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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확충된 ‘속죄’에 관한 책은 대결을 재촉함
Ⅰ. 위기를 초래함에 있어서 Joseph H. Waggoner’s 역할
1. 탈선의 두 기본적 분야
우리는 이제 두 강력한 인격 중에 두번째 사람에게로 돌려보자. Joseph H. Waggoner와 Uriah Smith는 모두 전략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리하여 저들의 책을 매개로 하여 공개적으로 저들의 견해를 강조했다. 모두 저들의 견해-둘 다 비슷함- 삼위일체에 관한 우리의 견해에 위반되는 파생된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을 단지 비인격적 감화력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역설했다. 이들은 수세기간 낡은 과거의 Arian의 견해, 최근에 형성된 Christian Connection에 의하여 부활된 견해를 옮기는 자들이었다. Uriah Smith도 Joseh Waggoner도 모두 자기 견해를 Christian Connection에서 취한 것 같지는 않다.
두 사람 다 속죄를 십자가의 사건과 분리시키는 속죄에 대한 협소한 견해를 강조했다. 이 사상은 어떤 다른 종교 단체에서 습득한 것이 아니요. 우리 교회의 발전 단계의 성소 진리의 관점에 대한 어떤 초기의 제한된 견해와 참람된 고집이 자라난 것이다. 그 줄기를 찾아 올라가면 최초로 O. R. L. Crosier에 이른다. 그것은 초기의 미완성 단계의 견해요 더 연구해서 교정할 수 있다.
2. 추후의 큰 비난이 될 근거
이 탈선의 두 기본 분야- 신성과 속죄- 이 둘이 합하여 큰 투쟁의 결합이 되었다. 비 재림 교인 학자들(크리스챤)이 사실은 단지 개인적인 견해를 나타낸 이 책들의 내용에 접하게 될 때 큰 모면하기 어려운 오해로 인도하는 근거가 되었다. 얼마 안되어 거기 제시된 견해들은 우리가 실제로 적그리스적인 단체라는 그 후에 널리 퍼진 비난의 근거가 되었다.- 이 칭호(적그리스도교단)는 소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십자가에서의 완전한 속죄행위를 부인하는 종교 단체에 근본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이다. 저들은 모든 재림교도들은 그렇게 주장한다고 자연적으로 주장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뚜렷이 예언의 신은 그렇지 않았고 도리어 그 반대였다.
3. 1888년과 그 이후의 대결
성서적인 진리와 비 성서적인 오류가 이 견해에 관하여 처음 대결이 있기까지는 여하한 견해의 일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1888년에 Minneapolis 대총회에서 E. J. Waggoner의 발표를 통해서 공개적으로 시작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상 중에 어떤 것은 근본적 견해 차이로서 그렇게 많이 공개토론의 대상의 영역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Minneapolis에서의 주안점이었으며 나눌 수 없는 쌍둥이로서 속죄 문제가 주안점이었다. 그러나 조금 후에 논하겠지만 그 후에는-1894년과 그 이후에 지도적인 중심지인 Battle Creek 교회에서 시작하여- 후자(속죄문제)가 전자(칭의)보다 더 많은 논쟁이 되었다.
Ⅱ. Joseph H. Waggoner의 호전적 견해가 위기를 촉진함
1. 편집자, 저자, 전도자인 와그너
J. H. Waggoner(1820-1889)는 Dr. Ellet J. Waggoner의 아버지인데 그와 혼돈하지 않아야 한다. Joseph Waggoner-전도자, 편집자, 저자 이전에 침례교(Baptist)-는 중서 지방 출신이다. 그가 1852년에 재림 신앙을 받을 당시는 Wisconsin에 있는 신문사 편집자요 출판사업가였다. 백절불존의 독서가요 효과적인 연설가요 훌륭한 문필가로서 그는 Wisconsin에 전도자로서 먼저 개척자가 되었다. Review사가 Rochester에서 Battle Creek으로 옮겼을 때 출판위원이었으며 보조 편집자로서 재임했다.
그는 1857년에 시작하여 세 작은 책- 율법, 강신술, 닥쳐올 오류(Age to come falbcy)을 썼다. 이것은 전술한 Waggoner가 일찌기 개종시킨 Stephenson의 변절후였다. Waggoner는 1860년에 우리의 합법적인 교회 조직 형성을 위하여 택함 받은 위원이었다. 그는 또한 S.D.A라는 본 교회 이름을 제외한 3명 중 하나였다. - 이 명칭은 1863년에 새로 조직된 교회에 채택되었다.
2. 확대한 ‘속죄’ 서적은 위기를 촉진다
Waggoner는 1868년에 Iowa에서 열린 첫번째 S.D.A Camp meeting에서 설교자 중 하나였고 여러 Camp meeting에서 기마의 용병 역할로 봉사했다. 그는 또한 1868년에 ‘속죄’라는 논문을 출판했고 1872년(168page)에 재판을 냈다. 이 책은 Battle Creek에 있는 우리 출판소의 ‘증기 인쇄기’로 인쇄한 것이다. -그 당시 Uriah Smith가 그 Review사의 편집자이었으며 그는 Waggoner에게 그의 사상을 거기에 수록하도록 위임했다. 1877년에 Waggoner는 같은 그릇된 사상을 반복하는 ‘하나님의 신’(144 page)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1881년에 Joseph Waggoner는 태평양 연안의 우리 교회 시조의 편집자가 되었다(James White 후임). 그리고 1885년에는 ‘미국 파수군’이라는 잡지도 편집했다. 그 다음 James White이 죽은 지 3년 후인 1884년에 Waggoner는 그의 저작 ‘속죄’를 보충한 형태(368 page)로 재판했는데 이 책에 분명하게 수록된 Arian적 반 삼위일체론적인 견해에 대하여 성장하는 반동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그 위에 속죄를 십자가의 행위와 분리된다고 선포한 것이 첨가되었다. 이 책은 그가 그 당시 편집자로서 일하고 있는 태평양 인쇄소에서 출판되었다. 1886년에 Waggoner는 우리 사업의 확장을 협조하도록 유렵에 보냄 받았다. 그는 그가 죽은 직후인 1889년에 ‘에덴에서 에덴까지’라는 책을 썼다(쓰고 죽었다). 결과적으로 1888년의 결정적 Minneapolice 대총회에 참석지 않았다. 거기에서 그의 아들(Dr. E. J. Waggoner)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그의 강력한 묘사의 기초로서 ‘신성의 모든 충만함’인 그리스도의 근본 진리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Ⅲ. Joseph Waggoner의 협소한 그리스도와 제한된 속제관
1. 종속절 중에 유일한 하나님
그의 ‘속죄’라는 책에서 ‘J. H.’는 그의 십자가와 분리된 속죄관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그의 Arian 견해를 공격적으로 제시했다. ‘대신’으로(p. 73) ‘대리자로서’(p. 77)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리스도의 양성-인간과 신성(p. 86)을 인정하고 취급한 후 Waggoner는 그리스도의 선재하는 신용성을 말하고(p. 86) 그러나 아들이란 점을 강조했다. 그 다음에 이 주요한 ‘종속적’ 아들이란 말이 있다.
위에 인용한 첫 부분에서(요 1:1-3) 말씀은 하나님이요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다. 그것은 참으로 자존한다는 증거는 없다. 말씀을 하나님(God)라는 것은 The God은 아니요 그분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한 하나님 밖에 없는 고로 그 구절은 말씀(그리스도)는 종속적(하위의) 의미로 했음이 틀림없다(J. H. Waggoner, The Atonement, 1872, pp. 87, 88).
여기에서(히 1:8-9) 하나님이란 칭호를 아들에게 적용한다. 그리고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이것은 그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칭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아버지에게 적용함에 대한 종속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는 것이 확실하다(상동, p. 88).
2. 그리스도-제한된 의미에서만 하나님
이것은 우리 앞에 제시된 Waggoner의 견해에 핵심이다. 그 다음에 성령의 힘(p. 89) 아들의 높임과 영원하신 아버지(p. 98)에 대하여 말한 후에 4장은 속죄에 관한 파괴적인 삼위일체 교리(p. 97)라고 했다.(제목을) 거기에서 삼위일체론 자들에 관하여 Waggoner는 날카롭게 말한다. 저들은 저들의 근거로서 교리를 들고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제 이위(사람, 인격)이므로 죽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상동, p. 100). 그러한 논리를 부인하고 Waggoner는 다시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에 대하여 하위의(종속적) 하나님의 칭호를 갖는다(p. 101). 그 다음 그는 확언하기를 “그러므로 그 칭호(God)는 종속적이며 제한된 의미에서 그(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그 무제한의 우주적 의미에서 그것은(God 칭호)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이신 최고의 존재에게만 적용 된다.”(상동, p. 102).
3.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속죄가 아니다
Waggoner는 또한 속죄는 제사장이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 한정된 의미에서는 그것(속죄)는 대속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닌 것처럼(p. 110) 그 다음에 보언하기를 이로 볼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속죄 사이에는 명백한 구분이 있음이 나타난다(p. 110). 모든 경우에서 제사장이 속죄를 했다(p. 110). 한 수 Waggoner가 단언하기를 “여기에서 희생제물을 죽이는 것과 속죄를 하는 것은 분명하고 분리된 행위임이 명백하다”(p. 111). Waggoner는 한층 더 노력하며 부언하기를- “여기에서 속죄는 성소에서 행해졌다는 것이 좀더 확실해 진다. 이것은 희생을 죽이는 것은 속죄가 아니요 다만 그것을 준비하는 것임이 가장 명백히 증거 된다”
4. 지상에 계실 때는 제사장이 아니다
Waggoner가 부언하기를 ‘우리 주님의 제사장 직분은 지상에서 시작되었다는 흔히 주장하는 잘못은 고쳐야 할 것이다(p. 115). Waggoner는 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속죄를 혼돈함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는 재 확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은 명백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은 것은 그것은 속죄를 위한 단지 준비이며 그 속죄에는 그 적용이 죄를 완전히 제거(옮기는 것)하는 피를 적용함으로 되는 것이다(상동, p. 117).
제물의 죽음과 속죄를 혼돈함의 혼란과 오류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Waggoner는 그것은 화목을 위해서 길을 여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제사장적인 속죄사업을 내다본다고 주장한다(p. 119).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실제적인 죄에서 아무것도 없애지 못한다고 말하면서(p. 120) 희생은 속죄를 이루는 수단이라는 그의 말로서 그의 논리를 지지한다(p. 122).
5. 속죄는 제사장의 마지막 사업이다
그 다음 Waggoner가 선언하기를- 속죄는 그의 재림 직전에 이루시는 우리 대제사장의 마지막 사업이다(상동, p. 123). 속죄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이루셨으며(p. 134)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속죄를 이룬다는 사상을 한 순간이라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상동, p. 135). 이상은 1868년에 처음 표현하고 지금 보충한 옹졸한 그리스도관, 제한된 속죄관-의 J. H. Waggoner의 선포된 개인적 견해였다.
6. 성령을 다만 ‘능력’으로 주장함
5년 후인 1877년에 Waggoner는 그의 저서 144 page The Spiriti if God(하나님의신)에 성령의 본성을 취급한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신의 인격성의 사상을 도전하고(p. 8)- 그 점에 관한 널리 퍼진 대중의 불일치를 논하고- 주로 Arian에 물든 계급을 묘사했지만(p. 9) 그 다음에 Waggoner는 정의를 내리고 확증하기를 “하나님의 신은 우주의 보좌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두렵고 신비한 권능이다. 그리고 그것은 창조사업과 구속사업에 효과적인 행위를 한다(The Spirit of God, 1877, p. 9)
능력이란 구절을 반복하고(p. 9) 성령을 항상 그것이라고 말하고-7 page에 5번, 13 page에 2번, 기타-Waggoner는 성령을 ‘이 능력’(p. 17)라고 부르고 God의 권능이라고 부른다(p. 20). 그리고 140과 141p에 2번 더 기록했다. Waggoner는 이같이 성령의 인격을 완전히 부인했다.
Ⅳ. Waggoner의 중보한 ‘속죄’(1884)는 분열에 박차를 가하다(Accentwates)
1. White의 억제하는 영향이 그의 죽음으로 없어짐
James White이 살이 있는 동안에 이 두 분야- 신성과 속죄- 에서 공격적인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완화시키는 영향을 끼쳤다. White도(목사), Christian Conection파에서 나왔을지라도 그는 저들이 일반적으로 취한 Arian적인 그리스도관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속죄를 십자가와 분리시키는 Crosier의 견해를 개인적으로 강조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의 견해를 관용했다.
Waggoner는 얼마 안되어 개칭, 중보한 그의 속죄-두배 크기 이상 되는 368 pages-를 출간했다. 이때 그것(책)은 그가 Signs(시조)지의 편집인으로 봉직하고 있는 Oakland에 있는 태평양 출판소에서 합법적으로 출판되었다. 시조 1868년과 1872년의 그의 제시에다 보증하고 강화한 이 새로운 개정판은 Smith가 편집하고 있는 Review사에서 출판했다. 00 저들의 유명한 출판소들과의 뛰어난 관련은 출판 사업에 있어서 주동 역할을 하였다. 지면으로의 난으로 종전의 인용의 단지 강조된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1884년 증보판에서의 Waggoner의 지침이 되는 사실만을 인용한다.
2. 하위의 제한된 의미에서의 하나님
아직도 그의 아버지보다 하위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칭호를 그리스도는 갖는다고 선포하였으며 Waggoner는 관련된 말로 기록해 나간다. “그러므로 그 칭호(하나님보다 하위의 그리고 제한된 의미에서 그에게 적용된다. 그 무제한의 우주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이신 최상의 분에게만 적용 된다.”(The Atonement 1884, pp. 169, 170). “성경은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해서 풍성히 가르친다. 그리고 그의 신성을 그러나 성경은 삼위일체에 관해서는 완전히 침묵한다.”(상동 p. 173, 174)
3.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이 아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은 아들이 아니요 아버지라고 단순한 한 문장에 4번 말하면서 Waggoner는 확증하기를 “우리의 삼위일체의 교리는 이 유능한(비 재림교도) 저자들 편에 있는 이 오류들의 기초 위에 놓여 있다(p. 177)”. 그 다음에 강조하기를 “물론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존재를 모든 점에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p. 178)”. 다른 논쟁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은 일(p. 181)- Waggoner는 의미 있는 답변을 했다; “저들은 동일하지 않다. 희생의 죽음 없이 속죄가 있을 수 없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속죄 없이 희생의 죽음은 있을 수 있다(상동 p. 181)”.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은 참으로 대신 죽음이다. 그러나 속죄는 그의 제사장의 사업이다”(상동). 여기에 간결한 차별의 선포가 있다. “예수의 죽으심과 속죄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p. 182). “희생제물을 죽이는 것과 속죄를 이루는 것은 구별되며 별개의 행위이다”(p. 183). “속죄는 성소에서 이루어지나 희생제물은 성소 내에서 죽이지 않는다”(p. 187). 우리 주님의 제사장 직분이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매우 자주 행해지는 잘못으로서 이 잘못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p. 188).
그의 그릇된 사상을 더 이상 말로써 명백히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4. 죽음은 다만 “준비”로 속죄는 “제사장의 일”이다
Waggoner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다만 준비에 불과하다는 이론에서 결코 빗나가지 않는다: -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확실히 한 말이지만 그것은 단지 속죄를 위한 준비이며 죄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하여 그 피를 적용하는 것은 속죄에 포함된 것이다”(상동 p. 181). - 마지막으로 “부록 A”에 그의 이 논리를 재강조하는 요약을 발견한다. 예수의 죽으심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도 구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능하게 만든다. 속죄는 항상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서 행하는 제사장의 일로서 예표 되어 있는데 성경을 읽는 자들이 한 순간이라도 죽음은 속죄를 이룬다는 사상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상동 p. 335).
이와 같은 이론들은 1884년의 - 그 최초로 1868년에 말한 후 16년 후요 미니아폴리스 전 4년 전 - 죠셉 Waggoner의 불변의 견해였다. 이 견해에서 그는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견해의 독단은 그의 친아들 - Dr. E. J. Waggoner 편에서의 결정적인 반작용을 빚어냈다. 그런 말들은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반역적인 견해에 대한 대결은 와야만 했고 또 왔던 것이다.
Ⅴ. Waggoner와 Smith의 마지막 견해
1. 예수는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드리심
우리 선구자들의 견해는 구약 성서에서 대부분 발견되는 속죄라는 낱말은 보통으로 지상 성소에서의 제사장의 봉사에 관해서 사용된다는 사실에 주로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속죄라는 말을 제사장의 봉사에 제한해야 하고 희생의 피를 흘리는 것은 속죄 전에 단순히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사업은 희생제물로서 자신을 드리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위하여 당신이 흘리신 피를 적용하는 것 둘다 포함되어 있다. 예수는 제사장으로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서 자신을 드리셨다. 그리고 또한 제사장으로서 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당신이 흘리신 피를 드리신다. 이리하여 그의 제사장의 봉사는 두 국면이 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의 피를 흘리신 것은 그의 속죄 사업에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초기의 오해에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은 1895년에 엘렌 지 화잇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거기에 이 논제의 기초적 주제가 함께 포함되었다.
“이것들은 우리의 주제이다 -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못박히시고 부활하셨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다: 그리고 이것들과 밀접히 연결된 것은 성령의 직무이다(Letter 83, 1895. EV187).
2. 균형진 견해를 유지함
그러나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속죄에 관한 저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구자들 중에 아무도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긴요하다는 것을 일찍이 부인한 적이 없으며. 그것 없이도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균형진 견해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는 십자가에서 그의 죽으심과 같이 구원의 계획에 긴요하다.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부활 후에 하늘에서 완전히 이루기 위하여 그가 승천하여 그 사업을 시작하셨다”(JC 489).
우리 선구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이 그의 죽으심과 그의 제사장의 봉사가 모두 포함되고 피차 하나가 없이는 충분치 못하는 것을 명백히 보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새로운 균형진 제시 가운데도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신 견고하게 붙드는 손을 가지셨다.
Ⅵ. James White - 완화시키는 영향력을 끼쳤다
1. White과 Bate 두 분 다 완화시킴
그러면 이 논쟁에 대한 James White의 관계는 어떠한가? 보아온 바와 같이 우리 교회의 기초를 이룬 조상들 중에 지도적으로 가장 존경을 받는 두 분 제임스 화잇과 조셉 베이츠는 Christian Connection에서 안수 받은 목사로서 밀러 운동에 가담했다. 와그너응 배경이 다르지만 Arian의 견해를 완강히 주장했다. Christian Connection에서는 보편적으로 주장하지 않는 건전한 성서적 견해인 조건적 불멸성을 가르치고 있었다. 동시에 유감스럽게도 그릇된 견해인 그리스도에 관한 Arian의 견해를 주장했다. 00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선재와 완전한 신성을 듣는 자들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로 다르게 일반적으로 부인했다. 인격성-신적인 제 삼위-역시 부인했다. 이것들이 유감스런 특성(그 교파) 중에 몇가지이다. 그러나 Christian Connection 중에서 어떤 이들은 Arianism을 주장하는 한편 어떤 이들은 반Arian적인 태도로써 완화시켰다. 화잇과 베이츠는 이 완화된 무리에 속했다. 베이츠에 관한 말 중에도 거의 없고 그 외 특별한 관심은 예언의 신에 관한 성서적 진리에 확신을 세우는 것이 있고 그것을 시험하는 진리들 혹은 구조적 교리들과 함께 나타내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2. 삼위일체를 삼신론으로 확실히 혼동함
어떤 이는 제임스 화잇이 최초로 인쇄한 날 중에서 한 말에 대해서 당황했다. - 1845. 1. 8에 쓴 Day Star의 편집자 Cincinnati의 Enoch Jacobs에게 보내는 편지 - “화잇은 그가 유형적 인격자로 받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등 영적으로 해석하는 성서적인 삼신론적 신조를 사용하여(trinitarian=삼위일체)유일하신 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다. 저들이 한 구절로도 이것을 지지하지 않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며, 우리는 그분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백한 성서적 증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The Day-Star, Jan. 21. 1846. p. 1).
이 1845년인 최초의 말은 Crosier가 Day-Star지에 성소에 관한 빛을 먼저 출판하기 1년 전에 White목사가 쓴 것이었다. 그것을 말한 그가 개인적으로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한 때보다 1년 전의 일이었다. 더욱이 그것은 1848년의 안식일 회의가 있기 3년 전이었다. “시험하는 진리”들은 아직 일절 보지 못했었다. 그러므로 1846년의 제임스 회잇의 말은 이해 할만 하다. 그리스도의 본성을 1848년 회의의 주제 중에 들지 않았다.
더욱이 화잇이 말한 사람들. 1845년에 기록한 자들은 안식일 재림교도들에 대한 말이 아니다. 그 초기의 말은 독립한 “제 1일 재림교잡지에 나타났다. 우리는 그런 말들의 연대적인 시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고, 그 후에 발전된 부당한 논쟁과 문맥을 그 속에서 읽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아들과 사도들의 한 말은 아버지의 계명에 의하여 한 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옛날 삼위일체론자의 모순인 예수 그리스도는 곧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처럼 진리에서 먼 것이다”(Aug. 5, 1852. p. 52). 그것은 확실히 그 후에 완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 변화는 시간이 걸렸다.
3. 1887년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이라고 주장함
1877년에는 화잇은 아들을 아버지와 동등으로 믿는 것을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Uriah Smith가 편집인으로 있는 동안에 Review의 난에 그와 비슷한 편집자로서 일했다는 것을 주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과 동등인 그리스도”라는 제목 하에 쓰면서 화잇 그는 참으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버지보다 낮추는(낮은 위치로, 하위로 만드는) 교회 내외의 어떤 견해도 오류라고 정리했다”(J. W. R&H, Nov. 29, 1887. p. 172). 화잇은 이와 관련해서 요령 있게 묻기를 “하나님께서 낮은 자에게 우리가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했겠는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 편집(기사)는 Uriah Smith가 1865-67년에 그리스도를 “피조된” 존재요 그의 생명은 결과적으로 파생된 생명이라고 주장한 후에 10년 후에 출판된 사실이다. 그것은 역시 Joseph H. Waggoner가 1868년에 Christ는 아버지에게 “종속”되었다고 주장한 후 9년 뒤라는 것이다. 화잇 목사는 이와 같이 이 점에 관한 기록으로서 반대하는 영향을 가진 것이다. 확실히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Arian적인 종속적 관념을 주장하고 발표한 자들의 불행한 표현을 상쇄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것이 그 당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00또한 주목할 것은 이 편집자란을 쓴 때는(1887년) 화잇 목사가 대총회장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무게가 있었고 그 문제에 결론을 (그 목적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내릴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왜 그를 완화시키는(상쇄하는)영향을 끼친 분이라고 말했는가 하는 이유이다.
4. 우리의 서적들에 다른 견해가 나타났다
더 적은 점에 대하여 견해차이가 있었던 것과 꼭 같이 그 당시에 그리스도의 본성과 특성들에 관하여 우리 진영에서 두가지 견해가 성행하고 있었다. 화잇이 스미스와 다르게 공중 앞에서 강조했던 것이 포함되었다. 00 그런 솔직한 표현이 그 시대의 특징이었고 발전 도상의 진리를 위한 계속적 탐구를 나타내었다. 그것은 온전하고 효과적으로 그 당시에 실천되고 인정된 관습을 인식하게 한다. 저들은 진리는 연구를 위하여 제시된다면 이길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지도적인 정기 간행물에 나타난 그런 견해차이들이 우리를 놀라게 할지라도 그것이 유익이 있었다. 그러나 그 공개 토론회적 사상은 그 초기 수십년간에 이루어진 독특한 부분이었고 신앙에 있어서의 구극적 일치로 인도했다.
5. 진리는 점진적으로 공개됨
그 전 해인 1876년 10월 12일자 Review지에 화잇 목사가 기록한 제목이 있었는데 루터 교인들이 루터이상 전진 못했고, Calvinist가 칼빈에서 그리고 Wesley 교인들도 Wesley에서 그친 것에 관하여 유감을 표시했다. 진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첨단을 향하여 증가되어가도록 되어있다. - 기독교 시대의 두 끝이 함께 만나는 것처럼 쉽게 표현된다고 논했다. 00 차이점이 될만한 좋은 이유가 없을 때 다른 이들과 견해를 달리 하는 것은 잘 보이라고 주장하면서, 화잇 목사는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키는 작은 일들이 그리스도 품성에 시험이 되어서는 않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의 말로 견론을 지었다.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에는 그리스도인 품성의 시험들이 있다. 19세기 동안에 안식일 준수자 외 교회 정부 형태, 편의주의 문제, 자유주의 구원, 제한된 (택한 자)구원, 삼위 일체되지 않는 다른 문제들 때문에 작은 종파들을 만드는 자 등을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계명에 엄격하기 따르고 그리스도의 품성의 유일의 참 시험이 되는 예수의 믿음에 엄격히 일치하는 것 때문에 우리를 그런 류에 포함시키고 종교적 두려움의 대상으로 표시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R&H. 10, 12, 1876. p. 116). 이것은 빛을 주는 말이며 많은 것을 해명한다.
6. 신성과 삼위일체는 시험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두 단체들 제 칠일 침례교와 제 칠일 침례교에 관한 편집자란에서 화잇은 이 중대한 말을 했다. “이 두 단체의 주요한 차이점은 불멸성 문제이다. S.D.A.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삼위일체론 자들과 매우 가깝게 주장한다. 이것은 시험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S.D.A.와 S.D.B.는 그러한 품성의 시험이 되지 않응 교리들에 관하여 논쟁할 수 없다”(상동 p. 116, Col 2)
이 말은 화잇이 개인적으로 삼위일체론에 관하여 그는 그것은 분란 시키는 시험으로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 확실하다. 그것이 화잇의 성숙한 태도와 관계가 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1888년의 대결의 7년 전에 죽었다는 것이다.
7. 가치가 재정이 되고 시험이 재고되다
화잇의 견해는 실제로 1888년 미네아 폴리스 집회전에 일반적인 태도였다. 비교적 소수만이 삼위일체론을 대한하는 개인적인 견해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견해를 선동하고 강조했다. 와그너가 이 중에 한 사람이었고 호전적으로 그렇게 했다. 00 바로 이 태도는 그 옹호한 자들에게 중대한 태도를 끼쳤다. 미네아 폴리스 회기 동안과 그 이후에 신성의 모든 충만함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혹은 주저하고 거절하게 했다.
가치관이 재정립되고 시험하는 진리들이 재고되어야 했다. 첫째 것들이 첫 자리에 와야 했다. 이 일이 이때에 이루어졌다. 비록 유감스럽게도 그 충분한 성취를 위해 긴 기간이 요했지만...
Ⅶ. Stone - 그리스도는 비존재에서 존재하게 되었다
1. 피조물이 아니요 창조주임
생략하지 못할 말은 1883년에 C. W. Stone이 쓴 85쪽의 책에 관한 것인데 이 책은 그가 죽은 후에 1886년에 Uriah Smith에 의해서 편집되었다.
다른 도움이 될만한 인쇄된 설교, 제2장(Who is Christ) 우리의 구원의 대장에서 “먼 과거”(p. 12) - “창조전 시대”(p. 15) - 그 자신(살아 계신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없을 때에 대해서 말한다(p. 15). Stone은 그리스도 자신이 피조된 존재임을 옳게 부인하고 그리스도도 모든 창조물의 효과적인 원인이라고 말한다.(p. 16).
2.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에서 발생했다
그 다음에 Stone은 그리스도의 근원(p. 17)에 대해서 돌아가서 그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우리에게 알리지 않는다. 결론은 피할 수 없이 보이는데 Stone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근원 혹은 시작이 있는 고로 그리고 “존재케 된 어떤 점이 있는 고로 확실히 그가 인격적 존재로서 계시지 않을 이런 시대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물론 그 당시에 스미스가 그같이 주장했던 Arian의 견해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형태로 존재케 되었다. 그는 우리가 알 필요가 없는 방법으로 마버지의 존재로부터 발생했다.
Stone은 다시 창조전 시대에 대해서 언급된다. 그 때 모두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아버지와 아들 두 존재에 계시다(p. 19, 40)- 오직 두 분만 계셨다. - 그 다음선지자들에게 영감을 주신분(p. 72)이라고 옳게 표현한다. 이 뒷부분은 모두 옳고 잘 말했다.
3. 세가지 탈선한 점들
①그러나 탈선한 점이 세곳이 남아 있다. Stone이 주장하기를 그리스도는 근원이 있다. 그가 처음 존재된 때가 있다. 또는 나타난 때가 있었다. 즉 아버지의 존재에서 나왔다는 것. 먼 과거에 온 우주에 “오직 두분만 계셨다고 반복해서 강조함으로서 Stone은 신성의 삼위이신 성령을 제외해 버렸다.
“하늘 Trio의 필수 인원이신 성령님을 제외함(엘렌 화잇은 그 후에 이 점에 관해서 인상적으로 말씀한 바와 같이)”(p. 180).
그의 스승 스미스와 같이 스톤은 삼위일체, 즉 성령의 인격을 믿지 않았다. 누구나 왜 스미스가 상식을 벗어난 종교 사상의 조류를 회복시키려고 애쓴 스톤의 노력을 칭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 71)
4. 조셉 와그너의 견해와는 달랐다
스톤은 여러 차례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등하다고 명백히 말했다(p. 7, 11, 32, 33, 40). 이 점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동등이 아니요 하위의 하나님이라고 끈질기게 주장한 조셉 와그너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러므로 다른 견해들을 주장하고 출판하고 그대로 1888년에 이르렀다. 그리고 항상 혁신자들은 집주 광선(무대)을 가졌다. 스톤의 제시는 조셉 와그너가 1884년에 중보한 반삼위일체 책을 출판하기 직전에 기록되었다. 스톤의 논리는 1888년의 신속한 발전이 있기 2년전인 1886에 출판되었다. 1888년에는 비록 구두로 해석하고 선동했지만 그것은 시간적은 빛을 제공한다.
VIII. 초기의 시험하는 진리들은 그리스도에게 중심이 되지 않는다
1. 그 즉시의 강조에 의하여 동기가 됨
시대적인 배경으로 돌이켜 보면 밀러 운동의 각 종파 사이에서 나온, 복합체에서 나온 우리의 기초를 놓은 조상들이 1000년기 전의 재림과 심판의 임박함을 거의 독단적으로 강조하고 1844년 10월 2일의 신속한 접근에 고정된 열열한 기대를 가졌던 조상들이 임박한 주요 관심사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말미암아 동기가 형성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그런 절박한 상황 하에서 저들이 신성, 그리스도의 신성, 성령의 인격 둥 여러 가지 견해를 주장하던 관련된 문제들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시간이 중요했고 저들은 주님을 곧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임박한 관심사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였다. 실망 직전에 다른 일을 대부분 망각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달리는 있을 수 없었다. -- 10월 22일 실망 이후의 우리 교회 조상들은 비슷했다. 저들의 기본적인 관심사가 전에 알지 못했던 세째 천사의 기별의 구조내에 공개된 명백한 진리들을 파악하는 것보다 대 실망의 원인과 본질을 이해 할 때에 더 컸다는 것은 별로 이상한 것이 없다. 저들은 저들의 길을 의식하면서 한 별개의 운동을 형성하기 위하여 출발하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그것이 저들의 모든 관심을 흡수하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2. 시험하는 진리들은 처음에는 그리스도 위에 놓여지지 않았다
다른 모든 종교 단체로부터 저들을 구별하는 이 시험하는 진리들은 처음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다른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거나 중심이 되지 않았던 것은 역시 거의 이상하지 않다. - 가장 높은 피조물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함까지 쭉 나열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 위에 중심이 될 수 없었다. 이 새로 발견한 교리들 - 안식일, 성소, 예언의 신, 조건적 불멸성, 예언의 새로운 양상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 등은 그런 상황하에서는 아직 그리스도에게 모두 필수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치 못했다. 결과적으로 저들은 가가 사람이 연관된 교리들이지만 대부분 독립적으로 주장했다.
아직은 그리스도의 초월적 본성과 심성이 명백히 이해되지 못했다. - 그리고 그의 뛰어난 위치는 열열한 성경 연구, 공중 제시, 예언의 신의 확증을 통해서 확립되었다. - 아직은 이 교리들과 그리스도의 관련성이 확립되고 강조되지 못했다.
3. 그리스도 중심의 호소는 1888년 이 후에 왔다
모든 교리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으라는 예언의 신의 반복적인 호소는 특히 1888년 전후해서 그리스도의 명백한 신성을 강조하기 시작함으로써 명료케 되기까지는 눈에 띄지 못했다. 이 탁월함이 확립된 후에 엘렌 화잇의 펜을 통해서 그런 호소가 논리적, 연속적으로 계속되었다. 거기에는 확실한 이유와 관련성이 있었다.
그 전에는 무엇 때문에 가능하지도 기대하지도 못했는가를 나을 것이 이제 긴급히 요청된다. 우리가 그의 최상의 높은 지위를 참으로 이해하지 않는 한 그리고 뛰어난 사람들이 파생된 존재라서 하위의 위치로 그에 대해서 아직 지위를 떨어뜨리고 있는 동안 모든 교리에 그리스도를 높이는데 맨 앞장에 서라고 부름 받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1888년 대총회의 장면과 그 예배 집회로 돌아왔다.
Ⅷ. 1888년 회기의 배경을 이룬 상황
1. 승리한 전투는 자아 만족에 빠지게 한다
우리 교회사에 첫 40년간은 우리 목사들이 끊임없이 저들 주위의 개신 교회들의 편견, 오류, 공격에 대항해서 싸워야 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견 운동은 전진했다. 그러나 논쟁적 접근은 우세했다. 우리의 논쟁적 제시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다른 이들이 재림교도들을 논쟁적 접근은 우세했다. 우리의 논쟁적 제시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다른 이들이 재림교도들을 논쟁으로 이기기는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서 우리 중에는 위험한 안전감과 우리의 방법과 교리적 견해에 대한 자아 만족이 자라났다.
많은 이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한 추상적 교리로 받아들이고 지적으로 승인하게 되는 것으로 그러나 그것을 산 경험으로 알지 못하면 그 영혼에게 기쁨과 평화와 능력과 구원을 가져오지 못하는데 경험보다 지식으로 알았다.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형식 주의와 율법주의 빠져 버렸다. 저들은 교리 주의자들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1870년대와 80년대는 라오디게아 주의로써 영감에 의해서 상술된 뜨뜨미지근한 정신으로 특징되었다. 시험하는 진리들 - 구별된 교리들 - 은 굳게 확립되어 있지만, 영적 가뭄, 영적 능력 없이 신앙 고백만이 있었다. 엘렌 화잇도 깜짝 놀라서 Emope에서 이에 대하여 기록했다. 다른 이들은 미국에서 또한 깊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2. 염려는 금식과 기도로 인도함
우리 서적은 그 환경을 충실히 반영한다. 우리는 대부분 00적으로 보다 신학적 교리적으로 되었다. 안식일, 인간의 00, 다른 주요한 과제에 대한 변론이 증가되었다. 이 독특한 교리들이 변호하기 쉽고 자만과 자기도취가 증가 되었다. 도전들이 자주 행해졌다. 많은 사람들은 변론적 방법과 정신이 발전하였고 이것은 냉정하고 공박하는 태도를 증가시켰다. 성령의 매력적인 힘은 심히 부족했다. 성장하는 반동과 함께 이것을 인식하는 자의 수효가 증가했다. -수년전인 1882년에 대총회 행정 위원회은 12월 1-3일을 헌신하지 않은 상태와 영적 능력의 결정을 인식하고 금식과 기도로 정했다(R&H 11, 21, 1882). 미네아 폴리스 대총회는 수년 후에 왔다. 그 간에 염려는 깊어 갔다.
Ⅸ. 1883년에 으뜸되는 강조점을 엘렌 화잇이 고치다
가장 의미심장한 강조됨을 고친 전조가 미네아 폴리스 5년전인 1883년에 엘렌 화잇에 의하여 예고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1976년으로 돌아가서 인간의 타락된 야기에서 시작하여 그의 회복이 19”×24”의 화폭에 비유적으로 그려서 묘사되었다.
1. 1876년의 특색은 하나님의 율법이 뛰어남
고대 희생 제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심을 예표 한다. 중앙 우편에 있고 십자가의 긴 그림자요 지적하고 있다. 그 제단이 에덴에서 인간이 쫓겨나는 쪽에 구약시대 편에 있다. 그 다음 신약 시대가 시작되어 구약과 신약을 갈라놓는 점으로 묘사되었다. 맨 오른 쪽에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곳에 새 예루살렘 - 잃었다가 결국 회복된 낙원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그 그림에는 제임스 화잇이 쓴 그림 설명을 적은 책이 수반되었다. (이것은 일찍이 M. G. Kellogg이 그런 그림에 기초되었으며1850년 안교 교과에 먼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익숙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제임스 화잇의 그림에 현저한 특징은 그 그림 중앙에 거대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의 두 큰 가지에 매달린 율법의 두 판 -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그것이 시선을 점령하여 그 밖의 모든 것은 위축되어 버렸다. 그것이 전체를 점령하여 십자가 위를 덮어 버려서 십자가도 실제로 제 2차적이니 것이 되었다. 그것은 물어 볼 것도 없이 1870년대 중엽에 강조점을 상징했고 그 당시 우리의 서적의 강조에 반영되었다. 복음은 묘사되었으나, 그것은 율법을 뛰어나게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빛을 잃었다. 그것이 제임스 화잇이 판권을 가진 그림이었다. 그 표준은 1876년을 강조한다(1876, 12, 13 R&H에 있는 제임스 화잇이 쓴 주의를 주목하라. p. 192) 배포되기 위하여 25,000부가 인쇄되었다.
2. 강조점을 “생명의 길 그리스도”로 변경시킴
엘렌 화잇은 제임스 화잇이 그리고 강조한 생명의 길과 율법의 그림을 보고 확실히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임스 화잇이 죽은지 2년 후이며, 1888년 미네아 폴리스 대총회가 있기 5년전인 1883년에 화잇부인은 그 그림과 제목을 고쳤다. 후자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생명의 길이 되신 그리스도라고 변경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개괄은 비슷하지만 아름다운 화도로 새긴 그 그림은 이 혁명적인 변화 - 율법에 뛰어난 강조를 나타낸 거대한 나무를 생략함 - 그대신 왼쪽 배경에 시내산이 있고 폭풍의 검은 구름과 번개가 있다. 율법은 거기에 있고, 그것은 복음의 배경에 불과했다. -- 하나님의 속죄의 희생을 지닌 거대한 십자가가 이제는 중심에 있다. 그것이 모든 것을 덮어 버린다. 에덴에서부터 모든 것은 이 중추적인 십자가를 가리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부터 모든 것을 새 예루살렘까지(생생하게 묘사된 새 예루살렘은 십자가에서 솟아난다. 그 상징적 개년은 기본적으로 같다. 그러나 이것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1883년 엘렌 화잇이 묘사한 그림에서 뛰어난 특성이 된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중앙이요, 중추요, 지배적이다. 모든 구속은 그로부터 나왔고 그에게 중심이 된다. 아무것도 그리스도안에서 인격화 된 복음의 탁월함에서 피하게 할 수 없다. 그응 생명의 길이다. 그리고 언급한 바와 같이 24”×32” 제목과 석반으로 인쇄된 그림 - 1883년에 엘렌 화잇부인에 의하여 인쇄된 - 은 “CHRIST The Way of Life”라고 제목을 붙혔다. 거기에는 분명히 남은 교회에 보낸 사자가 이 유별난 행동을 할 필요가 있고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었다(1884, 6, 5. p. 350 Signs of the Times).
3. 강조점을 바꾼 것이 1883년에 출판됨
이 화도로 새긴 그림은 그 그림의 모든 부분을 설명한 48쪽과 “열쇠”라는 소책자가 수반되었고, 화잇 부인이 붙인 제목이 있다. 이것은 곧 있게 될 운동에서 나타나고, 곧 강조하게 될 의미 있는 예조였다. 엘렌 화잇은 이렇게 선도를 취하여 와그너가 증보판 The Atonement(1884)을 출판하기 전에 냈다. “속죄”에는 속죄와 십자가를 분리시키고 신성의 제2위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령의 인격을 부인하고, 제3위이신 성령을 부인한 책 The Atonement가 나오기 1년 전에 기한을 잡았다.
엘렌 화잇의 행위는 우리 교회사에 전환점이 된 중 후적 대총회에서 Ellet J. Waggoner의 발표하에 1888년에 나타날 구체화한 복음의 강조의 지시자요 개척자요 현저한 모본이 되었다.
4. 그 운동에 대한 예언의 신의 유별난 관계 - 여기서 명백한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와그너 부류의 강조, 음성의 반형자, 추종자, 흉내 내는 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길을 보여주는 자요 복음과 율법을 올바른 관계에 두고 올바로 강조하는 개척자요 강조점을 바꾼 영감 받은 분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재림 운동에 대한 예언의 신의 무비의 관련성을 보여 주는 지도와 때와 더 좋은 강조의 가장 인상적인 모본 중의 하나이다. 엘렌 화잇은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고 미네아 폴리스 이전에 세째 천사의 기별에 그리스도를 그의 올바른 중심적 위치에 세워야 한 시점을 담대히 제시 했고 좀 후인 1888년에 있을 신성의 보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안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성서적 강조를 위하여 길을 예비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인도하는 손을 본다. 남을 교회에 보내는 주님의 특별한 사자를 인도하신 영적 인도를 본다. 그것은 분명한 전환점이었다. 전에 더 그같은 일은 없었고 그 후에도 아무것도 그와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새로운 시대를 연다. 그 최초의 투쟁 이후에는 마음을 살핌과 부흥의 시기가 뒤딸았다. 이것을 초래한 것은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었다. - 폭풍의 시기에 강조한 사실상의 00가 된 표현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우리 역사 중에서 과거 어느 때 보다도 이제 까지 상상도 선포도 하지 않은 만큼 충분히 그 총회 전에 높혀 졌다. 그것은 모든 것의 요점이었다. 그러므로 1888년은 그 당시에도 그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의미심장한 새 시대요, 새로운 표의 시작이었다. -1888년은 패배의 시점이 아니었고 궁극의 승리로 향한 조수로의 전환이었다. 그것은 투쟁과 역류도 있었지만 정화와 전진의 수십년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올 운동의 큰 절정을 위한 준비로서 기본 신조의 일치된 지점으로 결론지었다. 영원한 진리들이 올바른 위치로 오고 있었다. 어떤 이들의 끈질긴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확실히 인도하고 계시다. 그것이 1888년의 더 깊은 의미이다. 우리는 이제 그 놀라운 이야기를 위해 준비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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