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551-479BCE)(편집)
(대사구 시절 공자 와 고향 창평향 현재의 곡부)
이름은 丘 자는 仲尼
周 왕실이 쇠퇴하고 秦楚齊韓魏趙燕의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가운데 사상과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시기에 여러 사상가와 학파를 諸子百家, 이들의 활동을 百家爭鳴이라 하였다.

주요사상들을 보면
儒家;공자,안회,자하,중삼,자사,맹자,순자,자유( 효제(孝悌)·인의(仁義)·예(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
道家;장자,노자,열자,양자,환염,신도,전병(노자(老子)가 우주 본체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도(道)와 덕(德)의 개념에서 비롯되어 도덕을 논하는 일련의 학자들을 도덕가라고 호칭하다가 뒤에 이를 약하여 도가로 부르게 된 것이다.)
陰陽家;(鄒衍)·추석(鄒奭 )( 천체(天體)의 운행이나 사계(四季)의 추이(推移) 등 자연현상의 법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나, 반면 이 법칙을 인사(人事)에 관련시켜 인간생활도 이에 따르지 않으면 재해(災害)를 입게 된다는 등 미신적 요소가 강하다.)
法家;상앙,오자,신불해,한비자,이사(법치주의를 제창한 중국의 정치 사상가.)
名家;공손룡 (이름[名]과 실재[實]의 관계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통해 인간 인식의 상대성과 제한의 불일치를 극복하여 천하를 바로잡겠다는 명실합일의 정치사상)
墨家;묵자 (상현(尙賢) ·상동(尙同) ·겸애(兼愛) ·비공(非攻) ·절용(節用) ·절장(節葬) ·천지(天志) ·비락(非樂) ·명귀(明鬼) ·비명(非命)등 10론(論)의 주장은 그 하나하나가 매우 이색적이고, 전국시대의 세상에서 중앙집권적 체제지향과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하여 유가(儒家)와 대립한 유력 학파였다)
縱橫家; 소진 (합종설),장의(연횡설) (合從(합종)과 連衡(연횡)의 두 외교정책을 합한 말로, 국제무대에서의 외교적 角逐戰(각축전)을 가리켜 쓰는 말이다)
農家;허행 (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皆農主義)를 주장)
兵家;제(齊)나라의 손자(孫子), 주(周)나라의 오자(吳子), 울요(尉繚) (고대의 사마직(司馬職)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용병(用兵)방법을 설명하였다)

공자는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사학을 설립 제자를 육성하였다. 최초의 사학이다. 子路, 顔回를 비롯한 72인의 통달한 제자를 포함 3000여명이 넘었다. 노나라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여 대사구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B.C. 496년(56세 때) 정승의 일까지 겸직하게 된 공자는 관리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난신(亂臣)인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잡아 사형에 처했다.
이렇게 되자 이웃 제나라 에서는 노 나라의 국력이 강대해질 것으로 여겨 두려워하게 된다. 그들은 대부 여서의 책략에 따라 노래와 춤에 능한 미녀 80명과 말 120필을 노에 보냈다. 정공과 계환자는 이 선물을 받고 좋아하여 사흘이나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임금인 정공(定公)과 계환자 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음락(淫樂)에 빠져버리자 공자는 이들과는 큰 일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벼슬을 버렸다.
이듬해인 B,C. 496년 공자는 제자인 자로, 자공, 안회 등과 함께 천하 유력(游歷)의 길에 올랐다. 이것이 유명한 주유천하이다.(또는 轍環天下) 그러나 제(齊),송(宋), 위(衛), 진(陳), 채(蔡), (曹) 등에 대한 이 遊歷에서도 역시 각국의 제후들이 서로 攻伐 하기에만 급급하여 그의 이상 정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시기를 받는 등 뜻을 펼 만한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 공자는 여행 중 여러 차례 고난과 박해를 당해야 했다. 송나라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겪었고, 또한 광(匡)에서는 양호로 오인되어 닷새 동안 잡혀 있기도 했다. 또한 진·채에서는 7일간이나 양식이 떨어져 고생하였다. 이렇게 공자는 13년 동안이나 자기의 도덕정치를 채택할 임금을 찾았으나 끝내 만날 수 없었다. 당시의 제후들은 공자의 주장을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만 생각했다. 그것은 이들이 武力에 의한 영토 확장과 권모술수에 의한 권력 유지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간난신고(艱難辛苦: 극심한 고생)만을 하다가 B,C. 484년에 귀국하고 말았다. 끝내 노나라에서 기용하지 않자 약 4년간 교육에 전념하다 73세로 죽었다. 그의 저서로는 《춘추(春秋)》와 《예기(禮記)》있고 《역경(易經)》(주역) 《시경(詩經)》 《서경(書經)》등을 정리 하였다.

주1)첫번째 외유;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이는 삼환(三桓氏: 노나라 16대 왕인 환공의 후손으로 노나라 정권을 장악하던 세도가)씨였다. 이들은 국토를 채읍으로 삼고 군대와 가신을 길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노나라 임금인 소공은 삼환씨의 하나인 계평자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삼환씨의 단결된 무력에 패하여 그는 제나라로 도주하였다. 이것이 삼환의 난이라는 사건이다. 공자도 패배한 임금의 뒤를 쫓아 제나라에 갔다(B.C. 517년, 공자 35세 때).
주2) 공자는 태산에 올랐다. (공자는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보인다(등태산 이소천하)라는 말을 남겼다)
주3) 주유천하; 송(宋)/ 위(衛)/ 진(陳)/ 채(蔡)/ (曹)
주4) 모세의 가나안 정벌과 같이 제자들을 (모세 이스라엘 백성 : 십계명) 가르치고 실천하는 여행의 공통점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仁義禮智의 四端으로 인간사회에 올바른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바람직한 인간상을 확립 함으로서 더블어 잘사는 사회를 지향하였다. 그의 중심 사상인 인은 인간중심사상, 진실함과 성실성, 부단한 자기노력 등으로 요약된다. 유가사상은 황제권력을 뒷받침하는 정치사상으로 자리잡게 되고 역대 제왕은 封號와 諡號를 높이며 공자를 기렸다. 曲阜에 공자의 사후 祠堂(대성전)을 세우고 738년 당나라 현종은 文宣王 시호를 , 청나라 강희제는 사당에 萬世師表라는 현판글씨를 내렸다. 명 건국후 수여된 至聖先師와 더블어 후세 공자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용어가 되어버렸다. 전국에는 孔廟를 세웠다. 유가상은 한반도,일본, 베트남에 전해졌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학을 관료 및 인재양성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고려시대 개경의 성균관,조선시대 한양 성균관,지방에 鄕校가 있었고 일본은 고대 백제와의 교류로 유학을 받아들였다. 베트남에도 하노이에 번묘라는 공자사당이 있어 공자와 제자들을 모신 사당이 있다.
참고
廟號; 임금사후 有功曰祖, 有德曰宗 개념으로 추서했으나 꼭 일치되는 건 아닌 것 같다.
諡號; 왕자, 정2품이상 신하, 훌륭한 선비(문사포함)에게 왕이 내렸다.
尊號 ; 생시나 사후 왕이나 왕비의 功德을 稱頌하여 올린글
徽號 ; 왕비 昇遐후 올린글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공자와 그의 사상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악의 표상'으로 규정되었고(批林批孔;중국에서 린뱌오[林彪]와 공자의 사상을 공격하였던 운동.), 이에 따라 공자묘와 비석 등이 파괴되었다. 유학서 및 다량의 공자 관련 유물 등도 무더기로 불에 타 사라지는 참화를 겪었다. 최근에 인민정부에 의해 봉제사가 재개되었다.
공자는 만년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말하기를, "나이 열다섯에 학문의 길로 가기를 마음 먹었고, 서른에 이르러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모두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일에 대해 순리를 알 수 있었고,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