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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09
사망 50년, 아직도 처칠을 찾는 영국인들
영국에는 매년 정초가 되면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1874~1965)에 관한 기사들이 자주 보인다. 1월 24일이 처칠의 서거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그 50주년이라 유독 처칠에 대한 기사가 많이 보이고 행사도 많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사태 때 ‘만일 처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글을 적어도 3군데의 매체 지면에서 본 적이 있다. 영국인들에게 아직도 처칠은 국가 위기 때 의지할 수 있는 지도자라는 뜻이다.
그런 영국인의 심정은 2002년 영국 공영방송 BBC가 시청자들을 상대로 벌인 ‘위대한 영국인’ 투표에서도 볼 수 있다. ‘위대한 영국인’ 1위가 놀랍게도 정치인인 처칠이었으니 말이다. 세계인 누구나가 다 아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같은 역사적 인물이 아닌 현대 정치인이 어떻게 1등을 할 수 있었는지는 좀 과장하면 불가사의다. 어느 나라나 정치인 혐오가 제일가는 소일거리일 뿐 아니라 아무리 세상을 구한 위대한 정치인이라 해도 공과가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평가할 때만은 굳이 허물을 따지지 않는가 보다. 특히 세기의 악마라는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자신들을 구한 처칠을 평가할 때 만큼은 그의 숱한 허물을 덮어두고 싶은 것 같다. 참고로 당시 BBC 여론조사에서 2위는 우리에겐 좀 낯선 과학자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이 차지했고 이어 3위가 다이애나 왕세자비였다. 이어 과학자 찰스 다윈, 대문호 셰익스피어, 과학자 아이작 뉴턴, 비틀스 멤버 존 레넌, 엘리자베스 1세 여왕, 호레이쇼 넬슨 해군제독, 혁명가 올리버 크롬웰의 순서로 10위를 채웠다.
▲ 영국에서 새롭게 발행을 준비 중인 처칠 얼굴이 들어간 5파운드짜리 화폐 시안. / ⓒ 연합
영국인들은 위기상황에서 앞이 잘 안 보일 때는 역사에서 혜안을 가졌던 지도자들로부터 교훈을 얻으려 한다. 국가 재정문제로 사회복지를 줄이려 할 때는 일찍이 서민들의 복지를 외쳤던 찰스 디킨스를 불러와 ‘당신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 건가?’라는 질문을 던져 문제를 풀려고 한다. 미묘한 가족, 애정 문제가 터져 나왔을 때는 인간 갈등의 전문가인 셰익스피어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지난 5월 우크라이나 사태가 터졌을 때 ‘만일 처칠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온 게 당연하다. 특히 처칠은 러시아 관련 문제라면 누구보다도 전문가였으니 말이다.
당시 구체적으로는 ‘처칠이라면 푸틴의 군대가 크림반도를 병합할 때 영국군을 파병했을까?’라는 질문이 나왔다. 처칠 지지자들은 2차대전 때 나치에 대해 단호한 행동을 취하고 러시아인들의 끝모르는 야심을 아는 처칠이 분명 파병을 해서 초기에 막는 식으로 대처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논자들은 1938년의 처칠(2차대전 발발 전)을 보지 말고 1919년의 처칠(러시아혁명이 진행 중일 때)을 보라고 반박했다. 1차대전 이후 러시아가 10월혁명에 휘말렸을 때 처칠은 볼셰비키가 이기기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으면서도 각종 무력 개입 아이디어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는 것이다. 결국 백계러시아인(White Russian)이 이기도록 직접 개입해서 돕지 않았다.
때문에 일부 논자들은 처칠이었다고 해도 아마 지금 서방이 펼치고 있는 경제제재 이상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 이유로 처칠이 재무장관 출신이고 승부가 확실치 않을 경우 함부로 개입하지 않는 형이라는 점을 들었다. 실제 처칠은 결코 모험을 하는 정치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손익을 철저히 계산해서 움직였다. 이는 젊은 시절 터키를 상대로 벌인 갈리폴리전투의 쓰라린 경험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갈리폴리전투의 패배로 처칠은 자신의 첫 고위직인 해군장관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처칠은 2차대전 중에도 프랑스·소련을 비롯한 연합국 모두가 유럽 북부전선 작전을 시작하자고 난리를 쳤지만 끝까지 버텼다. 일단 지중해와 아프리카에서 승기를 잡은 후 작전을 벌여도 늦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처칠은 지중해와 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난 뒤에야 북부전선에서 전투를 펼쳤다. 보기보다는 신중한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나토군이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한다면 처칠이 반대했을까’라는 질문에는 상당수 논자들이 “아마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1919년 10월혁명 때도 처칠은 공산주의자들을 철저히 미워하면서도 영국 정부가 볼셰비키 러시아를 국가로 빨리 승인하라고 설득하는 입장이었다. 무역으로 실리를 먼저 취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영국은 가장 먼저 소련을 승인했다. 그 결과 지금도 러시아의 영국대사관 차량번호가 1번이다. 러시아는 자신들을 승인한 순서대로 외교관 앞자리 숫자를 줬기 때문이다.(참고로 북한이 87번이고 한국이 124번이다.)
영국은 명분도 중요시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훨씬 실리를 챙기는 나라이다. 이런 면에서는 처칠이 대표적인 지도자이다. 그래서 처칠은 비록 푸틴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절대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우크라이나 사태에 처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에 대한 결론이었다.
우크라이나 사태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요즘 영국에서는 오는 5월 총선에서 가장 큰 이슈로 등장할 영국의 EU 탈퇴 문제에까지 처칠의 혜안을 빌리려는 시도가 나온다. ‘이런 세기적인 위기를 처칠 같은 지도자 없이 헤쳐나갈 생각을 하니 무섭다’는 한 논자의 말처럼 영국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두리번두리번하는 아이 같은 심정인 모양이다. 요즘 영국에서 떠오르는 제3당 영국독립당은 독립당대로 처칠의 반유럽 발언을 들먹이면서 분명 처칠은 EU 탈퇴의 결정을 서슴없이 내렸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고, EU 잔류 지지파들은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을 창시한 사람이 바로 처칠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금도 칭찬받고 있는 처칠의 대표적 혜안은 러시아에 관한 것이다. 2차대전이 채 끝나기도 전부터 처칠은 공산주의를 세계에 수출하려고 하는 소련의 야심을 줄기차게 경고했다. 그때 나온 유명한 말이 ‘철의 장막’이다. 처칠은 제정러시아 피터 대제의 서진(西進)정책부터 시작된 욕심을 지금 막지 않으면 나중에 비싼 대가를 치른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11월 영국 언론들은 처칠이 냉전 중인 1947년 러시아에 원자탄 투하를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다는 내용의 미국 정부 서류가 공개되었다고 보도했다. 처칠은 당시 소련의 야심을 가만히 두면 더욱 커질 것을 염려해 아예 시작부터 싹을 자르자고 미국 방문 중 우파 공화당 중견 정치인에게 심각하게 제안했다는 것이다. 지금 원자탄을 사용해서 소련을 약화시키면 장래의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는데 그냥 두면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트루먼 대통령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은 원자탄을 개발하지 못했고 1949년에야 시험에 성공했다. 당시 영국의 야당 당수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처칠은 미국에 놀랄 정도로 진지하게 이런 제의를 했다. 2차대전의 우방국인 소련인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희생을 치르고라도 소련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모스크바 한복판의 크렘린궁이 그 목표였다. 처칠은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2~3년 내에 소련이 원자탄을 개발할 것이고, 그러면 바로 미국을 공격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세계는 공산주의자 손안에 다 들어간다고 설파했다.
그러나 처칠은 1951년 다시 집권을 하고 나서는 소련에 대한 원자탄 공격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처칠이 예견한 철의 장막이 ‘발트해의 스테틴에서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터까지’ 쳐져서 구소련이 해체되는 날까지 존재했다. 이렇게 처칠은 러시아를 처음부터 끝까지 경계했다. 처칠이 러시아에 관해 한 제일 유명한 말은 1939년 러시아가 독일과 리벤트로프 몰로토프 평화협정을 맺었을 때 했던 ‘나는 러시아의 행동을 전혀 미리 짐작할 수 없다. 그들은 불가사의 속의 신비에 싸인 수수께끼(A riddle wrapped in a mystery inside an enigma)이기 때문이다’였다. 그래도 처칠은 러시아를 제대로 잘 이해한 유일한 유럽 지도자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처칠의 혜안은 1차대전이 끝나고 유럽이 평화무드에 젖어 있을 때 혼자서 독일의 재무장을 경계하면서 공군 창설을 비롯해 영국군의 군비강화를 외친 점에서도 빛난다. 그래서 당시 세상은 그를 호전주의자로 취급했다. 하지만 정확하게 처칠은 외로운 전쟁준비주의자였다. 1차대전으로부터 지친 사람들은 더 이상 전쟁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더더욱 군비 재무장에 대한 처칠의 주장은 인기가 없었다.
처칠은 2차대전을 ‘불필요했던 전쟁’이라고 불렀다. 만일 유럽이 모두 일찍부터 독일의 위험을 감지하고 군비를 강화했었다면 히틀러가 감히 전쟁을 일으킬 야심을 품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랬으면 유럽은 불필요한 전쟁을 막을 수 있었고 7300만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고 엄청난 재화를 낭비하는 인류 최고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했다. 평화를 이루는 최선의 방법은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라는 모순된 처칠의 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2차대전과 관련해서도 처칠의 선견지명과 그가 미래를 보는 위대한 정치인임이 결국 증명되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처칠이 옳았음을 느꼈고 결국 영국인들은 그를 1940년 총리로 만들었다. 그때 처칠은 운명을 이야기했다. 자신은 이런 일을 위해 지금까지의 삶을 준비했었다는 운명을 느낀다면서 총리 취임을 했다.
▲ 처칠이 1952년 런던 다우닝 10번가 총리실 정문 앞에서 웃고 있는 모습. ⓒphoto 연합
개전 초기 영국은 혼자였다.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모두가 함락되고 혼자서 독일과의 전투를 감당해야 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연합군의 항전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영국 본토로 쏟아져 들어오는 독일 공군의 공격, 이른바 ‘영국 본토 공중전(Battle of Britain·영국 상공에서의 독일 공군과의 공중전)’, ‘영국 본토 공습(Blitz)’을 앉아서 당해야 했다. 영국 혼자서 거의 전쟁을 짊어져야 하는 상황이어서 전황은 암담했다. 바로 이때 지도자로서 처칠의 능력이 발휘되었다. 처칠의 단호한 결전 의지를 다지는 연설은 영국 국민들에게는 유일한 위안과 안심의 메시지였다. 공습 중 세인트폴성당이 포연 속에서 몸 성하게 우뚝 솟은 흑백사진은 당시 영국인들의 사기를 진작시켰고 영국인의 저항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영국인들은 처칠을 파시스트 독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줄 파수꾼으로 여겼다. 처칠은 서유럽의 생존 전망이 정말 어두울 때 오로지 혼자서 밝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말했다.
처칠의 소통 능력은 천재적이었다. 전시 동안 처칠은 ‘항상 보이는 지도자(visible leader)’였다. 군수공장, 폭격 맞은 집, 군인 막사들 어디나 방문해 국민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이는 당연히 신문에 기사로 났다. 국민은 자신들의 지도자가 항상 자신들과 같은 보통 사람들 가까이 있음에 안심하고 친근감을 느꼈다. 당시 처칠은 하루에 18시간을 일했다. 수도 없이 많은 전선과 공장을 방문했고 해외방문도 이어졌다.
처칠은 초인적인 체력을 발휘했다. 아주 고령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젊은이들보다 더 심하게 일을 했다. 전쟁 중인 1940년 7월부터 1945년 7월 사이에 처칠의 인기는 한 번도 78% 이하를 내려간 적이 없었다. 거의 주간 행사처럼 폭격을 당하고 자신과 이웃의 자식들이 죽어 나가고 식품을 배급받아 겨우 연명하고 심지어는 현직 장관이 소시지를 한번 먹기 위해 호주대사관 파티에 갈 정도였는데도 국민들은 처칠을 무조건 믿고 지지했다.
당시 처칠은 자신의 목표는 승전이라고 항상 얘기했다. 그 말이 국민들에게 쉽게 이해가 됐다. 처칠의 발언은 항상 간단하고 짧았고 같은 내용의 말을 반복했다. 그래서 국민들은 그의 말을 쉽게 이해했고 기억했다. 국민을 세뇌시킨 셈이다. 처칠은 지도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처칠은 자신이 그런 이상을 가졌다고 확신했다. 확실하고 명백한 미래에 대한 이상은 국민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향으로 가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전쟁 중 처칠의 이상은 전쟁에서의 승리 말고는 없었다. 승전이 처칠의 최상의 이상이었다. 그래서 처칠이 “나는 당신들에게 피와 고통과 눈물과 땀밖에는 드릴 것이 없다”고 했을 때도 그를 이해하고 모두들 따랐다. 아직도 처칠의 유명한 연설 녹음을 다시 들을 때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는 영국인이 많다. 불안에 떠는 국민들을 다시 한 번 강철처럼 뭉치게 해서 조국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각오를 하게 만들었다고 영국인들은 믿는다.
전쟁영웅이라는 것 말고도 지금까지 처칠이 영국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귀족 집안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결코 귀족 티를 내지 않고 일생을 통틀어 평민들 속에서 평민들처럼 살고 싶어했다는 것도 한 가지다. 그는 상원으로 갈 수 있는 런던 공작이라는 귀족 칭호를 수여하겠다는 여왕의 제안을 사양하고 은퇴하는 날까지 하원에 남았다. 무덤도 그렇다.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묻힐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냥 자신의 고향 마을 조그만 교회의 가족묘지 부모 옆에 묻히길 원했다.(그래도 웨스트민스터사원에 가면 서쪽 정문 안 바닥에 처칠을 기리는 큼지막한 기념판이 붙어 있다.) 거기다가 결혼도 귀족들의 결혼이 상시로 열리는 웨스트민스터사원이 아닌 바로 옆의 평민교회 센트 마거릿에서 했다. 이런 소소한 일들이 영국인들로 하여금 처칠을 더욱 가깝게 느끼게 하고 존경하게 만든다.
영국인이 처칠을 더욱 가깝게 느끼는 이유에는 그의 인간적인 약점도 있다. 하루에 18시간을 일한 처칠은 수퍼맨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 ‘거인’이었다. 난독증을 비롯해 말더듬이 혀짤배기까지 말이다. 이런 어려움들을 다 이겨낸 그가 평생을 못 고친 것이 우울증이다. 처칠은 정신적 압박을 코냑과 시가로 다스렸다. 처칠은 자신의 우울증을 ‘검은개’라고 불렀다. 이런 우울증을 이기기 위해 택한 것이 그림이었다. 우울증은 유전이었는지 자녀들도 알코올중독과 자살 등의 불행을 겪었다. 그래도 후손들 중에는 처칠을 닮아 정계로 진출한 인물도 나왔다. 처칠의 장남 란돌프도 하원의원을 지냈고 할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그의 아들도 하원의원을 역임했다. 막내딸 메리의 아들인 차관 출신 67세의 손자가 올해 총선에 출마한다.
2010년 처칠의 의치가 1만5200파운드에 팔린 적이 있다. 이 의치는 혀짤배기여서 S 발음에 어려움을 겪은 처칠이 발음을 고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의치이다. 처칠은 의치를 서너 개 만들어 항상 지참하고 다녔다. 2010년 팔린 것은 의치 제작자 아들이 갖고 있던 것이었다. 처칠의 의치 제작자는 2차대전 중 군에 징집당하지 않고 처칠의 의치를 돌보는 일을 했다. 처칠은 자신의 아들 딸과 손자는 참전을 하게 해놓고 의치 기술자는 군 징집을 면하게 해 주었다. 처칠은 화가 났을 때는 의치를 빼서 직원들에게 집어던지는 버릇이 있어 의치 기술자가 항상 근처에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 처칠이 그린 그림 "우리카와 아틀라스 산맥의 계곡" / © 처칠 헤리티지 (Churchill Heritage Ltd.)
사실 따지고 보면 처칠은 수퍼맨이 맞다. 처칠은 군인, 작가, 학자, 화가, 언론인, 종군기자 그리고 정치인이었다. 작가로서는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니 세계 최고 수준이고, 화가로는 영국 예술원 회원이니 또 최고이다. 처칠이 우울증을 이기기 위해 시작한 것이 그림이다. 그는 1915년 갈리폴리전투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신의 표현대로 ‘무자비하게(cruelly) 정치 현장에서 밀려났을 때 “그림의 여신이 나를 구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했다. 그리고는 “내가 죽어서 천국을 가게 되면 첫 100만년은 그림만 그려서 그림의 밑바닥까지 다 한번 알아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500여점을 남겼다. 하지만 처칠은 자신을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고, 화가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하지도 않았다. 거의 작품을 친구들이나 신세 진 사람들에게 그냥 기념품처럼 선물했다. 처칠의 그림을 선물받은 친지들의 후손이 화가의 서명이 없는 그림이 누구 그림인지 모르고 있다가 가끔 다락방 등에서 발견된 그림이 처칠의 것이란 게 밝혀져서 세상을 놀라게 한다. 처칠은 친지들의 설득으로 1947년 영국예술원 전시회에 데이비드 윈터라는 가명으로 그림 두 점을 보냈는데 모두 전시작품으로 선정됐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처칠의 이름 뒤에는 영국예술원 회원이라는 약자 RA(Royal Academy of Art)가 붙어 다닌다. 처칠의 그림은 경매에도 잘 안 나온다. 소유자들이 팔지 않고 가지고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처칠의 그림 가격은 계속 올랐다. 가장 최근에는 120만파운드에 팔리기도 했다. 처칠의 마지막 자녀 메리가 지난해 5월 사망하고 나서 12월 유품 256점이 경매에 나왔는데 모두 1540만파운드에 팔렸다. 원래 경매 예상금액 550만파운드를 3배나 뛰어넘었다. 당시 경매에 나온 유품 중에는 15점의 유화도 포함이 되어 있었는데 특히 ‘금붕어 연못’이란 작품은 180만파운드에 팔렸다.
처칠은 작가로서도 대단한 저작물을 남겼다. 24살인 1898년에 북서부 인도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를 주제로 첫 책을 썼다. 소위로 참전한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엮어냈다. 이 책에서 처칠은 탄환을 처음으로 뒤에서 넣는 후장식 무기의 위력을 실감했다고 썼다. 수십 배에 달하는 적 병력을 간단하게 살상하는 무기를 보고 탱크 등 현대무기 개발에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경험을 얻었다고 기술했다. 그 이후 그는 91살의 생애를 통해 43종 72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의 유일한 소설 ‘사브롤라’를 빼고는 모두 기록물들이다.
그런 수퍼맨 처칠도 결국 은퇴하고 10년간은 그림 그리고 저술하고 연설하면서 보낸다. 그러다가 자신이 태어나고 아내 클레멘타인에게 청혼한 장소가 있는 블렌하임궁 근처 교회에 묻힌다. 생전에 처칠은 “여기서 나는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결정을 했다. 태어나고 결혼하기로 하는 결정이 모두 여기 블렌하임궁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런던에서 1시간 거리의 블렌하임궁에는 처칠이 클레멘타인에게 청혼한 장소에 ‘다이애나의 신전’이라는 예쁜 정자가 있다. 로맨틱한 분위기이고 스토리도 있는 곳이라 지금도 젊은이들이 여기서 청혼을 많이 한다.) 처칠 부부는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헤어져 있을 때는 항상 서로 편지를 썼다. 클레멘타인은 처칠을 강하게 비평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보기에 처칠이 무언가 잘못한다 싶으면 절대 참지 않고 비평을 해댔다. 다른 사람들의 비평은 도저히 못 견디면서도 클레멘타인의 비평은 잘 들었고 그런 이유로 둘의 결혼은 끝까지 유지되었다. 처칠에게 있어 클레멘타인은 평생 동안 정치적 조언자였다.
둘의 편지는 항상 서로의 애완동물을 그린 만화로 끝을 맺었다. 처칠은 퍼그종 개였고 클레멘타인은 고양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클레멘타인을 처칠의 고양이였다고도 한다.
처칠의 묘지가 있는 블라돈교회에는 지난 50년간 처칠을 기념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드디어 최근 처칠을 기념하는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설치되기로 결정됐다. 그 유리에는 처칠의 유명한 문구들이 들어갈 예정이다. 내년에는 처칠 얼굴이 들어간 5파운드짜리 화폐가 발행된다. 뭔가를 기념하길 좋아하는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영웅이라 생각하는 처칠을 지난 50년 동안 잊고 있었던 셈인데, 조금 이해가 안 간다.
권석하 / 재영칼럼니스트·‘영국인 재발견’ 저자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