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은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으로 호칭하고,
군자국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산해경은 중국 최고의 지리서이면서 신화집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작가는 하(夏)나라 우왕(禹王) 또는 백익(伯益)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205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화학자 손작운, 원가 등은 산해경을 동이계의 고서로 보았다.
중국의 문호 노신(魯迅)은 산해경을 무서(巫書)로서 규정하기도 했다.
무(巫)는 우리 민족의 원형이다.
춤은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표현 수단이기 때문이다.
산해경이 동이문화 원형과 깊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먼저 제시한 것이
중국의 학자들인 셈이다.
기록에 보면, 조선(朝鮮), 숙신(肅愼), 부여(夫餘), 예맥(穢貊), 삼한(三韓) 등
고대 한국을 지칭했던 나라들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고
청구국(靑丘國), 군자국(君子國), 대인국(大人國), 백민국(白民國),
삼위산(三危山), 불함산(不咸山) 등
고대 한국을 지칭했던 신화적 공간에 대한 표현도 자주 눈에 띠고 있어
친 동이계적 성향을 뚜렷이 표현하고 있다.
산해경은 한나라 때 한 가지씩 첨가되고
유흠(劉歆)이 고본(古本) 32권을 18권으로 정리했으며,
진(晋)나라(265-420)의 곽박(郭璞)이 기존의 자료를 모아 편찬하여 주(註)를 달았다.
산경(山經)과 해경(海經)으로 되어 있는데,
"동쪽 끝 탕곡(湯谷)에 부상(扶桑)의 나무가 있다"
"서쪽에 왕모(王母)의 산이 있어… 봉황의 알을 먹고,
감로(甘露)를 마시고" 라는 서왕모 이야기도 나온다.
황제(黃帝), 치우(蚩尤), 소호, 전욱, 고신씨, 예, 요, 순이나,
조선, 청구, 천독 등의 실제로 있었던 지명이 나온다.
또한 곤륜(崑崙)의 위치나 약수(弱水)의 원류(源流) 등을 설명했다.
순초(荀草)가 미인이 되는 약이라 소개하는 등
많은 약초를 소개하여 한방의 약학인 본초(本草)의 원류를 보여주고 있다.
내용 중에는 상상의 생물이나 동물이 있어 전설 속의 지리서라고도 한다.
사마천은 감히 말할 수 없는 기서라고 하여 믿을 수 없다고 하였으나,
초사(楚辭)의 천문(天問)과 함께 중국 신화를 기록,
역사를 고증하는데 있어 귀중한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민족에 대한 여러 별칭을 보자.
아사달 阿斯達/ 백의민족 白衣民族/ 청구 靑丘/ 대동 大東/ 동토 東土/ 동이東夷/
삼천리 三千里/ 금수강산 錦繡江山/ 군자지국 君子之國/ 동방예의지국 東方禮儀之國/
계림 鷄林/ 소중화 小中華/ 배달 倍達/ 해동 海東/ 단국 檀國/ 진역 震域/ 진단 震檀, 震壇/
제잠 ?岑/ 동방 東邦/ 아동방 我東方, 我東邦/ 근화향 槿花鄕/ 접역 ?域 등이다.
이로 보아 산해경은 동이의 신화 원형 기록이라는 사실이 확연해 진다.
존화양이(尊華攘夷)를 외치며 동이를 공박했던
공자도 ‘그 곳에 가서 살고 싶다(子欲居九夷)’고 소원한
동방예의지국의 의미는 이 처럼 산해경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산해경의 기록 원천은 천손민족의 시원을 다룬 부도지와
여타 우리 고사서에서 그 근원이 증빙되듯,
천손의 상고 역사를 취해 써졌음이 명백해 진다.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에 대해 어떠한 기록을 남겼을까.
최립(崔? 1539~1612)은 그가 쓴 간이집 제4권 사행문록(四行文錄)
‘한 순무(韓巡撫)에게 올린 글’에서 (상략)
‘그렇게 함으로써 성천자(聖天子)께서 맡기신 중한 뜻에 부응하여
’불보(不報)의 땅‘에 인의(仁義)를 극진히 베풀어 주신다면,
더 이상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하략)
‘불보(不報)의 땅’은 ‘군자의 나라라는 말로,
동방예의지국으로 일컬어졌던 조선을 가리킨다는 주를 달았다.
윤휴(尹? 1617-1680)의 백호전서 행장(行狀) 편에 보면
임금이 ‘동방예의지국으로서의 명성이 백세(百世)에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
나의 지극한 소원이다.’라 썼다.
윤휴는 주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의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라는
견지에서 새로운 분장·분구 및 해석을 시도하였던 것이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탄 받고 사사(賜死)되고 만다.
주자가례(朱子家禮)는 국시(國是)가 되고 의례절차의 모든 법식이 되어
대중 속에 확산되면서 공자나 주자의 논리에 반한 사상을 말하거나,
쓸 경우 사문난적으로 지목되어 정치적, 사상적으로 매장 당하고
죽임을 면치 못하고 말았다.
김장생(金長生)은 사계전서 제2권 서(書)에 ‘200년 동방예의지국’이라 했고,
정제두(鄭齊斗)는 하곡집(霞谷集) 서류(書類) 편에서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동방예의지국으로 자처할 정도’라 썼다.
역사의 기록이 엄연히 존재하는 데도
이를 간과했던 유학자들의 몸보신이 가련하다.
명나라의 눈치를 살펴서 일까.
소중화의 실리를 찾기 위한 복지부동이었을까.
왕조실록의 동방예의지국 기록은 인조 때 단 2건 뿐이며,
문헌에서도 10여 건으로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이 경우 예의지국 용어는 정치적 논리로 한계에 머물렀다.
당파에 의한 계층간 반목과 질시, 불신과 분노로 점철되었다.
역사를 외면하고 사대에 맹종한 조선 사대부들의 일신 안녕만을 추구한
복지부동이 남긴 유산이다.
지나인들이 우리를 회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불러 주었다는
일부의 시각차가 한심스럽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는 찾아야 할 때이다.
천손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되짚어 새겨 보자.
예의지국의 자긍심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고려장은 있었는가?’ 칼럼에서
동방예의지국의 예(禮)에 대한 변명을 삼고자 한다.
- 한눌의 고대사 메모 수첩에서.
한문수 2011. 10. 1. 1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