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세계", 2008년 12월호 양미숙론 - 삽질하는 사람들 “미쓰 홍당무”(이경미 감독, 2008, 18세)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영화의 스토리텔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캐릭터로 설정되느냐에 따라 캐스팅 되는 배우가 달라질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의 연기방향을 좌우하고, 결과적으로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캐릭터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재구성 혹은 재창조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영화는 영상언어를 통해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보도록 하거나, 혹은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유형이어야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비정상적인 유형의 캐릭터를 등장시켜 영화의 스토리텔링에 주목하게 하기도 한다. 캐릭터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현실을 반성하기도 하고, 이상적인 모습을 통해 꿈을 꾸기도 하며, 또한 우리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을 영화 속 캐릭터를 통해 만나보면서 우리는 인간을 이해하고 결과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캐릭터는 참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가끔 독특한 캐릭터를 만나게 되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저런 캐릭터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실제 인물을 배경으로 한 것일까? 아니면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여러 유형들을 인공적으로 조합한 것인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유형의 캐릭터를 만나게 될 경우에 우리는 주목하게 되고 그 결말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경미 감독의 장편영화로서는 처녀작에 해당되는 ‘미쓰 홍당무’는 한국 영화계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 시대의 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교육상 청소년들 모두가 관람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영화 속에 삽입된 외설장면으로 인해 18세 등급을 받은 것이 아쉽다. 여하튼 양미숙(공효진 분)은 누가 보더라도 다소 독특한 캐릭터다. 심지어 비정상적이기까지 하다. 끊임없이 삽질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삽질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준 서종철(이종철 분) 선생님을 10년 동안 짝사랑한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매사에 삽질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영화는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면서 하나의 예로서 양미숙의 삶 속에 얽혀 있는 여러 관계들을 실마리로 삼는다.
‘삽질한다’ 함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을 행하는 것을 일컫는다. 때로는 스트레스를 풀기위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결국 허무한 결과에 이르게 될 뿐이다. 첫 장면부터 나오는 양미숙의 삽질을 통해 그녀는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사람으로 소개된다. 마치 아무도 오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기다림 자체에 의미를 두고 사는 모습을 그린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양미숙을 대하는 사람들이나 영화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 사실 양미숙에게는 모든 행위가 의미심장하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서종철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근 4년 동안 서종철에 집착해온 것이나, 그의 딸 서종희(서우 분)와 협력하여 서종철과 이유리(황우슬혜 분)의 내연관계를 끊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자신이 서종철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이나, 서종희와 함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기한 것 등, 이 모든 것은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믿음 때문에 그녀가 선택한 삶의 모습이었고,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 안면홍조증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의지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학교에서 스스로 왕따를 자초하는 행위였다.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서 서종희와 함께 힘겹게 찾아간 피부과 의사에게 하는 사랑의 고백마저도 양미숙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삽질에 불과하다. 이처럼 양미숙에게는 모든 것이 진지한 의미를 갖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삽질로 여겨지게 된 것일까? 감독이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양미숙은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 것인가?
영화 속에서 그녀의 삽질 외에 그녀를 주목하게 만드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부터 시작된 안면홍조증이다. 이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못한다. 사실 그녀의 안면홍조증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피부과 전문의에게 치료를 위한 상담을 받는다. 사뭇 진지하게 보여야 할 상담 장면이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표현되고 있는 것은 문제의 핵심이 결코 치료에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줄 대상을 찾고 싶은 것이다. 둘째, 그녀의 독특한 사고와 행동에는 세상은 공평치 않다는 믿음이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늘 자기 비하적이며 부정적이다. 그녀가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유도 세상은 결코 1등을 할 수 없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원래 고등학교 러시아어 교사이지만 비인기 과목으로 전락되어 중학교 영어교사로 전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새벽시간에 영어학원엘 다닐 수 있었다. 동료교사들로부터나 학생들로부터 왕따 취급을 받아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셋째, 부정적인 가치관과 안면홍조증으로 인해 그녀의 생각과 태도는 상당히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매달려 있고(관계사고),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사실로 믿어버린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보이는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는 세상과 소통하는 일에 있어서 실패하는 사람의 전형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싶지만 자기 내적인 혹은 외적인 조건에 매여 결코 진정한 소통에 이르지 못하는, 아니 스스로 그것이 좌절됐다고 믿는 사람의 한 유형이다. 겉보기에는 외적인 조건으로 인해 소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인한 것이다. 즉, 양미숙은 진정한 소통을 원했지만 내외적인 조건에 사로잡혀 스스로 소통을 포기해버린 사람이다. 소통을 포기한 그녀의 행위가 아무리 의미 있는 것이라 해도 결국 하나의 삽질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고 관객들은 그녀의 일방적인 행위에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제대로 된 소통을 스스로 포기한 채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또 그런 사람들의 주변에서 어떠한 해프닝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미쓰 홍당무’를 통해서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빠져 양방향 소통을 거부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통을 거부할 경우에 결국 우리의 모든 행위는 삽질에 불과하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듣게 된다.
최근 들어 미디어 업계와 기업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고 또 경영원리로 채택되고 있는 웹2.0은 개방, 참여, 공유를 기본철학으로 삼고 있는 새로운 웹 서비스로서 무엇보다 양방향 소통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웹2.0이 추구하는 양방향 소통은 경쟁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전략의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가 주목해야 할 점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필자는 한국교회의 위기에 대해 제시되는 여러 원인들 가운데 무엇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소통의 부재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소통 방식으로는 종교 간 선의의 경쟁이 이뤄지는 다원주의 시대에서 결코 살아남기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대내외적으로 양방향 소통의 모범을 직접 보여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있어서 일방향적인 소통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교회의 소통의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정신이 빠진 것으로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고 결국 하나의 삽질에 불과할 뿐임을 명심할 일이다. |
출처: 기초신학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최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