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02. 21
80년대 프로야구를 보아온 사람이 장효조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록 마니아가 비틀스(Beatles)에 대해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낯간지럽고 애매한 일이다.
아, 도대체 무슨 말로 그를 설명해야 할까.
0점대 평균자책점의 선동열, 56홈런의 이승엽, 22연승의 박철순. 물론 장효조에게도 최고의 통산타율 .331라든가 4번의 타격왕, 6번의 출루율 1위 같은 기록들이 있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에게는 붙여지기 어려운 고유명사처럼 되어버린 '타격의 달인'이라는 별명도 있다. 그러나 최동원이 그저 시속 150㎞를 던지고 시즌 27승을 거두었던 투수로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장효조 역시 그 정도로 모두 설명될 수 있는 선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 장효조의 주루플레이 / ⓒ 삼성 라이온즈 웹진
'3관왕' 결승점에서 실신한 결승주자
1973년 9월 14일. 서울운동장에서는 대구상고와 배명고가 맞붙는 황금사자기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요즘 어지간한 프로야구 주말경기보다 더 붐볐던 2만5천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구상고가 6회에 먼저 3점을 내고도 8회 3점을 허용해 동점을 이루었고, 경기는 연장으로 돌입했다.
김한근·석주옥·박기수라는 정상급 투수 세 명으로 구축된 두터운 투수진을 앞세워 그 해 이미 대통령배와 봉황대기를 차지한 대구상고는 '3관왕'이라는 목표를 눈앞에 두고 커다란 암초를 만난 셈이었다. 반면 배명고는 그 해 남아있는 마지막 메이저대회 우승기를 붙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연장 10회에 돌입하며, 관중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극적인 결승 승부의 순간을 지켜보며 한껏 달아올랐다.
10회 초, 1사 2루. 3번 타자 이승후의 깨끗한 타구가 중견수 앞으로 굴러갔고 순간 2루 주자는 날쌔게 3루를 돌아 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깊지 않은 안타였기에 중견수는 곧바로 공을 잡아던질 수 있었고, 송구되는 공과 달려드는 주자는 거의 동시에 홈에서 만났다.
양쪽 모두 우승을 위해 한 발도 양보할 수 없는 날카로운 순간, 엄청난 흙먼지가 일어나며 승부의 순간을 가렸고 관중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는 순간 적막을 가르는 '세이프'라는 심판의 함성이 울려 퍼졌고, 홈플레이트 위에는 왼손과 오른쪽 뺨을 포개놓은 채 의식을 잃은 결승주자가 쓰러져 있었다.
결국 대구상고는 황금사자기마저 가져가며 '역대 최강 고교팀'의 요건인 '메이저대회 3관왕'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 결승점을 올리고 곧장 응급실로 실려갔던 그 소년은, 그 세 번의 대회에서 5할 가까운 타율(40타수 19안타)로 두 번의 타격왕과 한 번의 타격 3위를 마크하며 팀 공격력을 주도한 2학년생 장효조였다(투수인 박기수·석주옥·김한근이 그 세 번의 대회에서 최우수선수를 각각 나누어 가졌다).
말 그대로, 안타 제조기
▲ 장효조의 타격자세 / ⓒ 삼성라이온즈 웹진
대학에 진학한 2년 뒤에도 그의 모습은 다르지 않았다. 입학 직후 참가한 대학야구 춘계연맹전에서 당장 4할대 타율로 타격 랭킹 2위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2학년 때는 .459(159타수 73안타), 3학년 때는 .437(112타수 49안타)의 기록을 이어나가며 이름 앞에 '안타제조기'라는 별명을 붙이게 된다. 이미 몇몇 선배들이 가져본 적이 있지만, 그만큼 어울리지는 못했던 별명.
그가 대학에 다니던 75년부터 78년 사이, 대학 무대의 장단기리그에서 타격상은 거의 대부분 장효조의 몫이었고, 거기에 곁들여 때로는 도루상, 때로는 홈런상을 부산물로 챙겨가기도 했다.
그는 그저 '두려운 타자'가 아니라 '그러려니 생각하고 넘겨야 하는 타자'였고, 그런 점에서 오히려 존재감을 가지기 어려운 타자이기도 했다.
그 사이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국제대회에 국가대표팀을 파견하기 시작했던 한국은 76년부터 대학 2학년생인 장효조를 붙박이로 차출하기 시작했다.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 우승을 비롯해 78년과 79년 세계선수권 준우승 등 세계대회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는 과정에 장효조라는 이름을 새겨넣은 데 이어 1982년 한국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내내 4번 타자를 맡으며 감동적인 우승을 일궈내는 주역이 되기도 했다.
신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신인
1983년은 한국 프로야구에 있어서 또 한 번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를 위해 프로 진출을 보류했던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선수들이 대거 참가한 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철과 군인팀 상무에 소속되어 대학 무대와 별다를 것 없이 휩쓸며 지나쳤던 짧은 실업야구 시절을 보낸 장효조도 그 해에 프로 무대를 밟게 된다. 그때 나이가 이미 우리나이로 스물여덟이었다.
첫해, 그는 곧바로 117개의 안타를 치면서 .369의 타율과 .475의 출루율, .618의 장타율을 기록해 그 네 가지 부문에서 모두 1위에 이름을 올린다(그 해에는 홈런도 리그 3위인 18개를 때려내기도 했다). 그는 김시진과 최동원의 투구, 김재박의 수비와 더불어 세계선수권 우승멤버의 힘을 재확인시켜준 대표주자였고, 곧장 원년의 백인천을 대신해 강타자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는 경악스런 데뷔 시즌 뒤로도 서른넷이 되던 1989년까지 모두 일곱 시즌 내내 3할대 밑으로 내려오지 않는 타율을 유지하며 세 번의 타격왕과 다섯 번의 출루율왕을 그의 이력에 더했다. 그에게는 특별한 슬럼프도 없었고, 자잘한 부상이나 마음고생도 별것 아니었다.
딱 한 번, 트레이드를 당한다는 것이 마치 호적에서 파내지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던 시절 고향 팀 라이온즈에서 롯데 자이언츠로 보내진 뒤였던 1989년과 1990년, 각각 .303과 .275로 '충격적인 부진'을 겪은 적이 있지만 곧 털고 일어나 1991년 다시 .347의 고타율로 치열한 타격왕 경쟁에 나서며 재기를 했던 것이다.
▲ MVP 장효조 1987년, .387의 타율로 타격왕을 차지하며 정규리그 MVP로 선정된 장효조 / ⓒ 삼성 라이온즈 웹진
그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힘과 스피드와 정확성, 그리고 수비력에 더해 센스와 근성까지 모든 것을 갖춘 선수였고, 밀어쳐서도 홈런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배트를 짧게 잡으면서 더 많은 안타를 만들어냈듯, 그저 필요에 따라 한 쪽을 희생해 다른 한쪽을 보충하는 '안배'만으로 어느 부문이든 최고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저 들여다볼수록 놀랍고 대단하고 굉장한 이력. 천재이며, 황태자이며, 최고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기록들. 그러나 그는 역설적이게도 지지리도 상 복이 없는 선수이기도 했다.
고교시절, 그는 4개 주요 대회에서만 네 번의 우승을 일구어내며 세 번의 타격상을 받은 자타공인의 당대 최고였고 군계일학이었다. 그는 항상 두 번 나와 한 번꼴은 안타를 쳤고, 결정적인 순간에 홈런(74년 봉황대기 결승전 홈런)이나 실신을 불사하는 주루 플레이를 펼치는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단 한 번도 최우수선수에 선발된 적이 없었다.
프로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데뷔 첫해였던 1983년, 네 가지 주요 공격부문(타율, 출루율, 장타율, 최다안타)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MVP급 활약을 펼치고도 MVP는커녕 신인왕도 받지 못하는 진풍경의 주역이 되어야 했다(신인왕은 그보다 5푼 이상 낮은 타율을 비롯해 단 한 가지도 장효조를 추월하지 못한 베어스의 박종훈에게 돌아갔는데, 장효조의 경우 '참신성이 없다'는 점이 탈락의 이유였다).
1991년, 막판 타격왕 경쟁에서 경쟁자였던 이정훈의 동료인 이글스 투수들이 연속 볼넷을 던지며 견제하는 통에 역전의 기회를 놓치며 통산 5회 타격왕의 꿈을 접어야 했던 것도 유명한 일화이고, 전후기 통합우승을 차지한 1985년에는 .373의 기록적인 타율로 다시 한 번 타격왕을 차지하고도 팀 동료인 홈런, 타점 2관왕의 이만수, 25승의 김시진과 표가 갈리며 김성한에 이어 2위로 MVP 투표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다.
그는 항상 잘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오히려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선수였고, 오히려 웬만한 다른 선수들이 생애 단 한 번도 넘어서기 어려운 3할 밑으로 한 번 내려온 것이 오히려 충격으로 받아들여지는 선수였다. 그가 겪었던 상에 관한 불운은, 그래서 어느 만큼은 모든 사람들이 둔감해질 정도로 경이적인 기록들을 끝도 없이 만들어나간 그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 이런 독보적인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MVP 는 물론이거니와 신인왕 투표에서도 너무 신인같지 않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OB 박종훈이 선정되었다. MVP 투표에도 홈런왕도, 타점왕 프리미엄을 안은 이만수가 선정되었다. 이런걸 두고 무관의 제왕이 된 것이다. / 김태진의 인사이드 파크 홈런
시련은 성장을 위한 과정일 뿐이다
조금 과장이 없지 않지만, 남들은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에 벌써 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지만, 장효조는 공이 홈플레이트 앞에 왔을 때 결정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는 완벽에 가까운 선구안과 순간적 대응이 가능한 배트스피드, 그리고 감각적인 손놀림으로 어떤 구질의 공이든 '결대로' 쳐내는 '부챗살 타격'을 해내는 타자였다. 해외무대의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닌 그가 그렇게 기대적, 지역적 한계를 넘어 한 차원 높은 기술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90년대 이전까지, 한국 야구에서 타격은 역시 '힘'이었다. 투수의 공을 몸에 바짝 붙여놓고 '당겨치는' 것이 타격기술의 핵심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빠른 중심 이동을 위한 타격자세, 그리고 이동시키는 중심에 실어 보낼 어느 만큼의 체격과 체중이 필요했다. 그러나 장효조는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키는 150㎝ 안팎에 불과했던 데다 별명이 '짱구'였을 정도로 유난히 머리가 컸던, '가능성 없는' 체형을 가진 선수였다.
초등학생 시절 이미 작은 키를 이유로 야구부 입단을 거절당한 것을 시작으로, 중학생 시절 내내,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도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저 이전부터 수많은 소년들이 그랬듯, 멋진 유니폼에 매료되어 가능성 없는 벤치를 지키다가 부족한 재능에 한숨 쉬며 쓸쓸히 사라져갈 한 명의 가망 없는 후보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다른 이들과 달랐던 것은, 자라지 않는 키를 탓하기만 하는 대신 그런 조건을 이겨나가기 위한 길을 찾았다는 점이다. 그는 힘의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꾸준히 근력 운동을 한 것은 물론이고, 중학생 시절부터 밀어치는 연습을 하며 당겨진 수비진의 빈틈을 갈라 안타를 '제조'해내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공의 위력과 힘으로 맞서는 대신 그 힘을 역이용해 '결대로' 되치는 기술이 그렇게 다듬어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공이든 상관없이 때려넘길 수 있는' 타자가 아니라면 가장 자신있는 공만을 노려야 했고, 그런 공을 골라내기 위해서는 하나하나의 공에 집중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노리지 않는 공이라면 스트라이크라고 해도 건드리지 않는 타자였다. 그런 공은 단지 '커트'해내며 다음 공을 다시 기다릴 뿐이었다. 그것은 훗날 '투스트라이크 이후에 장효조가 건드리지 않는 공은 볼'이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투수들로 하여금 '차라리 안타 하나를 주고 만다'는 심정으로 정면승부하게끔 압박하는 힘이 된다.
고교 2학년 시절, 마침내 올라선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팀의 3관왕 도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내달리고 부딪혀냈던 그 독한 집중력으로 매 타석마다 공을 노려보았기에, 그는 지금껏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하는 통산타율 .331의 고지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타석에 서면, '어떤 공도 내 허락 없이는 홈플레이트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고함이 들리는 듯, 작지만 단단한 쇳덩어리 같은 묵직한 존재감을 시위하던, 그리고 어설프게, 되는대로 대충 살아서는 이를 수 없는 또 다른 경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던 날카로웠던 눈빛과 방망이의 살기. 그래서 그를 떠올리며 단순한 '3할 타자'라거나 '타격왕' 따위의 설명으로는 아무래도 뭔가 허전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장효조'라는 이름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된다고 믿는 이들, 그리고 굳이 그가 프로 무대에서 뛰었던 시절의 나이와 기록들을 들먹이고 다시 계산하며 그의 위대함을 입증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 그 사이에도 벌써 세대차이가 존재할 만큼 깊어진 것이 우리 프로야구사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