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페이스북에서 성격이나 취향, 주제어 등을 알려주는 테스트가 인기를 끌고 있다. 처음에는 무작위로 재치 있는 답을 제시하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치밀하고 정확해졌다. 몇 개의 설문이나 퀴즈를 통해 파악하는 정도에서 페이스북의 포스팅을 분석하여 각자에게 합당한 답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다, 당신은 어떤 직업이 어울립니다 등에서 30년 후의 당신은 어떻게 됩니다, 당신에게 맞는 나라는 이곳입니다 등 다양한 질문이 나온다.
그 중에서 당신의 묘비명은 이것입니다, 라는 것도 있었다. 죽고 난 후 묘비명에는 어떤 것이 적힐까. 아직 한국에서는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지정하고 죽는 경우가 많지 않다. 고인의 유가족이나 친구 등이 그를 기리며 적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고, 대부분은 이름과 생몰 기록을 적는 정도다.
외국의 묘비명 중에서 기억나는 것 하나는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다. 하지만 이건 오역에 가깝다. 우물쭈물이 아니라 살다 보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즉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뜻에 가깝다. 인간의 조건과 어리석음을 희화적으로 그려낸 극작가 버나드 쇼는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내가 죽은 후, 나는 무엇을 묘비명에 남기고 싶은가. 혹은 나의 지인은 어떤 말을 남겨줄 것인가.
지난 7월 개봉한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이라는 영화가 있다. 마크 펠링톤이 감독을 했고, 빌리 와일더 감독의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1960)에 잭 레먼과 함께 출연하여 당시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셜리 맥클레인이 나온다. 1934년생이니 70이 넘었지만, 지금도 꾸준히 영화에 나오고 있다. 당신이 중년의 나이라면 제임스 L. 브룩스의 <애정의 조건>(1983)에서 데보라 윙거, 잭 니콜슨과 함께 나온 셜리 맥클레인을 기억할 것이다. 셜리 맥클레인과 함께 나오는 배우는 <레미제라블>의 아만다 사이프리드다.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내가 죽으면 지인들은 과연 어떻게 말해줄 것인가. 한국에서는 부고기사가 대체로 형식적이거나 지나치게 업적 위주로만 되어 있다. 외국에서는 전문적으로 부고 기사만 쓰는 기자가 다양한 스타일로 고인을 추모한다. 부고 기사만으로도 충분한 에세이가 된다. 2014년부터 한국일보에서 연재되었고, 2016년 책으로도 나온 <가만한 당신>은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35명의 ‘부고 기사’를 싣고 있는 좋은 책이다. 이미 죽은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남은 이들은 어떻게 그들을 평가하고 있을까. 아마도 궁금할 것이다. 자신이 꽤 알려진 삶을 살았고, 업적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해리엇은 한때 최고의 광고 에이전시를 설립, 운영했고 은퇴한 지금도 여러 회사에 영향력을 가진 여성이다.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컨트롤해 왔던 해리엇은 어느 날, 자신의 부고기사가 궁금해진다. 당장 신문사를 찾아간 해리엇은 부고 전문기자인 앤을 고용하여 자신의 부고기사를 작성하게 한다. 하지만 해리엇의 주변 인물들을 찾아간 앤은 난감해진다. 좋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시작되면 해리엇이 어떤 인물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정원사에게 가서 참견한다. 이 나무는 이렇게 손질해야 하고, 잔디는 어떻게 해야 하고. 말로 하다가 급기야는 자기가 직접 정원가위를 들고 손질한다. 미용실에 가서도 자기 머리를 직접 자르고, 원하는 대로 되었다며 만족한다. 자신의 기준과 요구가 명확하고, 반드시 실행을 해야 한다. 고집불통에 독불장군이지만 사업에 있어서는 탁월한 성과를 올렸다. 대신 가족도, 친구도, 우군도 없다. 부고기사가 실린다면 광고 에이전시 설립과 탁월한 광고인이었다는 정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평범한 부고기사를 쓴 앤을 질책하던 해리엇은 직접 나선다. 좋은 부고기사가 되려면, 고인에게 4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정리한다. 가족에게 사랑받고, 동료에게 존경 받고,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소수집단이나 장애인이라면 더욱 좋다. 마지막은 와일드 카드가 있어야 한다. 뭔가 독특하고 개성적인 그만의 업적이나 취향이 있어야 한다. 해리엇은 지금부터 4가지 요소를 만들기 위해 돌진한다. 빈민 지역의 흑인 아동을 만나고, 소원했던 딸을 찾아가고, 지역 방송국에서 DJ도 하게 된다.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지난 인생을 돌아보는 해리엇을 통해서 20대 후반의 앤이 다시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단지 노인이 지난 인생을 되짚어보며 평가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을 넘어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해리엇은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이 옳다며 달려온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즐거워하는 순간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다. 그래, 내가 틀렸네. 강박적으로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려는 것은 두려움에 기인한다. 그렇기에 틀렸음을 확실하게 알았을 때에는 오히려 모든 것을 놓아주면서 자유로워지고 즐거워진다.
앤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떠나간 이후 막연한 이상향을 꿈꾸고 있었다. 언젠가는, 어디에 가면 나는 행복해질 거야. 그러면서 모든 것을 유예하고 완벽한 기회가 오기를 찾고 있었다. 노력을 하면서도 과감하게 무언가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해리엇을 만나 그녀의 과거를 함께 되짚어 가면서 앤은 변화한다. 가만히 앉아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는 미래를 꿈꾸게 된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
해리엇은 DJ를 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세상에 던진다. 그 중 핵심적인 말이라면 ‘그저 좋은 날보다는 의미있는 하루를 보내세요.’다. 좋은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이건 의미를 찾아내라는 것. 그것은 ‘네가 실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수가 너를 만드는 것이야.’라는 말로도 이어진다. 실수를 두려워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성공보다는 실패와 실수를 통해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으니까. 해리엇 역시 과거의 실수와 실패를 진지하게 되짚어보면서 진짜 자기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앤 역시 실수와 실패를 겪은 해리엇을 보면서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고, 부고기사를 제대로 쓸 수 있게 된다.
버나드 쇼의 말처럼,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누구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한 번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가 죽은 후에 어떤 말을 듣게 될 것인가. 그것은 결국 내가 어떤 삶을 사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해리엇처럼, 은퇴를 하고 모든 것이 정리된 것 같았던 시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아니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보고,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보고 다시 한 번 나의 과거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자.
전 「시네필」, 「씨네21」, 「한겨레」 기자, 「ME」, 「ACOMICS」편집장. 저서로는 『클릭! 일본문화』(공저), 『18금의 세계』(공저)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과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좀비사전 등이 있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J-pop 등 일본 대중 문화를 지속적으로 즐기면서, <한겨레>, <중앙일보> 등의 일간지에 TV 비평, 대중음악 비평과 영화음악 칼럼을 써오고 있다. 그리고 YES24 「채널 예스」에 만화 비평, 「씨네21」에 문화 비평 등 다양한 대중문화 분야의 글들을 쓰고 있으며, 스릴러, 미스터리, 공포, SF 등 대중문학의 해설을 쓰고 책을 엮는 등의 출판 활동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