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士林갈등 → 東․西 分黨
사색당쟁은 사화로부터 시작된다. 분당은 척신정치 청산에 대한 방법이 발단이었다면 이조전랑 직에 대한 문제가 직접적 원인이다. 사림파는 4대 사화를 견디며 선조 즉위 이후 정계 주도권을 차지한다. 명종 원년에 윤원형과 윤임 세력이 파워게임을 벌이다 윤임 편에 섰던 많은 사림파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을사사화를 청산하면서 사림파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게 된다.
척신정치 청산에 소극적인 심의겸(沈義謙) 중심의 기성 사림은 척신정치 청산에 적극적인 김효원(金孝元) 중심의 신진사림간의 대립이다. 이 두 집단간의 갈등은 서서히 표출되었는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1575년 김효원과 심의겸의 개인적인 대립이었다. 발단은 심의겸이 이조전랑(銓郞)으로 있으면서 김효원의 천거를 막았으나 수년 뒤에 김효원이 전랑에 오르면서 비롯됐다.
그 후 김효원이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을 전랑에 천거해주지 않아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심의겸과 김효원간의 대립은 사소하고 개인적인 관계에 불과했으나 잠재했던 구조적인 긴장관계를 노출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때까지는 선배집단이 재상권에 진입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의 사이는 수시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분당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양자의 집단적인 대결의 양상이 표면으로 나타나자 이 문제를 놓고 조정차원에서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이(李珥)의 중재에 따라 김효원과 심의겸은 외직으로 내보내졌다. 그러나 외임의 임명에 대해서 김효원당에서는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조처했다고 생각했고, 심의겸당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해 김효원당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획책하면서 사태는 오히려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1578년(선조 11) 김효원당은 낭관과 언관을 장악하여 이이·이산보(李山甫) 등을 심의겸당으로 몰아 선배당인 서인과 후배당인 동인으로 분리되면서 구체적으로 붕당을 형성했다. 재상권에 기반을 둔 서인들은 이이를 주축으로 동인을 붕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공격의 초점은 낭관권 결집의 핵인 자천제(自薦制)와 언관권의 이념적 토대인 공론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서인의 전술은 실패했다. 이는 사화와 권신들의 압력 속에서 유지·강화되어온 언권과 낭권의 성장과정으로 보아 당연한 귀결이다. 게다가 이이의 죽음으로 세력이 위축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인이 성장하면서 새 방향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언관권과 낭관권을 인정하고 서인과 동인은 기본적으로 동질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서인의 입장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은 이귀(李貴)의 상소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서인도 사류(士類)이다"라고 전제함으로써 서인도 공론지인(公論之人)으로 자처하는 것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재상권을 토대로 하면서 낭관권이나 공론을 부정하던 종전의 입장을 바꾼 것이다. 서인이 낭관과 언관의 토대로 인식되었던 공론과의 연결을 주장하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이것은 당시 서인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로 말미암아 공론에 입각한 붕당정치가 정립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됐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림이 추구해왔던 공론정치의 이상(理想)이 새로운 정치의 운영방식이라고 볼 수 있어 붕당정치를 통해서 정립되는 현상이었다. 여럿이 함께 논의하는 공론은 타당성을 도출하는데 객관성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동인
출신 배경 : 金孝元 지지세력 (신진사림)
정치 개혁 : 척신정치 개혁에 적극적
학문 계승 : 李滉, 曺植, 徐敬德
서인
출신 배경 : 沈義謙 지지세력 (기성사림)
정치 개혁 : 척신정치 개혁에 소극적
학문 계승 : 李珥, 成渾
이조정랑은 이조(吏曹)에 있는 정오품(정5품) 관직으로 정원은 2원이다. 위로 이조판서(정2품), 이조참판(종2품), 이조참의(정3품 堂上) 각 1원이 있고, 아래로 이조좌랑(정6품) 2원이 있다. 정랑 아래에는 문관의 인사를 관장하는 문선사(文選司), 정색(政色), 제향색(祭享色), 고공색(考工色), 고훈사(考勳司), 노직색(老職色), 공명색(空名色) 등의 사무를 분장했다.
정랑은 육조의 실무를 관장한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으며, 특히 이조와·병조의 정랑은 좌랑과 함께 인사행정을 담당하여 전랑(銓郞)이라고 했다. 또한 이들은 삼사(三司) 관직의 임명동의권인 통청권(通淸權)과 자신의 후임자를 추천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어 권한이 막강했다. 동인과 서인이 확연하게 갈린 직접적 이유는 이조전랑 직을 놓고 대립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