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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포럼 인문의 숲 열세 번째 만남
오늘도 어김없이 반가운 배담샘의 인사로 시작하는 수요일. 소소한 일상에서도 살아야 할 이유는 명징하다라는 메시지를 함께 전해주신다. 15분 스피치 연사로 이숙영 아나운서가 나왔다. 통통 튀는 진행과 재치 넘치는 순발력으로 활기찬 대한민국의 아침을 18년 간이나 책임져 왔던 그녀였던지라 일상에서도 늘 요란스럽고 시끌벅적하리라 속짐작을 했다간 큰 오산. 의외로 말이 없고 경청하는 것 좋아하는 만년 문학소녀. 그녀가 궁금했다.
경기여고 이화여대 출신의 전형적 모범생에 부모님이 다 의사여서 결핍없이 그 시대에 과외를 받아가며 전략가적 삶을 살았다는 그녀. 단신으로 피난 내려와 갖은 고생 끝에 의사가 되신 엄마가 천하 풍류 한량인 아버지를 남편으로 맞기까지 보여준 배포와 진중함은 악착 같이 학구적이고 최고가 되고자 하는 목표지향적 인간으로 성장하게 하였다. 그런 한편 세상의 멋은 다 누리고 사는 아버지의 풍류와 낭만적 정서가 또 자신의 영원한 감성의 원천 문학적 성향을 잉태시켰노라고 고백한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애착이 지나치나 대부분의 사안들에 대해선 융통성이 있고 수용적이라서 등소평의 흑묘백묘 관점을 좋아한단다.
문학에 대한 동경심은 영원하여 주류정서보다는 이방인적 기질이 다분한 편이다. 해서 소수의 소외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에 애정이 많은 편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토지>의 용이,<키다리 아저씨>같은 인물들을 좋아한다. <애첩기질, 본첩기질><맛있는 대화법> 등의 책을 쓰면서 강연도 할 기회가 있는데 자신에겐 쓰라린 경험이 없는 것이 마이너스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결국 ‘상처가 진주다’라듯이 세상에는 손해라고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나이가 들수록 <울지마 스톤즈>같은 류의 실제적 얘기들을 담은 인간미 넘치는 기록영화들이 좋아진다. 테마가 있는 문학여행을 다니길 좋아하는데 올해의 목표로 영국을 잡고 있다. 에밀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궤적을 따라가고프고 세익스피어 생가를 가고프다. 자신의 전생이 스페인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도록 스페인에 대해선 특별한 느낌이 있어서 까르멘의 도시 세비야를 방문했을 때의 탐미적 빛깔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그런 열정이 그녀가 입는 옷들에서 여지없이 드러나나보다. 플랑멩고의 정열을 담은 듯한 블링블링한 레이스와 확 파인 원피스, 형형색색의 화려함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어제 왔다 오늘 살고 내일 간다’ ‘다음 생이 내일보다 먼저 올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적당한 허무주의가 있는 편이어서 품위있게 죽을 권리인 안락사에 대한 문제도 상당히 허용적이다. 확실히 그녀 자신도 얘기하듯이 자신의 삶조차 제 3자의 시선으로 객관화시키는 작가적 시선이 있음을 알겠다. 삶과 죽음을 일직선 상에 두고 언제나 죽음을 함께 생각하며 밤에 죽고 아침에 살아나는 실존적 삶을 산다. 영원한 노마드족으로 경험의 참 가치를 생각한다. 의미보다는 재미를 성공 성취가 아닌 내밀한 즐거움을 누리고 살고 싶은 그녀.
튀는 것은 자신의 마케팅의 한 측면이었을 것이란다. 오히려 침잠하며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을 즐긴다. 가족이기주의보다는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측은지심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그녀는 죽음마저 드라마틱하게 연출하고 싶다. 브람스의 음악을 들으며 향 좋은 아프리카 산 커피를 마시면서 맛사지를 받으며 조용히 눈감고 싶다. 역시 사람은 겉보기만으로 다 판단할 수 없을 일이다. 반전이 있는 삶은 언제나 신선하다. 학창시절 라디오를 통해 통통 튀는 음성으로 목청껏 깔깔대던 그녀의 애드리브가 그냥 터지던 게 아님을 또 한번 실감한다. 지금까지도 일주일에 적어도 책 두 권 씩은 너끈히 읽어내고, 문학적 감성을 충전시킨 그녀의 일상이 현역 고정 라디오 프로그램의 아나운서의 내공으로 남아있다. 뜨거운 사람.이 숙 영!!!
동서양의 금융차이에 대한 역사적 이해
- 이동훈 대표-
인문의 숲 출신 명 강사라는 타이틀로 우리의 기대치를 한껏 높였던 이동훈 대표는 해외출장에서 바로 쫓아온 길이었다. 그 성의만으로도 감사함 그득이다. 비행기에서 막 내려 정신도 없다는데도 날카로운 눈빛이 살아 움직인다. 일주일 사이에 컨트리 호핑을 하고 온 명실상부한 글로벌화된 인간이라고 서두를 연다. 본격적 강의에 앞서 자신의 출장길에 대한 소회를 푸는 대목에서 그의 관점을 엿볼 수 있었다.
사업에 있어선 항상 합리적인 분석 후에 의사결정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앞선 인간에 대한 신뢰가 우선하는 사례를 들려준다. 74년 생,80년 생 미얀마 주류동업자가 박카스 수입을 원하는 상황이다. 6개월간 실무를 진행한 후 최후 낙점이 필요해서 파트너를 직접 보고 결정하겠다는 심산으로 오른 미얀마 길이었단다. 공항에 나온 상대들은 마치 조폭들을 연상케하는 험악한 외모였다. 하루 동안 코스를 돌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한 친구가 한국말을 곧잘 하였다. 알고 보니 1996년부터 4년간 인천의 한 중소 가구공장에서 불법체류를 하며 일한 경험이 있었다. 일주일 중 4일은 밤 12시가 넘도록 야근을 해서 받는 수당이 100만원이 좀 넘었단다. 2000년에 귀국하여 양곤에 산 땅으로 돈을 벌어 한국에 새우를 수출하다가 쫄딱 망했다. 그 후 열심히 일해서 주류업으로 연 매출 100억을 달성하는 럼주 공장까지 가지게 되었다. 2012년 한국에 패키지 여행을 왔는데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자신이 일했던 가구공장이었다. 사장님과 만나 회포를 풀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실히 일한 그를 작업반장으로 임명했고 그도 한국인의 끈기와 성의 정성 열정을 보고 배우며 악바리 정신과 기업가 정신을 일군 셈이었다. 그의 인간 됨됨이를 짐작하게 된 이대표는 파트너로 낙점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역시 ‘사람이 먼저’다라는 진정성 하나를 또 붙들게 된다.
동서양의 금융 스타일의 차이를 이대표는 쌀과 밀의 음식문화에서부터 찾아내었다. 따듯한 곳에서 자라나는 쌀은 동양을 대표한다. 쌀은 이모작도 가능해서 고대로부터 자급자족이 가능하였다. 자연스레 마을을 형성하여 농업문명이 발달해서 잉여 재산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결국 마을을 중심으로 현명한 촌로들의 리더십을 필요로 하고 조화롭게 잘 사는 방법을 연구해야 했으므로 철학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 정치적 기구와 제도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중앙집권제의 강력한 정치적 카리스마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언제나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닌 정치적 이유의 패권 다툼이 일어났다.
한편, 습하고 추운 곳에서 자라는 밀을 주식으로 하는 서양은 동양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밀은 수확 후 생으로 먹을 수 없어서 언제나 가공하고 불에 익혀 먹어야 했다. 자연히 대단위의 제분소나 오븐이 필요해져서 마을 단위의 산업시설 설치가 필수였다. Company가 빵을 같이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이런 욕구가 결국 돈을 중요하게 만들었고, 경제적 관념을 형성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또 오븐을 가동하려면 땔감을 구해와야 해서 벌목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에 더해 밀농사는 이모작도 불가능하며 한번 수확하고 난 땅은 척박해져 더 이상은 쓸모 없는 땅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히 토지가 필요하여 언제나 영토 확장이 관건이 되었다. 이런 경제적 이유와 영토확장의 필요성에 의해서 서양은 전쟁을 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의 아내였던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에도 숨은 비화가 있다.카이사르나 안토니우스는 로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아프리카 땅이 필요했다. 아테네 시내로 들어가는 동안 산마다 황폐화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이집트는 최대의 밀 곡창지였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비옥한 땅이 유지되어 유일하게 연작이 가능했었다. 결국 로마는 농사를 지어 경제적인 부분을 충당했어야 했었다. 서양의 전쟁은 늘 경제적인 이유가 절대적으로 민감사안이었다. 서양인들의 더치페이나 내 것 네 것이 분명한 경제적 계산 속이 모두 생존과 직결되었던 본능적 유전인자임을 알 수 있다.
동서양의 금융 스타일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동전의 발달과 화폐의 발달을 들 수 있다. 동양은 대륙경제로 바다로 진출하는 일이 잘 없고 황제나 국왕에 의한 중앙집권제의 통합된 지리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사신을 파견할 때도 왕은 인삼을 줘서 중국에 가서 그 인삼을 팔아 자신의 노자돈을 마련하게 하거나 물물 교환을 하는 등 보따리 수준의 교역만으로 충분했다. 소량 교환에는 지폐가 필요하지 않고 동전만으로도 충분했다. 또한 금화 은화는 그 자체로 값어치를 띠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고려 조선시대 때 화폐를 도입하려 했으나 신용사회가 형성되지 않아서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서양과 일본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해양경제를 펼칠 수밖에 없는 지역 간의 독립경제 체제였다. 영주나 기사 사무라이 등으로 대표되는 분리된 지리구조에서는 분업이 발달하여 서로 가공식품을 교환하는 사회였다. 대량교환을 해야 했으므로 환가의 증명인 화폐가 필요하게 되어 표준화된 신용사회가 정착되게 되었다. 스위스나 영국이 지금도 돈 장사로 돈을 벌고 있는 것이 이때로부터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금융체계가 발달한 나라였기에 세계적 금융위기에 영국은 오히려 덕을 볼 수 있었다. 중국이 GDP 총액으로는 세계 1위로 볼 수 있으나 금융 측면에선 동양이 탑 10에 들기는 요원하다. 서양에서 닦아온 금융 시스템을 하루아침에 따라 잡기는 힘든 이유이다.
금융의 발전과 붕괴의 역사적 사례를 살펴 보는 일은 또한 흥미롭다. 서양의 템플기사단의 사례를 통해서 은행의 기원과 역사를 살펴본다. 십자군 원정은 표면적으로는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으나 경제적 이유가 숨어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가 비잔틴 제국을 점령해서 거둬들이는 관세가 과해지자 그 관세를 철폐시킬 방법으로서 비잔틴 제국과 실크로드의 경로에 있는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교황청에 구원군을 청하여 일어났다.이에 수도자들로 결성된 템플기사단은 직업군인으로서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슬람 군대는 그다지 거칠지 않았기에 템플기사단은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운 좋게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었다. 십자군 원정이 본격화되면서 각 지역에서 약탈이 횡행했다. 황제나 국가를 위해 전쟁을 하는 동양과는 달리 용병문화가 발달한 서양의 군사들은 오로지 개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노략질을 하여 재산을 형성하였다. 군사들은 약탈한 금은보화를 집으로 보내려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이때 템플기사단은 이 재산들을 안전하게 찾을 수 있도록 은행 노릇을 시작함으로써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돈을 벌게 되었다. 템플기사단이 각지에 지점을 내고 어음을 발행하며 그들의 재산을 지켜주었다. 그 당시의 송금, 예금, 신탁 루트가 지금의 은행 금융 루트를 만들어 금융시스템화를 시작했다. 스위스 독일 등의 은행 엠블렘에 기사단 문장이 많은 것이 여기에서 연유한다. 지금 스위스 은행이 예금주 본인에게만 돈을 내어주는 전통이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사단이 번성하자 배가 아팠던 왕들은 교황의 승인 하에 기사단들을 금요일 밤에 모두 죽여버렸다. 이로부터 금융가의 저주인 ‘블랙 프라이데이’가 탄생되었다. 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견고한 금융시스템이 지금의 월 스트리트를 탄생시킨 것이고 보면 무슨 재주로 주식조작 같은 그들의 농간을 눈치채겠는가? 주식의 부침에 울고 웃는 어리석은 동양인들이 짠해지는 부분이다.
서양 금융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영국 South Sea Company 주가조작 사건의 배경에는 콜롬부스의 신대륙 항해가 있다. 캄보디아의 통후추가 현지의 360배를 받는 장사가 되었던 정도에 실크로드가 막히자 유럽 각 국들이 동남아 일대를 식민지로 삼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유럽의 왕들은 돈이 없이는 자신의 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으므로 언제나 영역을 확대 하기 위한 정복전쟁으로 이어졌다. 자신들의 기호를 위해서 타국 타 민족을 짓밟아도 되는 논리로 장착한 유럽제국주의들의 이기적 정복욕에 아연해진다.
1711년 로버트 할리 백작은 South Sea Company를 설립하고 대서양의 남쪽 무역 독점권과 식민지의 제품 면세권을 주면 영국왕실의 60만 파운드의 채무를 부담하겠노라 나섰다. 이에 지속적 유상증자로 주가를 조작한다. ‘커피 하우스’라는 남성들만 출입하는 고급 살롱문화가 탄생하는 배경이다. 남자들이 모였다 하면 투자에 관한 얘기들을 하였다. 남자들이 집에 돌아오지도 않으니 애조차 낳을 수 없다면서 남편 집에 돌아오기 항의운동은 벌이는 아내들까지 생겨났다. 짝퉁 거품회사가 300여 개가 만들어졌다. 거품 방지법을 발동함으로써 최초의 주식의 거품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결국 주식폭락으로 막차를 탄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쪽박을 찼지만 미리 돈을 번 사람들은 ‘밀리언에어’ 백만장자란 용어마저 꿰찼다. 프랑스나 미국 같은 곳에서도 똑 같은 회사들과 현상들이 존재했다. 300년이 지난 1989년 한국에서도 똑 같은 현상을 재연한 걸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는 끝이 없다.
한편 동양에서도 2,000년 전에 이미 금융위기의 역사가 있었다. 한 무제는 흉노족이 한 고조를 무너뜨린 적이 있어서 트라우마가 있었던 터라 흉노족을 극히 싫어했다. 흉노족이 기마병이 뛰어난 것에 늘 열등감이 있었던 한 무제는 장건을 보내 아라비안 말을 갖고 오게 하여 전투 말을 기르게 하여 너도나도 말을 사들이기 바빴다. 한 무제가 과연 흉노족을 일소해버리고 다시 농경문화화 되고 나니 말 값은 형편없이 폭락할 수밖에 없어서 이미 금융위기를 겪은 바가 있었다. 금융위기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오는 바로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과 같다.
일본은 일반적인 동양과는 여러 면에서 정서 상 다른 점이 많았다. 오사까의 거리에 가면 지금도 네덜란드와 덴마크 전통의상을 입은 젊은이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1592년 우리 나라에서 임진왜한을 겪던 그 시기가 일본으로서는 글로벌화의 원년으로 일본은 명나라에게서 배울 바가 전혀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 경희대 대학원 생들의 2/3가 중국인인데 그 중 10명은 한국어를 아주 잘 한다. 거의 시골 출신의 학생들로 한국에서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하고 와서 열심히 공부 중이다. 동남아에서도 한국에 대한 선망이 대단한데 임진왜란을 일으킬 당시만 해도 일본은 명나라를 그런 동경의 대상이었다. 조공을 바치는 일은 단순 정치적 이유만의 굴욕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조공은 중요한 무역 수단이기도 했다. 조공 한 개를 갖다 바치면 10개를 하사 받는 셈이었는데 명이 더 이상 일본에게는 조공조차 받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버렸다. 일본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런 중에 쇼군 일본에 온 유럽 열강들의 끝없는 유혹이 있었다.
기독교로 개종을 하기를 종용하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네덜란드만이 일본에게 교환 무역을 하자고 제안해왔다. 네덜란드 인들은 일본에 의학, 박물학,지리학 같은 지적재산권 사업을 시작했고 일본으로부터 은과 구리를 가져갔다. 미생물 현미경 등의 난학의 정보들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중화사상에 빠져있던 일본은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정보를 필사와 기록으로 남기며 디테일 터치가 강한 나라로 자리매김을 한다. 이로써 대동아라는 지리적 상상력이 확장 가동되면서 400년 후의 한일합방이 가능케 한 ‘대동아공영권’의 꿈을 배태시킨다. 일본에서 만나는 소녀들의 네덜란드 식 복장이 자연스러운 이유가 설명되는 부분이다. 동남아시아의 여러나라들 중에 미얀마가 신흥 잠재국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그 나라를 상대하는 일본의 주재원들의 전략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3~5년마다 주재원이 교체되어 일관된 전략을 수립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은 지역 붙박이 전략을 위해30년씩 주재하는 직원들을 흔히 본다. 우리나라의 중고 소나타가 1억씩에 팔리기도 하여 한류의 바람을 타고 인지도는 높였다고 하나 블랙 마켓 형성에 일조한 반면, 과연 일본인들은 모든 정통적 제조업이나 무역업에 있어 진작에 선점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동차 공장이 가동되니 이제 우리의 중고시장 진출도 힘들어지게 생겼으니 현지인들의 문화에 동화되어 현지 상황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그들을 당하기는 힘들다.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로 400년의 대동아공영의 꿈을 배태하던 저력을 지금도 여전한 고전적 전략으로 놓치지 않고 있는데 냄비 근성으로 단편적 그림만 그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동양의 맹주 중국의 금융사를 빼놓고 갈 수는 없다. 1800년대까지 세계 1위였던 중국의 흥망성쇠에 세계의 움직임이 다 들어있다., 1700년대 비단을 내다팔자 유럽으로부터 은이 미친 듯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산시성의 광산업이 활황을 띠면서 산시성에서부터 금융업이 시작되었다. 진상(晉商)들이 천진에서 상해까지 은을 가져가려면 도적들에게 빼앗기는 걸 두려워하여 은 보관증 어음에 해당하는 표호(票號)로 가져가 바꿔 찾는 것이 은행이 탄생하게 되었다. 신뢰와 신용, 규율을 생명으로 했기에 은행 직원들은 지점으로 발령이 나도 가족을 대동할 수 없었으며 도박 음주 같은 문란한 생활들이 금지되었다.고리대금 금지 등의 강한 규율을 적용시켰다. 신해혁명 후 청이 멸망하면서 은행들이 다 망하게 되어 은 하나가 중국을 망하게 했다는 말이 생겨났다. 중국의 은행 운영의 실패로 중국계의 금융 발달사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경제 규모로는 세계 1위에 육박했다 하나 세계 금융시장에서는 10위도 채 안 되는 기형적 현상은 동서양의 금융 흥망사에서 잘 보여준다.
수요포럼 인문의 숲 15멤버 육현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