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8
무명이 무엇이냐? 이름이 없다.
무상, 형상 없다. 절일체다. 무명무상절일체.
태산같이 큰 산이 바늘 구멍에 들어 갈 수 있나?
무상인데 가능한가?
물질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빛의 세계에서는 내 눈에 보이는 온 세계가
한 점 속에 들어간다. 걸림없이 들어간다.
자,
그럼 시점에 따른 모습의 변화에서 무상을 살펴보자.
색수상행식의 오온도 모습이 없으며,
깨달음에도 모습이 없고, 큼이나 작음이라는 모습이 원래 없기에 큰 것이 작은 것 속에 들어간다.
예를 들어,
컵의 경우 어떠한가?
정해진 모습이 있나?
둥글다, 네모나다, ... 접이 부채다..
조건(緣)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起). 바로 연기(緣起)다.
컵의 원래 모습일까? 그 어떤 것도 원래 모습이 아니지만 그 모두가 다 컵의 모습가운에 하나다. 그래서 컵에 원래의 모습은 없다. 무상이다.
‘나’라 할 때 이름이 ‘나’다. 그러나 이것도 조건따라 변한다. 누구를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알고보면 어떤 것이든 정해진게 없다.
무명무상이다. 정체불명이다.
또다른 예로 무상을 살펴보자.
모든 사물은 움직인다. 나에게서 멀어지기도, 다가오기도, 위로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한다.
이런 움직임의 모습은 모두 상대적이다.
관찰자와의 관계에 따라서 움직임의 이름이 바뀐다.
관자의 시점(연)에 의존하여 새로운 움직임이 발생한다(起). 緣起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든 어떤 상태에서든 움직임의 특정한 상(相)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상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서 발견되는 무상의 예를 보자.
법성게에서 세상만물의 모습에 실체가 없다는 무상의 진리는 미술의 화풍에도
잘 드러나 있다.
빛의 각도(緣)에 따라 사물의 색깔에 변화가 일어난다(起).
이들의 통찰에서 우리는 연기와 공성 – 무자성의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
무명이고, 무상이고, 절일체다.
무상과 관련하여 더더욱 주목해야 할 미술사조가 바로 입체주의, 즉 입체파다.
피카소는 평면에 입체의 모습을 담으려고 한다.
다시점적(多視點的)이다.
그 어떤 모습도 그 사물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모든 사물은 원래 모습이 없다. 무상이다.
화가들이 발견한 무상의 진리다.
여기서 주목할 것!!
불교수행의 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성문 –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리를 들어 깨달음을 이루는 길
연각 – 불교가 전파되지 않은 땅에 태어나 홀로 골똘히 생각하여 연기의 이치를 깨달음으로 가는 길
보살 – 부처님 전생을 담은 본생담의 보살과 같이 살면서 성불을 지향하는 길
불교를 몰랐지만 화엄에서 가르치는 법계연기의 한 조각인 ‘무상(無相)’의 진리를 발견한 서양의 근대 화가들은 연각의 길, 독각의 길을 가던 수행자들이었다고 평할 수 있으리라.
진리를 추구하면 ‘수행자’이다.
이들 모두 익명의 불교도(Anonymous Buddhist), 독각행자(獨覺行者)였다.
절일체(絶一切)다 –모든 것이 끊겼으니..
무명무상절일체의 ‘절일체’다.
일체가 끊어져 있다는 뜻이다.
제법이 그렇다. 법이 부동하고 고요하고 이름없고 모양없다.
제법의 본질인 법성이 그렇다는 말이다.
모든 생각이 끊어져 있다는 뜻이다.
절일체는 공성이기도 하고, 열반이기도 하고, 본래무일물이다.
반야심경에서도 공에는 ‘오온이 없다’고 했고.. 법성은 이런 오온법,
모든 법 각각의 본질이고 공통점이다.
외견상 제각각인 법들도 그 본질을 끝가지 추구해 가면 공성과 만난다.
정체불명임을 알게 된다.
법성은 모든 법의 참 모습읻. 그래서 법성을 제법실상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공성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 절일체다.
(4)증지소지비여경 –깨달은이 아는 경계 다른이는 모른다네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무명무상절일체.
지금까지 법성 즉 법의 본질을 말했다.
법의 참모습은 원융하여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으며 무이상, 부동하고,고요하며(寂), 이름없고(무명), 모양없고(무상), 일체가 끊어져 있다(절일체) 법의 참모습에 대해 다종 다양한 묘사 같지만 ‘법의 본질은 공하다’라는 가르침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들 낱낱이 본질적으로 다 공하다. 실체가 없다.
그런데 일반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고 오직 깨달은 이들만 이를 안다.
“증지소지비여경”이다.
깨달음을 얻은 지혜로운 자(證智)만 알 수 있는 경계(所知)이지 그밖의 다른 사람들(餘)이 알 수 있는 경계(境)가 아니(非)다는 뜻이다.
바로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의 지혜로만 알 수 있는 경계다.
(5)진성심심극미묘 – 참된 본성 아주 깊고 지극하게 미묘하여.
진성은 참된 본성이다.
법의 본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인 법들 낱낱의 참된 성품이다.
먼저 현재든, 과거든 미래든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몸은 인연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인연(因緣)에서 인(因)이란 직접조건, 연(緣)이란 간접조건을 의미한다.
우리와 같은 중생의 몸은 인연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동아시아의 아함경이나 남방상좌부의 니까야(Nikaya)와 같은 초기불전에서는
남녀가 교합을 하고 향음이 결합하면 생명이 탄생한다고 가르친다.
<중아함경>의 경문에 말하는 향음은 간다르바(gandharva)의 번역어로 중음신(中陰身)이나 식(識)을 의미한다. 속된 말로 귀신이다.
이렇게 아비의 정, 어미의 배란기, 향음의 세 가지 인연이 화합하여 인간이 탄생한다.
자 더 자세히 보자.
향음(중음신)=귀신=아귀라 하며 먼저 간사람 즉 쁘레(앞,먼저)+따(가다)로
먼저 죽은 조상을 말한다.
이 중음신이 49일 머문다고 한 것이 티벳불교에서 나왔다. (최대한 49일)
남방에서는 인정 안한다. 인연 따라 달라진다. 즉 죽으면 바로 인연 따라 간다고 한다.
그럼 아비달마 불교에서 어떻게 설명했나!!
죽음의 순간을 사유 또는 사음 이라 했다. 오온을 오음이라 하듯 ‘집착한다’는 안좋은 의미다.
죽고 다시 태어난 순간까지 중유 (중음)다.
태어난 후 생유 (생음) 다.
그 후 죽을때까지 살아가는 것이 본유 (본음)다.
사유와 생유사이, 이 둘의 사이를 ‘바르도’라 티벳에서는 부른다.
왜 이런 설명을 구구절절 했나!
상견과 단견을, 깨주기 위해서다. 중도를 알게 하기 위해서다.
불교에서의 윤회는 ‘무아론적 윤회’를 말하고 있다.
바로 알아야 한다.
다음시간에...
첫댓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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