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희
아버지는 내게 '윤봉희'라는 나만의 이름을 지어주셨다. 지난 삶을 돌아보니 한 자락 커튼을 열 듯 펼쳐지는 기억 속에는 추억을 담은 다른 이름이 내게 많았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내 이름이 '봉기'인줄 알았다. 이모와 외삼촌이 우리 집에 오면 대문 밖에서부터 "봉기야" 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입학식 날, 가슴에 단 이름표에는 '윤봉희' 였다. 어린 마음에도 궁금했다. 왜 '봉희'를 이모들은 '봉기'라고 부를까? 부르기 어려워서인가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아나운서인 외삼촌도 그렇게 불렀으니까. 어느 날 이모에게 물었다. 이모들은 웃으며 부르기 쉬워서 그런다 했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신다.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숙제로 '손'에 대해 시를 지어 오라고 했다. 다음 날 국어 시간이었다. 출석을 부르던 선생님이 '윤봉희박사' 하며 큰 소리로 부르셨다. 아이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난 창피하고 영문을 몰라 대답하지 못했다. 출석을 마친 선생님은 지난번 숙제에 한 명이 만점을 받아서 박사로 부르기로 했다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숙제를 하며 내 손을 들여다보았다. 겨울 날씨에 밖에서 운동을 한 내 손등은 찬바람에 마른 사막처럼 갈라져 피가 나곤 했다. 나는 내 손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시로 표현한 것인데 그 마음을 공감하신거다. 그 후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제일 먼저 나를 불러 책을 읽혔다. 문예반에 들어오기를 권했지만 이미 배구반에 속해있음을 알고 아쉬워 하셨다. 한동안 친구들도 박사라고 부르며 놀렸다.
우리 학교 배구팀은 서울에서 우승팀이었다. 운동도 공부도 뒤처지지 않은 나에게 선생님들의 관심은 컸다. 어느 남자 선생님이 언제부터인지 나를 '봉이윤선달'이라 부르며 "너는 어디 물을 팔았느냐" 라고 놀리셨다. 그 말에 모두 깔깔 웃었다. 그 후로 나는 선생님들 사이에 '봉이윤선달'로 불렸다. 학창시절 많은 추억을 담은 내 이름을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직장에 다닐 때 내 이름은 '미쓰 윤'이었다. 몇 년 후 함께 일하던 동료로 어려움을 겪은 나는 회사를 떠나려 했다. 내가 그만두면 그 사람도 퇴사 해야한다며 한 번 더 생각해달라는 권유를 했다. 전무님은 어디든 가고 싶은 부서로 옮겨 줄테니 나오라고 했다. 전무님의 부탁에 거절을 못하고 자리를 옮겨 근무하였다. 그즈음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다른 건물에 근무하던 그 남자가 한 달 후 내 옆자리로 왔다.
운명이었다. 서로 다른 부서에 속했던 우리가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근무하게 되었다. 회사에 승진 발표가 있던 날, 우리 부서에는 아무도 없었다. 왠지 침울해하는 동료를 위해 제안을 했다. 공장에서 올라온 직원에게는 사장을,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그 남자에게는 과장으로 임명했다. 미쓰 윤은 무어냐고 묻기에 나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래도 이과장보다 입사 선배니 당연히 부장은 해야죠" 그날부터 내 이름은 윤부장이었다. 훗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저녁, 친척들이 있는 자리에서 무심코 부른 '이과장' '윤부장' 을 들은 고모가 물었다. "회사에서 네가 더 직책이 높은거니?"
우리 세 사람은 우리만 아는 직책을 불러가며 낄낄거렸다. 회사생활이 더 재미있었다. 어느 오후, 그의 누빈 바지가 내 눈을 붙잡았다.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이 다닌다는 대학을 졸업한 그였기에 그 바지는 의아했다. 가끔 시집갈 데 없으면 나에게 오라는 그에게 대꾸할 가치도 없다던 내가 누빈 바지를 보며 겉치레가 아닌 속이 찬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관심이 갔다. 내 꾀에 내가 넘어간 것이다. 몇 달 후 그 남자가 사표를 냈다. 인연이 여기까지인가 생각하였다.
그 남자가 퇴사한 날 저녁 무렵 옆 책상으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아버지라는데 아닌 것 같다며 건네준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퇴근 후 커피 한 잔 할 수 있느냐며 물었다. 서울역 앞 다방에서 만난 나는 갑자기 그만두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항에서 유연한 몸짓으로 춤을 추는듯한 금붕어를 우리는 한참을 보고 있었다. 남산을 걸을 때도 아무 말이 없었다. 버스를 타려는 나에게 갑자기 손을 내민 그는 주소를 부르라고 했다. 얼떨결에 불러준 주소를 갖고 그는 울산으로 직장을 옮겨 내려갔다. 소식이 궁금할 즈음 날아온 그의 편지. 보고 싶다거나 사귀자는 말도 없이 그냥 소식을 전하는 겉봉투에는 그의 주소도 없었다. 내 이름을 '금봉어'라고 적어 보내주곤 했다. 잊을만 하면 편지를 보내는 그가 신경이 쓰였다. 그때 불리운 그 이름 '금봉어'에 내 마음이 조금씩 열렸다. 답장을 할 수 없던 것이 그가 생각한 한수 였다. 그 한수에 내가 말린 것이었다. '금봉어'는 그의 애정이 담긴 나의 이름이었다.
아이를 낳으니 '수진 엄마' 가 내 이름을 대신하였다. 엄마라는 이름은 내게 많은 행복을 주었다. 딸이 유치원을 들어갈 즈음 남편은 외국으로 떠나 거의 8년을 근무하였다. 가족들과 떨어져 아이들이 자라는 것도 볼 수 없는 그에게 나는 매일 일기처럼 편지를 썼다. 그때 편지를 마치며 '당신의 희야' 라고 적어 보냈다. 왠지 촌스러운 것 같은 봉희라는 내 이름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가끔 '당신만의 여자'라고도 적어 보냈다. 8 년 동안 서로 오간 편지 묶음은 스페인과 미국으로 오며 보물처럼 가져왔다. '당신의 희야'는 그에게만 준 내 이름이다. 지금도 카드에 마음을 담아 전할 때 쓰는 내 이름이다.
또 하나의 이름, 딸이 불러주던 '취정'이다. 아이들이 학교가고 난 후 서예를 배웠다. 호를 지어준다며 선생님이 나의 생년월일을 물었다. 내가 단명할 운을 태어나 '취정'이라 지었다고 했다. 큰 병을 앓지 않으면 50대에 명이 끊긴다며 많이 쓰고 불러 푸른 잔듸위 정자에서 노년을 보내라는 마음이 담겼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딸은 눈물이 글썽이며 아빠와 동생에게 '오늘부터 엄마가 아니고 취정이라고 불러야 되. 우리가 많이 불러야 엄마가 오래 산대' 라며 연신 '취정'이라 불렀다. 집에서,교회에서도 '취정'하고 부르고 헌금봉투에도 '취정'이라 썼다. 사람들이 물었다. "누가 취정이야?" 그 이름은 딸의 간절한 바람을 담은 사랑이 담겨 있다.
살아오며 많은 이름과 함께 행복했던 추억은 나만의 항아리에 담아두고 꺼내본다. 믿음 생활을 하며 권사라는 직분을 받아 벗들은 나의 이름 뒤에 권사를 붙여 부른다. 이 세상을 떠나면 사람들은 나를 무어라 불러줄까? 그들이 불러주는 이름은 나의 살아온 삶을 말해주는 이름일 것이다. 비록 주위를 돌아보며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내게 주신 인연들을 사랑하며 살다가 남은 벗들에게 좋은 이름으로 남고 싶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 그저 곁에 있기만 해도 좋은 사람' 생각만 해도 따듯한 사람' 벗이 불러주는 이름을 생각해본다. 내가 살다간 흔적으로 영원히 남길 이름을 생각하며 오늘을 겸손히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