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창고건립 및 부두확장 공사가 진행 중인 1970년대 부산항 제1부두. 부산세관박물관 소장 |
- 징용 끌려가고 동포들 귀국 공간
- 경제성장·원양수산업 개척 현장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자 일본은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에 관부연락선을 띄웠다.
그러나 밤새워 대한해협을 내달려온 관부연락선이지만 부산항에 와서는 부두 접안시설이 미비해 항 내에 떠 있어야만 했다. 더구나 조선 내륙을 관통하는 경부선의 시발점인 부산역도 지금의 초량 부근에 자리하고 있어 해륙운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관부연락선이 철도 운송과 연계된 해상 운송수단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접안이 가능한 부두시설이 만들어져서 이곳까지 철도가 놓여 있어야만 했다. 바로 이러한 두 교통수단의 연결 접점을 찾는 공사가 1906년에 시작된 부산해관공사였다.
용두산 앞 해변에 있었던 부산해관을 해륙운송의 역할을 하도록 일본은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 지금의 중앙동 해변으로 이전을 꾀했다. 이 공사에서 오늘날 1부두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해관잔교, 즉 부산잔교가 만들어지고 이 시설은 곧 북항의 부두 기점이 되었다. 이러한 해관공사는 일본의 주도하에 면밀하게 이루어져 1912년 완공되면서 해관잔교는 일제강점기에 화객선인 관부연락선을 비롯해 일반 화물선이 접안하는 대표적인 부두가 됐다. 민족 자본의 수탈과 대륙침략의 거점공간이 된 것이다.
게다가 부산항 제1부두는 청년들이 강제징용과 학병으로 끌려간 공간이기도 하고 김마리아가 일본에서 3·1 운동의 불씨를 가지고 첫발을 내디딘 공간이기도 하다. 또 눈물로 떠났던 140만 동포들이 해방을 맞아 귀국할 때 환희의 물결로 넘쳐났던 현장이기도 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는 후방군수기지로서 이 나라의 버팀목이 되었는가 하면, 1960년대 이후로는 부두 확장공사를 해가면서 우리나라 경제성장을 이끈 산업현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1963년에는 부두 남측에 부산종합어시장이 들어서기도 했는데, 1973년에 어시장이 지금의 남부민동 쪽으로 옮겨가면서 그 자리에는 국제여객터미널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제1부두는 우리나라의 해양과 원양수산업 등의 개척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1952년 10월 21일에는 1만t급의 우리나라 국적 화물선 '고려호'가 고철 1678t을 싣고 최초로 태평양을 건너는 취항식이 열리기도 했다.
어디 그뿐일까? 그로부터 5년 후인 1957년 6월 26일 오후 5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指南號·230t급)의 출항식이 열린 곳도 이곳이었다. 최근에 와서는 2008년 4월 2일 우리나라 최초로 부산을 모항으로 하는 연안 크루즈선 '팬스타 허니호'의 출항식도 이곳에서 열려 크루즈시대를 예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부산항 제1부두는 화물을 하역하고 장치하는 부두 본래의 기능 못지않게 우리나라 해양산업의 개척정신이 서린 부두로서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머지 않아 부산항 제1부두는 북항재개발사업으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해진다. 그동안 부산항 제1부두는 한·일간에 소유자가 누구냐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는 애증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우리 민족으로서는 애환이 가장 많이 묻어 있는 부두인 것만은 틀림없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