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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3일 수정--8월 18일 완역(Stanghellini, et al., 2009).hwp
Stanghellini, G. (2009). Embodiment and schizophrenia. World Psychiatry, 8(1), 56-59. 결합성과 조현병
Abstract 조현병 존재의 핵심양상(the essential feature of schizophrenic existence)은 그것의 비결합된 존재방식(its being disembodied)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것의 다양한 차원들을 통일하는(that unifies the varied dimensions of that existence) 양상(the feature)이다. 자기와의(of the self), 자기-대상 관계와의(of the self-object relation), 그리고 대인관계와의(of interpersonal relationships) 비결합(the disembodiment), 이 모두는(all) 그 속에서 조현병 환자들이 영혼이 없는 몸 또는 비결합된 영혼처럼(like a soulless body or a disembodied spirit) 살고 행동하는(lives and behaves) 그러한 세상으로(to a kind of world) 이끈다(lead).
20세기가 시작된 이후, 현상학은 살아가는 몸(lived body)(Leib)과 신체적인 몸(physical body)(Koerper) 또는 몸-주체(body-subject)와 몸-객체(body-object) 사이의 구분을 발전시켜왔다. 첫 번째는 내부로부터 경험되는 몸(the body experienced from within), 즉 당사자-관점에서의(in the first-person perspective) 내 몸과의 직접적인 나의 경험(my own direct experience of my body)이다. 두 번째는, 해부학과 생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에 의한 예에서처럼, 외부로부터 주제적으로 연구되는 몸(the body thematically investigated from without)이며, 제삼자 관점(a third person perspective)이다. 현상학은 살아가는 몸(lived body)을 경험의 세 가지 주요 차원(three main dimensions of experience)의 중심(the center)으로 간주한다. 경험의 세 가지 주요차원은 즉(:) a) 나 자신과의 경험(the experience of my self), 특히 자기-인식self-awareness)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the primitive form); b) 대상-경험(object-experience)과 의미-부여(meaning-bestowing); c) 다른 사람과의 경험(the experience of other people) 즉(i. e.)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다.
최소 자기-인식(MINIMAL SELF-AWARENESS)
나는 나 자신을 내 경험(즉 지각 또는 정동), 행위, 그리고 사고의 조망적 근원(the prespectival origin)으로써 경험한다. 나 자신에 대한 이 원초적 접근(this primordial access) 또는 자아중심성(ego-centricity)의 원초적 형태는 나-인식(I-awareness)의 어떠한 명시적 그리고 주제적 형태(any explicit and thematic form)와도 구분되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비록 경험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무언적이고(tacit) 암묵적이기(implicit)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이 원초적 경험은 자각(reflection)으로는, 즉 경험되는(experienced) 그리고 경험하는(experiencing) 자아 간의 분리로부터는 경험되지 않는, 전-자각적(a pre-reflexive) 현상이다. 이것은 또한 즉각적(immediate)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추론적이거나 비판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 형태의 원초적 자기-인식(this form of primitive self-awareness)은 자신에 대한 개념적 또는 언어적 표상이 아니며, 대신에 자신에 대한 원초적 접촉(a primordial contact with oneself) 또는 자기-존재감(self-affection)인데, 이 속에서 그가 느끼거나 느꼈던 것은 오직(just) 한 가지(one thing)이다 (1). 마지막으로 그리고 최소한, 이것은 또한 일종의 대상-인식(object-awareness)과도 구분되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대상화하는 것(an objectifying) 또는 자신에 대한 관찰적 지각(observational perception of oneself)으로부터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Henry는 이 기초적인 또는 최소한의 자기-인식의 형태(this basic or minimal form of self-awareness)를 표현하기 위해 자기감(ipse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 따라서 자기감(ipseity)은 암묵적(implicit), 전-자각적(pre-reflexive), 즉각적(immediate), 비개념적(non-conceptual), 비객관화적(non-objectifying), 그리고 비관찰적(non-observational) 느낌(sense)이며, 의식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느낌이다. 이것은 다른 경험들에 선행하며, 다른 경험들의 조건(a condition)이다.
최소 자기-인식(minimal self-awareness)의 두 가지 기초적이고 밀접하게 연관된 측면은 자기-소유권(self-ownership)과 자기-작용(self-agency)이다 (2). 자기-소유권(self-ownership)은, 내가 경험해 나가는 바로 그 사람(the one)이라는, 전-자각적 느낌(the pre-reflexive sense)이다. 자기-작용(self-agency)은 내가 행위를 주도하는 바로 그 사람(the one)이라는 전-자각적 느낌(the pre-reflexive sense)이다. 내 경험 또는 행위의 주관성에 대한 즉각적 인식(the immediate awareness)은 이것이 내 자신에게 속해 있고 내 자신에 의해 생성된다는 느낌을 포함한다. 이것은 자기(self)와 비자기(non-self), 나 자신과 내가 지각하는 대상,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나의 표상과 대상 그 자체에 대한 경험에 의한 구분(the experienced differentiation)의 기초적 요소(the basic components)이다. Merleau-Ponty (3)는 이 기본적인 형태의 자기경험(self-experience)은 개인의 신체적 경험(bodily experience)과 세상에 널린(worldly) 대상들과 타인들의 존재(situatedness)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자기감(ipseity)은, Merleau-Ponty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의 세상에 “깃들어 있는 것(inhabiting)”으로부터, 즉 자기 자신의 환경에 관여하는 것(being engaged)과 순응된 느낌(feeling attuned)으로부터, 구별하기 어렵다(is indiscernible). 이 관여(engagement)와 순응(attunement)을 제공하는 것은 살아가는 몸(the lived body)이다. 의식한다는 것(being conscious)은, Merleau-Ponty가 말하기를 (3), 자기 자신의 살아가는 몸(one's own lived body)을 통하여 세상 속에 거주하는 것(is dwelling in = être-à)이다. 발달심리학에는, 신생아가 이미 이 최소 형태의 자기-인식(this minimal form of self-awareness)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세상에 결합되어 있고 순응되어 있다는 훌륭한 경험적 증거가 있다. 예로써, Rochat (4)는 아동은, 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적 이미지를 발달시키기 이전에, 자신의 신체적 자아(their bodily self)에 대한 자기고유감각적(proprioceptive)이고 생태학적(ecological) 느낌(sense)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상-인식과 의미부여
(OBJECT-AWARENESS AND MEANING BESTOWING)
경험을 조직화하는 힘은 운동성(motility)과 지각에 기초한다. Husserl (5)은 개인의 살아가는 몸(lived body)에서의 수정(modification)은 외부 세상에 대한 지각의 수정을 수반한다(implies)는 점을 보여주었다. Husserl에게서, 재료의 형태(the shape of material things)는, 예로써, 직관적인 방식으로(in an intuitive way) 나의 정면에 서 있는 것 같은 사물은, 나 자신의 조합(configuration), 즉 경험하는 결합된 주체로서의 나 자신의 조합에 의존한다. 운동감각의 통합성(the integrity of kinaesthesia)이라는, 즉 수의적 근육의 위치와 움직임에 대한 느낌이라는, 수단으로서의, 나 자신의 몸은 지각적 장에서 나의 지향의 항상적 참조체계(the constant reference of my orientation)이다. 지각된 대상은 일련의 조망적 출현의 통합(the integration of a series of prospective appearance)을 통해 그 자체를 제공한다.
살아가는 몸(the lived body)은 내 지각의 지각적 근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통합의 소재(장소)(the locus of their integration)이며, 그것에 의해 내가 세상을 소유하는 수단인데, 그 정도는 그것이 경험의 장에서 참여의 기회를 구조화하고 조직화하는 정도 만큼이다.
살아있는 몸(the living body)은 이 세상의 대상들을 자신이 참여하는 상황의, 자신이 헌신하는 프로젝트의, 한 부분으로 지각하는데, 그러므로 그것의 행위는 자극에 대한 반응(reactions to stimuli)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반응(responses to situations)이다. 몸은, Merleau-Ponty가 지적했듯이, 자신이 상호작용하는 대상으로부터 이해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몸(the lived body)은 내가 행하는 모든 일에 소리 없이 참여한다. 나는 내 환경을 내가 그것에 거주함으로써 이해하며, 경험의 장에 대한 의미 있는 조직화는 나 자신의 몸의 적극적이고 수용적인 잠재력이 지속적으로 그 속으로 투사되기(are projected) 때문이다 (6). 지식은 행위화이거나(is enacted) (7) 또는 행위-특정적(action-specific)이며, 지각은 행위의 특수한 가능성과 항상 얽혀 있다(is tangled up) (8). 지각은 행위의 가능성을 추적하는 것에 항상 맞물려져 있다(is geared up). 이 행위의 가능성이 우리가 말하는 이른 바 “의미(meaning)"이며, 따라서(since) 대상의 의미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how we put it at use) 하는 것이다. Heidegger가 (9) 지적했듯이, 내가 세상에서 직면하는 대상에 대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기본적인 종류(a basic kind)는 단순한 이론적인 인지의 종류가 아니며, 오히려 사물을 조작하고 ”자신을 사용에 투입하는“ 관심사(concern)와 관련된 종류이다. 대상은 내 결합된 자아(my embodied self)에, "하기 위한(in-order-to)” 어떤 것, 즉 현실을 다루기 위한, 예로써 자르고, 꿰매고, 쓰고(writing), 등등의 “장치(equipment)”, “처리대상(ready to hand)”으로, 나타난다. 나는 어떤 것의 의미를 말 그대로(literally) 잡으며(grasp), 따라서(since) 의미(the meaning)는 정확히 어떤 것의 특정한 “조작가능성(manipulability)”(Handlichkeit)이다.
간주관성
(INTERSUBJECTIVITY)
Mealeau-Ponty는 살아가는 몸(the lived body)을 또한 간주관성 문제의 중심에 위치시켰는데, 간주관성을 간육체성(intercorporeality)으로 이해하는 단계를 설정함으로써 그렇게 하였다. 즉 간육체성이란 나 자신과 타인의 몸 간의 직접적이고, 전-자각적인 지각적 연결이며, 이것을 통해 나는 다른 존재를 변경된 에고(an alter ego)로 인식하며 그의 행위를 이해한다(make sense). 간육체성의 관점에서, 간주관성은 살의 대화(communication of flesh)이며, 분리된 개인 간의 관계성이 아니다. 간육체성은 육체도식(the corporeal schema)의 전이(the transfer), 지각의 일차적 결합(the primary bond)을 의미하는데, 이것에 의해서 나는 타인을 나와 비슷한 존재로 인식한다. 이 현상은 일치적(?) 사교성(syncretic sociability)의, 즉 타인과의 희생적 동일시(pathic identification)의, 한 마디로(in a word), 간주관성의 현상학적 기초이다 (10). 간육체성은 결코 충분히 드러나지 않지만, 행동과 연결된 모든 상호작용을 지지하는 지점(bearing)이며, 모든 명백한 의사소통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활동한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 간의 지각적 결속(bond)은 일차적인 지각적 버팀목(tie)으로서 다른 사람의 몸과 동일시하는 나 자신의 가능성에 기초한다. 발달심리학자들은 고유감각(proprioception)이 몸-대-몸 조율(attunement)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관여한다는 가설을 지지한다 (11). 신경영상(neuroimaging)으로부터의 과학적인 발견 또한 이 관점을 확증하는(corroborate) 것으로 보인다. 즉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s)는 영장류(primates)의 전-운동 피질에 있는 일련의 시각-운동 신경세포들인데, 이것은 간육체성으로서의 간주관성의 신경생리학적 기반(substratum)으로 가정된다. 거울신경세포는 어떤 존재하는 행위가 자신에 의해 수행될 때와, 다른 사람에 의해 수행되면서, 단지 관찰되기만 할 때, 두 경우 모두에 격발하며, 이와 같이 이들은 행위 이해(action understanding)에 관여한다. 즉 의미(meaning)는, 관찰된 행위를 생성해 낼 수 있는 동일한 신경회로에, 관찰된 행위를 짝짓기(matching)함으로써, 관찰된 행위에 할당된다.
CENESTHESIA (체감)
체감(cenesthesia)은 심리학자들이, 때로는 철학자들이, 개인 자신의 몸에 대한 내적 감각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반면에 체감이상(cenethropathy)은 비정상적인 몸의 감각을 의미한다. 두 가지 다 주류 현대 정신병리학에서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주제이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19세기와 20세기 정신의학에서의 근본적인 주제를 대표했었다. 역사학자 Starobinski는 (14) 지난 세기에 “체감의 제국주의(imperialism of cenesthesia)”에 대해 말하였다. 1794년에 Reil은 이 단어를 “그것에 의해 영혼이 그 자체의 몸에 대해 정보를 얻는 수단”과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체감은 (공통감각이라는, 그리스어 koiné aesthesis에서 기원) 모든 단일 몸 감각들이 종합된 전반적인 경험(the global experience)으로, 그 위에 의식이 자리 잡는 모든 감각성의 교차점(the crossroads)으로 정의되는데, 존재의 느낌, 자기존재의 느낌, 그리고 외부세계와 분리된 존재의 느낌을 포함한다. 체감의 감정은, 특히 프랑스의 20세기 초반의 정신병리학자들에게는, 정신병의 근원이다. 예로써, Dide와 Guiraud는 (15) 파과증(hebephrenia)은 체감적이고 운동감각적인 통합(the cenesthetic and kynesthetic synthesis)을 관장하는 세포수준의 신경계통(cellular nervous systems)의 특수한 손상으로 특징지었다. Athymornia(혼수증?)는, 본능(hormé)의 전반적인 장애인데, ”망상의 분출(the spring of delusions)"로 간주되었다. 그 이유는 망상은, 인간사고의 지적이고 정서적인 강력한 구조에 의해 복잡해지고 위장된, “원시적 정신활동(primordial psychic activity)”의 장애로 가정되었기 때문이다 (16).
매우 다른 학파(vein)에서, Huber는 (17) 조현병의 네 번째 하위유형을 정의하였는데, 망상형, 긴장형, 단순-파과형에 이어서, 그것은 체감이상형 조현병(cenesthetic schizophrenia)이라는 임상증후군이며, 이상 몸 감각(abnormal bodily sensations)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살아가는 몸(the lived body)의 장애인데, 고통스럽고 기이하며(uncanny), 갑작스럽게 발생하며 종종 한 기관에서 다른 몸의 부위로 이동한다. 전형적인 예는 몸의 일부가 존재하지 않는 느낌, 마비된 느낌, 또는 외부에 있는 느낌, 마비되고, 무겁고, 비정상적으로 가볍고, 또는 수축되거나 확장된, 움직이거나 견인되는 등의 감각이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몸의 감각은 정신병 증상을 가져올 수 있는데, 예로써 건강염려증적 망상(hypochondriac delusions)과 조종된다는 보다 전형적인 망상을 가져올 수 있다. Sass는 (18) 이러한 몸의 감각들은 그 자체로는(per se) 비정상적이지 않으며, 오히려(but) 자신의 몸에 대해 거리를 둔 내성적 자세(a detached introspective stance)를 취하도록 한 정상인 피험자들이 보고한 것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을 표명하였다. 조현병적 체감이상(cenesthopathies)은, 비록 우리가 그것에 주목하지는 않지만, 항상 존재하는 정상적인 몸의 감각이다. 비정상적인 것은 조현병적인 사람들이 그것에 주목하는 방식이다. 즉 그들이 비정상적인 이유는 그들이 “고조된 자각적 인식(hyperreflexive awareness)과 감소된 자기-존재감(diminished self-affection)이라는 전적으로 비정상적인 상태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17). 그 최종 결과는 주관성(subjectivity)과 몸의 경험(bodily experience) 간의 증가된 거리에 대한 경험(an experience of increasing distance)이다.
다른 사람들은 조현병적 체감이상(cenesthopathies)은 전형적인 유사-표현불능(quasi-ineffable)이라고 말한다. Huber는 (17) 조현병적인 몸의 diesthesias의 핵심양상은 그것이 통상적인 언어적 표현능력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점을 관찰했다. 즉 우리의 언어에서 이러한 특이한 몸의 감각과 관련된 표현적 가능성과 적절한 범주는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비정상적인 몸의 감각과 언어 간의 관계에 대한 이슈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Blondel은 (19) 이 분야의 선구자인데 체감이상(cenesthopathies)은 정신이 몸의 감각을 범주화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고 가정하였다. 즉 비개인적인 사회화된 화법의 체계를 통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Ey는 (20) 개인(the subject)이 몸의 감각을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몸의 환각(bodily hallucinations)이 발생한다고 말하였다. Ey에게 있어서, 몸의 감각에 대한 표현은 항상 은유(a metaphor)를 필요로 한다. 이 특이한 감각 영역에서, 환각이 일어나는 것은(Hallucinating), 개인 자신의 몸을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대상처럼 또는 자신의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즉 매우 불가능한 은유적 표현(the very impossibility of metaphorical expression)에 의해 변환된 대상처럼, 지각하는 것이다.
SCHIZOPHRENIA AND DISEMBODIMENT (조현병과 비결합성)
조현병적 실존의 기본적인 양상은 그것의 비결합성(being disembodied)이다. 이것은 조현병적 실존의 다양한 차원을 단일화해주는 양상이다. 자기의, 자기-대상 관계의, 그리고 대인관계성의 비결합(the disembodiment) 이 모두는, 그 속에서 조현병 환자가 살고 있고, 영혼이 없는 몸처럼, 또는 비결합된 영혼처럼 행동하도록 하는, 그러한 종류의 세상으로 물러서도록 한다.
Disembodiment of the self (자기의 비결합성)
자기감의 위기(the crisis of ipseity)는 조현병적인 삶의 명백히 특징적인 표현인데, 조현병적인 삶이란 생생함이 부족한 몸(a diaminated body)처럼 (즉, 그 자체로서의 살아있는 개인적 경험들, 즉 지각, 사고, 감정들의 가능성이 박탈된 몸과) 또한 비결합된 영혼처럼 (즉 그 자신의 경험을 외부로부터, 즉 제삼자 관점 또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곳으로부터의 관점에서 관찰하는 일종의 추상적 실체) 가정된다. 생생함이 부족한 몸 때문에,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현존감 상실(loss of presence)이라는 특수한 느낌을 경험한다. 가벼운 경우에는, 그는 자신과 자신의 행위, 그리고 경험으로부터 거리감을 느낀다. 정신과 육체의 이음새(the seam)는 떨어져 나간 것처럼 느껴진다. 심한 경우에는,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텅 빈, 공허로 묘사한다. 즉 “내 몸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단지 뼈대일 뿐이다.”, “내 흉곽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커다란 구멍일 뿐이다.” (23). 비어있음(the hollowness)은 그 자체로, 움직임 속에서, 신체의 다양한 부분들 간의 접촉의 결여를 통해 표현된다. “내가 움직일 때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았는데, 내 몸 전체가 나를 떠난 것 같았다. 척추 또는 무언가가 살을 통과하여 보이지 않게 사라졌다” (23). 기관들은 그 무게와 질량을 상실하고, 이와 함께 그들을 함께 묶는 힘으로 작용하는 상호적인 결속을 하도록 하는 그들의 능력도 상실된다. 이 상태는 몸의 완전한 기계화(a total mechanization)라는 특징을 갖는다. 즉 “나는 내가 켜고 끌 수 있는 부레-주머니(bladder-emptier)와 항문 발사체(an anal expeller)가 되는 축복을 받았다.” 그들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기계적인 복제품(mechanical replicas)처럼 느낀다. 즉 “나는 정신-기계이다”라고 Kimura라는 환자는 말했다 (24). 이러한 경험과 표현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은유적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몸을 경험하는 두 번째 방식은 비결합된 영혼 또는 영, 즉 순수하게 이론적인 인식으로서의 경험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지각, 행위, 그리고 사고의 단순한 구경꾼으로 살아간다. 즉 “만일 마음이 비어 있다면, 그것은 좌표기 또는 카메라처럼 기능할 것이다.” 생각하는 주체와 그것의 순수하고 단순한 광범위한 외면(extensive externalness)으로 생각되는 객체 간의 이 극단적인 이중성은, 즉 순수한 의식과 순수한 물질성(materialness)은, 비결합된 자기-인식으로서의 조현병적 이상성의 근본적인 현상이다.
Disembodiment of self-object relations (자기-대상 관계의 비결합성)
결합성의 전반적인 위기는 자기-대상 관계와 의미-부여(meaning-bestowing)의 비정상성을 포함한다. 만일 세상에서의 나의 몸-기반 참여가 꺼져버리면, 세상에 대한 나의 파악(grasp)도 역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세상 속의 대상들은, 실존적으로 상대적인 도구들로, 내 몸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을 것이다. 대상들은 비-이용가능한 것이 될 것이며 실용적인 의미가 결여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세상 속에 있는 사물들에 부착되어 있는 “이용-수단으로서의 의미(ready-to-hand meanings)”가 상실되는데, 이것은 전-망상적 당혹감(pre-delusional perplexity)에서 패러다임적(전형적)으로 발생한다. 이때 “이용-수단(ready-to-hand)”이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은유적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파악(grasped) 불가능하며, 그것의 통상적인 의미가 결여(devoid of their ordinary meaning)된 것으로, 즉 사람들이 사용하기 위해 그것들에 통상적으로 부여한 방식이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25). 새로운 의미가 출현할 수 있는데 (망상적 지각에서처럼) 그것은 통상적인 관점에서의 실용적인 의미. 즉 생존과 본능-기반의 통상적인 삶과 맞물려 있는 의미가 없다. 반면에 그것은 존재론적 불완전성과, 간주관성의 비정상적인 구성이라는 배경으로부터 발생한, 개인특유의 관심사와 맞물려 있다. 개인적 자아정체감과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 그리고 초신체적 관심사(metaphysical concerns)에 대한 탐색은 전형적으로 조현병적인 비결합된 자기-세계 관계성에 새롭고 특이한 종류의 법칙제정(enactment)을 제공한다. 예로써, K. Schneider (26) 라고 불리는 환자는 자신의 앞에서 발을 들어 올린 개를 “진정한 계시(a true revelation)”로 받아 들였다. 망상적 지각 속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그에게 말을 거는(that speaks to the person), 지각적으로 세부적인 것(perceptive detail)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 또는 보다 심오하고 보다 비개인적인 새로운 정체감이 드러난다 (27). 초신체적 법칙제정(metaphysical enactment)의 상징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어떤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말하기를, 자신이 극장에서 좌석에 앉으면, 자신은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무대 뒤에서 진행되는 일들에 대해서, 즉 무엇이 “그 장면을 가능하게 만드는지” 생각할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에 대한 비통상적인 관점이 취해지며, 새로운 의미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에 대한 탐색) 출현한다 (28).
비결합성의 추가적인 양상은 조현병적 인지의 추상(abstraction) 경향성이다. 즉 단어는 그것이 참조하는 상황을 벗어나며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취해지는 의미를 벗어난다. 단어는 지나치게 비결합적이고 비-상황적이 되며, 그 자체의 존재감을 획득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대상-비슷한 존재감을 갖고, “실제” 대상과 구분되지 않게 된다. (대상은 지나치게 비결합적이 되며, 따라서 물질적 대상이라기보다는 개념과 표상에 보다 가깝게 된다.) 단어는 세상과 공유되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으며, 대안적인 어떤 것을 또는 그 자체의 세상을 창조해낸다. 따라서 단어와 대상은 호환적이 된다. 즉 패러다임적(전형적)으로, 은유는 피-와-살을 지닌 것(flesh-and-blood things)이 되며, 은유의 날뜀(metaphors flings)의 오용은 (구체적인 표현) 망상의 문을 열어젖힌다.
Disembodiment of intersubjectivity (간주관성의 비결합성)
결합된 자기-인식과 간주관성-간육체성 장애 간의 관계에서, 우리는 순환적 관계성을 인식할 수 있다. 자기성(selfhood)의 결손적 구조는, 특히 신체-정신 이인증 (몸의 지각 장애) 현상과 자동-정신 이인증 (자기 자신의 감정과 사고로부터의 분리) 현상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 간의 간육체적 조율(intercorporeal attunement)에 방해물이 될 수 있다. 조현병적 자폐증은 타인과의 정서적 조율에 참여하는 데에서의 무능함으로부터 출현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몸의 수행의 질에 대한 primum movens 으로 인식할 수 있다.
조현병적 자폐증은 자기성의 근본적인 체질적 허약성(constitutional fragility), 즉 근본적인 불완전성을 반영하는데, 이것은 문제소지가 있는 관계, 모임, 그리고 타인과의 대면을 초래한다. 사회적 세계로부터의 분리(detachment)는, 자기이기 위해서 필요하고 사실상 필수적인,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서의 자기/자기-로부터의-타인의 변증법적 부분을 취하는, 근본적인 구조의, 이 존재론적 세팅의 결여로부터 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쪽 각도에서, 즉 의식의 개체발생학의 대인관계적 차원에서 이것을 볼 때, 어린 시기의 관계성의 장애는 충분한 육체적 자기-인식의 성숙과정을 심하게 손상시킬 수 있다.
조율위기(the attunement crisis)는 대인관계적 세상에서 이 제삼자 조망을 가져온다. 이 사회적 세상은 감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몸들 간의 관계망으로서의 그것의 특징을 상실하고, 차갑고, 이해 불가능한 게임으로 전환되며, 그것으로부터 조현병을 지닌 사람들은 배제된 느낌을 받으며, 자신의 의미는 추상적인 알고리즘(계산법), 즉 비개인적인 법칙의 정교화에 대한 탐색을 통해 찾아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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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좀 전에 올린 <Sass와 Parnas의 논문>은 사실 상당히 난해한 논문입니다. 스탕헬리니의 이 논문이 <Sass와 Parnas> 논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여 올립니다. 이 논문을 먼저 읽어보시고, <Sass와 Parnas> 논문을 읽으시면 이해가 조금은 수월하실 듯합니다.
위의 논문에는 엄청나게 많은 얘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써, 제가 빨간색으로 표시한 문장의 의미를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비결합성의 추가적인 양상은 조현병적 인지의 추상(abstraction) 경향성이다. 즉 단어는 그것이 참조하는 상황을 벗어나며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취해지는 의미를 벗어난다. 단어는 지나치게 비결합적이고 비-상황적이 되며, 그 자체의 존재감을 획득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대상-비슷한 존재감을 갖고, “실제” 대상과 구분되지 않게 된다. (대상은 지나치게 비결합적이 되며, 따라서 물질적 대상이라기보다는 개념과 표상에 보다 가깝게 된다.)
단어는 세상과 공유되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으며, 대안적인 어떤 것을 또는 그 자체의 세상을 창조해낸다. 따라서 단어와 대상은 호환적이 된다. 즉 패러다임적(전형적)으로, 은유는 피-와-살을 지닌 것(flesh-and-blood things)이 되며, 은유의 날뜀(metaphors flings)의 오용은 (구체적인 표현) 망상의 문을 열어젖힌다." 이 인용문의 요점은 "단어가 실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조현병 당사자들에게는 그러한 경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인용문은 엄청난 실용적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그러해야 하지만, 이 인용문에 따르자면, 조현병 당사자들은 특히 단어선택에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어를 선택하는 순간에 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 단어 자체가 "실제"인 것처럼 기능하기 시작합니다. 예로써 "이용"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면, 그러니까 "저 사람은 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단어을 선택하면, 실제로 그 사람이 그를 이용하는가와 관계없이, 당사자의 의식 속에는 "그가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개념이 형성되고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기능합니다. 이것은 "서운하다."거나 또는 "내가 손해보는 듯한 느낌이다."는 단어를 선택할 때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시점에서 키위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 논문에 따르자면, 키위가 "갑질"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순간에, 누군가가 자신에게 갑질을 실제로 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키위의 의식 세계 속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갑질을 했다."는 의식이 형성되며,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기능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논문에 따르자면, 당사자들은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감정에 치우쳐서 극단적인 단어를 선택하게 되면, 그 극단적인 단어가 생명력을 얻게 되며, 그때부터 그 단어 자체가 사실인 듯이 기능하기 시작합니다. "서운하다"할 것을 "이용한다"하면 그때부터는 서운한 것이 이용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무시당하는 느낌이다", "잘난 척하는 느낌이다."라고 표현하면 될 것을 "갑질한다."고 표현하면, 그때부터는 사실이 변질되어 버립니다. 즉 상대방이 갑질을 했든 안했든 관계없이, 그의 머리 속에는, 그의 의식세계 속에는 "갑질한다."는 이미지가 형성되며, 그것이 사실인 듯한 느낌이 들며, 자신이 선택한 "갑질"이라는 단어에 입각해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왕왕 당사자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감정에 치우쳐서 극단적인 단어를 선택하고, 그 다음에는 극단적인 단어에 입각해서 자신의 판단을 사실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그러해야 하지만, 특히 당사자들은 단어 선택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언어를 순화해야 합니다. 며칠 전에 누군가가 "말에는 생명력이 있고 힘이 있다."는 게시글을 올렸듯이, 말에는, 단어 하나 하나에는 생명력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단어 하나를 선택할 때에도, 말 한 마디를 할 때에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나아가 가급적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단어와 말의 사용을 줄여나가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며 자기자신을 격려하고 서로를 격려해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촛불님 사람 마음속을 논리로만 해석 하는게 안타 깝네요. 이런 글 쓰는 동안 저에게 위로의 연락 한통 하셨나요. 카페에서 여론 조장은 그만하세요
이봐요 배교수 당신은 당사자 조련사요!! 난 당신에게 길들여지지 않아서 괴롭히는 거구. 당사자와 친구 되기는 안드로메다에 처 받아 두셨슈??
당신이 내보고 못났다 나쁘다고 그리고 개시발놈 그런것도 당사자 극단적 표현이란 말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