이 간단한 요구마저 무시하실 참인가요? 그런 천한 고려의 여자 하나 곧바로 처리하지 못할 정도가 전하의 그릇입니까?"
"닥치시오!" 선왕은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나 또한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이거늘...엄밀히 따지면 대원제국에서 서열은 내가 그대보다 까마득히 높다는 말이오. 게다가 이제 고려의 왕인 나에게 어찌 그런 말을...이번에는 철없는 것으로 치고 불문에 부치지만 다음번에 또다시 이런 막말을 하면 내 그때는 가만있지 않겠소!"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선왕을 향해 공주는 다시한번 무서운 눈길을 쏘아붙였다.
-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었지만 사실상 유폐 상태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경왕에게도 이러한 왕과 공주의 불화소식은 들렸다. 자나깨나 테무르칸의 소환명령을 기다리던 경왕은 선왕이 자신도 쥐도새도 모르게 죽일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공주와 왕의 잦은 다툼 소식을 듣자 경왕은 속으로 뜻밖의 원군을 얻었다며 쾌재를 부르고 이 상황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하던 공주는 원나라에서 지내던대로 자주 사냥을 나가는 것을 유일한 삶의 낙으로 삼았다. 무엇이든지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곁에 있던 시녀들을 개패듯이 패는 것은 애교로 심지어 칼을 뽑아들어 시녀들을 죽이는 것을 즐길정도로 공주의 성품은 잔학무도했다. 경왕은 이런 정보를 얻자 어떻게하든 공주와 접촉해 만남을 가질 시도를 하고자 했다. 유폐되어 있던 경왕은 몰래 지니고 있던 재물을 풀어 자신을 지키던 경비병들을 매수하는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그리고 경비대장을 통해 공주의 시녀와 접선하는데도 성공했다. 시녀가 공주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이미 왕과 상왕의 관계를 알고있던 공주는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상왕이 시아버지로서 조비를 빨리 몰아낼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귀띔하자 왕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오르던 공주는 한번 만나보기로 했다. 비밀장소에서 공주와 경왕은 드디어 만났다.
"아버님..."
말은 이렇게 했지만 표정은 그야말로 거만의 극치였다. 경왕은 속으로 새파랗게 어린 년이 60이 넘은 자신을 무슨 쓰레기 취급하듯이 기분나쁘게 보자 온갖 열불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때가 아니었다.
"오냐 아가야...드디어 처음 얼굴을 보는구나.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지..."
경왕은 일부러 초췌한 표정으로 공주의 동정심을 사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눈물을 보이기까지 하자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그녀라도 경왕이 어떤 위인인가는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아들이 왕이 되어 나를 한번도 만나주지 않는구나. 그런데 그녀석 변발은 하고 있더냐?"
그러자 공주는 문득 왕이 변발을 하지 않은것을 새삼 깨달았다. 엄밀히 말하면 머리모양을 애매하게 해 변발같기도 했고 그동안 관을 쓰고 있어 그 모습을 잘 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주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던 경왕은 이윽고 말을 이었다.
"난 왕이 되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변발을 한 것이었다. 그건 대원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상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의 원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 이런 내가 감히 나의 왕후이자 쿠빌라이의 성스러운 소생을 사주해 죽였다는 것이 말이 되냐말이다. 이 모든 것은 무고란다."
"그런데 저를 보자 한 것은 그것때문이 아닐텐데요?"
공주가 냉정하게 쏘아붙이자 경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이 상관이 있다. 내가 이지부르카였다면 고려왕이 되어서 가장 먼저 너를 왕후에 봉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이 머뭇거리는 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네가 바로 대원제국을 상징하는 것인데 너를 무시하는 것은 곧 대원제국을 무시하는 거란 말이다. 대원제국에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고려왕으로서 이는 반역이 아니겠느냐?"
(이 인간이 정말...)
아무리 왕이 밉지만 명색이 아비라는 자가 아들을 모함하는 꼴은 공주라 해도 차마 더 이상 듣기가 역겨웠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지금 왕도 상왕을 밀어내고 자기가 왕이 된 셈이 아니던가? 공주의 셈법은 복잡해졌다.
"거래를 하자꾸나."
"뭐라고요?"
"이미 너와 왕은 잘못된 만남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내 자식이지만 명색이 쿠빌라이칸의 외손자라는 녀석이 대놓고 원나라를 무시하는 꼴은 나로서도 차마 더 이상 참기 힘들다. 그러나 지금 나는 힘이 없다. 네가 날 도와준다면 조비를 당장 몰아내고 너에게 새로운 삶도 찾아줄 것이다. 이건 내가 너의 시아버지로서 며느리에게 베푸는 온정이라는 점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공주는 며느리 어쩌구 하는 것은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겠지만 조비를 쫒아내는 방책만은 궁금했다.
"그럼 아버님이 무슨 묘안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 정답은 이미 내가 한 말 안에 있다."
상왕은 그제서야 무서운 눈빛을 하고 공주를 쳐다봤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은 공주는 그마저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이렇듯 신왕에 대한 음모는 그 모양을 갖추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 겉으로 선왕이 총애하는 조비를 몰아내고자 하는데 일단 의기투합한 공주와 상왕은 즉각 음모를 꾸미기에 몰두했다. 물론 공주의 일차 목적은 조비를 빨리 쫒아내고 자신이 고려의 정식 황후가 되는 것이지만 상왕은 선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복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이와 관련해 공주는 상왕이 자신에게 한 말 중 다음을 그냥 흘려들었던 것이다.
"너에게 새로운 삶도 찾아줄 것이다."
- 완전히 손발이 묶여있었던 상왕은 일단 공주를 통해 풍비박산난 자신의 세력을 다시 모으는데 열중했다. 이들은 선왕에 의해 대대적으로 숙청되었거나 이해관계에 따라 완전히 상왕을 버린 이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상왕 입장에서는 일단 세를 불리는 차원에서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끌어모았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복위하면 자신을 버린 자들은 남김없이 처치해버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 상왕은 계국공주를 통해 대도의 테무르 대칸에게도 다시 접선해 선왕을 몰아낼 음모를 다시 꾸미기 시작했다. 이미 공주의 아버지 진왕 감마라칸은 고려의 딸에게 이야기를 다 들어 마음이 선왕에게서 많이 떠나있었던 정도도 아니고 자신의 딸을 푸대접하는 선왕에게 적개심마저 품게 되었다. 자연 그동안 한배를 타고 있던 카이산과 바얀 등과도 척을 지게 되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대칸은 진왕 감마라칸을 자신에게 끌어들여 반대 정적들을 더욱 열심히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카이산을 위시한 바얀과 다란칸 등의 대칸 반대파들은 이와 같은 사태에 크게 당혹감을 느꼈다. 감마라칸이 자신들의 편에 있음으로써 대칸을 강력하게 견제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 버팀목이 빠져나가니 자신들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됨과 동시에 고려의 선왕에 대한 보호막마저 엄청 쇠약해졌기 떄문이다.
- 자신의 측근들을 재결합한 상왕은 비밀리에 조비와 조인규를 모함할 구실을 찾기 시작했고 이를 빌미로 선왕 또한 왕위에서 내몰 음모를 한꺼번에 꾸미기 시작했다. 이윽고 상왕의 지시대로 공주는 위구르어로 선왕이 고려로 돌아오자 자신을 갑자기 박대하기 시작했으며 대원제국과의 일체감의 상징인 변발도 소홀히하고 옷도 고려식으로 입고 모든 것을 원나라 이전 고려의 것으로 바꾸려 한다고 썼다. 또한 고려인인 조비만을 총애해 그 어미가 자신을 저주하는 굿을 밤낮으로 올려 자신의 건강도 많이 나빠졌다고까지 썼다. 게다가 선왕이 장인인 조인규를 사주해 비밀리에 군사를 기르고 고려의 다루가치와 친원파들을 남김없이 죽이려한다는 무고까지 낱낱이 써서 대도의 왕태후에게 보냈다. 겉으로는 왕태후에게 하소연하는 형태였지만 사실상 고려의 선왕을 무고하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실제로 공주가 쓴 내용은 조비 가족에 한정된 것이었으나 상왕이 이를 몰래 가로채 그밖의 내용을 왕창 추가했던 것이다. 이렇게 공주는 상왕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그래도 명색이 대원제국의 황실 일원이자 고려의 정식황후가 될 몸이 자신의 지아비를 참소하는 서신을 보낸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형식을 취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이 모든 것은 상왕과 대칸의 사전조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서신 자체도 곧바로 대칸 테무르에게 전달되었다. 테무르칸은 왕태후에게 받았다며 이 서신을 조정에 대대적으로 공개했고 그 파문은 엄청났다. 일찌기 자신의 어머니이자 쿠빌라이칸의 딸인 장목왕후의 억울함을 풀겠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고려로 가서 자신의 친부인 상왕을 끌어내릴 정도로 열심이었던 선왕이 이제 자신이 왕이 되자 곧바로 반원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 대원제국의 위정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모양새이자 카이산 등 선왕파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무고입니다. 모든 정황이 앞뒤가 맞지 않지 않습니까?"
"좋소. 그럼 그 논란의 당사자들을 대도로 압송해 문책해봅시다."
대칸의 명령하에 조비를 비롯해 그 일가족이 모두 대도로 압송되었는데 특히 조인규는 대칸의 밀명하에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시키는대로만 말하면 일가족은 모두 무사할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조인규는 그만 굴복하고 허위자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공주와 상왕이 꾸민 서신에 적힌 그대로로 조인규의 거짓실토로 원나라 조정은 경악했다. 대칸은 이러한 분위기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 속전속결로 밀어붙였다.
"위대하신 쿠빌라이칸의 외손자로 푸른 늑대의 성스러운 혈통을 이어받은 고려왕 이지부르카는 선대에 씻을 수 없는 패악을 저질렀소. 그동안 이 자가 저질렀던 모든 행위는 바로 우리 대원제국의 등에 비수를 꽂기 위한 철저한 위장이었던 것이오. 그 죄로 보면은 당장 처형감이지만 쿠빌라이칸의 핏줄을 이어받았고 또 실제로 반역을 도모한 증좌는 없으므로 일단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당장 대도로 압송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감히 우리 황족공주를 능멸한 그 조비라는 여인은 처형하도록 하시오."
그러면서 테무르칸은 의기양양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이산을 비롯한 선왕파는 이 모든 것이 농간임을 속으로 알아차렸으나 지금 의문을 제기하면 자신들의 입지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대칸의 날카로운 눈매를 피해 눈을 지그시 감고 외면했다.
- 고려 상왕을 폐위한 지 불과 7개월만에 또 다시 고려의 왕을 폐위하는 대원제국의 특사가 고려의 왕도 개경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대칸의 폐위교서를 읽고 선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자신의 투기가 이렇게 엄청난 사태로 이어지자 계국공주는 마음 한 켠에 아차했지만 어차피 선왕에 대해 별다른 애정이 있지 않았던지라 그저 무덤덤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또한 선왕도 의외로 이 모든 것의 배후에 공주가 있었음을 알아차렸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공주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이리하여 새로운 고려를 만들어 자신의 대망의 발판을 구축하려던 선왕의 시도는 7개월만에 산산히 부셔졌다. 그리고 공주와 함께 이제 다시 대도로 끌려가 미지의 운명과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 아들인 선왕을 몰아내고 다시금 고려의 왕으로 복위한 상왕, 즉 경왕은 그동안 억눌렀던 울분을 마음껏 토해냈다. 선왕이 나름 고려의 앞날을 위해 취한 개혁조치들은 모두 혁파되었고 다시금 자신이 이전 왕이었을때로 환원시켰다. 선왕이 개혁한 것들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선왕이 했다는 것 자체로 앞뒤 따지지 않고 무조건 원상태로 복귀시켰던 것이다.
- 아울러 인간성이 소심하고 간악했던 경왕은 왕위에서 쫒겨났을때 자신에게 등돌린 이들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의 복위를 도왔던 이들도 가차없었다. 어차피 경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복위를 위해 이용하고 버릴 버러지같은 인간들이었다. 다만 비록 지난날 자신을 배신했더라도 그 능력이 뛰어나 한 번 쓰고 버리기 아까운 무리들도 있었다. 그런 부류들을 경왕은 일단 살려두기로 하고 훗날 진짜로 그 쓰임이 다하면 잔인하게 처형시킬 생각이었다. 이런 신하들 역시 다시금 경왕의 천하가 오리라고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일단 경왕에 적극 협조하며 나름 살길을 모색하기에 바빴다. 말하자면 서로 불안전한 협조관계를 잠정적으로 유지한 셈이었다. 그렇지 못한 과거 신하들은 모두 목이 달아났다. 그래서 수도 개경은 한동안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 경왕은 비록 폐주(선왕)가 대도로 끌려갔으나 안심할수는 없었다. 폐주가 대도에 나름 지지세력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마음대로 자객을 보내 암살하기도 용의치 않았음도 잘 알고 있었다. 폐주를 제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정치적 역량에 달려있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대도로 간자들을 보내어 폐주의 동태를 감시함과 동시에 계속적으로 계국공주와 연락을 취하며 폐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고 광분했다.
- 대도로 끌려간 폐주는 비밀리에 대칸의 비밀감옥으로 끌려갔다. 테무르 대칸의 입장에서는 이지부르카를 대도의 거리를 돌게 하며 죄인으로서 온갖 수모를 주고 싶었으나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다해도 엄연히 쿠빌라이 대칸의 혈통을 받은 이로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정통성까지 훼손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또한 그를 쥐도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모든 이들은 자신을 지목할 것이고 이는 곧 엄청난 정치적 부담이 될 것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폐주를 자신의 비밀 지하감옥으로 끌고 온 것이었다. 카이산칸을 비롯한 폐주파도 이를 알고 있었으나 어차피 폐주가 겪어야 할 고난의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폐주와 함께 대도로 온 공주는 아버지 감마라칸한테로 갔다.
- 처참한 몰골로 대역죄인처럼 사슬에 묶인 채 있는 폐주의 앞에 대칸이 실실 비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이지부르카, 난 니가 어렸을때부터 싫었어." 대칸의 첫마디였다.
"너는 항상 쿠빌라이 대칸 할아버지의 총애를 나보다 더 받았지...그래서 니가 싫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난 다짐했지. 꼭 대칸이 되어서 내가 너보나 낫다는 것을 너에게 보여주겠다고 말이야. 결국 나는 대칸이 되어서 온 세상의 지배자가 되었지. 너도 지기 싫었는지 고려의 왕이 되었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지...이게 뭘 뜻하는지 아냐? 넌 나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는거야."
마치 인생의 승리자라도 된 듯이 테무르는 만면에 승리자의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날 어떻게 할꺼냐?"
"물론 널 죽일 수는 없겠지..."
테무르는 순간 살벌한 표정을 지었다.
"또한 너에게 신체적 위해를 가할 수도 없다. 어떻게 너같은 것이 감히 대쿠빌라이칸의 성스러운 핏줄을 받아 이렇게 날 곤란하게 하는 지 모르겠다. 생각같아서는 단칼에 해치우고 싶은데 말야...하지만..."
폐주는 대칸을 똑바로 노려봤다.
"이제 네가 꿈꾸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을 하나하나 다 빼앗아 갈 참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로부터 서서히 말라죽일거다. 네가 사랑하는 것...꿈꾸는 것...너의 나라 고려...철저히 내가 알아내 하나하나 없애주마. 그래서 널 산 송장으로 만들어 나에게 죽여달라고 매달리게 만들것이라 말이다."
"너야말로 꿈꾸고 있구나. 테무르..."
그러자 대칸이 가지고 온 채찍을 사정없이 폐주에게 휘둘렀다.
"대칸이라고 불러라. 이 빌어먹을 고려종자야!"
대칸이 가지고 있던 채찍은 쇠가죽으로 된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이를 피하려한 폐주는 결국 팔꿈치에 채찍을 맞아 피가 줄줄 새어나왔다. 그러나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폐주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쿠빌라이칸이 나를 너보다 더 총애하신 거지. 대칸으로서 온 만물의 지배자로서의 그릇은 조금도 보여주지 못하고 기껏해야 옛날 사사로운 인연의 기억으로 그걸 복수하려고 날뛰는 너의 모습을 보시면 하늘의 쿠빌라이칸이 뭐라 하실까? 내가 고려의 피를 반이나 가지고 있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너와 나의 위치가 바뀌어 있을 것이다."
"뭐야? 이자식이...이자식이 입만 살아서..."
테무르는 부들부들 떨며 다시한번 채찍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폐주는 두려움없이 할말을 했다.
"딱하구나 대칸이여...그러니 너는 쿠빌라이칸의 반도 못따라가서 나 하나 마음대로 못하는 것 아니겠냐? 나 또한 하늘에 계신 쿠빌라이칸과 그리고 고려의 왕으로서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 나는 지은 죄가 없단 말이다. 지금 넌 그렇게 의기양양하지만 지금 그럴때 마음껏 즐겨라. 대칸으로서 마음껏 누릴 것을 누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하늘은 반드시 나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그건 대칸으로서의 너도 어찌할 수 없는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며 숙명이다. 네 생각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다."
테무르는 이에 대해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 채 길길이 날뛰기만 했다. 그러나 주변의 제지로 감옥을 나와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 이후 폐주는 한 달 간 지하감옥에 갇혀있었다. 고문같은 것은 당하지 않았지만 그 기간동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윽고 감옥에서 나오자 카이산을 비롯한 폐주파 일원이 나와 맞이했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공주는..."
"당연히 지 아비인 감마라칸에게 갔겠지요. 더 이상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렇군."
폐주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야속진은...?"
"제 처소에 있습니다."
"그래...하지만 이 정도로 쓰러질 나 이지부르카가 아니다. 오히려 지하감옥에서 나오니 새로 태어난 기분이야.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용기가 생겼어."
- 폐주는 막연하지만 아직도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희망이 저기 저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아득하기는 했지만...이후 폐주는 한동안 카이산 등과 함께 사냥을 다니며 다시 자신의 때를 기다리게 된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야망을 다시 구체화시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칭기스칸이 이룩한 인류 역사상 최대제국 몽골제국은 쿠빌라이칸에 이르러서는 5개의 칸국으로 나뉘어졌다. 대원제국, 차가타이칸국, 오고타이칸국, 일칸국, 그리고 킵챠크칸국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 차가타이칸국과 오고타이칸국은 제일 약체라 그 존재감이 미미했고 일칸국은 페르시아 지방, 킵차크칸국은 러시아 등 멀리 위치해있어 당시 대원제국의 관심밖이었다. 칭기스칸 생전시에도 몽골제국이 가장 염두에 두었던 지역은 중국이었기 때문에 중국을 완전히 먹어치운 대원제국이야말로 몽골제국의 중심으로 자부하기에 지나침이 없었던 것이다.
- 그러나 쿠빌라이칸이 중국을 완전히 병합하고 제국의 중심을 중국땅인 대도로 옮기자 중국화를 우려한 몽골 지도부층 일부가 쿠빌라이의 동생인 아리크부케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쿠빌라이는 남쪽의 남송과 북쪽의 몽골반란세력 양쪽을 모두 상대해야 하는 위기에 처했었다. 그래서 당시 끈질기게 몽골제국에 반항하던 고려의 태자가 스스로 자신을 찾아오자 이를 크게 반기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려-몽골의 밀월관계가 성립된 것이었고, 태자의 아들인 지금의 경왕이 스스로 변발을 하며 몽골아내를 맞아들였던 것이다.
- 비록 쿠빌라이 생전 당시에는 숨을 죽이고 있었으나 테무르칸이 즉위하자 이런 북방의 몽골반란세력은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다. 아리크부케 이후 이들 반란세력의 중심에는 카이두가 있었는데 쿠빌라이칸이 죽기만을 기다리던 그는 테무르칸이 형편없는 대칸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후 오랜 준비끝에 드디어 서기 1301년 대군을 일으켜 대도를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 그동안 자신의 대칸자리를 공고히 하는데만 급급해 반대파인 카이산을 비롯해 폐주 등을 핍박하기에 바빴던 테무르는 이런 반란군 소식정보를 오래전부터 들어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겨 무시해왔었다. 중국의 풍부한 물자와 인력을 손아귀에 쥔 그는 이런 초원의 떨거지들을 가볍게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치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오랜 기간 엄청난 각고의 노력을 들인 카이두의 대군은 그야말로 무적의 정예병들로 테무르가 보낸 대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순식간에 대도 인근까지 접근해버렸다. 득의양양한 카이두는 대도를 점령하고 중국인들을 모두 몰살시킬 것이라 장담하며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에 식겁한 테무르는 카이두군이 대도를 완전히 에워싸기 전에 탈출해 남쪽으로 천도할 뜻을 비추었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이런 궁리를 하자 대다수의 몽골 신료들은 다시 한번 대칸에게 크게 실망했다.
- 제국대장공주 일로 이 당시 대칸을 지지하고 있던 감마라칸 역시 대칸의 졸렬한 행동에 크게 실망한 이들 중 하나였다. 폐주가 고려에서 대도로 끌려온 이후 어언 3년이 지나는 동안, 공주와 폐주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감마라칸이 엄금한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폐주와 공주 양쪽이 모두 그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두의 이번 사건으로 인해 감마라칸은 다시 한번 대칸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는데, 카이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감마라칸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여 힘을 회복할 궁리를 하게 된다.
- 한편, 고려의 경왕은 자나깨나 대도의 폐주가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제국공주와 폐주의 사이를 나쁘게 유지하도록 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는데 이제는 감마라칸이 시큰둥하게 나오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대도로 갔다가는 재수없으면 카이두의 포로가 되거나 개죽음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밀정만을 계속적으로 보내 동태를 파악하기에 바빴다.
- 오랫동안 대칸과 경왕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사냥 등으로 소일하며 때를 기다리던 폐주는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다. 비록 실제로 자신의 정적들이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항상 그런 위협에 시달리는 것은 대단한 스트레스였다. 또한 몽골 황족들의 자신에 대한 멸시의 시선도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자 카이산이 자신을 찾아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형님, 이번 카이두의 공격은 우리 대원제국으로서는 크게 불행한 일이나 형님에게는 전화위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와 함께 백의종군해 카이두의 반란군을 물리치는데 동참하십시오. 열심히 싸워서 적들을 물리치면 형님은 쿠빌라이의 외손자라는 명예를 되찾을 수 있고 잘하면 그걸 기화로 고려의 왕으로 복위할 길도 열릴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용을 써도 지금 대칸이 저렇게 시퍼렇게 버티고 있는 이상 힘들 것이네..."
"그런 대칸은 지금 도망칠 궁리만을 해 쿠빌라이칸 할아버지를 크게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황실의 여론도 대칸에게 매우 안 좋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전공은 커녕 죽는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그러자 카이산은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쿠빌라이칸이 푸른 하늘에서 우리를 자랑스럽게 맞이해 주시겠지요. 그보다도 더한 영예가 있겠습니까? 형님도 몽골의 전사이자 고려의 용사로서 진면목을 보여주실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음...생각해 보겠네."
카이산을 돌려보낸 폐주는 야속진을 불렀다. 야속진은 이때 이미 폐주의 아들을 둘이나 낳으며 사실상 정실부인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폐주의 사랑이자 더없이 믿을 수 있는 참모였다.
"야속진,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마마, 카이산님의 말대로 하시지요. 지금 그 방법밖에는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마의 명예를 회복하셔야죠."
"그대도 역시 같은 생각인게요? 허허..."
폐주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야속진에게 말했다.
"의충(훗날 세자 왕감)과 아라눌특실리(훗날 충숙왕)를 불러주시오."
이윽고 폐주의 어린 아들들이 아버지 무릎 위에 앉았다. 폐주는 말없이 이들을 정답게 쓰다듬더니 다시 한번 눈을 감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 대도에 육박하던 카이산의 대군은 대칸이 보낸 대군을 다시 한번 격파하고 대도를 포위하기 직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그 순간 카이산이 비밀리에 기르던 사병들이 일종의 특공대를 조직해 야밤에 카이산군의 후방을 급습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습격을 당한 카이두군은 허둥지둥대다가 일시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폐주의 계책이었다. 야속진도 다시 한번 전사의 옷을 갖춰입고 부군을 도와 종군했다.
- 예기치않은 일격을 당한 카이두는 노발대발하며 대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대도에서 모든 몽골인들은 자신에게 항복하고 모든 중국인들은 죽일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엄포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도를 통째로 불살라버리겠다고 했다.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카이두에게 혼쭐이 난 대칸파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으나 카이산파의 대응은 달랐다. 카이산은 이 전갈을 가지고 온 카이두의 사신의 목을 베고 카이두에게 일전을 선포했다. 대칸 허락없이 한 행동이라 대칸은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이 비상시국에 또한 몽골 황족들 분위기때문에 가벼운 핀잔만을 주고 끝낼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 사신의 목을 받아든 카이두의 분노는 이제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대도를 완전히 포위한 그는 온갖 최신무기들을 동원해 인정사정없이 대도에 있는 건물들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이제 대도가 함락되면 카이두가 새로운 대칸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쿠빌라이칸때 워낙 철옹성으로 지은 대도이고 성 안에 중국인들은 대도가 떨어지면 자신들이 모두 몰살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죽을 힘을 다 해 싸웠다. 이런 이들을 격려하며 앞장서서 싸운 이는 황궁에서 벌벌떨며 있던 대칸이 아니라 바로 카이산과 폐주였다.
- 예상과는 달리 대도가 쉽게 함락되지 않자 카이두의 초조함은 날로 더했다. 그러자 같이 반란에 참여해 대도 포위전에 가담하고 있던 차가타이 칸국의 칸 두아의 마음도 심히 흔들렸다. 만에 하나 대도공격이 실패한다면 그 후폭풍은 곧 자신의 나라의 멸망이었다. 그러자 회군을 결심하고 몰래 카이산에게 전갈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 고전하고 있던 카이산에게도 이는 분명 희소식이었다. 이 서신에 따르면 두아 자신은 카이두의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것이고 하늘 아래 중심인 대도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푸른 하늘의 뜻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겠으니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그러자 카이산은 카이두를 없앨 계책을 물었으나 두아는 카이두는 자기 자신을 겹겹히 호위해 암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했다.
- 이윽고 두아는 약속대로 자신의 군대를 야음을 틈타 몰래 빼내어 본국으로 돌아갔고 이 사실을 안 카이두 역시 이제 본거지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자신 군대의 피해도 막심한데다가 역으로 포위되면 전멸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돌아가 자신을 배신한 두아를 응징할 앙심도 또한 품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카이산의 입장에선 이 역적을 그대로 돌려보내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금 죽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여의치 않아 고민하고 있었는데 폐주가 자신이 특공대를 이끌고 잡입해 카이두를 해치우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카이산이 기겁하며 보낼 수 없다고 완강히 말렸으나 폐주는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결국 죽음보다 못 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비장하게 말하자 카이산은 마지못해 이를 허락했다.
- 야속진과 특공대를 이끈 폐주는 밤이 되자 철군준비로 어수선한 적군의 진영으로 잠입했다. 폐주 자신 또한 무예에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자원한 것이기도 했지만 이건 누가 보더라도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행위였다. 적군의 군복을 입은 채 침투했지만 지나가는 길에 암호라도 물으면 난감한 일이었다. 물론 특공대원들 중에 몽골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카이두의 대천막 근처까지 접근하는데는 성공했다.
- 카이두의 대천막이 보이자 일단 폐주는 불화살을 당겨 대천막 갤에 쏘아댔다. 그러자 삽시간에 불길이 타오르며 카이두를 비롯한 장군들이 천막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자 더욱 많은 수의 군사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어 일이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그러자 폐주의 수신호에 따라 특공대원들은 순식간에 여기저기 흩어지고 폐주 곁에는 오직 야속진만이 남게 되었다. 흩어진 대원들은 여기저기 불길을 놓기 시작했고 이들을 따라 카이산 주변에 있던 병사들도 조금씩 대오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 결국 사로잡힌 대원들은 카이두의 졸개들에게 하나하나 처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이미 카이두군 복장을 한 폐주와 야속진은 어수선한 틈을 타 카이두의 오십 보 근처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야속진이 틈을 보아 몸을 날려 순식간에 카이두의 목덜미에 비수를 들이대는데 성공했다. 황망하게 당한 카이두는 영문을 모른 채 다짜고짜 달려들려는 병사들에게 저리가라는 손짓을 하기에 바빴다.
- 이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야속진과 카이두 옆에 바싹 다가간 폐주는 재빨리 하늘로 불꽃화살을 쏘아올렸다. 그러자 이를 기화로 성문을 열고 카이산의 군대가 카이두의 진영으로 곧바로 짓쳐나왔고, 카이두의 목줄에 비수를 댄 채 폐주와 야속진은 점차 카이산의 군대쪽으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 그러나 야속진의 실수로 돌에 걸려 넘어지자 해방된 카이두는 자신의 칼을 뽑아들어 단숨에 야속진을 베려했다. 그러자 폐주가 재빨리 달려들어 카이두의 검을 막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윽고 카이두와 폐주의 대결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몽골 전통에는 일대일로 겨룰때는 아무도 훼방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룰이 있었다. 카이두 역시 당시 몽골 최고의 전사 중 하나였으므로 폐주는 여러번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점차 카이산의 군대가 기세를 올리며 다가오자 카이두는 부하들에게 폐주와 야속진에게 달려들라는 신호를 보낸다. 카이두의 기가 꺾인 것을 직감한 폐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려 카이두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렸다.
- 우두머리가 쓰러지자 살벌했던 카이두군 역시 달려드는 카이산군과 함께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모두들 무기를 버리고 줄행랑을 놓았다.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이지부르카'가 다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 대원제국 창립 이래 최대의 위기였던 카이두의 대도 공격을 성공리에 방어한 카이산의 명성과 카이두의 목을 용감무쌍하게 베어버린 폐주 이지부르카의 위용은 삽시간에 대전환을 불러왔다. 더군다나 카이산과 폐주는 같이 힘을 모아 카이두의 패잔병들을 추격해 이들을 깨끗이 일망타진해버리니 원나라의 몽골 황족들간에도 폐주를 보는 눈이 확연히 달라졌던 것이다. 쿠빌라이의 외손자답다는 평가가 다시 일어났다.
- 반면 시종일관 비굴한 모습만을 보여준 테무르칸에 대한 비판여론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위기상황에서 사람의 본성이 나오는 법인데 대칸 즉위 이후 가장 궁지에 몰렸던 상황에서 테무르의 행동은 대원제국의 치욕이라는 의견들이 조정을 압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테무르는 조회도 잘 열지도 않았으며 열더라도 몽골 황족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하는 등 굴욕의 연속이었다.
- 카이두의 난이라는 변수로 인해 오히려 폐주의 명성만 높아지자 고려 본국에서 시종 대도의 정세를 주시하고 있던 경왕에게는 이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또다시 폐주가 무비 일파 제거때처럼 자신을 몰아내고 왕이 될지도 모르는 판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경왕의 지나친 우려가 아닌 엄연히 현실로 일어나기 충분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 고심끝에 경왕은 자신의 최측근인 왕유소, 송린, 석천보 등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이들 중 송린과 석천보는 경왕이 이전에 한번 폐위당했을때 가장 먼저 경왕을 버리고 폐주에게 붙었던 경력이 있던 간신배들이었지만 사람이 워낙 없던 경왕으로서 나름 쓸모가 있어서 경왕은 속내를 숨긴채 다시 쓰고 있었다. 물론 이용가치가 다하면 극형에 처할 심산이었다.
- 다만 왕유소의 경우는 달랐다. 경왕이 특히나 왕유소를 중요시했던 까닭은 왕유소가 폐주에 대해 극한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폐주가 고려왕이었을때 개혁의 일환으로 권문세족들의 토지를 대거 압수해 백성들에게 분배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가장 피해를 본 자가 바로 권문세족의 대표주자였던 왕유소였기 때문이다. 이후 경왕이 복위한 다음에 왕유소는 자신의 땅을 되찾으려고 했으나 다른 권문세족들이 이미 다 나꿔채어 순식간에 집안이 몰락했다. 절치부심하던 왕유소는 경왕에게 절대충성을 맹세하고 폐주를 파멸시키는데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 경왕 또한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유소에 대한 믿음은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남달랐다. 그래서 그에게 제일 먼저 의견을 구했다. 자신들도 살아남기 위해 근근하던 송린과 석천보는 어떻게 하던 경왕에게 찰싹 달라붙어 공을 세워 목숨을 부지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에 경왕이 왕유소만을 총애하자 은근히 이를 견제하고 질시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이때도 역시 이들은 경왕이 왕유소에게 먼저 묻자 무섭게 왕유소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이를 간단히 무시한 왕유소는 입을 열었다.
"역시나 이전에 전하께서 언급하셨던 일을 추진하셔야 할 줄 아뢰나이다."
"그렇다면..."
"폐주와 공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놓는 것 말이옵니다."
경왕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되물었다.
"공주의 아비 감마라칸이 최근 대칸에 대한 지지를 거두려하고 있는 마당에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경왕이 이렇게 나오자 송린과 석천보는 무섭게 송유소를 몰아붙였다.
"영명하시옵니다. 전하. 그대는 어찌하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해 이 중차대한 사안을 어지럽히려 하시오?"
그러자 왕유소는 이들을 무시한 채 경왕을 직시하며 말했다.
"감마라칸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주에게 직접 접촉해 승낙을 얻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공주를 개가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이미 그 적임자도 물색해놓았습니다."
"그게 누구요?"
"고려 왕족인 서흥후 왕전이옵니다. 제가 이미 의사를 타진했는데 흔쾌히 받아들이더군요."
"왕전...? 흠..."
"외모며 기질이며 뭐 하나 폐주에 빠지는 것이 없고 오히려 폐주가 비교도 안되는 봉황같은 인물이지요. 이미 폐주에 대한 마음을 거둔 공주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신랑감일 것입니다."
- 경왕은 무릎을 쳤다. 이전에 공주에게 한 말도 있고해서 공주를 개가시킨다면 감마라칸도 폐주에게 다시 붙을 명분 자체를 앗아가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러한 폐주도 세력기반을 다시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 틈을 노려 테무르칸과 다시 폐주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밀 기반도 마련되는 것이었다.
"역시 경은 과인의 제갈공명이요. 그럼 경이 직접 가서 공주에게 의향을 타진하도록 하시오."
"예, 전하."
송린과 석천보는 한 마디도 못한 채 다만 뭐씹은 표정만을 지을 뿐이었다.
- 지체없이 대도로 달려간 왕유소는 어렵지 않게 공주를 만나 대면했다. 그리고 경왕과 나눈 말을 그대로 공주에게 전했다. 그런데 공주의 대답이 심상치 않았다.
"또다시 고려인과 혼인하라구요?"
"이전 경왕 전하가 하신 말씀을 기억하옵소서. 이는 대원제국과 고려의 만년친선을 위한 대계이오니 공주마마께서는 부디 혜량하옵소서."
" 그 왕전이라는 자는 저와의 혼인을 대번에 승낙했다구요?"
"고려의 왕족으로서 폐주와는 비교도 안되는 큰 인물이옵니다. 공주마마께서도 매우 흡족해 하실 것이옵니다."
그러자 공주는 앙천대소하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아니 이보세요...그런 큰 인물이 그래도 한때 자신이 주군으로 모셨던 고려왕의 왕후였던 나를 주저함도 없이 취하려고 한다는게 말이 된다고 보시나요? 그런 폐륜아가 어디 있나요?"
"서흥후께서는 고려와 제국의 만년대계를 위해 자신의 한 몸 던지실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셨습니다. 공주님께서는 부디 오해를 거두시옵소서."
그러자 공주는 대번에 칼을 뽑아들어 송유소의 목줄기에 갖다댔다.
"닥치시오!!! 자기를 희생하는게 아니라 나의 부와 권력을 나누려는 욕심이겠지...내 이미 경왕과 경왕을 따르는 네놈과 같은 모리배들의 됨됨이를 다 알고 있거늘...비록 이제 폐주와 나는 남남이나 다름없지만 어찌 그대들과 같은 무리들과 한통속이 되겠소? 난 칭기스칸의 피를 받은 위대한 몽골의 여전사란 말이요. 그 왕전이라는 자가 그렇게 나를 취할 자신이 있으면 어디 대도로 와서 나와 한번 겨뤄보자고 하시오. 나를 이기면 나를 가져도 좋지만 그렇게 못하면 내 칼에 그자의 목이 떨어질테니...아니 그보다도 경이 나와 한번 겨뤄보는게 어떻겠소? 경이 나를 이기면 내 대번에 승낙할테니..."
"마마...제발."
아무러한 왕유소도 오금이 저리는 순간이었다. 한참이나 왕유소를 노려보던 공주는 이윽고 칼을 거두며 말했다.
"가서 경왕에게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하세요. 어차피 나는 더 이상 고려인과 살을 섞을 생각은 꿈에도 없으니...!"
왕유소의 낯이 흙빛이 된 채 줄행랑을 치는 뒷모습을 보던 공주 앞에 장막을 걷으며 한 사내가 나타났다.
"잘했다. 내 딸아."
감마라칸이었다.
- 왕유소가 고려로 돌아와 뜻밖의 소식을 전하자 경왕 역시 경악했다. 이는 미처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송린과 석천보는 기다렸다는 듯이 왕유소를 비웃기 시작했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경왕은 더 이상 고려에 계속 있기도 불안했다. 다시금 테무르 대칸에게 사신을 보내 직접 독대를 요청했다. 본격적으로 만나 폐주와 그 세력을 없앨 궁리를 함께 하자는 요지였다.
- 테무르 역시 날로 카이산과 폐주의 기세가 높아가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자신에게는 아직 후사도 없었고 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이전에는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경왕과의 직접 만남은 가급적 피했지만 이제는 그럴 여유가 여러모로 없었다. 쿠빌라이의 외손자? 흥! 그렇다면 나는 쿠빌라의 친손자로서 대칸이고 유일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카이산이나 이지부르카 따위는 서열상으로 나와 동렬이 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뇌까리며 대칸은 전격적으로 경왕의 대도 방문을 승인했다. 그리고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경왕은 드디어 대도에 직접 발을 들였다. 이때가 1305년의 일이었다.
- 오랜만에 온 대도였다. 경왕은 테무르 대칸을 만나기 위해 곧바로 황궁으로 입궐했다. 몽골제국의 속국이 되어 여러가지로 초라했던 고려의 개경에 비해 대도는 확실히 천하의 중심이라 자연스럽게 느낄 정도로 모든 것이 거대했고 위풍당당했다. 자신의 처지와 대비되며 경왕은 더욱 위축되었다.
- 그러나 이번에 먼 길을 온 김에 경왕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폐주를 제거하고 이 모든 것을 끝낼 독한 마음을 품고 왔다. 그래서 고려의 조정을 통째로 옮겨온듯한 것처럼 막대한 재물과 신하들을 대거 대동했다. 왕유소 등 자신의 최측근들도 동행했음은 물론이다. 이후 경왕이 귀국할 때까지 2년동안 고려는 왕과 주요 신료들이 모두 없는 한국 역사상 초유의 일이 처음 벌어지게 되는데, 후에 폐주 역시 이를 답습하게 된다.
- 그런데 경왕이 막상 황궁에 들어오자 환관은 경왕을 만조백관이 도열해있는 대전이 아닌 밀실로 안내했다. 더군다나 밀실 앞에 이르자 환관은 경왕 일행을 막아서며 오직 경왕만이 들어갈 수 있고 나머지는 밖에서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경왕은 내심 은근히 두려워졌으나 뭐 별일이야 있겠느냐하며 이에 따랐다. 밀실에 들어서고 문이 닫히자 거기에는 잔뜩 화가 나 있는 대칸 테무르가 채찍을 들며 살기등등하게 경왕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경왕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대칸 폐하, 불충한 신 왕거(경왕의 이름) 이제서야 폐하를 알...알현하옵나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말하기가 무섭게 대칸의 채찍이 사정없이 늙은 경왕의 살을 파고들었다.
"으...으헉!"
채찍의 고통으로 경왕은 자기도 모르게 나자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씩씩거리며 대칸은 광인처럼 소리를 지르며 인정사정없이 경왕을 매질했다.
"네놈이 아들놈을 잘못 싸질러 오늘날 내가 이런 곤경에 빠지게 된거다. 네 죄를 알렸다?"
"아이고 아이고...천번 만번 죽어 마땅하오니 대칸께서는 부디 고정하옵소서..."
채찍으로 피투성이가 된 경왕은 죽을 힘을 다해 이를 악물며 버텼다. 잠시 이성을 잃은 대칸은 그제서야 채찍을 거두며 뇌까렸다.
"생각 같아서는 만조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네놈을 응징하고 싶었다만...그래도 일국의 왕이니 네 체면을 생각해 이정도로 해두는거다!"
"아이고...황...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폐하..."
경왕은 몸을 부들부들떨며 연신 머리를 땅에 박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왕께서는 대칸의 언사를 용서하시오. 요새 하도 시절이 수상해서 그런 것이니..."
경왕이 놀라며 고개를 쳐들자 거기에는 대칸 옆에 황후 브르간이 있었다.
"대칸 폐하...몸도 성치 않으신데 지나치게 힘을 쓰시면 해롭습니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이지부르카를 낳은 저 놈을 보니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올라서 말이요."
아직도 씩씩거리며 대칸은 옆에 앉았다. 브르간은 아무 말 없이 경왕에게 옆자리를 권했다. 경왕도 비틀거리며 간신히 자리에 앉았고 환관들이 달려와 경왕의 몸에서 열심히 피를 닦았다. 경왕을 노려보던 대칸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래 이지부르카 그놈을 완전히 결딴낼 좋은 방법이 있는가?"
"이지부르카는 누가 뭐래도 제 아들놈입니다. 저보다 그놈을 잘 아는 이는 없죠."
"그놈 때문에 내가 요새 죽을 맛이다. 카이산과 함께 카이두의 난을 진압해 정상적으로는 이제 그놈을 제거할 수 없게 되었어."
"몽골인들이 힘들다면 우리 고려인들이 나설 수 밖에요." 어느덧 경왕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일단 제가 이지부르카의 집에 머물 예정입니다. 아무리 원수지간이라고 하나 설마 저를 내쫒기야 하겠습니까? 거기에 머물며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제가 감시하며 방법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브르간이 맞장구를 쳤다. 이에 힘을 얻은 듯 경왕의 목소리는 더욱 단호해졌다.
"신이 고려의 왕이기 때문에 그놈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대도의 몽골 황족들에게 소문을 퍼뜨릴겁니다. 그러면 이지부르카에 대한 평판도 다시 떨어질 것이고 그와 한통속인 카이산 등의 세력도 많이 꺾이겠지요."
"하지만..." 다시 브르간이 나섰다.
"이지부르카와 카이산은 카이두 전쟁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벌써 조정의 대다수 중신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형편입니다,.그래서 이제 더 어려운 싸움이 되었습니다."
- 브르간의 말이 나오자 대칸은 더욱 더 수심에 찬 얼굴이 되었다. 그러자 경왕은 더욱 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제 신이 직접 이 대도로 온 이상 뭔가 달라질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 말대로 경왕은 직접 폐주의 저택을 찾아갔다. 밖에 사냥을 나가있던 폐주는 이 소식을 듣자 같이 있던 카이산과 의논했다.
"형님, 도대체 경왕이 무슨 꿍꿍이속일까요? 고려의 정사를 내팽겨치고 대도까지 왔다면 이는 분명 대단한 결심을 한 듯 합니다만..."
"아버지와 아들이 이런 모습으로 맨날 부딪치니 이는 분명 경왕이 나와의 마찰을 고의적으로 일으켜 나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수작일거다. 사실 허구헌날 이러는 나도 정말 지치는구나..."
폐주는 뭔가를 골똘이 생각하더니 곧 시종에게 서신을 써주어 집으로 보냈다.
- 폐주를 만나면 실컷 곯려주며 원한을 표출하려고 했던 경왕은 의외로 시종이 전해준 서찰을 읽고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내용은 아버지 전하를 만나 자식의 예를 다하고자 했으나 공사다망하고 곧 카이산과 함께 오고타이 칸국을 정벌하는 준비때문에 피치못해 뵐 수 없다는 것이었다. 후에 이 불효의 벌을 받겠으니 용서해달라는 것이었다. 경왕은 폐주가 이미 자신의 속내를 훤히 꽤뚫고 있었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버지만큼 자식을 잘 아는 사람도 없지만 자식만큼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왕은 이를 갈며 폐주의 거처에 짐을 풀며 자신의 집 마냥 행세했다.
- 폐주는 다른 임시 거처에 머물면서 경왕의 동태를 감시했다. 이전같으면 카이산과 함께 오고타이 칸국 정벌전에 종군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경왕이 직접 대도로 온 이상 이는 불가했다. 그래서 1306년 카이산만이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 칸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정벌에 나서 드디어 오고타이 칸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하고, 카이산의 명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이러한 성공 뒤에는 물론 폐주의 보이지 않는 활약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 폐주는 비밀리에 오고타이 정벌전에 개입하기도 하고 대도에 머물려 자신의 지지세력을 늘리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은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경왕은 폐주의 행방조차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어서 애를 태웠다. 경왕이 대도에 온 이후 폐주는 유령처럼 되어버린 것이었다. 대칸이 폐주를 불러도 폐주는 이를 생까고 종적을 감춰버렸다. 이를 역이용해 대칸과 경왕은 폐주가 황명도 무시하고 잠적했다고 비난했으나, 이미 폐주를 욕할 중신들은 거의 없었다.
- 오고타이 칸국의 멸망으로 카이산은 이제 명실상부한 몽골제국 최고의 영웅이 되었고 후사가 없던 테무르 대칸에 이어 원나라의 대칸이 되리라는 점은 이제 누구도 의심치 않게 되었다. 그러나 브르간이 자신의 처가인 옹기라트 부족의 중립을 깨뜨리고 대칸의 편에 끌어들이자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옹기라트 부족은 칭기스칸의 아내 보르테의 부족으로 그동안의 중립을 깨고 대칸을 지지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대칸은 카이산이 오고타이 칸국 원정을 떠난 틈을 타고 폐주가 종적을 감춰버린 사이 전격적으로 종제인 아난다칸을 자신의 후계로 폭탄선언을 해버렸다. 이제 양측의 황위를 둔 혈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 오랜만에 온 대도였다. 경왕은 테무르 대칸을 만나기 위해 곧바로 황궁으로 입궐했다. 몽골제국의 속국이 되어 여러가지로 초라했던 고려의 개경에 비해 대도는 확실히 천하의 중심이라 자연스럽게 느낄 정도로 모든 것이 거대했고 위풍당당했다. 자신의 처지와 대비되며 경왕은 더욱 위축되었다.
- 그러나 이번에 먼 길을 온 김에 경왕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폐주를 제거하고 이 모든 것을 끝낼 독한 마음을 품고 왔다. 그래서 고려의 조정을 통째로 옮겨온듯한 것처럼 막대한 재물과 신하들을 대거 대동했다. 왕유소 등 자신의 최측근들도 동행했음은 물론이다. 이후 경왕이 귀국할 때까지 2년동안 고려는 왕과 주요 신료들이 모두 없는 한국 역사상 초유의 일이 처음 벌어지게 되는데, 후에 폐주 역시 이를 답습하게 된다.
- 그런데 경왕이 막상 황궁에 들어오자 환관은 경왕을 만조백관이 도열해있는 대전이 아닌 밀실로 안내했다. 더군다나 밀실 앞에 이르자 환관은 경왕 일행을 막아서며 오직 경왕만이 들어갈 수 있고 나머지는 밖에서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경왕은 내심 은근히 두려워졌으나 뭐 별일이야 있겠느냐하며 이에 따랐다. 밀실에 들어서고 문이 닫히자 거기에는 잔뜩 화가 나 있는 대칸 테무르가 채찍을 들며 살기등등하게 경왕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경왕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대칸 폐하, 불충한 신 왕거(경왕의 이름) 이제서야 폐하를 알...알현하옵나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말하기가 무섭게 대칸의 채찍이 사정없이 늙은 경왕의 살을 파고들었다.
"으...으헉!"
채찍의 고통으로 경왕은 자기도 모르게 나자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씩씩거리며 대칸은 광인처럼 소리를 지르며 인정사정없이 경왕을 매질했다.
"네놈이 아들놈을 잘못 싸질러 오늘날 내가 이런 곤경에 빠지게 된거다. 네 죄를 알렸다?"
"아이고 아이고...천번 만번 죽어 마땅하오니 대칸께서는 부디 고정하옵소서..."
채찍으로 피투성이가 된 경왕은 죽을 힘을 다해 이를 악물며 버텼다. 잠시 이성을 잃은 대칸은 그제서야 채찍을 거두며 뇌까렸다.
"생각 같아서는 만조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네놈을 응징하고 싶었다만...그래도 일국의 왕이니 네 체면을 생각해 이정도로 해두는거다!"
"아이고...황...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폐하..."
경왕은 몸을 부들부들떨며 연신 머리를 땅에 박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왕께서는 대칸의 언사를 용서하시오. 요새 하도 시절이 수상해서 그런 것이니..."
경왕이 놀라며 고개를 쳐들자 거기에는 대칸 옆에 황후 브르간이 있었다.
"대칸 폐하...몸도 성치 않으신데 지나치게 힘을 쓰시면 해롭습니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이지부르카를 낳은 저 놈을 보니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올라서 말이요."
아직도 씩씩거리며 대칸은 옆에 앉았다. 브르간은 아무 말 없이 경왕에게 옆자리를 권했다. 경왕도 비틀거리며 간신히 자리에 앉았고 환관들이 달려와 경왕의 몸에서 열심히 피를 닦았다. 경왕을 노려보던 대칸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래 이지부르카 그놈을 완전히 결딴낼 좋은 방법이 있는가?"
"이지부르카는 누가 뭐래도 제 아들놈입니다. 저보다 그놈을 잘 아는 이는 없죠."
"그놈 때문에 내가 요새 죽을 맛이다. 카이산과 함께 카이두의 난을 진압해 정상적으로는 이제 그놈을 제거할 수 없게 되었어."
"몽골인들이 힘들다면 우리 고려인들이 나설 수 밖에요." 어느덧 경왕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일단 제가 이지부르카의 집에 머물 예정입니다. 아무리 원수지간이라고 하나 설마 저를 내쫒기야 하겠습니까? 거기에 머물며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제가 감시하며 방법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브르간이 맞장구를 쳤다. 이에 힘을 얻은 듯 경왕의 목소리는 더욱 단호해졌다.
"신이 고려의 왕이기 때문에 그놈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대도의 몽골 황족들에게 소문을 퍼뜨릴겁니다. 그러면 이지부르카에 대한 평판도 다시 떨어질 것이고 그와 한통속인 카이산 등의 세력도 많이 꺾이겠지요."
"하지만..." 다시 브르간이 나섰다.
"이지부르카와 카이산은 카이두 전쟁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벌써 조정의 대다수 중신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형편입니다,.그래서 이제 더 어려운 싸움이 되었습니다."
- 브르간의 말이 나오자 대칸은 더욱 더 수심에 찬 얼굴이 되었다. 그러자 경왕은 더욱 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제 신이 직접 이 대도로 온 이상 뭔가 달라질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 말대로 경왕은 직접 폐주의 저택을 찾아갔다. 밖에 사냥을 나가있던 폐주는 이 소식을 듣자 같이 있던 카이산과 의논했다.
"형님, 도대체 경왕이 무슨 꿍꿍이속일까요? 고려의 정사를 내팽겨치고 대도까지 왔다면 이는 분명 대단한 결심을 한 듯 합니다만..."
"아버지와 아들이 이런 모습으로 맨날 부딪치니 이는 분명 경왕이 나와의 마찰을 고의적으로 일으켜 나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수작일거다. 사실 허구헌날 이러는 나도 정말 지치는구나..."
폐주는 뭔가를 골똘이 생각하더니 곧 시종에게 서신을 써주어 집으로 보냈다.
- 폐주를 만나면 실컷 곯려주며 원한을 표출하려고 했던 경왕은 의외로 시종이 전해준 서찰을 읽고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내용은 아버지 전하를 만나 자식의 예를 다하고자 했으나 공사다망하고 곧 카이산과 함께 오고타이 칸국을 정벌하는 준비때문에 피치못해 뵐 수 없다는 것이었다. 후에 이 불효의 벌을 받겠으니 용서해달라는 것이었다. 경왕은 폐주가 이미 자신의 속내를 훤히 꽤뚫고 있었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버지만큼 자식을 잘 아는 사람도 없지만 자식만큼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왕은 이를 갈며 폐주의 거처에 짐을 풀며 자신의 집 마냥 행세했다.
- 폐주는 다른 임시 거처에 머물면서 경왕의 동태를 감시했다. 이전같으면 카이산과 함께 오고타이 칸국 정벌전에 종군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경왕이 직접 대도로 온 이상 이는 불가했다. 그래서 1306년 카이산만이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 칸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정벌에 나서 드디어 오고타이 칸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하고, 카이산의 명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이러한 성공 뒤에는 물론 폐주의 보이지 않는 활약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 폐주는 비밀리에 오고타이 정벌전에 개입하기도 하고 대도에 머물려 자신의 지지세력을 늘리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은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경왕은 폐주의 행방조차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어서 애를 태웠다. 경왕이 대도에 온 이후 폐주는 유령처럼 되어버린 것이었다. 대칸이 폐주를 불러도 폐주는 이를 생까고 종적을 감춰버렸다. 이를 역이용해 대칸과 경왕은 폐주가 황명도 무시하고 잠적했다고 비난했으나, 이미 폐주를 욕할 중신들은 거의 없었다.
- 오고타이 칸국의 멸망으로 카이산은 이제 명실상부한 몽골제국 최고의 영웅이 되었고 후사가 없던 테무르 대칸에 이어 원나라의 대칸이 되리라는 점은 이제 누구도 의심치 않게 되었다. 그러나 브르간이 자신의 처가인 옹기라트 부족의 중립을 깨뜨리고 대칸의 편에 끌어들이자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옹기라트 부족은 칭기스칸의 아내 보르테의 부족으로 그동안의 중립을 깨고 대칸을 지지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대칸은 카이산이 오고타이 칸국 원정을 떠난 틈을 타고 폐주가 종적을 감춰버린 사이 전격적으로 종제인 아난다칸을 자신의 후계로 폭탄선언을 해버렸다. 이제 양측의 황위를 둔 혈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 카이산의 반란 성공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바로 옹기라트 부족의 내응 여부였다. 테무르 대칸의 황후인 브르간이 이 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옹기라트 부족도 대칸편에 섰다. 카이산의 외가도 옹기라트 부족이었으나 브르간의 경우는 친가로 직계 혈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해도 넘어설 수 없는 현실 앞에 옹기라트 부족의 인내도 급격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폐주의 부탁을 받은 형식상 장인인 감마라칸의 설득으로 인해 극적으로 이 부족의 지지도 카이산쪽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 카이산이 이끄는 10만 대군은 어느덧 대도 외곽에 진출해 순식간에 몽골제국의 수도를 겹겹이 포위했다. 테무르 대칸은 15만 대군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쨌든 수세에 몰린 입장이라 절대로 성문을 열고 나가 맞대응하지 않았다. 그의 또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은 능력있는 장수들이 거의 다 카이산에게 붙었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마지막 보루인 옹기라트 부족의 장군들을 믿고 버티고 있었으나 물론 틈만 나면 성문을 열것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그냥 성문을 열고 카이산군을 맞으면 그만일 것 같지만 성문을 여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녹록치 않았다. 테무르가 그래도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아 자기 심복들을 성문 요충지에 배치해 여차하면 대칸에게 알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대칸을 놓치면 카이산의 입장에서는 크나큰 낭패였다. 그는 반드시 대칸을 사로잡거나 여의치 않으면 죽여야만 했다. 그래야 후환을 깨끗이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원로들의 밀지를 받은 옹기라트 장수들은 폐주의 계략을 채택해 황궁 주변에 불을 놓고 성문의 심복들을 그쪽으로 향하게 했다. 처음에는 옹기라트 장수들보고 가서 불을 끄라고 했지만 이들이 미동도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썰물처럼 성벽에서 빠져나가 황궁으로 향했다.
- 대도 입성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은 야음을 틈타 이루어졌고 대칸 심복들이 성벽에서 철수해 황궁 근방까지 간 것을 신호로 옹기라트 부족들은 지체없이 성문을 열었고 카이산의 15만 기병의 대군은 무서운 속도로 대도 안으로 짓쳐나갔다. 동시에 숨어있던 반 테무르파의 모든 군사들도 완전무장을 하고 안에서 호응했다. 카이산군 이외에 대도 안에서 수많은 군병들이 대칸 타도를 외치며 사방에서 나타나자 대칸의 15만 대병 역시 모래알처럼 흩어지기에 바빴다.
- 황궁의 방화를 진압하러 대칸파 장수들이 달려왔으나 이것은 연막전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배후에서 엄청난 함성이 들리며 대칸의 죽음을 외치며 황궁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온 천지에 진동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칸과 그 무리들은 한꺼번에 황궁에 갇힌 채 최후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 대칸 테무르는 모든 상황을 깨닫자 가뜩이나 안 좋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피를 갑자기 한 움큼 토하더니 실신했다. 한참 뒤 깨어난 그는 황후 브르간에게 말했다.
"황후...이제 모든 것은 끝난 듯 하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카이산에게 목숨이라도 건져달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자 브르간의 안색이 돌변했다.
"대칸...그렇게 카이산을 죽이려고 악을 쓰시더니 갑자기 이렇게 비겁한 말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이제는 별다른 수가 없지 않소?"
"아마도 대칸은 운좋으면 사시겠지요. 허나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분명 저들은 저는 죽이려고 할겁니다."
그러자 대칸은 아무말 없이 브르간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이미 눈에 초점이 없는게 거의 반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온 몸을 비틀비틀 거리며 일어나더니 황궁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카이산에게 직접 항복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낌새를 황후가 모를리가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칸...제발 마지막 순간이라도 대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십시오. 이건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용납을 못합니다!"
그녀는 울먹거렸다. 지아비로서 황후의 목숨은 어찌되던 상관안하고 자신만 살겠다고 하는 대칸의 추한 모습이기도 했다.
"대칸...절대로...절대로 나가시면 안됩니다. 그 문을 열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자 비틀거리며 나가던 대칸이 뒤를 돌아 황후를 쳐다봤다. 역시나 눈에 초점이 없는 것이 표정 또한 무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였다.
"으헉...으으..."
대칸이 갑자기 문을 열다 말고 고꾸라졌다. 커다란 창이 자신의 배를 관통해 그 끝을 자신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칸은 입을 파르르 떨며 뭐라 입을 움직이다 말고 그대로 넘어져 즉사했다. 황후가 창을 던져 대칸을 죽인 것이다.
"대칸...이렇게라도 체통을 지켰으니 다행입니다." 황후가 눈물지으며 이미 숨이 끊어진 그에게 한 말이었다.
황후는 이제 황궁, 아니 대도를 빠져나가 후일을 기약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며 여전사가 들이닥쳤다. 아직도 폐주의 공식 왕후였던 제국대장공주 보다실리였다. 그녀는 자빠져 죽은 대칸의 모습을 잠시 쳐다보더니 이윽고 비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창을 대칸에게서 뽑아내며 황후 브르간에게 한 마디 던졌다.
"황후...아니 브르간...이거 니년이 한 짓 맞지?"
"뭐라?...네년이 감히 나한테..."
"훗, 곧 죽을 몸인데 니년이 아직도 황후 타령이냐?"
그말을 마치자마자 대칸을 뚫은 그 창을 곧바로 황후에 날렸다. 황후 역시 정통으로 창을 맞아 그 자리에서 외마디를 지르며 쓰러져 즉사했다. 뒤이어 곧바로 들어온 감마라칸은 그런 딸의 모습을 보자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부부가 일심동체라 했던가? 역시 같은 창으로 최후를 맞이하는구나...하하!"
대도에 입성한 카이산은 곧바로 황궁을 향했는데 저항하는 대칸파를 소탕하느라 조금 늦게 황궁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 폐주 등과 합세하고 다란칸, 바얀 등과 함께 대칸과 황후가 최후를 맞은 그 방으로 들이닥쳤다. 감마라칸과 공주는 이미 그들을 기다린지 오래였다.
"브르간이 대칸을 해쳐서 우리가 브르간을 응징했소." 감마라칸이 상황 설명을 하자 카이산과 폐주는 한동안 주검이 된 대칸과 황후를 내려보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정적이었지만 그래도 피를 나눈 친척이었다. 특히나 폐주는 어릴 적 할아버지 쿠빌라이 대칸의 무릎팍에서 같이 놀던 대칸이었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 상대라도 막상 죽어버리면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하게 마련이다.
- 카이산이 뒷수습을 하는 동안 폐주는 이제 자신의 숙제를 해결하러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경왕은 난리가 나자 자신의 신료들과 방법을 궁리했지만 온갖 아이디어를 내면서도 빠져나가려다가 죽을까봐 그냥 폐주의 저택에서 죽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장한 군사들을 이끌고 온 폐주와 맞딱드린 것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부자지간이지만 폐주와 경왕 모두 서로를 쳐다보기만 할 뿐, 한동안 적막감만 감돌 뿐이었다. 다만 폐주는 얼굴표정이 복잡했고 경왕은 사시나무 떨 듯이 두려움에 휩싸였을 뿐이었다. 이윽고 폐주는 경왕을 비롯 고려에서 옮겨 온 조정신료들을 통째로 모두 연금시켰다.
- 이리하여 서기 1307년 카이산은 그의 오랜 정적이었던 대칸 테무르를 물리치고 새로운 대칸이 되었으니 중국식으로 말하자면 원나라 3대 대칸이자 황제인 '무종'이 바로 이 사람이다. 새 대칸은 모든 상황이 수습되고 열린 대연회에서 모두들 앞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이제 우리 대원제국은 짐과 이지부르카 형님의 것이다!"
- 그러자 바얀과 다란칸 등은 잠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모두들 공감할 정도로 이번 정변에서 폐주의 역할은 지대했다. 또한 쿠빌라이 대칸의 외손자로서 그 정도 공치사는 들어도 마땅한 것이었다. 드디어 폐주는 고려의 왕으로 복귀하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오랜 야망을 다시 재추진할 동력을 얻은 것이었다.
- 대원제국의 회녕왕 하야스(카이산)가 새로운 대칸이 되자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테무르파들은 남김없이 숙청이 되었으나 이번 정변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옹기라트 부족세력은 우대되었다. 이제 천하는 하야스칸과 그를 지지하던 바얀, 다란칸, 그리고 폐주의 세상이었다. 그리고 막후세력인 진왕 감마라칸 등이 있었다.
- 새로운 대칸이 공공석상에서 폐주가 자신과 함께 대원제국의 주인이라 천명한만큼 폐주로서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이제 자신의 숙적이던 테무르칸이 처치되었으니 자신은 마땅히 억울하게 참소받아 빼앗긴 고려왕의 지위를 되찾아 귀환해야만 했으나 여기에는 두 가지 고려되어야 할 점이 남아있었다. 첫번째는 이전에 자신이 왕위에 올랐을때는 아버지 경왕이 쿠빌라이 대칸의 딸이자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일파의 수장이라는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다시 아버지를 고려국왕의 지위에서 끌어내릴만한 명분이 부족했다. 물론 경왕이 테무르에게 붙어 자신의 환국을 막으려하고 나아가 죽이려하기까지 한 점에 따라 경왕을 쫒아내고 자신이 고려왕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 그러나 문제는 본국 고려에서의 정서였다. 당시 유교적인 관념이 꽤 뿌리깊게 남아있던 고려로서는 이유야 어땠던간에 아들이 아버지를 두 번이나 폐하고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동서고금에서도 듣지 못한 해괴한 일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불안의 온상인 아버지를 계속 놔둔다는 것은 우선 대칸부터가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두번째로는 이전에 왕위에서 쫒겨난 경험에서도 보았듯이 이제는 명실상부한 세계의 중심은 고려가 아닌 대도였다. 폐주 자신의 세계관 또한 그러했다. 더구나 대칸이 자신에게 대원제국의 실권을 주다시피 한 상황에서 다시 고려왕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굴러온 복이자 절호의 기회를 차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폐주는 이제 몽골 황족들의 회의인 쿠릴타이에서도 쿠빌라이칸의 외손자라는 자격으로 7번째의 자리를 보장받았다.
- 폐주가 현재 이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바로 대칸과 야속진. 그러므로 폐주는 자신의 고민거리를 대칸과도 긴밀히 상의했다. 대칸은 이 세상 최고권력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사적인 공간에서는 여전히 폐주를 깎듯이 모셨다. 물론 그렇다고 폐주가 이전처럼 대칸을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므로 서로에게는 존댓말이 오갔다. 그 결과 폐주가 일단 돌아가 왕위에 오르고 그 방식은 경왕이 스스로 하야하게 만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 방식이야 폐주의 입장에서도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제 껍데기만 남은 부자지간이라는 관계가 문제인 것이지 스스로 하야하게 만드는 방법은 폐주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 작정할 정도로 독한 마음을 품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권력 앞에서는 천륜도 무용지물이라는 점은 동서고금의 진리였다. 일단 고려국왕의 지위를 회복하고 대도로 귀환하는 문제는 대칸과 차후 시간을 두고 논의하기로 했다.
- 이리하여 폐주는 1307년 4월 개선장군의 심정으로 경왕과 그 측근들 등 고려 조정을 한꺼번에 포로로 잡은 채 고려로 귀환길에 오른다. 폐주가 고려조정을 통째로 인질로 잡고 귀환하는데 당연히 저항이 있을리가 없었다. 고려의 황도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수많은 고려백성이 도열해 폐주의 행렬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들은 폐주가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행한 개혁을 기억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폐주에게서 다시금 희망을 본 것이었다.
- 개경에 도착한 폐주는 우선 경왕의 최고 측근이었던 왕유소, 송린, 석천보 등을 끌어내었다. 이미 대칸에 위협이 되던 아난다칸이 살해되었듯이 일찌기 이들이 충동질한 서흥후 왕전 또한 폐주의 밀명에 의해 쥐도새도 모르게 살해된 다음이었다. 살기등등한 폐주 앞에 끌려나온 이들은 사시나무 떨 듯이 떨며 그저 목숨만을 구걸할 뿐이었다. 그러나 왕유소는 침묵을 지킨 채 무겁게 눈을 감고 있었다. 폐주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왕유소만 남겨둔 채 송린과 석천보는 형장으로 보냈다. 곧 이들의 목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폐주에게 전달되었다.
"네가 나에 대한 원한으로 경왕에게 붙어 그동안 나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네가 너를 다른 놈들과 같이 당장 죽이지 않은 것은 죽이기 전에 너의 죄악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자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띄며 왕유소는 말했다.
"죽이려면 빨리 죽이지 무슨 뜸을 그리 들인다는 말이냐? 이미 난 모든 것을 잃어 두려울 것이 없는 몸이다. 다만 네놈을 없애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일 뿐..."
"네놈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그토록 막대한 부귀영화를 누렸으면서 백성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느냐?"
"내가 설령 그런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해도 너하고는 대체 무슨 상관이냐?"
"아직도 네 죄를 뉘우치지 못한다는 것이냐?"
그러자 왕유소는 껄껄 웃으며 얼굴에 독기를 품기 시작했다.
"이보게 젓비린내나는 젊은 친구..."
그러자 폐주를 옹위하던 주위에서는 술렁거리며 왕유소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댔다. 반말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실상 고려의 왕인 폐주에게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금도를 넘는 짓거리였기 때문이다. 폐주는 이제 30대 초반이었으니 60대인 왕유소가 그러는 것은 나이상 있을 수 있는 일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폐주는 그 모욕을 참으며 왕유소의 말을 경청했다.
"세상이 있은 이래 힘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뉘고 가진자와 못 가진 자로 나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일쎄. 더구나 네놈은 왕으로써 그야말로 가진 자의 가장 위가 아니겠는가? 자네가 개혁을 한답시고 하는 바람에 난 모든 것을 잃었다는 말이다. 다른 가진 놈들은 거의 건드리지 못하고 여전히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있는데 말이다. 이것이 과연 정당하다고 보는가?"
"나의 치세가 중간에 참소로 인해 멈추어 개혁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바로 네가 말한대로다. 개혁이 끝까지 갔더라면 너같은 악질 토호들은 모두 응징되었을 것이다. 이제 내가 복위하면 못했던 일들을 끝낼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너를 죽이는 것이다."
"백성들은 어차피 개돼지일 뿐이다. 적당히 먹고살게 해주면 주인이 누구인지 상관을 안한단 말이다. 이것이 그들의 천성이란 말이다. 네가 아직 젊어 세상을 모르는가본데 세상은 네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지도 않고 만만하지도 않다. 내가 죽어도 다시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쥐어짜는 놈들은 나오게 되어 있다. 백성들이 너의 개혁에 환호한다? 그들의 욕심을 채워주기 때문에 너에게 환호하는 것이겠지. 결국 백성들도 수가 틀리면 언제든지 네 등에 비수를 꽂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음..."
폐주는 도저히 말이 안통한다고 여겼음인지 손짓으로 왕유소를 처형장으로 보냈다.
- 이리하여 폐주는 아버지 경왕의 측근세력을 두번째로 소탕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두번 다시 경왕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다 잘라놔야 할 심산이었다. 자기가 한 짓이 있는지라 경왕은 연금 상태에서 거의 반미치광이 노인으로 변해갔다. 어차피 제정신이 아닌지라 폐주가 상대해봐야 시간낭비였다. 이윽고 1308년 7월 경왕은 향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뒷말이 무성했다. 폐주가 생각처럼 빨리 안죽어 죽였다느니, 이전에 내통한 혐의가 있는 폐주의 왕후 보다시리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죽였다느니 하는 등이었다. 경왕의 장례는 졸속으로 빨리 행해지고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다시 고려왕이 된 이지부르카는 속으로 뇌까렸다.
(아버지...비록 이승에서는 악연이었지만 저승에서 눈 똑바로 보고 또 보시옵소서. 이 이지부르카...아니 왕장의 꿈이 어떻게 이 세상을 뒤덮어 버리는지를 말이옵니다...)
- 하야스칸이 대원제국의 새로운 대칸에 오르자, 이제 폐주는 당장이라도 경왕을 폐하고 자신이 다시 고려왕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경왕이 죽기만을 기다렸는데, 이윽고 경왕이 죽자 폐주가 다시 복위하니 그가 바로 선왕이다.
- 선왕은 왕위에 복귀하자 이전에 멈췄던 여러가지 개혁을 재추진했다. 그는 경왕때 일본원정이나 합단의 난으로 안그래도 오랜 몽골과의 항쟁으로 쑥대밭으로 되어있던 고려가 한층 더 피폐해지고 백성들도 모두 거지꼴을 못 면하고 있던 사정을 잘 알았기에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가 세자때부터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기도 했다.
- 그가 이전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선포한 30여항의 개혁안은 고려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고려병'을 전면적으로 고치고자 하는 뜻을 담았는데, 조세의 공평, 인재등용의 개방, 농상업의 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엄단 등이 있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러한 일련의 개혁들 중 그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권문세족과 사원세력의 소금 전매제를 금지시켜 백성들에게 폭리를 취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았다는 데 있다. 또한 권문세가들이 불법적으로 독점한 토지들을 백성들에게 돌려주거나 나눠주어 살 길을 열어주고자 도모했다.
- 왕의 목적은 일단 고려를 안정시켜 백성들에게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비록 자신의 야망이 대륙에 있다 해도 자신이 왕으로 있는 고려는 자신의 중요한 기반이었고 고려를 바탕으로 자신의 발언권도 존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쿠빌라이 대칸의 외손자라는 혈통이 있다해도 자신의 반쪽은 고려인이었으며 더구나 부계였기 때문에 이것도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만큼은 고려에서 자신의 개혁이 완전히 자리잡도록 하기 위해 끝을 보고자 할 참이었다.
- 선왕이 고려에서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재추진하는 동안 그는 꾸준히 대도의 대칸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소통했다. 이것은 오늘날의 일종의 인터넷 이멜의 역할을 했다. 당시 몽골의 발달된 역참제 덕에, 또한 개경와 대도의 거리가 생각처럼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1주일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형님, 제 옆에 형님이 없으니 뭔가 공허합니다. 하루속히 몽골 황실의 어른으로서 대도로 와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대칸,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지금 고려에서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이 마무리되는대로 대도로 들어가 대칸을 보좌하겠습니다>
<대원제국이 저와 형님의 것이라는 제 선언을 벌써 잊으신겁니까? 세상의 중심으로 오셔서 제국을 돌보셔야 하는 것이 곧 형님의 나라 고려를 돕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대칸>
<바얀과 다란칸 등만으로는 제 통치에 문제가 많습니다. 더욱이 이번에 공을 세운 옹기라트 부족과 감마라칸의 압박도 상당하구요. 여기 대도의 정세도 한시가 급합니다. 형님이 빨리 오셔야 중심을 잡고 보다 제가 안정적으로 통치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려야 대도에서 그리 멀지도 않으니 대도에서 다스리는거나 개경에서 하는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제국의 안정이 먼저입니다. 형님>
- 대칸이 매주마다 사람을 보내 대도로 들어오라고 압력을 넣으니 선왕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칸이 계속 대도로 오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으로 대칸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선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선왕은 대칸에게 제국의 경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기도 했다. 오랜 숙고 끝에 선왕은 일단 대도로 가서 직접 대칸과 상의하기로 했다. 복위 후 불과 2개월만에 일이었다. 그러나 이전에 경왕처럼 온 조정신료를 대동하고 대도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숙부 제안공 왕숙에게 정권을 대행하게 하고 대도로 길을 떠났다.
"이렇게 닥달하시면 애당초 왜 저를 고려로 보내셨습니까?"
선왕이 대칸에게 한 말이었다. 불경스러운 언사였으나 선왕과 대칸 사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형님."
"그렇게 여기 대도 사정이 않 좋습니까?"
"남방에서도, 티벳에서도, 북쪽 초원지대에서도 모두 반란의 조짐이 보이고 안으로는 형님이 안 계신 사이에 감마라칸과 옹기라트 부족 원로들이 연합해 바얀과 다란칸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형님이 여기 계셔서 절 좀 도와주시면 제가 안심이 될 터인데 말이지요."
"저도 제 앞가림을 할 뭔가가 필요해 일단 고려왕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한 것입니다."
"제가 형님께 뭘 더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제가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이고 고려국왕이지만 이제는 대칸이 계신 이상 보다 확실한 지위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 선왕이 거기까지 말하자 대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건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눈빛이어서 선왕을 내심 당황하게 했다. 권력이란 결국 서로간의 신의마저 바꾸어 놓을 것인가...? 그러나 선왕은 이제와서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옛 고구려의 땅을 영지로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자 대칸이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형님...형님은 이제 저와 함께 대원제국을 다 가지신거나 다름없고 이미 고려를 다스리고 있는데 새삼 옛 고구려의 땅이 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고려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입니다. 고려왕으로서 옛 조상의 나라에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현재까지 대칸이 임명해 관료로서 다스린다면 모를까...그토록 거대한 영토를 봉한 예는 칭기스칸 이래 차가타이칸국, 오고타이칸국, 일칸국, 킵챠크 한국 이후로는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미 오고타이 칸국은 우리손으로 끝장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외로 만들어 주십시오." 선왕의 목소리도 단호해졌다. 이전에 보지 못한 선왕의 돌출행동에 대칸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선왕은 표정도 단호하게 지으며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하야스...이건 네 형님으로서 부탁하는 거다...너와 나 사이에 숨길 것이 무엇이 있더냐? 우리는 한 핏줄인데 말이다."
갑자기 선왕이 반말투가 되었으나 대칸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말씀하십시오...형님."
"나는 큰 꿈이 있다. 비록 외가는 몽골 황족에 닿아있으나 부계로는 나는 엄연한 고려의 황실 혈통이다. 우리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으로 항상 북쪽 땅을 염원해왔다. 대제국 고구려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이다. 차가타이 칸국, 오고타이 칸국, 일 칸국, 킵차크 칸국 등은 모두 대원제국에 복속해있지만 엄연히 하나의 제국들이 아니더냐? 나는 그것을 뛰어넘고자 한다."
대칸은 놀라기는 커녕 조용히 경청하기만 했다.
"...고구려 제국의 땅을 내가 받아서 나만의 제국을 세우고자 한다. 그래서 대원제국과 영원한 우호를 나누고자 한다. 나는 고려와 몽골 황실 양쪽을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에 그것은 나만이 할 수 있어..."
"고구려 이야기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옛날 쿠빌라이 칸께서도 고구려의 안시성 싸움을 기억하실 정도이고 옛날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 칭기스칸 할아버지의 먼 조상도 고구려와 발해에 닿아 있다는 전설도 있구요..."
"그래 동방의 그 전설적인 제국 고구려 말이다...결국 몽골도 고구려와 전혀 남이라고 할 수 없는 사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고구려 땅의 지배자가 되도 명분적으로나 아무 문제가 없다. 이미 우리 모두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들은 대칸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형님이 대원제국을 위해 세우신 공이 있고 지위로보나 제가 그런 파격을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허나 또 하나의 문제는 이미 그 땅은 칭기스칸의 외가쪽 부족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님이 완전히 그 땅을 차지하실 수는 없을겁니다. 그들을 평화적으로 복속시키고 그 지배권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또다시 대원제국에는 피바람이 불 것이고 이는 제가 절대로 원치않는 상황입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도 당장 그 땅을 절대적으로 지배할 권한을 달라는건 아니다. 일단 나를 봉해주고 차츰 내 세력을 넓힐 작정이다."
"그렇다면..." 대칸은 잠시 운을 떼다가 말했다. "형님을 심양왕으로 봉하면 어떻겠습니까? 자 이제 만족하시고 제 곁에서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심양왕..."
"옛 고구려 땅의 지배자를 뜻하는 봉호입니다."
- 선왕은 이리하여 '심양왕'이라는 봉호를 받고 지금의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땅의 지배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는 더더욱 고려에만 머물 수 있는 구실도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어차피 외교권도 없는 고려왕으로 내정간섭을 받으며 사느니 고려를 실제로 좌지우지하는 것은 대도이기 때문에 거기에 머물며 실력자로 행세하는 것이 고려를 위해서도 한층 낫다고 생각했다.
- 심양왕이 된 선왕은 만주 일대로 행차해 그 드넓은 벌판을 말달리며 옛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미 심양왕의 명성을 들은 만주 일대의 몽골 군벌들은 스스로 찾아와 심양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선왕은 그냥 대도에 눌러앉아 심양왕으로서 만주와 한반도 양쪽을 다 다스리는 처지가 되었는데 고려만을 염두에 둔 고려땅의 조정대신들에게 이것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고려의 전하가 고려에 안 계시고 대도에서 고려를 다스린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 어찌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반발이 일파만파가 되어 고려 조정에 퍼져나갔다. 비록 명분은 심양왕이 되어 만주 일대까지 형식적으로나마 지배하는 위치에 있으니 고려와 만주를 다 다스리기 위해서는 대도에 있는 것이 합당하다는 선왕의 교지가 있었지만 가뜩이나 이전 경왕때부터 피폐해있던 고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왕이 고려에 있어야 고려의 내정에 집중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 더욱이 고려나 심양왕 자신에 있어서 심각했던 사실은 심양왕이 고려에 있는 동안 야심차게 추진했던 일련의 개혁정책들이 계속적인 상황변화로 인해 꾸준히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심양왕도 이 점을 우려해 대칸의 소환명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급격한 개혁으로 인해 권문세족 등 기득권층이 속으로 칼을 갈고 있었는데 자신이 고려에 부재하면 이들이 준동하기가 한층 손쉬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심양왕은 자신이 대원제국의 실력자가 된 현 시국에서 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단지 동방의 작은 소국 고려의 왕이 아니라 대원제국의 일부분인 킵차크 칸국이나 일 칸국 등의 지위를 능가하는 동방의 대제국 고구려와 고려를 합치는 큰 야망을 실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려 조야의 반발은 그의 입장에서는 한심하게 여겨졌다. 물론 고려 백성의 민생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보다 큰 중심에 있으면 장기적으로 자신의 개혁 역시 보다 강력하게 추진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했기 떄문에 고려의 인내력이 요구되는 시점이었지만 그의 야망 전체를 내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의 설득 역시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