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의 인물>
●장계업(晩松 張繼業, 1601~1681)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중술(仲述), 호는 만송(晩松)이다. 충좌위 부사용 장언상의 둘째 아들이다. 학행과 효행이 세상에 알려졌으며, 선략장군을 지냈다.
●고시항(澗齋 高是恒, 1602~1676)
본관은 개성, 자는 자구, 호는 간재이다. 직제학 고사원의 현손으로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병자호란 때 마을에 기민들이 넘침에 마을 앞 금천변 회나무 아래에 그들을 모아놓고 사재를 털어 구휼하니 사람들이 그 나무를 활인목이라 하고, 뒤에 그 느티나무 아래에 정자 하나를 세워 활인정이라 부른다.
●신숭구(洛峰 申崇耉, 1604~1677)
본관은 평산, 자는 주한, 호는 낙봉이다. 문희공 신개의 후예로 대사성 신자승의 현손이며, 증조부는 사정 극효이고 조부는 증 좌승지 여길이며,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상철이고 어머니는 군수 이문명의 딸로 정부인 신평이씨이다. 1630년 경오식년시에 나아가 사마시 진사과에 합격하여 반궁에서 종유하다가, 1651년 의금부 금오랑에 특제되고 김좌점의 옥사를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이듬해인 1652년 금산군수로 나아가 묵은 폐단을 모두 고치니 백성들이 그 치적을 높이 찬양하였다. 뒤에 대구부사로 옮겼을 때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이 농사의 어려움을 호소하니, 동생인 호군 신형구를 시켜 7년의 수로공사로 큰 보를 완성하니 그 보를 '신당보'라고 한다. 1664년 정3품 통정대부로 한성부서윤에 제수되었다가, 외직인 한산군수 겸공산진병마첨절제사를 지냈다. 1699년 인천도호부사로 나아갔을 때 흉년을 당하니 녹봉을 털어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뒤에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서사를 연구하고 자제들을 가르치며 고이행, 정도응 등과 향약을 실시하였다. 늘 맑고 곧은 지조로 평생을 일관하다가 1677년(숙종 3) 5월 문경 오리동 자택에서 별세하니 마을 동산 기슭에 장사지냈다. 숙부인은 서애 유성룡의 손녀로 풍산유씨 유진의 딸이다.
●장도
●채득기
●변응로
●신첨
●강복선
●박원개
●김단
○김해(金楷, 1633~1716)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정칙(正則), 호는 부훤당(負暄堂)이다. 사득(士得)의 손자이며 광호(光灝)의 아들이다. 28세 때인 1660년(현종1, 庚子) 식년시(式年試)에서 생원(生員) 1등(一等)으로 입격하여 성균생원으로 있었으나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27세 때인 1659년 안동(安東)에서 상주(尙州) 산양현(山陽縣) 대도촌(大道村)으로 이거(移居)하여 당대의 명사들과 널리 사귀었으며, 유림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61세 때인 1693년에는 산양현 군자봉(君子峰) 아래 근암촌(近嵒村, 현 산북면 서중리)으로 이거한 뒤 오랜 벗 권이칭(權以偁, 청대 권상일의 조부)의 도움으로 마을 북쪽을 개척하여 '보가리(保家里)'라 칭하였다.
만년에는 역학(易學)과 예학(禮學)을 깊이 탐구하여 심오한 경지에 이르니 명성이 높았다. 또한 천문(天文), 지리(地理), 법률(法律), 율려(律呂), 산수(算數)에도 정통하였다. 저서로 《부훤당문집(負暄堂文集)》 4권 2책이 전한다. 특히 그의 문집 3권에 <영빈서당이설기(潁濱書堂移設記)>를 남겨 근암서원(近嵒書院) 및 영원사지(鸰原寺址)의 연원을 밝힌 것은 학술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부훤당집, 상산지, 문경지 증보판, 문경의 인물록.
○권상일(權相一, 1679∼175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및 졸수재(拙修齋)로 증조부는 권구(權坵), 조부는 권이칭(權以偁), 부친은 권심(權深)이며 모친은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선대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태사공 권행(權幸)으로 그의 후손들은 여전히 관향지인 안동에 많이 살고 있다. 그의 선대 역시 안동 이계촌에 세거하였는데, 고조 권익린이 예천 지금곡으로 이주하였고, 다시 증조 권구가 산양현 근암촌 초곡(일명 수개곡)으로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권상일은 상주 산양현 근암리(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서 태어나 가학으로 퇴계학을 전수(6대조 권대기-5대조 권우-고조 권익린-증조 권구-조부 권이칭-부친 권심) 받아 학문탐구에 진력하였다. 19세 때 선성김씨를 첫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며, 20세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 사회활동에도 점차 외연을 넓혀 나가면서 1705년 8월(27세)에는 한성시에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으나, 이듬해인 1706년 3월(28세) 부인 선성김씨와 사별하였다. 같은 해 12월 여주이씨를 재취로 맞으며 가정의 안정을 되찾고 과거시험에 대비하였다. 1707년 봄(29세) 향시에 합격했다. 1710년(32세) 늦은 나이에 득남(아들 욱)의 기쁨을 누렸으며, 같은 해 음6월 증광시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승문원 부정자라는 벼슬이 내려져 겹경사를 맞이하였다. 이후 점차 승진하여 중앙의 청요직을 두루 거쳐 1727년 7월(49세) 처음으로 외직인 만경현령에 임명되자 부친을 모시고 부임했다. 1733년 양산군수·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을 교열해 간행하고, 1734년 상소를 올려 민폐 근절책과 관기숙정 방안을 건의했다. 이에따라 홍문관의 계청에 의해 경연에 참석해 소신을 진술했다. 그 해 울산부사가 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고, 구강서원(鷗江書院)을 중창해 동서양재(東西兩齋)를 건립하여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공씨에게 군역을 면제하는 등 선치를 행하였다. 1741년 시강원 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45년 봉상시정, 이듬 해 사헌부 헌납·사간원 사성·사헌부 집의·동부승지·형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748년 우부승지로 물러났다. 뒤에 대사간·판결사(判決事)·홍문관 부제학·한성좌윤·지중추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퇴계 이황(李滉)을 사숙해 「사칠설(四七說)」을 지어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둘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의 성이며 기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청대집(淸臺集)』 18권 9책, 『초학지남(初學指南)』·『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소대비고(昭代備考)』·『가범(家範)』·『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과 『일기(日記)』 30여 권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죽림정사(竹林精舍)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근암서원(近嵒書院)으로 위패 등을 옮겨 향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청대집, 청대일기, 청대 권상일의 생애와 사상, 문경지 증보판, 문경의 인물록.
○홍상조(洪相朝, 1690~1756)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서일(敍一), 호는 만송(晩松)이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3)의 문인으로, 권상일(權相一, 1679~1759), 정간(鄭榦, 1692~1757) 등과 교유하였다. 1723년(경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728년(영조 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정랑, 고부군수(古阜郡守)를 거쳐 1742년 박천군수(博川郡守)가 되었는데, 군수로 있을 때의 행적이 역모에 연루되어 1745년 무안(務安)으로 원찬(遠竄)되었다가 1748년 2월에 무고가 밝혀져서 풀려났다. 청대 권상일이 쓴 제문(祭文)에 의하면, 말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산양녹문리(山陽鹿門里)로 낙향하여 현리(縣里) 부벽정(浮碧亭) 옆에 함취정(含翠亭)을 세우고 후진(채헌 등등)을 양성하며 학문에 몰두하다가 1756년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참고문헌] 출처
《淸臺集 》 卷10 祭晩松洪相朝文, 韓國文集叢刊 續61輯, 《國朝文科榜目》, 《承政院日記》, 문경의 인물록(1701년생이라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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