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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어머니와 아들 (1)
정(鄭)나라.
지금의 하남성 정주 일대를 영지로 하고 있는 신생국가이다.
나라를 연 사람은 정환공(鄭桓公).
주선왕 22년에 처음 건국했으니, 주평왕 시대를 기준으로 한다 하더라도 50년이 채 되지 않은 나라이다.
그런데 아니러니하게도 미증유(未曾有)의 혼란 상태를 이어가는 제후시대의 첫장을 장식한 나라가 바로 이 정(鄭)나라였다.
대만 태생이자 일본의 역사소설가로 유명한 진순신(陳舜臣)은 정나라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춘추 초기 시대의 부산물.
간략하면서도 많은 내용을 함축한,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평왕 등극 후 정환공의 아들이자 세자인 굴돌(掘突)은 정나라로 돌아와 군위에 올랐다.
그가 정무공(鄭武公)이다.
정무공이 즉위할 무렵만 해도 정(鄭)나라는 아직 영토가 작은 신생국가였다.
땅을 넓히고 인구를 늘릴 필요가 있었다.
정무공(鄭武公)은 야심과 패기에 찬 인물이었다.
- 나는 경사(卿士)다.
자신에게 주어진 왕실의 지위를 이용할 줄도 알았다.
정무공(鄭武公)은 즉위 4년째에 이웃 나라인 동괵을 공격하여 자기 땅으로 삼았다.
다음 해에는 회나라를 병탄하였다.
처음 정환공(鄭桓公)이 신정으로 나라를 옮길 때 동괵과 회나라는 자진해서 10개의 봉읍을 떼어줌으로써 정나라 이주를 도왔었다.
그런 호의를 보인 두 나라를 정무공(鄭武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집어삼킨 것이었다.
- 정(鄭)나라의 국력 신장은 주왕실의 부흥이다.
이러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을 것이다.
정(鄭)나라는 삽시간에 강국이 되었다.
주왕실에 대한 입김도 세졌다.
처음에는 정나라의 국력 신장을 환영하던 주평왕도 정무공(鄭武公)의 간섭이 지나치게 되면서 언짢은 기색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월권 행위를 자주 했던 모양이다.
이런 행태는 주왕실의 사도직을 맡았던 위무공(衛武公)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잦아졌다.
그러나 정무공(鄭武公)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정나라와 주왕실과의 관계는 그런 대로 유지되었다.
두 나라 사이에 금이 간 것은 다음 대인 정장공(鄭莊公)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정무공(鄭武公)은 즉위 10년째 되는 해에 신후(申侯)의 딸을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았다.
이름은 무강(武姜).
무공의 부인 강씨라는 뜻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름이 아니라 시호이나, 이 당시는 공실(公室)의 부인에게 따로이 시호를 내리지 않았으므로 죽은 후에 붙인 이름이라고 해야 정확하겠다.
무강(武姜)은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의 이름은 오생(寤生)이었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단(段)이었다.
무강(武姜)은 형인 오생을 극도로 싫어한 반면, 동생인 단(段)을 몹시 사랑하였다.
그 이유를 <사기(史記)>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무강은 오생(寤生)을 낳을 때 난산이었기 때문에 낳은 후에까지도 오생을 싫어하였다.
그 후 무강은 둘째 아들인 단(段)을 낳았는데 그때는 순산이었기 때문에 그 아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반면에 <열국지(列國志)>의 저자는 다른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강씨는 오생(寤生)을 낳을 때 해산자리에 앉아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깊은 잠을 자면서 해산하는 꿈을 꿨다.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엔 이미 갓난아기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강씨는 몹시 놀랐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잠 깰 오(寤)자에, 낳을 생(生)자로 한 것이다.
강씨는 이 일을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오생(寤生)이라는 글자 뜻풀이에 대해서는 또 한가지 설이 있다.
- 눈을 뜬 채 아이를 낳다.
어쨌거나 오생(寤生)의 출산은 정상적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무강이 오생보다 둘째 아들 단(段)을 편애한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무강(武姜)은 기회만 생기면 정무공의 귀에 속삭였다.
"단(段)은 어질고 영특하여 명군의 기질이 엿보입니다. 단(段)을 세자에 책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정무공(鄭武公)은 정나라를 강국으로 키운 제후답게 심지가 굳었다.
"사람에게는 장유(長幼)의 질서가 있소. 공연히 공실을 문란케 하지마시오. 더욱이 오생(寤生)에게는 아무런 허물도 없소. 어찌 장자(長字)를 폐하고 차자(次子)로 대를 이을 수 있겠소?"
결국 정무공(鄭武公)은 오생을 세자로 삼는 한편 단에게는 공성(共城)이라는 조그만 땅을 식읍(食邑)으로 내주었다.
무강(武姜)은 이러한 남편의 처사를 대단히 못마땅히 여겼다.
'두고 보라지. 내 기어코 단(段)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할 터인즉.'
속으로 이런 결심을 하였다.
그런 중에 정무공(鄭武公)이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세자 오생(寤生)이 정무공의 뒤를 이어 군위(君位)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정장공(鄭莊公)이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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