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학도이신 아버지는 중학교 3학년 때 큰 형이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니 부끄러워 자퇴를 하시고 집에서 한자공부를 하셨다. 불혹의 나이에 보배같은 자식을 잃은 슬픔에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
몇 년후 할아버지 주선으로 아버지 나이 43세에 어려운 처지의 처녀를 후실로 맞으셨다.그 처녀가 내 어머니시다. 당시 18세에 시집을 와서 19세에 딸을 낳으니 할아버지가 마음 편히 살라고 문경 산양면 신전리로 이주해 그곳에서 아들둘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슬하에 총 3남 4녀를 두셨다. 어릴 때 기억은 아버지, 어머니, 큰어머니, 큰어머니 막내딸, 우리 삼형제와 외할머니, 이렇게 8식구가 살았다. 외할머니는 딸집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내가 3살 때 돌아가셔서 우리 선산에 묻히셨다. 남매를 두셨는데 외삼촌은 몸이 허약하여 자주 아팠는데 아버지가 도움을 주신 듯 하다. 나는 어머니가 문맹인 것을 고등학교 때 알았다. 외삼촌은 겨우 결혼을 하고 외숙모 친정과 합가해서 5남매를 낳아 출가시키고 바로 돌아가셨다.
큰 어머니는 내 나이 6살 되던 해 앓고 있던 페병으로 돌아가셨다. 매섭게 춥던 한 겨울, 9살 형이 상주복을 입고 상여를 뒤따랐고 일가친척들이 그 뒤를 따르며 눈시울을 적셨다. 큰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 비로소 어머니는 거처하던 골방에서 안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큰어머니 막내딸이 중매로 영등포 전매청에 근무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이제 아버지 어머니 우리 삼남매
5식구가 오붓이 살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재야의 한학자셨다.
사랑방에서 서책 읽으시는 소리가 낭랑하셨고 장정들에게 천자문도 가르치셨다.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되니 서툰 농사일은 머슴에게 맡기셨다. 어머니가 곱게 차려주신 두루마기와 중절모, 또는 갓을 쓰시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로 다니시며 한학자들 모임에 참석하시며 며칠을 출타하셨다. 대구 경북사무소는 약전골목의 덕흥당 한약방이었다 그런데 이 못난 자식들은 아버지의 학문을 계승하지 못하고 깊이도 알지 못한 터라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 뵈올 면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