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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61. [역경의 열매] 최찬영 (1-20) 내 삶은 한마디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나이 85세. 내 이력에는 유난히 최초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된다. ‘해방 후 첫 한국인 선교사’ ‘아시아인 최초의 태국과 라오스 성서공회 총무’ ‘1978년부터 92년 은퇴할 때까지 아시아인 최초의 성서공회 아시아태평양지역 총무’ 등. 이 모두가 능력에 비해 분에 넘치는 광영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난 부족한 사람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일생을 한 문장으로 축약하라면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
난 오랜 시간 언어와 문화가 다른 외국에서 살아왔다. 고국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하나님은 92년에 은퇴한 이 늙은이를 17년 만에 미국 LA또감사선교교회를 통해 또다시 선교사로 파송시켜주셨다. 그러니 난 예비역이 아닌 현역 선교사다. 전에 누군가 나에게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다시 살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선교사의 삶을 그대로 되풀이할 수만 있다면 또 그 길을 가겠다”고 했다. 크리스천에게 선교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특정한 사람만 선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다. 또 선교사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상상한다. 물론 이국땅에서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현지인들과 부대끼면서도 생각지 못한 위로와 격려가 있다. 역경(逆鏡)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양지차다. 크리스천은 역경을 순경(順鏡)으로 반전시키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본격적으로 내 얘기를 시작하려 한다. 아니 나를 이끄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섭리를 나누려 한다. 2009년 말 아내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마치 연어의 귀향처럼.
“여보, 이제 우리 한국에 돌아가 살면 어때요? 동생 순명이네 가서 지내보니 한국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옛날 부산에서 환자를 돌보며 느꼈던 그런 향수가 남아있더라고요. 병원과 치료시설, 양로원 등 우리 같은 노인들이 지내기에도 모든 것이 편하게 잘 갖춰져 있어요.”
의사지만 선교사의 아내로 살아왔던 ‘내 사랑’, 김광명. 그는 항상 내 뜻을 존중해주었다. 일평생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은 내 몫이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아내가 먼저 고국행을 제안했다.
“후배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베트남과 태국 등지를 돌아보고 2주 후에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잘 생각해보구려. 이번에는 당신이 결정하시오. 기쁘게 당신의 뜻을 따르겠소.”
선교지 순방을 마치고 미국의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아내는 인생을 정리라도 하듯 아스라한 기억 속에 자리한 고국을 깊이 느끼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난 어디에서 살아도 좋다고 생각해 왔다. 때문에 그동안 고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접었다. 모처럼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이번 한국행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걸 확신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당부를 하시는 게 느껴졌다. “한국에서 여생을 아내와 함께 보내거라. 한국교회와 선교에 조금이라고 유익한 사람이 되어라. 내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 [역경의 열매] 최찬영 (1) 내 삶은 한마디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 [역경의 열매] 최찬영 (2) 오늘 나를 만든 건 할머니의 신앙 유산
* [역경의 열매] 최찬영 (3) 공산당 들끓는 중국 떠나 해방된 조국으로
* [역경의 열매] 최찬영 (4) 고아원 아이들 가르치다 신학교 입학
* [역경의 열매] 최찬영 (5) 공산군 총칼 앞에 신학교 학생증이 날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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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찬영 선교사=1926년 평양 출생. 장로회신학교 졸업. 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선교사 파송. 태국과 라오스 성서공회 총무, 성서공회 아시아태평양 지역총무, 미국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 한국학부 교수 역임. 현재 미국 LA 또감사선교교회 선교사, GEDA인터내셔널 총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역경의 열매] 최찬영 (2) 오늘 나를 만든 건 할머니의 신앙 유산
선교사는 나에게 숙명적인 단어처럼 느껴진다. 우리 가족에게 친할머니는 신앙의 조상이다. 할머니는 1900년대 초 아들(내 아버지)이 아홉 살 되던 해, 한 서양 선교사의 전도로 믿음생활을 시작하셨다.
“어서 오십시오. 차암 반갑습네다야.”
훤칠한 서양 선교사가 할머니를 친절하게 맞아주면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서양식 발음이 익숙지 않아 생소했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나님인가 하는 분이 그렇게도 용하시다면서요. ‘야소(耶蘇)교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정말 우리 아이 병도 고칠 수 있나요?”
당시 내 아버지는 중병을 앓아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백방으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해 보았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눈물과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던 중 할머니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가장 능력 많으신 분, 하나님을 전하는 선교사가 있다는 거였다.
“무당이 하는 것처럼 굿을 할 필요는 없습네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병든 아이도 나을 수 있습네다. 우리 같이 기도하십세다.”
할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선교사를 따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간절한 기도에는 응답이라는 선물이 있다. 선교사와 할머니의 기도 후 아버지의 병은 급속도로 호전돼 갔다. 짙은 어두움 가운데 밝은 빛을 본 할머니는 집안 내 우상 단지는 물론 집 앞에 있는 서낭당도 없애버렸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했소.” 소스라치게 놀란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물으셨다.
“제가 했어요.”
“뭐라고. 제정신이요. 귀신이 우리에게 복수해 올 텐데.”
“야소교를 믿어야 삽니다.”
할아버지는 아내가 서양종교에 미쳐 있다고 생각하니 암담해졌다. 어느 날에는 할머니에게 칼을 들이대고 교회를 가지 못하게 했다. “남편 말을 무시하니, 아예 없애버리겠소.” 할머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 희망은 죽어 천당에 가는 것인데,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며 당돌하게 맞받아쳤다. 이후 할머니는 남편과 갈등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고 결국 남편을 장로로 만들었다.
인생에 있어서 만일이란 가설은 그다지 의미가 없겠지만 할머니의 신앙 유산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내가 있을까 아찔한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내가 두 살 때 고향을 떠나 중국 안동 지방으로 이주했다. 당시 안동에는 훌륭한 목사님이 많았다. 특히 아버지가 장로로 봉사하셨던 육도교회에는 방계성 목사님이 당시 전도사로 봉직하고 계셨다. 방 목사님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시다가 오랜 세월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해방과 더불어 풀려난 그는 공산 치하에서 다시 투옥되고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민족의식이 투철한 방 목사님의 지도 하에 신앙생활을 한 아버지의 나라 사랑은 남달랐다. 당시 일본군의 영향권에 있던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창씨개명이 강요됐다. “사람은 부모를 바꿀 수 없듯이 성씨와 이름을 바꿀 수 없단다.” 아버지는 창씨개명과 관련해 나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연유로 난 학교에서 곤욕을 치르기 일쑤였다. ‘최’라는 한국 성을 고집하는 사람은 우리 학교에 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모태신앙인이었지만 나는 아직 어린 터라 민족의식이 확고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다르게 취급받는 게 싫었다. 그러면서 사춘기가 찾아왔고 인생에 대한 고민과 방황이 시작됐다. 신앙에 대한 의문과 미래에 대한 걱정도 생겨났다. 그때 교회에서 대부흥사경회가 열렸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3) 공산당 들끓는 중국 떠나 해방된 조국으로
사경회를 인도하러 오신 분은 이성봉 목사님이셨다. 한겨울이라 눈이 많이 내렸고 매서운 칼바람까지 몰아쳤다. 그렇지만 이 목사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새벽 4시30분 집회에 참석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3년간이나 훈련시켰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계집종 앞에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데 성령의 뜨거운 바람이 내 가슴을 후려쳤다. 순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뜨거운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체험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진다. 이 목사님의 설교는 권위와 영력이 배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다. “우리가 기도하며 기다리던 해방이 되었으니 이제는 서울로 가야 한다. 여보, 내가 먼저 가서 자리를 알아보고 올 테니 그때까지 아이들하고 기다리시오.”
아버지는 간단하게 짐을 챙겨 떠나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오셨다. 지병인 위장병이 도져 서울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길로 몸져누우셨다. 그리고 두 주일 후 어머니의 지극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 마흔이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와 맏아들인 나, 누이 하나, 어린 동생 둘. 다섯 식구는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여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머니는 네 남매를 돌보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셨다. 그리고 두어 달 뒤 나에게 서울까지 갈 차비를 마련해주셨다.
“찬영아, 너도 알겠지만 공산당이 들끓는 이곳에서는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돌아가신 아버지 말씀대로 해방된 조국의 서울에 가야만 내 나라 내 땅에서 마음껏 예수님을 믿으며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 같구나. 네가 아버지 대신 서울에 다녀오도록 하여라.”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뒤로 하고 나는 생전에 아버지가 그렇게 가보기 원하셨던 서울로 떠났다. 친구 최원일과 함께 서울로 떠났다. 1946년 1월 소련군 트럭을 얻어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남으로 남으로 계속 내려왔다.
하루는 성진이라는 곳에 이르러 조그마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됐다.
“동무들, 어디메서 오는 것이오? 그 보따리 좀 열어보시오.”
어디선가 신고를 받고 달려온 보안대원이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일어난 신의주학생사건 때문에 폭동을 일으킨 학생들을 잡기 위해 젊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수색하고 있었다. 짐을 샅샅이 뒤졌다. 낡은 성경책과 영어책이 나왔다. 보안대원이 투박한 함경도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동무, 영어 좋아하우?”
“일제 강점기에는 영어가 적국의 말이라 배우지 못했는데 이제는 외국어를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아 갖고 왔습니다.”
“동무들은 신의주에서 도망친 것이 아니우?”
“아닙니다. 저희는 중국에서 내려오는 길입니다.”
보안대원들은 우리가 신의주에서 도망온 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뒤 풀어주었다. 이후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도착했다. 하지만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줄 사람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도 중국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주해 왔다. 오징어 장사를 하는 등 녹록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놀라웠다. 간도사범학교 동기동창인 현용무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4) 고아원 아이들 가르치다 신학교 입학
“아니, 이거 용무 아닌가!”
“찬영이! 오랜만일세.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네. 내가 자네를 찾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아는가?”
“나는 지금 용산으로 이사하게 되어 짐을 가지러 왔네. 그런데 여기서 자네를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 반갑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그리 찾았나?”
“나는 태릉에 있는 국립육아원 부속초등학교 선생으로 있네. 지금 우리 학교에서 선생님 한 분을 더 모시려고 한다네. 자네가 생각나서 수소문했었지.”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태릉의 국립육아원은 오늘의 고아원 같은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에서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운영하다가 미국 군정이 시작되면서 미군에서 관할했다. 용무의 소개로 나는 교사가 됐다. 6학년 담임을 맡아 열심히 가르쳤다. 하지만 학생들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이유가 궁금해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너희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어. 그런데 너희는 왜 공부를 하지 않니?”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중학교에 못 가요. 지금까지 중학교에 진학한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열심히 공부해서 뭐하겠어요?”
마음이 아팠다. 열심히 공부하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국립육아원을 책임지는 보건후생국장을 찾아가 간절히 부탁했다. 그 결과 역사상 처음으로 육아원 출신도 상급학교에 진학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학생들에게 전하고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여섯 명에게 중학교에 진학하도록 권했다. 최선을 다해 이들을 지도했다. 여섯 명 전원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어린 아이들의 마음속에 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엄마 아빠가 없는 고아지만 열심히 공부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소박한 꿈을 갖게 된 것이다.
교사로서의 큰 보람을 느끼고 있을 때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친구 조요상을 만났다.
“찬영아, 난 지금 감리교신학교에 등록했어. 세상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도 귀하지만 영생의 말씀을 가르치는 영적 선생이 더욱 귀하지 않을까. 자네도 나와 함께 신학 공부하면 좋을 듯하네.”
“난 아직까지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어….”
어머니가 어릴 적부터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찬영아, 하나님께 언제나 최고의 것을 바쳐야 한다. 나는 우리 귀한 큰아들 찬영이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기도를 드렸어. 하나님께 너의 인생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나는 고민하며 기도했다. 과거 뜨거운 눈물로 드렸던 회심기도가 생각났다. “주님의 뜻대로,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써 주시옵소서.” 순간 로마서 12장 1∼2절 중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구절이 내 몸에 스며들며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았다. 영적 선생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성경과 영어 과목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과하고 1947년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했다. 학생들 가운데 일본이나 중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온 사람도 있었다. 나는 높은 학문 수준에 만족했다. 열심히 공부하던 중 서울에 박형룡 박사가 이끄는 장로회신학교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원래 장로교 출신이라 감리교신학교보다 장로회신학교가 더 적합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의 학력인가를 받은 감리교신학교 학생증을 반납하고 48년 무인가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 학생이 됐다. 경건한 신앙과 학문이 좋았다. 참혹한 전쟁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역경의 열매] 최찬영 (5) 공산군 총칼 앞에 신학교 학생증이 날 살렸다
새벽 6시쯤 집 옆에 떨어진 폭탄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당황하고 놀란 나는 새벽예배를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와 주위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국군들이 마구 북쪽을 향해 허겁지겁 올라가는 걸 보니 무슨 일이 나도 큰일이 난 것 같수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폭탄이 또다시 집 옆에 떨어졌고 흙더미가 우리 집 창문을 덮어버렸다.
“어머니, 여기 있다가는 큰일 나겠습니다. 우리도 어서 피해야겠습니다.”
아직 자고 있는 아홉 살과 열두 살 난 동생들을 깨웠다. 남으로 향하는 행렬에 끼었다.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동두천은 삽시간에 폐허가 됐다. 우리는 하루를 걸어 성동역 부근에 도착했다. 겨우 식사를 하고 세수를 했다. 신학교 동기들이 생각나 남산에 있는 장로회신학교를 찾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산 쪽은 아무 일 없는 듯 조용했다. 신학생들은 모여 기도회를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이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우리는 공산군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야만 했다. 한 집에 계속 있을 수 없어 이집 저집 신세를 지다가 친구 영수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둔탁한 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려왔다. 빨간 완장을 두른 보안대원 여러 명이 몰려왔다. 그들은 국군 패잔병들을 잡고 있었다. 나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동무는 국군이오?”
“아닙니다. 저는 신학생입니다. 남산 꼭대기에 가면 제가 다니는 신학교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로 가 봅시다.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소.”
보안대원들은 나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장로회신학교 기숙사로 끌고 갔다. 잠옷 바람으로 일어난 신학생들이 옷을 추스르고 바르르 떨면서 겁먹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동무들은 군인 아니오?”
“아니요. 신학생들입니다.”
우리 모두 신학생임을 확인한 보안대원들은 “충성스러운 인민으로서 새롭게 탄생한 공화국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말한 뒤 사라졌다. 이후 나는 오류동의 한 교회에서 지내게 됐다. 고구마 순에 보리를 약간 넣어 끓인 죽을 먹으며 연명해나갔다. 하루는 호미를 들고 교회 밖 길옆에 있는 고구마 밭으로 갔다. 고구마 순이라도 캐기 위해서였다. 그만 인민군에게 체포됐다.
“동무, 이북에서 왔소?” 내가 제시한 학생증에서 본적이 평안남도로 기록돼 있는 것을 발견한 인민군이 이렇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동무는 이북에서 온 반동분자구먼. 이북 반동분자가 미군의 스파이 노릇을 하다니. 어서 따라오시오.”
그는 나를 부대 안으로 끌고 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내게 다가오는 듯했다. 그때까지 전쟁터에 나가지 않은 젊은이는 악질 반동, 미군첩자 또는 패잔병으로 간주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적잖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장로회신학교 학생증 등을 살펴보던 부대장이 한참 생각에 잠겼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지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다시는 이 부대 주변에 얼씬도 하지 마시오. 그리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오.” 순간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나는 전쟁이 끝나기만 기다리다가 또다시 체포됐다. 이번에는 북한으로 끌려 갈 위기에 처했다. “나는 안 갑니다. 절대 북으로 갈 수 없습니다.” 모두 침묵할 때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이렇게 말했다. “동무들은 이쪽으로 따로 서시오.”
***[역경의 열매] 최찬영 (6) 눈빛 맑은 그녀와 만난지 이틀만에 약혼
인민군 장교는 우리 몇 사람을 따로 세웠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주님, 저는 이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들을 따라 도저히 북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따로 섰습니다. 결과를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 뜻대로 하여 주옵소서.’
중화기로 무장한 인민군 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못 가겠다고 한 사람들은 다 나가시오.”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우리 뒤에서 기관총을 난사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또다시 내 생명을 구해주신 것이다.
다음날인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미군이 마포까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오래 전부터 미국 유학을 꿈꾸며 틈틈이 영어공부를 했는데 한 번도 영어를 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영어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미군들에게 가서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용기를 내 미군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미군들은 내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좌절감이 밀려왔다. ‘내 영어가 이렇게 형편이 없었단 말인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 통신정보부대 소령의 부탁으로 통역관이 될 수 있었다. 일년 남짓 통역관으로 영어를 배울 기회도 가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선교사 훈련이었다. 하나님은 죽음의 고비를 몇 번씩 넘기며 확고한 신앙을 갖게 한 뒤 미군에게 영어까지 배우게 하신 것이다.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전쟁터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은 셈이다.
1952년 11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50년대 결혼 상대로 목사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신학교 동기들 가운데 3년 가까이 통학을 같이한 친구(홍동근 목사)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주 결혼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내가 중신을 한번 서 볼까? 최형은 어드런 사람이 좋으시갔소?”
어느 날 그는 자못 심각한 어조로 얘기를 꺼냈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 깊이 존경했던 김예진 목사님이 있었다”며 공산당에 순교 당한 김 목사님의 셋째 딸이 혼기가 찬 여의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을지로의 한 허름한 중국식당에서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녀는 장기려 박사를 도와 부산복음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무슨 말을 그녀에게 건넸는지 확실히 생각나지 않지만 맑은 호수와 같은 눈빛에 빠져든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녀는 열일곱 살 때부터 결혼을 위해 구체적인 기도를 해왔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목사 사모가 되겠다는 결심을 오래 전부터 했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 집 형편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일찍 돌아가셨고, 저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가난해서 집도 없이 어렵게 삽니다. 더구나 장남이고요. 돌봐야 할 어린 동생들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바보스러울 만큼 진실하게 얘기한 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았다. 훗날 그녀는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착한 사람하고 결혼하면 행복하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잘 아는 목사님에게 소개를 받아 좋은 사람일 거라고 대충 짐작을 했지만요.” 그녀는 내 얘기를 들으면서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 사람과 짝지어 주시는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 길이 어떠하든지 순종해야지’라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우리는 만난 지 이틀 만에 작은 진주반지와 만년필을 각각 예물로 교환하고 약혼식을 했다. 만난 지 한 달 반이 지난 11월 24일에는 결혼식을 올렸다. 한경직 목사님이 주례를 서주셨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7) 꿈같은 美유학 앞두고 선교사로 가라니…
1954년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학교에서 생활비와 용돈도 제공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의사인 아내는 로스앤젤레스 카이저기념병원에서 수련의를 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중 풀러신학교 초대총장이신 오렝카 박사에게 또 다른 감동의 편지가 왔다. 아내가 풀러신학교와 가까운 패서디나에 있는 헌팅턴메모리얼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광국 목사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총회 부탁으로 우리를 만나러 오셨다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최찬영 목사님, 지금 총회 선교부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려 합니다. 여러 사람과 상의한 끝에 몇 분을 선정해 인터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최 목사님 부부를 보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고 해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청천벽력 같았다. “잘 생각해 보시고 선교사로 가실 생각이 있으면 내일 저녁 총회 선교부 모임에 참석해주면 좋겠습니다.”
내일 저녁 모임까지는 30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 우리 부부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가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선교사의 생활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고생길인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미국 유학길은 지상천국, 선교사의 길은 미지의 땅. 인간적 갈등과 고민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도하는 가운데 새벽녘에 이르러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선교의 길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공부하는 길은 다시 열릴 수 있지만 주님이 부르시는 선교사의 길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이 아닌가. 나는 덤으로 살아왔는데 주님이 부르신다는데 어찌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총회의 부름에 응하기로 했다. 선교부 모임에 참석, 나의 결정을 전하자 선교부는 곧바로 우리를 태국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결의했다.
홀어머니와 아직 어린 두 동생을 남겨 두고 전혀 알지 못하는 선교지로 떠나야 한다니 마음이 무거웠다. 여기저기 주름살이 팬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을 부여잡았다. 불효자가 된 듯해 죄의식이 가득 찼다. ‘어떻게 해야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도울 수 있을까.’
깊은 시름에 잠긴 나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 장남으로서 어머님을 잘 모시고 동생들을 보살펴야 마땅한데, 이렇게 떠나게 됐으니… 하지만 우리가 떠나더라도 큰 어려움 없이 사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만 해요.”
“어떻게 해 드렸으면 좋겠소?”
“우리의 장래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우리가 가진 전부를 어머니께 드려요. 일단 제가 병원 일을 하며 모은 돈과 당신이 받는 사례비를 드리기로 해요. 그리고 선교사로 파송되면 매월 120달러씩 선교비를 지원받기로 했으니 그중 20달러 정도는 어머니께 드리기로 해요.”
아내는 매우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고맙구려. 당신 말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합시다.” 지금도 그때의 아내 모습을 떠올리면 감동이 몰려온다.
우리는 가진 것을 다 털어 서울 모래내에 땅 200여평을 샀다. 또 어머니가 그곳에서 사시도록 15평짜리 집을 지어드리기로 했다. 어머니는 그곳으로 이사하신 뒤 남는 땅에서 양계 일을 하셨다. “이 어미가 다른 일이라면 절대 너를 보낼 수 없어.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너를 살려주셨으니, 어디든 가서 주의 일을 하여라. 하나님께서 늘 너와 함께하여 주실 것이다. 나도 너를 위해 늘 기도하마.”
***[역경의 열매] 최찬영 (8) 선교사 여권 발급에 1년이나 걸리던 시대
1955년 4월 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선교부장인 한경직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영락교회에서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린 우리 부부는 출국 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직면했다. 총회 선교부원 중 어떻게 해야 여권을 받을 수 있고, 어떻게 비자 수속을 밟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도 선교 목적의 여권을 발급하는 게 처음이었다. 나 또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여권을 발급하는 일이 교육부 소관인지, 내무부 소관인지, 문화부 소관인지, 공보부 소관인지 도무지 몰랐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직접 각 부처를 찾아다니며 알아봐야 했다.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여권을 발급 받으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예에? 선교사라고요? 선교사 여권이라… 그게 우리 부처 소관입니까?”
“어느 부처 소관인지부터 알아봐야겠기에 찾아왔는데요.”
“아마 교육부로 가야 할 겁니다.” “아니, 문화부로 가야겠는데요.” “공보부에 문의해보시죠.” “내무부에서 신원증명을 먼저 받으셔야 합니다.” “경찰국에 가 봐야 합니다.” “외무부로 가야지요.”
각 부처 담당자들도 처음 있는 일이라 어디 소관인지, 누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오히려 도움을 청하러 온 나에게 묻곤 했다. 결국 교육부 문화부 공보부 내무부 외무부 등을 돌면서 아주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서류 하나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전달되는 데 몇 주일에서 몇 달씩 걸리기도 했다. 누군가 나에게 일을 맡은 담당자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귀띔까지 해 주었다. 뇌물을 줘서라도 일을 빨리 진행시키라고 권한 것이다.
‘주의 복음을 들고 가는 선교사가 시작부터 뇌물을 줘가면서 일하는 게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 마냥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만도 없지 않은가? 그럴 수는 없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처음부터 인간적인 방법으로 일한다면 선교지에 가서 무엇을 전하고 어떤 모범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바른 방법으로 하자.’
나는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처럼 매일 담당자를 찾아다녔다.
“이 서류가 언제 될 수 있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경찰에 신원조회를 신청했으나 두 달 반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담당자를 찾아갔다. 그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이것저것 물으면서 시간을 끌었다. 뭔가 달라는 눈치였다. 나 같은 숙맥의 눈에도 많이 해 본 솜씨 같아 보였다. 나는 못 가면 못 갔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절대 뇌물을 줄 수 없었다.
지인들과 교인들은 이런 사정을 모르고 만날 때마다 언제 떠나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선교사 임명받으신 지 언젠데…”라는 말이 되돌아오곤 했다. 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인내를 배웠다. 8개월이 지난 뒤에야 신원조회가 끝났다. 외무부에서 여권을 발급받는 데만 2개월이 더 걸렸다. 서류작업을 시작한 지 만 일년이 지나서야 여권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선교사로 외국에 나가 고생한 것이 아니라 떠나기 전에 국내에서 1년여 마음고생을 한 셈이다. 우리 부부는 한국과 외교관계도 확실하지 않고 대사관도 없는 태국을 향해 마침내 떠나게 됐다. 파송예배를 드린 지 1년하고도 한 달이 지난 뒤였다. 1956년 5월 24일, 1주일에 한 번씩 운행하는 홍콩행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9) 종탑 바로 아랫방서 도마뱀과 함께 숙식
비행기로 홍콩까지 가 거기서 방콕까지는 다시 배를 타고 가야 했다. 공항에는 박형룡 박사, 최기은 김동수 목사를 비롯해 교단 지도자 및 총회 선교부 임원, 영락교회 교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기쁨으로 우리의 장도를 축하하고 기도해주었다. 당시 아내는 임신한 상태라 몸이 무거웠다.
나는 아내의 한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찬송가를 불렀다. “나의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아기 같이 어리니 나를 도와주소서….”
마침내 선교지 태국 방콕에 도착했다. 태국 교회에서 우리가 거처할 집을 준비해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마음이 놓였다. 태국 교회에서는 내가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지냈다는 것을 알고 중국 사람들과 사역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중국인 교회 내 작은 방을 마련해주었다.
그 교회에는 큰 종탑이 세워져 있었다. 그 바로 밑에 있는 작은 방이 우리의 처소였다. 방에 들어섰을 때 열대 도마뱀들이 천장과 벽을 마구 기어다니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라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더운 밤에 잠을 자다가 차가운 도마뱀이 내 맨살 위에 떨어져 놀라 깨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열대 기후에 적응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모기가 많아 모기장을 치면 더위에 숨이 막힐 듯했다. 종탑 밑 방 생활이 익숙해져갔지만 아내에게는 점점 어려움이 더해갔다. 임신부라 자주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화장실이 방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마다 서너 번씩 서로의 손을 잡고 종탑 3층에서 내려와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교회 구석진 곳에 있는 화장실에 가야만 했다.
아내와 나는 태국에 도착한 뒤 현지어 공부를 시작했다. 언어를 배우러 다닐 때는 ‘쌈로’라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가야 했다. 외국 사람들과 함께 현지어를 공부하면서 특별히 기억나는 게 있다.
어느 날 ‘∼을 원한다. ∼을 하고 싶다’라는 문장을 배우게 됐다. 태국말로 ‘∼을 원한다’는 동사가 아주 재미있다. ‘또옹깐’으로 한국어 ‘똥깐’과 비슷했다. 그날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모두가 ‘똥깐’으로 말해 우리 부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외국 학생들은 우리가 왜 그렇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싱글벙글하는지 어리둥절해했다.
요즘에는 선교사로 떠나기 전 선교지에 대한 정보는 물론 기초적인 언어 수업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 부부가 떠날 때만 해도 그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본의 아니게 많은 실수를 했다. 태국은 같은 동양권이지만 문화적으로 다른 게 많았다.
한번은 아내와 전차를 타고 외출을 했다. 차에 올라타 보니 다행히 빈 자리가 보였다. 몸이 무거운 아내를 그 자리에 앉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러 사람이 우르르 몰려와 아내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더니 다른 자리로 데려갔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웠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태국에서는 여자, 더욱이 임신한 여자는 노란 승복을 입은 스님 옆에 절대 앉지 못하게 돼 있다. 여자의 살이 스님에게 닿으면 큰일이 난다는 것이다. 스님 옆자리가 비어 있다고 임신한 여자가 넙죽 앉았으니. 아무도 그런 문화적 풍습을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모르고 한 실수였다.
태국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아무리 귀여워도 머리를 쓰다듬어서는 안 된다. 태국인은 머리를 신성하게 여겨 아무도 만져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머리를 만진다는 것은 매우 불경한 일이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10) 가난한 나라 한국 선교사라고 온갖 멸시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어디서 온 것 같습니까? 한번 맞혀 보시지요.”
“일본, 대만, 홍콩, 중국?”
“아니오.”
“그럼 어디입니까? 도무지 알 수 없군요.”
“저희는 하늘나라 시민입니다. 세계 시민입니다.”
“아니,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에서 온 선교사입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당시 태국인들은 코가 큰 서양 사람들이나 선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폐허 속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선교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우리 부부를 선교사로 인정해 주거나 대접해 주지 않았다. 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외국 선교사들에게 존칭어 ‘아쟌’을 넣어 부른다. 그런데 태국인들은 우리 부부에게 그런 존칭을 붙여주지 않았다. 일반 사람에게 붙이는 ‘쿤’이라는 존칭조차 붙여주지 않았다.
한번은 푸레라는 지방으로 태국 총회의 렉 타이용 총무와 함께 교회 및 학교사역을 돌아보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태국에 도착한 지 7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아 언어가 서툴 때였다. 렉 타이용 총무는 방콕 기독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직장에서 일하다가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었다. 당시 태국에서는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쓸 만한 사람이다 싶으면 안수를 해주곤 했다. 그는 외국 선교사들에게는 아주 친절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푸레까지는 상당한 거리라 기차의 침대칸을 이용했다. 아래층 침대는 옆에 창문이 있고 통풍이 잘되었기 때문에 60바트(약 3달러) 정도 하고 위층 침대는 불편하고 통풍이 잘되지 않아 40바트(약 2달러) 정도를 내야 했다. 타이용 총무는 기차표 2장을 사왔다. 그리고 나와는 한마디 상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초이(최)! 저 위층 침대에 올라가시오.”
명령조의 어투가 신경에 거슬렸다.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저 사람은 왜 나를 이렇게 대접할까? 내가 미국에서 온 선교사였어도 이랬을까?’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괄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이 상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뒤 그와 사역지를 자세히 돌아봤다. 그리고 돌아오던 길에 또다시 황당한 경우를 겪었다.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내렸다. 이 때문에 철로가 붕괴돼 더 이상 기차를 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차를 타고 되돌아가야 했다. 새벽 2시경 우리는 강을 건너야 했다. 차에서 내려 걸어서 작은 통나무 다리를 건넜다. 우산으로 간신히 빗줄기를 피하며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넜다. 맞은편에서 다른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타이용 총무가 나를 불렀다.
“초이! 내가 시골 마을에서 선물로 받은 빗자루를 강 건너에다 깜빡 놓고 왔어요.”
“그래서요.”
“당장 가서 가져와요!”
그는 몸종 부리듯 나에게 명령했다.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이 올라왔다. 울화가 치밀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강을 건너가서 빗자루를 가져왔다. 오가는 길에 비를 맞으며 눈물을 쏟았다.
‘이 사람은 나를 종으로 대하는구나. 선교사나 목사를 호칭하는 아쟌은커녕 일반 사람을 존칭하는 쿤이라는 호칭도 쓰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군.’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교사 파송예배 때 들은 말씀이 떠올랐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최초의 선교사다. 그분은 천국을 버리고 우리에게 오셨다.” 인간을 섬기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묵상했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11) 캄보디아서 ‘SOS’… 기쁘게 23일간 집회 인도
한국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방콕에 있다는 소식이 외부에 전해지면서 하루는 캄보디아에서 초청장이 왔다. 미국 선교단체인 ‘C&MA(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에서 전보를 보낸 것이다.
‘SOS 최찬영 선교사님, 2주일 내로 캄보디아로 와서 일주일간 특별집회를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캄보디아 선교는 가톨릭 선교사들과 C&MA 교단이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긴급 구조를 요청하는 ‘SOS’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집회를 요청하니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내 여권으로는 캄보디아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발급받은 여권에는 목적지가 태국 한 나라로 기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 여권법상 태국에 있는 것만 가능하고 다른 나라에는 갈 수 없었다. 1주일 가까이 고민하던 중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태국 영주권을 갖고 있으면 태국에서 해외여행을 위한 신원보증서만으로 캄보디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담당자를 찾아갔다.
“캄보디아에 가기 위해 신원보증서를 발급받으러 왔습니다.”
“영주권을 보여주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제가 급한데 언제쯤 신원보증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2주일 정도 걸립니다.”
특별집회까지는 1주일밖에 없는데 2주일이나 걸린다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담당자에게 급한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노력해 보겠습니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서류를 접수시킨 지 5일째 되는 날, 담당자가 집에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태국 정부에서 발행한 신원보증서가 들려 있었다.
나는 요청받은 날짜 안에 캄보디아 프놈펜에 도착할 수 있게 됐다. 한국에서 온 동양인 선교사가 집회를 인도한다고 했기 때문인지 현지인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당시 나는 태국어 설교는 자유로웠지만 영어로 설교하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프놈펜 집회를 마친 뒤 캄보다의 6개 지역을 방문하며 23일간 집회를 인도했다. 특히 크라체에 갈 때는 칸퐁참에서 작은 배를 타고 11시간 항해해야만 했다. 그곳에서는 영어 태국어 중국어 등 어느 말도 통하지 않았다. 만국 공용어인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다. 마침 톰슨이라는 미국인 선교사를 만났고 그가 특별집회를 인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크라체에서 만난 톰슨 선교사 부부는 훗날 베트남에서 사역하다가 월맹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귀한 선교사였기에 매우 안타까웠다.
2007년 크리스마스를 맞아 다시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때 ‘킬링필드’였던 곳이 복음의 옥토가 돼 있었다. 현지 정부에서 해외 선교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인 선교사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며 새로운 선교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태국 현지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기독교병원의 원목, 성경학교 교사 등으로 활동했다. 태국어를 잘하는 선교사로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집회 요청이 이어졌다. 태국 교단의 부탁으로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학교를 순회하며 전국 집회를 하게 됐다. 한번은 C&MA에서 동북쪽 곤켄에 세운 일반 학교와 한센병 환자를 위한 학교에서 일주일간 특별집회를 인도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12) 태국서 얻은 맏아들 갑자기 의식불명
태국에서 얻은 맏아들 사무엘이 갑자기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아내는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아이를 진찰했다. 다행히 콜레라는 아니었다. 당시 태국에서는 모기로 전염되는 급성뇌염이 돌고 있었다. 이 병에 걸리면 적혈구가 급속히 파괴돼 생명이 위태로웠다. 진찰 결과 사무엘은 이 병에 걸린 것으로 판명 났다. 방콕에서만 2만명의 아이가 이 병에 걸렸고, 그중 1만명 이상 목숨을 잃었다.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아비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백약이 무효였다. 축 늘어진 아이를 붙잡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주님, 선교지에서 얻은 첫아들입니다. 병들어야 한다면 제가 들어야지, 왜 이 어린 게 병들어야 합니까? 의사들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주님의 손길에 맡긴 채 주님의 능력만 바랄 뿐입니다. 다시 한번 건강하게 뛰놀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의사인 아내도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후 4시. 집회 장소로 떠나야 할 시각이 다가왔다. ‘집회를 취소해야 할 것인가? 사경을 헤매는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단 말인가? 나 없이 집사람 혼자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결국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고 집회 장소로 가기로 했다.
‘주님, 제 힘으로는 아이를 살릴 수 없습니다. 아이의 생명을 주님께 맡깁니다. 뜻대로 하시옵소서. 저는 내일 아침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떠나겠습니다. 거기서 말씀을 전할 때 성령으로 함께하소서.’
차도가 없는 아이와 아내를 뒤로 한 채 집회 장소로 떠났다. 집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100명이 넘는 결신자들이 나왔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지구를 몇 바퀴 도는 우주선의 궤도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1만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죽었다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집에 도착했는데 뜻밖의 모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경을 헤매던 아이가 방실방실 웃으며 나를 반겨준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동안 병간호로 지치고 거칠어진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두 손을 꼭 잡았다.
‘주여, 감사합니다. 사무엘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아이도 평생 주님을 위해 사는 아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OMF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한 태국 야우족 마을에 갈 기회가 있었다. OMF는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세운 중국내지선교회(CMI)가 발전된 것이다. 산기슭에 약 400가구가 촌락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난 그곳에서 OMF 소속 두 여선교사를 만났다. 그들은 원주민들과 꼭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대나무로 마루를 엮고 벽을 만든 집에서 살았다. 원주민들의 집에는 가재도구가 여기저기 널려있어 지저분해 보였지만 선교사들의 집은 깨끗하게 잘 정돈돼 있는 게 다를 뿐이었다.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입어 우리와 같이 되신 것처럼 OMF 선교사들은 원주민과 동화되는 ‘성육신 선교정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후예로서 OMF 선교사들은 산속의 원주민들을 도우며 복음을 온몸으로 전하고 있었다. 나는 OMF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한센병 환자를 위한 집회를 인도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13) 한센병 환자 집회서 주님의 섭리 깨달아
한센병 환자 특별집회를 위해 들판에 가건물이 세워졌다. 허름한 건물이었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갈급한 심정이었다. 나는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누구라도 주님은 따뜻한 손길과 사랑으로 맞아주시고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용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선포했다.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주님을 기억하라고 강권했다.
이 말씀을 전할 때 한두 사람이 흐느끼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집회 장소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그들은 마음속 깊숙이 담아 두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처럼 버림받고, 저주받은 사람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당신을 위하여, 소외된 사람을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기 원합니다.” “저도 믿을 수 있나요?” 여기저기서 주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눈물로 감사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경험했지만 나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것은 식사시간이었다. 나는 한센병 환자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눈이 먼 사람, 코가 떨어져 나간 사람, 얼굴이 일그러진 흉측한 사람들이 노래하면서 즐겁게 식사를 준비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그릇을 보니 정말 새카맣고 더러웠다. 금방이라도 세균이 우글거리며 단체로 기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당시 한센병에 대한 상식이 별로 없었다. 환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다만 그들이 만든 음식에 대해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선교사로서 그들의 정성을 무시할 수 없어 주는 대로 먹기로 했다. 그들이 마련한 음식을 먹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식사를 했다. 속사정을 모르는 그들은 나를 선교사의 표본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내가 겁에 질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길은 멀고 험하다. 동료 선교사들은 나에게는 귀한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처음 선교사로 나가 시행착오를 거듭할 때마다 하나님은 적절하게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고, 그들을 통해 협력선교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셨다.
나는 첫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미국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1960년대 미국은 실로 부강한 나라라는 사실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학문을 배우며 나름대로 도전받는 시간이었다.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나는 다시 선교지인 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뉴욕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과 통화를 했다. 1962년 3월 23일이었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미국 성서공회연합회 총무 라톤 홈그렌입니다.”
“무슨 일이죠?”
“최 목사님을 좀 만나고 싶습니다.”
당시 피츠버그에는 미국인 장로교회가 많았다. 피츠버그 지역 장로교회들은 내가 그 부근에 있는 유일한 한국인 장로교 선교사였기 때문에 집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했었다. 이 때문에 이번에도 집회를 부탁하려는 만남 정도로 여기고 별 생각 없이 만나기로 약속했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14) 태국 성서공회 총무 제안받고 깊은 고민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나가니 키가 크고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한 미국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라톤 홈그렌 미국 성서공회연합회 총무였다. 그는 자신의 일과 성서공회가 세계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한 시간 이상 서론을 끝내고 드디어 본론을 말했다.
“지금까지 태국 성서공회 총무는 미국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태국인들 중 총무를 뽑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여러모로 알아보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태국에 있는 아시아 선교사들 가운데 한 명을 택하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죠. 혹시 추천할 만한 분이 있으신가요?”
“네, 제가 알기로 일본과 필리핀에서 온 선교사 두 분이 있는데요. 고야마 선교사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신학교수입니다. 솔리스 선교사는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매우 유능한 필리핀인입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두 분 선교사님은 이미 만나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 그분들은 지금 하시는 일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제 생각에는 최 선교사님이 가장 적합할 것 같은데요. 두 분 모두 최 선교사님을 추천하셨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때까지 나는 문서 선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아닙니다. 저는 태국에 전도하러 간 것이지 사무실에 앉아 사무를 보기 위해 간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편지 쓰고 서류 정리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 없습니다. 저는 전도 현장이 좋습니다.”
나의 얘기를 묵묵히 듣던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정중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사실 오늘 최 선교사님께서 총무 직을 맡겠다고 선뜻 나섰다면 좀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사교적이고 노련한 홈그렌 총무 앞에서 나는 순진한 아이처럼 느껴졌다. 그는 다시 말을 건넸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보시지 않겠습니까? 또 최 선교사님은 결혼하신 분이니 집에 돌아가 사모님하고 서로 의논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도면밀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이 있고 한 달 반 정도 지난 뒤 당시 총회 선교부장이셨던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최찬영 선교사님께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저희 선교부에 성서공회로부터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다름 아니라 최 선교사님께서 태국 성서공회 총무로 일해 주었으면 하는 청원입니다. 저희도 이 일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직접 전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문서 선교도 선교지에서 필요하니 세계적인 선교기관과 유대를 갖고 일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자 성서공회 담당자가 한국에까지 연락을 해 선교부장이신 한 목사님께서 직접 편지를 보내신 것이었다. 아내도 기도 가운데 내가 성서공회의 일을 맡으면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한국교회도, 집사람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역으로 나를 부르시는 것이 아닐까?’
나는 성서공회 뉴욕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뉴욕에서 한 달 정도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성서공회 사역은 대단했다. 처음 성서공회 일을 시작할 때는 서류나 보는 사무적 일이라 여겼는데 일에 깊숙이 관여하다보니 매우 귀한 선교사역임을 깨닫게 됐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15) 태국 불교 사찰에 성경 보내기 운동
태국 성서공회 총무로 일하는 동안 늘 부담스러웠던 곳이 불교 사찰이었다. 어떻게 하면 수십만 명의 스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스님들은 구도자이니, 다양한 책을 읽을 것이다. 각 사찰에 성경을 보내 도서관에 비치하도록 해 모든 스님이 읽어보도록 하면 어떨까. 스님들이 과연 성경을 받으실까. 가장 큰스님이 받으시면 다른 스님들에게 전해지지 않을까.’
나는 태국에서 가톨릭의 교황과 같은 위치에 있는 가장 높은 종정 스님을 찾아가기로 했다. 태국 문화에 걸맞게 불교를 상징하는 색깔인 금색으로 성경을 포장하고 금색 리본을 달고 귀한 분에게 선물할 때 쓰는 금색 쟁반을 준비했다.
“만나 뵙게 돼 참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최찬영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제가 종정 스님께 드릴 선물이 있어 가져왔습니다.”
“무엇입니까?” “네. 이것은 기독교인이 보는 성경입니다. 여기에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찰에 비치해 누구든지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읽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비치해 읽도록 하겠습니다.”
종정 스님은 정중하게 성경을 받아주었다.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이 일을 마치고 주님께 기도드렸다. ‘주님, 하나님의 말씀이 사찰에서도 능력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저들이 말씀을 읽을 때 참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몇 달 후 사찰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부탁하신 대로 저의 사찰에 성경을 비치해 원하는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저의 사찰에는 100여명의 스님이 있는데 저마다 읽기를 원하다보니 제가 아직 읽어 볼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미안한 부탁이지만 성경을 여러 권 더 보내줘 모두 읽어보고 진리를 구하도록 도와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곧바로 성경을 준비해 직접 전달했다. 종정 스님은 이전보다 더 정중하게 성경을 받아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전국 사찰에 성경을 비치하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각 사찰로 성경을 보내면 스님들은 앞 다투어 성경을 읽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러 사찰에서 성경을 읽은 스님들이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한 스님의 편지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저는 창세기를 읽으면서 이전까지 몰랐던 참 진리를 깨닫게 됐습니다. 온 삼라만상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궁금하고 모든 것을 윤회로 이해했는데 거기에 하나님이라는 분이 있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더군요. 참 귀한 진리입니다. 성경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양한 전도방법이 있겠지만 문서 선교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성경을 통한 문서 선교 사역은 그 효과가 이미 확증됐다. 어떤 선교 사역이든 성경을 나누어 주는 말씀 사역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기고, 말씀은 하나님의 성경을 통해 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님은 물론 전 세계 모든 사람의 손에 성경이 들려져야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나타나 있다.
문서 사역을 하면서 이전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한계를 느끼게 됐다. 그것은 사역의 대상에 관한 문제였다. 그동안 우리가 하던 문서 사역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아시아 인구의 절반 이상이 글을 읽지 못한다고 하니 새로운 방법을 간구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16) 만화성경 인도에서만 수백만권 팔려
‘읽히는 성경’을 만들고 싶어졌다. 글을 읽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나님 말씀을 알 수 없게 된다면 우리의 죄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1960년대 태국에서 성경 녹음테이프 사역을 시작했다. 덴마크인 선교사로 라디오와 대중매체를 이용한 사역을 하던 비고 소오가드와 함께 이 일을 했다.
성경을 듣게 해주는 테이프 사역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뒀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녹음테이프 전도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는 사역을 준비했다. ‘읽기 쉬운 성경(New Reader’s Bible)’ 사역이 바로 그것이었다. 기본 취지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글을 깨우치면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쉬운 이야기부터 시작해 어려운 말씀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재미를 붙일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이를 위해 어려운 문자와 복잡한 내용의 번역을 쉽게 풀어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접근해야 했다. 성서공회 연합회 일꾼들이 적극 도운 결과 ‘읽기 쉬운 성경’이 마침내 탄생했다.
이어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말씀을 읽게 할 수 있을지 연구했다. 학생들이 학교 공부 외에는 다른 책들을 별로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토록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이 시간만 있으면 만화책을 보는 것이었다. ‘옳지, 성경을 만화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학생들이 좋아하겠지.’
이에 따라 구상한 것이 ‘만화 성경’이다. 이 성경은 인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아브라함, 요셉, 다윗, 엘리야 등으로 구약시리즈를 만들고 연이어 예수님의 생애, 바울, 베드로 등으로 신약시리즈를 완성했다. 이 사역은 1970년 초기에 시작돼 아시아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됐다. 이런 접근 방법은 호응이 매우 뜨거웠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반대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성경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거룩한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만화로 만들 수 있단 말이야.” “만화는 아이들이 심심할 때 재미로 보는 것인데….” “성경을 만화로 그리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에 위반되는 것이 아닌가.” 경건주의자는 경건주의에 따라, 보수주의자는 보수주의 관점에서 반대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 말씀을 알고 주께 나오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에서 이 일을 강력히 추진했다. 만화 성경은 인도에서만 수백만 권이 팔려나갔다.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은 물론 여러 나라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던 중 1977년 4월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무를 선임하는 모임이 열렸다. 그 모임에서 내가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책임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아니, 당사자와 사전 상의도 없이 어떻게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습니까? 기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십시오.”
나는 3주일 정도 기도에만 열중했다. 그러나 분명한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성서공회 세계총무와 미국총무 등으로부터 급하게 연락이 왔다. 뉴욕에서 세계지도자회의가 있으니 꼭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뉴욕회의 석상에서 만난 성서공회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내가 아시아·태평양 지역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일이 있기 전 한국 성서공회 총무로부터 고국에서 일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고 20년 넘게 해외에서 지내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고심을 했다. 결국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무를 맡기로 했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17) 1970년대 중국에 성경 전할 방법 골몰
30여년간 성서공회연합회에 소속된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일은 중국 애덕기금회를 통해 중국 난징(南京)에 성경 인쇄공장을 설립한 것이다.
1970년대 중국 선교의 최대 이슈 중 하나는 죽의 장막으로 가려진 그 나라에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보낼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성서공회에서는 성경을 구하지 못하는 중국인들을 위해 극동방송을 청취케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적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방법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 중국의 많은 성도들이 라디오 앞에 앉아 성경 내용을 받아 적었다.
이 즈음 성경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져다 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경 밀수꾼’이 생겨났다. 브러더 앤드루가 설립한 선교단체 ‘오픈 도어즈’가 대표적이었다. 이 단체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중국 현지에 성경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성서공회도 이 일을 보다 효과적으로 도울 방법을 강구하며 늘 기도했다. 나는 중국인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어떻게 해야 중국을 도울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던 중 직접 중국에 들어가기로 했다.
84년 1월이었다.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중국에 도착했다. 나는 중국 정부와 종교단체 관계자 등을 만났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싸늘했다. 한마디로 냉대 그 자체였다. 외국 선교단체의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 후 또 중국을 방문했지만 여전히 냉대를 받았다. 사방이 막혀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하나님은 포기하지 말 것을 나에게 당부하시는 듯했다. 세 번째 방문에서는 딩광쉰(丁光訓) 주교 등 중국기독교협의회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기독교협의회 부회장으로서 해외 업무를 담당하는 한원자오(韓文藻)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도움이 필요하기는 합니다만….”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오랜만에 들어보는 반가운 말이었다.
“실은 성경 10만권을 찍으려고 하는데 종이를 구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100t의 종이가 필요합니다. 종이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언제까지 종이가 필요하십니까?”
“3월 15일까지 필요합니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종이 100t이라면 적어도 미화 10만 달러 이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때가 1월이었기 때문에 3월 15일까지 종이가 중국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많지 많았다. 예산도 확보해야 하고 종이를 선적하려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아무리 성서공회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무라 해도 그 자리에서 10만 달러를 결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생각한 뒤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상하이로 가는데 거기서 이것저것 알아본 뒤 이틀 내로 종이를 구할 수 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중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성서공회가 아무런 조건 없이 돕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인쇄돼 반포될 수 있다면 우리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중국교회 지도자 한명이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일전에 미국에서 한 교회 대표가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 인쇄하려면 지금 인쇄시설로는 어려움이 많을 것 같으니 5만 달러짜리 옵셋 인쇄기를 보내 주겠다고 했죠. 그 기계로 교회에 필요한 인쇄를 하라고요.”
“그래서요?”
“그의 말을 들은 지 만 일년이 지났지만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18) 성경 보급 위해 중국에 인쇄공장 추진
그는 무척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미국 사람의 말도 믿을 수 없는데, 동양 사람인 나의 말을 과연 믿어야 할지 의구심을 갖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일년을 기다렸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아니, 성경 인쇄를 한다면서 왜 그렇게 작은 인쇄 기계만 생각합니까? 크게 생각하시죠. 아주 큰 인쇄공장을 하나 세워 모든 교회의 인쇄물뿐 아니라 중국인들을 위한 성경들을 많이 찍어낼 수 있으면 좋지 않습니까?”
“….”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미국 사람은 5만 달러짜리 인쇄 기계를 약속하고도 만 일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데, 한국 사람이 뭘 믿고 큰소리를 치는 거야.’
대화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다음 날 다시 한번 중국교회 지도자들을 만나는 기회가 왔다. “어제 말씀하신 성경 찍는 인쇄공장 얘기 가능성 있나요?”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저 혼자 모든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공회에서 최대한 지원할 것입니다.”
“가능하다고요?” 그들은 대체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3월 초에 인도에 가시죠?”
“그렇습니다.”
“인도 가는 길에 홍콩 성서공회 사무실을 방문해 주신다면 그때까지 인쇄공장에 대한 청사진을 마련해 놓겠습니다. 어떤 기계를, 어떻게 설치하면, 어느 정도의 성경을 인쇄할 수 있는지 등 여러 자료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홍콩에 들러 기획서를 전달받으신 뒤 인도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나 어떤 합의나 결정을 하면 어떨까요?”
당시 무슨 배짱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성령이 나에게 지혜를 주셨던 것이다.
상하이로 돌아와 이곳저곳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우선 100t의 종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알아본 결과 3월 15일까지 상하이에 도착할 수 있는 종이를 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종이 대금 10만 달러였다. 당시 성서공회 지도자 세 사람이 서독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곳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했다.
“지금 10만 달러가 필요합니다.”
“아니, 갑자기 10만 달러라니요?”
자초지종을 말하자 성서공회 지도자들은 당장 그만한 예산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하기를 원하신다는 부담감을 갖고 적극 도와주겠다고 했다. 나는 중국 지도자에게도 전화를 걸어 “성경 찍을 종이 100t이 3월 15일까지 상하이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약속한 종이는 제 날짜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교회 지도자들과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100t의 종이를 전달받은 뒤 감사 편지를 나에게 보냈다. 그러면서 인도교회를 방문하러 가는 길에 홍콩 사무실에 꼭 들르겠다고 했다. 이에 나는 전문가에게 의뢰해 인쇄공장 청사진을 준비했다. 우리가 중국 측에 처음 제안한 인쇄공장에 들어가는 성경 인쇄기는 미화로 약 500만 달러에 해당되는 시설이었다. 문제는 중국교회는 이 일을 추진하는 게 곤란했다. 원칙상 외국 단체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우리는 중국 정부의 재가를 받아 중국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사회봉사단체이자 대외 창구인 애덕기금회를 설립, 이를 통해 애덕인쇄소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성서공회는 어떤 소유권도 행사하지 않는 대신 인쇄소의 우선순위가 성경을 찍는 데 있기를 요구했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19) 세계 5만5000여 교회 ‘중국산 성경’ 사용
과거 중국에 성경을 보내기 위해서는 1권당 10달러에서 12달러50센트가 들었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 볼 때 이런 행위는 불법이었다. 이 때문에 그 과정에서 많은 양이 소실되기도 했다. 중국에 성경 인쇄공장을 세운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 많은 사람이 염려했었다. 아니 염려보다는 부정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유권을 포기하면 손해만 보는 것 아닌가?” “성경을 찍지 않고 공산당 선전물을 찍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산당 정부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나는 반대 의견에도 흔들리지 않고 이 일을 추진했다. 중국 사람들이 성경을 보다 빨리 읽을 수 있도록 가장 좋은 인쇄 시설을 기증하고 싶었다. 영국에서 들여온 인쇄기계인 팀슨은 신문을 찍어내듯 빨리 인쇄할 수 있었고 정밀도 또한 남달랐다. 일본에서는 컴퓨터를 들여왔다. 중국 정부는 이 공장에서 성경을 찍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공식적으로 허락해주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신학교가 있는 난징에 세워진 이 공장의 건축비로 50만 달러 정도가 소요됐다. 500만 달러 상당의 인쇄기를 채워 넣었다.
인쇄공장은 1986년 11월 8일 기공식을 가진 뒤 8개월 만인 87년 7월 7일 완공됐다. 그해 12월 5일부터 이 공장을 통해 성경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93년 한 해에만 160만권의 성경이 인쇄됐다. 중국어 성경뿐 아니라 다른 소수부족 언어 성경도 인쇄했다. 중국 거주 한인을 위한 9만권의 관주성경과 9만2000권의 찬송가도 인쇄했다. 한국 성서공회에서는 관주 성경전서의 필름을 보내주기도 했다. 2008년까지 6000만권의 성경이 인쇄됐다. 애덕기금회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5만5000여 교회가 중국에서 인쇄된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 인쇄된 성경만 8000만부를 넘어섰다. 매달 100만부 이상 인쇄할 수 있어 규모면에서 세계 최대다.
나는 성서공회 사역에 있어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그래서 후계자를 선정한 뒤 1년에 걸친 인수인계 절차 등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 이사회에 은퇴 의사를 사전에 밝혔다. 은퇴 4년 전인 92년 2월 1일부로 은퇴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결심했다. 첫째, 지금까지 했던 일에 대해 더 이상 잔소리하는 사람으로 남지 않겠다. 둘째, 후임자가 마음껏 일하도록 될 수 있는 한 멀리 떠나겠다. 일생을 바친 일이었기에 많은 인간적 생각과 집착이 남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했던 일은 내 일이 아니요, 하나님의 일을 잠시 맡아 한 것뿐이므로 일에 대한 모든 미련을 떨쳐버렸다.
은퇴를 발표하자 아시아 지역의 모든 성서공회 사역자들이 깜짝 놀랐다. 우리는 후계자 선정 작업에 착수해 21년간 함께 사역해온 대만 성서공회 총무 출신인 채런리라는 분을 아시아·태평양 총무로 선출했다. 은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과 미국 신학교에서, 선교단체에서, 세계적인 지도자 교육기관에서 퇴임 후 후진 양성을 위해 수고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다음 행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기도만 했다. 은퇴 후 생활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미국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장이던 폴 피어슨 박사로부터 한 장의 팩스를 받았다. 풀러신학교 객원교수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나는 학자가 아니라 선교지에서 선교행정가로만 일했기에 학교는 내가 갈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최찬영 (20·끝) 선교지 교회와 사전에 협력할 필요
1992년 2월 은퇴하고 어디서 지낼 것인지 고민하던 중 자녀들이 살고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갔다가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을 방문하게 됐다. 학교에서는 또다시 교수로 일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승낙했다. 나는 풀러신학교에서 선교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임윤택 선교사와 함께 풀러선교대학원 한국학부 주임교수가 돼 선교사 및 신학생을 도왔다.
당시 5년간 연봉 1달러 교수로 후학을 길러냈다. 학교 측이 교수 초빙 계약을 하자고 요청했을 때 난 월급이 필요 없다고 했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 서류상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해 1년에 1달러 받는 것으로 했다. 1954년 유학생으로 가려 했던 풀러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
또 다른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태국 등지에서 37년간 사역하는 동안 영락교회가 파송교회로서 최선을 다해 지원해 주었다는 것이다. 기도와 사랑 외에도 생활비 및 사역비 보조 등 지속적인 도움을 주었다. 특히 고 한경직 목사님은 언제나 조언과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한 목사님의 고언을 들을 수 있었다는 건 나에게 큰 자랑거리였다.
이 지면을 빌려 아내와 네 자녀에게 감사의 마음도 전하고 싶다. 아내는 지난 56년간 내 곁에서 함께 고생하면서도 내가 신앙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도록 도왔다. 이제는 할머니가 돼 몸이 쇠약해졌지만 주님을 향한 헌신된 마음만은 젊은이 못지않게 뜨겁다. 나는 매우 바쁘게 활동을 하다보니 자녀들을 일일이 보살피기 어려웠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시간을 충분히 배려하지 못했고 장성했을 때도 떨어져 지내야 했다. 미안함이 적지 않는데 아이들이 잘 자라줘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인간은 강한 것을 좋아한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정치, 권력, 물질, 명예 등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그 유혹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후배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선교사에게 영성관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선교사가 영적으로 바로 서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도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 나는 최상의 영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성경을 보고 깊이 묵상하며 성경 속 인물들을 본받으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나보다 먼저 간 선배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 이야기를 담은 글을 보면서 도움도 받았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선교지 교회와는 전혀 상관없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적잖다. 어느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됐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아무개 목사님께서 가라고 해서 그냥 왔습니다”라고 했다. 이처럼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선교지 교회들과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지 미리 정립하지 않으면 잘못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크리스천이라면 선교를 매우 자연스럽게 여겨야 한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남을 위해 살아야 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여야 한다. 선교는 선교사만을 위한 과제가 아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몫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 세계가 한국교회를 주목하고 있다. 한국은 비서구권 교회를 대표하게 됐다. 세계 곳곳에 파송한 선교사만 2만3000여명에 달한다. 한국교회는 단기적 성과에만 매달리지 말고 무엇보다 겸손하게 전 세계를 섬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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