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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불교강의]
제 24강 : 생사가 곧 열반
감사합니다. 강의가 점점 무르익어가고, 제 마음은 조급합니다.
근데, 방청객에 보니까 훌륭한 제 친구이며, 교수분이 와 계신데, 잠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인이고, 동경대 인류학과 훌륭하신 분입니다. 서울대학에 초빙. 잠깐 인류학적으로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이토오 아비토(1943-) 동경대학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줄곧 교수로 봉직. 1972년부터 30년간 지녿에서 필드웍. 한때 하바드 대학에서 도올과 같이 수학. 동아시아 사회개발의 여러 측면을 폭넓게 탐구.)
한국어를 잘해요. 진도에서 여태까지 30년 가까이 필드웍을 모델로 해오셨고, 훌륭한 논문을 쓰신 분. 인류학자로써 몇 마디,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성격같은 것 말해주실수 있어요? 어려워요? 일본에 이런강의 있나요? 있을 수 있나요?
있을 수 없어요. 일본의 대중불교는 감각적이며 논리적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유형의 논리적 설득이 본질적으로 어렵다. 일본인들은 종교생활을 원리적인 교리를 탐구한다던가 보다는, 감성적으로 받아들인다. 일본인들은 모든 것을 구체적 물건이나 실천적 행동을 통해서만 파악한다. 그래서 원리 자체의 탐구를 회피한다. 이런 것은 원시사회의 특징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들어보니까 일본에서는 오히려 불교를 원리적으로 이해하려기보다, 실천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한국 사람들 상당히 원리적이죠. 한국인들은 원리적이며 추상적인 언어를 잘 구사하고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 이런 것은 고등한 사회의 특질이지만 그 나름대로 또 문제가 있다. (일본인 : 즉물적 -구체적 한국인 : 원리적 -추상적)
그렇지만, 일본이 교학들도 이런 불교 대단한데, 어떻게 생각해요?
일본은 교학이나 신학이 매우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제한된 나카마 속의 현상이며 보편적 현상은 아니다.
굉장히 수준이 높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한된, 일반사람들은 피하려고 함. 일본 교학들이 굉장히 발달해 있는데, 그런데 그건 소수이고,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 (일본문화는 종착역문화이다. 종점에는 모든 이질적인 요소들이 다양하게 공존한다. -도올-) 동양 속보다 밖, 주변에 있었죠. 일본문명은 동아시아 대륙질서의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구체적 물건이나 실천을 통해서만 추상적인 것을 파악하려 했다. 물질적인 것, 실천 통해서만 아주 추상적인 세계에 접근한 거 같습니다. 일본문명은 동아시아에서도 주변적인 문명이어서, 오히려 물질적, 실천을 통해서 추상적인 것을 파악하려 했다. 그런데 반해서 한국은 대륙 질서에 있었기에, 원리적인, 한국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고등한 문명사회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문명 이전의 원시적이고 즉물적인 특질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일본은 문명사회 이전에 정열적인, 지금 세대에서도 귀한 원시사회. 세련된 원시사회. 감사합니다.
거기 동신동에 서울재즈아카데미라고 학원같은 기관같은게 있어요. 거기 교장선생님을 잘 아는데, 우연히 만나서 김홍탁(1933-) 한국 최초의 록 그룹 키보이스의 기타리스트로서 활약. 작곡가. 음악컬럼니스트. 현재 서울 재즈 아카데미 원장. 한국 대중음악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내가 최근에 불교 원시 경전을 이야기 했는데, 그거 가지고 노래. 이야기가 되어 가지고, 재즈아카데미에서 불경을 재즈로. 찬불가. 닭살이 돋는데, 범패. 아름다운 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피아노같은 것으로, 그러니 내가 절간에 가면 끔직한데, 아예 재즈로 하는 게 낫겠다. 범패라는 게 흥이나는 대로 부른거야. 그러니까 그래서 옛날 범패는 진짜 재즈다. 그 정신에서 해서, 제가 27강까지 강의하고 28강 불교 전체 태마를 가지고 노래로 하나의 위대한 쇼를 만들어보려고 기획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사방에서 참여하겠다고, (중앙대 박범훈(1948-) 중앙대학교 음악과, 일본 무사시노 음대. 동국대학교 철학박사. 현재 중앙대학교 부총장. 최근에는 월드컵 개막식곡을 작곡하였다. 한국의 국악발전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고, 8-90년대 새로운 국악적 찬불가운동을 일으켰다.) 국악적인 요소로 찬불가를 만들어보자. 국악운동을 쭉 해오셨기 때문에, 여기 몇 개 선보이고 싶다. (김성녀 - 도올이 참여한 미추극단의 주역으로서 병창, 춤, 연극, 드라마, 뮤지컬, 마당놀이의 다양한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 현재 중앙대 국악대학 교수.) 경기 서도 소리. 이쪽에 대가죠. 김영임 그 분 하고 (김영임 - 이상배, 묵계월의 문하생. 경서도 소리의 명창으로 꾸준히 학업을 쌓았으며 1997년 한국방송대상 수상. 현재 중앙대 국악대학 겸임교수) 둘 다 교수로 있습니다. 그 분들을 모시고, 그 다음에 종합 예술학교에 또 교수로 있는 (원일(1967-) 추계예술대, 중앙대 대학원 졸.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연주와 작곡 양면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 신세대 음악의 리더로서 인정받고 있다.) 원일, 타이틀 뮤직을 만드신 분입니다. 원일 교수가 재즈와 합주해 보겠다. 또 우리나라의 해금의 특수한 대단한 주자인데, 강은일이라고 (강은일(1967-)한양대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학부, 대학원을 마친 해금 연주자로서 컨템포러리 감성을 자유자재롭게 구사하여 대중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강은일 양이 또 재즈와 협연하겠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호화케스팅. 재즈뮤지션과, 국악 기라성 같은 분들을 묘셔다가 음악의 축재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특별한 무대를 만들겠습니다. 28강을 기대하십시오.
인도인들 상상하는 모든 것들이 나와요. 난생. 태생별로 나누어 본 거죠. 난생의 존재들이죠. 태생. 태아를 가지고. 우리말로, 포유동물이 되나? 습생. 이라는 것은 물에서 태어나는 것들, 모기나, 곤충. 했다고 해요. 습생이고. 화생, 도깨비 화. 일본 사람들은 다케모노. 화생이라는 것은 그런 근거없이 태아나 인연의 근거없이 갑자기 태어나는 것. 지옥의 중생이라든가, 신이라든가, 이런 거에요. 태마가 달라져요. 형체가 없는 존재란 무색계의 신들이다. 형태가 있는 존재들. 무생은 형태가 없는 존재들. 지각이 있는 존재. 지각이 없는 존재. 우리는 유생이죠. 천상의 존재라든가, 신이든가. 이렇게 생각했어요. 비유상비무상.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존재들. 어려워요. 신들 같은 거일 꺼에요. 지각이라는 테마로 분류하고. 이렇게 하면, 모든 중생이 들어가요. 일체중생 (일체중생- 난생, 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비무상 모두) 하여금, 무여열반으로 들어가게 했다. 남김없는 찌꺼기가 없는 열반으로 들어가게 했다. (열반 - 초기 경전에서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의미했다.) 무여열반이라는게 죽음이라는 말과 통하죠. (유여열반 : 살았을 때 도달하는 열반 무여열반 : 죽었을 때 도달하는 열반. 남김없는 열반이라고 했는데, 원래 소박한 의미로, 죽음이란 의미로 해석할 순 없다. 마음의 상태를 의미했다.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멕베스의 마지막 하는 이야기를 나는 항상 대학교 때부터 외웠는데 세익스피어의 맥베스 5막 5장에 나오는 이 맥베스의 절규는 불교가 말하는 공의 사상을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애절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 자기가 맡은 시간만은 스테이지 나오면, 시간만은 안달하는 서서 무대위에서 떠들지만, 지나가는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 우리 인생이 걸어다니는 그림자 같은 존재인데, 자기 인생에서 뭐가 어떻게 되면, 애를 써보려는 배우. 지나가면 누가 인정해줘요? 지나가면 그냥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 And then is heard no more. 그것은 지나가면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일 뿐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인생이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시끄러운 소리와 광포로 가득하지만, Signifying nothing.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이야기 너무 비참합니까? 셰익스피어가 말하는 인간의 모습. 이런 테마. 여기를 봐도 불교가 있다.
인생의 무상함. 오온의 그림자처럼 걸어다니는 존재.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그림자같은 존재가 여기서 마음의 편안을 얻느냐? 이것이 가장 큰 테마. 그래서 나는 그들을 열도해주려고, 영원한 마음의 평화를 주려고 그렇게 노력했느니라. 이처럼 난 헤아릴 수도 없고, 중생들 도한다고 했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다. 45년 동안 멸도 한다고 했는데, 나는 아무도 구제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이죠, 싯달타는 자기 인생, 논리적으로 따지면 전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이런 생각을 해보세요. 난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으로 자랐어요. 예수의 일생을 정직하게 따져봅시다. 그 분 인간으로 살았던지 간에,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고 살았던 게 아니에요. 자기는 항상 신의 아들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인류의 죄를 가지고, 우리가 그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보든 안보든 간에, 거기에 철저히 따라 산 사람. 난 신의 아들, 인간의 허울을 썻을 뿐이다. 거지왕자가 어떻게 해요? 얼굴이 똑같이 생긴 왕자. 거지 옷을 입는 순간, 거지가 되어 버리고, 이 사람은 여기서 거지 옷을 입고 인간 세상 속에서, 아무리 왕자라고 해봐야, 세상 사람들 너 거지 아니냐? 박해하잖아. 난 여기 사람이 아니고, 난 왕궁에서 산 사람이다. 설득해봐야 안되잖아. 온갖 세상을 경험하잖아. 예수는 하나님의 성부, 성자, 성신을 가진 성스런 존재. 잠깐 인간의 육신으로 빌려서 나타났는데,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2 인간세상에 와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봤자 누가 알아줘? 그래도 여전히 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건 위대한 거에요. 미친 것이든 아니든 떠나서. 인간이 그런 위대한 생각을 가지고 산 것 위대한 거에요. 나중에 결국 이해가 안 되었잖아.
결국 십자가에, 그러면 지금 보세요. 십자가에 못이 밖혀서,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의 열반의 순간이다. 잠시 빌렸던 거잖아요. 죽음과 동시에 자신의 본래 모습이 회복되는 거잖아요. 예수는 죽는 순간에 슬퍼해야 해요? 기뻐해야 해요? 기뻐해야죠. 본래 왕궁으로 가니까. 빛이 어두움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오 주여, 나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쁜 얼굴로 죽어야 하는 데, 당연히 그렇잖아요.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절망의 탄성을 지르잖아요. 이게 뭐에요. 정직하게 아무도 기독교학자들이 해석하는 자들이 없어. 이게 뭐야? 해석이 안된단 말이야. 뭐냐? 여기서 소승에서 드라마틱 대승. 해탈 생각해보세요. 거지 왕자가 윤회의 세계. 윤회의 세계 속에서 거적을 입고 산 거에요. 불교, 기독교 같이 이해한다면, 열반에 들어가는 거잖아. 열반의 순간에, 그 순간에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나는 사람이라는 거야. 그래서 죽음이 두렵다는 거야. 세계를 긍정하는 거야. 이 세계가 리얼하다는 거야. 우리가 살고 있는 윤회의 세계가 대승적 외침이라는 거야. 예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침은 거지 옷을 입고 살았던 윤회의 세계가 곧 열반이라는 대승적 외침이었다. 기독교도 기독교에 갇혀 있는 정신을 애매하게 해석하면 안되요.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기뻐 날뛰며 춤춰야 되요. 예수는 죽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한 인간으로서 죽었다. 바로 그러기에 그의 영원함이 있다.
영지주의 문서에 보면, 기뻐 날뛰면서 가는 예수도 있어요. 영지주의 체노보스키온 문서에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 기뻐 날뛰면서 자기의 죽음을 슬퍼하는 인간들을 조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학자들이 웃는 예수라고 이름지었다.
지금 여러가지 문헌이 있다고. 복음서에는 하필 그렇게 절망감에 주여주여, 나를 어찌하여 버리십니까. 나는 천당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걸 선택했단 말이에요. 이게 기독교의 위대한 점이에요. 오늘의 27서 형태의 신약성서는 AD 4세기에나 채택된 것이다. 따라서 그 전에는 수 없는 복음서와 사도서한들이 존재했다. 오늘의 4복음서의 채택이야말로 기독교를 위대하게 만든 역사적 사건이다. 만약에 그런 걸 빼면 날라리가 되는 거에요. 그러면 사기종교가 되는 거에요. 웃는 예수가 되었다면 기독교는 피안, 내세, 초월만을 외치는 무당종교가 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도올의 저서. 절차탁마대기만성을 보라. 기뻐하는 경우에, 주여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싯달타가 나는 중새을 제도하려고 했으나, 아무도,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는 일체중생을 멸도한다 하였으나 아무도 멸도하지 않았다. 대상이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란 말이에요.
지금 중생 제도, 열반의 개념.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왜 그런가? 여기 하시는 말씀이. 만약 보살이 아상. 아상이라는 것은 나의 모습. 여기에 여러가지 설이 나와요. 산냐. 아트만이에요. 아트만의 산탸. 인상이라는 것은 인상 pudgala 아상 atman sattva 수좌상 jiva 물론, 산스크리트 원문, 논리가 있어요. 아트만, 브라만 전통에 대한 부정이 있고, 뿌드갈라 윤회에 대한 비판. 인상(pudgala-samjna) 소승 독자부에 대한 비판. 윤회 주체로써의 뿌드갈라, 독자부를 비판한거다. 중생상이라는 것은, 불교 초기 대승에 대한 자체 반성으로 볼 수 있다. 어떠한 중생, 천하게 본다든가 벗어난다. 수좌상, 동시대의 쟈이니즘의 명아의 비판. 순수 영혼으로 설정된 개념. 아상을 보면, 이렇게도 볼 수 있단 말이야. 개인으로 보자면, 타인을, 중생 더 넓은 의미로 모든 중생, 수자라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 그렇게 개념을 확대시켜 볼 수도 있고. Eho Man Life All Beings 개념의 외연확대로 해석될 수도 있다. 어떤 중국적인 맥락에서 보면, 아상, 너, 상들. 내가 있고, 너가 있다. 중국말, 타인. 중국에는 아와 인이 대립하면서 성립하는 상. 고귀한 수명을 누리는. 수좌상 - 주생상 고귀한 존재 천한 존재 금강경에 항상 반복되어서 나오는 말이여. 아,인,생. 는 금강경에 계속 반복되어지는 테마다. 그 요체는 나라는 산냐이다. 반야에서 있잖아요. 색즉시공, 그렇게 했잖아요.
산스크리트어에는 3단계. 색성시공. 색성시공, 공성시색(제1단계) 법월가 738년에 번역한 ~에 나오는 말. 앞에 나와요. 그러면 앞에 색성시공, 공성시색. 모든 존재는 존재로써 실체를 가지는 게 아니라, 공하다는 것. 공인데,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는 하는 것은 2단계. 공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만, 모든 존재 공하다. 사로잡힌단 말이야. 내가 있잖아. 존재가 있단 말이야. 그러나 끊임없이 변하는 속에서 가변적인 존재. 색은 공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이 가학적인 것에서 존재하는 존재다. 그래서 가란 말이야.
색즉시공, 공즉시색. 3단계.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닌, 떠난, 그래서 공가중. 불교에서 제일 중시하는 지관론. 천태대사 지의(538-597)는 법화경을 해석하는데 이공가중의 일심삼관론을 중심으로 지관의 사상을 전개했다. 공가중.
아시겠어요? 깨달음 있지만, 공이라면 모두 없어지는데, 가, 변하는 속에서 살잖아요. 가학적인 세계 인정안할 수 없어요. 공, 진제라고 한다면, 가는 속제. 그런데 궁극적으로 진제, 속제를 떠나야 중도에 간다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하는 말이, 사리자야, 제법공상은 불생불명, 불구부정, ~. 반야심경이야기여. 그 다음에 공즉무색, 무수산. 색도 없고, 수도없고, 행도 없고, 식도 없고, 공 속에는 가학적 존재는 안한다고. 눈도없고, 몸도 없고 생각도 없다. 육경의 세계 없고,
여기서는 6개의 식. 18개의 모든 불교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다 없애버려요. 반야심경은 6근, 6경, 6식의 18계를 모조리 부정했다. 이것은 그 이전의 모든 소승의 교학을 다 부정한 것이다. 감각기관도 없고, 의식도 없고. 반야심경처럼 철저하게 반불교적인 게 없어요. 반야심경은 철저히 반불교적인 경전이다. 아무것도 없다. 무무경. 내지무노사. 그게 무슨 이야기냐면, 12연기에서 뭐뭐~했잖아요. 여기서 무명도 없고, 무명이 없다고 했잖아요. 쭉 12개 짬뽕한거에요. 최후로 노사도 없다. 중요한 것은 무명이 없다는 것도, 거기다 이게 없어지는게 귀한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무명이 없으면 밝음도 없지. 선도 없으면 악도 없는 거에요. 진리가 없으면 허망도 없다. 선이 없으면 악도 없다. 깨우침이 없으면 무명도 없다.
그러니까 반야심경에 내가 감동을 받는 거는, 무명도 없고,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도 없다. 깨달음도 없고, 깨달아질 일도 없으니, 고도 없고, 집도 없고, 멸도 없다. 4성제, 부처님 가르침인데, 부처 평생 가르친 게, 고집멸도가 다였잖아요. 고토의 원인이 있다. 고통을 멸하는 방법이 있다. 설하는데, 무슨 고통의 원인도 없다. 도대체 안다고 하는 것이 없다. There is no cognition, no attainment and no non-attainment. 뭘 얻어서 깨달음에 이른다도없어. 열반도 없으면, 윤회의 현실도 없는 거에요. 열반이 없으면 윤회도 없다. 우리는 자꾸 윤회라는 현실이 있고, 아름다운 세계로 간다. 부처님, 이 현실에서 열반이 따로 있다는 생각에서 버려야 니가 반야에 이를 수 있다. 윤회를 떠난 열반이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비로소 반야에 이를 수 있다.
그러니까 하시는 말씀이 뭐에요? 대승불교, 생사즉열반이요, 우리의 죽고사는 현실이 즉 열반이요, 이 번뇌의 현실이 곧 깨닳음이란 거야. 그렇잖아요. 깨닳음이 없는데, 깨닳음이라는 건 번뇌가 있기 때문에 깨닳음이 있는 것이고, 깨닳음이 있기 때문에 번뇌가 있다는 거야. 웃긴 이야기야. 불교의 소승불교 모든 가르침을 싹 쓸어버리는 거야. 반야심경처럼 무서운게 없어요. anti-Buddhistic statements 반불교적 명제들 원시적으로 표현한것이 금강경. 나중에 반야심경, 금강경 태마를 명료하게, 도끼로 착착 부셔요. 대승운동의 위대한 것. 왜 그런가 하면서, 만약 보살이, 인살이 있고, 수자상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다. 이 세계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 구세주의 의식이 있다면 이 세계를 구하지 못해요. 이게 기독교의 맹점이고 위대점이고 그래요. 구세주의 의식에 사로잡힌 자는 영원히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없다. 난 하나님의 아들 구원, 발심은 좋지. 자기를 죽여야지. 자기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로 나아있는 것은 안되요. 자 여기까지 나가는 것이죠.
또한 이제다시 수보리야. 보살은 법에 있어서 법에 머무르는 것이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 그 법에 머무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 세계에 머물지 아니하면서, 보시를 행하고. 색성향위촉보. 이렇게. 색에 머물러 보시를 함이 없어야 하고, 쭉 나가는 것이죠. 나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향 미촉법에 머무르는 것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보시해야 함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테레사 수녀가 훌륭한 굶주린 사람들을 보시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위대한 게 아니라, 보시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지들이 위대한 거에요. 만일 테레사 수녀가 보시할 기회가 없었다면 성녀가 안되었죠.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보시한다는 마음으로 살았을 거에요. 항상 기독교 성경에서도 오른손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기도하고 마음에 안든단 말이야. 나타낼려고 하고. 이런 것들이 전부 잘못된 것. 법에 머무르는 안돼. 모두 머무르면, 저 여자가 아름답기 때문에 보시. 색에 머무는 것. 그렇잖아요. 모든 것에 머움이 없이 보시를 해야만 그것이 진정한 보시니라. 그게 보시바라밀이다. 그거야. 그러한 인간이 보시를 할 때만이 보시바라밀이 되는 거에요. 누가 준다고 할 적에 동전을 준다고 할 적에, 저 사람도 없는 것이고, 나도 없는 것. 아무것도 없을 때 보시바라밀. 6바라밀 중 가장 중요한 것. 지혜의 바라밀. 지혜의 바라밀 가르친 게 반야심경이여. 기존의 모든 불교의 이론을 부정합니다.
부처님께서 난 평생 제도한다고 하였으나, 아무도 제도하지 않았다. 아상이 있으면, 제도할 수 없다. 얼마나 멋있어요? 현실적으로 종교의 위대성은 보시에 있습니다. 기독교도 많은 구제를 하고, 그러나 그러한 보시기관으로써 활약, 평가합니다. 이러한 대승정신이 없다면 무서운 해악. 보시안하고, 쓰러지는 게 맞죠. 그래서 살사람 살게 되어 있어요.
나는 세계 종교사를 생각할 때, 훌륭한 점 다 있습니다. 종교의 보시정신은 위대하다. 그러나 대승의 자아부정사상이 없다면 그 위대함은 비상보다 무서운 독이 될 수 있다. 자아 부정사상이야말로, 이것만 없었다면 얼마나 해악을 끼쳤을까? 대승정신이 없는 한, 세계종교로 인정받을 수 없다.
오늘 대승의 정종분을 끝냈습니다만, 오늘 깊은 생각을 하시고, 오늘 선진국을 향해서 가는데, 금강경이 우리 나라 상식에 깔리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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