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24
ㅡ 백제건국과 소서노 1ㅡ
'소서노'!
바로 앞 편에서 '소서노'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성이라 표현했다.
남편 '주몽'이 고구려 건국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고,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백제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대하드라마 '주몽'에서 나오는 이야이기 이다.
물론 역사기록에도 '소서노' 중요한 역할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서에는 소서노에 관한 기록이 너무 작다. 그리고 정확히 하나로 적혀져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서 마다 '소서노'나 '비류' '온조'에 대한 기록 내용이 다르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삼국 건국시조의 시조모들 중에서 유일하게 신으로 추존되지 않고 인간으로 남은 사람이 '소서노'이다.
즉 백제시조인 '비류'나 '온조'가 '주몽'이나 '박혁거세' '김수로왕'처럼 알에서 태어나지 않고 '소서노' 라는 여성에게서 태어났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서노 아들이었던 비류 온조가 삼국시대 건국자 중 유일하게 난생설화가 없다보니 소서노도 신격화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백제시조인 '비류'나 '온조'만 '난생설화'처럼 신화가 없는 것일까?
여러가지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요인이 있겠지만 백제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들이 건국하고, 부여를 계승한다고 했다. 아버지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 했는데 본인들도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서노'라는 어머니가 너무 분명하게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는 상황에서 그런 설화를 만들어 내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공식 국정역사서로 인정받고 있는 '삼국사기'에도 '백제본기' 편을 보면 백제건국과 더불어 백제건국과 '소서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소서노'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소서노에 대한 기록이 그나마 가장 자세한 것은 '백제 본기'에 "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一云]으로 인용되는 묘한 문서이다.
내용이 조금 길지만 참고하라고 삼국사기 원문 그대로 옯겨본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했다.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했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했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건너편 고을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봤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했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18년) 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했다.
후에 내려 올 때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一云)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라 했고, 둘째는 온조라 했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했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했다.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ㅡ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ㅡ
윗 기록으로 보았을 때 삼국사기가 기록될 고려시대 중엽에는 백제초기에 상당히 의견이 다른 두 종류 문헌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본문과 일운으로 시작되는 이 두 기록은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보인다.
ㅡ 비류, 온조 형제의 혈통
본문: 비류와 온조가 모두 주몽의 아들이다.
일운: 비류와 온조가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아들이며, 주몽은 양아버지일 뿐이다.
ㅡ 백제의 시조
본문: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일운: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이다
ㅡ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
본문: 도읍을 정하는 데 이들의 발언이 기록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운: 남하를 주도하는 것은 비류로 되어 있으며, 10명의 신하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ㅡ 소서노
본문: 소서노의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온조의 어머니는 단순히 졸본부여 왕의 딸로, 그로부터 추모로 왕위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만 하고, 심지어 남하할 때 동행했는지 조차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일운: 소서노가 자신의 재산을 이용해 주몽이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고 하여 중요한 소임을 맡은 인물임을 강조한다. 이뿐만 아니라 형제가 어머니인 소서노를 모시고 남하했다고 적시한다.
ㅡ 형제의 남하 시점
본문: 아직 추모가 왕이고, 유류가 태자가 되자 스스로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운: 추모가 죽고 유류가 왕위를 계승하자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전자의 문헌은 온조와 10명의 신하가 맡은 소임을 강조하며, 후자의 문헌은 비류와 소서노가 맡은 소임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보았을 때 '본문'보다 '일운'의 내용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역사적 사실에 가깝게 보인다.
'비류' '온조'가 주몽 친아들이 아닌 양아들이었다는 것이 더 정설에 가깝게도 추정된다.
그 이유는 글이 너무 길어지니 다음 편에 이어서 정리하겠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