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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 계엄군의총탄에 숨져
서삼초등학교, 장성중학교 졸업, 조선대학교 3학년 재학 중에
김동수 열사
<부처님 오신날 봉축 행사 준비에 바빴던 김동수>
지광 김동수 열사는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30분경 전남도청 2층 회의실에서 계엄군에 의해 15명의 시민군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는 전남도청 내 항쟁지도부에서 학생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였고, 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전남지부장(광주`전남)을 맡고 있었다.
2019년 김동수 열사 기념사업회는 김동수 열사 생애사 발굴단을 조직하여 그의 짧은 삶과 5.18 당시의 자세한 행적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꼼꼼하고, 조용하면서도 불의 앞에서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던 그는 당시의 활동을 기록한 두 권의 수첩을 남겼다.
김동수열사는 1980년 5월 21일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 광주`전남 부위원장을 맡아 5월 17일에는 봉축행사의 하나로 광주시민회관에서 열린 법정 스님과 이항녕 박사 강연회의 사회를 맡기도 했다. 그날 저녁 봉축행사 준비를 위해 조선대학교 옆에 있는 신광사에서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하여 청년들과 학생들을 무조건 잡아 구타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김동수 열사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봉축행사 준비를 위해 신광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던 법우(法友)들을 모두 안전하게 귀가시킨 뒤 이남(불교학생회장), 오원재 3명이 남아 사태를 주시하기로 했다.
5월 18일 김동수 열사 등은 봉축위원회 광주`전남 사무실이 있던 금남로 관음사(백양사 말사)로 갔다. 이곳에서 사흘 뒤인 21일 ‘부처님 오신날’ 봉축행사를 강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대불련은 당시의 시국 상황으로 봉축행사를 강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였고, 결국 행사는 연기되었다. 김동수 열사는 관음사에서 회의를 마치고 신광사로 가는 길에 공수부대원들을 만나 몸을 피한 뒤 외곽으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김동수 열사 추모비(조선대 민주동산)
김동수 열사와 이남 그리고 오원재 등 3명은 계엄군이 자신들을 예비검속 대상자 명단에 포함시켰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김동수 열사는 조선대학교에 입학한 뒤 대불련 활동 외에도 각종 시국강연회, 동학혁명 추모집회, 4.19혁명 기념행사에도 참여하였으며 학내 민주화 투쟁을 위한 철야 농성에도 적극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일단 목포로 가기로 하고,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탔으나 전남여고 후문 쪽에서 공수부대에 의해 저지되었고, 공수부대원들은 그들을 뒤쫓았으나, 버스에서 내린 세 사람은 가정집으로 피신해 몸을 숨겼다. 다행히도 공수부대원들이 떠난 뒤 그 집에 사는 택시기사가 택시 트렁크에 그들을 태워 광주 밖으로 태워다 주었다.
세 사람은 목포로 향했다. 대불련 목포지부에서 열기로 한 부처님 오신날 기념 체육대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파악할 겸 목포 정혜원으로 가기로 했다.
<다시 광주로 돌아오다>
목포 정혜원(법정스님이 출가하기 전 머물던 사찰)에 도착한 김동수 열사는 스님으로부터 “지금이 어느 때인데 체육대회를 걱정하느냐? 어서 몸을 숨겨라”는 말을 듣고 목포 외곽에 있던 조대공전 불교학생회장 집으로 가게 되었다.
2021년 김동수 열사 추모제
19일 광주 상황이 어려워짐을 알고 있던 김동수 열사는 다시 광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이미 광주로 가는 버스와 기차도 끊긴 상황이었다. 21일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목포 시내로 들어간 김동수 열사는 시위대가 가두 방송에서 광주의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으며, 계엄군의 만행이 도저히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광주로 돌아가는 시위대 차량에 탑승했다. 21일 광주에 도착한 김동수 열사는 고등학교 때부터 머물던 효천동 고모 댁에 안부 전화를 했다. 이 전화가 김동수 열사의 가족 친지가 마지막으로 받은 전화였다.
김동수 열사 마지막 모습
전남도청으로 들어간 김동수 열사는 항쟁본부의 학생수습대책위원이 되었고, 도청을 사수하며 계엄군에게 살해된 시민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직접 입관해 주었으며, 태극기를 둘러주고 염불을 해주었다고 한다.
김동수 열사는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30분경 탱크를 앞세우고 시가지로 진입한 계엄군의 총탄에 의해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목포로 잠시 피신했던 김동수 열사는 광주 소식을 듣고, 차마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목포에 있을 수 없어 함께 간 법우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광주로 갔었다. 가족들은 5월21일 이후 김동수 열사의 소식을 알지 못해 사방을 수소문했지만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1980년 6월 7일에야 면사무소에서 김동수 열사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고, 망월동 묘지에 가매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봉축위원회위원장이었던 이순규(의사) 전남대불교학생회 동문 등이 김동수 열사의 시신을 확인해 주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품은 때묻은 염주와 대불련 배지, 수강신청서, 시계 그리고 동전 몇 개였다.
2021년 5월에 열린 김동수 열사 41주년 추모문화재가 열렸고, 이때 1980년 5월 27일 외신기자인 노면 서프 기자가 촬영한 사진과 영상에서 전남도청 2층 강당 회의실 무대 뒤쪽에 쓰러져 있는 김동수 열사의 주검이 공개되었다.
서삼초 김동수 열사 추모비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에서 태어나>
지광 김동수 열사는 1958년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에서 부친 김영석씨와 모친 김병순 여사의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삼초등학교와 장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조대부고를 졸업한 뒤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하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광주 향림사와 관음사에서 고등부 불교학생회 활동을 시작하며 불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1978년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뒤 대불련에 가입하였으며 1980년에는 군입대를 연기하며 대불련 전남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불련 활동 등에 적극적이던 그는 성품이 소탈하고 과묵했으며 옷을 바꿔입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김동수 추모비 앞에서 묵념하는 서삼초 학생들
담배를 좋아하여 실수로 바지에 담배 구멍을 낸 적이 많던 그는 그런 바지를 흔연하게 입고 다녔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고집스럽고 외골수적인 강한 눈빛을 가졌지만 마음은 여리고 따뜻하여 주변의 선후배와 친구들의 신뢰가 깊었다.
김동수 열사가 오월혁명의 불꽃으로 산화한 뒤 1989년 조선대학교는 그에게 명예 공학사 학위를 수여하며 그를 추모하였다. 1992년 그의 법명(法名)을 딴 지광김동수열사 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열사의 모교인 장성군 서삼초등학교와 조선대학교 민주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지광 김동수 열사 기념사업회와 조선대학교, 한국대학생 불교연합회 동문은 매년 김동수 열사를 추모하고 그의 보살 정신을 계승하는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서삼초등학교에서도 매년 5월이면 전교 학생들이 5.18의 역사를 배우는 수업을 진행하고, 열사의 추모비 앞에 묵념하는 등 추모행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