쿰란 공동체는 기원전 150년경 에세네파가 시작했다.
그리고 기원후 68년경 반란을 진압하던 로마군에 의해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고문서들이 주변 동굴에 감춰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굴들은 공동체 주거지역에서 125m에서 1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해사본과 쿰란사본은 다르다.
사해사본은 사해 주변에서 발견된 모든 문서를 말한다.
쿰란사본은 쿰란 공동체 인근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만을 가리킨다.
쿰란사본은 사해사본의 일부인 셈이다.
사본 가운데는 두루마리 형태를 취한 것이 대부분이다.
쿰란 공동체가 있던 곳은 현재 이스라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요르단 소속이었지만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 땅이 되었다.
이곳에는 기원전 2세기부터 성경을 필사하던
도서관과 공동식당 그리고 공장과 목욕탕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주거지역 동쪽 언덕에는 대략 1,200개의 무덤도 있다.
쿰란 공동체 사람들로 대부분 남자로 밝혀졌다.
사해사본 발견 전까지는 예루살렘 성전시대에 관한 히브리어기록은 없었다.
이 시대를 알리는 문헌은 구약의 마카베오서와 요세푸스의 역사기록
그리고 신약성경으로 모두 희랍어로 기록된 것이었다.
사해사본 등장으로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을가까이 알 수 있게 되었고
객관적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해사본 첫 발견자는 베두인 목동이었다.
그가 발견한 두루마리가 돈이 되자 사해 주변 굴같이 보이는 곳은 모두 파헤쳐진다.
그 결과 많은 문서가 골동품 시장에 나돌았다.
이렇게 되자 전쟁 중인데도 요르단은 쿰란에 탐사대를 보냈다.
박물관장인 영국 출신의 하딩Harding과
도미니코 수도회의 드 보Rolandde Vaux신부가 이들을 이끌었다.
쿰란 공동체 유적지는 이들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후 발굴팀은 사해문서를 담고 있는 3번 동굴을 찾아냈다.
동굴에는 구리 두루마리로 밝혀진 금속문서가 있었다.
내용이 공개되었는데 예루살렘 성전 금은보화와
제사에 쓰이던 그릇과 기구들을 감추어둔 72개 장소의 목록이었다.
이후 보물을 찾으려 애썼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없다.
사해사본은 1990년 9월 22일 뉴욕 타임스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고
이스라엘 문화재관리국이 1991년 사진들을 공개했다.
우리나라에는 2007년 12월부터 2008년 6월까지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전시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