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성(鐵城) 최영(崔瑩)은 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늘 ‘돈 보기를 돌멩이처럼 하라’[견금여석 : 見金如石)고 가르쳤으므로, 최영은 항상 이 네 글자를 큰 허리띠에 써서 평생 지니고 다녀며 잊지 않았다.
나라 정치를 맡아 위신을 멀리 떨쳤으나 남의 것을 조금도 취하지 않고 겨우 먹고 사는 데 만족할 뿐이었다.
당시의 재상들은 서로 초대하여 바둑으로 날을 보내면서 다투어 성찬을 차려 호사함에 힘썼지만 최영은 손님을 초대하여 한낮이 지나도록 밥을 내놓지 않다가 날이 저물어 기장과 쌀을 섞어 지은 밥에 여 러 가지 나물만 차렸다.
손님들은 배가 고팠던 터에 나물 반찬이어도 남김없이 먹고는 “철성 집의 밥이 참 맛있습니다.”고 하니, 공은 웃으며 “이것도 병사를 다루는 방법입니다.” 라고 하였다.
崔鐵城瑩少時, 其父常戒之曰, 見金如土, 瑩常以四字書諸紳, 終身服膺而勿失. 雖秉國政, 威行中外, 而一毫不取於人家, 纔足食而已. 當時宰樞相邀迓, 以棋局消日, 爭設珍饌, 以務豪侈, 公獨邀客, 過午不設饌, 日暮糅黍稱炊飯, 兼陳雜菜, 諸客枵膓, 盡啖菜飯曰, 鐵城之飯, 甚甘也, 公笑曰, 此亦用兵之謀也.
출처 : ≪용재총화(慵齋叢話)≫(成俔, 1439-1504)
최영(崔瑩 : 1316-1388)
고려의 명장, 충신으로, 1359년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쳤다. 1361년에도 홍건적이 창궐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를 격퇴하여 전리판서에 올랐다. 이후에도 흥왕사의 변, 제주 목호의 난을 진압했으며, 1376년에는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자 홍산에서 적을 대파했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하자,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출정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다.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선 중기에 성현(成俔)이 지은 잡기류(雜記類) 문헌이다. 고려 때부터 조선 성종 때까지의 왕가(王家)ㆍ사대부ㆍ문인ㆍ서화가ㆍ음악가 등의 인물 일화를 비롯해 풍속ㆍ지리ㆍ제도ㆍ음악ㆍ문화ㆍ소화(笑話) 등 사회 문화 전반을 다루고 있다. 책의 저술 연도가 분명하지 않으나, 1499년(연산 5년)까지의 일이 기록되었고 성현이 1504년에 죽었음을 감안하면 1499-1504년 사이에 저술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성종과 당대 관료층 문인들의 잡기류에 대한 관심은 성현이 ≪용재총화≫를 저술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성임(成任), 성간(成侃) 두 형의 영향이 크다. 성임과 성간은 경전(經典)만 추종하는 도학자(道學者)와는 다른 문학관을 지니고 있었다. 성임은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 ≪태평통재(太平通載)≫를 엮었다. 같은 시기에 서거정(徐居正)은 ≪필원잡기(筆苑雜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강희맹(姜希孟)은 ≪촌담해이(村談解弛)≫, 이륙(李陸)은 ≪청파극담(靑坡劇談)≫을 저술했다. 이륙은 성현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돈이다. 이 같은 여건 속에서 성현이 ≪용재총화≫를 저술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