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교를 건너며
첫아이를 낳던 날이었다.
산통을 참기 위해 같은 노래를 계속 들었다.
그때는 그저 아이만 무사히 태어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산통도 끝이 있고, 힘든 시간도 언젠가는 끝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서야 알았다.
끝난 것이 아니라, 그날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는 것을.
월요일 새벽이면 곤히 잠든 아이를 안고 집을 나섰다.
화양동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노량진으로 출근해야 했다.
새벽 라디오를 켜면 원효대교를 건널 즈음 늘 같은 멘트가 흘러나왔다.
“여기는 대한민국 ○○○입니다.”
곧이어 애국가가 시작됐다.
다리 한가운데쯤 흐르던 그 애국가를 들으면 괜히 마음이 바빠졌다.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다시 출근길에 올라야 하는 월요일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월요일은 늘 그렇게 시작됐다.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을 다닌다는 건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는 일이었다.
감기는 떨어질 줄 몰랐고, 밤새 열이 나는 아이를 안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일도 많았다.
그래도 아침이 되면 출근해야 했다.
퇴근길 어린이집에 가면 제일 먼저 신발장을 봤다.
늘 아이 신발만 남아 있었다.
어느 날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아이를 데리러 갔다.
나를 보더니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 아침인데 왜 벌써 왔어?”
웃으며 아이를 안았지만 마음이 저렸다.
그 말을 오래 잊지 못했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빨간 패딩을 입고 서 있던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등하교는 태권도 관장님의 몫이었고, 동네 문방구는 엄마에게는 말 못 할 비밀을 털어놓는 아이들의 사랑방이었다.
지금도 두 분을 만나면 인사를 드린다.
“우리 애들은 관장님하고 사장님이 다 키워주셨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다 친구가 밀어 난간에 얼굴을 부딪혔다.
코를 크게 다쳤다는 전화를 받았다.
회사와 집은 한 시간 반 거리였다.
가까이 사는 동네 동생에게 먼저 병원으로 가 달라고 부탁하고 나도 정신없이 차에 올랐다.
그날은 신호등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모른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보며 웃었다.
“엄마, 괜찮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났다.
그렇게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았는데,
돌아보니 아이도 자라고,
나도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가끔 원효대교를 건넌다.
다리 한가운데쯤 이르면 문득 그 시절이 떠오른다.
잠든 아이를 안고 건너던 월요일 새벽.
그때는 그저 다리 하나를 건너는 줄만 알았다.
돌아보니 원효대교를 건너던 그 시간마다,
아이도 자라고 나도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그 시간을 건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