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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의존교회110513a (십자가 승리)-이 근호 목사
골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 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초대교회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교회들이 있고 기독교라는 것이 한국에 있으니까 교회답다, 참된 교회다 하는 그 모델을 이웃 교회나 큰 교회에서 찾기 쉬워요. 그것은 잘못입니다. 성경에 보면 진짜 교회 같은 교회가 초대교회에 나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도 사람이거든요. 신월동에 사시는 여러분하고 똑같은 사람인데 그들은 하루하루 특히 금요일, 그들은 무엇으로 살았겠습니까? 그 초대교회 사람들이 무엇으로 살았기에 이 골로새서라는 편지, 갈라디아서라는 편지, 로마서라는 편지, 고린도서라는 편지 거기에 목을 달고 거기에 올인 하고 그것에 자기의 생명을 바치면서 그들이 살았던 것입니다.
다 같은 사람인데 그들도 세포로 되어 있고 그들도 하루 두 끼나 세끼 먹을 거고 그들도 일상의 생존의 부담 같은 것을 그들도 갖고 있었단 말입니다. 같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사도행전 초대교회를 보면 그들은 그렇게 기뻐하고 그렇게 즐거워하고 그렇게 놀라워했어요. 우리와 같은 인간인데 그리고 사도들이 그들에게 편지할 때 여러분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잘 살아라 이렇게 편지했습니까? 골로새서가 그런 내용입니까? 잘 먹고 잘사세요. 이것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였습니까? 그게 아니죠. 골로새서에 편지를 보내면 그들은 감격했습니다. 제가 지금 까지 이야기한 이 말은 결국 그들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그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사도행전에 보면 이것을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그 당시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어요.
왜냐 하면 사람은 죽는 것이 당연하니까 그런데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 죽은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나서 자기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그런 목격담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기가 막힐 놀라운 일이에요. 구름 타고 하늘로 로케이트처럼 올라갔어요. 이것도 놀라운 일이에요.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일입니다. 십자가 죽으신 분도 예수님이요 부활하신 것도 예수님이요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도 예수님이죠.
일반 사람하고 상관없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십자가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무슨 소식이 들려오느냐 하면 성령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해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이야기 아니고 누구 이야기에요? 보통 사람에게 주어진 특별한 변화였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로마서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골로새서는 결국은 무슨 이야기였냐 하면 이 사람들 돈 잘 벌고 밥 잘 먹고 잠잘 자라는 그런 이야기의 편지 내용이 아니고 무엇과 관련이 있냐 하면 성령 받았다는 의미가 뭔지 왜 다른 사람에게 오지 않는 그 성령께서 하필이면 우리에게, 나에게 성령세례가 왔는지 의미와 연관된 편지들을 골로새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이렇게 보내 준 겁니다.
그 편지 내용에 보게 되면 사람이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부터 이미 죽고 난 뒤에 천국 갈 것이냐 지옥 갈 것이냐를 결정할 것이 아니고 이미 죽기 전에 성령세례 받은 사람 한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고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합류한다는 사실이 편지로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이 죽어야 구원받는 겁니까?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구원받은 겁니까?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성령을 받아서 구원받았죠.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성령께서 오게 되면 십자가로 인하여 자기는 세상에 죽고 세상은 나한테 죽었느니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 안에서 이미 내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 한 사람만의 이야기라면 또 우리하고 상관없는 이야기가 될 텐데 사도 바울은 성령 받은 사람은 모두 자기와 같이 그 들안에 예수님이 사시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났을 때는 예수님 혼자만의 인생을 살았어요. 기적을 베풀었는데 예수님 혼자 할 수 있었는데 일반 사람과 상관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질 때도 예수님 혼자 계시고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에 가담하지 못했죠. 강도가 옆에 같이 죽었지만 가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게 되면 그때부터 어떤 기이한 일이 생기느냐 하면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분이 일반인과 같이 합세가 돼서 잇는 새로운 사람들이 여기서 등장하죠.
십자가 지신 예수님과 같이 사는 형식의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그렇게 돼요 그렇다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머리색이 흰 것이 검어진다던지 키가 큰다던지 그게 아니잖아요. 성령세례 받는 다고해서 갑자기 한식 먹다가 양식 먹고 그게 아닌 거죠. 성령세례 받았다고 해서 수입이 늘어나고 전혀 그런 거 없습니다.
그건 한국 교회에서 거짓말해서 그렇지 성령세례 받으면 그냥 성령세례 받은 거예요 성령세례를 돈으로 바꿔 주는 법은 없단 말입니다. 성령세례 받은 근거로 돈 달라고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성령세례 받으면 그냥 성령세례 받은 겁니다.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자기 거처를 삼아서 우리 안에 들어 와서 살겠다는 그러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녹차입니까? 차의 컵이 이렇게 있죠. 이 컵이 녹차가 들어간다고 컵이 갑자기 종이컵으로 바뀌는 법이 없잖아요 녹차가 있던, 물이 있던 관계없이 똑같이 생긴 동일한 컵이란 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들어간다고 해서 우리한테 변화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럽게 임하시는 게 아니라 십자가 자체가 된다는 것은 나중에 결국 죽게 될, 나중에 먼지가 될 우리의 몸에 들어 올수 있는 그런 여건이 십자가 안에 이미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인들은 그때부터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남들처럼 돈으로 살고 명예로 살고 권력으로 살고 권세로 사는데 이 예수님의 성령세례를 받고 난 뒤에는 그때부터는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어떤 어르신이 자기 안에 들어오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가 쓰임 받고 있다는 생각을 그들은 하게 됩니다. 쓰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러면 어떻게 쓰임 받느냐는 내용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고린도 전후서 이런 편지, 디모데전서 이런 편지들을 통해서 너희는 이런 식으로 쓰임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로마서 8장을 예를 들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이를 영화롭다 하셨느니라. 라는 계시 그 현실을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가지고 우리를 성령세례를 받게 함으로서 미리 아신 자가 부르심을 입고 부르신 자가 의롭다 함을 받고 의롭다 하신 자가 영화롭게 되었다는 그 모습이 실제로 실시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하는 겁니다.
제 이야기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어떤 누구도 골로새서 로마서 내용에 거기에 그것이 이루어지겠어요? 안 이루어지겠어요? 안 이루어지지요 편지 자체가 편지보고 돈 벌라고 준 편지가 아니고 성령세례 집어넣고 편지가 뒤에 따라 온 거예요 어떤 때는 동시에 들어 올수도 있고 말씀 전하는 순간에 성령 받을 수도 있고 자기 영을 주시고 영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함께 거하시고 성령이 없으면 예수님이 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몸에 들어오지를 못해요 반드시 성령을 매개로 해서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 것이 어려운데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모세가 수건을 써야 모세가 시내산에 내려온 모세와 밑의 백성들과 합세가 되는 것처럼 그 수건 역할을 누가 한 단 말이죠. 수건 역할을 성령이 해서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그들이 하나 됐다 이 말이죠.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뒤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실 일들이 우르르 쏟아지면서 들어 와 버려요 그런 내용이 골로새서 2장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 뒤따라 나온 겁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이 골로새서 내용을 보면서 자기가 한가할 때는 관심 있게 보지만 자기가 바쁜 일이 생기면 이 성경 자체가 자기하고 상관이 없지요 왜냐 하면 자기 임무는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임무가 아니고 자기 삶은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성령세례를 안 받을 경우에 성령세례를 안 받아 버리면 예수님은 자기 안에 있겠어요?? 밖에 있겠어요?? 저 밖에 있든지 아니면 성경 속에 만 있는 거예요 자기 하고 상관이 없는 거예요 교회 와서 성경 펼칠 때는 옛날에 예수라는 분이 뭘 했지 라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 모시지 않고 그냥 홀로 와서 책에 있는 어떤 주인공을 보는 거예요 마치 얘들이 위인전 볼 때 강감찬 장군이 뭘 했을까, 을지문덕이 뭘 했을까? 할 때는 그것은 자기 속에 을지문덕 귀신들린 게, 강감찬 귀신들린 게 아니잖아요. 그것은 “오늘 선생님이 강감찬 장군에 대해서 선생님이 이야기하는데 강감찬이 누구일까? 하고 한번 찾아볼까 해서 도서관에 가서 강감찬 장군 책을 보면 아 이런 분이구나 하고 알듯이 그것을 아는 것은 지식으로 아는 거잖아요
그 순간에 강감찬 귀신이 들어 온 게 아니라 말이죠. 그런데 진짜 성경에서는 그게 아니고 이미 성령이 들어 온 입장이기 때문에 성령이 들어 온 입장에서 이런 골로새서나 로마서를 보게 되면 지금 남의 이야기 아니고 나라는 인생이 이런 식으로 풀려 하고 있구나! 라고 이 내용대로 그대로 실천이 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운명은 누구의 손에 달려 있습니까? 우리의 운명은 내손에 달려 있는 게 아니고 다른 분에 의해서 장악 당하고 있죠. 이게 기분 좋은 이야기에요? 기분 나쁜 이야기에요? 어떻습니까? 기분 좋게 들립니까? 기분 나쁘게 들립니까? 기분 더럽죠.
내 인생은 어릴 때부터 꿈이 있고 비전이 있고 그 꿈을 내가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데 성경 내용에 보면 니꿈은 개꿈이고 성경 안에 있는 내용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내가 너 안에서 살겠다고 들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적으로 싫어지겠지만 초대교회 교인들은 어떻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싫다 좋다 할 수가 없어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기분 좋았겠어요? 나빴겠어요? 스데반 집사가 기분 더럽다 오늘 돌 맞고 이렇게 죽다니 내 청춘이 이렇게 끝나나 하면서 기분 나빠했겠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은 현실을 모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함께 있다는 것을 그들은 현실을 모릅니다. 저들의 하는 짓은 몰라서 하는 짓이니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보면 그것이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그게 초대교회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에요. 스데반 집사가 키가 170이고 몸무게가 100키로가 넘는다! 이게 아니에요. 비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입니다. 똑같은 아담의 자손인데 돌에 맞았을 때 그 입에서 나온 고백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그들은 현재 이 세상의 생활고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 정도가 아니고 온갖 수모와 핍박을 받아도 그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적나라한 모습은 히브리서 11장에 끝에 보면 나와 있어요.
히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
라
이 성령세례 받은 사람으로 인하여 졸지에 무슨 사람과 무슨 사람으로 나눠지느냐 하면 세상 사람과 믿음 있는 사람, 성령세례 받은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서로 소통될 수 없는 교류될 수 없는 완전히 큰 절벽이 쭉 갈라지듯이 균열이 보이는 겁니다. 지진에 땅 갈라지듯이 그런 갈라짐이 결국은 벌써 이미 심판이 시작이 되었다는 신호가 돼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이미 심판이 실시되었다고 나오죠. 그 다음에 3장 18절에 보면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되어 있어요. 12장 31절에 보면
요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심판은 이미 이루어 졌는데 그 심판이 뭐냐 하면 하늘에 유황불 떨어지고 하는 것은 나중에 일어나겠지만 이미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 사람에게 성령이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갈라지는 거예요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세상을 이해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거지 나사로하고 부자가 갔던 것처럼 그것은 수직적으로 갈라지는데 이 땅에서는 이미 수평적으로 균열이 일어나서 세상 보는 눈이 다 달라져 버려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성령세례 받은 사람들의 보는 세상 관이 누구의 세상 관이냐 하는 것을 제가 묻고 싶어요. 누구의 세상 관이겠습니까? 예수님이 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을 보는 거와 동일하게 세상을 그런 식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보는 식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세상에 왔을 때 세상은 예수님을 그냥 방치하지 않았죠. 예수님을 밀치고 핍박을 했겠죠. 그게 세상의 속성이에요. 그 속성이 그대로 누구한테로 그대로 적용되겠습니까? 바로 성령세례 받은 예수님이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겁니다.
지금 골로새서 2장을 하고 있는데 지금 초대교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초대교회에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 등장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생활할 때 일반적으로 생활하는 것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 성령세례 받아 버리면 갑자기 사람들 자체가 우리가 사는 일반적으로 밥 먹고 사는 그런 사고방식이 아니고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은 편지를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격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변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심판 자체가 벌써 이미 시작이 되었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앞장세워서 심판을 시도 했냐? 죽 이야기 들어 보면 누굽니까? 누구를 심판하는 겁니까? 보통 사람인데 성령세례 받은 사람에게 불쑥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예를 들어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 빌립 집사 같은 경우에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세상은 갈라져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빌립 집사가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에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죠. 에티오피아 내시가 에티오피아의 고급 관료죠. 요새 말로 고급 공무원입니다. 고급 공무원이 뭐가 아쉬워서 뭐가 부족해서 난데없는 사람을 만나서 세례를 받겠어요? 그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았죠. 골로새서 같은 경우에 이방 민족인데 이방 민족에게 성령세례가 와 버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그 사도들은 마치 어떤 소식을 들었냐 하면 강원도에서 구제역이 있다 하면 서울에 있는 가축 전문가가 당장 어디로 달려가야 됩니까? 강원도로 달려가야 되겠죠. 저 강원도에서 누가 성령세례 받았다면 사도들이 당장 달려가서 이 편지들을 소개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하는 일이 뭐에요? 분명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승천하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는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갈라질 수밖에 없다 그 갈라질 때 다 천국, 지옥 가는가를 문제 삼을 수 없고 지옥 갈 수 밖에 없는 인간들 가운데 누가 성령세례를 받아서 주님의 백성이냐 그 소식만 들려오도록 고대하겠죠. 그리고 고대하기도 하고 그 소식을 전하러 가기도 하고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하러 사도가 가는데 사도 자기 맘대로 갑니까? 누구의 지시를 받아요? 성령님의 지시, 또는 주님께서 지시를 해서 복음을 전하는 순간 령과 함께 임하는 그런 현상들이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에 보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국은 지금 바로 초대교회에서 말하는 교회는 성령을 받아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된다는 것이 교회이거든요 성경에서 교회를 출발하지 않고 기존에 나와 있는 기독교라는 집단이 교회라고 생각을 해서 거기에 넘어가고 그것을 따라가고 그것과 비슷하게 해야 되고 그들과 유사하게 해야 되는 그것을 교회라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오산이라는 겁니다. 오늘 강의 주제가 제가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출발점을 성경에서 출발하는 교회를 생각해야 되지 기존에 있는 머리로 쓴 이런 교회를 교회라고 강조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꾸 그것을 교회라고 강조하게 되면 그 사람만큼 또 그 사람 비슷하게 해 버리면 그것을 교회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 다니까요 ‘그쪽 교회 가니까 사랑이 없어 그런데 우리는 사랑이 있으니까 우리는 교회야’ 비교를 저쪽과 비교해서 마치 저쪽 교회가 아닌 것을 가지고 비교해서 자기가 저들보다 나으니까 마치 훌륭한 교회처럼 오해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죠.
출발을 성경에서 해야 될 것을 가지고 성경에서 하지 않고 어떤 큰 교회, 목동에 어느 00교회, 00교회 또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하네요. 돈 몇 오십억을 목사가 횡령을 했다는 그런 이야기인데 우리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훌륭한 교회가 되는 게 아니에요 교회는 이쪽 교회 모자라는 거 저쪽 교회 부족한 거 채운다고 교회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의 출발은 성령세례를 받아서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피로 산 교회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그것을 피를 증거하고 피를 받아서 그 안에서 그 피의 의미를 아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의 갈 바라는 것을 다짐을 하고 의식하는 사람들의 모임 거기에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께서 함께 하시잖아요 그게 교회가 되는 거예요
지금 그 이야기하려고 30분 이상 계속 이야기했어요. 초대교회와 기존 교회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게요 기존 교회 먼저 하겠는데 기존 교회의 인간들은 여러 가지의 자기가 부챗살처럼 할 일이 많아요. 얘들 양육도 해야 되고 시어머니 봉양도 해야 되고 자기 직장 생활도 해야 되고 자기 건강을 위해서 헬스나 수영도 해야 되고 주일날 되면 교회도 가야 되고 기존의 교회는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은데 그중의 하나가 교회 가 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챗살처럼 여러 시간을 쪼개서 하나가 교회 가기에요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런 것이 없어요. 초대교회는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했습니다. 교회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초대교회는 이미 이렇게 교회를 통해서 오는 게 아니고 바로 직접 양육하고 봉양하고 직장 생활하고 교회 일하고 어떤 일이든 상관하지 않고 교회 일이 주의 일이 아니고 이것과 상관없이 직접 성령께서 와 버렸잖아요. 주님께서 오셔서 성령을 통해서 이 일을, 봉양을 하게하고 직장 생활을 하게하고 성령이 직접 와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주께서 주시는 힘 가지고 한다는 겁니다.
교회 일이 이념이 일보다 먼저 아니에요 초대교회는 일부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 점을 가지고 골로새서 가지고 이제 설명을 할 거예요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라는 것은 성령세례 받은 사람에게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이런 일을 일어나게 될 것이다. 왜? 그 사람 안에 있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께서 골로새서의 내용들을 끌어당겨서 그것을 가지고 이 골로새서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것을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게 되는데 너는 거기에 동원된 하나의 매개체의 불과하다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주께서 성령세례를 받으면 완전히 장악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 복음의 내용도 그대로 그 길로 가도록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운명을 쥐고 있는 분이 들어 와서 자신의 뜻을 이루는 그 광장 그 공간이 능력으로서 우리는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궁금한 게 뭔가 하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합니까? 하는 것이 궁금해 져야 돼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지요 제가 지어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는 그렇게 살았다는 겁니다.
되지도 않는 일을 억지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로 초대교회에서 성령세례 받고 골로새서에 있는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이 말입니다.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애써서 해 봅시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반드시 일어나는 일을 하는 거예요 아까 예를 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이를 영화롭다 하셨느니라.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숙제가 아니고 반드시 주께서 우리 안에서 그렇게 해 내고야 마는 예수님의 자기 일을 벌이는 우리는 로마서 8장를 통해서 아하 주께서 지금 내안에서 이런 작업을 벌리고 있구나! 라고 감격하고 고백하고 감사하고 그것을 증거하는 일, 이 현상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게 일어나는 와중 속에서 우리 속에서 뭐만 자꾸 끝없이 나오겠습니까? 우리가 버려야 될 것만 자꾸만 나오죠. 여러분 오병 이어가 뭔지 알죠. 오병 이어라고 하는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주님이 축사하니까 자꾸만 나오죠. 맞죠? 맞는 이야기잖아요 그 자꾸만 나오는 게 결국은 뭐에요? 쓸데없는 게 자꾸 나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습니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그들이 배불리 먹었잖아요. 배불리 먹은 것은 결국은 그 배불리 먹은 것으로 구원이 됩니까? 구원이 안 되죠. 안 되는 것을 주께서 풍성히 주신 거예요.
먹어도 구원이 안 되는 것을 풍성히 줘서 배불리 먹더라도 거기에 신경 쓰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오병 이어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 안에서 육이 계속 튀어나오게 하는 거예요 육이 계속 튀어나오면 뭐가 작용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영이 계속 작용해 줘야 육이 계속 튀어나오는 겁니다. 영이 들어 와야 육이 튀어나오죠.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한 거예요 우리가 골로새서 고린도 전서, 로마서 이런 내용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일상의 모든 관심사나 일상의 우리의 뉴스거리라는 던지 우리가 일상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것들은 골로새서나 로마서 여기에 안 나오죠. 동해야 웃어라 하는 이야기 디모데전서에 나옵니까? 안 나오죠.
박지성이 축구하는 것이 로마서에 안 나오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성경 보다가 박지성이 한 골 넣으면 거기 쫓아가잖아요. 그 말은 성령세례가 오게 되면 우리의 몸은 골로새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내용대로 실천이 돼야 되는데 우리 안에는 여전히 뭐가 있어요? 골로새서 내용, 거기에 지옥 갈 수 밖에 없는 저주받을 내용들이 가득 있잖아요. 골로새서가 차고 들어오면서 너 안에 이런 쓰레기들이 있었다고 밖으로 배출하는 작용을 성령세례를 받으면서 일어나야 돼요 어떻게? 더 풍성하게……. 뭐가? 쓰레기가……. 구원되지 않는, 구원될 수 없는 그 쓰레기가 계속해서 밖으로 더욱더 차고 넘치도록 풍성히 계속 나와야 돼요
문제는 그런 것을 자랑한 다는 거예요. 쓰레기를 배출하니까 쓰레기를 많이 받았다고 그것을 간증으로 자랑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암에서 나았다, 부자 되었다, 생활하기가 좋아졌다 ……. 그게 골로새서의 내용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내용하고 관계없어요. 고린도후서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게 나와야 되는데 나 뭐 건졌다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아직도 자기가 안 죽은 거란 말이죠. 나는 이렇게 해서 죽어야 마땅합니다! 하는 그런 증거들이 막 쏟아져 나올 때 내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이것도 귀하고 저것도 귀하고 이것도 중요하고 돈도 중요했지만 이제는 어떻게 됐는지 그런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그런 것들이 돈 수천억이 내 목숨, 천국을 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식으로 그런 고백이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 안은 우리가 청소할 수 없어요. 누가 청소해요?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막 설치니까 튀어나온 겁니다.
옛날에 봤던 가위손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가위의 달인이에요 멀리서 보니까 어떤 집 정원에 보니까 풀이 사방으로 튀어요. 왜 풀잎이 튀나 가보니까 아주 현란하게 빠르게 가위질하다 보니까 나뭇잎을 막 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성령 받은 사람은 쓰레기 같은 것이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시기와 탐욕과 질투와 음란과 세상 정욕이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가만 보니까 성령께서 가위질 한다고 바빠요 초대교회가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에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남들을 용서하고 많은 초대교회에 사도 바울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그들의 몸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그 안에 무슨 귀신이 들어 있기에 그 안에 뭐가 들어 있기에 그들은 육체를 인해 썩어질 것을 거둔다는 그런 이야기를 감히 하는 겁니까?
자기 몸을 위해서 사는 것은 썩어질 것만 거둔다는 이야기, 갈라디아서 6장8절에 나오잖아요. 자기 몸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육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영생을 얻으리라 둘 사이에 어떤 타협이나 어떤 흥정도 갈라디아서에서는 그것을 용납해 준적이 없어요. 한국 교회 목사들은 용납했지만 갈라디아서는 용납을 안 해줍니다.
그럼 갈라디아서가 맞아요? 한국 교회 목사들이 맞아요?? 어느 것이 맞아요?? 어떤 것이 편하냐 하면 한국 목사들은 편해요 하지만 한국 목사가 천국 넣어 주는 게 아닙니다. 한국 목사가 성령세례 주신 분이 아니에요. 실제 이 땅에서 버림받아 십자가 지신 분만이 성령세례를 주어서 이미 이 땅에서 천국과 지옥을 갈라지게 한다 이 말이죠. 골로새서 2장9절 말씀이 굉장히 난해 한 말씀인데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골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하나님의 속성이 어디 안에 거하신다고 했습니까? 그 조그마한 육체 안에 하늘의 신성이 하나님 됨이 그 안에 충만하게 거한다 했죠.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에게 만 해당됩니까? 그 다음을 보세요.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지고’ 성도가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돈으로 충만합니까? 세상에 있는 보석으로 충만합니까? 목걸이로 충만합니까? 어떤 것으로 충만합니까? 이것은 구원받을 것으로 구원받을 능력으로 충만하죠. 아까 말한 가위손 구원과 관계없는 것, 아 이런 것들이 구원하고 상관없는 거구나 하고 막 날아가는 것 애 공부 잘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인물 좋은 것도 구원하고 천국하고 관계없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가위로 잘려서 아 이것이 바로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고 주님 십자가 공로를, 사랑을, 감사를 감사케 못하고 원망 거리를 만드는 구나하고 이게 막 타다닥 치는 겁니다.
칠 때 그 사람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쓰레기처럼 밖으로 막 쏟아져 보이는 거예요 애들이 흙장난해서 손에 흙이 묻으면 손 떼찌하고 손 펴 봐 하면 손안에 흙하고 돌하고 우르르하고 쏟아지잖아요. 이처럼 우리 육을 우리가 몰라요 우리가 우리 속 어떤 구원과 상관없는 것들이 가득 차 있는지 몰라요 우리는 죄가 충만하잖아요. 죄가 충만한 곳에 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신성이 들어와 버리면 주님의 신성이 충만함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이런 육체가 가득 들어 있음을 밖으로 그것을 완전히 다 발산해서 들춰서 내보내는 일들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 올 때 어떻게 그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 많은 우리 육신의 몸에 어떻게 들어 올 수 있습니까? 간단하죠. 성령으로 들어오잖아요. 맞아요, 틀려요? 맞지요 마리아 몸에 성령으로 잉태했으니까 맞잖아요. 성령으로 들어 왔으면 그 나타난 결과, 현상은 어떤 현상이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버림받음이에요. 예수님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습니다. 성령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수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몸은 그냥 몸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예수님의 몸은 주변에 무엇으로 둘러싸여 있습니까? 바로 세상, 또는 세상사람 이 세상으로 둘러싸여 있음으로서 이 둘 사이에 세상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관계냐 하면 세상은 예수님을 버리고 예수님은 세상한테 버림받은 몸으로 오신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문제가 거기 예수님이 어떻게 영광스런 예수님이 우리 몸에 들어 올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되어 있습니다.
여기 11절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할례라는 것은 율법에 속한 거예요 율법에 속한 건데 지금 너무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5절 봅시다. ‘정사와 권사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4절에 보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 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의문이라는 것은 문자인데 문자로 쓴 종이쪽지를 찢어 버렸다 또는 도말해 버렸다 덮어 버렸다 이런 뜻인데 그러면 할례는 어디에 속하느냐 율법에 속하죠. 율법에 속한 것을 무엇을 벗겨 냈다? 뭐로 승리했다? 십자가죠.
그러면 율법도 하나님의 계시고 십자가는 새언약인데도 역시 하나님의 계시잖아요. 하나님의 계시 사이에 뭐가 들어갔습니까? 균열이 일어나요 하나님의 계시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균열이 일어나게 되면 이런 균열로 인하여 할례 받은 몸이 새언약에 의해서 할례 받은 몸이 제제가 되는 식으로 성취를 시켰다는 이야기죠. 율법에 해당되는 율법에서 율법이 어디 하고 연결이 되느냐 하면 죄의 몸과 연결되어 있고 이 십자가는 누구와 연결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과 연결되어 있어요.
율법과 십자가 사이에 갈라진다는 것은 곧 율법에 접촉해 있는 몸과 새언약에 있는 몸과 이 둘 사이를 따로 갈라지게 하는 겁니다. 논리가 그래요 율법이라는 것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누구를 지배합니까? 너희들 몸까지고 똑바로 살라는 말을 해서 율법은 항상 우리의 어디를 지배해요? 현재 우리의 죄의 몸을 견양하고 있어요. 율법이 쏘고 있어요.
우리 몸을 긴장하도록 율법대로 너 살지 않으면 저주고 지옥으로 보낸다고 이렇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율법을 없앨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율법이 우리 전 인간의 몸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 ‘나는 이제 율법 안 지켜 난 무율법자야 나는 율법하고 상관없어’ 하고 도망친다고 해서 율법에 해당이 저촉이 안 되는 겁니까? 율법은 계속해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겠죠.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지키면 될 것 아닙니까?’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 가 있습니까? 저주 아래 있는 거예요 제 말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율법이 하나님의 계시가 먼저 이고 계시 다음에 피조물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피조물이에요? 말씀이에요? 우리는 피조물이잖아요 말씀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다음에 모든 것이 말씀 없이 된 능력이 없다고 했잖아요. 우리는 좋든 싫든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만 증거하기 위해서 동원된 피조물입니다. 동원된 피조물인데 현재 우리 동원된 몸은 어디에 연결되어 있어요? 율법과 연결되어 있잖아요. 좋든 싫든 간에 율법의 저주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초대교회에도 우리와 똑같이 하루 세끼 먹고 잠자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세례가 와 버렸어요. 성령세례가 왔다는 것은 이 골로새서 로마서 이야기가 그대로 그들에게 통보되는 겁니다. 통보되고 난 뒤에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아 내가 평소에 내 몸은 내가 관리하고 내가 농사짓고 내가 장사해서 산다는 이런 범범한 보통사람 그냥 돈 있으면 살고 돈 없으면 죽는다는 평범한 생을 살고자 했던 그들에게 성령세례가 와서 그들은 갑자기 어떤 세계를 접하게 됩니까?
말씀의 세계에 접하게 되죠. 말씀의 세계에 딱 접하게 되니까 자기 몸은 돈이 있고 없고 관계없이 이미 무엇과 관계 연관되어 있다? 율법의 저주와 관련되어 있는 몸이라는 것이 밝혀진 거예요 율법이 와서 우리는 저주받아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마땅히 지옥 가야 된 다는 사실을 알죠. 그런데 그 율법의 몸을 완전히 껍데기를 벗겨 버리는 분이 계시다는 거예요 누구에요? 그것은 예수님 자신에게 먼저 일어나야 돼요 예수님 자신이 율법의 몸을 벗어버렸다는 것은 십자가로 보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의 죄 된 몸을 벗어버렸다 이것을 할례라고 합니다. 할례라고 하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의 끝을 벗기는 겁니다. 십자가가 하는 일은 율법으로 옴팡 덮어쓴 저주로 옴팡 뒤집어쓴 우리의 몸을 율법과 관련된 몸을 이제 율법과 관련 몸을 청산 기키고 없애 버리고 누구와 관련시켰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한 몸과 관련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율법에서 벗어나서 어디에 속한다?? 이제 십자가를 뗄 수 없는 십자가의 혜택을 누릴 수밖에 없는 그런 몸으로 될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함께 계심의 증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자체 그렇게 해요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이해됩니다. 왜냐 하면 자기가 저주받아 마땅하다가 고백하기 때문에 ……. 성령 세례 안 받은 사람은 그런 고백 안 나오잖아요 누가 이 곤고함에서 나를 건져낼까 오 예수님의 십자가이구나! 그 십자가는 뭐지? 아하 십자가가 우리의 율법과 관련된 이 몸을 껍데기를 홀랑 벗겨 버렸구나! 그게 바로 할례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할례라는 것은 할례를 받을 때 거룩하게 되는 거거든요
우리의 죄 된 몸을 벗게 될 때 그게 거룩이라 하는 거예요 그것을 벗겨 버리면 겉껍데기가 남을 것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세상에게 버림받은 예수님, 그래서 생겼던 그 십자가 그렇다면 거기서부터 껍데기를 벗어버려서 부활했다면 그러면 예수님을 핍박했던 그것을 가지고 정사와 권세라고 하는 겁니다. 아, 어렵죠.
세상의 악한 권력과 보자면 묵시적 이고 영적 인 악마의 권력의 의한 사실은 우리가 와서 우리가 정치한 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위발시킨 그들이 쓰러졌던 진짜배기 진짜 세상이 우리를 그동안 죄악된 몸으로 지배했던 악마의 세계 영적 어두운 세계의 그의 모든 것이었다 이 말이죠. 그것이 15절에 보면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뭐로 승리했다? 십자가로 승리했다 부활이 승리한 게 아니고 십자가로 승리하신 거예요
이것은 초대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더 이상 세상 권력을 세상이 보여준 악마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도록 더 이상 어떤 두려워 할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다음 시간에는 승리가 무엇에 대한 승리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10513b (십자가 승리)-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12절에 보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 이렇게 되어 있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켰다 할 때 우리는 우리 목숨 끊어진데서 일으켰다 생각 마시고 무엇이 예수님을 죽게 했는가에 신경을 써야 돼요 주님께서 죽은 것이 예수님께서 실수해서 절벽에서 떨어졌다던 지 연탄가스에 죽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은 자들을 생각할 때 그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을 죽이도록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세력에서 하나님이 살렸다는 거예요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 이외에 자립으로 또는 선행으로 정신력으로 거기서 탈출이,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은 사람은 늙으면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고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을 죽게 만드는 그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세력이 놀랍게도 율법화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지킬 수 없는 말씀이 옴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못 지켰다는 이유 때문에 영원히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 그런 환경 그것이 저 세계의 율법화라는 겁니다.
여기에 지킬 수 없고 성취시킬 수 없는 이 율법 안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죽게 되었는데 율법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었지만 율법에 의해서 죽었다고 되어 있으면서 여기에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두운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왜 죽으셨는가? 율법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죄가 있고 죄에게 주어지는 것은 저주밖에 없어서 율법이 주는 저주에 의해서 예수님이 돌아가셨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적 사항을 보면 예수님을 죽였던 것은 어두운 세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거예요 그렇다면 율법의 세계라는 것이 뭐로 대비되느냐 하면 율법이 무섭다 율법이 악하다 이런 것이 아니고 율법이 선한 율법인데 그것이 율법이 안에서 무엇이 태동하고 있느냐, 무엇이 만들어 지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마저 살해할 정도로 강력한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는 어두운 세력이 자행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율법은 선하다, 율법은 선하고 율법을 지배받은 이 세상은 반대로 악하다 그래서 율법적 입장에서 보면 세상은 저주받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예수님 이 땅에 저주받기 위해서 오셨다 이것은 이해되죠.
문제는 여기서 한 가지 율법 아래서 세상은 악하다 왜 악하냐? 어떻게 악하냐? 무엇 때문에 악하냐?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면서 또 다시 밝혀지는 겁니다. 베들레헴에 별이 떴죠. 별이 도망간 사람 따라 예루살렘에 머물다가 사라져 버리고 다시 베들레헴에 갔을 때 별이 떴죠. 그렇다면 별이 떴다는 말은 예루살렘, 베들레헴 동네가 악하다는 말입니까? 선하다는 말입니까? 별 밑에서……. 악하죠. 악하니까 헤롯 군대가 예수님이 피신하고 난 뒤에 그 밑에 두 살 아이들 다 죽였잖아요. 억울하게 두 살 밑에 죽였던 그 사태는 결국은 누가 악한 거예요? 별이 떴던 그 동네 예루살렘, 베들레헴 전체가 이미 악한 거예요 율법이 와서 악함이 드러난 것 같지만 율법이 오지 않더라도 이 세상은 이미 악한 거예요
율법이 옴으로 말미암아 이 정도로 개판이라 하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따라 죄를 짓지만 다른 말로 하면 율법 밑에서 악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세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와도 상관없고 그리고 이 악한 세상에도 저촉을 안 받는 새로운 성도를 성령세례를 주심으로서 만들어 낸 거예요 탄생하게 하신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초대교회 교인들이 알았어요. 이것을 알았다고 해서 돈 더 생기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안겁니다. 이 세상을 전부를 알게 된 거예요 십자가를 알고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 세상은 이렇게 행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전부 알게 된 거예요
지금부터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은 율법 밑에서 악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들이 예수님을 공격할 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공격했느냐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7장 49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는 말이 저 무리는 율법을 모르는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했어요.
요7장49절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저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세례를 안 받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악한 세상에 속하겠어요? 안 속하겠어요? 성령세례를 안 받으면 우리는 이 어두운 세계에 속하겠습니까? 안 속하겠습니까? 속하겠죠. 어두운 세계에 속하면 누구를 죽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이겠죠.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이유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이유가 있었죠. 하나님을 믿는 그들이 왜 예수님을 맘 놓고 자기를 증거한다고 당연히 죽일 자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들에게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보기에 자기 기준에 맞춰서 당연히 죽을 자가 죽었다고 장담하듯이 감히 이야기하겠습니까? 뭐가 있었어요? 율법이에요.
그런데 전제가 뭐냐 하면 우리가 성령 받지 않았다고 전제를 해 봅시다. 성령 받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도 같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을 때 우리는 무슨 근거로 예수님을 싫어하고 예수님은 죽어 없어져도 상관없어 라고 맘 놓고 살겠습니까? 우리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율법이 있죠. 양심 또는 율법, 한 마디로 이 세상의 법, 법이 있잖아요.
16절 봅시다. 골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고 할 때 절기 지키고 월삭 지키고 십일조 지키고 주일 지키고 왜 지키고 에 왜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리는 이유가 뭡니까? 그들 속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율법, 법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최소한 우리 인간이 짐승이 아닌 이상은 인간다운 뭔가 최소한의 규율, 최소한의 규칙 같은 것 우리가 짐승으로 떨어질 것인가 아니면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를 결정짓는 그 경계선에 있는 최소한의 어떤 규칙 같은 것을 우리가 갖고 있어요? 없어요? 가지고 있을 거예요
‘아, 점잖은 내가 참는다.’ 그 점잖은 기준 있잖아요. ‘다른 사람 같으면 넌 죽었어. 내가 워낙 인간성이 좋아서 내가 참는 거야’ 그 인간성 좋다는 최후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것 법 어기면 짐승 됐다고 여기는 그것, 그것이 있지요 바리새인이나 우리가 법을 지켰다고 여깁니까? 평소에 안 지켰다고 여깁니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다 같이 답변해 보세요. 이 마지노선 마지막 보류, 이 법은 우리가 평소에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못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법은 지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해병대가 귀신 잡는 군대죠. 귀신 잡는 군대 같으면 괜찮아요. 어차피 귀신은 안 잡히니까 해병대를 귀신 잡는 군대라고 하면 부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해병대는 40키로 완전무장에 구보까지 하는 군대라고 한다면 해병대 가는 사람이 얼마나 큰 부담이 되겠어요? 40킬로를 뛰어서 또는 행군할 수 있는 부대라면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겁니까? 할 수 없는 겁니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할 수 있는 법으로 인하여 그것을 못했을 경우에는 그 인간은 죽어야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그들이 자기가 생각한 그 법은 자기들은 해 낼 수 있는데 누구는 못한다? 그 법은 예수님은 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들 손에서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죽일 때 자기는 의롭고 예수님은 그것조차도 못한 인간이니까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자아성이에요.
인간의 자아성은 법으로 구축되어 있고 그 법은 자기에게 부당한 법이 아니고 자기에게 가능한 법을 가지고 자기보다 뒤떨어진 못난 자기보다 해 내지 못한 사람들을 자기보다 질이 떨어지는 하류 인간으로 간주하는 그런 법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저 사람보다 우수한 더 나은 자아상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부산 저축 은행 사람들은 5천만 원 후순위 채권 저축한 사람들은 돈 다 날렸잖아요. 전 국민을 고소하게 만들었어요. 왜 자기는 돈 안 떼어먹고 자기는 부산 저축 은행에 돈 저축 안했거든요 유명 연예인 이혼해 보세요. 전국의 이혼한 사람을 기쁘게 만듭니다. 전국에 있는 결혼한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왜, ‘나는 아직 이혼 안 했잖아’ 얼마나 거룩합니까? ‘고현정이 이혼해도 우리는 고현정처럼 못살아도 우리는 이혼 안했잖아’ 얼마나 대단해요
자기가 지키는 법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의로운 자가 되고 이 의로움은 이 악한 세상에서 남은 지옥 가도 의로운 자기는 천국 갈 수 있다는 율법적인 의식, 그 율법적인 의식이 예수님께 얻어맞았습니다. 그게 뭔가 정사와 권세의 실체라는 겁니다. 누가 그런 마음을 심어 줬습니까? 보이지 않는 힘, 보이지 않는 세상의 권력을 지고 있는 어떤 괴물이 그 마음에 준 거예요 그 괴물이 누구에요? 마귀잖아요 사탄이에요.
사탄은 법을 주고 우리에게 지킬 수 있는 법을 조명하는 게 사탄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승리했다는 것은 결국은 누구보고 승리했다는 거예요 예수님 죽을 때 전쟁 붙은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공중 권세 잡은 자잖아요. 예수님이 누구하고 싸웠습니까? 사람하고 싸웠습니까? 마귀하고 싸웠잖아요. 요한계시록에서 마귀하고 싸우잖아요.
마귀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율법을 이기고 죄를 이긴다는 네 가지 이김이 나오는데 그 세상 권세 잡은 자 마귀와 싸우고 있다 이 말이죠.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와 씨름을 하되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고 공중 권세 잡은 영적인 세력과의 싸움이다. 어떻게 이기느냐 복음으로 무장해라 복음으로 무장하라는 것은 복음 속으로 들어가라는 이 말이죠.
네가 싸울 문제가 아니고 복음이, 주님이 맞서 싸울 문제라 이 말 아닙니까? 마귀가 우리에게 제공한 것이 자신의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네가 지킬 수 있는 법들을 가지고 지키지 못한 것을 버리고 지킬 만한 것들은 가져서 그 지킬 만한 것들을 끌어 모아서 그것이 전부가 우리 자신을 의롭게 존재할 만한 복을 받을 만한 그런 가치 있는 존재라고 확신을 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육체에 심어져 있다는 말이죠. 그 껍데기를 홀라당 벗겨 내는 거예요 그것을 아까 두자로 뭐라 했습니까? 할례라 한다. 육의 옷을 벗는 거예요 벗을 때마다 겨울에 세타를 벗을 때 찌지직 전전기 일어나듯이 우리는 주께서 옷을 강제로 벗겨 버리면 무엇도 같이 벗겨집니까?
그동안 이런 것 저런 것 지켰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의롭다 여기는 의도 같이 찢어지면서 다 으드득 하고 벗겨지겠죠.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자기 의가 벗겨져 날아갔으니까 우리는 졸지에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겁니다.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예수님께서 행하심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고 예수님께서 먼저 행하신 것 이 율법 아래 있는 세상에 들어 와서 율법의 죄를 지으시고 아버지께서 거기서부터 부활시킨 그 세력이 우리 안에 작용하면 이것은 율법에 해당되는 몸 말고 새 언약의 양성, 예수님의 사랑과 관련된 예수님의 용서와 관련된 십자가의 능력과 관련된 새로운 몸으로 기초되기 위해서 이쪽 몸이 예수님의 몸의 작용으로 뜯겨 나가는데 그 뜯겨 나가는 몸의 거기에는 그동안 우리 자랑, 나 의롭다, 나는 의인 중에 의인이다.
나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야 나는 율법의 흠이 없다는 그런 것들이 같이 벗겨져 뜯겨져 나라 간 거예요 그러면 그 위에 우리 몸을 그동안 나를 거룩하게 고상하게 괜찮은 순간으로 봤던 그 모든 것이던 간에 뭐가 지키는가 하면 바로 16절을 지키는 거예요 먹고 마시고 절기나 월삭과 안식일과 각종 율법과 십계명, 십일조 그런 것들이 다 이미 담겨 있는 거예요
율법은 우리의 육적인 몸을 표방하는데 육적 몸이 뜯겨져 버리면 이제는 더 이상 율법과 이렇게 이유를 댈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매직 가지고 칠판에 쓰는데 교회 이사 가면서 칠판을 뜯어 가 버리면 나는 그러면 어디에다 씁니까? 쓸데가 없다니까요 율법을 우리 몸에 새기는데 몸이 뜯겨져 나가면 율법 새길 때가 없잖아요 율법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율법을 쏠 때가 없습니다.
그동안 율법을 가지고 자랑해 왔던 나 새벽기도 나오고 십일조하고 주일성수하고 설치던 이것이 예수님의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내가 율법과 이렇게 연결된 몸 가지고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예수님의 몸, 새로운 몸, 율법과 상관없는 몸으로 구원받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이런 것들이 이제는 우리한테는 소용없는 거죠
그런데 이제 와서 부활절 크리스마스 맥추절에다 거기에다 여러 가지 법을 강요한다는 것은 결국은 뜯겨져 가는 율법의 몸을 목사가 앞장서서 그것을 증지 하면서 ‘가만있어 가만있으란 말이야 십일조 해야 돼’ 라고 거기에 옴팡 새벽기도 나와야 되고 교회에 돈 바쳐야 되고 목사에게 순종해야 되고 ……. 온갖 것을 다 뒤집어썼다는 말은 결국은 자기도 구원받지 못하고 자기도 천국 가지 못하면서 남도 천국 가는 것을 방해하는 악마의 종입니다. 마귀의 종입니다.
아까 전제가 성령세례 안 받은 사람 같으면 누구를 좋아하겠습니까? 성령세례 안 받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누구를 좋아하겠어요? ‘아 목사님 완벽하게 천국 갈 수 있도록 내가 얼추 이정도 착한 사람이라는 거 알지만 이제 교회 왔으니까 이제 술, 담배 끊을까요?’ 좀 더 완벽한 몸, 이 육체의 몸을 가지고 죽어서 좋은 나라 갈 수 있도록 팍팍 우리에게 명령과 지시를 쏴 주세요! 날려 주세요! 그게 지켜 주는 즐거움이에요 아주 멋진 즐거움입니다.
큰 교회 가 보세요. 이제 집안에 우한이 있어서 새벽기도에 나가보면 거기 보면 나이 많은 토주 대감들, 연세 많은 할머니들 많습니다. 저쪽 최권사님은 16년째 개근, 이쪽에 박권사님은 25년째 개근 한나들, 과부가 된지 95년 된 사람들 와 있습니다. 그 사람들 앞에서 새벽기도를 논하지 마세요. 특히 그들이 눈이 온다. 비가 온다면 더욱더 열심입니다. 왜? 이쪽 일에는 의지의 한국인이 되는 거죠.
교회 어려울 때 그들이 기도 해서 교회를 살렸고 교회가 부채에 시달릴 때 교회가 여러 가지 어려울 때 자기들이 더욱더 새벽기도에 나옴으로 교회가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이에요. 그것이 마치 북한 군 김정일의 장군의 훈장을 붙이고 있는 것처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훈장이 붙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권세와 정사, 배후의 악마의 힘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에요. 악마의 힘으로 마귀의 주이는 힘으로 신앙생활 하는 거예요
그 모든 원인은 무엇을 안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성령을 받아 본적이 없기 때문에 항상 강점은 나의 과거는, 나의 기여로서는, 이런 식으로 이만큼 나의 의가 누적 되어 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거 하고 있어요. 뭐가 중요하냐 하면 이 절기와 월삭이라는 것이 법과 관련되는데 절기와 월삭 법이 어디의 형상에 쓰여 있는 법이죠? 이게 시간 선상에 쓰여 있는 보통 일반 교회에서 4월말쯤에 부활절전 주간에 무슨 주간 지킵니까? 고난 주간 지키죠. 고난주간이 부활절 이후에는 고난주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럼 고난주간이라는 법은 어디 선상에 있는 겁니까? 시간 선상에 있는 법이죠. 그 시간만 지나 버리면 고난주간이라는 안 지켜도 되잖아요. 시간이 우선이고 시간 따라서 고난주간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시간 따라 산다면 고난주간도 자기가 지켰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보세요. 십자가 진 것이 사도바울은 십자가라고 이야기했는데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때가 예수님 십자가 질 때입니까? 이 이야기할 때가 예수님 십자가 질 때 골고다 언덕이었어요? 아니잖아요. 사도바울 자기 집일 수도 있고 화장실일 수도 있다 이 말이죠.
십자가 사건은 언제 있었어요? 그것보다 15년 전에, 25년 전에 그전에 십자가 사건이 있었죠. 십자가 사건이 어떤 역사의 한 시점, AD 35년이다, 어떤 한 시점의 십자가로 알고 있는데 이 십자가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고 난 뒤에 성령 안에서 이 십자가가 어떤 한 시점에 머물 수 있는 십자가이다? 아니다? 아니죠.
여기 뭐가 적용됩니까? 고난 주간에도 십자가, 부활주일에도 십자가 어디에도 십자가 적용이 안 되는 데가 없습니다. 맥추절에도 십자가……. 그러면 그냥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로 승리 하셨느니라. 그러면 십자가가 승리하려면 뭔가 패배할 것이 있어야 돼요 뭐가 패배 됩니까? 뭔가 하면 법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법 지켜야 너는 착한 사람 된다는 정사와 권세, 악마의 법적인 호소력 지시 명령을 누가 승리했다? 중간에 십자가가 승리했죠.
그러면 고난주간에 이 십자가를 섬긴다면 고난주간을 지킨다는 것이 결국 누구의 지시이다? 악마의 사탄의 일꾼들의 지시라는 말이 제 논리입니다. 사도 바울의 논리가 그거에요 십자가로 승리라고 이야기 해 놓고 그 다음에 시간적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과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비난하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너희가 성령세례 받은 사람입니까? 안 받은 사람입니까? 성령세례 받은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이런 것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을 용납하지 말라 허용하지 마라 나는 너에게 비난받을 존재가 아니다. 어디 감히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아야 된다면 내가 율법 못 지키고 절기 못 지켰다고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성령세례 받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율법으로 지킬 수 없는 그 의를 또는 율법 지켜서 갈 수 없는 그 천국을 그 하늘나라를 뭐로 봤다? 주께서 찾아오심으로서 자기 자신이 하늘나라의 일원으로서 포함이 된 거잖아요
율법 없이 되어 짐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마귀의 지시, 악마의 지시에 따라 왜 율법을 지켜야 됩니까? 율법 지키면 또 뭐가 동원되어야 됩니까? 옛날에 허리에 벗었던 그 율법 지키기 위해서 율법을 듣는 그 몸뚱이, 율법의 저촉을 받는 으깨진 그 몸을 또 다시 그것을 중요시해야 되고 그것을 도입해야 되겠죠. 그게 바로 개혁 주의 신앙 아닙니까?
옛날에는 성령 못 만나서 못 지키는 율법을 이제는 깨끗한 몸을 입었기 때문에 깨끗한 몸에 율법을 채워 버린 겁니다. 개혁 주의 생활이 그래요 거짓말 하는 게 아닙니다. 옛날에 성령 받았다 하면 이제 온전히 율법 지켜보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꼭 묻고 싶은 게 ‘그럼 율법을 지킨 증거 내 놔 바라 당신이 율법 지킨 증거 내 놔 바라’ 하고 싶습니다. 증거를 내 놓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내놓죠. 왜? 워낙 그 동네는 도사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달인들이 많거든요
어떤 사람이 '나는 율법 지키고 난 뒤에 피아노를 잘 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처음에 성령 받아 쳤습니까?' '예 성령 받아쳤습니다.' 그럼 성령 받아 치는 거 한번 쳐보세요. 이거 성령 안 받아도 다 쳐요 나는 율법 지키고 난 뒤에 목이 트여서 찬송가 부릅니다. 조수미는 성령 안 받아도 더 잘 합니다. 성령 받고 난 뒤에 높은 산도 그렇게 올라갑니다. 우리나라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천 미터 16좌 완등 한 엄홍길씨, 그 사람은 성령 받아 등산했습니까?
법적으로 따지게 되면 그 법에 대해서 완벽을 구현하는 도사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기도 했더니 낚시 잘 되더라 그러면 낚시꾼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몇 명 있어요? 낚시 좋아하는데 교회 안가고 낚시터 가는데 마냥 성령 받아 걷어 올립니까? 기도 하니까 공부 잘된다. 공부 잘되어 서울대 간사람 몇 명 있습니까? 왜 자꾸 몸의 흙을 벗겠다는데 왜 안 벗기고 그대로 남아서 쓸데없는 그 저주를 유발시키느냐 말입니다.
율법 아래서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결국 저주의 바늘이 꽂입니다. 온 몸에 저주의 바늘을 한 번 꽂아 볼까요? 노태우뿐만 아니라 다 꽂입니다. 왜 사서 저주를 받아요?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말로는 성령 받았다는데 실제로는 성령 받은 적이 없어요. 실제로 성령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법을 그리워해요 ‘내가 그래도 신자인데 적어도 신자는 이 정도는 해야지’ 자꾸 법을 그리워하는 거예요 법을 그리워하면 우리를 의롭게 한 그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거가 되는 거예요
그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것이 권세가 가지고 있는 악마가 마지막 노림수가 뭔가 하면 예수의 피는 네 인생 한 방울도 소용없다 그 수단을 악마가 하는 거예요 예수의 피가 너의 돈을 하늘에서 내려 주느냐 말이죠. 어디 신랑감이 하늘에서 막 떨어지는가?
이것이 초대교회 때 성령 받은 성도들이 이 편지를 보고 감격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바로 이런 일들을 내 허락도 없이 내 안에서 주께서 이런 일들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이제 자기 속에 주께서 이런 일을 하시는데 우리가 제발 험한 꼴이 안 되었으면 좋겠어요.
주께서 절기와 월삭을 없앴는데 자기가 답답해서 자기가 주님이여 다 가져가면 내가 심심해서 안 됩니다. 이것은 남겨 줘야 됩니다. 이것 남겨 줘야 내가 또 의로운 인간이 됩니다. 하고 붙들지 마세요. 붙든다고 주께서 일을 안 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런 것들도 우리가 풍성하게 오병이어처럼 늘 쏟아져 나오는 자기 의에 미련, 나 잘남에 대한 애착,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평생토록 살면서 뿜어져 나옵니다. 자기 의로움을 쥐고서 이 의로움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의시되고 싶은 쓰레기 같은 것들이 계속 배출되는 겁니다.
꼭 살아 있는 공장 같아요. 기계에요 우리가 살아 있는 공장 같아요. 한시도 자기 자랑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는 그래도 내가 뭐 했잖아 하는 자신의 과거 이력이 없으면 더 이상 남한테 기죽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주님은 온 우주를 상대로 악마를 이겼는데 주님은 승리했는데 우리는 못 마땅한 사람처럼 삐친 사람처럼 입이 한 다발 나와 있어요. 왜 그렇게들 살고 있습니까?
금요일 저녁에 오게 되면 저는 바짝 마음을 다지게 됩니다. 어떤 학자라는 사람은 성도라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것과 구원받은 상대로 긴장 상태라고 하는데 성도는 긴장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몰라서 그렇게 성령을 못 받아서 그렇고 긴장 상태에 있으면 위아래가 없어요. 긴장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치열하죠. 양보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절대로 주께서 다 이루신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 이 교회가 법으로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피로 세운 교회에요 그 안에 법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돼요 법을 피로 주신 이 교회다움을 양보하지 않고 치열하게 버티고 증거 하는 겁니다.
사람의 이미 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낼 때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인간 자체의 의미를 따로 드러내려는 것은 마귀의 역사이고 내가 어떻다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분이 어떻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성령세례 받은 사람의 특징이 되는 겁니다.
나는 못난 거 아는데 그래도 내 안에 계신 분은 이런 분이라고 증거하고 그분이 십자가로서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로서 그동안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던 이 더러운 세상,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수치스런 세상에서 우리는 빠져나왔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할 때 그 다음에 우리에게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가 버림받고 미움 받는 절차만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세례 받은 사람의 효과이니까 너무 슬퍼하거나 억울해 하거나 서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아무나 주어지는 복이 아니에요. 에티오피아 고관 대장이 무엇이 아쉬워서 그 하찮은 사람에게 물로 세례를 받습니까? 내가 고급 관료지만 그게 구원받는데 무슨 도움이 됩니까? 오히려 고급 관료다 하는 훈장 붙어 있는 이 육적 몸이 내 구원을 훼방하고 십자가를 가리는 역할을 합니다.
가려진 십자가를 가리지 않도록 가려진 것을 떼어내고 벗겨 내는 작업을 계속 하는 거예요 중국에 어떤 요릿집에 가니까 이런 작문이 있어요. 요리사가 국수를 뜨거운 솥에다 넣는데 칼을 하나 들고 밀가루 반죽을 옆구리 팔에 끼고 뜨거운 물에다 팍팍 벗겨 버리면 벗기는 각도가 얼마나 얇은지 얇은 국수가 지렁이처럼 뚝뚝 날아가 빠지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를 들고 십자가 나 올 때 까지 계속해서 벗겨 내는 겁니다. 십자가가 나올 때 까지 벗겨 내고 벗겨 냅니다. 국수가 날아가는 것이 우리의 육적인 내 자랑하고 싶은 것이 뜨거운 물속에 계속 빠지면서 십자가만 계속 드러내는 거예요
아침 되면 또 수북이 싸이고 싸이면 또 벗겨 내고 벗겨 내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 우리 아담의 몸은 다른 사람을 흉내 내고 모방해서 그것도 괜찮은 거 모방해서 그것으로 자기를 포장하고 자기의 수치를 자기의 기죽음, 자기 인생 실패를 그런 식으로 보상하려고 거들 덕 됩니다.
그러면 주께서 또 들고 그동안 우리가 애써서 한 것을 다 깎아 내는 거예요 어디서 십자가를 가려 버려 하면서 너 때문에 내 피가 모자라 내 피가 보일 때 까지 벗겨 내고 벗겨 내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골로새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내 된 자여 남편을 존중하라, 순종하라 남편 된 자여 아내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쳐라 이 이야기가 왜 나왔느냐 하면 이것은 그런 생활 달라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내가 성령세례 받았으면 둘 다 그 안에 뭐가 중심이냐, 내가 중심이 아니고 당신은 당신 중심이 아니고 내가 내 중심이 아니고 누가 중심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중심이 되어서 십자가를 들어내기 위한 우리 속의 계시를 들어내기 위해서만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 성령 세례 받지 않았냐 이 말입니다.
18절 봅시다.
골 2: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일부로 겸손한 것 이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지킨 것처럼 그렇게 오해들을 하고 있어요. 겸손하고 온유하고 고상하고 양심적으로 살고 하는 것이 전부다 껍데기를 벗겨 내야 될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예수에 대해서 공격할 때 자기는 율법을 지켰다고 본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인정했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들 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너희들 인간들끼리는 네가 최고야 그런데 그 최고가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그 밑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구원한 게 아니고 바리새인이 구원한 거예요 나 어떻게 하면 바리새인처럼 살아볼까 그게 구원이 됩니다.
그런 상황을 주께서 인정했다니까요 그래 바리새인 네가 최고다 하지만 너희가 천국 못 간다면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 따라서 예수님이 그들이 지켜 내지 못한 율법을 제안합니다. 아무리 애써도 못 지키는 것 오른뺨 때리거든 왼뺨 내 놔라 하는 것 못 지킵니다.
무엇을 입을까를 위해서 기도 하지 마라 이런 것 못 지켜요 아 기도를 그런 재미로 하지 ㅎㅎ 사랑한다는 것은 그때부터 자기를 위한 기도가 멈추고 사랑하는 자을 위해서 기도 하는 것이 사랑이다.
만약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기 전에는 나를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겠지만, 그런 기도를 했겠지만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제는 내 기도를 멈추고 주께서 하실 일을 나를 통해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 합니다. 그게 사랑하는 사이 아닙니까?
처음에 부부가 사랑할 때 상대방이 너무 좋아서 처음에 사랑했던 시절은 나는 어찌 되든 좋으니까 상대방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로 인하여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자에 대한 내용의 기도가 많이 포함이 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하신 일이 기도에 많이 포함이 돼야 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게 주기도문에 나오지 않습니까? 주기도문이야 우리가 수천 번 외웠지 않습니까? 외운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기도문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영광이 영화롭게 하옵시고 이름을 영화롭게 해 주시고 그저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게 해 주시고 주께서 용서하는 게 뜻이라면 저를 통해서 주님의 용서가 나타나게 하옵시고……. 사랑한다면 이런 식으로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면 사랑이 나오는 게 아니고 원망이 나오죠. 만날 하나님을 거론하면서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오늘 18절 말씀에서 누구든지 일부로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이라 했는데 결국은 이것은 누가 어떤 식으로 구원했다는 말입니까? 내가 나를 관리함으로 관리한 내가 구원한 식이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관리를 잘해서 그 잘한 덕분에 내가 영광을 받고 그것이 하늘까지를 통할 수 있는 그런 종교 그런 신앙심 그것이 성령세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제일 극한으로 모범적으로 나올 수 있는 모범 답안처럼 나올 수 있는 게 이게 전부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모든 것들이 다 그런 거예요 ‘그 본 것을 의지 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지라’ 뭔가 하나 신비로운 것을 붙잡아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어서 나는 이런 신비로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라는 그것을 근거로 해서 천국 문을 열어젖혀서 통과시키려고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이 다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한번 해 보는 겁니다.
그냥 보통 산 같으면 개미가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산이 역으로 꺾여 있다면 개미가 아무리 올라가도 뚝 떨어지죠. 못 올라갑니다. 그냥 해 보는 거예요 가만있으니까 답답하고 그냥 시도 해 보는 거예요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뚫고 주님께서 찾아와서 들어오신 거예요 죄 많은 우리 몸까지 들어오신 이유가 예수님 본인이 바로 죄 많은 우리 몸을 대신했기 때문에 우리 몸속에 들어 올 수 있는 겁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면서 오지 못할 때 수건 걸치고 들어 왔을 때 그 수건 역할이 성령이 하는 것처럼 말이죠. 네가 성령 안에서 네가 자유롭다 성령 안에서 자유롭다 자유롭다는 말은 주님과 통한다 이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을 요구한 것이 아니고 사랑의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를 불쌍히 여길 테니까 너는 내가 준 사랑을 네가 받으면 그것으로 드디어 계약 끝, 계약 성취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다 법을 섞어 넣지를 마세요. 사랑에다 법, 자기의 행위를 섞어 넣으면 안 돼요 그러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환란이나 핍박 곤고가 온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너를 끊어 낼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 사랑이 뭔가 하면 너를 살리기 위해서 너의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로서 행동을 취해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내 주신 그 자체가 그 자체 안에서 이미 사랑은 완성된 거예요
우리가 세상에서 재롱을 떤다고 더 예뻐지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안에 있으면 그것으로 더 이상 묻거나 따지지 않고 그것 자체로 가장 기뻐하는 겁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자는 누구나 그 사람이, 강도든 관계없이 누구나 천국에 입성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사람들의 집합이에요. 그것을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죠. 그 피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주께서 먼저 율법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율법을 이야기해서 너희들에게 너희 자력으로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신세임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길은 십자가의 길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시는 것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게 되면 십자가 피가 우리가 속에 꽂히게 됩니다.
우리의 주도권은 십자가가 쥐고 있게 되고 우리는 거기서 십자가 때문에 졸지에 율법이나 챙기는 그런 죄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다행스런 것은 율법과 관련된 몸은 주님의 몸에 의해서 날마다 주의시키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과 관련된 몸은 우리의 몸이 아닌 거예요 그냥 허물일 뿐입니다.
증거하는 시간에 십자가는 시간을 초월한 묵시로 모든 우리가 평생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에 대해서 십자가가 빠짐없이 전부 공중 폭격해요 꼭 리비아 나토군 폭격하는 것 같아요. 카다피 궁전이던 상당수가 위에서 폭격할 수 있는 그런 능력으로서 십자가가 작용하는 겁니다.
이 소리를 듣고 초대교회에 성령 받은 사람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들도 똑같이 하루세끼 먹고 잠자고 일반보통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에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구분된 다는 것은 어떤 얼굴색이 달라서가 아니라 세상을 볼 때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 아니면 기존의 자기 입장에서 보느냐는 그 차이로 완전히 갈라지는 겁니다.
여기 18절에 나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을 꾸미려는 거예요 그만큼 십자가 피를 무용지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악마의 역사지요 사탄의 유혹입니다. 신기한 것 보여줄게 그거 갖고 있어라 필요 없어요. 십자가 피가 있으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뭐가 다른 것을 가집니까? 가져 봐야 추억되고 기억이 되는데 나의 훈장이 될 수밖에 없는데…….
목사가 구원받는 것이 평생토록 복음 전하기 위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목사가 구원받는 것은 십자가 피로 구원받아요. 주께서 그렇게 사용하시는 거예요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필요하면 주께서 돈을 주실 거예요 십자가 피를 증거 하는데 적절하게 쓰실 겁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속에 들어 있는 계시를 밖으로 들어내기 위한 용도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더 오래 살아서 복음 전하지 않고 그 죽는 순간이 있음으로서 이 세상을 떠난 것은 그것이 가장 하나님 보시기에 제대로 다 쓰였기 때문에 그래요 활용도가 돌에 맞아 죽음으로 스데반 집사의 운명을 완전히 쓰신 거예요 왜냐 주님 자신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럴 때 스데반 집사가 성령 충만 받았습니다.
정말 우리가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이 맞는다면 우리도 같은 입장입니다. 현재 우리의 형편이 주님 보시기에 십자가가 벗기는 데 가장 최적의 환경이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 증거 하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승리했다는데 혹시 주님 혼자 승리하고 우리는 승리하지 않은 태도로 산 것이 아닌지 예수님 홀로 신나고 우리는 전혀 신남이 없이 오직 입에서 원망만 나온 것은 아닌지 예수님이 남이 아니고 바로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안다면 내 인생 따로 챙기지 말고 주님의 인생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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