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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주 테마여행 / 12차 /경남 통영시 벽방산 산행후기
1. 일 시 : 2011. 01. 09(일) / 7시 출발 - 8시30분 도착 / 13시간30분
2. 장 소 : 벽방산(통영시) / 통영 세병관/ 향토박물관 / 중앙시장
3. 참여인원 : 43명
4. 이동코스 : 상주-중부내륙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대진고속도로-동고성 ic - 벽방산 장안사주차장- 산행후 - 통영시내 관광후 - 대진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진주ic - 국도- 동고령ic- 88고속도로-경부내륙고속도로- 상주무양청사
5. 테마여행 일정
◇등산소요시간 : 안정사 - 가섭암 - 의상암 - 벽방산 정상 - 안정치 - 안정사/ 6.3km / 3시간20분
◇문화탐방 : 안정사 / 세병관 / 향토역사관 /중앙시장
◇별미탐방 : 박여사 해물탕 /055-641-5532 /
통영은 굴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하지만 저희 테마팀은 굴보다 싱싱한 해물로 더 유명한 통영의 해물탕을 별미로 정하고 맛집을 수소문한 결과 박여사 해물탕집이 그런대로 유명하다고 하여 미리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근데 사장님 왈 5시부터는 일반손님을 받아야 하므로 4시까지는 와서 저녁을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여 이집이 통영에서는 알아주는 해물탕집이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식당은 통영의 신도시 아파트 주변에 있고, 건물과 내부는 상당히 청결하고 잘지어진 식당이였습니다. 내륙에서 먹는 해물탕과는 차이점은 콩나물을 사용하지 않고 밥을 뽂아주지 않는게 특징이였고, 역시 해물이 싱싱함을 알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해물탕을 싹싹 비우고 한잔술의 하산주로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6. 테마여행 후기
2011년 첫 테마여행을 한국의 나폴리라는 통영시를 탐방하기로 결정하고 명산과 문화탐방과 별미코스를 통영시 문화관광과에 도움을 받아 추진을 하였습니다.
전국이 구제역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는데 여행을 추진할려고 하니 좀 마음이 편치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일정이 있어 취소도 못하고 하루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이번달에는 43명이 여행에 참여하여 만차의 기쁨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상주와 남쪽지역과는 날씨가 3-4도 이상은 차이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산행을 시작하니 금새 땀이 몽글몽글 옷을 적셨습니다. 벽방산은 조망이 좋아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산행을 하였습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해의 아름다운 섬들을 감상할수 눈에게 모처럼 호강을 시켜주었습니다
정상에서 테마여행팀이 무탈하게 한해를 보낼수 있도록 벽방산 산신님께 막걸리 한잔 올리고 모두 둘러 앉아 막걸리 한잔으로 정상주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남해의 섬들을 조망하고, 안정재를 경유하여, 고저늑한 임도를 따라 걸어면 아름다운 나폴리를 감상하면서 걷는 기분은 어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안정사를 관람하고 통영의 세병관으로 이동하여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감상하였습니다.
세병관 바로 옆에 있는 향토역사관을 관람하고 도보로 2분거리에 있는 중앙시장으로 이동하여 싱싱한 해산물 장을 보았습니다.
4시에 예약을 한관계를 서둘러 박여사 해물탕으로 이동하여 이른 저녁겸 별미를 맛보고 5시에 통영을 출발하여 8시30분에 무사히 상주에 도착하여 2011년 첫 여행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안정사 주차장에서 산행시작전 단체 사진입니다.
안정사 주차장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대형버스와 승용차를 주차할수 있고, 화장실도 현대식으로 잘지어져 있습니다.
주차장 관리는 할아버지 몇분이 하시는데, 구수한 입담으로 등산객들을 웃게 만든답니다.
'명산에는 대찰이 있다'는 옛말처럼 벽방산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고찰 안정사와 산 내 암자인 가섭암, 의상암, 은봉암, 천개암을 품고 있습니다. 벽방산은 육덕을 갖춘 골산으로 거대 한 암반이 장엄하게 얽어 놓은 산정이 칼끝같은 남부 바위능선을 거느렸으며 남으로는 천개산, 도덕산, 발암산, 제석봉으로 줄기를 뻗고 있어 가히 통영의 조산(祖山)다운 위용을 지니고 있다. 또 안정사 부근의 적송림과 맑은 계류는 속세를 떠난 경계이고 안정사 들어 가는 길에는 동백나무를 심어 봄에는 동백꽃이 피는 아름다운 길을 걸을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섭암입니다. 다시 증축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암자이름 치고는 좀 생소한 암자 이름 이지요. 가섭존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중 두타제일의 제자였답니다.
가섭존자하면 염화미소라는 말이 유명하답니다.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시다가 문득 하늘에서 내리는 꽃한송이를 집어 대중들에게 보이시자 모두들 영문을 몰라 할때 가섭존자만이 빙글레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시중의 미소가 그것입니다.
가섭존자는 누더기로 한평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를 가리켜 두타제일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두타행이란 욕심이 적고 의식주 세가지의 최소한의 것에 만족하며 항상 엄격한 규율한 실천한 분이랍니다
의상암 입니다. 의상대사하면 부석사를 생각하게 하고 부석사를 생각하면 선묘낭자와 인연을 빼놓을수 없답니다. 다음은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우리 나라 불교 화엄종을 처음으로 도입한 신라고승 의상대사(625-702)는 신라왕족의 신분으로 경주 황복사에 출가하여 20세에 불문에 귀의하였다. 그가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 유학길에 나선 시기는 진덕여왕 4년(650년)의 일로써 그의 나이 26세였다.
처음 당나라로 떠난 길은 고구려 땅인 요동반도를 거쳐 들어가는 루트였으나 국경에서 고구려군의 검문을 받아 첩자혐의로 체포되어 고생하다가 귀국하였다. 이들은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시도하였는데 의상이 36세 되던 해에 원효와 함께 서해안 당항성(남양, 오늘날 경기도 화성군 해안 추정)에 다다라 당나라로 떠나는 무역선을 기다렸다.
당나라에 들어가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시기는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해이고 처음으로 세운 사찰이 강원도 양양 낙산사와 경북 영주 부석사이다. 의상이 당나라로 떠난 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하던 시기였고, 백제가 멸망하면서 서해 바닷 길이 열렸으나 아직 고구려는 건재하였던 때였으므로 이 위험한 고구려 내륙 루트를 이용하지 않고 뱃길을 택하여 중국 산동반도 등주로 떠났다. 그 당시 산동반도를 비롯한 황해 연안은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신라방(신라주민 집단 거주지)이 있었고 여기에는 신라인들이 출입하는 사찰도 있었는데 의상이 잠시 머문 곳이 적산 법화원이다.
의상대사에 관련한 중국 내 기록은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에 살면서 승려가 된 북송의 찬영이 저술한 송고승전에 전해오고 있으나 우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구체적 기록이 전해오지 않는다. 의상대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부석사 창건 설화에 기록이 전하고 민간 전설에도 전해온다. 그리고 일본 경도 근처 고산사에는 10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신라 여인상이 근세 발견되어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 여인상은 다름 아닌 의상대사와 슬픈 사연을 간직한 당나라 처녀 선묘라고 보고 있으며, 이 절에는 화엄연기라는 불교서적이 전해오는데 이 책에 의상과 선묘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의상이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위해 도착한 곳은 서해안 당주계(신라시대 지명 에는 당성, 당항성)이며 그들은 배를 기다리다가 산중에서 노숙하면서 밤중에 비를 만났다. 어둠 속에서 민가를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고 움집을 발견하여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의상과 원효는 밤중에 갈증을 느껴 가까이 고인 물을 달게 마셨다.
먼 여행길에 지치고 피로하여 불편을 잊고 단잠을 잔 뒤 이튿날 날이 새면서 주위를살펴보니 자신들이 잠을 잤던 그 자리에 해골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하룻밤을 보낸 곳은 움집이 아니라 피폐해진 무덤 속이었다. 의상은 해골에 고인 물을 자신이 마셨다는 사실을 알고 구토하고 더러움을 느꼈으나 원효는 태연 자약한 자세로 오히려 환희에 젖어 있었다.
이튿날도 비가 멎지 않자 또 다시 무덤 속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밤중에 귀신이 나타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원효는 이틀동안 무덤 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고 갈파하였다.
즉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원효는 "어젯밤 무덤을 무덤이라고 보지 않고 토굴이라고 생각하여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고, 자리를 옮겨 잠을 자면서 귀신을 만났지만 마음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누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 모든 사물의 형상이 다르게 보고 느끼게 되고 또 생각을 멀리하게 되면 무덤이나 토굴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오직 내 마음 이외 무슨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깨달았으니 당나라에 가지 않고 경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의상은 더 배우기 위해서 홀로 외롭고 험한 길을 택하여 뱃길로 중국을 향했다.
서기 661년에 의상이 중국 땅을 밟은 곳은 산동 반도 북쪽 등주였는데 그는 독실한 불교신도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 집에는 아름다운 처녀 선묘가 살고 있어 훗날 신라승려 의상과 인연을 맺게 되지만 의상이 여자를 멀리하므로 두 사람은 끝내 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의상이 적산에 있는 법화원으로 옮겨 머무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탁발을 나설 때는 선묘가 멀리서 의상을 바라보면서 흠모했다고 한다. 선묘가 절 밖에서 의상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마음을 전하려 했으나 의상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의상은 이곳에서 서쪽 멀리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떠났으며 근처 종남산에서 화엄경을 설법하는 지엄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10년간 삼장(불교의 기본이 되는 경 · 율 · 논)을 배웠다.
지엄은 의상에게 귀국하면 널리 화엄종을 보급할 것을 당부하였고 의상은 유학을 마치고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등주 항구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선묘는 자기가 손수 지은 법복을 전해주고자 바닷가로 갔으나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선묘는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는 의상에게 법복이 무사히 전달되도록 마음속으로 빌면서 배를 향하여
던지니 법복은 무사히 의상 품안으로 떨어졌다.
선묘는 평소 독실한 신도로써 의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의상이 불법을 공부하여 득도 하고 무사히 귀국하도록 부처님에게 빌었다. 의상이 떠나자 함께 따라 갈 수 없게 되어 선묘는 자신이 용이 되어 달라고 하늘에 빌면서 황해바다에 몸을 던다.
하늘이 이에 감읍하여 선묘는 용이 될 수 있었고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면서 신라까지 무사히 보살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신라에 돌아온 의상은 뜻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이상히 여겼지만 나중에서야 용이 된 선묘의 보살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의상이 귀국 후 처음 세운 절은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이고 그 다음이 태백산 근처 봉황산 아래 지은 부석사이다. 문무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에 내려가 명산대천에 사찰을 지으라는 분부를 받고 절터를 정한 곳이 곧 부석사이다. 그는 문무왕 10년(676년)에 이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으나 이미 이곳에 와서 절을 짓고 사는 5백여명의 다른 종파의 불승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의상은 마음속으로 부처님에게 어려움을 호소하자 갑자기 하늘에서 바위로 변한 선묘의 용이 나타나 3일 동안 공중에 머물면서 반대하는 불승들을 향하여 내리칠 듯 위협하니 그들은 두려워서 달아나고 종국에는 굴복하여 새 절을 짓는데 협조하게 되었다.
어리고 착한 선묘의 넋이 용이 되어 의상을 보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용이 된 것이다. 선묘가 바위가 되어 땅에 내려앉은 바위를 부석이라 하고 선묘의 도움으로 지어진 이 절의 이름을 부석사 라고 지었다. 현재 부석사에 선묘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은 부석, 선묘각(선묘상을 모신 사당), 선묘정, 석룡이다.
절 동쪽에는 선묘정이 있고 서쪽에는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던 식사용정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아래 묻혀 있는 석룡은 절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데 아미타불 불상아래에 용머리가 묻혀있고 절 마당 석등 아래에 꼬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근세 이 절을 보수할 때 비늘이 새겨져 있는 석룡이 묻혀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며 그 당시 무량수전 앞뜰에서 절단된 용의 허리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벽방산 정상입니다.
벽방산 650m - 경남 통영시 광도면, 고성군 고성읍
통영지맥이 뻗어가는 산릉에서 단연 빼어난 산이 벽방산(碧芳山)이다. 더불어 통영, 고성, 거제지역에서 해발고도가 제일 높은 산이면서 통영의 주산(主山)이요, 조산(祖山)이라 할 수 있다. 옛 <통영지>에는 ‘산세가 마치 거대한 뱀이 꿈틀거리는 위세를 하였으며, 그 중 한 산맥이 굳세게 옆으로 뻗치다가 곧장 바다 속으로 들어가 터전을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산을 불가에서는 벽발산(碧鉢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산세가 석가모니의 상좌(제자)인 가섭존자가 공양할 때 쓰는 바리때(그릇)를 들고 미래에 올 미륵부처를 기다리고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벽방산이 일제강점기에 개명된 이름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성현조에 벽산(碧山)으로, <경상남도여지집성>에는 벽방산(碧芳山)으로 기록돼 있다. 또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중 1594년(갑오년) 6월 28일(을해)의 기록에 ‘… 진무성(陳武晟)이 벽방(碧方)의 망보는 곳을 조사하고 와서는 적선이 없다고 보고했다’는 내용이 있다.
아무튼 이름 그대로 푸르고(碧) 꽃다운(芳) 벽방산의 매력은 장쾌한 조망에 있다.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들이면 들, 섬이면 섬, 이 모두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안정사 /경남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 벽방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태종무열왕 원년 갑인년(서기 654)
에 우리나라의 해동 화엄종 초조이며 세계적 성현으로 추앙받는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현재까지 1400여년동
안을 면면히 그 법 맥을 이어가고 있다. 층정과 예향, 대선문과 진지 한 삶의 색채가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있는 것을 보면 고찰이 사적지임을 금방 알수가 있다고 한다.
1309년(충선왕1년)에 회월선사가 중건한 뒤 1626년(인조 4년)과 1733년 (영조 9년)1841년(헌종7년) 1880년
(고종 17년)에 중수가 중건 되었다. 지금의 김덕진 스님은 가람 수호 정진 중에 있다.현존하는 국보급 보존가
치가 있는 지방유형 문화재 80호 포립형식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나한전,칠성각,음향각,만세루,광화문,
범종루,천왕문,묘사채,괘불,한국 대종 등이 있다. 산내 암자로는 절에서 보이는 은봉, 바위 밑에서 보이는
숲속에 묻혀 있는 은봉암이 있다. 이은봉암은 634년(선덕 여왕3년)징파화상이 창건하였으며 약수가 유명하다.
또한 의상암은 663년 (문무왕 3년)에 창건한 것으로 의상 대사가 천공을 받으며 좌선 했다는 의상선대가 있고
칠성도량으로 민 족의 애환을 같이한 기도 도량이기도 하여 각처에 이름이 알려져 있다. 신비하게도
현재 구성된 신도들 중 70명이 기도하여 자식을 얻었다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아래 가섭암이
있는데 가섭암은 669년 봉진이 창건 하였다도 한다.
그리고 인도에서 출발하여 중수가 되어서 우리 나라에 들어 왔다는 혜위등광불이 모셔져 있는 천개 암이 있다.
또한 은봉암에 있는 성석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괴석으로 높이가 6m 되는 바위 세개가 나한히 있었는데 바위 한개가 넘어 지면서 해월선사라는 도인이 나타났고, 그후에도 또 한개가 넘어졌을 때 종렬선사라는 도인이 나타났다고 하여 성석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현재 한개가 남아있어 새로은 한 분을 기다 리고 있다고 한다.이렇듯 암자마다 제각기 다른 전설과 고서들이 있고 불타의 가르침으로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어 기도처로서는 좋은 곳이다.
또 원효암, 운필암,만리암,백련암,소월암, 등의 빼어난 사적지가 산내에 두루 산재했는데 임진왜란 및 한국전쟁등으로 소실하여 지금껏 복원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암자의 소실에 대하는 복원이 제대로 이루지 못한것은 정신 문화고갈과 부재에서 오는 것 으로 빨리 재현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주지 김덕진 스님이 헌신적이 고 희생적인 사찰 수호의 정신으로 복원 불사를 계획하고 그 실천 단계가 그리 멀지 않았 은 장래에 도래하여 신심에 찬 환희로운 고대 불사 문화도량의 제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 이다.
세병관 /국보 제305호. 정식명칭은 통영세병관(統營洗兵館)이다. 이 건물은 1603년(선조 36) 충무공 이순신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세웠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두룡포(頭龍浦)에 설치했던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의 중심건물로, 궐패(闕牌)를 모시고 출전하는 군사들이 출사(出師)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앞면 9칸, 옆면 6칸의 단층팔작지붕 건물로 여수의 진남관(鎭南館)과 함께 남아 있는 군사용 건물 가운데 평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 중 하나이다. 가구(架構)는 11량가(樑架)이며 기둥 사이에 비해 기둥이 높은 비례로 되어 있다. 원래는 벽체가 있었으나 현재는 사면이 모두 개방되어 있다.
내진(內陣)에 높은 기둥을 세우고 다시 대들보[大樑] 아래에 굵은 사이기둥을 세워 당당함과 위엄을 보여준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중앙 3칸의 뒤편에는 궐패를 모셨던 시설이 남아 있다. 법주사 팔상전(捌相殿)과 함께 주심포 후기양식의 대표적인 예이다.
한 달에 두번 임금에게 예를 올리고, 일 년에 두 번 삼도수군이 모인 합조 등 통제영의 의전과 연회를 행하던 통제영의 중심건물이다. 민흘림기둥 사이로 들어서면 조금 높은 궐패단이 있다. 천장에 위로 들어 올리는 문이 있어 예를 드릴 때면 문을 닫아 함부로 근접하지 못하게 했다. 세병이란 무기를 씻는다는 말로 평화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통영세병관은 예향통영의 근간이다. 왕명을 받은 통제사가 가져온 당시 서울의 양반문화와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 수군이 모이는 합조 때면 삼도의 문화예술이 300년간 남쪽 작은 항구에 모여 들며 통영 곳곳에 스며들었다. 통제영 12공방엔 전국 각지의 장인이 찾아들어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 명성을 떨쳤다. 소설가 박경리의 말처럼 통영사람에겐 예술의 DNA가 흐른다.
일제강점기 때 민족혼 말살 정책을 펴면서 통제영을 해체시키고 세병관은 칸을 지어 학교로 사용하였다. 유치환, 전혁림, 윤이상, 김춘수, 박경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이었다. 여수 진남관과 경복궁의 경회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가장 큰 목조건물이며 처음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세병관이란 이름의 유래는 당나라 두보의 시에 따온말로 “장사를 얻어서 하늘에 있는 은하수를 끌어와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 영원히 전쟁에 쓰지 않도록 할까” 라는 뜻이다.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 기가 막힌 말입니다.
세병관은 17세기초에 건립된 목조단층 건물로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하고 이미 국보로 지정된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그 역사성과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향토역사관 /통영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역사를 한 자리에 모아 둔 곳이다. 원래 교회가 들어설 목적으로 건립되었으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세병관 바로 앞에 교회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로 향토역사관이 되었다.
김일룡 관장은 유물 수집을 위해 한 때 골동품 가게와 화랑을 운영하기도 했다. 통영 구석구석 발품을 팔며 수많은 통영의 유적을 모아 역사관 곳곳에 시대별 분야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다. 선사시대 유물부터 이순신 관련 자료와 통영 12공방의 각 공예품들 그리고 통영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기록사진까지 방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왠지 공짜로 본다는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답니다
통영중앙시장 / 역시 통영의 중앙시장 활기찹니다.
잘 정리된 간판이며 여러가지 물건들을 팔고 있는 곳 통영의 중앙시장.
열심히 해물탕을 음미하면서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 살아있는 문어를 보니 역시 해물감이 싱싱함을 직감적으로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회원들이 맛있게 드셨는지 .. 배부른자의 모습을 하고 나오는 모습을 보니 배가 불룩한 포대화상이 생각이 났습니다....
2011년 첫 나들이에 참여하신 회원과 일일회원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도 바쁜일정에 잘 맞춰 주어서 감사합니다. 항상 떠나오고 나면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이번 통영여행도 충렬사를 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회장님 여행후기처럼 말없이 갔다고 인사도 못하고 떠나왔습니다. 다음에 또다른 동행인과 다시 올것이기에 그때 인사하고 온다는 마음으로 떠나왔습니다.
통영에 대한 아쉬움은 훗날 다시 보시기로 하고 1월 테마여행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다음달에는 경주와 하동중 하나를 선택해서 테마여행을 계획하겠습니다. 다음달에도 많은 참여를 기대하면서 여행후기는 여기 까집니다...
첫댓글 PERFECT !!!!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