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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반복 공부법
거울을 닦듯 꾸준히 공부하라
젊은 시절 서울에서 유학하던 퇴계는 『주자전서』라는 책을 처음으로 구하게 되었다. 퇴계는 그 즉시 방문을 걸어 닫고 방 안에 조용히 틀어박혀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밥 먹는 시간 이외에는 전혀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며 방 안에서 그 책을 수없이 되풀이하여 읽고 또 읽었다. 그에게 있어서 공부는 수없이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서 몸에 배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오래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반복해서 읽고 사색하라]
퇴계 이황(李滉, 1501~1570년)은 16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그는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대학자로 1534년에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한 후 대사성, 공조판서,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낸 바 있다.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 시대 성리학의 쌍벽을 이루었으며, 후에 안동 도산서원을 창설하여 후진을 양성하였고 학자적인 양심과 태도를 끝까지 견지했던 공부의 대가였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퇴계학을 일으킨 퇴계 이황
퇴계는 진성 이씨집안에서는 처음으로 선조 원년에 의정부 우찬성과 홍문관 및 예문관의 대제학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다. 하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이후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상도 예안(禮安)으로 내려가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 혼신을 다하였다.
퇴계 이황은 조선 성리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사람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공부하여 새로운 경지로 발전시키고 체계화하였는데 그 덕분에 오늘날 성리학에는 '퇴계학'이라는 학파가 자리잡게 되었다.
명종실록33권, 21년 1566년 병인 6월 15일에 퇴계 이황에 대한 글이 적혀 있다
이황은 성리학에 전념하였으며 『주역』을 읽고 그 교훈을 따른 사람이다. 참된 지식과 실천을 위주로 공부하였으며 다양한 학설의 차이점과 장단점에 대해 깊이 깨우치고 그것을 주자의 이론에 의하여 절충하려고 하였다. 이황은 소견이 정미하고 도의 대원에 대하여 꿰뚫어 통찰하고 있었다. 도를 닦고 덕이 확립될수록 사람의 성품이 더욱더 겸허해져서 그에게 배우려는 학자들이 곳곳에서 모여들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학문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몸단속을 강조하였고 이후 사림의 풍속도 크게 변화하였다."
(출처-조선왕조실록 졸기』 중에서)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유학에 통달한 권위 있는 학자라는 의미에서 '유'이라고 불릴 만큼 높은 학식을 인정받았고, 사상적으로 깊이가 있는 그의 문하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퇴계 이황이 학문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 데에는 퇴계의 남다른 공부법과 공부에 대한 열정이 큰 원동력이 되었다.
퇴계 이황의 공부법은 전해지는 것만도 여러 가지이다. 그것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반복하여 사색하는 공부
2. 거울을 닦듯이 쉬지 않고 매일 하는 공부
3. 오래도록 하는 공부
4. 힘들 정도로 부지런하게 하는 공부
퇴계는 반복 학습을 강조하였지만, 무조건 외우기 위한 반복 학습은 하지 않고 깊이 사색하며 되새기고 숙고하여 그 의미를 깊게 느낄 수 있는 공부를 추구하였다. 그러한 공부법 때문에 퇴계 이황은 성리학을 사상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었다. 특히 반복해서 읽고 사색하여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글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공부법은 퇴계를 대학자의 반열에 올린 비결이었다.
자신의 머리가 좋다고 해도 반복해서 읽으며 그 내용을 되새기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책을 읽어도 얻을 수 있는 지식이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떤 책을 읽느냐보다 어떤 방법으로 읽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를 대표하는 이황의 공부법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살펴보자.
[퇴계 이황의 반복 공부법]
공부는 수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퇴계 이황의 골방 공부에 대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젊은 시절 서울에서 유학하던 퇴계는 주자전서』라는 책을 처음으로 구해 읽게 되었다. 퇴계는 그 즉시 방문을 걸어 닫고 방 안에 조용히 틀어박혀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밥 먹는 시간 이외에는 전혀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며 방 안에서 그 책을 수없이 되풀이하여 읽고 또 읽었다. 그의 공부는 골방에 들어가서 세상과 단절한 채 공부에 완전히 몰입하는 두문불출 공부법이었다.
그런데 퇴계 이황은 아무리 피곤해도 눕거나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자세로 책을 읽고 공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책이 너덜너덜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퇴계 이황의 공부법은 세상과 단절하고 오롯이 책에 몰입하여 읽고 또 읽는 반복 공부였다. 그는 어떤 책을 읽더라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완전히 깨우치기 전에는 그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일들에 요동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이렇게 치열하게 공부했으니 그의 학문이 동년배들을 앞서 나간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퇴계 이황은 단순히 기억하고 외우는 공부는 경계하였다. 많이 되새기고 숙고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을 뿐이다. 퇴계의 공부법은 오늘날처럼 바쁜 현대에는 실천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서둘러 읽고 넘겨버리며 공부하면 책을 읽어 얻는 소득이 별로 없다는 그의 말에는 반드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퇴계는 글을 아무리 오래 읽는다고 해도 익숙해지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려서 마음에 간직할 수 없다고 하였다. 배우고나서 익숙해질 때까지 노력하고 자기 몸에 배도록 해야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고 글맛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하였다.
공부는 매일 거울을 닦는 것이다
퇴계 이황이 자신의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공부하는 것을 거울을 닦는 것에 비유했음을 알 수 있다. 먼지와 때가 겹겹이 쌓여 있는 거울을 닦아서 본래대로 반짝반짝 윤이 나게 하려면 매우 힘들고 귀찮은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처음에는 몇 번 시도하다가 그 일이 고되고 힘들어서 그만 손을 놓아버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꾸준히 오래 반복해서 여러번 거울을 닦는다
면 거울의 때도 차츰 벗겨지고 나중에는 힘도 덜 든다.
퇴계는 공부 역시 처음이 힘들지 여러 번 반복하면 수고로움은 차츰 덜할 것이며 학문 역시 한층 깊어질 것이라고 거울을 닦는 것에 빗대어 공부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처음의 과정이 어려워서인지 이를 이겨내고 공부의 경지에 이르는 사람이 참으로 드물다는 안타까움도 함께 밝히고 있다.
또한 퇴계 이황은 아들에게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그 후에는 다시 쫓기 어려우니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부하는 날이 적고 또한 그것을 써먹는 날도 적어지면 칼날이 무디어지듯 공부한 것을 금세 잊고 만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사실에 매우 동감한다. 글을 쓰는 것이나 공부하는 것이나 원리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남들보다 많은 책을 쓸 수 있었던 비결은 남들보다 재주가 더 뛰어나고 더 많은 지식이 있거나 더 많은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로지 필자는 시간을 절대 낭비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쉼 없이 글을 썼기 때문에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주말이라고 글쓰기를 쉬고 공휴일이라고 글쓰기를 쉬며 기분이 좋지 않다고 글쓰기를 쉰다. 또한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글쓰기를 하루나 이틀 정도 쉬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몇 주씩 쉬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도저히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필자는 집필을 시작한 이래 하루도 책을 쓰는 것을 멈추거나 쉰 적이 없다. 매일 200자 원고지로 50장 이상은 꼭 쓴다. 쓸 것이 없어도 쓰고 몸이 아파도 쓰고 기분이 좋아도 쓰고 기분이 나빠도 쓰고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도 쓰고 쓸 것이 넘쳐나도 쓴다. 필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글을 쓰니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필자의 능력보다 많은 양의 글을 쓰게 되었고 글을 쓰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게 되었다. 퇴계 이황의 공부도 이와 같은 원리이다.
매일 거울을 깨끗하게 닦는 사람은 거울 닦는 것이 힘들지 않을 뿐더러 항상 깨끗한 거울을 쳐다볼 수 있다. 공부는 이렇게 매일 거울을 닦듯 해야 한다고 이황은 말하고 있다.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퇴계 이황이 말년에 유생을 교육하고 학문을 쌓기 위해 세운 안동 도산서원 전경(출처:문화재청)
꾸준히 오래 공부하라
공부는 정직하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청년기에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였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청년기와 중년기를 거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꾸준히 공부한 사람들이 학문의 성취도가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머리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조선 시대에 높은 벼슬을 한 사람들을 보면 공부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서 공부에 전념한 학자보다 많은 저술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공부는 정직한 것이다. 몰입한 만큼 보답을 하기 때문이다.
공부는 오래 할수록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진다. 이러한 사실을 퇴계 이황도 자신의 편지에 밝힌 적이 있다. 그는 성리학의 창시자 회암 주자를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자의 문자는 푸른 하늘의 태양처럼 밝지만 그 글이 깊고 은미한 까닭에 공부가 미숙하거나 마음이 깊지 못한 학자들은 그 뜻을 금세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니 '꾸준히 오래 하는 공부', 즉 '구원공부를 한다면 자신의 미숙함을 깨치고 선인의 본래 뜻에 다가갈 수 있다".
퇴계 이황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도 꾸준히 오래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나이 60세에 안동 도산서원을 지어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후학을 키우면서 남은 생을 살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너무 급히 나아가려 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퇴계는 자신의 『문집』에서 성급한 사람이 저지르는 공부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그는 거기에서 "성급한 사람은 공부를 급히 포기한다. 우물을 팔 때도 100자 깊이로 파야 하는데, 네다섯 번 파고 나서는 물이 솟아오르지 않는다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고 비유한 바 있다. 또한 “90자까지 팠는데 샘물이 솟아오르지 않는다고 파는 것을 그만둔다면 어찌 우물을 얻을 수 있겠느냐?"라는 걱정의 말도 잊지 않았다. “100자까지 파내려가서 원하는 샘물을 얻는 사람이 되라"는 퇴계의 당부를 우리도 기억해야겠다.
힘들고 부지런하게 공부하라
퇴계 이황은 자신의 말처럼 일생동안 학문을 부지런히 닦고 늙어서도 고달플 정도로 독실하게 공부하였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월천조목은 임금에게 스승이 공부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고한 적이 있다. 이는 스승 이황의 문집을 편찬하기 위해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는 상소>라는 글로 남아 있다.
신의 스승 이황은 평생 학문 공부에 온 힘을 다하였으며 늙어서는 더욱 주렴 정자형제의 학문을 본받아 유학의 바른 학통을 깊이 터득하고자 힘썼습니다. 제 스승의 글은 모두 마음과 생각을 맑게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켜야 할 도리를 부양하는 것이니, 이는 전대의 성인을 계승하여 후대를 계몽하려는 것입니다. (출처-조목, 『월천집』 권2, 「丙戌辭職疏」 중에서)
퇴계가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세계적인 석학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퇴계는 그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평생 힘들고 고달픈 공부를 통해 일가를 이룬 것이다.
퇴계의 공부법은 마음과 뜻을 다할 뿐만아니라 모든 것을 투자하는 공부이다.
스승 이황의 문집을 편찬하기 위해 벼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힌 월천조목의 『병술상소서』(출처:한국고전종합DB)
이런 공부를 '근고공부'라고 할 수 있다. 퇴계 이황에게서 우리 후손들이 배워야 할 공부 자세는 시련과 역경, 최악의 상황과 현실에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는 면학 정신이다.
그는 집에 식량이 자주 떨어졌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또한 새벽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까지 한시도 마음을 흩트리지 않고 구도 자세를 유지하며 의관을 정제하고 말없이 앉아 심신을 수양하는 공부를 하였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퇴계 이황은 힘들고 부지런하게 공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이 축나고 병이 날 정도로는 공부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퇴계 본인도 공부에만 매진하였기 때문에 오랜 지병을 앓았다며, 후학들에게는 꾸준히 오래 공부하려면 잘 때는 자고 일어날 때는 일어나며 틈틈이 자신의 심신을 살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어떻게 공부를 실천할 것인가]
인격을 위하여 공부하라
퇴계 이황이 남긴 글 중에 남의 이목을 생각하여 공부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인격을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 있다. 그는 인격을 위한 공부를 하려면 "우주의 진리와 인간의 윤리도 덕을 마땅히 알아야 하고, 또한 덕을 베푸는 행실을 알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내 몸과 내 몸 가까운 곳에서부터 공부를 시작하고,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숨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숨은 공부란 세상의 출세에 연연하는 공부나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공부가 아닌, 자기 자신의 성장을 위한 공부를 말한다.
퇴계 이황은 인격을 위한 공부를 강조하였기에 성현의 말을 앵무새처럼 읊는 그런 외형적인 공부를 경계하였다. 즉 수박 겉핥기식
월천 조목이 학문을 배우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월천 서당(출처:문화재청)
공부를 매우 경계한 것이다. 퇴계가 강조한 것은 '涵養'과 '體察'이었다. 함양은 학식을 넓혀 심성을 닦는 것이고 체찰은 몸으로 익혀 실천하는 것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함양은 마음을 수양하는 마음공부이고 체찰은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위한 공부, 남을 위한 공부
퇴계에게 공부는 '심성을 올바르게 갈고 닦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공부 또한 그는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의 공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두 가지 공부 중 하나는 '자신을 위하는 학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남을 위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신을 위하는 학문은 나를 위해서 마땅히 행해야 할 학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이고 남을 위한 학문은 깨닫고 실천하는 학문인 '위인지학(爲人之學)'이다.
중국의 유교 사상가이자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의 한 사람인 맹자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
지금 이시대에는 자기를 위한 공부가 아닌 출세와 학벌, 승진과 부와 명예를 위한 공부인 남을 위한 공부가 횡행하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공부하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요하고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강요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이다. 공부를 해야 좋은 대학을 갈 수 있고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으며, 좋은 직업을 가져 돈을 많이 벌고 명예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이유는 자녀의 출세와 성공 때문이다.
이것부터가 위인지학이다. 하지만 과거 조선 시대 퇴계를 비롯한 참된 선비들은 출세와 성공을 위한 공부가 아닌 자신의 성장과 완성을 위한 공부를 강조하였고, 자기 자신도 그러한 공부를 평생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조급함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
퇴계 이황은 같은 시대의 학자였던 남시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공부에 대한 조급증, 생활고나 이익, 손해, 출세나 이득, 명예와 같은 것에 연연해하는 마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단 이것은 공부뿐만이 아닐 것이다. 무엇을 하더라도 이 두 가지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맹자』의 「공손추公孫丑」편에 '알묘조장(揠苗助長)'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온다. 송나라 사람이 곡식을 빨리 자라게 하려고 그 싹을 조금씩 뽑아 올려 주었는데, 다음날 가보니 그 곡식들이 모두 말라 죽었다는 데서 나온 고사로 지나치게 욕심을 내어 조급하게 서두르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비유를 예로 들은 것이다. 조급한 마음에 서두른다면 도리어 해를 본다는 이 이야기는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곤궁함, 출세, 상실, 명예, 치욕, 이익, 손해 등에 마음을 지나치게 쓰거나 연연해해서는 안 된다"고 퇴계는 조언하고 있다.
그는 공부는 짧은 기간에 완성할 수도, 도약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즉 공부는 끝이 없고 평생 해야 하는 것이기에 단기간에 끝내려는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자나 증자처럼 훌륭한 선인들도 공부를 다 마쳤다고 말할 수가 없는데, 그보다 못한 사람들이 감히 공부를 마쳤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그는 반문한다.
또한 퇴계 이황은 후일을 기다리지 말고 지금 당장 공부를 시작할 것이며, 의심하여 머뭇거리지 말고 자신의 형편에 따라 공부에 힘을 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치를 구하는 것과 마음을 기르는 것” 두 가지를 병행하는 공부를 하라는 뜻이다.
퇴계 이황의 말처럼,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며 힘들고 부지런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단번에 성과를 얻지 못한다고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공부한다면 우리도 반드시 그 이치를 얻는 날이 올 것이다.
주자서절요 朱子節書節要』는 1561년(명종 16) 퇴계가 『주자전서』의 「서간문」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뽑아 편찬한 책이다. 『주자전서』는 저자 주희의 대인관계와 사우관계 및 당시 교유하던 인물들의 정보, 송나라의 역사, 주희의 학문과 사상이 모두 함축되어 있는 성리학의 입문서이다. 이황은 주자전서』 중 특히 「서간문」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그중에서 성리학 경전 연구와 정치, 사상 등에 관한 내용만을 추려 『주자서절요』를 완성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의 성리학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주자서절요』의 출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주자전서』 전반에 관한 연구가 영남학파는 물론 기호학파에서도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이 책은 그 방향성을 제시한 자료로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