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문학]<특집>서지월시인 화재현장에서 찾아낸 미당 자료
생전에 미당은 서지월시인을 두고 ‘아들 보다 낫다’고 했다 한다. 이는 아들들이 모두 미국에 있어 문안을 잘 들지 못하기에 대구에 살고 있는 서지월시인이 자주 찾아뵙는 것 뿐만 아니라 신문이나 책에 나온 미당관련 출판물을 그때 그때 챙겨 가서 보여드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서지월시인이 미당을 처음 만난 것은 등단한지 7년째인 37세때, 서울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우리선생님시집 출판기념회>에서였다. 송수권 나태주 이성선시집 출판기념회가 전옥란씨가 경영하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거기 미당이 축사를 하려 오셔서 첫 대면하고 인사를 나누었던 것이다. 이때 미당이 서지월시인에게 나이를 물었는데 '서른 일곱 살'이라 했더니 미당은 '아니, 스물 일곱이구먼!'이라 했다 한다. 이때 서지월시인이 '앞으로 선생님댁 찾아 뵈어도 되겠습니까?' 하니, '그럼, 오고말고...'라 하셨다 한다.
그후로 해마다 미당 생신인 음력 4월 18일은 빼먹지 않고 서울 남현동 예술인마을 봉산산방을 찾아 미당선생님을 뵙는 건 물론 미당 관련 행사에 놓치지 않고 참여했던 것이다.
1996년에는 대구에서 미당 서정주선생님을 초청해 동아백화점에서 문학강연을 열었는데 대구문단사상 초유의 대성황을 이룬 기록도 세웠다 한다. 이때 미당은 달성서씨 종가인 구암서원도 찾았는데 미당은 서지월시인에게 ‘나도 본이 달성이야, 그러니 달성서씨이지. 윗대가 전북 고창에서 살아서 그렇지 본은 대구 달성이야. 나는 조선조 서거정어른 형님 후손이고 서군 자네는 서거정어른 후손일걸세’라 하셨는가 하면 ‘진시왕 때 명을 받고 불로초를 캐러 오신 서불이라는 어른이 바로 서씨 조상인 ’서불‘이라는 사람이야’ 등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한다.
어느 해 겨울에는 감홍시를 따들고 서울 미당댁으로 가지고 갔는데 그걸 두 달 후엔가 한국일보 시단에 <홍시>라는 제목으로 시를 발표하셨는데 바로 까막까치가 파먹은 홍시를 발견하고서 미당이 썼던 것이다.
대구의 시인 서지월(徐芝月)이가
"자셔 보이소" 하며
저희 집에서 딴 감을 가져왔기에
보니 거기엔
山까치가
그 부리로 쪼아먹은
흔적이 있는 것도 보여서
나는 그걸 골라 먹으며
이런 논아 먹음이
너무나 좋아
웃어 자치고 있었다.
ㅡ시 ‘서지월이의 홍시’ 전문.
미당의 마지막 시집이 되는 <80소년 떠돌이의 시>(시와시학사)에는 더 구체적으로 <서지월이의 홍시>로 제목을 바꾸어 수록했는데 「시 '서지월이의 홍시' 를 보면 제자 시인 서지월씨가 보낸 홍시를 고맙고 맛있게 먹는 풍경이 우선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러나 그대로 읽어버리면 안될, 그 어느 종교. 사상도 풀 수 없는 우주관이 들어있다. 산까치와 내가 함께 '논아먹음'이 나누어 먹음으로써 까치는 내가 되고 나는 다시 홍시가 되어 '웃어자칠 수' 있는 삼라만상의 조응. 그 세계에는 나와 대상, 순간과 영원, 삶과 죽음의 구분이 없다. 이렇듯 미당의 시에서는 모든 것들은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무엇 무엇으로 되어간다. 그러면서 영생을 누리는 우주적 생명이 된다.」고 중앙일보 문화부 이경철기자가 중앙일보 신문지상에 게재한 한 바 있는데, 나중에 중앙일보 이경철기자가 서지월시인에게 미당이 시집에서 직접 이름까지 넣어 제목을 달아 내놓은 것은 그만큼한 특별한 애정을 각인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한 미당은 1994년에 태어난 서지월시인 아들 이름을 ‘대원(大源)’이라 지어주었는데 유명한 점술가는 노무현 같은 건 안 되어도 그 다음 자리하는 건 된다고 했다 한다. 이는 미당이 추사 김정희가 백파율사께 준 법호를 가진 불제자 중 석전 박한영스님 같이 당대 최고의 불교계 인물이 났다고 했던 것과 다름 아닌지.
서지월시인은 일간신문에 서정주시인에 대해 기사가 나온 신문을 모두 챙겨 서울 미당댁을 갈 때마다 챙겨 드렸는다 미당은 서지월시인을 보고 '아들보다 낫다'고 했다 한다. 한번은 미당댁을 가기로 미리 날짜를 약속해 놓고 모친이 세상을 떠 가질 못해 통보를 했는데 미당이 화선지에다 <사경(四更)>라는 육필시를 써서 인편으로 건냈는가 하면, 어느 해는 '내가 시 하나 붓으로 써 주지' 하시며 한국 현대시사 최고의 시로 평가받고 있는 시 <동천(冬天)> 을 직접 하사받기도 했다 한다.
그때 문학사상사에서 이어령교수가 펴낸 미당 회갑기념 육필시선도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절판이 된『서정주육필시선(徐廷柱肉筆詩選)』을 서지월시인이 미당의 허락을 받아 1996년 재발간 하기도 했는데, 그후 연도는 분명하지 않으나 하얀 일반 편지봉투에 미당 서정주시인의 '봉산산방원고지'라 인쇄된 원고지에 <새해의 우리집>이라는 미당 친필원고가 나왔는데 서지월시인은 거기 끼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한다고 말했다.
이 뿐만 아니라, 미당은 서지월시인에게 첫시집인 <화사집> 영인본 속지에 붓으로 시 <동천> 구절을 써서 건냈는가 하면, 누군가 중국 다녀와서 선물로 미당께 드린 청동으로 제작된 ‘청룡알과 주작알’ 이 한 쌍으로 들어있는 상자를 꺼내 미당이 서지월시인과 대구시인학교에서 온 이은림 정이랑 이채운 최별희 이별리 임해 등 회원들이 보는 앞에서 흔들어 보이기도 하며, ‘에라 이거 자네가 가져. 하나는 내가 마누라 하고 가지고 놀고...’ 하셨다 한다.
◆서지월시인 화재현장에서 찾아낸 미당 자료
서지월시인 거처가 지난 해 9월 7일(추석 전날) 오후 3시쯤 화재로 48년간 문학해 온 방대한 서적 신문 사진 비디오 도자기 미술품 등이 30분만에 전소되었는데 다행히 미당 육필시 <동천(冬天)>과 <사경(四更>, <남풍(南風)>,『서정주육필시선(徐廷柱肉筆詩選)』, 『화사집(花蛇集)』, <새해의 우리집> 등이 발견된 것이다. 비닐 파일에 넣어 여러 자료들 속에 끼어있던 원고지에 쓴 육필시 <새해의 우리집>이 발견된 것이다.
<남풍(南風)>은
새해의 우리집
미당
지난해의 홍시들
새해에도 아직 매달려 있고
지난 해의 까치들
아직도 그 홍시 에워싸고 돌고
이걸 지켜보는 관악산
깔깔거리는 바위웃음소리도
아직도 청청히 울리어 오고.....
**국선문학회가 박재삼시인위원장으로 해 발족이 되었는데(동아일보 기사) 당시 미당이 국선문학회에서 문예지를 발간하면 써먹으라고 <남풍(南風)>이러고 직접 붓글씨로 써서 준 것을 서지월시인이 보관해 왔는데 그 사본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서지월시인은 미당 사후 지금까지 한번 빠지지 않고 전북 고창 선운리 질마재 미당묘제를 참석했는데 지난 해 미당 14주기 추모제 추모사에서 공개한 것이 처음이라 한다. 미당묘제에 안빠지고 참여하는 트링ㅎ가 바로 서지월시인과 동국대 윤재웅교수, 이경철 전 중앙일보 기자. 여기 한 사람 더 보탠다면 전옥란작이다.
지난 해 미당시문학관에서 열린 미당 14주기 추모사에서 서지월시인은 미당이 원고지에 직접 볼펜으로 쓴 육필시 <새해에는 우리집>원본과 아직 찾지 못한 한국 현대시사 최고의 시로 평가받고 있는 시 <동천(冬天)> 사본을 공개했다. 미당이 이백의 시 <아미산월가>를 직접 암송하며 어린 시절 서당에서 배웠다며 해설까지 붙여 들려준 육성녹음테입도 공개했다.이 모두 서지월시인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로 평소 미당과의 거리낌 없는 사이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미당은 평소 서지월시인에게 '나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지만 대구가 본향이야, 대구 달성서가야, 나는 서거정형님의 후손이며 자넨 서거정선생의 후손일거야' 라고 말씀 하셨다 한다.
◆미당이 서지월시인에게 한 말
노벨문학상 후보 두번짼가 세번짼가 후보에 오르고 발표 나기 한 달 전 찾아뵈었는데 부억식타게서 미당이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 가운데 신라시대까지 최고의 시인은 고운 최치원,고려시대에는 이규보, 조선시대에는 서거정, 근대 이후는 '자신이라 했으며 이번 노벨문학상은 자신의 시를 번역한 사람들이 더러 관여되어 있는 걸로 보아 받게될 거라 전망까지도 햐셨다.
공초 오상순은 여러날 담배와 술에 빠져있었는데 하도 가지를 않아 귀찮기도 해서 차비를 줘 가라 했더니 간다고 나간 사람이 다시 돌아왔다는 일화와 1942년 명월관에서 미당이 첫시집 <화사집>출판기념회를 한다고 하얀 비단 와이샤스를 맞추어 입고 명월관에서 문인들 일곱여덟 명이 축배를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용악이 나타나더니 미당 앞으로 와서는 면도칼로 와이샤스를 찢었는데 알고 보니 연락이 닿질 않았는데 자신을 빼고 출판축하회를 해 섭섭했더 모양이라고 미당은 술회했다. 그 후로 길거리에서 이용악 들 좌파시인 동료를 만났는데도 모른 척하고 지나갔는데 그들이 다 북으로 넘어간 월북시인이었다고 미당은 술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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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박재삼선생님께서 써주신 <아득하면 되리라>는 마침 삼천포에서 박재삼문학관이 개관되는 시점이라 바로 기증을 해 지금도 걸려있으나 미당의 동천 등은 칼라로 원본 그대로 인쇄해 놓고 미당시문학관에 기증한다는게 차일피일하다가 그만ㅡㅡㅡㅡㅡㅡㅡ
화재 이후 안그래도 미당이 꿈에 나타났는데, 선생님께서 써 주신 <동천(冬天)>등이 소실되었다 하니까 담담해 하시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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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시산방 남서재에서,서지월시인(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