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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 | 고체 |
그 형태를 쉽게 유지할 수 없음 | 비틀리고 구부러진 채로 상태를 유지 |
공간을 붙들거나 시간을 묶어두지 않음 | 본래의 형태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 |
지속적으로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음 | 분명한 공간적 차원을 지님 |
공간보다 시간의 흐름이 중요(날짜가 있어야 하는 사진) | 시간을 무효화 |
쉽게 이동, 쉽게 멈추지 않음, 가벼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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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성, 액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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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그 시작부터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것’(마르크스)으로 어떤 액화 과정이었다. 근대에는 전근대적인 고체들의 해체상태가 꽤나 진척되어 있었다. 견고한 것들을 녹인 결과:전반적 사회관계의 복잡한 그물망을 느슨하게 만들어, 그 그물망은 헐벗고 보호받지 못하고 비무장인 채로 노출되며, 기업정신으로 충만한 행동 규칙들과 기업형태의 합리성에 대한 기준에 맞서 효과적으로 경쟁하기는커녕,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되었다. 새질서를 변화시키거나 개혁할 힘이 있는 정치적 도덕적 지렛대는 대부분 파괴되거나 그 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짧거나 약하거나 부적합한 것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질서가 인간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된 이유는 가차없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그 질서의 재생산에 관한 한, 삶에서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는 별 무관한, 비효율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오페 「제로 옵션의 유토피아」(1987)에서 “복잡한 사회들은 너무나도 경색된 나머지 그들의 질서를 규범적으로 반추해보거나 이를 갱신하려는 시도는 그 사회들의 실제적 무용성과 그에 따른 본질적 부적합성으로 말미암아 사전에 거의 차단된다. 그 질서의 하위 체제들이 개별적으로는 아무리 자유롭고 가변적이라 해도 이것들이 서로 얽혀 있는 방식은 경색되어 있고 치명적이며 선택의 자유로부터 차단되어 있다.”고 했다. 전체 질서와 목적을 지닌 행동의 개별 행위자들, 매개들, 전략들 사이에는 불분명한 틈이 있으며 자꾸만 벌어지고 있는 이 간극을 메울 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의 상황은 선택하고 행동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족쇄와 사슬이 근본적으로 녹아버린 데서 발생하였다. 질서의 경색은 인간 주체의 자유가 만든 인공물이자 침전물이다.(경색은 브레이크를 푼 전반적 결과. 규제 철폐 자유화 유연화, 증가된 유동성, 재정 부동산 노동시장을 풀고 조세의무를 덜어준 결과) 체제와 자유로운 행위자들이 근본적으로 결속을 끊고, 서로 만나지 않고 스쳐갈 수 있도록 해준 기술들의 산물이다. 새롭고 더 나은 질서를 건설하여 낡고 결함 있는 질서를 바꾸는 과업은 현재로서는 의사일정에 올라와 있지 않다. 적어도 정치적 행동이 자리해야 할 영역의 일정표에는 없다. 따라서 근대성의 영구적 특징인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일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여 무엇보다도 새로운 목표를 상정하게 되었다.
울리히 벡(조나단 러서포드와의 인터뷰)(1999. 2. 3)은 “오늘날 가족이란 것이 실상 어떠한지 자문해 보라. 그 의미는 무엇인가? 물론 자식들, 내 자식들, 우리 자식들이 있다. 그러나 가족생활의 핵심인 부모의 역할은 이혼이라는 상황 때문에 해체되기 시작했다. (---) 그들 아들딸들의 결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포함되거나 배재된다. 손자들의 관점에서 조부모라는 의미는 개인의 결정과 선택으로 결정이 나는 것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이것은 근대성의 ‘녹이는 힘’이 재분배되고 재할당되는 현상이다. 처음에 녹이는 힘은 행위-선택이 가능한 영역들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 제도들이나 구조틀들, 예를 들자면 한 번 귀속되면 항소가 불가능한 세습신분 같은 데만 가해졌다. 후에 이것들은 새롭게 주형되어 만들어졌다. 자유로운 개인이 직면한 과제는 그들의 새로운 자유를 이용하여 알맞은 장소를 찾아 그곳에 순응하며 정착하는 것이었다. 그 위치에 걸맞고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행동 규범과 양식을 충직하게 따름으로써 말이다.
액화하는 힘은 ‘체제’를 ‘사회’로, ‘정치’를 생활정책들‘로 바꾸고, 사회적 공존의 거시적인 차원을 미시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그 결과 우리 시대는 개인화되고 사적으로 변한 근대, 유형을 짜야하는 부담과 실패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개인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유체를 한 형태로 유지하는 것은 많은 주의와 끊임없는 감시와 노력이 필요하다, 또 그렇게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그것이 성공할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다. 유동적 근대의 도래가 인간조건에 초래한 심오한 변화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체제의 구조가 지닌 원격성과 접근 불가능성은 구조화되지 않은 유동적인 순간적 생활정치 무대와 쌍을 이루어 인간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면서, 그 서사를 형성해주던 낡은 개념들을 재고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실제적인 질문은 그들의 부활이 새로운 형상을 통한 것이든 다른 육체를 통한 것이든 간에, 실행 가능한가이다. 혹은 실행 가능하지 않다면 이것들을 어떻게 점잖고 효율적으로 매장시키는가이다.
액체 근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세 가지 조건 속에 내던져진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둘째, 예측하려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결코 측정되지 않는 지속적인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한다. 셋째, 신뢰의 위기 속에서도 과감히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우만은 이런 조건 속에서도 개인의 어깨에 지워진 책임의 무게를 넘어, 자기결단과 해방의 자유, 거대한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 공동의 노력을 향한 책임의 ‘통각’을 길러야 함을 역설한다. 이를 위해 그는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 등 인간 삶의 조건을 점검하는 작업을 한다.
1. 해방
해방이란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유로움 자체를 싫어하고 해방의 전망에 오히려 분노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정표 하나 없고 온통 자신이 헤쳐나가야만 하되, 그 결과가 어찌될지 전혀 확신이 없는 상태로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이 잔뜩 도사린 길을 가며 일련의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해방은 축복인가 저주인가?(33) 온전히 내 어깨 위로 떨어진 책임이란 것도 어디 호소하여 구제를 받을 자격조차 없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온갖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34)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사회가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를 멈춘(코넬리우스 타스토리아디스) 데 있고, 비판이 있어도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종이호랑이(40)에 불과한 것에 있다. 비판에 대한 호의는 캠핑용 차량 캐러밴으로 이루어진 이동주택 단지의 방식을 닮았다. 그곳은 캐러밴을 소유하고 있거나 임대할 만큼의 돈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개방된다. 손님들은 그곳을 오가는데, 그들 중 누구도 그곳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별 관심이 없다. 고객들은 캐러밴을 주차할 정도의 땅을 할당 받고, 전기와 수돗물이 갖추어져 있으며, 주변의 캐러밴 소유자들이 너무 시끄럽게 굴지 않으면 그만이다.(40) 그들은 관리자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사용료를 제 때 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돈을 내기 때문에 때로는 요구사항이 있을 때도 있다.
무시당했다고 느끼거나 관리자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캐러밴 생활자들은 불만을 늘어놓으며 자신들의 몫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이 이동주택단지의 관리 철학에 질문을 던지거나 이를 두고 교섭하려고 마음먹는 일은 결코 없다. 행여 뒤이어 도착한 여행자 무리들이 연이어 특정한 불만을 계속 품게 되면, 차후에 똑같은 불평이 반복되지 않도록 편의제공 사항이 바뀔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이동주택 단지가 차량 소유주에게 베푸는 호의를 그대로 빼닮은 비판에는 호의적이면서도, 비판 전문가들의 비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적대적이다.(소비자 스타일의 비판이 생산자 스타일의 비판을 대체-포스트모더니즘 야유)(43)
우리의 근대 형식이 새롭고 다른 이유는 근대 초기의 믿음이 와해, 근대화의 과제와 책임의 규칙이 폐지되고 사적인 것으로 변했다. 개인화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이 아니라, 이를 하나의 과제로 삼아 그 과제를 수행할 책임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행위자에게 지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적인 자율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근대성은 개인의 사회적 위상이 강제적이고 의무적으로 결정되던 것을 개인의 결단으로 바꾸어 놓았다.(53) 유동적인 근대에서도 개인화는 하나의 정해진 운명이지 선택이 아니다. 개인화는 개인들이 지닌 고충들의 유사성을 토크쇼에서 공유할 수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독을 버텨갈 방법을 터득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화의 이면에는 시민의식의 부패와 점진적인 해체가 있다. 근심 걱정을 나누고 고뇌와 증오도 나누지만 각각의 공동체들은 수많은 고립된 개인들이 그들만의 고립된 개별적 두려움을 매달아 놓은 ‘말뚝’ 주위로 일시적으로 결합한 말뚝 공동체와 같다. 비판이론이 해야 할 일은 해방의 노정에 첩첩으로 쌓인 많은 장애물들을 폭로하는 것이다. 사적인 문제들을 공적 현안으로 옮겨 쓰고, 고유하게 사적인 문제들을 개인적인 요소들의 총합이 아닌 더 넓은 차원의 공적 관심사로 응축해내고, 생활정치의 사적인 이상향들을 상기해 내어 다시 한번 ‘좋은 사회’와 ‘정의로운 사회’의 전망을 얻어내려는 일들이 점차로 어려워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공동의 대안을 모색하는 일은 생활정치의 대안을 고찰하는 것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2. 개인성
자본주의-포드주의는 근대사회가 ‘무겁고’ ‘부피가 크고’ ‘고정불변’이며, ‘뿌리박힌’ ‘고체’ 단계임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94) 오늘날 자본은 여행가방에 서류케이스, 휴대폰, 노트북만 담고 가볍게 이동한다.(95)(무거운 자본주의 가벼운 자본주의)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이행하는 길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추구할 가치가 있는 목적들과 관련하여 대법원이 항소 불가능한 판결을 내리는 가치들을 절대화할 능력을 갖춘, 보이지 않는 최고 권력기구들(계몽주의, 빅브라더)의 소멸이다.(98) 최고사령관이 사라지면서 텅비게 된 공간을 메운 것은 무한한 기회들이다.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찾아내어 그 능력을 극대화하고 그것이 가장 잘 적용될 만한 목표들을 고르는 일들인 개인에게 달려있다. 기회로 가득한 세상에서 미리 예정된 것은 없으며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더욱 드물다. 미완과 불완전함, 미결정의 상태는 위험과 고뇌로 가득 차 있다.(101) 가능성으로 가득한 세상은 무엇을 먼저 먹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뷔페와도 같다. 소비자의 불행은 선택의 결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과잉에서 비롯된다.(102)
액체 근대에서 권력기관과 지도자는 없고, 상담자만 있을 뿐이다. 지도자는 추종을 받지만 상담자는 고용 및 해고가 가능한 점이다. 또한 지도자는 개인적인 이익과 우리 모두의 이익 혹은 사적인 근심과 공적인 이슈 사이의 쌍방 통역을 하지만, 상담자는 사적인 폐쇄영역 밖으로 혹시라도 발을 내디딜까봐 늘 주의를 기울인다. 질병과 치료는 개인적인 것일 뿐이다. 상담자들이 제공하는 상담은 대문자로 시작하는 정치가 아니라 생활정치를 거론한다.(105) 자기계발서(멜로디 비티)는 독자들에게 충고/경고한다. “우리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 일에 휘말리는 것이고, 제 정신으로 행복하게 살게끔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은 우리 자신을 잘 돌보는 것이다.” 어떤 충고를 들었든지 간에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상담 받은 사람 혼자의 몫이다. 그 충고를 알맞게 실천해야 할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 해도 이는 오직 자신의 잘못과 태만 때문이므로 남을 탓해서는 안 된다. 결국 개인들이 각자 그들의 개인적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고 개인 각자의 기술과 재능을 사용해 그 문제들과 씨름하는 방식과 관련된 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공적 현안이며 공적 관심의 유일한 대상이다.
본보기와 조언, 안내를 구하는 것은 하나의 중독이다. 인기 있는 약을 구하지 못하면 더 불행하다고 느끼게 된다. 모든 중독은 자기 파괴적이다.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만족될 간ㅇ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본보기나 비결은 우리에게 약속했던 것이 실현되기 바로 직전에 멈추어 버린다. 설사 어느 하나가 기대되던 바대로 이루어졌다고 증명이 된다고 해도 그 만족은 오래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비적 세상에서는 여러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고, 매물로 나와 있는 매력적 목표들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경주의 지속, 격기에 계속 참여하고 있다는 만족스러운 지각이 진정한 중독이 되는 것이지 결승점에 닿을지도 모를 극소수의 사람들을 기다리는 어떤 특별한 상에 중독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그 자체가 이의제기나 질문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목적이 된다.
우리가 더 경쟁력을 갖추어야 할 분야는 너무나도 많고 각각의 분야는 이리저리 쇼핑할 것을 요청한다. 쇼핑목록은 끝이 없다. 그 목록이 아무리 길어도 쇼핑을 하지 않을 방법을 고르는 것은 그 목록에 없다 무한한 목표들이 가득한 우리 세상에서 꼭 필요한 경쟁력은 능숙하고 지칠 줄 모르는 구매자의 경쟁력이다.
3. 시공간
리처드 세넷의 고전적 정의를 따르면 도시라는 것은 “이방인들이 서로 마주할 만한 장소”를 뜻한다. 이방인들은 이방인으로 만나는 것이고 그 등장뿐만 아니라 사라짐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방인끼리의 만남은 친척이나 친구, 지인들과의 만남과 비교해 볼 때, 잘못된-만남을 특징으로 하는 만남이다. 만남의 과정에 시련이나 동요, 기쁨과 즐거움이 채워져 있지도 않으며, 공동의 추억이랄 것도 없다. 이방인들의 만남은 과거가 없는 사건이자. 미래가 없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방인들의 만남은 외모나 말투, 몸짓과 같은 가늘고 헐거운 연결망에 의해서만 지탱될 뿐이다. 그 결과 도시에서의 삶은 특별하고 세련된 기술을 요한다. 세넷은 이것을 예의라고 한다. 상대를 보호해 주면서 상대와 즐길 수 있게끔 하는 활동, 가면을 쓰는 것이 예의의 본질이다. 각각의 가면들은 그 가면을 쓴 이들이 권력과 불쾌감, 개인적 감정과는 거리를 둔 순수한 사회적 친분을 가능케 한다. 예의의 목표는 남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자신으로부터 타인을 보호하는 것이다.
도시의 환경이 ‘예의바르다“는 것은 사람들이 ’공공의 가면‘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함을 뜻한다. 따라서 그 공간에서는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속내를 표현하거나, 마음 속 느낌과 내밀한 생각, 희망과 근심걱정을 털어놓으라고 자꾸 채근하고 압력을 넣거나 부추기는 법이 없다. (156) 공공의 가면을 쓰는 것은 일종의 적극적 결속과 참여행위가 된다. 소비자들은 별다른 실제적 사회 교류 없이도 콘서트, 전시공간, 휴양지, 스포츠 공간, 쇼핑몰, 매점 등과 같은 물리적 소비공간을 서로 공유한다. 그런 공간들은 상호적이지 않은 행위를 장려한다. 다른 행위자들과 유사한 행위를 하면서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는 것은 행위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 공간을 ’집단의 승인‘을 받은 것으로 규정해주며,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해 주어, 논쟁할 필요도 없이 이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소비이고, 소비는 전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개인적 소일거리이자 오직 주관적으로만 경험되고 지속되는 일련의 감각들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리처의 말을 빌리면 ‘소비의 사원의 내부를 가득 채운 사람들은 목적이 있는 회중이 아니라 그저 모여 있는 것이며, 구성된 팀이 아니라 무리, 총체가 아니라 총합일 뿐이다.’ 만남은 짧고 깊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쇼핑 여행은 공간여행이며 시간여행은 오직 부차적인 것이다. 소비의 사원은 도시 안에 있지만 도시의 일부는 아니며, 일상적인 세상이 일시적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소비의 사원은 미셀푸코가 말하는 ‘홀로 존재하며 문을 닫아건 동시에 망망대해의 무한함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부유하는 공간의 조각이자 장소 없는 장소이다.“(161) 자기봉쇄적 ’장소 없는 장소‘는 매일 같이 점유되거나 관통되는 다른 모든 장소들과는 달리 정형화된 공간이다. 쇼핑과 소비를 하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일부가 되었다는 위안의 감정, 안락한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세넷의 말을 빌려, 차이의 부재, 우리는 모두 같다는 느낌, 우리는 한마음이므로 어떤 협상도 필요없다는 가정이야말로 삶의 무대가 복수화되고 다성화되는 것과 비례하여 증가하는 공동체 개념의 궁극적 의미이며 공동체가 지닌 매력의 궁극적인 원인이다.(162) 세넷은 공동체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갈등은 물론 차이를 인식하게 만들 모든 것들을 깨끗이 제거한다. 이런면에서 공동체적 연대의 신화는 일종의 정화의식이 된다.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에서 타인의 타자성 문제 해결 전략은 뱉어내는 전략과 먹어치우는 전략 두 종류이다. 첫 번째 전략은 교정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이질적으로 간주되는 타자들을 뱉어 ‘토하는 것’이다. 신체접촉과 대화, 사회적 교류 및 모든 종류의 축제, 친교, 종족 간 혼인을 금지한다. 극단적인 양태는 감금, 추방, 살해이다.(타자 추방, 전멸) 현대화된 형태는 공간 분리이다. 두 번째 전략은 이질적인 내용을 ‘비이질화’하는 것이다. 외부인들의 몸과 정신을 섭취하고 먹어치우고 신진대사를 거쳐 그 섭취하는 몸과 별반 차이가 없는 동질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다.(타자성을 유예시키거나 무효화)
비-장소들은 첫 번째 범주, 표면상 공적이지만 전혀 공손하지 않은 장소들과 몇몇 특성을 공유한다. 비-장소들은 정체성, 관계, 역사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 없는 공간이다. 예컨대 공항, 도로, 익명의 호텔 방, 대중교통 등이다. ‘빈공간’도 있다. 아무런 의미도 부여되지 않은 장소이다. 그 공간들은 담장이나 차단막 따위로 물리적 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 금지된 장소는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특성 때문에 텅 비어 있고, 도달할 수 없다. 빈 공간들은 의미라는 것이 없다. 텅 비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도 전달하지 않고, 의미라는 것을 전달할 여지가 있다고 믿지도 않기 때문에 비어 있는 공간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빈공간은 바라보는 자의 시선 속에 그리고 도시를 오가는 이들의 다리나 차바퀴 속에 존재한다. 사람들이 들어가지 않는 곳, 사람들을 보고 크게 놀라서 길을 잃고 습격당할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 그런 곳이 바로 빈 공간이다.(170)
모든 사회 무대는 각각의 특정한 합리성을 고무하며 이를 합리적 삶의 전략개념으로 투사한다. 따라서 현재 공동체주의의 징후를 나타내는 것들은 공적 공간의 진정한 위기, 따라서 공적 공간이 본령으로 삼고 있는 인간 행위인 정치의 위기에 대한 일종의 합리적 대응이라는 가설이 그 힘을 얻게 된다. 정치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려하는 대신 공적 무대에 모습을 비추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성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살기 좋고 정의로운 사회의 전망이 정치적 담론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되면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행동이 아닌 의도와 감정만을 소비할 것을 권하는 정치적 배우를 바라만 보는 수동적 관객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멋진 구경거리 말고는 바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정치가로부터도 그다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175)
무거운 근대는 영토 정복의 시대였다. 제국들은 지구의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갔다. 크기 그리고 양질의 하드웨어에 입각한 부와 권능은 그 움직임이 대단히 느리고 꿈쩍할 수 없을 정도로 황당무계하게 무거운 편이었다. 빽빽이 짜인 공장의 고정된 시간은 공장 담벼락의 벽돌과 모르타르로 그곳에 고용된 노동을 꽁꽁 묶어두었고, 그만큼 효과적으로 자본 역시 고정화하였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자본주의와 가벼운 근대가도래하게 되자,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경력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어디로 가게 될지 알 수가 없다. 포드나 르노에서 시작한 사람은 거의 틀림없이 똑 같은 곳에서 경력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다니엘 코엔) 이제는 저멀리와 바로 여기의 차이가 무효화된다. 공간은 행동에 한계를 짓지 않게 되고, 행동의 결과는 그다지 혹은 전혀 중요치 않게 되었다. 모든 공간 구석구석까지 동일한 시간 범위 안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특권화되거나 특별한 가치를 지닌 공간은 사라졌다.
소프트웨어적인 세계의 즉시성은 당면한 바로 그 현장의 완성을 뜻하지만, 즉시 고갈되고 관심이 사라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일차원적 시간의 점들, 즉 순간뿐이다. 더 빨리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 운동의 순간성에 가장 근접한 이들이 이제 세상의 지배자들이다. 그들만큼 빨리 움직이지 못하거나, 자유자재로 떠나지 못하는 범주의 사람들이 피지배자들이다. 가벼운 근대는 자본과 노동의 양편 가운데 자본을 철제 우리 바깥으로 놓아주었다. 고체 근대는 상호결속의 시대였다. 유동적인 근대는 결속 끊기, 회피, 손쉬운 도주, 절망에 찬 추격의 시대이다. 액체 근대 시대에서 지배자는 가장 잘 빠져나가고 사전 예고 없이 이동할 자유가 있는 자들이다.(194)
고체 근대는 인간의 노동력을 고용하여 일을 시킬 때는 노동을 하는 자의 육체를 함께 고용해야 했고, 굼뜨기만 한 피고용인의 몸은 고용주의 자유를 제한했다. 자본과 노동은 한 덩어리였다. 유동적인 근대는 자본과 노동은 분리된다. 소프트웨어시대의 탈-육화된 노동은 더 이상 자본을 지상에 묶어두지 않는다. 노동은 자본이 영토를 벗어나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도록 놓아둔다. 더 큰 것이 더 효율적이지는 않다. 경영 차원에서 지방흡입술은 가장 으뜸가는 경영기술 전략이 되었다. 감량, 감원, 단계적 철수, 폐업, 매각 등이다. 감원에 대한 집착증은 기업합병에 의해 완성된다.
합병과 감원 전략이야말로 자본과 금권을 신속히 이동시키고 그 범위를 더욱 지구적인 것으로 만든다. 동시에 노동에서 협상 및 소요를 일으킬 힘을 빼앗고 노동을 이동 불가능하게 하며 그 손을 가장 확실히 묶어버린다.
록펠러는 굴착기, 빌딩, 기계, 철도 등을 장기간 소유하길 원했던 반면, 게이츠의 상품들은 맹렬하게 나타나서 재빠르게 사라져 버린다.(세넷) 고체 근대가 행동의 주요 동기와 원칙으로서 영원한 지속을 상정했다면, 액체 근대에서는 영원한 지속이 할 역할이 없다. 단기간이 장기간을 대체했고, 즉시성이 궁극적 이상이 되었다. 지속과 순간의 경계선이 한때는 강렬한 경쟁과 부산한 계획의 초점이었던 그 경계가 이제는 그저 국경 경비대와 거대한 빌딩군단이 떠나버린 채 황폐화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시간의 새로운 즉시성은 인간의 공존 양식을 바꾸어 놓는다. 인간이 공동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 인간이 어떤 일들을 공동의 일로 만드는 방식에서 일어난다. 즉시성의 시대에 합리적 선택은 결과를 회피하면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결과가 내포하고 있는 책임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 영원성에 무심하고 지속성을 회피하는 문화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인간 행동의결과에 무심하고 그러한 행동이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회피하는 도덕을 상상하는 것도 어렵다. “인간은 자기 조상들을 닮은 것보다 자신의 시대를 더욱 닮는다.”, “현재의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싶어하며 이제 미래도 믿지 않는 듯한 그러한 현재를 살고 있다.”(기 드보르) 그러나 지금껏 긴 시간 동안 책임을 지는 것과 순간을 사는 것을 이어줄 뿐 아니라, 순간성과 지속성을, 인간이 지닌 필멸성과 그가 이루어낸 성취의 불멸성을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해 온 것은 다름 아닌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신뢰였다.
4. 일
진보는 역사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믿음, 그리고 역사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내버려두는 결심을 공언한 것이다. 진보는 역사의 어떤 특징이 아닌, 현재에 대한 확신을 의미한다. 진보의 의미는 ‘시간은 우리 편이다’라는 믿음과 ‘어떤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라는 믿음으로 구성된다. 자기 확신이 진보에 대한 믿음이 자리할 유일한 기초라면, 우리 시대에 믿음이 불안정해지고 취약해진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세상을 앞으로 가게끔 하는 힘이 뚜렷하게 부족한 것이다. 액체 근대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진보에 대한 믿음의 기초는 오늘날 현저하게 금이 가고 균열되며 만성적으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둘째, 실천주체가 세상을 개선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자꾸만 불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근대 전반기에 그린 행복한 사회의 이미지들은 모두 이룰 수 없는 백일몽이거나 사람이 살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진보라는 근대의 로맨스, 즉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있고, 지금보다 더 많은 만족을 얻게 될 것이며, 그렇게 나아지는 방행으로 가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믿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조만간 끝날 것 같지도 않다. 진보 개념에서 공적인 성격이 빠져나가고 사적인 것만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신들의 지혜와 자원과 근면함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좀더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끌어올리고, 불쾌한 현재의 조건들을 수수방관하는 것은 바로 개개의 남녀들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부여잡는 것이 필요하다.(부르디외) 새로운 것은 개인들 각자가 현재를 붙잡는 것이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우리는 보편적인 유연성의 세계에서 뼈아프고 가망 없는 개인 삶의 모든 요소요소에 속속 침투한 불안정한 조건에서 살고 있다. 일은 더 이상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사명을 지니도록 원대하게 계획된 것도 평생의 천직이라는 웅장한 의도를 지닌 것도 아니게 되었다. 고체 근대와 무거운 자본주의 시대를 지배하던 가치들의 집합 속에서 부여 받았던 중심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일은 이제 더 사람이 자신을 정의하고 정체성이나 평생의 계획들을 설정하고 수정할 때 중심이 되는 확고한 축을 제공하지 못한다. 더 이상 그것은 사회의 윤리적 기초 또는 개인의 삶의 윤리적 축이 아니게(225) 되었다.
일이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을 고귀한 인간으로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되는 법이 없으며 그러한 이유로 일이 칭송받는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을 추구하고 소비자의 미학적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고 즐겁게 해주는 능력 여부로 평가되고 측정된다.(226)
1776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노동’이라는 말은 “사회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할 목적으로 행하는 육체적 힘씀”으로 풀이되고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반노동자, 숙련공, 노동조합, 정치성 등으로 그 의미가 세분화되고 확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육체적 수고를 사회의 부와 복지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것과 노동운동의 자기주장을 연결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와 연결된다. 칼 폴라니가 이야기하는 ‘대변환’은 노동이 부의 원천이 아니라 그저 상품으로 간주되고 취급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새로운 단절이 노동력과 그 보유자들이 자유롭게 이동하거나 이동되어 다른 용도에 쓰이도록 새롭게 결합되고, 다른 조합에 속할 수 있게 되었다. (--)
고체 근대는 무거운 자본주의 시대, 상호의존성으로 강화된 자본/노동이 결합된 시대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생계 때문에 고용된 상태에 의존하고, 자본은 재생산과 성장 때문에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데 의존했다. 그들이 결합하는 장소는 하나의 고정된 주소였다. 육중한 공장의 담장들이 감옥 속 두 파트너를 감금하고 묶어두었다.(233) 한편 자본과 노동을 재상품화하는 것이 정치 및 국가의 주요 기능이고 관심사가 되었다. 국가는 자본가들이 노동을 구매할 적합한 상태인지, 시가대로 지불할 능력이 있는지 감독해야 했다. 실업자들은 진정 ‘산업예비군’이었고 여하한 경우에도 일하라는 요청이 떨어질 경우 바로 뛰어들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여야 했다. 그런 일에 전념하기 위해 존재하는 복지국가는 순수하게 좌우익을 초월한 버팀목이었다.
우리가 알던 일에 대한 종말이 오고 있다는 것, 대신 계약서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단기계약과 다음번 통고까지라는 불안정한 지위가 도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가 일하는 삶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오늘날의 불확실성은 강력한 개인화의 힘이 되고 있다. 통합하기보다는 분리하며, 다음엔 어떤 식으러 분리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공공의 이해라는 개념은 점점 더 불명확해지고 실용적 가치를 송두리째 잃고 있다. 오늘날 공포, 근심, 슬픔은 혼자 감당하게끔 되었다. 공동의 명분으로 모아지는 일은 없으며, 분명한 주소는커녕 주소란 것이 있지도 않다. “각종 규제가 풀린 노동과 임시직을 늘리는 방식으로 지원되는 새로운 착취 형태에 직면하여 전통적 노조운동 형식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최근 시작된 사태가 과거 연대의 토대를 무너뜨렸으며 결속 끊기가 전투적 정신과 정치 참여의 죽음에 병행되고 있다.(부르디외)
결혼에서 동거로 옮아가는 현상에서 동거의 필요나 욕구가 고갈되면 이 결합이 언제 어떤 이유로도 깨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한다. 함께 지낸다는 것이 서로 득이 되는 함의와 상호의존의 문제였다면, 결속 끊기는 일방의 문제이다. 자본은 전례없이 초지리적이고, 가볍고, 모든 짐을 훌훌 벗어던진 채 실물 기반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이미 달성한 공간적 이동성은 지리적 구속을 받는 정치집행 주체들을 위협하여 순순히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도록 굴복시킬 정도가 되었다. 자본은 전례없이 초지리적이고, 가볍고, 모든 짐을 훌훌 벗어던진 채 실물 기반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이미 달성한 공간적 이동성은 지리적 구속을 받는 정치집행 주체들을 위협하여 순순히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도록 굴복시킬 정도가 되었다.
이익의 주요자원 특히 미래자본의 큰 이익을 만들어내는 것은 점증하는 규모로, 점점 더 물질적 대상보다는 아니디어가 되고 있다. 아이디어는 이끌리는 구매자/고객/소비자들인 사람들의 수효를 바탕으로 계속 부를 발생시킨다. 로버트 라이히는 현재 경제활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누고 있다. 아이디어를 바람직하고 시장성이 있도록 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사람들(상징 제작자들), 노동의 재생산에 참여하는 사람들, 개인서비스에 종사하는 사람들,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노동운동의 사회적 토대를 형성한 사람들(일상적인 노동자)이다.
나이젤 드리프트는 「부드러운 자본주의」(1997)에서 어휘와 인식틀의 변화가 새로운 전지구적, 탈지리적 엘리트를 특징짓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들은 ‘엔지니어링, 여러 문화, 네트워크, 통제, 리더십, 관리’ 등의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춤, 서핑, 팀, 제휴, 영향력’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들은 직전통고나 통고 자체가 없이도 조합을 이루었다가 해체되고 다시 결합될 수 있는 느슨한 조직에 관심이 있다. 결합의 유동적인 형태는 세상을 모호하고 임의적이고 불확실하고, 역설적이며, 혼돈이기까지 하다. 오늘날 기업의 조직들은 유동적이 될수록 좋다. 모든 지식은 빠르게 노화되고, 제도화된 지식을 거부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선례와 축적되어 온 지혜를 거부하는 것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교훈으로 간주된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오늘날 불안정성은 도처에 있다」(1997)에서 변덕스러운, 불안정성, 진입의 용이성 등은 삶의 조건이라고 했다. 프랑스 이론가들은 불안정성(précarité)을, 독일 이론가들은 불확정성(Unsicherheit)과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를, 이탈리아 이론가들은 불안(incertezza)을, 영국 이론가들은 불안정(insecurity)을 말한다.(256) 이들은 모두 지위와 자격과 생계의 불안정성, 지속적이고 안정적일지에 대한 불확실성, 소유물, 이웃, 지역사회의 불안함을 근거로 하는 말들이다. 구조적 실업의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진정 안전하게 느낄 수 없다. 감원, 능률화, 합리화, 경쟁력, 생산성, 효율성 등은 삶의 지반을 흐물거리게 만드는 용어들이다.
우리시대의 남녀를 특징짓는 냉소주의를 개탄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냉소주의가 그것을 부추기고 요청하는 사회 경제적 상황과 관련된 것임을 놓치면 안 된다.(부르디외) 남녀 개인들은 이 세상을 일회용품, 한번 쓰고 버리는 물품들이 가득담긴 용기처럼 보는 훈련을 하고 있다. 흐릿한 안개가 자욱하고 위험요소로 가득한 것만 같은 세상에서 장기적 목표를 세우고 집단의 힘을 키우기 위해 개인의 이익을 양보하며, 미래의 행복이라는 명분 아래 현재를 희생한다는 것은 근사하지도 않고 분별 있는 계획도 아니다.(256) 인간의 유대, 시회적 유대, 동반자적 유대가 해체되고, 파트너 중 하나가 다른 기회나 더 나은 가치를 발견하면 얼마든지 몸을 빼내는 계약이 된다. 이는 유대와 동반 관계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 때문이다. 세상의 소비자화와 인간적 유대의 해체를 연결해주는 또 하나의 고리는 소비가 홀로 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사회적 실존의 불안정성 때문에 주변 세상은 즉각적으로 소비될 상품의 총합으로 여겨진다.
유예되고, 감원되고, 개량되는 조직(나이젤 드리프트)을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신뢰의 붕괴, 정치 참여, 집단행동에 대한 의지와 쇠퇴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부르디외)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은 변형하는 사고와 현재의 사태를 재점검하려는 노력에서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현재를 확고히 장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생길 수가 없다
5. 공동체
공동체들이 살아남으려면 보호를 받아야 하고, 구성원 개개인의 선택에 의해 생존이 보장된다고 설득해야 한다. 공동체주의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은 인간적 가치의 필수불가결한 한 쌍(자유와 안전) 가운데 안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방향으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진정 통렬한 추세에 대한 응답이다. 공동체의 생존을 개인의 책임으로 여기는 한, 모든 공동체들은 추정된 공동체이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공동체주의는 근대의 삶의 가속화되는 액화에 대한 지극히 예상 가능한 반응, 개인의 자유와 안전 사이의 깊어만 가는 부조화에 대한 반응이다.
공동체주의 복음에서의 공동체는 한 민족의 공동체이거나 민족 공동체의 유형을 본떠 구상된 공동체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민족성은 인간들을 통일시키려는 다른 어떠한 토대와도 다르게 역사를 자연화하고, 문화를 자연적 사실로, 자유를 동의된 불가피함으로 드러내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둘째, 일체의 다른 충성심들보다 민족의 단결을 우위에 두는 민족국가는 법적 판단력과 효력을 가진 위상까지 공동체를 밀어 올리는 노력을 기울인 유일한 단위였다. 애국적/민족주의적 신조에서의 우리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뜻한다. 반면, 그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뜻한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끼리도 동질적인 특성 못지않게 이런저런 차이점들이 있지만, 같은 면들이 이를 축소하고 완화하고 중화시켜준다.
공동체의 이미지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갈등은 차치하고, 차이점을 느끼게 할 만한 모든 것을 깨끗이 정화한다. 이런 식으로 공동체적 연대감의 신화는 일종의 정화의식이 된다. 공동체들 안에서 이 신화적 공유가 뚜렷이 말해주는 바는 서로 같기 때문에 이들이 서로 속해 있고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우리라는 느낌, 비슷해지려는 욕망을 표현한 이 느낌은 인간이 서로를 더욱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게 해주는 하나의 방편이다.(리차드 세넷, 「순수한 공동체의 신화」, 1996)
비슷함을 나누는 공동체 속에서 불쾌한 질문은 하지 말아야 하고, 정화를 통해 획득한 안전이 믿을 만한가의 문제 역시 절대로 질문해서는 안 된다. 공동체를 모색하는 일은 소요와 적대감의 바다 속에서 아늑하고 쾌적하고 평온한 섬을 찾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근대에 들어 민족은 국가의 또 다른 얼굴이자 국가가 영토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는 일에서 주요 무기였다. 안전과 지속성에 대한 보증으로 민족에게 부여한 신ㄹ히와 흡인력의 대부분은 민족이 국가와 주민의 확실성과 안전을 하나의 지속적이고도 믿을 만한기초 위에 놓으려는 목적을 품은 행동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민족을 국가와 가깝게 연결시켜서 별로 얻을 것이 없어졌다. 열광적 애국심으로 강화되고 결속되었던 대량 징집된 군대가 엘리트주의적이고 냉담한 전문직 첨단기술자 단위들로 바뀌게 됨에 따라 국가 차원에서는 민족의 동원 잠재력에서 그다지 기대할 것이 없어졌다. 수백년간 지속되었던 민족과 국가 사이의 로맨스는 이제 끝이 날 참이다. 이혼까지는 아니지만 결혼관계는 사라지고, 동거를 위한 합의사항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국가의 정치적 자유는 전지구적 자본에 의해 쇠퇴되었다. 새로운 전지구적 규칙을 따라 벌이는 게임을 거부하는 것은 가장 잔인하게 처벌 받을 범죄이며, 그 처벌은 경제 차원에서 행해진다. 차관 대출이 거부되고, 부채 탕감이 되지 않는 것이 그 예이다. 지구화는 공동체 간 평화로운 공존이 아닌, 적대감과 투쟁을 악화시키는 데 훨씬 더 성공하고 있다.
폭력은 국가차원에서부터 공동체 차원으로 강등된 채 규제 풀린 상태가 될 것이다. 제도적 수목구조(들뢰즈, 가타리)의 틀이 없는 속에서 사회성은 폭발적 표현 양식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매우 다양한 정도의 지속성을 지닌 형식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만성적으로 깔린 불안정 상태는 일정한 보상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 공백을 메우는 적절한 방법은 계속 ‘화약고 사회’ 상태가 유지되어 처벌을 효과적으로 피하면서도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것이다. 화약 사회에는 반드시 폭력이 태어나야만 되고 그것이 계속 살아 있어야만 한다. 그런 사회에는 생존을 위협할 적, 집단적으로 처형하고 고문하고 절단시킬 적, 만일 전투에서 지게 될 경우, 상대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을 인류를 저버린 범죄의 방관자로 선포하고 기소하고 처벌받도록 하기 위한 적이 반드시 필요하다.
짐 보관소로서의 공동체는 평소에는 판이한 개인들 내면에 잠들어 있는 유사한 관심사에 호소를 하는, 다른 관심사들은 잠시 방치되거나 아예 망각된 채로 젖혀두고 모두 모여들게 만들 어떤 구경거리를 필요로 한다. 짐 보관소 공동체는 잠시 존재하는 하나의 행사로서, 구경거리들은 개인의 관심사들을 집단적 이해와 뒤섞지 않는다. 구경거리들이 무거운 근대의 공동의 명분을 대시하게 되었다.
6. 사회학적 글쓰기의 지향점
“시인이 글을 쓴다는 것은 ‘항상 거기 있는’ 그 무언가를 뒤에 숨긴 벽에 부딪힘을 의미한다.”(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1986) 이런 점에서 시인의 과제는 역사의 저술과 다르지 않다. 역사의 저술 역시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백하고 자명하며 ‘우리 모두 그걸 믿잖아’하는 lr의 진실들을 대변하는 자들은 가짜 시인이라고 쿤데라는 말한다. 사회학자들도 시인처럼 숨어 있는 인간의 가능성들을 발굴하는 진짜 시인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해야만 한다.
시와 역사는 인간 잠재력에 있는 오토포이에시스(자기창조, 니클라스 루만)의 두 평행적 흐름이다. 사회학은 이 두 흐름과 나란히 흐르는 제3의 흐름이다. 적어도 사회학이 인간 조건을 파악하고 그것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면서 그 인간 조건 내에 머물러야 한다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325) 사회학이 전달해 줄 수 있는 종류의 계몽은 자유롭게 선택하는 개인을 그 대상으로 하며, 개인들의 선택의 자유를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회학의 당면 목표는 설명의 문이 닫힌 경우, 그 문을 다시 열어 이해를 돕고자 함이다.
고체 근대의 후원 아래 태어나고 발전한 정통 사회학이 인간의 복종과 순응의 조건들에 온 신경을 썼다면, 액체 근대에 걸맞는 사회학이 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자율성과 자유의 촉진이다. 그런 사회학은 개인의 자각과 이해, 그리고 책임을 반드시 그 초점으로 삼아야 한다. 고체화되고 관리 감독되는 근대 사회의 주민들에게 주어진 대립 지점은 순응인가 이탈인가였다. 오늘날의 액화되고 중심을 해체당한 단계의 사회에 주어진 대립지점은, 진정 자율사회로 가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 꼭 직면해야 할 대립 지점은 책임을 떠맡을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굳이 그 행위자가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어떤 피난처를 찾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확고하고도 신뢰할 만한 보장이 없이, 우리가 대단히 많은 서러 다투는 가치관들, 규범들, 삶의 방식들 가운데 처해 있다는 것은 위험 천만하며 값비싼 심리적 대가를 치르는 일이다. 외국인혐오, 인종편견, 희생양, 차이에 대한 이해 부족 등에 대해 선입관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 사회학의 임무이다. ‘만일 사회가 그 사회에 대한 질문을 멈춘다면 사회는 아픈 것이다.“(카스토리아디스)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이는 장기적으로 치료로 한걸음 다가감을 의미한다. 바우만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사유에서 발견과 창조, 설명과 이해, 진단과 치료는 같은 궤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방임처럼 죄 많은 것도 없다.(부르디외) 인간의 불행을 평상심으로 지켜보면서 TINA(더 이상 대안이 없다, There is no alterative)라는 주문을 외우며 양심의 가책을 달래는 것은 그 불행에 공범이라는 뜻이다.
사회학을 하고 사회학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되, 덜 불행하게 혹은 전혀 불행하지 않게 살 가능성, 나날이 억제되고 간과되고 믿지 않게 된 이 가능성을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발견은 시작일 뿐, 인간적 불행과의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에서 그 척도를 밝히고 인식함으로써 가장 개인적이고 사적인 불행을 포함한 모든 불행의 사회적 원천과 투쟁하는 데 그 자유를 온전히 사용하도록 힘쓰지 않는 한, 그러한 전쟁은 부분적 성공도 거두지 못할뿐더러 진지하게 수행되기도 어렵다. 사회학을 하는 길에서 ‘참여’와 ‘중립’을 선택할 여지는 없다. 참여하지 않는 사회학은 아예 불가능하다.
참고문헌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근대, 이일수 옮김, 강, 2005.
인디고연구소 기획, 희망, 살아있는 자의 의무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궁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