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월면 대명리는 계룡산 국사봉과 향적산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여섯 개 마을 103여호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은 계룡산이 막아주고 있고 마을 앞뒤로 개울이 흐르는데 이곳에선 앞 갱변, 뒷갱변이라 부른다.
여섯마을은 쟁기볕 닮은 바위가 있는 볕바우(양암) 옥녀탄금혈(금동) 대추나 무, 밤나무밭에 함정을 파서 호랑이를 잡았다던(함덕굴) 거룸고를 뜯는 마을 (검동) 벌듬(벌판) 강거름(강입구)등의 옛날 이름을 갖고 있고 지금도 그렇게 불린다.
이마을의 농기에는 신농유업(神農淚業)이라 새겨 있고 장대는 어른의 다리통만한 굵기에 하늘을 찌를 듯 크고 길었다. 깃발의 지내발이나 꿩장목은 한껏기의 품위를 자랑하듯 멋을 내었다. 대명리 두레는 1905에 만들어진 것으 로 알려져 있다.
대명리 마을은 150년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무안 박씨가 제일 많고 살고있는 곳이였다. 옛날의 부와 함께 이름을 남기신 고 박참봉(115세)의 친동생 고 박병원(106세) 당시 삼남제일의 상쇠로 활동하셨으며 고 임현제 (106세)장구, 장나팔은 삼남에 제일가는 상장구 명나팔로써 대명리 풍물을 삼 남의 제일로 꼽았다고 한다. 그리고 대명리는 박참봉 아들이신 박도지사, 손자 영광군수 등 쟁쟁한 무안 박씨들의 고향이다.
현재 당시 삼남의 이름 날리던 고 박병원씨(106세) 후손 박만원씨(61세)가 상 장구를 치고 있고, 장나팔의 명수이신 고 임현제(100세)후손, 임영제씨(80세)가 상쇠를 치고 있으나 작고후 김병수씨가 상쇠를 치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들 을수 없는 가락, 춤가락이나 눈 끔적이 가락등이 살아있는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수 없다.
두레는 농촌에서 공동작업으로 능률을 올리기 위한 수단이지만 두레를 통해서 동네 사람들간에 협동노동, 상호부조, 공동오락 등 여러 가지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농촌에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 두레라고 본다 .
매일 4시~6까지 연습을하는데 쓰여질 물건을 차에 싣고옵니다 (2006.8.28 촬영)
못자리에 심을 모인것 같습니다
소리를하는 어르신인데 60~80 세 노인분들이 이중창(후렴)으로 소리가 시작되고~
소리와 춤으로 못자리에 모를 찌러 들어가는 중입니다
빨리 모를쪄야 겠기때문에 소리꾼말고 전체가 들어가 일을하고..
지금이야 기계모를 내지만 옛날에는 이런모습으로 모를찌고 묶어냅니다
모를내야할 논에다 지게로 모를 갔다놓아야 모를 냅니다
나팔을 부는 사람도~ 소리꾼도..
한쪽에서는 일을하지만 힘겹고 즐거움으로 농악을 하는가 봅니다
옛날에는 줄모를 내야겠기 때문에 많은사람들이 공동작업으로 모를 냅니다
옛날에는 많은 일꾼들의 식사나 새참을 아낙네들이 머리에이고 갔다줍니다
부여에서 오신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무더운 여름날씨에도 연습을 매일 한다고 합니다
모를다낸 즐거움으로 새참도 먹어가면서 농악놀이를 하는가 봅니다
지금이야 체초제를 뿌리지만 옛날에는 모를낸지 20일이면 호미로 김을 매야하는데 혼자서는 힘이들고 이렇게 공동작업으로 일하는가 봅니다
김을(풀 나오는것을 호미로 갈아업는것을말함) 다 매고 나옵니다
소리꾼들이 노인분들인데 얼마나 잘하는지..
선생님 지도하에 매일 연습을 하였는지 노인분들이 잘들하고 계십니다
김을 매고나서 이렇게 농악으로 ..
지게놀이라고 처음본것인데 아마 상여놀이인가 봅니다 공연때는 상여로 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흥겹게 공동 작업을하면서 즐겁게 일을 하였는가 봅니다
상여대신 지게로 상여을 만들어 연습을 하는가 봅니다
대명리 두레 일소리를 60~80세 노인분들이 더운날씨에 연습을 한다고 부녀회에서 시원한 막걸리와
과일로 새참을 드시고 다시 연습을하는 모습을 볼수가 있었다 박~수를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