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panasati sutta(出入息念經)
(The Four Bases for Spiritual Power) 네 가지 정신적 힘의 기초(네 가지 성취수단, 四如意足)
“다시, 우다윈이여,
나는 제자들에게 ‘네 가지 정신적 힘에 대한 기초’를 계발하는 방법을 분명하게 말해왔다.
여기 한 비구는 단호한 노력과 함께 평온한 마음을 성취하게 하는 ‘기쁨’(chanda)의
정신적 힘의 기초를 계발한다.”
첫 번째 정신적 힘은 ‘기쁨’(joy)을 말한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는 단호한 노력과 함께 집중을 성취하게 하는 ‘정진’(viriya)의 정신적 힘의 기초를 계발한다.”
(여기서의 집중은 평온을 의미한다.)
이것은 두 번째 정신적 힘이다.
붓다의 길을 걷는다면 게을러지거나 느슨해질 수 없다.
특히 붓다의 길이 일생에 걸친 수행임을 깨달을 때 그 길에 머무르기 위해 많은 힘이 필요하다!
이것은 마음이 긴장되고 굳어 있을 때 그 상태를 알아차리고 있는 힘을 말한다.
호흡으로 되돌아오기 전에 생각을 놓아버리고 머리와 마음에서의 생긴 긴장을 이완하는 힘을 말한다.
“그는 단호한 노력과 함께 집중을 성취하게 하는
‘마음의 정화’(purity of mind)의 정신적 힘의 기초를 계발한다.”
(여기서의 집중은 평온을 의미한다.)
세 번째 정신적 힘은 마음의 정화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명상의 대상에 가능한 오래 머무를 때 계발된다.
수행의 장애가 일어나 명상하기 힘들 때마다,
있는 그대로 그 장애를 놔두어서 장애에 대해 사고하여 개입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수행의 장애로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이완하고 나서, 부드럽게 명상의 대상,
즉 호흡과 마음이 평온해지고 넓어짐으로 주의를 되돌리는 것이다.
마음이 미혹과 수행의 장애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이 아무리 여러 차례라도 괜찮다.
이완시키고 그리고 호흡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기만 하라.
이것이 모든 번뇌와 장애로부터 마음을 정화하는 방법이다.
기억해라.
명상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순간 속에서 마음과 알아차림을 확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자비로운 받아들임(loving acceptance)’으로 표현되는 상태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미지와 언어를 갖는 생각들이 완전히 소멸하게 될 때 명상은 고요함(silence)이다.
그러나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마음을 수축시켜 죄이고 배척하는 형태이며 끊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수행의 장애를 억눌러 저항하며 투쟁하는 형태이다.
명상하는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평정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배척, 억누름, 저항이 아니다.
집중된 마음으로는 붓다의 수행법에 따라 명상할 수 없다.
“그는 단호한 노력과 함께 집중을 성취하게 하는 ‘고찰’(investigation)의 정신적인 힘의 기초를 계발한다.
(여기서 집중은 평온한 마음을 의미한다.)”
경험되는 현상을 탐구하는 습관은 정신적 성장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수행의 장애나 고통, 다른 미혹들에 사로잡혀 있을 때 마음이
그 특별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명상할 때 졸음이 온다고 하자.
졸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수행자가 더 주의 깊게 기쁨에 찬 흥미를 가지고 그 명상의 대상에 머무르는 것이다.
마음이 졸음에 어떻게 슬며시 빠지게 되는지 직접 보도록 노력해라.
즉 더 많은 노력과 힘을 수행에 쏟아야만 한다.
수행자가 마음이 어떻게 수행의 장애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는지 안다면
그는 더 빨리 놓아버리고 오랫동안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가 졸음에 완전히 사로잡히면 이 수행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잠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는 마음이 장애를 극복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탁구경기’처럼 명상의 대상과 졸음사이를 왔다 갔다 할지 모른다.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더 밝고 기쁨에 찬 흥미를 가질수록
더 빨리 수행의 장애를 놓아버리고 다시 명상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이와 유사하게 고통이 일어날 때 고통으로 마음이 향하지 않다가 주의가 고통으로 이끌려지면
그때서야 마음이 어떻게 고통이란 감각에 저항하는지 볼 수 있다.
만약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고통은 더 커지고 강렬해 질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미혹들(고통, 수행의 장애, 무거운 감정 등)을 언어화하는 마음 속의 생각을 먼저 놓아버린다.
그리고 마음을 완화시키고 그 감각을 둘러싼 긴장된 정신적 매듭을 푼다.
그리고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완화시키고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그리고 나서 명상의 대상으로 주의를 되돌린다.
고통이 다시 마음을 끌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것을 행한다.
이것은 명상자가 주의를 고통의 한 가운데에 놓고
‘고통...고통..고통.’ 하며 고통을 인식하라는 어떤 명상 지침과 아주 다르다.
그 명상 지침에 따르는 동안 그들은 고통의 진정한 본성을 보고 고통이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고통은 본래 불쾌한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계속 지켜보기 위해서 긴장하고 굳어 있는 마음을 갖는 경향이 있다.
명상자는 이러한 마음의 경직을 결코 알 수 없고 그런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분명하게 볼 수 없다.
명상자는 결국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집중(고정된 주의)을 계발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을 억누르고 긴장함으로써 도달하는 것이다.
경험에 대한 ‘고찰’의 정신적인 힘의 기초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허용함으로써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싸우거나, 조절하거나 방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자애로운 받아들임(Loving-acceptance)과
인내(영어 사전에서는 ‘반목 없음’의 의미로 정의된다)는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집중, 긴장함, 억압함, 억누름으로 도달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