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보원사지
2024년 05월 15일(수요일)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으로 가는 길입니다.
불이문
不二門(불이문) 편액은 원담 진성(圓潭 眞性 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는 곳이 보입니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국보 제84호)
마애여래삼존상을 바라볼 때, 중앙에 석가여래 입상을 기준으로 왼쪽에 제화갈라보살입상, 오른쪽에 미륵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는 백제 후기의 마애불입니다.
마애불은 자연 암벽에 선을 새겨 넣거나 도톰하게 솟아오르도록 다듬어 만든 불상을 말합니다.
삼존불은 6~7세기 동북아시아에서 유행한 보편적 형식이지만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입상 보살과 반가보살이 함께 새겨진 것은 중국이나 일본, 고구려, 신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입니다.
석가여래 좌측으로 제화갈라보살, 우측에 미륵보살은 반가상을 하고 앉아 계십니다.
제화갈라보살은 석가모니에게 수기한 연등불의 전생시절 이름입니다.
그러니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가 계시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세분다 미소가 원만합니다.
마애여래삼존상은 웃는 미소가 포인트인데 이 미소는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표현이 됩니다. 아침에는 밝고 평화로운 미소를 저녁에는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볼 수 있습니다.
마애불이 새겨진 돌이 80도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아 미학적 우수함은 물론 과학적 치밀함도 우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가 절로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백제의 미소입니다.
서산 보원사지(瑞山 普願寺址) (사적 제316호)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보원사의 옛터로 통일신라~고려초에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 900~975)이 묻힌 곳이며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대사찰이었습니다.
이 절터에 신라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있던 것을 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이며 1967년도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유물로 보아 당시에는 매우 융성했음을 알 수 있으며 백제와 신라, 고려초 불교미술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있는 사적지입니다.
유물로는 백제계의 양식 기반위에 통일신라와 고려초의 석탑양식을 갖춘 5층석탑(보물 제104호), 통돌을 장방형으로 파내어 만든 한국 최대의 석조(보물 제102호), 975년(고려 광종 26)에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광종의 지시로 세운 승보탑(보물 제105호),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승보탑비(보물 제106호), 사찰에 불교행사가 있을 때 불기나 괘불을 걸기 위해 만든 당간지주(보물 제103호)가 있습니다.
가까이에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한 백암사지 등 불교유적이 집중되어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곳입니다.
보원사지 당간지주(普願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103호) 높이 4.2m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석조물입니다. 당간(幢竿) 은 절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위엄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의미를 가진 당(幢) 이라는 깃발을 다는 깃대입니다.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의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마주보고 있는 두 지주의 안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바깥쪽에는 양측 가장자리를 따라 돌대(突帶)가 돋을 새김되어 있습니다. 기단부가 없어진 것을 화강암으로 새로 보강하였는데, 주위에 흩어져 있는 여러가지 석재들로 보아 원래는 직사각형의 기단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당(幢, 깃발)을 매다는 당간(幢竿)을 지지하는 당간지주(幢竿支柱) 사이로 저 멀리 5층석탑이 보입니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깍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아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습니다.
간대
아랫부분에도 구멍(원공)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습니다.
보원사지 석조 (普願寺址 石槽) (보물 제102호)
화강석의 돌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절에서 물을 담아 쓰던 용기입니다. 안쪽과 뒷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은 거칠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아 간결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거대한 크기로 인해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내부에도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밑바닥은 평평하고 한쪽에 물을 내보내는 구멍이 있을 뿐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석조입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978년(고려 경종 3년)에 제작된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을 비롯한 다른석조물과 관련시켜볼 때 고려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야산에서 발원한 용현계곡을 걸어갑니다.
중문터
계단 난간 기둥을 끼웠던 부재도 보입니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瑞山 普願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104호)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옛 보원사 터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입니다.
현재 보원사터 가운데 서쪽 사찰 구역의 중심에 위치합니다.
이 탑은 상하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리고 정상에 머리 장식이 있는 구조입니다.
현재 머리장식은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있고, 그 위에 머리 장식을 고정하기 위한 철제 찰주(擦柱-탑의 중심 기둥)가 꽂혀 있습니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와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석탑입니다.
기단의 이중 구조, 상하층 기단 양옆에 돋을 새김한 팔부중(八部衆-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의 배치나 조각 수법 등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모습이지만 조각이나 돌을 다듬는 기술 등이 다소 섬세하지 못한 점은 고려 석탑의 특징입니다.
또한 지붕돌이 얇고 넓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네 모서리 끝이 살짝 들린 것은 옛 백제 지역에 남아있는 백제탑의 특색입니다.
1968년과 2003년에 해체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1968년 해체할 때 사리구(舍利具-사리 용기)와 함께 납석제 소탑(小塔-작은 모형탑) 등이 나와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전시 중입니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전체적으로 미려하고 경쾌하며 안정감이 있습니다. 상륜부에는 긴 찰주만 남아 있지만 1945년 광복 전까지 아름다운 복발, 양화, 보륜, 보개, 수련, 용차, 보주 등의 부재가 완전하게 있었다고 합니다.
1968년 해체 복원시 사리내갑, 외갑, 사리병, 납석소탑 등이 출토되어 부여박물관에서 전시 중입니다.
오층석탑 팔부중상 배치도
부처의 법을 지키는 8명의 선신
인도 각지에 있던 토착신들이 불교가 발전하면서 부처의 법을 수호하는 선선으로 수용
동(앞면)
용(龍)
원래의 인도의 나가라고 불리는 코브라신인데 중국에서 용으로 번역, 용을 두른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왼손에 금강저를 들고 오른손은 용꼬리를 잡고 있습니다.
남(좌면)
건달바(乾達婆)
음식을 먹지 않고 대신 향을 즐기며 음악을 들려주며 천신들을 공양하는 신으로, 머리에 사자관을 쓰고 공후고대 현악기를 켜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건달이라 부르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 말입니다.
서(뒷면)
가루라(迦樓羅)
광명의 신 비슈누의 상징이자 상상의 새를 신격화한 것으로 새 중의 왕이며 뱀과 용을 잡아먹는 신으로 새의 부리가 표현되었습니다.
황금빛 새라고 하여 금시조라고도 합니다. 오른손에 금강저를 들고 왼손에는 불꽃무늬 보주를 쥐고 있습니다.
북(우면)
마후라가(摩睺羅伽)
원음악을 담당하는 신으로 머리 위에 뱀을 올려 놓은 모습입니다. 오른손은 금강저를 잡고 왼손은 뱀꼬리를 잡고 있습니다.
금당지
금당지의 중앙에는 철조불상을 모셨던 연화좌대가 남아 있습니다.
금당터 뒤쪽의 법인국사 승탑(보물 제105호)와 탑비(보물 제106호)가 남아 있습니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 (보물 제105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은 옛 보원사 터에 세워진 탄문(坦文, 900~975)의 승탑(僧塔)입니다.
탄문은 고려 초의 대표적인 화엄종 승려로서 광종(光宗) 때 승려 최고 직위인 왕사와 국사를 지냈으며, 말년인 975년(광종 26)에 보원사로 내려와 머물다가 3개월 만에 입적하였습니다.
고려 왕실은 탄문에게 '법인(法印)'이라는 시호(諡號-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그의 승탑에 '보승(寶乘)'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국가의 최고 장인(匠人)을 보내 승탑과 탑비(塔碑-승려의 행적을 기록한 비)를 제작하도록 하였습니다.
승탑은 탄문이 입적한 975년에서 탑비의 비문이 완성된 978년사이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승탑은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으로 사리탑(舍利塔), 부도(浮屠), 묘탑(妙塔)이라고도 하며, 사리를 넣어두는 몸돌을 중심으로 아레에는 기단을 쌓아 받치고, 위에는 머리 장식을 얹습니다.
보원사지 법인국사탑은 통일신라 승탑 양식에 따라 머리 장식을 제외한 모든 석재가 팔각형으로 제작된 고려 초기의 승탑입니다.
이 승탑은 몸돌의 사천왕상과 보관을 쓴 인물상, 지붕돌의 귀꽃(지붕돌 모서리에 새긴 꽃모양의 장식) 등의 조각이 매우 뛰어납니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下臺石)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습니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 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에 모서리 기둥인 우주(隅柱)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두었습니다.
뒷면에도 문비(門扉)를 새기고 양쪽에 사천왕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양쪽 옆에서 보면 가운데 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을,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을 배치하였습니다.
문비 2기, 사천왕, 신상 2기를 탑신석 각면에 새겼습니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碑) (보물 제106호)
총높이 4.25m, 폭 1.15m/화강암
법인국사의 탑비로 978(고려 경종 3)에 경종의 지시로 세워졌습니다.
비몸 높이 230Cm, 폭 115Cm, 글자 수 5,000여 자나 되는 거비이며 국공(國工)을 파견하여 이들이 세우게 했습니다.
이분은 신라말~고려초의 고승으로 법호는 탄문(坦文)입니다.
비문의 내용은 탄문의 일대기이며 900년(신라 효공왕 4)에 출생하여 15세에 계(戒)를 받고 968년(고려 광종 19)에 왕사(王師), 974년(광종 25)에 국사(國師)로 지내다가 이곳 보원사에 와서 975년(광종 26)에 입적하였습니다.
역대 왕들과 가까웠으며 국가 시행 불사를 도맡아 시행하였고, 특히 광종은 왕권강화 작업기간 이후 정신적인 지주로서 왕사, 국사로 가까이 있게 했으며 입적하자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이분은 학승으로 제자가 많아 말년에 보원사에 올 때 선(禪), 교승(敎僧) 천여명이 영접했으며 이곳을 「고산(故山)」이라 하고 여기에 와서 묻혔습니다.
귀부(龜趺) 앞면
부리부리한 눈매에 뿔이 달려있고 코에는 수염이 날리고 입에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습니다.
이수(螭首)
이수(螭首)라고 부르는 옥개석(屋蓋石)을 얹었습니다.
비머리의 가운데에는 편액처럼 면을 다듬어서 부도비의 주인 이름을 새기는 제액(題額)을 만들고 네 모서리에는 용을 조각하고 운룡문(雲龍紋)을 새겼습니다.
귀부 뒷면
비신 받침은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을 새기고 네모난 비석 받침구멍을 파서 비좌(碑座)를 올렸습니다.
거북 등의 중앙에는 등뼈 모습을 새겼고 꼬리는 한바퀴 감아 돌렸습니다.
귀부 측면
옆에서 보면 거북의 몸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모습을 하고 목을 곧추 세우고 앞발은 땅을 힘차게 밟고 있습니다.
보원사지는 까마득한 옛날에 거대한 사찰이었던 축구장 2배 가량의 넓이에 백제 시대의 보원사(普願寺) 절터로 10 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지(寺址)입니다. 거기에 당시의 화려했던 불교 유적이 모습이 석물과 그 잔해인 사찰 지붕의 개와, 탑의 파편들의 석재도 그렇지만 보물로 지정된 석물들이 완벽하게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보원사
철조여래좌상
2014년 새롭게 조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