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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소설> 2012년 제7호에 발표한 문갑연 소설가의 단편소설 "꿈의 향연"을 올립니다.
단편소설 꿈의 향연 문갑연
아들이 모는 차는 보스턴 공항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귀선은 양쪽으로 늘어선 고층 건물에다가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사실은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목울대까지 꽉 찬 울화 때문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기다가 곧 아들과의 긴 이별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참느라 귀선은 더더욱 입을 굳게 닫았다. 계획대로라면 이 시간 공항으로 갈 게 아니고 메이플라워호가 있는 플리머스Plymouth로 가기 위해 배를 타려고 항구에 나가 있을 것이다. 아들의 졸업식을 마치고 바닷가 랍스터 전문점에서 메이플라워호가 그리 멀지 않은 같은 메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 있다는 사실과, 그곳까지 관광을 위한 유람선이 있다는 것, 아들은 그렇게도 한국의 많은 유학생들이 거기 관광하는데도 못 가봤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오히려 잘된 일이라면서 그것도 엄마 아빠와 함께 갈 기회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며 얼마나 기뻐했던지. 귀선은 아들의 말에 흥분한 나머지 처음으로 먹어본 환상적인 랍스터의 맛에 반해, 부랴부랴 두 번째 발라낸 속살도 그냥 그릇에 던져 버리고는 관광에 관한 얘기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남편은 가족의 이 작은 소망 하나 들어주지 못하다니, 귀선은 남편의 선택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미국 체류기간과 비행기에서 보내는 날짜를 합쳐 총 15일간이었다. 이것은 귀선의 신춘문예 당선 시상식 일을 기준으로 한 날짜였다. 귀선과 남편은 아들의 졸업식 일주일 전에 출국을 했다. 하지만 졸업식 전까지는 아들의 얼굴 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졸업 준비하느라 밤에도 사람들이 다 잠든 시각에서야 녹음을 하러 학교에 가면 새벽녘에야 들어왔다. 그때서야 남은 시간만큼이라도 눈을 붙이다가 귀선이 차려주는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다시 학교로 갔다. 이런 아들의 생활을 보고서야 귀선은 벽장에 있던 박스째 사다놓은 라면을 떠올리며 한숨을 불어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는 아들의 건강이 염려됐던 것이다. 웬 한국 라면이냐며 놀라는 귀선에게 한국 마켓에 가면 우리나라 것 없는 것 없습니다, 곧 시간 내서 엄마 아빠 모시고 한번 가죠 했다. 하지만 졸업식을 마친 그 다음 다음 날 겨우 한국 마켓에 간다던 약속을 지켰다. 귀선과 남편이 졸업식까지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 할 일은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귀선은 이미 한국에서 준비해 온 재료들로 한국식 밑반찬과 요리와 간식을 만들어 룸메이트와 들락거리는 한국 학생들에 제공하는 것이 크나큰 낙이었다. 그리고 4일째부터는 본격적으로 집안을 청소했다. 얼마나 닦지 않고 쓸지 않았으면 욕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펫까지 때가 덕지덕지 끼여 아예 색깔 자체가 변색되어 있었다. 욕조의 경우 짙은 회색인데 보기에 우중충한 느낌이 들어 혹시나 하고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한곳에 집중적으로 닦자 하얀 색이 불거져 나왔다. 비로소 아들의 유학생활은 시간과의 피나는 경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눈시울을 적셨다. 귀선이 욕조를 사정 두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박박 문질러 닦은 다음 물로 씻어내니 몰라볼 정도로 맑고 희어졌다. 방과 거실에 깔려 있던 카펫에도 겹겹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아들에게 진공청소기를 사러 가자고 했으나 시간 나면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언제 날지 몰라 마른 걸레로 힘껏 문지르기도 하고 사용하지 않는 칫솔로 카펫 사이사이를 일일이 긁어내어 마른 걸레로 닦아냈다. 그래도 남아 있는 먼지나 머리카락은 테이프로 찍어냈다. 이렇게 지나기를 일주일, 졸업식 날은 이럭저럭, 그 다음 날은 긴장이 풀리는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귀선은 밥을 먹고 다시 자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을 잠에서 깨워야 한다고 했고, 남편은 이럴 때는 밥보다 잠이 더 보약이라고 했다. 그래서 끝내 아들이 좋아하는 찰밥과 미역국을 끓여놓고도 먹이지 못하자, 귀선은 아들이 일어나면 같이 먹겠노라고 어깨에 힘이 쏙 빠진 채 설거지를 했다. 이럭저럭 죽여 없애버린 시간들과 남은 시간을 헤아려 봤다. 벌써부터 아쉬움이 스쳤다. 미리 이별 연습이라도 하듯이 귀선은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쓱쓱 닦아냈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 아들은 귀선의 기분을 풀어볼 요량인지 운전을 하면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려댔다. 그러다가도 말이 막힌다 싶으면 급기야는 "엄마!"를 연발했다. 남편은 그때서야 장가갈 때 다 된 놈이 "엄마는, 무슨" 했다. 그러면 아들은 말할 거리가 생긴 게 여간 기쁘지 않은지 "저는 늙어 죽을 때까지 엄마라고 부를 겁니다. 아빠께서 절대로 막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라며 능청을 떤다. 남편은 체념한 듯 소리 내어 웃으면서 "그래도 사내 녀석인데 막내 티는 꼭 내야 하냐" 했다. 아무리 귀선의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아들과 남편이 노력해도 귀선의 생각은 메이플라워호에 대한 미련을 떨어버릴 수가 없다. 오늘날의 화려한 미대륙의 조상인 네덜란드에서 거주하던 청교도(퓨리턴)들이 신앙의 박해를 피해, 가족들과 함께 102명이 1620년 8월 4일 포도주 운반에 이용되던 두 척의 범선을 타고 영국 남서부 덴번에 있는 항구도시 플리머스항을 떠났다. 하지만 항해 중 스피드웰호가 고장나 메이플라워호에 합승하여 그해 12월 11일 도착한 곳이 미국의 북동부 메사추세츠 이름 없는 항구였다. 그들은 이곳을 출발지인 플리머스로 이름을 지었으며 이듬해 4월 5일에 런던으로 돌려보냈던 메이플라워호를 먼 훗날 이곳으로 다시 가져와 문화재로 보관하게 되었다. 다행히 룸메이트가 방학 동안 한국에 가면서 부모님도 오셨으니 쓰라며 자가용 키를 주고 간 덕분에, 짧은 기간이지만 보스턴 일대는 물론이고, 그 유명한 뉴욕의 맨해튼까지 관광을 할 수 있었다. 남편은 그저께 하버드대학을 관광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매우 진지한 어조로 연장시킨 입국 날짜를 원래대로 앞당기라고 아들에게 주문했다. 귀선은 당연히 펄쩍 뛰었다. 하지만 남편은 귀선이 시상식에 참석하는 일 말고 우리 가정에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또 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귀선은 당선작도 아니고 겨우 가작 당선인데, 자식과 바꿀 수 없다고 우겼다. 그러자 남편은 "겨우!?"라며 반문하더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말도 모르냐"며 질타했다. 마침 남편이 원하는 날 한국으로 가는 여객기에 좌석이 있어서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었다. 귀선도 메이플라워호에 사활을 거는 게 아니라 아들이 가고 싶어 하던 곳을 가지 못함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하게 된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부터는 적극적으로 남편을 지지했다. 당연히 가야 한다고, 뿐만 아니라 그런 영광스런 자리에 자식으로서 당연히 가서 축하를 드려야 하는데 못 가는 것만도 불효막심한데, 엄마의 참석까지 제가 가로막는다는 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라며 귀선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애썼다. 여객기는 보스턴 공항에서 출발하여 워싱턴 공항에서 두 시간을 경유한 후 환승하여 한국으로 향했다. 귀선은 워싱턴까지 계속 눈물바람이었다. 아들의 웃음에 섞여 있던 외로움을 읽을 수 없었더라면 또 모를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렸다. 그런데 모처럼 부모와 함께 행복한 순간을 꿈꾸어온 아들의 그 작은 소망 하나도 들어주지 못하다니. 그렇지만 귀선이 소설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무조건 좋아라 응원해 준 가족이 아들이었다. 그 어린 게 뭘 안다고, 하지만 소설가는 좋은 거라는 느낌을 받았던지 벌써 엄마가 소설가가 된 듯 귀선의 턱밑에 와서 "소설가님! 소설가님!"하며 신나했던 아들. 중학생이었던 큰딸과 초등학교 6학년 작은딸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막상 마루에 상을 펴놓고 밤늦게까지 원고지를 메우던 귀선을 보고 달려 나온 남편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며 야단을 치자, 엄마도 자기 인생이 있는데 왜 아빠가 가로막느냐며 편을 들었다. 그러자 어린 아들이 함구한 채 귀선의 원고지를 가만히 들고 가자 남편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찢어버릴 태세를 취하면서도 막상 그러지는 못했다. 사실 지나고 보면 한갓 낙서에 지나지 않았던 그 소설이라던 원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그 사실을 안 귀선은 자녀들의 성원에 힘입어 여기까지 왔다는 게 꿈만 같았다. 그러자 남편은 "시는 이미 인정도 받았겠다 일을 하다가도 시상이 떠오르면 즉석에서도 쓸 수 있고, 그리고 또 짬짬이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취미로 써도 무방하지만 구태여 불가능한 소설을 쓰느라 고생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시간과 노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소설을 취미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라는 게 남편의 견해였다. 남편의 말도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다. 큰딸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우수 학생들의 어머니 시화전에서 귀선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 입선작들은 무려 한 달 동안 학교에서 전시까지 했었다. 그러니 남편도 귀선이 시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한 건 당연할 것이다. 거기다가 해마다 지방 문협에서 시행하는 백일장에 몇 해를 산문으로 도전했으나 입선을 못하자, 그 이듬해는 장르를 바꾸어 시를 썼다. 그런데 당선까지는 못 해도 단 번에 입선을 한 것이다. 그러니 남편도 못 나무란다. 아이들이야 아직 어리니까 엄마가 소설가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 발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보다는 세상을 더 많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터라, 꿈만 가진다고 다 이루어 질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귀선도 생각을 달리했다. 남편이 원하는 시를 하기로. 그러자 남편은 신이 났다. 어느 날 중앙지를 보다가 문예대학이 여름방학 기간에 열린다는 광고를 본 것이다. 그때부터 귀선의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시 강의는 화요일과 목요일, 그러니까 일주일에 이틀이었다. 문예대학 시 강의 첫날이었다. Y대 국문학과 교수가 강사였다. 먼저 강사가 자기소개를 한 다음 21명의 수강생도 똑같이 돌아가면서 하게 했다. 귀선의 차례가 되어 경남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그런데 귀선이 소개를 마치자 경남에서 왔느냐고 강사가 확인했다. 귀선이 그렇다고 하자, 잠시 뜸을 들인 강사가 경남에도 유명한 시인이 있는데 구태여 이 먼 서울까지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원한다면 좋은 시인을 소개시켜 줄 수도 있다면서 대답을 기다리듯 귀선의 입에다가 시선을 박았다. 귀선은 갑작스런 질문에 머무적거리다가 주눅 든 어조로 그래주기를 부탁했다. 귀선이 강사로부터 소개받은 분은 지방 신문사 주필이었다. 귀선은 미리 전화로 사정을 말하고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얻어 놓고는 써놓은 작품을 수정 정리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주필을 찾았다. 매우 긴장된 상태였지만 막상 그를 만나니 생각과는 달리 친절해서 마음을 푹 놓고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는 귀선의 작품을 읽고는 구체적인 평은 하지 않고 글이란 남이 쓴 작품을 무조건 많이 읽고 또 내가 많이 쓰는 것 외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말하면서, 쓴 작품을 되도록 여러 번 수정을 하는 게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백일장에도 나가서 글을 써보고 쓴 작품들을 여러 곳에다가 응모하는 게 바로 공부지 문학공부라면 다들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귀선은 시 쓰는 지도를 부탁하러 갔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끝내 내놓지 못하고 말았다. 남편은 개인 지도를 받는다는 자체가 어려운 일이니 다시 서울 문예대학으로 가는 게 낫겠다고 권했지만, 실제로 귀선은 시에 대한 열정이 없었기 때문에 어영부영하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고등학교 교장이며 시인인 귀선의 초등학교 선배였다. 마침 여름 방학이라 총동창회가 열렸다. 총동창회 회장은 중소기업 사장인 귀선의 남자 동기였다. 그러자 동기생들이 다 참석하자는 운동이 일어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참석하기로 했다. 그날 귀선이 그 선배 시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국문학과를 나온 선배 시인은 한국문인협회의 시분과 위원장이기도 했다. 선배는 귀선을 보고 꼭 등단할 터이니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기가 안내하는 대로만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면서, 일단 먼저 시를 사랑하는 여성 동인회에 가입하여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추천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귀선의 생각에는 시를 쓰는 모임에 가입하려면 시를 좀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어 선뜻 선배의 제의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에 앞서 한두 번이라도 선배에게 지도를 받는 게 순서라고 부탁드렸다. 귀선은 일주일에 한 번씩 선배가 근무하는 그 학교를 방문하여 미리 써간 시를 중심으로 매우 성의 있는 지도를 받았지만, 하면 할수록 시를 써야 할 의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선배의 정성을 봐서라도 중도에 포기할 수 없다며 자책도 수없이, 하지만 결국 시동인회가 모이던 날 귀선은 거기에 가입하기 위해 선배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지만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나가지 않았다. 귀선은 시를 하면 할수록 소설에 대한 꿈이 더 강렬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에 더 이상 시와의 인연을 굳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덧 큰딸이 여고 3학년이 되기 전 마지막 겨울이었다. 그해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귀선은 그 춥고 긴 겨울 동안 3번째 장편소설을 썼다. 딸들은 귀선을 보고 엄마가 삼세번째니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라며 응모날짜를 지키기 위해 밤잠도 설쳐가면서 번갈아 띄어쓰기와 틀린 글자 그리고 또 어색한 문장 등을 수정했다. 그렇지만 큰딸은 순수한 봉사가 아니고 상금을 받으면 대학입학금을 내줘야 한다며 압력을 넣듯이 했고, 작은딸은 언니와는 달리 글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자기는 엄마가 소설가가 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설사 소설가가 아니라도 목표를 세워놓고 글을 쓴다는 자체로도 충분히 만족하다는 것이었다. 귀선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작은딸의 말이 훨씬 더 부담스러웠다. 거기다가 구정 명절날에도 두 딸은 귀선이 쓴 장편소설을 나눠 수정하느라 친구들은 고사하고 큰댁에 가서 사촌들과 노는 것까지 다 반납해 버릴 정도로 귀선을 응원해 주었다. Z여성 전문잡지는 여성만이 응모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귀선도 아이들도 더 가볍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세 번째의 장편소설도 앞의 두 작품과 마찬가지 결과였다. 그해 당선자는 노처녀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졸업을 한 후부터 해마다 장편소설을 한 편씩 써서 응모했다고 했다. 그리고 10년 동안 열 편의 작품을 썼는데 그 열 번째 소설이 당선되었다. 귀선은 당선자의 당선소감을 읽자 쓴웃음이 나왔다. 3번의 고배는 아무것도 아니다. 당선자는 국문학까지 전공했음에도 열 번이나 도전하였다. 귀선은 그때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소설을 너무 우습게 안 걸 깨달았다. 남편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았는데 며칠씩이나 고민에 빠졌다. 불가능하다는 남편의 말이 예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당장 포기하자! 그런데 가장 미련한 자를 택하여 가장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라는 성구가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이미 귀선은 소설가의 꿈을 꿀 때부터 그 주인공이 되자고 다짐했었다. 귀선의 가슴은 처음과 똑같이 뛰었다. 그러자 한순간도 허무하게 놓치고 싶지 않아서 또다시 원고지를 채우기 시작했다. 귀선이 소설가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는 정확히 말해서 결혼한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사실 그전까지는 남편이 가졌던 부농의 꿈을 향해 밤낮없이 일하는 것 말고 딴생각은 사치로 여길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그러던 중에 농촌 지원시책으로 정부가 캐나다산 도입 젖소를 농협으로부터 각 농가에 보급시켰다. 그때 귀선의 남편도 신청을 하였다. 그렇게 배정받은 젖소 중에 앓는 소 1두가 있었다. 수의사의 진단에 의하면 도입 전이거나 도입되는 과정에서 발병된 병으로, 국내서는 아직껏 경험하지 못한 희귀병이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발이 닳도록 농협과 관계기관에 들락거리면서 호소했지만, 해결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귀선의 여고 동기동창생의 남편이 농협중앙회 지부장으로 왔다는 소식을 입수하고는 그 동기생의 힘을 빌려 만나기로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귀선을 기다리게 해놓고는 다른 고객들과의 상담을 빌미로 끝내 오전 근무시간을 모조리 다 써버린 다음 자리를 비워놓고 고객을 따라 말 한 마디 없이 출타하고 말았다. 귀선이 얼마나 상식 이하의 대접을 받았는가 하면, 오전 근무 시작 시간에 도착하여 정오까지 지부장이 부르리라 기다리는 동안, 여러 고객들과 만날 때마다 여직원을 시켜 차를 가져오게 했지만 귀선의 몫은 끝내 없었다. 거기다가 그들은 이야기를 하는 도중 매우 큰 소리로 웃는가 하면 또 어떤 여자 고객은 귀선을 힐끔 돌아보고는 누구냐고 물었다. 지부장은 신경 쓸 것 없다며 일부러 톤을 높이는가 하면 억지로 껄껄거리기까지 했다. 귀선이 결국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는 집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겨진 자존심을 조심스럽게 싸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릴 때 옆집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좌석에 앉아서 옆에 서 있던 귀선의 아래위를 한번 훑어보더니 동정 어린 목소리로, "너! 아직 거기 사니?" 했다. 그러면서 이어서 "귀선이 네 엄마가 널 공부시키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공부 못한 처자들도 시집가서 도시에서 사는데 말이다. 네 엄만 널 도시까지 보내서 공부시켰는데 다 헛일 했네."라는 것이었다. 그날은 하필이면 읍내 장날이라 차 안은 기름 짜듯 승객들이 꽉 들어찼었다. 이런 차안에서 아저씨의 말을 들은 승객들이 용을 쓰면서 귀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귀선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굴은 숯불을 올려놓은 듯 달아올랐고 아저씨가 원망스러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귀선은 아저씨 옆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틈새 없이 꽉 찬 승객들 때문에 운신도 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이미 그 전해 여름 어머니를 따라 귀선네에 구경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아저씨는 어머니가 힘들게 고등교육까지 시켰는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돼지우리 같은 이런 곳에서 살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도회지로 나가라는 충고를 이미 했었다. 아저씨는 그날 양의 젖을 짜 대접했지만 마시지 않을 뿐 아니라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물론 이웃사촌이랄 정도로 허물없이 지내온 사이기에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라고 이해했었다. 그런데 귀선은 분노마저 느꼈다. 귀선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느라 입술까지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더 이상 아저씨 입에서 농민을 무시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더 듣는다는 것은 고문이나 다를 바 없을 것 같았다. 농촌이 잘살아야 나라가 산다며 좋은 직장까지 그만두고 농사짓던 남편, 결혼하기 위해 없던 직장에도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어머니는 귀선을 향해 "내가 이러자고 생고생하면서 널 높은 데까지 공부시켰냐"고 원통하다며 눈물을 훔쳐 내다가 결국은 한숨만 폭폭 내쉬었다. 하필이면 이 좁은 버스 안에서 그때의 일이 떠오르다니, 귀선이 기억을 지우기 위해 도리질을 할 때였다. 버스가 껑충 뛰었다. 귀선의 상체도 다른 승객들과 함께 앞으로 확 넘어졌다. 비포장도로인데다가 버스는 고물이고 거기다 승객까지 꽉 찼으니 한 몸처럼 같은 방향으로 쓰러졌다가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다시 일어나기를 거듭했다. 이런 와중에 차장 아가씨는 저 뒤에는 아직 많이 비어 있는데 들어가지 않는다고 고함이고, 기사아저씨는 아예 질책이다. 손잡이를 잡지 않아서 운전하는데 방해된다면서. 하지만 손잡이를 잡거나 의자 등받이를 잡은 사람, 거기다가 좁은 통로 한 중간에 샌드위치마냥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여서 아무리 손으로 잡으려 해도 손에 잡히는 게 없다. 다행히 귀선은 바로 의자 옆에 있어서 즉시 의자등받이를 잡고 몸의 중심을 잡았다. 차장 아가씨는 문을 닫기 위해 두 팔을 벌려 승객을 밀어 넣는다고 용을 쓰는지 "한 발씩만 뒤로 들어가 보세요!"를 계속 외쳤다. 이때 차장 옆 승강장 입구에서 출입문에 바싹 붙어서 있던 반백은 넘어 보이는 야윈 한 남자가 큰 소리로 역정을 냈다. "이놈의 버스는 고무풍선처럼 자꾸 늘어나는 줄 아나 보네? 고무풍선도 너무 늘어나면 터지는 법인데." 그러자 기사 아저씨가 매우 엄중한 목소리로 "그러면 당신이 내리면 되겠네!" 했다. 그러자 사내는 지고 싶지 않은지 말꼬리를 바로 물고늘어졌다. "이놈의 버스 배가 불렀나. 촌놈들 덕에 벌써 폐차시켰을 고물차로 돈깨나 버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네? 내리라니! 촌놈은 고객 아이가? 촌놈들 태우고 다니기 싫으면 다른 차를 보내주던가." 남자의 질타가 이어지자 "야! 이 촌놈아, 차 안 내려!" 하며 버스를 세운 기사 아저씨가 성난 목소리로 운전석에서 벌떡 일어나 사내를 향해 명령했다. "쳇! 그런다고 누가 겁낼 줄 알고! 그리고, 내가 촌놈이면, 넌 뭐꼬? 도시놈! 이히히힛!" 사내는 상대방의 반응에 신명이 난 사람처럼 더 큰 소리로 응수했다. 그런데 갑자기 승강장 문 두드리는 소리와 동시에 언제 거기로 갔는지 기사가 불쑥 나타나더니 사내의 멱살을 잡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장날이라 약주라도 한잔했음인지 약간의 취기가 느껴지는 검게 그을린 사내는 당장 땅바닥에 납작 뻗어버렸다. 불혹을 갓 넘겼을 것 같은 좋은 체격의 기사는 참았던 화가 폭발했음인지 바닥의 사내를 두 구둣발로 번갈아가며 사정없이 찼다. 하지만 차 안을 가득 메운 승객들은 이 광경을 구경만 했다. 기사는 사내를 빠른 동작으로 찬 후 어느 순간 부리나케 운전석으로 달려와 승객을 향해 "여기도 저 새끼처럼 불만이 있는 사람 있으면 당장 내리세요!"라며 거칠게 명령했다. 그러자 기사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이런 비포장도로로 버스를 운전해 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왜 화를 돋구지……."라며 오히려 여기저기서 사내만 나무랐다. 그러자 화가 잔뜩 난 듯 씩씩 소리까지 내던 기사가 슬그머니 운전석에 앉더니 즉시 시동을 걸었다. 버스가 출발을 하자 그때서야 사내가 정신이 드는지 무릎을 세우고 버스를 향해 기어오면서 손을 흔들었다. 이 모습에서 자신을 태워달라는 애절함이 묻어 있었다. 귀선 역시 기사의 태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사내를 대변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귀선은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날 하루 동안에 일어났던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반복해서 교란시켰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친구 남편이 귀선을 투명인간으로 취급하듯 오전 업무시간 내내 관심 하나 보이지 않았던 그 거만하던 태도와 기사의 구둣발에 무자비하게 구타당하던 사내의 모습이 떠오르면 귀선의 감정은 일순간에 분노로 들끓었다. 그러다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전율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야 해답을 찾았다. 농촌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귀선은 곧바로 일어나 서재로 갔다. 서재라고 하지만 구별된 공간이 아니라 거실을 서재로 겸해 사용한다. 귀선이 결혼할 때 지참금 이상으로 소중하게 챙겨온 서적과 남편의 책이다. 결혼하고도 책을 손에서 뗀 적이 없는 귀선이 거실 벽장에 진열되어 있는 책을 찬찬히 둘러봤다. 조금 전 귀선의 뇌리를 강타하며 스쳐간, 즉 소설가가 되자!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왜 하필이면 그 어렵고 힘든 방법을 선택했을까. 돈과 백 그리고 명예 그 어느 것도 가지지 못한 힘없는 농민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고 얻을 수 없다는 게 귀선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소설은 그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이 목적한 목소리를 마음껏 낼 수 있는 최대의 공간이 될 것 같았던 것이다. 귀선은 일단 감명 깊게 읽은 소설과 또 색깔이 걸맞다고 생각하는 장편소설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장편소설 습작, 장편소설 공모에 3번 낙선되고서야 단편을 썼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소설을 쓰자면 공부를 해야 하고 공부를 하려면 소설 습작을 전문가에게 보여서 수준이나 가능성 정도부터 물어야 한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무작정 쓴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란 걸 겨우 깨달았다. 분량이 많은 장편소설을 누구에게 읽어달라고 하겠는가. 짧은 단편을 쓰자. 소설 공부를 목적하기 때문에 일단은 서점에서 단편소설 중에서도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을 중심으로 골라 읽었다. 그러고 한편으로는 전문가를 만나려고 지역 대학 국문학과 연구실마다 전화를 냈다. 드디어 어느 날 N대학 국문학과 교수와 어렵게 통화가 이루어졌다. 귀선은 써놓은 장편소설을 검증받고 싶었다. 그것은 소설로서의 수준을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 소설가로서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싶다는 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고 "소설공부를 본격적으로 해 보고 싶은데 도와 줄 수 있겠는지? 물론 소설 공부를 하는 동안은 남들에게 부탁할 수 있도록 짧은 단편소설을 쓸 것이다." 등으로 귀선은 자신의 계획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귀선이 교수님을 만나러 대학 연구실로 가는 날 얼마나 가슴이 설레던지, 문학박사에 시인이며 지역문인협회 회장이시기도 했다. 귀선은 열심히 썼다. 한데 열 편째 단편을 썼을 때 교수님은 책을 내는 게 좋겠다고, 그리고 출판사를 소개해 주겠노라고도 했다. 하지만 귀선의 귀에는 교수님의 말이 "공식적인 등단은 어려우나 그래도 소설가가 소원이니 그냥 책이나 한 권 내고 말아라!"로 들렸다. 등단 코스 중에서 자비로 책을 내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라던 말도 떠올랐다. 거기다가 교수님이 작품해설을 쓰고 소설집을 내본 지방 문인협회원까지 소개했다. 귀선은 불쾌하기 그지없었지만 스승 앞에서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며 감정을 꾹꾹 눌렀다. 왜 스승으로서 제자를 제대로 가도록 인도하지 않을까. 귀선은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태연을 가장하고는 "제가, 정말, 벌써 책을 출판해도 될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답했다. 귀선은 출판비나 어느 출판사냐에 대해서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귀선의 실망은 너무 컸던 것이다. 등단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고 싶었던 꿈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물론 그날 이후로 교수를 찾아가지 않았다. 아무리 문학박사라고는 하나 소설가가 아닌 시인에게 소설 공부가 가당키나 한 일이었느냐는 생각이 들면서 귀선은 비로소 자책했다. 사실 소설 공부랍시고 꼭 초등학생들 작문시간이나 진배없는, 띄어쓰기와 어색한 문장 고치기, 틀린 글자를 지적하는데 그쳤으니, 그러고도 귀선은 스스로 소설을 쓰고 있는 줄로 착각했으니까. 귀선은 그때부터 2년 후 송대범 교수를 만나고서야 지난 모든 세월들도 모두 소중한 재산이 되어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한국 고토신문사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만난 송대범 교수에게 사사를 시작한 첫 작품을 우편으로 되돌려 받았을 때였다. 귀선은 아연실색했었다. 빨간 볼펜으로 지적한 글들이 원문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귀선은 전문가의 열정과 진심을 보기보다 읽기도 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회초리를 맞을 때마다 아픔을 참지 못하고 소설을 그만두려고 했다. 그런데 지난 세월들이 생각나자, 포기하기엔 너무 억울했다. N지방대 교수에게는 한 번도 꾸중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송대범 교수의 혹평을 어떻게 이겨내겠는가. 사실 N대 교수의 낙관적인 성품과 인내심이 있었기에, 주저 없이 그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동안 서울 중앙지 문예대학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으며, 그리고 소설 습작에도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사는 문예창작학과 교수요, 유명 소설가였다. 15명의 소설가 지망생들과 일주일에 이틀씩 소설 공부를 했다. 귀선은 첫날 강사에게 국문학이나 문예창작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소설가가 될 수 있을지 물었다. 강사는 소설가가 되는 데는 학벌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과, 문학이란 원래 커트라인이 없지 않느냐며 용기를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소설가가 되려면 쓰겠다는 의욕과 끝까지 쓰는 것, 거기에 사명감까지 더한다면 금상첨화라는 것이었다. 이론은 첫 주에 끝나고 그 다음부터는 수강생들의 습작을 돌아가면서 합평회를 했다. 한 번은 수강생들 중에 준비된 작품이 없었다. 그러자 강사는 합평회 작품으로 본인의 것을 내놓았다. 그것도 보통 작품도 아닌 국내 최고 권위 있는 문학상 수상작이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소설가 지망생일 뿐인데 감히 강사의 작품을 뜯어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일주일 동안 읽어온 그 작품을 수강생들은 과감하게 도마 위에 올려놓고, 하나같이 서툰 칼솜씬데도 겁 없이 난도질을 했으니, 그런데도 그 시간 내내 여유 있는 미소를 잃지 않았던 강사의 모습이 너무나 존경스러웠었다. 귀선은 그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경솔했던 자신을 포함한 제자들의 언행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거기다가 수강생들을 "선생님"으로 깍듯이 부르는 강사, 귀선은 너무 송구스러워 그렇게 부르지 말기를 부탁했지만, "다 미래의 소설가들인데요."라는 대답에는 할 말을 잃었었다. 귀선은 그 강사를 통해 소설은 기술이 아니라 쓰는 사람의 삶과 인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가의 분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귀선은 서울 딸들 집으로 가 시상식에 참석하면서 한 친구도 초대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한 여고 동창으로 국문학을 전공했는데 수필로 등단하여, 아이 둘 공부 끝나면 꼭 소설을 쓰겠다는 친구였다. 초대해 줘서 영광이라며 열일 다 제쳐놓고 참석하겠노라고 하면서, 장하다. 고맙다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시상식과 신문사 창립 60주년 기념행사를 겸해선지 축하객들이 많았다. 리셉션은 각 장르별 당선자들이 높게 쌓아올린 떡을 자르면서 시작됐다. 대부분 자유롭게 다니면서 인사할 사람들과 환담을 해가며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다른 입상자들은 축하객들이 많았지만 귀선은 두 딸과 친구뿐이라 다닐 필요가 없었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조금 전에 총평을 해준 소설 심사위원이었던 송대범 교수였다. 그는 F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며 소설가였는데 외모가 매우 여성스럽고 온화했다. 귀선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인사를 하면서 명함을 내밀었다. 귀선은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눈치 빠른 큰딸이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명함을 받았다. 그리고 귀선 친구까지 소개하면서 명한을 한 장 더 부탁했다. 신문사 사장도 일부러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귀선은 그날 송대범 교수가 한 말이 소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실감났다. 친구도 송교수에게 소설 지도를 부탁했다. 긴 터널 속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싶으면 다시 험산 준령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 어떤 때는 출력해서 보낸 작품이 교수님의 호된 회초리를 동봉한 채 돌아오면 가슴이 떨리고 겁나서, 한 달은 족히 개봉하지 않고 던져 놓기도 했다. 이렇게 가혹한 훈련을 넘긴 이 년 후에, 귀선은 R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일상에 전념하던 어느 날 축사에서 남편보다 먼저 들어와 아침밥상을 차리는데 전화가 왔다. "임귀선 씬가요?" "네, 그렇습니다, 만……?" "저희 신문사에 응모한 단편소설 당선을 축하합니다! 당선소감이 필요해서……." 귀선은 당선 소식에도 전혀 감동이 없었지만, 밝은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했다. 그때 마침 보스턴에서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날의 일이 생각났다. 그 순간에는 자신의 생각만이 옳을 것 같았는데, 지금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참석을 강행했던 남편이 아니었으면 송대범 교수를 만나지 못했고, 오늘의 이 소식도 역시……. 귀선은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인간의 도리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문갑연│한남신학교, 방송통신대학 농학과 수료, 현대문학 문예대학 수업. 1992년 《농민문학》 단편소설 신인상, 2000년 《한국기독공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입선, 2001년 《믿음의 문학》 단편소설 신인상. 소설집 《거울 없이 사는 사람들》 《꿈이 묶여 있는 땅》 《추도식의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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