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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갈릴리미션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평강의 길...
ENGLISH BIBLE HISTORYTIMELINE OF HOW WE GOT THE ENGLISH BIBLE
<영어 성서의 역사적 타임라인>
-우리는 어떻게 영어 성서를 가지게 되었나?-
The story of how we got the English language Bible is, for the most part, the story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which began in the late 14th Century AD with John Wycliffe.
우리가 어떻게 현 영어 성경책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는 기원후 14세기의 종교 개혁 당시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이야기로 주를 이룹니다.
Indeed, if we go back more than just one thousand years, there is no language recognizable as “English” that even existed anywhere. The story of the Bible is much older than that, however.
사실, 천년전만 해도 “영어”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언어였지만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입니다.
The first stories of the Bible go back to pre-history, long before writing was invented. They were passed on in the same way as children’s playground songs are passed on today- by being consistently repeated. Passing stories on in this way is often called oral (or spoken) tradition. Round the campfires in the evenings, as worship, at work, or at war, people sang the songs and told the stories that they had learned as children. Because these stories were about God, they were treated with great respect. Every word was important and had to be repeated correctly.
성경의 최초 역사는 글쓰기가 발명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그 이야기들은 마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와 같이 꾸준히 반복되며 퍼져나갔습니다. 이런 방식의 이야기 전파를 ‘구전’이라고 부릅니다. 모닥불을 피우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일터에서, 혹은 전쟁터에서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배운 노래를 부르거나 그 시절에 들은 이야기들을 전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들이었기에 큰 경의와 함께 다루어졌습니다. 이야기의 모든 낱말들은 중요했고 올바르게 전수되어져야 했습니다.
The first writing consisted of simple pictures with one
picture for each word. Writing like this, with over 800 pictures has been found
in Babylonia (modern
처음의 글자는 한 점의 그림당 하나의 낱말을 뜻하도록 이루어진 간단한 그림들이었습니다. 이런식으로 씌여진 800여개의 그림들이 바벨론(현 이라크)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5,000년도 더 지난 것들이었습니다.
The first recorded instance of God’s Word being
written down, was when the Lord Himself wrote it down in the form of Ten
Commandments on the stone tablets delivered to Moses at the top of
첫 기록판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이 아닌 하나님 그 분 자신께서 직접 돌판에 십계명의 형식을 적으신 후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거의 3,500년 전인 1,400 BC 와 1,500BC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가늠하고있습니다. 사용된 언어는 거의 확신적으로 구약 신자들의 언어였던 고대 히브리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The earliest scripture is generally considered to be the “Pentateuch”, the first five books of Moses : Genesis, Exodus, Leviticus, Numbers, & Deuteronomy… though there is some scholarly evidence to indicate that the Old Testament Book of Job may actually be the oldest book in the Bible. The Old Testament scriptures were written in ancient Hebrew, a language substantially different than the Hebrew of today. These writings were passed dow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for thousands of years on scrolls made of animal skin, usually sheep, but sometimes deer or cow. Animals considered “unclean” by the Jews, such as pigs, were of course, never used to make scrolls.
구약 성서의 ‘욥기’가 성경책 중 제일 오래된 책이라는 학술적인 증거가 있긴 하지만 보편적으로 ‘모세의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 제일 초기의 성서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구약 성서는 현대의 히브리어와는 상당히 다른 고대 히브리어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들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수천년의 세대를 걸쳐서 전승되어 왔습니다. 두루마리 가죽으로는 보통은 양가죽을 사용하였지만 때로는 사슴가죽이나 소가죽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불결’하다고 여기는 돼지등의 짐승의 가죽들은 당연히 두루마리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When the entire Pentateuch is present on a scroll, it is called a “Torah”. An entire Torah Scroll, if completely unraveled, is over 150 feet long! As most sheep are only about two to three feet long, it took an entire flock of sheep to make just one Torah scroll.
모세 오경 전체가 두루마리에 씌여진 것을 “토라”라고 부릅니다. “토라” 두루마리 전부를 펼쳐놓으면 그 길이가 150피트( 약 46미터)나 됩니다! 양 한마리의 가죽이 대략 2~3 피트 정도 밖에 되지 않으므로 한 두루마리의 토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떼 전체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The Jewish scribes who painstakingly produced each scroll were perfectionists. If they made even the slightest mistake in copying, such as allowing two letters of a word to touch, they destroyed that entire panel (the last three of four columns of text), and the panel before it, because it had touched the panel with a mistake! To make sure that each scribe understood the importance of his work, and to stop him making mistakes, careful rules were followed.
정성을 다해 두루마리를 만드는 유대 필경사들은 완벽주의자들이었습니다. 만약 필사 중에 두 글자를 이어서 써버리는 아주 약간의 실수만 있어도 그들은 그 전체 패널(네개의 문단 중 마지막 세개의 문단)을 망가뜨리고 바로 그 전의 패널까지 망가뜨렸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실수한 패널과 맞닿고 있는 부분이였기 때문입니다. 각 서기들이 맡은 일에 대한 중요성을 알며 실수를 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세심한 규칙들이 뒤따랐습니다.
For example:
예를 들어
- Each day he had to start his work with prayer.
- The name of God had to be left blank, to be filled in later by a different scribe using a “purer” ink.
- At the end of a section of a book, the scribe counted the lines, the words and the letters in the original and checked them with his copy. He also found and checked the middle word of each section.
- 매일 기도로 일을 시작해야 한다.
- 하나님의 이름은 나중에 다른 필경사가 “더 순전한” 잉크로 채워넣기 위해 공백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 책의 한 절이 끝날 때마다 필경사는 원본에 있는 줄과 낱말과 글자들의 갯수를 세어가며 그의 복사본을 비교검사 하고, 매 절당 중간에 위치한 낱말까지도 찾아 검사해야 한다.
While most Christians today would consider this behavior fanatical and even idolatrous (worshiping the scripture, rather than the One who gave it to us), it nevertheless demonstrates the level of faithfulness to accuracy applied to the preservation of God’s Word throughout the first couple of thousand years of Biblical transmission.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이러한 행위들을 광신도적이며 심지어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분을 섬기는 것이 아닌 말씀 그 자체를 섬긴다며 우상 숭배로 여기기도하나 이러한 과정들은 처음 몇 천년 동안의 성경 전승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보존하는데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Hebrews has one thing in common with English: they are both “picture languages”. Their words form a clear picture in your mind. As evidence of this; the first man to ever print the scriptures in English, William Tyndale, once commented that Hebrew was ten times easier to translate into English than any other language. Tyndale would certainly be qualified to make such a statement, as he was so fluent in eight languages, that it was said you would have thought any on of them to be his native tongue.
히브리어와 영어는 둘 다 “그림 언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두 언어 낱말들의 모양은 머리속에 선명하게 그려 집니다. 그 증거로, 처음 영어 성서를 인쇄한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은 히브리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그 어떤 다른 언어들로 번역하는 것보다 열배는 쉽다고 언급했었습니다. 틴데일은 여덟가지 언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능통하게 다뤘기 때문에 충분히 이런한 언급을 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By approximately 500BC, the 39 Books that make up the Old Testament were completed, and continued to be preserved in Hebrew on scrolls. As we approach the last few centuries before Christ, the Jewish historical books known as the “Apocrypha” were completed, yet they were recorded in Greek rather than Hebrew. By the end of the First Century AD, the New Testament had been completed. It was preserved in Greek on Papyrus, a thin paper-like material made from crushed and flattened stalks of a reed-like plant. The word “Bible” comes from the same Greek root word as “papyrus”. The papyrus sheets were bound, or tied together in a configuration much more similar to modern books than to an elongated scroll.
약 BC500 년 경에 구약의 39권의 성서들이 완성되어져서 두루마리에 히브리어로 보존되어 왔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몇 백년 전에는 “위경”이라 알려진 유대의 역사책이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로 기록이 완성되었습니다. AD 1세기 말에는 신약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신약 성서들은 갈대 비슷한 식물의 줄기를 으깨서 납작하게 펼친 얇은 종이 같은 재질의 파피루스에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이란 낱말은 헬라어의 “파피루스”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파피루스들은 하나로 묶여 있었기에 긴 두루마리보다는 현 시대의 책 형태에 더 가까웠습니다.
These groupings of papyrus were called a “codex”(plural
: “codices”). The oldest copies of the New Testament
known to exist today are: The Codex Alexandrius and the Codex Sinaiticus in the
British Museum Library in
이 파피루스 묶음을 “코덱스(사본)”이라 부릅니다.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신약의 사본으로는 런던 영국 박물관 도서관에 보관되어있는 코덱스 알렌산드리우스(Codex Alexandrius) 와 코덱스 사이나이트쿠스(Codex Sinaiticus), 그리고 바티칸에 보관되어 있는 코텍스 바티칸(Codex Vaticanus)이 있습니다. 약 AD 300년 경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아테나시우스(Athenasius)가 우리가 현재 정경이라고 알고 있는 27권의 신약 성서들을 승인하였습니다.
Aramaic was spoken by the Persians, who were the major power
in the
아랍어는 약 BC 550년 경부터 이백년동안 중동의 주세력이었던 바사인들에 의해 사용되어졌습니다. 아랍어는 그 지역의 상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구약 성서의 일부분인 다니엘서, 에스라서, 예레미야서는 아랍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탈굼”이라 불리는 구약의 아랍어는 보존되어 현 사람들이 고대의 히브리어를 연구하는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In 332 B.C. the Greek general Alexander the Great conquered
B.C. 332년에는 그리스의 장군이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하여 지배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이 헬라어(그리스어)를 일상어로써 이해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When the followers of Jesus wrote the New Testament, they wanted the whole known world the hear the Good News, so they wrote in Greek, translating the Aramaic spoken by Jesus into the Greek language.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전세계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예수님이 아랍어로 전하신 말씀들을 헬라어로 번역한 신약성서를 집필하였습니다.
In 382 AD, the early church father Jerome translated the New Testament from its original Greek into Latin. This translation became known as the “Latin Vulgate”, (“Vulgate” meaning “vulgar” or “common”). He put a note next to the Apocrypha Books, stating that he did not know whether or not they were inspired scripture or just Jewish historical writings which accompanied the Old Testament.
AD 382년에 초대교회의 아버지인 제롬(Jerome)은 본래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었던 신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번역본은 후에 “라틴 불가타-불가타 성서-”라 불리워졌습니다 (“불가타”는 “통속적인” 혹은 “보통의”라는 뜻입니다). 그는 위경 옆에 ‘이 것이 영감을 받아서 기록된 말씀인지 아니면 구약을 수반하는 단순한 유대 역사의 기록인지 모르겠다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The Apocrypha was kept as part of virtually every Bible scribed or printed from these early days until just 120 years ago, in the mid- 1880’s, when it was removed from protestant Bibles. Up until the 1880’s, however, every Christian… Protestant or otherwise… embraced the Apocrypha as part of the Bible though debate continued as to whether or not the Apocrypha was inspired. There is no truth to the popular myth that there is something “Roman Catholic” about the Apocrypha, which stemmed from the fact that the Roman Catholics kept 12 of the 14 Apocrypha Books in their Bible, as the Protestants removed all of them. No real justification was ever given for the removal of these ancient Jewish writings from before the time of Christ, which had remained untouched and part of every Bible for nearly two thousand years.
위경은 120년 전인 1880년대 중반에 개신교 성서에서 삭제되기 전까지 실질적으로 모든 성서 필사본과 인쇄본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위경이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1880년대에 이르기 까지 여전히 개신교나 그 외의 모든 크리스챤들은 위경을 성서의 일부분에 포함하였습니다. 위경에는 로마 카톨릭에 관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유명한 설은 개신교에서 모든 위경을 성경에서 삭제 할 때에 로마 카톨릭은 14권의 위경 중 12권을 그들의 성경에 남겨 두었다는 사실에 의거한 설로써 사실이 아닙니다. 거의 2천년 동안 모든 성경의 일부분으로써 손상되지 않고 남아있던 그리스도 시대 전의 고대 유대 기록이 왜 삭제 되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By 500 AD the Bible had been translated into over 500 languages. Just one century later, by 600 AD, it has been restricted to only one language: the Latin Vulgate! The only organized and recognized church at that time in history was the Catholic Church of Rome, and they refused to allow the scripture to be available in any language other than Latin. Those in possession of non-Latin scriptures would be executed! This was because only the priests were educated to understand Latin, and this gave the church ultimate power…a power to rule without question… a power to deceive… a power to extort money from the masses. Nobody could question their capitalized on this forced-ignorance through the 1,000 year period from 400 AD to 1,400 AD known as the “Dark and Middle Ages”.
AD 500년에 성서는 5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졌습니다. 정확히 100년후인 AD 600년에는 성서의 언어가 오로지 한 언어, “라틴 불가타”로 제한되어졌습니다. 그 당시에 유일하게 조직화되어있고 승인 받은 교회는 로마 카톨릭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의 성서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의 성서를 소유하고 있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는 오직 성직자들만이 라틴어를 이해 하도록 교육 받았기 때문이었는데 이것은 교회가 무조건적인 통치와 대중들을 현혹하여 그들로부터 물질을 탈취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도록 했습니다.
중세 암흑시대라 알려진 AD 400년 부터 AD 1,400년까지의 1,000년의 세월 동안 그 누구도 이런 강요된 무지함을 토대로 한 교회의 자본화에 의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Pope Leo the Tenth established a practice called the “selling of indulgences” as a way to extort money from the people. He offered forgiveness of sins for a fairly small amount of money. For a little bit more money, you would be allowed to indulge in a continuous lifestyle of sin, such as keeping a mistress. Also, through the invention of “Purgatory”, you could purchase the salvation of our loved-one’s souls. The church taught the ignorant masses, “As soon as the coin in the coffer rings, the troubled soul from Purgatory springs!” Pope Leo the Tenth showed his true feelings when he said, “The fable of Christ has been quite profitable to us!”
교황 레오 10세는 사람들에게부터 돈을 탈취하기 위해 면죄부를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꽤 싼 값의 돈으로 사람들의 죄를 면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적은 양의 돈으로 면죄부를 구매함으로써 정부를 들이는 등의 죄의 생활 방식을 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연옥”을 고안해냄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하는 이들의 영혼을 구원해 낼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무지한 대중들에게 “이 통안에 동전이 떨어져 울릴 때마다 연옥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적잖은 이익을 가져다 주는구나!” 라며 그의 진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Editorial Note (from www.Greatsite.com;
Author and Editor, John L. Jeffcoat III): Let us state at this point, that it
is not our intent to offend or “bash” Roman Catholics. It is unavoidable that
every historical account has its “good guys” and its “bad guys”. Just as it is impossible to accurately
tell the story of World War Two without offending the Germans and the Italians
who were undeniably the enemies of world peace at that time…
it is equally impossible to accurately tell the story of the English Bible
without unintentionally offending those who continue to revere the Roman
Catholic and
소론(小論) (출처:www.Greatsite.com – 저자/편집자 존 L. 제프코트 3세) : 우선, 우리의 의도가 로마 카톨릭을 불쾌하게 하려 한다거나 “후려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표명해둡니다. 역사 이야기에서 “착한놈”과 “나쁜놈”이 등장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세계 평화의 부정 할수 없는 대적이였던 독일과 이탈리아를 비난하지 않으면서 세계 2차 대전 당시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없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영어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로마 카톨릭과 성공회 교회들을 숭배하던 자들을 의도치도 않게 비난하는 것이 불가피한 사항입니다.
Where was the true
이러한 암흑 시대에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들을 어디 있었을까요?
On the
AD 563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아이오나 섬에서 콜럼비아라는 사람이 신학교를 세워서 시작했습니다. 이 후, 700년간 이 곳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중세 암흑시대의 비카톨릭인들에게 복음주의 성경 가르침을 제공해주는 공급지였습니다. 이 신학교 학생들은 “어느 낯선인”이라는 뜻인 “쿨디(Culdee)”라 불렸습니다. 쿨디는 비밀 단체였습니다. 수세기 동안 쿨디들은 진정한 크리스챤의 믿음을 지켜왔고 후에는 이것이 프로테스탄 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In fact, the first men to be
called a “Culdee” was Joseph of Aremethia. The Bible tells us that Joseph of
Aremethia gave up his tomb for Jesus. Tradition tells us that he was actually
the Uncle of the Virgin Mary, and therefore the Great-Uncle (or “half-Uncle” at
least) of Jesus. It is also believed that Joseph of Aremethia traveled to the
사실상 첫 “쿨디”라 불릴 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이 그의 무덤을 예수께 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실 그는 동정녀 마리아의 삼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의하면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종조부(최소한 이부삼촌)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예수님의
부활 후 짧은 기간 동안 영국의 섬들을 여행하며 그 땅에 첫번째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다고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그의 청년 시절(13세에서 30세 사이)에 그의 종조부인 요셉과 세계를 여행하며
다니셨다고 기록하고있습니다.
In the late 1300’s, the secret society of Culdees chose
John Wycliffe to lead the world out of the Dark Ages. Wycliffe has been called
the “Morning Star of the reformation”. The Protestant Reformation was about one
thing: getting the Word of God back into the hands of the masses in their own
native language, so that the corrupt church would be exposed and the message of
salvation in Christ alone, by scripture alone, through faith alone would be
proclaimed again.
1300년대 말에 비밀 단체인 쿨디는 이 세계를 암흑의 시대에서 벗어나게 하는데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를 선택하였습니다. 위클리프는
“개혁의 새벽별”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종교 개혁이 지향하는 것은 한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반 대중들이 그들의 나라 언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되어서 교회의 패역함이 밝혀지고 그리스도와 말씀과 믿음을 통한 구원의
소식이 다시금 선포되는 것이였습니다.
The fist
hand-written English language Bible manuscripts were produced in the 1380’s AD
by John Wycliffe, an
최초의 영어 필사본 성서는 AD 1380년대에 옥스포드 대학의 학자이며
교수이자 신학자였던 존 위클리프 (John Wycliffe) 에 의해 출간되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조직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에 어긋난다며 반대를 하면서부터 그 이름을 유럽에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롤라드’ 라 알려진 그의 제자들과,
조수 퍼베이(Purvey), 그리고 다른 수많은 신실한 서기관들의 도움으로
12권의 영어판 성서 말씀을 복사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번역본들은 라틴 불가타의
번역판이었습니다. 라틴 불가타는 위클리프가 유일하게 참고 할 수 있었던 출처문이었습니다. 교황은 위클리프의 가르침과 그의 영어 번역 성경으로 인해 매우 격노한 나머지 44년후 위클리프가
죽자 그의 뼈를 파낸 후 으깨서 강에 흩뿌리게 하였습니다.
One of Wycliffe’s followers, John Hus, actively promoted Wycliffe’s
ideas: that people should be permitted to read the Bible in their own language,
and they should oppose the tyranny of the Roman church that threatened anyone
possessing a non Latin Bible with execution. Hus was burned at the stake in
1415, with Wycliffe’s manuscript Bibles used as kindling the fire. The last
words of John Hus were that, “in 100 years, God will raise up a man whose calls
for reform cannot be suppressed.” Almost exactly 100 years later, in 1517,
Martin Luther nailed his famous 95 Theses of Contention (a list of 95 issues of
heretical theology and crimes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into the church
door at
위클리프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요한 후스(John Hus)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비(非)라틴 성경을 소유하고 있으면 사형에 처한다는 로마
교회의 협박에 대항해야 한다는 위클리프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조장하였습니다. 1415년, 후스는 위클리프의 사본 성경을 불쏘시개로 사용한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에 처했졌습니다.
요한 후스는 “앞으로 100년 안에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억눌러 지지 않을 개혁을 위해 세우실 것이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00년 후인 1517년에,
마틴 루터가 그의 유명한 “95 개조 반박문”(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단적인 신학과 죄악 대한 95가지의 반박문) 을 비텐베르크의 교회 문에 못질했습니다. 후스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마틴 루터는 성경을 처음으로 독일어로 출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Foxe’s Book of
Martyrs”에서는 루터가 반박문을 붙힌 해와 같은 1517년에 아이들에게 라틴어
대신 영어로 주기도문을 외우게 했다는 죄목으로 일곱명이 화형에 처했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Johann Gutenberg invented the printing press in the 1450’s,
and the first book to ever be printed was a Latin language Bible, printed in
Mains,
1450년, 요한 쿠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였습니다.
맨 처음으로 인쇄된 책은 독일의 마인츠에서 인쇄된 라틴어 성경이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워서 후에 인쇄물의 잎사귀 삽화들을 손으로 채색 하기도 했습니다. 본래는 이름은“요한 겐스플라이쉬(Johann Gensfleisch)”이지만 ‘아름다운 산, 요한’ 이라는 뜻인 “요한 쿠텐베르크”라고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발명품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품 중의 하나로 꼽히지만, 어느 부도덕한 사업체가 그의 인쇄사업을 가로채감으로써 그
희생양이 되어 빈곤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드디어 그가 가동 활자를 발명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양의 성경책과 다른 책들을 제작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것은 개혁 성공에 대한 매우 핵심적인
사항이었습니다.
In the 1490’s another
1490에 또 한명의 옥스포드 교수이자 헨리 7세와 8세의 개인 주치의였던 토머스 리너커(Thomas Linacre)가 헬라어를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헬라어로 된 복음서를 읽고 그것을 라틴 불가타 성서와
비교한 후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원 헬라어
말씀) 복음서가 아니던지… 우리가 크리스챤이 아니던지 둘 중 하나다.
“라틴어는 너무 변질되어져서 더 이상 복음서의 메시지를 보존하고 있지 않다… 라틴어가
성경의 본래 언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여전히 라틴어 외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읽는 자는 그 누구든지 죽이겠다며 위협을 가한다...
“
In 1496, John Colet, another
1496년, 또 한명의 옥스포트 교수이자 런던시
시장의 아들이였던 존 콜릿(John Colet)은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을 읽고는 그의 옥스포드 학교 제자에게
영어로 번역을 해주다가, 후에는 런던의 성 바울 성당에서 더 많은 대중들에게 번역을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해 할 수 있는 언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있었기에 성당에는 6개월만에 20,000명의 사람들로 꽉 들어차게 되었고 또 성당 밖깥에도 최소한 안에 있는 사람
수만큼의 인원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3년, 오늘날까지 성 바울 성당이 런던의 주 교회로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석하게도 일요일
아침 대 예배때의 출석 인원은 고작 200명 정도로 대부분이 관광객들입니다. 다행히 콜릿은 고위층의 친구들을 둔 권력자였기 때문에 놀랍게도 처형을 면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In considering the experiences of Linacre and Colet, the
great scholar Erasmus was so moved to correct the corrupt Latin Vulgate, that
in 1516, with the help of printer John Froben, he published a Greek-Latin
Parallel New Testament. The Latin part was not the corrupt Vulgate, but his own
fresh rendering of the text from the more accurate and reliable Greek New
Testament manuscripts he had acquired. This milestone was the first non-Latin
vulgate text of the scripture to be produced in a millennium… and the first
ever to come off a printing press. The 1516 Greek-Latin New Testament of
Erasmus further focused attention on just how corrupt and inaccurate the Latin
Vulgate had become, and how important it was to go back and use the original
Greek (New Testament) and original Hebrew (Old Testament) languages to maintain
accuracy… and to translate them faithfully into the languages of the common people,
whether that be English, German, or any words of Pope Leo X’s declaration that “the
fable of Christ was quite profitable to him” continued through the years to
infuriate the people of God.
대학자(大學者)였던 에라무스(Eramus)는
리너커와 콜릿의
경험들을 고려하며
변질된 라틴
불가타 성서를
수정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516년,
에라무스는 인쇄공
요한 프로벤(John
Froben)의
도움으로 ‘헬라어-라틴어
병행 신약
성서(Greek-Latin Parallel New Testament)’를
출판하였습니다. 이
신약 성서에
포함되어있는 라틴어는
변질 된
불가타가 아닌,
에라무스가 확보한
좀 더
정확하고 신뢰성
있는 헬라어
신약 성서에서
그가 직접
새롭게 번역
한 것이였습니다.
이것은 새천년
동안 발행된
최초의 비(非)라틴
불가타 말씀이었고
최초의 인쇄판
헬라어 신약
성서였기 때문에
역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1516년, 에라무스의
헬라어-라틴어
병행 신약
성서는 라틴
불가타 성서가
얼마나 변질
되고 비정확한지에
더 중점을
두고, 원
헬라어(신약)와
히브리어(구약)를
보존하는 것,
그리고 그
것들을 현
사람들에 맞춰
영어 혹은
독일어 혹은
다른 타
언어로 신실하게
번역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로마에서는
이러한 “불법
행위”에
대한 동조가
발견 될
수 없었으며,
교황 레오
10가 말한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적잖은 이익을
가져다 주는구나!”
와 같은
암흑 시대가
이 후에도
수년간 하나님의
사람들을 격노케
하였습니다.
William Tyndale was the Captain of the Army of Reformers, and was their
spiritual leader. Tyndale holds the distinction of being the first man to ever
print the new Testament in the English language. Tyndale was a true scholar and
a genius, so fluent in eight languages that it was said one would think any one
of them to be his native tongue. He is frequently referred to as the “Architect
of the English Language”, (even more so than William Shakespeare) as so many of
the phrases Tyndale coined are still in our language today.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은 개혁군대의 대장이자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틴데일은 최초로 영어판 신약 성서를 인쇄한 사람으로써 영어 성서에 대한 인쇄 역사의 전.후의
구분점에 서 있습니다. 틴데일은 진정한 학자이자 천재였습니다. 그는
여덟개의 언어에 능통했으며, 그가 그 중 어느 언어를 사용하던지 사람들은 그 것이 마치 그의 원어인줄 알
것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는 종종 “영어의 설계자”라고도 불립니다(윌리엄 셰익스피어보다도 많이). 그가 만들어 낸 많은 신조 (新造) 문귀들이 오늘 날 까지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Martin Luther had a small head-start on Tyndale, as Luther declared his
intolerance for the Roman Church’s corruption on Halloween in 1517, by nailing
his 95 Theses of Contention to the
1517년, 헬로윈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못질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로마 교회의 패역함을 관용 할 수 없다고 선포한 그는 개혁에서 틴데일보다 약간 더 선두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1521년, 루터를 처형하기 위한 Diet of Worms
Council이 열렸습니다. 이에 따라 몇개월 후 추방되어야 했던 그는 최초로 에라무스의
1516년판 헬라어-라틴어 신약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1522년 9월에 발간했습니다. 또한 그는
1523년에 독일어판 모세 오경을 발간하고, 1529년에는 다른 판의 독일어 신약성서를
발간했습니다. 1530년, 그는 성경 전체를 독일어판으로 발간했습니다.
William Tyndale wanted to use the same 1516 Erasmus text as a source to
translate and print the New Testament in English for the first time in history.
Tyndale showed up on Luther’s doorstep in
윌리웜 틴데일도 에라무스의 1516년판 사본을 번역하고 인쇄하여서 역사상 최초의 영어판 신약
성서를 발간하고자 하였습니다. 1525년, 틴데일은 독일에 있는 루터를
방문하여 그 해 말에 신약성서의 영어 번역화를 마쳤습니다. 틴데일이 신약 성서의 영어화 작업을 추진 중이라는
소문을 들은 종교 재판관들과 그의 추적자들이 틴데일을 추적하여 체포하고 그의 작업을 막으려 했으므로 그는 영국에서 도피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키셨고,
1525-1526 년, 틴데일의 신약 성서는 최초의 인쇄 영어판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 후에 1530년에는, 발행된 틴데일의 신약
성서들을 정교하게 공들여 채색화 하기도 했습니다.
They were burned as soon as the Bishop could confiscate them, but
copies trickled through and actually ended up in the bedroom of King Henry
VIII. The more the King and Bishop resisted its distribution, the more
fascinated the public at large became. The church declared it contained
thousands of errors as they torched hundreds of New Testaments confiscated by
the clergy, while in fact, they burned them because they could find no errors
at all. One risked death by burning if caught in mere possession of Tyndale’s
forbidden books.
그 신약 성서들은 주교에게 몰수 당한 즉시 불태워졌지만, 그 복사본들은 은밀하게 배포되어져서 결국엔 헨리
8세의 손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왕과 교주가 배포를 방해할수록 대중들은 더욱더
이 책에 빠져들었습니다. 교회는 성직자들에 의해 몰수된 수 백권의 신약 성서들이 수 천개의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며 불태웠지만, 사실은 오류를 전혀 발견 할 수 없었기에 불태워 버린 것이였습니다 이 틴데일의 금지 도서를
단순히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화형 당해 죽는 위험을 감수 해야 했습니다.
Having God’s Word available to the public in the language of the common
man, English, would have meant disaster to the church. No longer would they
control access to the scriptures. If people were able to read the Bible in
their own tongue, the church’s income and power would crumble. They could not
possibly continue to get away with selling indulgences (the forgiveness of
sins) or selling the release of loved ones from a church-manufactured “Purgatory”.
People would begin to challenge the church’s authority if the church were
exposed as frauds and thieves. The contradictions between what God’s Word said,
and what the priests taught, would open the public’s eyes and the truth would
set them free from the grip of fear that the institutional church held.
Salvation through faith, not works or donations, would be understood. The need
for priests would vanish through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The
veneration of church-canonized Saints and Mary would be called into question.
The availability of the scriptures in English was the biggest threat imaginable
to the wicked church. Neither side would give up without a fight.
하나님의 말씀을 현 시대 언어인 영어로 출판하는 것은 교회에게 재앙이었습니다. 더
이상 교회는 사람들이 말씀에 접근하는 것을 억제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그들 언어의 성경을 읽게
된다면 교회의 수입과 권력은 무너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또한 면죄부(죄에 대한 용서)를 발행 할수도 없을뿐더러 –교회가 꾸며낸-
“연옥”에 있는 사랑하는 자들의 영혼 구원을 대상으로 장사도 할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만약 교회가 사기꾼과 도둑으로 드러난다면 사람들은 교회의 권위에 대적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제들의 가르침 사이의 모순은 대중들의 눈을 열어서 제도적 교회에 대한 두려움으로 붙잡혀 있던 그들을 진리로서 자유케
만들 것이었습니다. 모든 믿는자들이 제사장권을 가지게 됨으로서 교회의 사제들의 필요성이 사라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시성(諡聖)화 시킨 성인들과 마리아에
대한 숭배에 의구심이 생기게 될 것이었습니다. 성서의 영어화는 교회가 짐작할 수 있는 최고의 위협이었습니다.
그 어느 한 쪽도 싸워보지 않고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Today, there are only two known copies left of Tyndale’s 1525-26 First
Edition. Any copies printed prior to 1570 are extremely valuable. Tyndale’s
flight was an inspiration to freedom-loving Englishmen who drew courage from the
11 years that he was hunted. Books and Bibles flowed into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틴데일의
1525-26의 초판은 단 두 권 밖에 없습니다. 1570년 전의 판본들은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됩니다. 틴데일의 도피는 자유를 사랑하는 영국인들을 고무시켰고 그가 체포되기까지
11년동안 용기를 일으켜 주었습니다. 틴데일의 도피는 그가 체포되기까지
11년 동안 자유를 사랑하는 영국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책들과 성경책들이 목화 꾸러미들과 밀가루 포대 속에 감춰져서 영국으로 유입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틴데일의 최고의 고객은 왕의 신하였습니다. 그는 구입 할 수 있는
최대한만큼 구입하여 불태워버리고, 틴데일은 그에게 판매한 돈으로 그보다 더 많은 양을 인쇄하였습니다.
결국에 틴데일은 그가 가장 가깝게 교제하던 한 영국인의 배신으로 인해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교살당하기 전까지 500일을 감금되어 1536년에
화형 당하였습니다. 틴데일은, “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여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틴데일의 이 기도는 마침내 삼 년 후인 1539년에 헨리 8세가 “대성경(Great Bible)”이라고 알려진 영어
성경의 발행을 허락하고 기금까지 함으로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Myles Coverdale and John “Thomas Matthew” Rogers had remained loyal
disciples the last six years of tyndale’s life, and they carried the English
Bible project forward and even
accelerated it. Coverdale finished translating the Old Testament, and in 1535
he printed the first complete Bible in the English language, making use of
Luther’s German text and the Latin as sources. Thus, the first complete English
Bible was printed on October 4, 1535, and is known as the Coverdale Bible.
마일스 카버데일과 존 “토머스 매튜” 로저스는 틴데일의 마지막 6년간 그의 충실한 제자로 남아있으면서 성서 영어화 작업을 진행하고 진척시키기까지 하였습니다. 카버데일은 루터의 독일어판 본문과 라틴어판을 출처로 구약 성서 번역을 마치고 1535년에는 최초로 전체 성경을 영어판으로 인쇄 출판 하였습니다.
John Rogers went on to print the second complete English Bible in 1537.
It was, however, the first English Bible translated from the original Biblical
languages of Hebrew & Greek. He printed it under the pseudonym “Thomas
Matthew”, (an assumed임시 name that had actually been used
by Tynndale at one time) as a considerable part of this Bible was the
translation of Tyndale, whose writings had been condemned by the English
authorities. It is a composite made up of Tyndale’s Pentateuch and New
Testament (1534-1535 edition) and Coverdale’s Bible and some of Roger’s own
translation of the text. It remains known most commonly as the Matthew-Tyndale
Bible. It went through a nearly identical동일한
second-edition printing in 1549.
1537년, 존 로저스는 계속하여 두번째 전체 영어판 성경을 인쇄 출판 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어판 성경으로서는 두번째이지만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본 성서 영역본으로서는 최초였습니다. 그는 “토머스 매튜”(실제로 한 때 틴데일이 사용하였던
임시 이름) 라는 필명하에 인쇄 출판 하였는데 이 성서가 영국 관헌에 의해 집필이 규제된 틴데일의 번역본이었다는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성서는 틴데일의 모세 오경과 신약 성서(1534-1535 년 판), 커버데일의 성서, 그리고 로저,
그 자신의 번역본을 합친 혼합본이었습니다. 이 것은 일반적으로 매튜-틴데일 성서(Matthew-Tyndale Bible)라고 알려져 보존되고 있습니다.
1549년에도 초판과 거의 동일한 두번째 판이 출간 되었습니다.
In 1539, Thomas Cranmer,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hired Myles
Coverdale at the bequest of King Henry VIII to publish the “Great Bible”. It
became the first Engish Bible authorized for public use, as it was distributed
to every church, chained to the pulpit, and a reader was even provided so that
the illiterate could hear the Word of God in plain English. It would seem that
William Tyndale’s last wish had been granted… just three years after his martyrdom.
Cranmer’s Bible, published by Coverdale, was known as the Great Bible due to
its great size: a large pulpit folio measuring over 14 inches tall. Seven
editions of this version were printed between April of 1539 and December of
1541.
1539년에 헨리 8세의 요청으로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가 마일스 커버데일로
하여금 “대성경(Great Biible)” 출판하도록 했습니다.이것은 모든 교회에 배포되어 대중이 사용하도록
승인 받은 최초로 영어 성서가 되었습니다. 배포된 성서는 강대상에 연결 해놓고, 읽어주는 사람까지 제공되어서 문맹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쉬운 영어로 들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윌리엄 틴데일의 마지막 바램이 그가 순교한지 단 3년 후에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커버데일이 출판한 Cranmer’s Bible은 그 거대한 크기 덕분에 “대성경(Great Bible)”이라고 불리웠습니다. 강대상의
이 커다란 책은 그 높이가 14인치가 넘었습니다. 이 성서역(譯)본은 1539년 4월과 1541년 12월 사이에 일곱개의 판이 출간되어졌습니다.
It was not that King Henry VIII had a change of conscience regarding
publishing the Bible in English. His motives were more sinister but the Lord
sometimes uses the evil intentions of men to bring about His glory. King Henry
VIII had in fact, requested that the Pope permit him to divorce his wife and
marry his mistress. The Pope refused. King Henry responded by marrying his
mistress anyway, (later having two of his many wives executed), and thumbing
his nose at the Pope by renouncing Roman Catholicism, taking England out from
under Rome’s religious control, and declaring himself as the reigning head of
State to also be the new head of the Church. This new branch of the Christian
Church, neither R
헨리 8세가 영어 성서 출판에 대한 그의 마음을 바꾼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성서 출판을
허가 한 것은 더 사악한 뜻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하나님은 때론 사람의 그러한 악한 의향까지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사실, 헨리 8세는
교황에게 그의 부인과 이혼하고 정부와 결혼하는 것에 대한 허가 승인을 요청했지만 거절 당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정부와 결혼 함으로써 교황의 거절 의사에 응답하고 (후에는 그의 많은 부인들 중 두명을 처형했음),
로마 카톨릭을 부인함으로써 교황에게 콧방귀를 뀌며 그 자신이 국가를 통치하는 장(長) 이며 또한 교회의 새로운 장(長)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때 생겨난 새로운 기독교 교회는 로마 카톨릭도, 신교도도 아닌 성공회 교회(Angelican Church) 또는 영국교회 (Church
of England)라고 불리워졌습니다. 헨리 8세 마치 그가 원래 “교황”이었다는 것 같이 행동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앙갚음을 하기 위한 첫번째 움직임으로서 최초의 합법적인 영어판 말씀 인쇄 출판을 위해 기금 하여 더욱더 로마의
뜻에 도전했습니다.
The ebb and flow of freedom continued through the 1540’s… and into the
1550’s. After King Henry VIII, King Edward VI took the throne, and after his
death, the reign of Queen “Bloody” Mary was the next obstable to the printing
of the Bible in English. She was possessed in her quest to return
자유의 밀물과 썰물은 1540년에도 계속되면서 1550년대까지도 이어졌습니다.
헨리 8세 후 에드워스 6세가 왕좌에 앉게
되었고, 또 그가 죽은후에는 “피의 메리(Bloody
Mary)”라 불리우는 메리 여왕의 치하에서 영어판 성경 인쇄는 다음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영국을 로마 카톨릭으로 되돌려야겠다는 목표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메리 여왕은 1555년에는 존 “토머스 매튜” 로저스와 토머스 크랜머를 화형에
처하고, 연이어서 수백명의 개혁자들을 그들이 신교도라는 “죄”
로 화형에 처했습니다. 이 시기는 Marian Exile이라 불리우며, 도피자들은 그들의 고향과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을지에 대한 희박한 희망을
가지고 영국을 떠났습니다..
In the 1550’s, the Church at
1550년대의 스위스, 제네바의 교회는 도피 해온 개혁자들에게 큰
동정심을 보이며 그들에게 몇몇 안되는 안전한 피난처 중 한 곳이 되었습니다. 마일스 커버데일과 존 폭스(”Foxe’s
Book of Martyrs”란 유명한 책의 저자. 이 책은 1세기에서 16세기 중반 사이의 초대 교회들과 신교도들이 당한 박해와 순교를 총망라 기록 해놓은
책으로서 오늘날의 유일한 참고자료서이다)가 이끄는 많은 개혁자들, 또한,
토머스 샘슨(Thomas Sampson)과 윌리엄 위팅험(William
Whittingham)도 제네바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There, with the protection of the great theologian John Calvin (author
of the most famous theological book ever published, Calvin’s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John Knox, the great Reformer of the Scottish Church,
the Church of Geneva determined to produce a Bible that would educate their
families while they continued in exile.
그곳에서 제네바
교회는 도피자들이 위대한 신학자인 존 칼빈(이제까지 출판되었던 신학책들 중 가장 유명한 신학책인 “Calvin’s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의 저자)과 스코트랜드
교회의 위대한 개혁자인 존 녹스의 보호를 받으며 망명 하고 있을 동안 그들의 가정들을 교육 시킬 수 있는 성경책들을 출판 할 수 있게 하도록 결정
내렸습니다.
The New Testament was completed in 1557, and the complete Bible was
first published in 1560. It became known as the Geneva Bible. Due to a passage
in Genesis describing the clothing that God fashioned for Adam and Eve upon
expulsion from the Garden of Eden as “Breeched” (an antiquated form of “Britches”),
some people referred to the Geneva Bible
as the Breeched Bible.
1557년에는 신약 성서가 완성되었고, 1560년에는 전체 성서가
첫 출판 되었습니다. 이 성서는 제네바 성경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는데,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에서 추방 하실 때 “반바지(breeched)”를 입히셨다고 표현하고 있기에 몇몇 사람들은 반바지 성서(Breeched Bible)라고도
부릅니다.
The Geneva Bible was the first Bible to add numbered verses to the
chapters, so that referencing specific
passages would be easier. Every chapter was also accompanied by
extensive, marginal notes and references so thorough and complete that the
Geneva Bible is also considered the first English “Study Bible”. William
Shakespeare quotes hundreds of times in his plays from the
제네바 성경은 특정 구절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장(chapter)마다 절(verse)수들을 매긴 최초의 영어 성경이었습니다. 매 장마다 넓은 여백의 필기 공간과 매우 철저하고
완전한 참조문들을 포함하고 있었기에 제네바 성서는 최초의 “학습 성서(Study Bible)”
이라고도 불립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수백번이고 그의 연극에서 제네바 역의 성서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제네바 성서는 100년이 넘도록 영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표준 성서가 되었습니다. 1560년과 1644년 사이에 최소한 144개 판의 성서가 출판되었습니다. 1611년 판의 흠정영역 성서를 검토해보면 번역가들이 그 어떤 사본들보다 제네바 성서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제네바 성경 자체는 윌리엄 틴데일의 최초 영역판을 90% 넘게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네바 성서는 흠정영역이 출간된 1611년 후에도 100년 동안이나 흠정영역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었습니다. 제네바 성서는 아메리카에 최초로 반입된 영어성경으로서의 영예를 가지고 있으며, 청교도들과 순례자들의
성서가 되었습니다. 이 성서는 진정한 “신교도 개혁 성서”
였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유명한 제네바 성서는
1644년도 부터 더 이상 인쇄되지 않았기에 이 성서를 얻기 위해서는 원본판을 구입하거나 혹은 값이 덜 드는 복사품을
구입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With the end of Queen Mary’s bloody reign, the reformers could safely
return to
개혁자들은 메리 여왕의 피의 통치의 끝나자 안전하게 영국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치하에서, 성공회는 어쩔 수 없이 영국에서 제네바 성서를 출판하고 배포하는
것에 대해 묵인해야 했습니다. 제네바 성서의 난외주는 격렬하게 제도적 교회에 반대하고 있었기에 그 당시의
주권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덜 선동적인 어조의 또 다른 역(譯)이 요구되었고, 게다가 “대성경(Great Bible)”의 사본들은 거의 백년이 다되어서 낡아졌었습니다.
1568년, Bishop’s Bible이라고 알려진 “대성경(Great Bible)”의 개정판이 소개되었습니다. 이 성서는 1568년과 1606년 사이에
19개 판이 인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흠정영역판의 미완성 초본”이라고 불리우며, 대중들에게 발끝만큼의 인기도 끌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제네바 성서와 필적하기엔 역부족으로 제네바 성서가 너무 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By the 1580’s, the Roman Catholic Church saw that it had lost the
battle to suppress the will of God: that His Holy Word be available in the
English language. In 1582, the Church of Rome surrendered their fight for “Latin
only” and decided that if the Bible was to be available in English, they would
at least have an official Roman Catholic English translation. And so, using the
corrupt and inaccurate Latin Vulgate as the only source text, they went on to
publish an English Bible with all the distortions and corruptions that Eramus
had revealed and warned of 75 years earlier. Because it was translted at the
Roman Catholic College in the city of
1580년 대에 이르러,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영어로도 통용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저지하는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582년, 로마 교회는 “오직 라틴만 사용”에 대한 싸움에서 항복하고 그들의 성서가 영어로도 통용 가능한지를 알고 공식적인 로마 카톨릭 영역판을 보유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에라무스가 75년전 이미 밝혀내고 경고한 변조되고 잘못된 라틴 불가타만을
번역 자료로 사용하여 왜곡됨과 변조됨을 모두 포함한 영어판 성서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서는 라임즈(Rheims)시의 로마 카톨릭 대학(Roman Catholic College)에서 번역되었기 때문에 라임즈
신약 성서라 불리워졌습니다. 도웨이(Douay) 구약 성서는
1609년 도웨이 시의 대학에서 로마 교회가 번역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두
성서의 결합판을 “도웨이/라임즈(Doway/Rheims)”
영역판이라고 부릅니다. 1589년, 윌리엄
펄크 (William Fulke) 박사가 “펄크의 논증(Fulke’s
Refutation)”을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에 비숍 영역판과 라임즈 영역판을
나란히 병행하여 인쇄함으로서 로마교회의 영역판 성서에 대한 틀린 절충사항들의 오류들과 왜곡들을 지적하였습니다.
With the death of Queen Elizabeth I, Prince James VI of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죽음으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왕자가 영국의 제임스 1세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1604년, 신교도 성직자들은 이 새로운 왕을 찾아가 1568년에 첫 인쇄된 비숍 성서(Bishop’s Bible)을 대신할 새로운 번역판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알렸습니다. 그들은 제네바 영역판이 훌륭한 학문과, 정확하고
철저한 주석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논쟁의 여지를 만드는 난외주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다’ 라는 내용 등등)가 포함되어 있는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본래, 교회의
리더들은 사람들을 위해 단순히 단어에 대한 설명문이나 앞 뒤 참조문 첨부된 주석이 있는 성경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This “translation to end all
translations” (for a while at least) was the result of the combined effort of
about fifty scholars. They took into consideration: The Tyndale New testament,
The Coverdale Bible, The Matthews Bible, The Great Bible, The Geneva Bible, and
even the Rheims New Testament. The great revision of the Bishop’s Bible had
begun. From 1605 to 1606 the scholars engaged in private research. From 1607 to
1609 the work was assembled. In 1610 the work went to press, and in 1611 the
first of the huge (16 inch tall) pulpit folios known today as “The 1611 King James
Bible” came off the printing press. A typographical discrepancy in Ruth 3:15
rendered a pronoun “He” instead of “She” in that verse in some printings.
“모든 번역들을 종결시킬 번역” (어찌됐든 한동안만큼은…) 이라는 결과는
50여명의 학자들이 함께 수고하여 이루어 낸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틴데일 신약성서,
커버데일 성서, 매튜 성서, 대성서,
제네바 성서, 그리고 라임즈 신약성서까지 참고하였습니다. 비숍 성서의 위대한 개정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1605년부터 1606년 까지는 각각의 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연구에 몰두하였고,
1607년 부터 1609년까지는 그 연구들을 모아 정리하였습니다.
1610년에는 인쇄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1611년에는 오늘날 “1611년판 흠정영역”이라고 알려진 거대한(높이
16인치) 2절판 성경을 인쇄했습니다. 하지만
인쇄상의 오류로 몇 인쇄물의 룻기 3:15의 구절의 “그녀(she)”가 “그(he)”로 표기되버리고 말았습니다.
This caused some of the 1611 First editions to be known by collectors
as “He” Bibles, and others as “She” Bibles. Starting just one year after the
huge 1611 pulpit- size King James Bibles were printed and chained to every
church pulpit in
이 오류 사항으로 인해 몇몇의 1611년의 초판들은 수집가들에게 “그(he)” 성경이라 불리우고 나머지는 “그녀(she)”
성경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설교단 크기의 거대한 1611년판 흠정영역이 인쇄되어 모든 교회의 설교단에 연결되고, 1년 후에는 초대 표준 크기의 흠정영역판을
인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표준 크기들의 인쇄 작업은 각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성서 사본을 소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The
성공회의 흠정영역이 신교도 교회의
제네바 성서보다 더 대중화 되기까지는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역사상 가장 아이러니한 사항 중 하나는 흠정영역이 신교도 영역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 신교 교회들은 오로지 흠정영역만이
진정한 영역판이라고 채택한다는 사실입니다! 흠정영역판은 역사상 가장 신교도인들에게 적대적이었으며 그들을 살해한
세력들이 신교도의 제네바 성서와 필적하게 하기 위해 출간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신교도인들이 그들이 받은 박해에 대한 모든 비난을 로마 카톨릭에게 돌리는 동안 주목해봐야 할 사실은
1500년대에 영국에서 로마 카톨릭이 파탄난 후인 1600년대에도 영국 교회(Angelican
Church)가 계속하여 신교도인들을 박해했다는 것입니다.
One famous example of this is John Bunyan, who while in prision for the
crime of preaching the Gospel, wrote one of Christian history’s greatest books,
Pilgrim’s Progress. Throughout the 1600’s, as the Puritans and the Pilgrims
fled the religious persectution of England to cross the Atlantic and start a
new free nation in America, they took with them their precious Geneva bible,
and rejected the King’s Bible.
이 사실에 대해 한가지 널리 알려진 실례(實例)로는 존 번얀(John
Bunyann)이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했다는 죄로 옥에 감금되어있는 동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독교 책인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저술했습니다.
1600년대 동안에 신교도인들과 순례자들은 영국에서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달아나 대서양을 건너 도착한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국가를 설립하면서 왕의 성경인 흠정영역을 거부하고 그들의 소중한 제네바 성서를 가져왔습니다. 아메리카는 흠정영역
성서가 아닌 제네바 성서의 토대 위에 설립된 것이었습니다.
Protestants today are largely unaware of their own history, and unaware
of the Geneva Bible (which is textually 95% the same as the King James Version,
but 50 years older than the King James Version, and not influenced by the Roman
Catholic Rheims New Testament that the King James translators admittedly took
into consideration).
오늘날의 신교도인들은 그들 자신들의 역사와 제네바 성서(본문상 95%가 흠정영역과 일치하지만 흠정영역보다 50년 더 먼저 발간된 것으로 흠정영역의 번역가들이 참고
했다고 인정한 로마 카톨릭의 Rheims 신약 성서의 영향을 받지 않음)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Nevertheless, the King James Bible turned out to be an excellent and
accurrate translation, and it became the most printed book in the history of
the world, and the only book with one billion copies in print. In fact, for
over 250 years… until the appearance of the English Revised Version of
1882-1885… the King James Version reigned without much of a rival.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정영역 성서는 우수하고 정확한 번역본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며 전세계 역사상 최고 많이 인쇄되고 유일하게 10억권의
복사 인쇄본을 발행한 책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흠정영역은 English Revised
Version이 나온 1882-1885년도 이전까지 250년이 넘도록 딱히 필적할 만한 다른 상대도 없이 그 영향력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One little-known fact, is that for the past 200 years, all King James
Bibles published in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한가지는, 지난 200년간 아메리카에서
출판된 흠정영역은 사실 1769년에 1611년 판의 어법과 단어들을
교정한 ‘Baskerville 단어와 어법 개정판’이었다는 것입니다.
출판업자는 속임수로 이 개정판에 “1611”년 판의 서문을 삽입하고 이 것이
1769년 판이라는 기록을 찾을 수 없게 했는데, 이는 판매에 차질이 없게 하기
위함이였습니다. 현재 무개정판의 진짜 1611년 판을 구하는 방법은
1769년 전에 인쇄된 흠정영역을 구입하거나, 혹은, 덜 비용이 드는 방법으로서는 1611년 흠정영역 성서의 복제한 모사품을 구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Although the first Bible printed in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인쇄된 성서는 1663년에 존 엘리엇(John Eliot)이 발행한 본토 알고키안(Algonquin) 인디안 언어 성서였지만,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인쇄된 영어판 성서는 1782년에 로버트 아트킨
(Robert Aitken)이 발행한 흠정영역 성서
였습니다. 1782년 판의 로버트 아트킨의 성서는 미국 의회에서 유일하게 승인 받은 성서이기도 합니다.
그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에게서 미국 독립 전쟁 중 영국 제품들을 수입금지하는 기간 동안 미국인들에게 성서들을 공급해주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습니다. 1808년, 로버트의 딸, 제인 아트킨(Jane Aitken)은 –물론 미국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성서를 발행하였습니다. 1791년에는 이삭 콜린스(Isaac Collins)가 미국 성서 활자의 품질과 크기에 커다란 개선을 가져와 미국에서 최초로 흠정영역판 “가정
성서(Family Bible)을 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1791년에 이사야 토머스(Isaiah Thomas)가 미국에서 최초로 흠정영역판
삽화 성서를 발행하였습니다.
While Noah Webster, just a few years after producing his famous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would produce his own modern translation of
the English Bible in 1833; the public remained too loyal to the King James
Version for Webster’s version to have much impact. It was not really until the
1880’s that
노아 웹스터(Noah Webster)는 그의 유명한 영어 사전을 제작하고 몇 년 후인 1833년에 자신의 현대판 영어
번역 성서를 제작해냈지만 당시 대중은 흠정영역판을 매우 신뢰하고 있던 나머지 웹스터의 영역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국에서는 1880년대까지도 그들의 흠정영역 성서를 대체 할 계획이 없었지만,
English Revised Version (E.R.V.)가 포스트 흠정영역의 현대 영어판 성서로서는 최초로 대중화가
되었습니다. 이 현대 영어판 성서는 14권의 위경의 부재로 인지도를
광범위적으로 넓혀갔습니다.
Up until the 1880’s every Protestant Bible (not just Catholic Bibles)
had 80 books, not 66! The inter-testamental books written hundreds of years
before Christ called “The Apocrypha” were part of virtually every printing of
the Tyndale- Matthews Bible, the Great Bible, the Bishops Bible, the Protestant
Geneva Bible, and the King James Bible until their removal in the 1880’s! The
original 1611 King James contained the Apocrypha, and King James threatened
anyone who dared to print the Bible without the Apocrypha with heavy fines and
a year in jail. Only for the last 120 years has the
1880년대까지 모든 신교도 성서들은(카톨릭 성서만이 아닌) 66권이 아닌 80권의 책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수백년 전에 중간에 기록된 책들을 “위경”이라 부릅니다. 사실, 이 위경은 1880년대에 성서에서 삭제되기 전까지 틴데일-매튜 성서, 대성서, 비숍 성서, 신교도 제네바 성서, 그리고 흠정영역 성서까지 모든 성서들의 일부분으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본래의 1611년 흠정영역은 위경을 포함하고 있었고, 제임스 왕은 누구든지 위경을 포함하지 않고 성서를 인쇄할 경우에는 무거운 벌금과 일 년간의 옥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였습니다. 현재로부터 불과 120년 전, 신교도 교회는 위경들을 거부하며 그들의 성서에서 삭제시켰습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현재의 크리스챤들은 ‘위경은 “로마 카톨릭”에 대한 어떤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라는 널리 알려진 설을 믿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그 설은 진실이 아닐 뿐더러, 왜 1880년대에 위경들을 신교도 성서에서 삭제시켰는지에 대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고 신교도 교파의 본부에서 공식적으로 토론해보지도 않은 문제였습니다.
The Americans responded to
1901년, 미국은 영국의 E.R.V. 성서에 대한 반응으로 이 성서와 거의 동일한 American standard Version (A.S.V.)를 출판하였습니다. 이것은 널리 인정 받으며 수백년 동안 현대 영어판 성서의 선두로서 미국의
많은 교회들에게 채택되었습니다. 1971년, 이것이 다시 개정되면서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Bible (N.A.S.V. , N.A.S.B. , N.A.S. 라고 불리기도 함) 이라고 불리워 졌습니다. 이
New American Standarrd 성서는 오늘날의 거의 모든 복음주의 기독교학자들과 번역가들에게 원 헬라어와 히브리어
사본을 현대 영어판으로 번역한 성서중 낱말 단위의 번역으로 가장 정확하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학자, 교수, 학자, 신학생들
사이에 가장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서는 직역과 문자적 번역의 문제(정확성에 초점을 맞춘 번역)로 인해 회화체 영어처럼 매끄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몇몇의 사람들에게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For this reason, in 1973,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was
produced, which was offered as a “dynamic equivalent” translation into modern
English. The N.I.V. was designed not for “word-for-word” accuracy, but rather,
for “phrase-for-phrase” accuracy, and ease of reading even at a Junior
High-School reading level. It was meant to appeal to a broader (and in some
instances less-educated) cross-section of the general public. Critics of the
N.I.V. often jokingly refer to it as the “Nearly Inspired Version”, but that
has not stopped it from becoming the best-selling modern-English translation of
the Bible ever published.
이러한 이유로 인해 1973년에는 근대 영어에 대해 “동적 동등” 번역판이 New International Version(N.I.V.)가 출시되었습니다.
N.I.V.는 “단어 단위(word-for-word)”의 정확도가 아닌 “문단 단위(phrase-for-phrase)”의 정확도에 중점을 맞춘 것인데다가, 중학생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읽기가 아주 쉽습니다.
이것은 더 넓은 범위의 대중들( 낮은 학력의 사람들도)에게 어필하기 위한 용도로 출시된 것입니다.종종 N.I.V.에 대한 비판으로 “가까스로 영감 받은 번역판(Nearly Inspired
Version)” 이란 말이 농담식으로 나오긴 하진만 그래도 그러한 비판들이 N.I.V.가 지금까지 출판된 근대 영역판 성서중에서 베스트셀러화 되는것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In 1982, Thomas Nelson Publishers produced what they called the “New
King James Version”. Their original intent was to keep the basic wording of the
King James to appeal to king James Version loyalists, while only changing the
most obscure모호한 words and the Elizabethan “thee, thy, thou”
pronouns. This was an interesting marketing ploy책략, 계획, however, upon discovering that this was not enough of a
change for them to be able to legally copyright the result, they had to make
more significant revisions, which defeated their purpose in the first place. It
was never taken seriously by scholars, but it has enjoyed some degree of public
acceptance, simply because of its clever “New King James Version” marketing
name.
1982년, 토머스 넬스 출판사가 “New King
James Version”을 출간했습니다. 원래의 의향은 흠정영역 중 뜻이 모호한
단어들과 엘리자세스 여왕 시대에 사용되었던 고어들 (thee, thy,thou)만 손보면서 흠정영역의 특색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언어들을 유지하는 것이였습니다. 이것은 흥미있는 마켓팅 책략이었지만 단순히 몇몇의 단어와
고어들을 고치는 것만으로는 이 성서에 대한 법적인 특허권을 획득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더욱 더 특색있는
개정판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학자들은 NKJV를 한번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단순히 New King James Version 이라는 똑똑한 마켓팅 이름 덕분에 몇몇의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In 2001, a major attempt was made to bridge the gap between the simple
readability of the N.I.V., and the extremely precise accuracy of the N.A.S.B..
This translation is called the English Standard Version (E.S.V.) and is rapidly
gaining popularity for its readability and accuracy. The 21st
Century will certainly continue to bring new translations of God’s Word in the
modern English language.
2011년에는 단순 가독성 (可讀性)을 가진 N.I.V.와 극도의 정밀한 정확성을 가진 N.A.S.B의 격차를 잇기 위한 중요한 시도로 English Standard Version(E.S.V.)를 출간하였습니다. 이것은 가독성과 정확성을 동시에 갖춤으로 급속도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분명 21세기에도 계속하여 말씀의 근대 영역본이 나올 것입니다.
As Christians, we must be very careful to make intelligent and informed
decisions about what translations of the Bible we choose to read. On the
liberal개방적인 extreme, we have people who would give us
heretical new translations that attempt to change God’s Word to make it
politically correct. One example of this, which has made headlines recently is
the Today’s New International Version (T.N.I.V.) which seeks to remove all
gender-specific references in the Bible whenever possible! Not all new
translations are good… and some are very bad.
우리는 크리스챤으로 우리가 어떤 번역본의 성서를 읽을 것인지에 대해 신중하게 판별력 있고 박식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극도의
자유 사상주의적인 관점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고쳐서 정치적 성향에 맞도록 만든 이단적인 새로운 번역본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한 예로서, 성경 내용에서 성차별적 단어들을 최대한 삭제시켜 화재거리가 된
Today’s New International Version (T.N.I.V)가 있습니다. 모든 새로운 번역본들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몇몇의 번역본들 매우 좋지 않습니다.
But equally dangerous, is the other extreme… of blindly rejecting ANY
English translation that was produced in the four centuries that have come
after the 1611 King James. We must remember that the main purpose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was to get the Bible out of the chains of being trapped
in an ancient language that few could understand, and into the modern, spoken,
conversational language of the present day. William Tyndale fought and died for
the right to print the Bible in the common, spoken, modern English tongue of
his day… as he boldly told one official who critized his efforts, “If God spare
my life, I will see to it that the boy who drives the plowshare knows more of
the scripture than you, Sir!”
이와 동등하게 위험한 사항은 1611 흠정영역판 이후의 모든 영어 번역본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청교도 개혁가들의 목표가 소수의 사람들만 이해 할 수 있는 고대 언어 속의 성서를 해방시켜서 그것을 현재 시대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로 개역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윌리엄 틴데일은 성서를 그 시대에 사용되는
근대 영어식으로 개역 발간 하기 위해 싸우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윌리엄 틴데일은 그의 노력을 비판하는 한
관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면, 난 쟁기질을 하는 아이가 당신보다도 성경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Will we now go backwards, and seek to imprison God’s Word once again
exclusively in ancient translations? Clearly it is not God’s will that we
over-react to SOME of the bad modern translations, by rejecting ALL new
translations and “throwing the baby out with the bathwater”. The Word of God is
unchanging from generation, but language is a dynamic and ever-changing form of
communication. We therefore have a responsibility before God as Christians to
make sure that each generation has a modern translation that they can easily
understand, yet that does not sacrifice accuracy in any way. Let’s be ever
mindful that we are not called to worship the Bible. That is called idolatry. We
are called to worship the God who gave us the Bible, and who preserved it
through the centuries of people who sought to destroy it.
다시 예전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직 고대의 번역 속에만 가둬 두실겁니까? 근대의 몇몇 잘못된 번역들로 인해 모든 새로운 번역들을
부인하며 “아이를 그의 목욕물과 함께 버리는” 행동은 절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대가 지나도 변치 않지만 언어는 역동적이고 변전무쌍한 소통의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리스챤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책임은, 각 세대가 그 시대의 현대어 번역판을 사용하게
하여 쉽게 말씀을 이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서’를 섬기지 않도록 주의 합시다.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성서를 주시고 수세기 동안 이것을 파기하려던 무리 속에서도 보존시켜 주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TIMELINE OF BIBLE TRANSLATION HISTORY
성서 번역 역사의 타임라인
1400 BC: The first written Word of God: The Ten Commandments delivered
to Moses.
B.C 1400 : 하나님의 말씀의 첫 기록. 모세에게 전해진 십계명.
500
BC: Completion of all original Hebrew manuscripts which make up the 39 Books of
the Old Testament.
B.C 500: 39권의 구약 성서로 이루어진 고대 히브리어 필사본 완성
200
BC: Completion of the Septuagint Greek manuscripts which contain the 39 Old
Testament Books and 14 Apocrypha books.
B.C
200: 39권의 구약과 14권의 위경으로 이루어진 70역 성서(Septuagint) 헬라어 필사본 완성
1st
Century AD: Completion of all original Greek manuscripts which make up the 27
books of the New Testament.
A.D
100: 27권의 신약 성서로 이루어진 고대 헬라어 필사본 완성
315
AD: Athenasius, the Bishop of Alexandria, identifies the 27 books of the New
Testament which are today recognized as the canon of scripture.
A.D
315: 알렉산드리아의 교황인 아데네시우스가 27권의 신약 성서를 정경으로 인정.
382
AD: Jerome’s Latin Vulgate manuscripts produced which contain all 80 Books (39
Old Test. + 14 Apocrypha + 27 New Test)
A.D382:
총 80권으로( 39권의 구약 성서
+ 14 권의 위경 + 27권의 신약) 으로
이루어진 ‘제롬의 라틴 불가타 필사본 완성
500
AD: Scriptures have been translated into over 500 Languages.
A.D 500: 말씀이 500여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됨.
600 AD: LATIN was the only language allowed for Scripture.
A.D 600: 말씀에 라틴어만 사용할 수 있게 함.
995
AD: Anglo- Saxon (early roots of English language) translations of the New
Testament produced.
A.D
995: 신약 성서 앵글로 색손(영어의 어원)판 제작
1384
AD: Wycliffe is the first person to produce a hand-written, manuscript copy of
the complete Bible; All 80 Books.
A.D 1384: 위클리프가 최초로 성경 전체, 80권을 손으로 필사(筆寫) 제작함
1455 AD: Gutenberg invents the printing press; Books may now be
mass-produced instead of individually hand-written. The first book ever printed
is Gutenberg’s Bible in Latin.
A.D 1455: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함. 일일이 손으로 필사 작업을
하지 않고도 책을 대량 생산 할 수 있게 됨. 처음으로 인쇄 된 책은 라틴어로 된 쿠텐베르크 성경.
1516 AD: Erasmus produces a Greek/Latin Parallel New Testament.
A.D 1516: 에라무스가 헬라어/라틴어 병행 신약 성서 제작
1522 AD: Martin Luther’s German New Testament.
A.D. 1522: 마틴 루터의 독일어 신약 성서
1526 AD: William Tyndale’s New Testament; The first New Testament printed
in the English language.
A.D. 1526: 윌리엄 틴데일의 신약 성서. 최초의 영어 성서로써
인쇄 제작 됨.
1535 AD: Myles Coverdale’s Bible; The first complete Bible printed in the
English language (80 Books: O.T. & N.T. & Apocrypha).
A.D. 1535: 마일스 카버데일 성서. 전 영어 성경으로써는 최초로
인쇄
제작 됨 (총
80권: 구약,신약과 위경)
1537 AD:
Tyndale & Matthews Bible; The second complete Bible printed in English.
Done by John “Thomas Matthew”
A.D. 1537: 틴데일/매튜 성서. 전 영어 성경으로써는 두번째로 인쇄
제작 됨. 존 “토머스 매튜” 로저스가 제작(80권).
1539 AD: The
“Great Bible” Printed; The first English language Bible authorized for public
use (80 books).
A.D. 1539: “대성서(Great Bible)” 제작.
최초로 대중에게 승인한 영어 성경
(80권).
1560 AD: The Geneva Bible printed; The first English language Bible to
add numbered verses to each chapter (80 books).
A.D.1560: 제네바 성서 인쇄 제작. 최초로 각 장(chapter)당 절(verse)수를
첨부한 영어 성경(80권).
1568 AD: The
Bishops Bible Printed; The Bible of which the King James was a Revision (80
books).
A.D. 1568: 비숍 성서 인쇄 제작. 흠정영역 개정 전(前)판 (80권)
1609 AD: The Douay Old Testament is added to the Rheims New Testament (of
1582). Making the first complete English Catholic Bible; Translated from the Latin
Vulgate (80 books).
A.D. 1609: Douay 구약 성서를 (1582년 판)Rheims
신약 성서에 첨부 함으로써 영어 카톨릭 성서 완성. 라틴 불가타 성서에서 번역(80권)
1611 AD: The King James Bible printed; Originally with all 80 books. The
Apocrypha was officially removed in 1885 leaving only 66 books.
A.D 1611: 본래의 80권으로 이루어진 흠정영역 출판.
위경은 공식적으로 1885년에 삭제되고 66권만 남음.
1782 AD: Robert Aitken’s Bible; The first English language Bible (KJV)
printed in
A.D. 1782: 로버트 아이트킨(Robert Aitken) 성서.
미국에서 최초로 발간된 영어 성서(흠정영역)
1791 AD: Isaac Collins and Isaiah Thomas Respectively produce the first
Family Bible and first illustrated Bible printed in
A.D. 1791: 미국에서 이삭 콜린스와 이사야 토머스가 각각 최초의 가정 성서와 삽화 성서를 발간 함.
두 성서 모두 80권의 흠정영역본이었음.
1808 AD: Jane Aitken’s Bible (Daughter of Robert Aitken); the first Bible
to be printed by a woman.
A.D. 1808: 제인 아이트킨(Jane Aitken) 성서(로버트 아이트킨의 딸). 최초로 여성이 발간한 성서.
1833 AD: Noah Webster’s Bible; After producing his famous dictionary,
Webster printed his own revision of the King James Bible.
A.D. 1833: 노아 웹스터 성서. 웹스터는 그의 유명한 사전을 출판
후 자신이 직접 개정한 흠정영역을 출간함.
1841 AD: English Hexapla New Testament; an early textual comparison
showing the Greek and 6 famous English translations in parallel columns.
A.D. 1841: 영어 헥사플라(Hexapla) 신약 성서.
원본 헬라어와 널리 알려진 6개의 영어 번역본을 병렬 단으로 인쇄하여 비교대조 함
1846 AD: The illuminated Bible; The most lavishly
illustrated Bible printed in
A.D. 1846: 채색 성서. 미국에서 발간된 가장 풍부한 삽화의 성서.
80권으로 이루어진 흠정영역.
1885 AD: The “English Revised Version” Bible; The fist major English
revision of the KJV.
A.D. 1885: 영어 개역 성서(English Revised Version Bible). 최초의 영국 흠정영역 개역판.
1901 AD: The “American Standard Version”; The first major American
revision of the KJV.
A.D. 1901: American Standard Version. 최초의 미국 흠정영역 개역판.
1971 AD: Th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B) is published as a “Modern
and Accurate Word for Word English Translation” of the Bible.
A.D. 1971: 정확하고 현대적인 단어 단위 영어 번역본인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B) 출판
1973 AD: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is published as a “Modern
and Accurate Phrase for Phrase English Translation” of the Bible.
A.D. 1973: 정확하고 현대적인 문단 단위 영어 번역본인 New International
Version 출판
1982 AD: The “New King James Version” (NKJV) is published as a “Modern
English Version Maintaining the Original Style of the King James.”
A.D. 1982: 본래의 흠정영역 형식을 유지한 현대 영어판 성서인 New King
James Version (NKJV) 출판
2002 AD: The English Standard Version (ESV) is published as a translation
to bridge the gap between the accuracy of the NASB and the readability of the
NIV.
A.D. 2002: 정확성에 고려한 NASB와 가독성 (可讀性)을 고려한 NIV의 격차를 잇기 위한 English
Standard Version (ESV)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