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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영상
김 광 욱
1
내가 ××경찰서 강력계에 발령받고 근무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신참 형사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서울역 건너편의 허름한 여관에 투숙하고 있었다. 오층 건물인데 인근 빌딩 공사장에서 밤과 낮으로 중장비 진동음이 귀따갑게 들려오고 여기저기에 공사 자재가 널려 있었다. 내가 다니는 골목길에도 철근들이 쌓여 있어 승용차가 자유롭게 통행할 수 없었다. 골목 입구 한쪽에 승용차를 세워 놓고 이백 미터쯤 여관까지 비탈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내가 그 여관에 묵는 이유는 여관비가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직장도 가까운 편이었다. 그 여관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머잖아 철거될 건물이었다. 부근엔 그런 여관들이 많았다. 내가 묵는 여관 주인은 삼층을 세내어 운영하는 아주머니였는데, 남편은 없는 것 같았고 대학과 고교에 다니는 두 자녀와 한쪽 방에서 생활했다. 아주머니는 내 옷도 빨아 주고 먹을 것도 나누어 먹는 등 친절했다. 나는 아주머니가 이사갈 때까지 그 여관에서 묵을 생각이었다.
나의 출근과 퇴근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내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사건이 배당되었다. 한 사건을 처리하기도 전에 다른 사건이 중복되어 떠맡겨졌다. 대부분의 강력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채 캐비넷에 쌓여 있다가 미제 사건으로 묻혀 버리곤 했다. 그것은 다른 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과장은 고약한 사람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란 표현이 딱 알맞게 부하들을 달달 볶고 화가 나면 형사에게 입에 못 담을 폭언을 하고 주먹질을 했다. 뺨을 때리는 게 아니고 주먹질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용케도 과장에게 잘 보였는지 그의 주먹을 피해 갔다. 과장이 형사들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사건 처리 실적이 부진하기 때문이었다. 형사들이 무능한 책임을 과장이 뒤집어쓰기 때문에 서장이 과장을 문책하면 과장은 그 몇 배, 몇 십 배로 불려서 부하들에게 앙갚음을 했다.
나와 같은 부서에 있는 조 선배는 나더러 운 좋은 놈이라고 놀렸다. 과장에게 얻어맞아서 부은 뒤통수를 보여 주며 나에게 얻어맞지 않는 비결을 좀 가르쳐 달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조 선배는 고교 때 공부를 꽤 잘 했던 문학 선배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의 꿈은 경찰관이 아니었지만 가정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못하고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가 경찰관이 되었다.
우리 집 형편도 조 선배와 대동소이했다. 조 선배와 다른 점은 내가 아직 미혼이란 점과, 소설가가 된답시고 취업도 하지 않은 채 소설에만 몰두했다는 점이 달랐다. 문학으로 출세한다는 건 무지개 잡기였다. 내가 경찰관이 된 것은 부모형제들에게 미안해서 더 이상 백수로 놀고 먹을 수 없어서였다. 이런 내게 무슨 경찰관의 긍지가 있고 자부심이 있겠는가. 직업은 하나의 호구지책일 뿐이었다. 나는 소설가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그 꿈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경찰관이 되어 국가의 녹을 먹고, 내게 맡겨진 끔찍한 사건들과 억울하게 피해 입은 사람들, 그 비극의 현장을 보고 소설 쓸 마음이 달아났다. 문학은 신선놀음이고 삶의 현장이 아니었다. 문학보다 긴급한 문제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그 문제들을 내가 해결해야 했다.
나의 힘과 조력을 바라는 사람들. 그 수많은 얼굴들이 숲처럼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한 소설 쓸 시간이 있다고 해도 나는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다. 그리고 차분히 앉아 명상하고 소설을 끄적거릴 시간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숨가쁜 시간의 톱니바퀴 속에서 바쁘게 흘러갔다. 나는 내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소설가의 꿈에서는 멀어졌지만 하나의 사건을 해결했을 때,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 주고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느끼는 보람은 그 어느 것과도 비할 수 없었다. 약자들은 나의 그 노력을 바라고 있었다. 한 사건에 매달려 최선을 다하려고 해도 인간이기 때문에 느끼는 능력의 한계를 어쩔 수 없었다.
형사가 사건을 처리하는 능력보다도 나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그 사건 수보다 적은 우리 형사들의 힘으론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사건도 그 많은 사건들 속의 극히 미세한 한 부분일 뿐이란 걸 나는 알고 있다.
2
인간에겐 잠깐씩 뇌리를 스쳐가는 영감이란 게 있었다. 영감과 현실이 일치할 때도 있다. 이 직업에 매달리다 보면 어떤 증거나 단서보다도 영감에 좌우될 때가 많다. 영감은 추측이란 형태로 나타난다. 형사가 매우 조심해야 할 일로서, 짐작만 갖고 범인을 잡으려고 해서는 안 되며 내가 말하는 영감과 짐작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형사 콜롬보처럼 영감 작용이 빠른 사람은 추리력이 뛰어난 유능한 형사가 될 수도 있다.
내게도 영감의 효험이 있는지, 어떤 사건을 단서 없이 추리로 해결한 적이 있었다. 물증이나 제보자가 없으면 그 사건은 오로지 형사의 두뇌로 풀어야 한다. 범인은 어느 곳엔가 분명히 있고 억울한 피해자와 가족들은 그 범인을 체포해 주기를 바란다. 범인과 피해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형사. 그때 어떤 사람의 한마디, 하찮은 물건 하나, 때로는 꿈 같은 게 그 범인을 잡을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목사의 설교가 간절하면 주의 은총이 내리듯이(그런 기적이 있듯이), 천인공노할 범인을 붙잡으려고 간절히 기도하는 형사를 하늘이 도와 주는 수가 있다. 나는 그것을 영감의 작용이라고 믿는다. 아니면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도움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연일 큼직큼직한 사건이 터져서 야근과 잠복근무하는 날이 많았다. 한 달 중 여관에 돌아오는 날은 몇 일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여관이었다. 나의 보금자리가 아닌 남의 집, 남의 방. 파김치가 된 몸으로 싸늘한 여관방에 돌아오면 나를 반겨 주는 것은 퀴퀴한 냄새와 곰팡이 슨 천장의 쥐똥 오줌. 나는 옷도 벗지 않고 잠에 곯아떨어져 다음날까지 잠만 잤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핸드폰이 울려서 잠에서 깨면 밥상에 더운밥과 국이 놓여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내가 안쓰러워서 차려 놓은 밥상이었다. 여관에 있는 날은 가까운 식당에서 밥을 사 먹지만 여관 여주인이 밥상을 차려 갖다 주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여주인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밥값을 후하게 계산해 주었다. 그러면 여주인은 미안해서 다음에 또 밥상을 차려 왔다. 잠든 나를 직접 깨우지 않고 핸드폰으로 전화해시 깨워 주곤 했다.
지금 전화는 여주인의 전화가 아니고 동료 형사한테서 온 전화였다. 사건이 터졌으니 빨리 출근하라는 것. 나는 국과 밥을 말아 급히 몇 숟갈 퍼넣고 외출복을 걸쳐 입었다. 나는 잠도 마음놓고 푹 잘 수 없었다. 수면은 인간의 모든 권리 중에서 가장 고귀한 권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범인을 신문할 때 밥보다도 잠을 못 자게 하는 게 범인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경찰관은 그점을 이용하여 철야 신문을 한다. 나도 잠을 자지 않고 범인과 똑같이 그 고통과 싸우면서.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는 고통. 사건 하나 변변히 처리 못하는 고통. 피해자에 대한 미안감. 나는 양치질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비탈길에 세워 둔 내 승용차로 달려갔다.
야적된 철근에 걸려 넘어지면서 달려가면 승용차는 그 자리에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세차를 하지 않아서 승용차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내게는 고마운 승용차였다. 이 승용차로 범인을 추격하고, 밖에서 잠복근무할 때는 승용차 안에서 먹고 자기도 하니 나에겐 소중한 친구요 재산이다. 그 승용차를 몰고 건축 자재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다른 차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3
비탈길 양쪽에 넓은 공터가 생겨서 한쪽엔 공사 자재가 쌓여 있고 한쪽은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차들이 골목을 가로막고 멋대로 늘어서 있었다. 나는 투덜거리면서 간신히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차창밖으로 내다보니 자재더미에 가려져 여관의 꼭대기만 보였다. 한때는 성황을 누렸겠지만 지금은 철거될 운명에 놓인 여관들. 그래도 그 속에 뜨겁게 살을 섞는 연인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외롭게도 혼자 몸이다.
승용차를 타고 운전을 하면 나 혼자가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차 안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바로 내 옆에, 안전벨트를 매고 얌전히 앉아 있는 여자. 그 얼굴은 낯설었지만 친근하게 느껴지는 곱상한 얼굴이었다. 스물 서너 살 먹었을까, 어찌 보면 그보다 더 먹었을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기침을 킁킁하고 돌아보면 여자는 없고 안전벨트만 의자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오래되어 고장난 안전벨트였다.
여자는 없었다. 착각이었다. 승용차 안에는 나 혼자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영상은 너무 뚜렷해서 초상화를 그릴 수 있다면 선명히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긴 파마머리와 짙은 속눈썹, 종이처럼 창백한 얼굴. 하얗다 못해 파리해서 그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면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입술의 빨간 루지가 창백함을 더해 주었다. 턱의 조그만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싸늘한 안색인데도 여자의 몸에서는 열기가 풍겼다. 그 열기는 내 몸을 감싸고 생기를 불러 일으켜 주었다. 피로가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얼굴은 내가 정면을 주시하고 운전에 열중할 때, 실물처럼 뚜렷이 나타났다. 그 순간은 착각이란 생각이 들지 않고 한 인간과 함께 있는 느낌이었다. 그 얼굴은 승용차 안에서뿐만이 아니고 언젠가부터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니며 내 옆에 붙어 있었다.
내가 차도로 나와서 교차로에서 금방 바뀐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려고 할 때 여자의 목소리가 쩌렁 귓전을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운전석의 잡동사니 물건들이 굴러떨어지고 내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핸들에 가슴을 세게 부딪쳐 숨이 멎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짐 실은 용달차 한 대가 과속으로 내 앞을 휙 지나갔다. 그 차도 신호위반이었다.
내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무얼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 여자가 나를 구해 준 것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들을 수 없었다. 목소리 없는 여자. 나는 그렇게 그 여자를 명명했다. 목소리만 없고 형체와 냄새는 선명하게 기억되었다.
내가 일찍이 초상화를 배우지 못한 게 한이었다. 아마 어디에서 그 여자와 똑같은 얼굴을 만난다면 바로 당신이야 하고 소리칠 것이다. 그 여자는 실물이 아니지만 이 서울 어디엔가 그 얼굴과 똑같은 여자가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여자를 만날 날을 기다렸다. 그 여자가 나를 따라다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나서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나는 그 영상을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조 선배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내가 그 영상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있는 줄 알면 조 선배는 나를 정신병자라고 놀릴 것이다. 나는 그 영상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그 여자가 왜 그렇게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떤 때는 노이로제 환자처럼 소리를 버럭 지르기도 했다. 동료들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일에 방해가 되는 그 영상에 차츰 혐오를 느끼고 그 환각을 제거하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정신과병원에 가 볼까 생각했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병자란 걸 스스로 인정하기 싫어서 병원에 가는 걸 자꾸 미루었다.
(나를 살려 준 여자다. 아마 무슨 좋은 일이 있겠지.)
나는 여자에 대한 불길한 잡념을 떨쳐 버리고 선의로 해석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미혼이니까 좋은 신부감이 생기려고 그러는지 모른다. 그 여자 같은 얼굴이라면 결혼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좋은 징조인 거야. 운전석 밑에 떨어진 담배와 라이터를 주워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니 우울증이 해소되었다. 그러나 걱정의 찌꺼기가 마음 한쪽에 남아 있었다.
4
다음날.
경찰서 현관 앞에서 햇볕을 쪼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조 선배를 만났다. 조 선배는 나를 보더니 반색했다. 조 선배는 내가 쉴 틈도 없이 비중 큰 사건을 맡게 된 걸 걱정했다. 비중 큰 사건이란 언론에 크게 보도된 연쇄강간살인 같은 사건들. 그런 사건은 베테랑 형사들이 맡지만 형사가 부족하니까 나 같은 신참에게 배당되었다.
과장은 고참 신참 가릴 것 없이 두세 명씩 묶어서 임무를 부여했다. 애숭이 여경이 끼는 경우도 있고 단 혼자만 맡는 경우도 있었다. 두 명이 두 사건을 동시에 처리할 때는 두 곳으로 나누어 수사를 해야 하니까 사실상 혼자나 마찬가지였다. 몸이 서너 개라도 감당 못한단 말이 걸맞는 표현이었다. 선배와 나는 같은 조가 아니지만 전화로 자주 통화했다.
조 선배는 신참때를 벗었다고 해도 아직 형사 초년병이었다. 그는 어떤 사건에서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내게 의견을 묻곤 했다. 그것은 고교 시절에 함께 문학을 꿈꾸었던 동지 의식의 발로였을 게다. 서로 푸념을 늘어놓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주 하찮은 것에서 단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조 선배는 내 영감을 믿는다고 했다. 우리 외할머니가 무당 출신이어서 내가 그 피를 물려받았다나.
형사가 무당을 찾는 건 옷을 벗냐 입느냐 하는 사면초가에 빠질 때였다. 그럴 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초능력자를 찾아가서 점을 보았다. 조 선배와 내가 그랬다. 조 선배는 점을 좋아했다. 점괘대로 범인이 잡혀서가 아니라 답답하니까 그런 거라도 봐서 마음의 위로를 삼았다.
“또 터졌나?”
“네.”
나는 힘없이 대답하며 그가 내뿜는 담배연기를 들여마셨다. 조 선배는 담배를 빼어 내게 주고 라이터불을 붙여 주었다. 점심때여서 조 선배와 내게는 공적인 휴식 시간이었다. 과장이 봐도 논다고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곧 파트너와 함께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야 한다. 나의 파트너는 고참 여경이었다.
“피해자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가 보기엔 같은 놈 소행일 것 같아. 오십대 부인만 골라서 돈을 빼앗고 능욕한 걸 보면. 능욕도 부족해서 살인까지 한다니까. 그 개 같은 새끼가……”
“나도 동일범일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차라리 다른 놈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놈 죄가 너무 커서 붙잡는다고 해도 사형 그 이상은 구형 못할 게 아니오?”
“그렇지. 목숨은 하나니까 두 명을 죽이나 세 명을 죽이나 범인이 형장에서 죽기밖에 더 하겠어? 사람을 죽인 숫쟈대로 천년만년 죽이고 또 죽이는 사형제도가 있었으면 좋겠어. 죽은 혼이라도 또 죽이게 말이야. 지능범은 증거를 안 남기니까 가 봤자 허탕칠 거다. 현장에 두 번 세 번 가지 말고 병원에 가서 피해자나 위로해 줘라. 그게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
“형사가 인간이에요?”
“인간 기계지. 이야기책에 나오는 화성인간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동물. 유능한 형사일수록 비정해야 얼른 승진한다더라. 너는 너무 정이 많아서 빨리 승진하긴 틀렸어. 내 말 섭섭히 생각하지 마라.”
“인정은 형님이 더 많지요. 단서를 찾으려면 최초에 사건이 난 곳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누구는 그 처참한 현장을 가고 싶어서 간답니까? 병원은 취미 없수다. 피해자가 범인 얼굴을 모르니. 그놈은 꼭 칠흑 같은 밤중에만 여자를 덮친다니까요. 어머니 같은 부인을.”
“그 새끼도 늙은 놈인지 모르잖아?”
조 선배와 나는 한참동안 말없이 담배연기만 내뿜었다.
“여관 여자 살해 사건은 무슨 진전 있소?”
“그 자식이 자백을 하지 않아. 물증이라곤 와이셔츠 단추 하나뿐인데 용의자 방을 다 찾아봐도 그런 단추가 달린 와이셔츠가 없단 말이야. 어디다 감췄는지 그걸 찾기만 하면 되는데.”
“이길호가 범인이란 증거는 그 여자의 애인이란 점 말고는 아무 것도 없잖아요?”
나는 내 코도 석 자이면서 길호가 안쓰러워서 슬쩍 범인의 편을 들었다. 조 선배는 내 말에 표정이 싹 달라지며 더 이상 나와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현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길호가 애인을 살해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 선배는 길호가 범인이라고 믿고 있었다. 애인이 살해되던 날 밤에 두 사람이 방에서 심하게 다퉜다는 여관 주인의 말을 믿고 길호가 살인범이라고 단정지었다.
나는 유미나란 그 애인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내가 맡은 사건도 아니고 남의 사건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가는 곳 어디에나 줄기차게 따라다니는 그 미모의 여자를 생각하고 나는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내가 당연히 풀어야 할 숙제를 풀지 않은 듯 그 무엇이 내 마음을 억눌렀다.
5
그 여자가 혹시 미나의 혼이 아닐까? 그것은 나만의 추측이다. 미나가 꼭 나에게 애원하는 것만 같다. 길호는 결백하고 범인은 다른 사람이라고 나를 그 범인 있는 곳으로 끌어당기는 듯하다. 길호는 얼마 전까지 길가에서 완구와 인형을 팔던 청년이었다. 여관에서 나와 식당으로 가는 길초에 전을 펴 놓고 춤추는 인형 흉내를 내며 행인들의 시선을 끌던 노점상이었다. 광대처럼 화장하고 각설이 흉내를 내던 그가 살인범이 되어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그 광대가 이길호란 이름을 가진 살인범이란 걸 알게 된 것은 경찰서에 끌려와서 조 선배의 취조를 받을 때였다. 나는 조 선배의 옆자리에 있어서 그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조 선배가 길호를 살인범이라고 믿고 있듯이, 내가 길호를 살인범이 아니라고 믿는 마음도 한결같았다.
살인범은 얼굴에 씌어 있다. 길호는 절대 애인을 죽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만약에 애인을 살해했다면 나의 눈이 잘못된 것이다. 인간을 보는 내 관점을 사그리 개조해야 한다. 선과 악의 차이도 없어진다. 나는 영원히 소설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호는 사랑하는 애인을 죽이고 시치미를 뗄 만큼 교활하거나 냉혈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피 말리는 취조를 받으며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그것은 취조가 고통스러워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가 소리없이 흘린 눈믈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길호가 소리없이 우는 모습을 눈여겨봤던 것이다. 그것은 연극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해 흘린 참회의 눈물이었다. 애인을 지켜 주지 못한 참회의 눈물. 애인의 죽음도 억울한데 살인범이란 누명은 길호를 더 고통스럽게 했다. 나는 그 누명을 벗겨 주고 싶었다. 허나 내가 맡은 사건이 아닌 걸 어쩐단 말인가?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내 추측이 빗나가서 길호가 정말 진범이라면 나는 길호를 용서할 것인가? 나는 그를 용서할 것 같았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애인을 죽인 사람은 길호가 아닌 또 하나의 길호. 인간의 죄를 넘어 그 범죄를 용서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을 길호라고 하고 싶었다. 그는 열심히 살았다. 추하지 않게 아름답게 살려고 노력한 성실한 젊은이었다.
형사가 범인을 용서핟나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안다. 나는 이유없이 길호를 도와 주고 싶은 것이다. 그 여자의 영상 때문이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 영상은 내가 여관에서 나올 때 일정한 장소에서 승차했다. 골목에서 내려와 큰길로 나가려면 골목 중간에 있는 ‘나리여관’ 앞을 지나가야 했다. 유미나가 살해된 곳이었다. 그 여관 앞을 지나갈 때면 나도 모르게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내 옆에 그 낯선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그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내 느낌이었다.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없으니 표정을 알 리 없지만 왠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진범은 다른 사람이라고. 나는 내가 담당한 사건에 묻혀 길호가 어떻게 취조를 받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조 선배는 범인을 취조할 때 구타하는 버릇이 있었다. 틀림없이 길호도 때렸을 것 같았다. 나는 조 선배 몰래 유치장으로 면회를 갔다. 아니나 다를까, 길호의 면상엔 군데군데 피멍이 들어 있고 몸뚱이에도 매질한 흔적이 있었다. 나는 길호의 몸을 들여다보고 눈물이 나왔다.
“정말 애인을 안 죽였나?”
내 물음에 길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날 밤 애인과 싸운 게 사실인가? 왜 싸웠지?”
“여관이 곧 뜯길 것 같으니 전세방을 하나 얻자고 미나가 졸라댔어요. 여관이 뜯긴다는 건 핑계이고 좋은 집에서 살림을 하고 싶었던 거지요. 미나는 내게 돈이 많이 있는 줄 알고 있었어요.”
“잘 벌었잖아? 오가는 길에 보니까 구경꾼도 많고 완구를 사는 사람도 제법 많던데.”
“미나한테 숨기고 있었지만, 그날 번 돈을 어머니 약값으로 모두 보내 드렸어요.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요. 금촌 시골에 사시거든요.”
“아들이 살인범이 된 줄 알고 더 아프시겠다. 미나한테 사실대로 말해 줬으면 좋았을 걸 그랬군. 자네가 돈이 없는 줄 알았다면 전세방을 얻자고 졸라대지 않았을 게 아닌가? 미나 씨가 살해됐을 때 자네는 어디에 있었지?”
“답답해서 바람 쏘이려고 남산공원에 올라갔습니다. 돌아와 보니 미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흑흑.”
“울지 말게. 자네는 지금 애인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이 없어. 살인범의 누명을 벗어야 애인의 무덤을 찾아갈 수도 있어. 나는 자네가 아이들에게 무료로 장난감을 선물하는 걸 여러 번 봤어.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살인을 못하는 법이야. 살인을 했다면 신고하지 않고 달아났겠지. 일반적으로 살인범들의 습성은 현장에서 도망치는 게 보통이거든. 자기가 뻔히 용의자인 줄 알 텐데 왜 경찰에 신고하겠어? 그래서 나는 자네를 도와 주고 싶은 거야. 내 일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억울한 사람이 누명 쓰게 해서는 안 되잖아?”
“감사합니다 형사님.”
“내일 또 오지. 밥 잘 먹고 힘내야 해. 절대 자포자기해선 안 돼.”
나는 길호를 위로해 주고 유치장에서 나왔다. 길호의 얼굴 어디에서도 살인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생긴 얼굴에 사슴 같은 눈빛이 나를 똑바로 바라볼 때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형사가 멍청해서 피해자를 오히려 가해자로 만들었구나. 빨리 너를 감옥에서 석방해 줘야겠다. 너는 지금 마음껏 울 자유도 없는 것이다.
나는 왜 그토록 길호를 믿고 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일까. 그 여자의 영상 때문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고 길호가 끝내 무거운 형벌을 받을 것 같아 걱정되었다. 한번 판결이 나면 그것을 번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하루 한 시간도 길호에겐 소중한 시간이다. 그는 돈을 벌어야 한다.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해야 하고 먹고 살아야 한다. 그의 자유와 행복을 빼앗을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그는 선량한 국민인 것이다.
6
나는 틈을 내어 길호와 그 애인이 묵었다는 ‘나리여관’으로 찾아갔다. 그 사건에 개입할 마음은 추호도 없고 혹시 길호를 도와 줄 수 있는 무슨 단서가 없을까 해서였다. ‘나리여관’은 내가 묵는 여관에서 삼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출퇴근할 때 그 여관 앞을 지나가므로 형사로서 그 사건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고 본다.
그들이 살았던 방은 여관 이층 안쪽 끝방이었다. 여관 주인 권 아무개 씨는 그 이층 여관의 주인이었다. 방안의 구조가 어찌 그리도 내 방의 구조와 똑같은지 몰랐다. 어른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것 같은 그 비좁은 방에서 두 연인은 사랑과 꿈을 불태웠다. 경찰의 조사가 진행 중이어서 방안의 물건과 이부자리가 사건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주인은 열쇠로 방문을 끌러 주면서 미나를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일 년 동안 이 방에 살면서 방세 한 번 밀린 적이 없었어요. 방세는 아가씨가 그 날짜에 꼭 지불했지요. 화장실과 세면장 청소를 그 아가씨가 다 해 주고 과자 한 봉지라도 사 오면 꼭 나눠 먹었어요. 말수없고 상냥한 아가씨였어요. 아가씨는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청년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여자를 무척 아꼈어요. 부엌일도 남자가 다 하고 옷도 남자가 빨고. 여자를 편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어요. 싸움이라곤 한 적이 없고 항상 방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어요. 사이좋은 젊은이들이었지요. 그런데 왜 그날 밤 싸웠는지 모르겠어요.”
“아가씨가 전세방을 얻자고 졸라대서 싸웠다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싸웠군요. 머잖아 이 여관이 뜯길 텐데 이보다 싼 방이 없을 거라고 걱정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살림하고 싶은 심정은 여자의 본성이죠. 그 젊은이들이 여관에서 사는 이유는 여관비가 싸고 살림 도구를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어요. 살림살이가 없어도 여관이라 흉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먹을 것 외에 세간도구를 산 적이 별로 없었어요. 세간살이라곤 저 텔레비전과 밥그릇과 비키니 옷장 하나예요. 참 완구들이 있구나.”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두 사람의 옷이 벽과 옷걸이에 그대로 걸려 있고 여자가 쓰던 화장품, 핸드백과 구두도 놓여 있었다. 남녀의 구두가 각각 세 켤레였다. 서로 약속하고 갯수를 맞춰 산 듯하다.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보니 그들의 체온이 내 손끝으로 전해 왔다. 방바닥은 얼음장처럼 찬데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연인이 살던 방이기 때문이었다.
잡지와 소설책도 몇 권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내 눈에 띄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란 제목이었다. 그 지루하고 재미 없는 책을 읽었다니. 아가씨가 읽었을까?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그들의 마음을 읽는 것 같았다. 책도 두 사람이 함께 봤으리라. 서로 읽어 주고 들으면서.
벽에 붙은 두 사람의 스넵사진을 보고 나는 그 영상이 하상이 아니란 걸 알았다. 여자의 턱에 붙은 작은 점이 그 영상과 일치했다. 피부가 유난히 하얀 아가씨였다. 눈부셔서 그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대단한 미인이었다.
(이 사진을 보게 하려고 아가씨의 혼이 나를 이 방으로 이끌었구나.)
나는 그 영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내 영감은 적중했다. 아가씨는 무슨 단서를 제공하려고 그토록 끈질기게 내게 달라붙었을까? 그들을 도와 줄 사람이 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다른 사건을 접고라도 그들을 도와 줘야 한다. 뜨거운 덩어리가 가슴 속에서 솟아올랐다. 방안에는 단서 될 만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조 선배가 말한 밤색 와이셔츠단추만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 와이셔츠는 어디로 갔을까?
길호가 범인이라면 이미 그 와이셔츠를 불태워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은 하기 싫었다. 나는 길호가 미나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는 끝까지 애인을 아끼고 사랑했을 것이다. 그 여자는 내게 그 말을 해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 내 귓가에 역력히 들린다. 그이는 죄가 없어요 라고.
7
여관 주인에게 내가 여기에 다녀갔단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고 부탁하려고 돌아보니 밖에 서 있는 줄 알았던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안방 쪽에서 주인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끝방에서 나와 복도 바깥쪽에 있는 안방 앞을 지나갔다. 주인이 술 취한 아들을 꾸짖고 있는 모습이 유리창 안으로 보였다. 시장에서 돌아온 아내가 아들을 너무 꾸짖지 마라고 남편을 말렸다.
아들은 아버지의 꾸중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 있다가 옆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상과 책꽂이가 보였다. 아들은 대학생이었다. 아버지 말에 고분고분한 걸로 보아 문제 학생은 아닌 듯했다. 나는 잠깐 사이에 한 가정의 평범한 삶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계단에서 사람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 시간이라 투숙객들이 몰려올 시간이었다. 이 여관의 손님들은 주로 공사장의 인부들이었다. 주인과 손님들이 시끄럽게 대화하는 사이에 나는 슬며시 그 여관에서 나왔다.
나는 조 선배에게 전화로 이길호의 검찰 송치 기한이 언제냐고 물어 보았다. 그 기한이 지나면 길호는 구치소로 이송된다. 검찰로 사건이 송치되면 확실한 단서가 없는 한 구치소에서 재판을 기다려야 한다. 경찰서 유치장에 있을 때보다 일이 까다롭고 길호를 자주 면회할 수도 없었다. 그 안에 길호의 혐의를 벗겨 줘야 한다. 그 일은 조 선배만이 할 수 있었다.
오늘도 길호를 신문했지만 길호가 완강히 혐의 사실을 부인한다고 선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조 선배에게 ‘나리여관’에 다녀온 걸 사실대로 얘기했다. 조 선배도 그 여관이 내 숙소와 가깝단 걸 알고 있었다.
“헛수고하지 마, 이 친구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 선배는 내 말에 귀기울여 주었다.
“무당 같은 그 말을 믿으란 말이야? 아서라, 무당에게 한두 번 속은 내가 아니다. 사랑하는 후배의 말이니까 참고로 기억해 두지. 네 일도 많은 사람이 내 일에까지 신경 써 주니 고맙다. 송치 기한이 되면 물증이 없더라도 자백을 받아서 검찰로 넘길 테니까 그리 알게. 살인범을 동정하는 건 형사의 도리가 아니야. 내가 변했다고? 그래, 나도 과장을 닮아 가는 것 같아.”
“자백은 재판정에서 번복될 수도 있어요. 용의자가 강요에 못 이겨 거짓 진술했다고 하면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길호를 풀어 주고 다시 수사해 볼 생각은 없어요? 풀어 주고 재수사할 수도 있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좌천되는 꼴 보려고 그래? 이 사건을 처리 못하면 나는 끝이야. 과장이 날 시골 경찰서로 보내겠다고 벼르고 있어.”
“형님도 참! 좌천이 그렇게 두려우면 처음부터 경찰관이 되지를 말지. 우리 세계에 좌천, 강등, 감봉은 가장 친근한 단어란 걸 모르슈?”
“그 말도 맞다. 그러나 좌천은 싫다.”
“길호는 범인이 아닙니다. 내 말을 믿어 주세요.”
“무슨 근거로? 길호가 결백하단 증거가 있냐?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지금 당장 석방하겠다.”
“원점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저는 사건의 열쇠가 보이지 않을 때 그 방법을 썼습니다. 그래서 실패도 했지만, 억울한 사람을 잡아 가두진 않았어요. 헛된 영웅심에 사로잡혀 무고한 시민을 범죄자로 만들지 마십시오. 살인범은 지금쯤 어디에선가 웃고 있을 겁니다.”
“무당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 걱정 말고 네 일나 잘해 봐. 과장이란 사람 너무 믿지 말고. 그 사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하는 독사야 독사뱀!”
선배는 길호를 풀어 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맥이 풀려서 내 할 일도 잊고 여관방에서 누워 뒹굴었다. 파트너 여자 선배한테서 빨리 잠복근무 현장으로 오라는 전화가 왔다. 내 귀에는 여자 선배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내 옆에 미나 씨의 영상이 붙어서 날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8
며칠 후 저녁 무렵에 시간을 내어 ‘나리여관’을 또 찾아갔다. 길호의 검찰 송치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내 마음은 초조했다. 강간 살인범을 잡으려고 여전히 잠복근무 중이었는데, 여자 선배에게는 잠깐 볼일이 있다고 양해를 얻었다. 미나의 영상은 한사코 나를 ‘나리여관’으로 가 보라고 종용했다.
내가 맡지 않은 사건에 주제넘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그쪽으로 이끌리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한 인간이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죄인이 된다. 기왕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그 죽음 때문에 이중 삼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구해 줘야 한다. 그 사람은 죽은 여자의 애인이다.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국가는 그에게 살인과 똑같은 죄를 짓는 것이다. 그를 두 번 세 번 죽인 셈이니까.
내가 ‘나리여관’에 찾아간 건 꼭 무슨 단서를 알아낸다기보다 그들이 내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좀이라도 도와 주고 싶어서였다. 길호가 결백하단 걸 입증할 수만 있다면 조그만 꼬투리 하나라도 잡아서 조 선배의 마음을 설득시켜 볼 요량이었다. 진범을 잡는 것과 무고한 사람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길호가 범인이 아니라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미나의 영상이 꿈속에서 내게 애원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길호가 결백하다는 신념이 굳어 갔다. 이제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강도 강간범을 붙잡는 문제보다도 눈앞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는 문제가 더 시급했다. 살인 누명은 길호에게 죽음과 같은 고통이었다. 국가와 사회가 그를 죽이는 것이다. 그 누명을 벗지 못하면 그는 영원히 매장된다. 그의 애인은 지하에서 얼마나 슬퍼할 것인가. 그들의 한을 풀어 줄 의무가 내게 있었다. 나는 형사인 것이다.
살인 사건이 있고 나서 한동안 발길을 끊던 손님들이 다시 찾아오고 그 사건은 차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여관 주인 부부는 수더분한 사람들이고 경찰에 협조적이었으며, 내 질문에 친절히 답변해 주었다. 여관 주인과의 대화를 통해 뭔가를 얻어내야만 했다.
미나가 만난 사람과 교우 관계, 가족 관계, 돈거래 따위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미나의 고향은 전남 여천이고 부모님도 생존해 있다고 했다. 미나는 평소에 한 가족처럼 지냈던 여관 주인에게 그녀의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숨김없이 얘기했다고 한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친구는 딱 한 사람 있는데 전화로만 가끔 대화하는 걸 들었다고 했다. 그 친구는 대전에 살고 있었다.
시장 보러 가는 시간 외에 외출도 잘 하지 않고 방안에서 혼자 노는 시간이 많았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독서로 소일했다. 독서는 책 대여점에서 빌려 보았다. 그래서 그녀의 방에는 그리 많은 책이 없었나 보다. 미나는 무슨 일인가 하고 싶어하는데 길호가 허락하지 않아서 빈둥빈둥 놀고 있었다.
길호가 장사하려고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미나는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서 여관 주인방에 찾아와서 자주 놀았다. 미나에겐 원한을 살 만한 사람도 없었다. 얌전하고 착해서 그 누구에게 원한 살 짓을 하는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런 아가씨가 한밤중에 남자 애인에 의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길호는 전세방 문제로 미나와 다투고 나서 남산공원에 갔다가 여관방에 돌아와 보니 그녀가 죽어 있었다고 했지만 경찰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조 선배는 두 사람이 다투던 중에 길호가 미나를 살해했다고 단정지었다. 조 선배도 미나의 주변 인물을 조사할 만큼 다 조사했다. 원한 관계나 돈 관계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방안의 물건과 지갑의 돈이 그대로 있고 이불만 흐트러져 있었다.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자세로 숨져 있었다. 그러니까 도둑은 아니다. 강간한 흔적도 없었다.
미나를 잘 아는 사람, 혹은 손님 중에 그녀를 범하려고 했다가 반항하니까 살해했을 수도 있다. 그날 밤 투숙한 손님들을 조사해 봤지만 어떤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 손님들은 공사장 인부들이고 미나가 살해될 시간에 술판과 화투판을 벌이고 있었다. 알리바이가 뚜렷했다. 길호는 왜 애인을 혼자 두고 깊은 밤에 남산공원에 올라갔을까? 그가 없는 사이에 애인에게 참변이 일어날 줄 예상이나 했을까? 그는 지금 유치장에서 가슴을 치고 울 것이다. 미나를 죽게 한 건 길호였다. 그렇다고 그가 살인범은 아니었다. 살인범은 따로 있는 것이다.
“참 말수없고 얌전한 아기씨였는데, 지금도 그 방 앞을 지나가면 그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요. 그 사건이 끝나서 방울 치우더라도 그 방은 다른 손님에게 안 주려고 해요. 죽은 넋이라도 그 보금자리가 그리우면 찾아와 쉬라지요. 끌끌끌”.
남자 주인은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 방 앞을 지나갈 때 무섭지 않냐고 내가 묻자 주인 부부는 아가씨가 꼭 살아 있는 것만 같아서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권씨는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그의 아내가 남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9
나는 주인 부부의 이야기만 듣고 별 소득 없이 내 근무 장소로 돌아갔다. 주인 부부는 내가 그 사건의 담당 형사인 줄 알고 있었다. 혹시 단서 될 만한 게 있으면 내게 연락하라고 부탁했는데 다음날 오후에 내게 전화가 왔다. 권씨가 내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나는 ‘나리여관’으로 달려갔다.
“우리 아들놈 행동이 이상해서 혹시 도움 될지 몰라 전화했습니다.”
그렇게 운을 떼고 나서 권씨는 그동안 아들 때문에 당한 고통을 털어놓았다. 권씨의 외아들 성재는 군 복무를 마치고 작년에 복학해서 지금 대학 삼학년이다. 성재는 어려서부터 일등만 한 공부벌레였는데 최근에 와서 폭음을 하고 학교에 결석을 자주 했다. 지도교수가 전화를 해서 아들이 결석한 사실을 알았다.
아들의 성격이 변한 건 ‘나리여관’에서 살인 사건이 있고 나서였다. 권씨는 성재가 미나를 그렇게 좋아한지 몰랐다고 했다. 미나의 죽음은 성재의 성격을 바꿔 놓았다. 아들 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면 죽은 미나가 가엾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가도 성재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성재는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부모에게 반항하고 야만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그전의 골샌님 귀염둥이가 아니었다.
권씨는 아들이 미나의 죽음과 관계있지 않은지 의심했다. 아들이 취중에 지껄이고 잠꼬대하는 소리를 듣고 그런 의심이 짙어졌다. 살인범은 길호가 아니고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권씨는 괴로워서 잠을 못 이루고 고민했다. 권씨는 아들이 하루라도 빨리 죄값을 받는 게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이 범인일지 모른다는 말에 아내는 펄쩍 뛰었다. 성재는 그런 짓을 할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끈질긴 설득으로 자수시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언젠가 아들놈이 방문 틈으로 그 아가씨의 방을 엿보는 걸 보고 내가 나무랬지요. 아가씨가 혼자 있을 때 훔쳐보는 것 같았어요. 아가씨에게 엉큼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거지요. 내 아들이 범인이란 생각을 하면 괴롭지만 고통은 여기서 끝나야 하지 않겠소?”
권씨 내외는 울면서 아들을 체포해 달라고 했다.
“아드님이 잠꼬대한 걸 가지고 범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잖습니까?”
“직감이란 게 있잖아요? 내 직감이 틀림없어요.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내 아들이 그 아가씨를 죽인 범인입니다.”
“아드님의 방을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보여 드리고말고요. 제발 증거 될 만한 게 나왔으면 좋겠소.”
아들은 학교에 가고 없었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봄축제 준비를 한다며 억지로 끌고갔다고 했다. 성재는 관악기를 다룰 줄 아는 음악광이기도 했다. 그의 방에 들어가니 클라리넷과 트롬본 등이 보이고 책상도 단정했다. 흐트러짐이 없는 공부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성재를 범인 취급한다는 게 길호에게 누명 씌우는 것만큼이나 가슴 아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다른 것은 보지 않고 그의 옷들만 조사했다. 책상 옆 옷걸이대에 갈색 와이셔츠가 걸려 있었다. 단추를 세어 보니 앞단추 일곱 개가 모두 달려 있었다. 여분 단추 두 개도 있었다. 그러나 소매 단추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소매 단추는 원래 두 개씩 달려 있었는데 밤색을 띈 자개빛이었다. 조 선배가 보관하고 있다는 밤색 단추와 같은 단추일 것이다. 성재가 진범이라면.
나는 그 와이셔츠를 압수했다. 와이셔츠를 옷걸이에서 벗기는 순간 호주머니에서 종이쪽지가 떨어졌다. 쪽지엔 성재가 부모님께 드리는 글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죄 많은 이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미나 씨는 제가 죽였습니다. 그날 밤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미나 씨의 방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호기심에 들여다보니 미나 씨가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미나 씨는 텔레비전을 보느라고 내가 방에 들어간 줄도 몰랐습니다. 잠옷만 입고 있는 미나 씨를 보고 나도 모르게 범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서 내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미나 씨가 내 뺨을 때리고 소리치려고 해서 입을 막고 목을 조른 것이 미나 씨를 죽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너무 겁이 나서 내 방으로 돌아와서 숨죽이고 미나 씨가 깨어나기를 빌었습니다. 잠시 후에 길호 형이 돌아오고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그때서야 내가 살인을 했단 걸 알았습니다.
길호 형이 나 때문에 살인자 누명을 쓰는 게 괴로워서 몇 번 자수하려고 했지만, 아들 하나 믿고 사는 부모님이 걸려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어서 경찰서에 제가 범인이라고 신고해 주십시오. 이 와이셔츠를 증거물로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길호 형께 미안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못난 이 자식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시기를……
불효자 성재 올림>
10
그것은 유서였다. 나는 조 선배에게 전화했다. 조 선배가 달려왔다. 나는 성재의 와이셔츠를 증거물로 조 선배에게 주었다. 조 선배가 보관한 단추와 그 와이셔츠의 단추가 일치했다. 문제는 성재의 행방이었다. 권씨 부부는 모든 것을 단념한 듯 눈물만 흘렸다. 조 선배와 나는 권씨에게 물어 성재가 갈 만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또 하나의 생명이 죽는 걸 막아야 한다. 성재가 죽지 말고 살아 있어 주기를 기도했다.
처음 찾아간 곳이 부천에 있는 선산이었다. 성재는 조부모님 묘 앞에 독약을 먹고 누워 있었다. 몸을 만져 보니 따뜻했다. 맥박이 뛰고 있었다. 속히 병원으로 싣고 가서 응급치료를 한 덕분에 성재는 목숨을 건졌다. 성재는 몸이 회복되자 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길호는 석방되었다. 성재는 미나 씨를 살해한 혐의로 검찰로 송치되어 재판을 기다려야 했다.
성재는 사랑하는 연인의 행복을 앗아간 악마였다. 그는 한 가정의 귀한 아들, 공부 잘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이기도 했다. 그가 목숨을 건지고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은 그에게 참회의 길을 열어 주려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그렇게 선의로 해석하고 싶다. 살인범에게 삶은 죽음보다 더한 고역일 수도 있다. 죽음 같은 삶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배운다면 그보다 더 좋은 참회가 없을 것이다.
길호가 석방된 날 나는 그를 내 승용차에 태우고 ‘나리여관’으로 갔다. 미나의 소지품과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가슴에 안고 펑펑 우는 길호를 달래어 식당으로 가서 함께 식사를 했다. 길호는 이제야 울음의 자유를 얻었단 듯이 밥을 먹으면서도 울었다. 손수건이 흥건히 젖도록 마음껏 우는 길호를 위해 마음으로 기도해 주었다. 그는 성실하니까 또 열심히 살 것이다. 미나만큼 마음에 드는 여자를 또 만날지 모르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미나의 무덤으로 가서 실컷 울어야죠 하고 길호는 억지로 웃었다. 나는 거리에서 장난감의 율동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는 길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기뻤다. 나는 길호와 헤어져서 ‘나리여관’으로 가서 슬픔에 빠진 권씨 부부를 위로했다. 권씨 부부는 슬픔을 감추고 그전처럼 태연히 생활했다. 숙박비를 깎아 달라는 노동자 손님과 입씨름도 하고 잘난 아들 둬서 행복하다는 농담도 하면서.
권씨는 미나를 죽인 법인을 잡아 줘서 내게 감사하다고 했다. 그 범인이 자기 아들이라고 해서 동정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성재는 좋은 부모를 가진 복 많은 청년이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고 했던가. 미나 씨가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나는 사건을 속히 해결하도록 도와 준 성재 부모에게 감사하고 싶다. 이제 그 사건은 끝났다. 참, 형사에게 끝이란 단어는 사전에 없지. 항상 시작의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춤추는 곡예사. 진짜 할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 연쇄 살인범을 꼭 잡아야겠다. 오랜만에 여관방에 들러 와이셔츠를 갈아입으려다가 성재의 것과 똑같은 갈색 와이셔츠가 있다는 걸 깨닫고 소름이 끼쳤다. 와이셔츠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이를 닦는데 핸드폰 전화가 왔다. 조 선배였다.
“과장이 자네와 나를 좌천시기겠다는데 어쩌지? 나는 죄 없는 사람을 살인범으로 몰아 경찰의 체면을 구겼고, 자네는 자기 일을 망각하고 남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거야. 그래도 진범을 체포했으니 저녁밥을 사겠대. 송별턱을 내려나 봐.”
조 선배의 말이 농담이란 걸 알고 나는 픽 웃었다. 우리에게 영역이 따로 있겠소? 범죄의 영역이 무한하듯이 모든 사건들이 다 모든 형사들 꺼지. 나는 그 회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여자 선배가 기다리는 잠복 근무처로 가야 한다. 미안하게도 여자 선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대뜸 비속어가 터져 나왔다.
“이 새끼야, 남자라고 네 멋대로 행동하기야? 누구는 발이 없어서 이 자리에 틀어박혀 있는 줄 알아? 소변이 마려워도 화장실엘 못 가고 있어. 교대자가 없으니까.”
나더러 자리 좀 지키라고 꾸짖는 선배 여경. 그녀의 질책과 욕설에 숙달되어 나는 태연했다. 내가 형사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 그런 줄 안다면 당신도 이해하겠지.
나는 양치질한 입을 대충 물로 씻고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바람 없이 청명했다. 초봄의 햇살이 서녘에 뉘엿거리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어둠이 또 오려나 보다. 자재더미들 사이로 내 고물 승용차가 보였다. 비탈길을 바삐 내려가다가 자갈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차문을 열고 핸들 앞에 앉을 순간 긴 한숨소리가 들렸다. 내 한숨소리가 아니고 여자의 한숨소리였다.
내 옆에 살포시 앉아 있던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고장난 안전벨트가 의자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여자의 냄새가 그리워서 몇 번을 돌아봐도 차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 여자는 떠난 것이다. 미나는 천국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여자는 내 옆에 없지만 또 미나와 똑같은 여자가 어디선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나는 잊지 않는다. 그 여자는 자기를 처참하게 살해하고 뻔뻔스럽게 활보하는 악마를 처벌해 달라고 언제 또 내 옆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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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