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가 만난 문인들 24
정을병 소설가
김 송 배
추한 세상, 혹자는 자신의 흠은 보지 못한 채 / 타인의 불행과 고통에 적지않은 기회로 여기는 猜忌에 / 人事가 萬事, 직원을 잘못 두어 일어난 訟事에 / 스승님, 생의 종점에서 桎梏과 囹圄의 참혹한 시간들을 / 더는 가슴에 담아두지 마시고, 훌훌 털어버리시고 /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영면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 생시 스승님에 대한 復權을 외쳤으나 / 오히려 공허한 메아리로 남긴, / 이 무지막지한 제자를 꾸짖어 주십시오 / 누가 뭐래도 저는 스승님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 누가 뭐래도 저는 스승님을 언제나 우러러 볼 겁니다.
지난 2009년 4월 7일, 대학로 함춘회관(서울대 의과대학 동창회관)에서 정을병 소설가의 49제 추모의 밤이 엄숙하게 열리고 있었다. 그와 절친했던 동료 친지문인들이 모여서 그를 회상하고 추모하면서 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밤이었다. 위의 글은 이만재 작가가 낭독한 추모시 ‘까토의 자유’ 중의 일부이다.
내가 정을병(鄭乙炳) 소설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66년인가 육군에서 제대를 한 후 그의 작품 「개새끼들」을 읽고 약간 통쾌하다는 생각과 함께 당시 시절이 시절이라 한편으로는 정치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위험이 있겠다싶어서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난다.
이 작품은 잘 아는 바와 같이 1961년 5, 16 군사혁명 직후 강원도 어느 곳에서 건설단에 입대한 주인공 멍게가 기간요원들이 말로만 애국을 외치면서도 힘없는 단원들을 등쳐먹자, 이에 항거하여 그들의 폭력과 위선을 사실적으로 고발한 작품으로 당시 많은 관심의 대상인 작품이었다.
나는 이 분인 어떤 분인가하는 마음이었지만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그의 작품 「아데나이의 비명」「까토의 자유」등에 심취하는 문학 지망생일 뿐이었다. 그후 그가 한국소설가협회 회장에 재임하면서 해외소설 심포지엄(2003. 4. 23. 하와이 와이키키 리조트 호텔)이 하와이에서 개최되어 나도 동참하게 되었다.
우리는 심포지엄이 끝난 후 하와이 곳곳을 관광하게 되었는데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서 담배 한 대를 달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담배를 끊어셨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가끔 피운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담배를 나누어 피우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내가 예총에 근무할 때니까 주로 화제가 예총문제와 문협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후에는 내가 문협 사무처장을 할 때는 문협 고문으로서, 또 문협 심사위원으로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는 1934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하여 한국신학대학을 수학하고 국도신문사 기자로 13년간 언론계에 종사하기도 했다. 1959년에 『자유공론』제1회 신인문학상에 당선하고 1961년에는『현대문학』에서 소설 초회 추천을 받고 1963년에 완료추천(「부도(不渡)」「반(反) 모랄」등)을 받았다.
그는 현대문학상과 한국일보 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 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을 수상하게 되는데 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과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회장, 크리스찬문학가협회 부회장, 한국기업문화협의회 부회장, 한국소설가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생애에서 씻지못할 두 가지의 사건을 우리는 기억하게 된다. 그는 악명 높은 군부 독재시절 문인간첩단 사건과 소설가협회 공금 횡령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모두 무죄로 결판이 났지만 옥고는 그의 일생에서 치욕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또다른 인생의 철학을 생성하면서 문학의 주제를 창출했는지 모른다.
1974년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이호철·김우종·정을병·장백일·임헌영 등 문인 5명을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은 1970년부터 일본에서 펴내던 『한양』지에 남한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한 혐의로 구속되어 1심공판에서 이호철과 임헌영에게 실형이 선고되었고, 항소심 공판에서 이들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되고 정을병은 무죄가 확정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은 1974년초 긴급조치 1호와 2호에 반대해 일어난 유신헌법 개헌청원 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문인들에 대한 탄압으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었다.
2006년에는 한국소설가협회의 공금을 횡령했다고 해서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된 일이다. 회장이 결론적으로 사무국장과 직원의 횡령을 챙기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횡령으로 몰린 것이다. 정상익(鄭相益-소설가) 변호사가 추모의 밤에 나와서 특별 증언한 내용을 보면 협회와 우리 소설의 발전을 위해서 불철주야 뛰었는데 그 이익은 곰이 챙기는 모순에 걸려들었으나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해서 구속될 무렵에 세계적인 컴퓨터 해킹방지 기술자였던 외아들이 사암하고 석방된 후에 사모님이 췌장암으로 별세하는 불운의 연속이 일어났다.
한편 그도 이때 받은 스트레스가 쌓여서 지병인 간암으로 2009년 2월 18일에 74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마감하고 말았다.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는 서늘했다. 평소에 그렇게 많이 따르던 문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범우사 윤형두 회장과 김진희 한맥사장, 백시종 소설가 등 평소에 친하던 지인들 몇몇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다. 좋을 때도 슬플 때도 그 원천적인 외로움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의 靈的인 고향에 친한 사람들을 모두 두고 혼자 지구에 온 게 분명했다. 70나이가 되도록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여러 가지 시련을 겪었어도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몰라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죽어서는 어디로 가는지. 나는 진리를 찾았다. 진리는 화려한 곳, 부유한 곳, 아름다운 곳, 깨끗한 곳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었다. 위에서보다는 아래에서, 앞에서보다는 뒤에서,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에서, 편리한 곳보다는 불편한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바닷물속의 고기가 바닷물에 싸여 그물의 존재를 모르듯 나는 은총속에 있으면서 그걸 모랄T다. 나는 이제 神과 한 덩어리가 된다. 한 방울의 물이 합치듯이. 내 인생속에 들어온 모든 경험은 모두 내게 책임이 있었다. 나는 그 책임을 이글을 쓰면서 용서받고 싶다. 그리고 감사한다. 사랑한다. 2008년 10월.
그는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정리한 원고의 서문에 그의 삶에 대한 독백을 적어 놓았다고 한다. 지난 2003년에 정부로부터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그해에 『정을병문학전집』이 국학자료원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저서는 장편소설「개새끼들」을 필두로 해서 42권의 장편과 150 여편의 중, 단편(17권 발행), 그리고 40여편의 꽁트(2권), 6권의 수필집 등 모두 72권의 저서가 있고 49제날 출판기념을 한 유고 장편소설『수행』(범우사 간)이 있다.
‘어이 김 선생. 담배 한 대만.....’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인자한 그의 모습은 이제 영원히 대할 수가 없다. 그는 하늘나라에서도 요가와 단전 그리고 명상의 세계를 실천하고 있으시겠지.
*2010. 5월호 [문학공간]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