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이씨(永川李氏) 영천시(永川市) 임고면(臨皐面) 덕연리(德淵里) 기타 마을
※군위 삽령(鈒嶺)에 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 선생 종손(宗孫)이 살게 된 내력(來歷)
영천이씨 영양군파조(永陽君派祖) 이대영(李大榮)은 고려(高麗) 진사(進士) 신호위 대장군(神號衛大將軍) 봉(封) 영양군으로 생몰 연대가 실전되고 익양군(益陽君) 이극인(李克仁)계에 연계(連繫)하지 못하여 후손 중시조 1세로 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영양군파는 영천이씨 자손 70% 내외의 대파문중으로 고려 말엽 지하(支下)에 6개파로 나누어진 문중이 전국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중 장파(長派)인 소감공파(少監公派)는 영양군 6세로 고려말 소부소감(少部少監) 이백고(李伯古) 문중으로 영천 관향지에 세거하다 단종사화 때 화를 당하여 영남(嶺南) 일원에 분산 피난하였다. 소감공 2세 참판(參判) 이선(李宣)은 세종(世宗) 기유(己酉, 1429)에 급제하여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올랐으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단종(端宗) 복위를 도모한 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이 역신(逆臣)으로 몰리는 화를 당하여 아들 이인근(李仁近) 대에 살아남기 위한 피난 잠적 300여 년으로 상하 7, 8대의 묘소(墓所), 배위(配位)와 사적(事蹟)을 일실(逸失)한 안타까운 연유가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멸문의 화를 당한 충장공 이보흠은 위 소감공파와 같은 영양군파 지하(支下)로 고려말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오른 영양군 6세 남곡(南谷) 이석지(李釋之, 두문동 72현)의 문중으로 남곡공파(南谷公派)이다. 조선 초까지는 3대 5제학의 명문으로 지하에 6파가 형성되어 경기, 영호남 및 호서(개성/황주/중화/장연)지방에도 고루 분포되고 영천이씨 전체 자손의 추계 30%를 상회한다.
이석지의 아들 5형제 중 장남 제학(提學) 이안우(李安愚)는 한성판윤(漢城判尹)에서 참판(參判)에 오른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으로 8개도 관찰사를 지냈다. 군위군(軍威郡) 우보면(友保面)에 제학공파(提學公派) 문중이 형성되어 있다. 곧 군위읍에서 우보면 소재지를 지나 영천, 신녕(新寧) 방면으로 주행하면 오른쪽 28번 국도변 미성리(美城里)에 남곡서원(南谷書院)이 있고, 송암정사(松巖精舍)가 있는데, 영양군 6세 남곡공 이석지의 장남 제학(提學) 이안우(李安愚)의 주손이 살고 있는 곳이다.
차남 이안직(李安直)은 정종(定宗) 기묘(己卯, 1399)년 문과(文科), 태종(太宗) 병술(丙戌, 1406)년에 중시(重試)로 지제교(知制敎)를 거처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아들 형제 중 쌍계(雙溪) 이종검(李宗儉)은 세종 기유(己酉, 1429) 문과(文科)에 올라 한림(翰林), 직제학,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문종(文宗) 사호(賜號) 효우당(孝友堂)으로 안성 덕곡에 정려(旌閭)와 담양 대치에 쌍계당이 있으며 단종대왕 충신으로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고 안성, 여주, 이천, 양주, 음성, 경산, 담양 대치에 효우당파(孝友堂派) 문중이 형성되었다. 양주 땅에 정착한 이종검(李宗儉)의 5세 이율(李律)은 경상감사를 거치고 선조 17년(1589)에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올랐으며, 동생 이선(李選)은 호조참의를 거처 판서를 지낸 기록이 왕조실록에 전한다. 이종검(李宗儉)의 동생 암곡(巖谷) 이종겸(李宗謙)은 세종 임자(壬子, 1432)에 문과,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집현전 제학에 올랐으나 단종사화 때 외종(外從) 사육신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과 종형제 되는 이보흠(李甫欽)의 피화(被禍)에 연루되어 대사간으로 있던 형 이종검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은둔하였다. 자손은 순천, 광양, 하동, 황해도 장연에 암곡공파(巖谷公派) 문중이 형성돠었다.
이석지의 제3자 서파(西坡) 이안유(李安杻)는 태종 을유(乙酉, 1405)에 문과, 사간원 헌납, 이조정랑을 지내고 고향 영천에 낙향하여 영천, 영덕, 김해, 양산에 서파공파(西坡公派) 문중이 형성되었다.
제4자 노전(老田) 이안실(李安實)은 봉선대부(奉善大夫) 군기시 부정랑을 지내고 자손이 황해도 황주, 중화에 이거 정착하였으며, 일부 자손은 영천, 신령, 청송에 정착하여 정랑공파(政郞公派)를 형성했다.
제5자 이현보(李玄寶)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내고 용인(龍仁)에서 떠나 제3형 이안유(李安杻)와 함께 영천(永川)에 이거 정착하였으나 아들 형제 중 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이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를 도모하다 역신으로 몰려 3대 멸족의 피화로 후손이 거창 웅곡(熊谷, 곰실)에 잠적하였으며 후에 주손은 군위에 피난 정착하여 충장공파(忠莊公派)를 형성하였다.
이보흠의 동생 이보관(李甫款)은 세종 경신(庚申, 1440)문과를 거처 풍저창 부사(豊儲倉府使)를 지내다 형의 피화로 이름을 세보(世輔)로 고치고 대구 팔공산 자락에 은거하고 일부 자손은 경남 고성, 통영에 피난 정착하여 부사공파(副使公派) 문중이 형성되었다.
영천시 서문통에서 청송, 화북 가는 35번 국도를 주행하다가 오미(五味)삼거리라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그 갈림길 지점 왼편 서쪽 산을 등진 채 자리잡은 마을이 과거 영천군 청통면의 서산리(瑞山里)이다가 지금 영천시 대전동(大田洞)이 된 마을이 있다. 이 대전 마을은 충장공의 부친 부사직(副司直) 이현보(李玄寶) 공이 처음 열었다고 한다. 대전동의 서쪽 마을이 이른바 서파촌(西坡村)의 쌍계동(雙溪洞)이다. 서파촌에는 부사직공의 제3형 헌납(獻納) 서파(西坡) 이안유(李安杻) 공이 들어가 살았다. 대전동 마을에 충장공(忠莊公) 대전(大田) 이보흠(李甫欽)의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오천정씨(烏川鄭氏)의 호수종택(湖叟宗宅)과 양계정(暘溪亭)이 있다. 이 마을은 곧 충장공 이보흠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이라 한다. 이곳에서 영천 청통 지역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고 대과(大科)에 급제를 하였으며,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簒奪)하자 기관낙향(棄官落鄕)한 곳 또한 그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마을에 충장공 후손 영천이씨는 한 집도 없다. 마을 안에 충장공의 유허비각(遺墟碑閣,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제24호)이 있는데, 이는 공이 복권된 6년 뒤인 1744년에 영천군수 병계(屛溪) 윤봉오(尹鳳五)가 세웠다. 비각 앞에는 충장공이 젊었을 때 거닐었다는 순흥연(順興淵)이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제법 큰 못이었다고 하는데 농지정리 때 논으로 편입되고 지금은 80평 정도만 남아 있다. 못둑에는 1973년 본손이 순흥연(順興淵)이라는 표석을 세웠으며 이 못에는 전설이 있는데, 공이 순흥에서 화를 당하고 교살당하자 혈류(血流)가 3일 동안 계속되었으므로 이후 못 이름을 순흥연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마을 대전리는 충장공의 생질(甥姪) 오천정씨 사성(司成) 정종소(鄭從韶)와 사위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 밀양손씨 손서륜(孫敍倫) 공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충장공은 한 마을에 살았던 오천정씨 생원(生員) 정문예(鄭文裔)공과 처남남매간이 된 인연을 이루었다. 정문예의 아들이 정종소인데, 그는 단종의 폐위를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절의를 지켰다. 또 한 마을에 살던 밀양손씨(密陽孫氏) 손서륜(孫敍倫)에게 따을 출가시킨 인연이 있었다. 충장공은 사위 손서륜과 함께 선산(善山)의 금오산 아래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묘소를 찾아 치제(致祭)를 하면서 울분을 달래었는데,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획책(劃策)하는 데 가담하여 장인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그래서 지금 이 마을에 정종소의 현손인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의 종택이 있게 되고, 정세아의 손자 정호인(鄭好仁)의 양계정사(暘溪精舍)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충장공은 거사(擧事)를 앞두고 외아들 이간인(李旰仁)에게 망명도생(亡命圖生)을 당부했다. 충장공 자신도 모르는 곳으로 피신을 하되, 꼭 대를 이어 후세를 기약하기 바란다는 다짐이었다. 세조 3년(1457)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 거사가 발각되자 이간인은 어린 아들 3형제를 데리고 거창의 심심산골 오가산으로 숨어들었다. 이 때 맏아들 이근(李根)이 11살, 차자 이지(李枝)가 7살, 계자 이식(李植)이 4살이었다. 그 오가산은 거창 남쪽에 위치한 첩첩산중으로 다섯 번 난을 피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었다. 3형제가 장성하자 살던 곳이 너무 협소하여 생활이 어렵게 되자 이후 차츰, 거창의 남상면(南上面) 웅곡(熊谷)과 장팔리(長八里), 무주로 가는 산골 오류동(五柳洞), 오류동 근방의 도동(道洞) 등에 옮겨 살게 되었다.
거창 웅곡은 거창읍에서 서남쪽으로 20여리 길, 덕유산 자락에 숨어 있는 작은 마을로 곰실이라 부른다. 심산궁곡(深山窮谷) 사방이 산으로 둘러 있고, 거창쪽으로 좁은 길이 열려 있다. 이곳이 하도 산골이라 후손들이 1845년까지도 1738년에 이루어진 충장공의 복권(復權)과 사시(賜諡)를 모른 채로 있었다 한다. 이 마을에 이간인 공의 추모비(追慕碑)와 충장공을 봉향하는 성인사(成仁祠)가 있다. 곰실에는 40여 호가 살고 있고, 상당수는 가까이 장팔리로 옮겨 살고 있는데, 장팔리에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충장공 양위를 배향한 덕천서원(德泉書院), 충장공신도비, 서원 창건자 호산(湖山) 이학도(李學斗)의 묘소와 가 있고, 호산정(湖山亭)이 있다.
오류동은 주상면(主尙面)의 내오리(內吾里) 중의 자연부락인데 이식(李植)의 후손 10여 호가 모여 살고 있다. 도동(道洞)은 거창군의 북쪽으로 무주 구천동으로 이어지는 37호 국도변 대덕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인데, 곰실, 장팔리에 살았던 이근(李根)의 증손자대에 집안이 번창하게 되자 큰집 4형제 중 계자(季子) 죽헌(竹軒) 이영신(李永信. 1641∼1725)이 개기(開基)하여 도의동(道義洞)이라 한 마을이다. 거기 도동에는 입향조를 기리는 도천재(道川齋)와 죽헌선생유적비(竹軒先生遺蹟碑)가 있다.
영천읍에서 동북쪽 20여리, 영천댐으로 가는 길을 주행하여 임고면(臨皐面) 소재지가 나오고 임고서원(臨皐書院) 초입을 지나 10여 리 되는 곳에 덕연(德淵)마을이 있고, 이어 삼매리(三梅里)가 나온다. 운주산승마자연휴양림 및 영천컨트리 클럽이 있는 서쪽 마을들인 셈이다. 중장공의 4세손 곧 이근(李根)의 증손(曾孫)인 귀래당(歸來堂) 이경선(李慶善. 1519∼1600)은 거창 웅곡(熊谷, 곰실)을 떠나 충장공의 탄생지요 관향지인 영천(永川)으로 귀환(歸還)하였다. 처음에는 대전동 근방 명산면(지금의 청통면) 직동(直洞, 곧은골) 숙곡(叔谷)에 정착하였다. 귀래당의 7세손 이현생(李現生)이 비로소 다시 솔가하여 더 북쪽인 구계동(임고면 덕연리)로 이거하여 덕연리 입향조가 되었다. 후손들은 덕연리에 대전정사(大田精舍)를 지어 충장공을 기리고 있으며, 예전에는 주위에 100여 호의 영천이씨가 세거하였다고 한다.
군위읍에서 10여 리, 68번 지방도를 따라 서북 소보면(召保面) 쪽으로 가면 외량(外良)이 나오고, 좀더 가면 충장공(忠莊公)의 주손(冑孫)이 살고 있는 삽령(鈒嶺, 삽재)마을이 나온다. 원래 이 집안은 거창의 웅곡(곰실)에서 살고 있었는데, 충장공의 8세손 이준화(李俊華. 1680∼1764)의 묘가 안의현(安義縣) 소제동(소제동)에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때 안의로 이거한 듯하다. 안의 고을은 1728년 영조조 이인좌(李麟佐)의 ‘무신(戊申)의 난’ 주동자인 정희량(鄭希亮)의 근거지였다. 난이 일어나자 일족 중 일부가 고향을 떠났는데, 그 난 때문에 충장공의 후손임이 밝혀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랬을지 모른다고 한다. 안동 지역으로 옮겨 살 작정으로 길을 가던 충장공 11세손 이명신(李命新, 당시 종손)이하 이국신(이국신), 이상신(이상신) 3형제 가족 일행이 군위 백령(白嶺, 흰재)를 지나게 되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군위는 충장공이 현감(縣監)을 지낸 인연도 있고 해서 드디어 삽령(삽재) 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 마을 후손들은 충장공 탄생 10주갑(600년)을 기리기 위하여 1997년 경절정사(景節精舍)를 세운 바 있다. 지난날 성시(盛時)에는 모두 50여 호였으나 지금은 20여 호가 살고 있으며, 통상 군위 신성(新城)으로 부르지만 행정동명으로는 삽령(鈒嶺)이다.
참고로 군위 소보 봉황리와 의성 산운 마을의 영천이씨는 영동정공파로서 가까운 일가이고, 안동 도산 분천리와 녹전면 원천리의 영천이씨는 영양군파의 소윤공파이다. 그리고 영천 임고 덕연리와 군위 삽령, 거창 웅곡 등의 영천이씨는 영양군파의 남곡공파 중 충장공파로서 가까운 일가이고, 군위 우보 미성리의 영천이씨는 영양군파의 남곡공파 중 제학공파로서 충장공파와 중시조가 형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