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이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글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불 속을 누벼 누벼
너른 들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ㅡ『1984년《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황인숙>
1958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동서문학상(1999).김수영 문학상(2004).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고』 (1988),
『슬픔이 나를 깨운다.』 1990),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1994),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1998), 『자명한 산책』 (2003),『꽃사과꽃이 피었다.』(2013)이 있다. 그 외 산문집, 소설등도 있다.
소감 /박경채
이 시를 읽으며 사기 그릇에 담긴 우유나 핥으며 주인의 대접에 일상을 맡기고
어슬렁거리는 냥이들이 왠지 게으르고 비루하게 느껴졌다. 혹독한 야생도 유감없이 만끽하는 들고양이의 당찬 일상이 훨씬 매력있어 보였다.
작고 다부진 고양이로 태어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야생 고양이의 일상이 흥겹게 상상되었다
그렇다고
정말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었을까
살아가는 일이 그러하리라
시 쓰는 일 또한 그러하리라
뭔가를 얻기 위해
고유의 자신을 팔 일이 아니다
고유의 자신을 갈고 닦고 빛내어
이루고 싶은 꿈을 성취해 갈 일이다
흥겹고 앙큼한 야생 고양이처럼...
첫댓글 시와 해설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