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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최초로 정복한 인물, 알렉산더가 아니다
비주류가 본 역사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타밈 안사리가 저술한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슬람인의 눈으로 세계사를 재해석한 타밈 안사리, 그가 들려주는 세계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어떻게 다를까요.
서구의 입맛대로 써내려 간 세계사
중동이라는 표현은 서유럽에서 보는 경우를 가정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페르시아의 고원 지대에 서 있다면 이른바 중동이라고 불리는 지역은 중서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인더스 강에서 이스탄불까지 이르는 전체 영역을 중간 세계라고 부르는 편을 선호하는데, 그 영역이 지중해권 세계와 중국의 세계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타밈 안사리가 역사를 이해하는 태도를 잘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중동'이란 표현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탄생한 것이니 '중간세계'란 표현이 더 옳다는 그의 주장은 꽤나 설득력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는 '유럽사와 기타 등등'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유럽 중심적이죠. 그 속에서는 동아시아도, 남북아메리카도, 아프리카도, '중간세계'도 그저 변방의 역사일 뿐입니다. 타밈 안사리는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 '상식'을 뒤집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역사상 최초로 세계를 정복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세계사 좀 안다는 사람이라면'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타밈 안사리의 대답은 다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역으로 쳐들어와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가끔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했다는 말이 들리지만, 그가 실제로 정복한 것은 페르시아였으며 그때는 이미 페르시아가 '세계'를 정복한 뒤였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한 최초의 '인물'이 아닌 최초의 '유럽인'으로 기록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대제국을 건설하고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그의 업적까지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죠. 단지 지나치게 서구의 입맛대로 쓰여진 비대칭적인 역사를 바로 잡고 역사적 균형감각을 회복하자는 것이 그의 논지입니다.
이슬람의 눈으로 바라본 십자군 전쟁
타밈 안사리는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주장을 펼칩니다. 우리는 십자군 전쟁을 '종교 해방 전쟁'이라고 교육 받았습니다. 하지만 타밈 안사리는 여기에 태클을 겁니다. 당시 유럽에는 귀족과 기사 계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귀족과 기사는 노동을 일체 하지 않았기에 이들을 먹여 살리는 일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더불어 내란이 일어날 잠재적 위험 또한 높아졌습니다. 이 문제들을 단번에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해방'을 명분으로 셀주크투르크와 전쟁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이었습니다. 우리가 배운 세계사에서는 십자군 전쟁을 꽤나 비중 있게 다룹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이슬람 문화권, 즉 당시의 셀주크투르크에서는 십자군 전쟁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공격을 당하는 지역에서는 물론 프랑코를 두려워했지만, 그렇다해도 이런 공격이 그들의 생각이나 믿음에 대한 지적인 도전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또한 십자군은 지중해 동부 해안에 사는 무슬림들에게 분명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무슬림 세계로 깊이 침투하지는 않았다. (중략) 십자군은 바그다드를 포위하거나 유서 깊은 페르시아를 침략한 적도 없었다. 호라산, 박트리아, 인더스 계곡 사람들은 프랑코의 침입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대개는 아예 모르고 지나갔다. 실제로 십자군 원정대는 셀주크투르크 제국의 중심부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했으며 단지 예루살렘 등 일부 지역을 점령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셀주크투르크 입장에서는 십자군 전쟁이 제국 변방에서 일어난 일련의 약탈행위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타밈 안사리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도 비대칭적인 역사 인식을 꼬집습니다.
건강한 역사 인식을 기르는 기회
흔히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에서 '비주류'와 'B급'이 사랑 받는 현상은 박수 받을 일입니다. 여러 각도의 인식을 지녔을 때는 비평이 가능하지만 한두 가지 좁은 시선으로는 비평이 아닌 비난만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잘 새겨야 합니다. 주류 세계사에서 비껴나 이채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써내려 간 타밈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풍성한 역사인식을 기를 기회를 선사하는 책입니다.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이란 책에 허영심은 신이 인간에게 준 미덕이란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인지 알뜰하고 소박한 나에게도 허영심이 좀 있다. 남들 하나씩은 다 갖고 있다는 '○○○똥' 가방이나 '○넬' 가방을 향한 불타는 욕망은 아니다. 패셔니스트가 외모의 꾀죄죄함을 못 참듯이 나는 내 머리 속의 꾀죄죄함을 못 참는다. 그래서 나의 허영심은 가방이 아니라 책방에서 본색을 드러낸다. 책방을 기웃거릴 때는 불타는 구매욕에 마구 사로잡힌다. 그 구매욕으로 찾아낸 올해 나의 명품은 타밈 안사리가 쓴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란 책이다. 올 한 해 이슬람 세계는 그 어느 곳보다도 변화무쌍하고 격렬했다.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에서 촉발된 '아랍의 봄'은 30년이 넘도록 철권통치를 유지해온 이집트의 무바라크와 리비아의 카다피를 비롯한 장기 독재정권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아랍 여러 나라에 민주화 열풍을 일으켰다. 또한 9·11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알 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었고, 9년여를 끌어온 이라크 전쟁이 종전을 맞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 하면 테러를 먼저 떠올리고, 부르카나 히잡으로 상징되는 여성차별과 억압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진짜 그럴까? 내게 이슬람은 과격하고 호전적인 이미지보다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과 <천일야화>로 기억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계인데, 왜 이슬람이 세계의 화약고로 동네북이 됐을까, 사뭇 궁금했다. 그때 마침 눈에 들어온 것이 제목부터 남다른 이 책, 바로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이다. 그동안 길들여졌던 서구의 시각에서 본 세계사가 아니라, 이슬람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사라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슬람은 인류 문명을 이끌어 온 거대한 한 축임에 틀림없다. 추천사를 보니 책에 대한 찬사 또한 대단하다. <식량 전쟁 : 배부른 제국과 굶주리는 세계>를 쓴 라즈 파텔이 이 책을 '이슬람공포증을 치료하는 완벽한 해독제'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내 궁금증의 치료제도 될 수 있을 듯하다.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 누가 지어낸 말이야?
저자부터 살펴보자면 타밈 안사리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의 유서 깊은 이슬람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카불 대학교의 교수였고, 어머니는 아프가니스탄 남자와 결혼해 그곳에 정착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선은 지극히 중립적이다. 타밈이 들려주는 이슬람 초기의 이야기는 마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처럼 재미나고 구수하다. 그러나 현대로 올수록 현 이슬람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치부까지도 드러내면서 편향되지 않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세계사를 통찰한다. 무엇보다도 그 점이 매우 흥미롭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슬람은 전 세계 인구의 1/5이 넘는 13억 명의 신도를 가진 종교이다. 그야말로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종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슬람의 교세가 이처럼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른바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라는 이슬람의 강압적인 종교전파 방식 때문이었다고 학교에서 배웠던 기억이 난다. 죽음과 믿음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이슬람은 결코 폭력적이지도,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이슬람 제국은 정복한 지역에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큰 저항 없이 서로 공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용이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오히려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왜곡된 말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것은 십자군전쟁 패배 후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확산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기감을 조성하기 위해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말에서 유래한다. 그 후 아퀴나스의 이 말은 마치 이슬람의 본질이 폭력에 기초한 것처럼 왜곡되어 무비판적으로 우리에게 이식된 것이다. 그 결과 이슬람은 폭력적인 종교로 비춰졌으며, 급기야는 이러한 호전성이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과 분쟁, 폭력의 화근이 된다는 식의 논리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서구문명의 우월성과 유럽중심주의를 강조하고 그들의 지배논리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어져 온 것이다.
"세상이 부패했지만 네가 변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믿음의 강요는 오히려 그리스도교에서 훨씬 심했다. 아메리카를 정복한 유럽인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라. 길을 가다보면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를 외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올해 초에는 조계사 경내에서 예수를 믿으라며 소란을 피웠던 목사와 신도들도 있었다. 타 종교에 대한 배려와 관용을 떠나서 나는 진짜로 궁금하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인지. 그런데 만약 그렇게 해서 갈 수 있는 천국이라면 난 전혀 가고 싶지 않다. 거기서 "서울시를 봉헌하겠다"던 분을 다시 만난다면 이미 그곳은 천국이 아닐 테니까. 많은 종교가 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부패했지만 너는 탈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슬람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부패했지만 네가 변화시킬 수 있다." (본문 105쪽) 탈출과 변화,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쪽이 더 매력적이다. 혼자 탈출해서 잘 살라고 유혹하는 것보다 고생되더라도 함께 노력해서 변화시키자는 것이 훨씬 인간적이고 도덕적이지 않은가. 이것이 우리가 잘 몰랐던 이슬람의 공동체 의식이다.
서구 시각으로 이슬람 세계를 재단하지 말라
9·11 직후 부시는 테러리스트들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며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고 그 후에는 대량살상무기를 핑계삼아 이라크를 사담 후세인의 독재로부터 민주화시키겠다고 전쟁을 일으켰다. 오사마 빈 라덴과 사담 후세인은 죽었고 전쟁은 끝났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저자는 서구의 시각으로 이슬람의 세계를 재단하지 말 것을 얘기한다. 공동체 중심의 삶을 살아온 무슬림에게 개인주의적 자유와 민주주의는 전통과 문화를 어지럽히는 이질적인 제도일 뿐이며, 무슬림이 혁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상적인 이슬람 공동체라는 것이다. 서구 중심의 세계사를 기준으로 삼아온 우리에게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볼 것을 이야기한다. 엄이도종(掩耳盜鐘,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 식으로 미국을 향해서만 모든 촉을 열고 있는 이 나라 위정자들에게 이 책은 마치 '오렌지'와 '어륀지' 사이에서 헤매지 말고 '한국인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그려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두껍긴 해도 상당히 재미있고 진도도 잘 나가는 이 책, 지난했던 한 해의 마지막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은 이들에게 적극 강추다.
"세계사는 하나다?" "천만의 말씀!"
타밈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프레시안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 2011.09.09
이슬람이 미국을 시기했다고?
"이슬람은 미국의 부와 미국의 생활양식(way of life)을 시기했다." 9·11 당시 미국 내 지식인 사회의 논평이었다. 그리고 "문명의 충돌론"이 주목받았다. 서방 기독교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의 싸움은 이미 오래전 십자군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제 그걸 마무리하는 단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슬람은 테러와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미국의 대 테러 전쟁은 이로써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굳혀갔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생전에 바로 이 테러와 이슬람을 동격으로 놓는 서방 언론의 이미지 조작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를 조금만 알면, 국가 테러의 주범은 도리어 서구였으며 그 희생자는 이슬람권이라는 그의 주장은 옳다. 뿐만 아니다. 서구 문명이 중세의 중압에서 해방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이슬람권이 번역하고 발전시켜온 그리스 문명의 자산이었다. 과학과 철학의 근대적 발상은 이슬람의 역할이 없이 생각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서구 문명이 틀을 짜놓은 방식으로 세계사를 바라보는데 익숙하다. 16세기 이전의 유럽과, 이슬람 문명권 그리고 동아시아를 비교해보면 그 삶의 질에서 엄청난 격차가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제대로 교육되지 않는다.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유럽이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 놓였는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서구는 언제나 문명의 선두에 서 있었고 그리스-로마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지금까지 지속적인 발전을 해온 양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지금은 미국에서 역사 교과서 편집자로 활약한 바 있는 타밈 안사리는 세계사를 인식하는 또 다른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서구가 근대 이후 주변화 시켜온 방외(方外)의 문명이 걸어온 역사에 대한 해석이다. 달리 말하자면, 변방으로 밀려난 역사관의 복구를 통해 세계사의 진실을 캐는 작업을 보여주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설명할 때 타자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다. 나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졌으며 너 안에는 또한 내가 있다. 조선의 역사에는 중국과 일본이 들어 있으며, 중국과 일본 역시 다르지 않다. 유럽 중세의 역사 속에 이슬람의 역사가 담겨 있으며 이슬람의 역사에도 거꾸로 유럽의 역사가 들어 있다. 이 관계를 전체적으로 복원하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의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게 된다. 이슬람을 공격 목표로 삼았던 십자군 전쟁은 서구와 동방의 관계에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고, 지중해 교역을 넘어서는 항로 발견이라는 역사적 압박을 형성한다. 이는 이후 아프리카와 대서양 그리고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건이 된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서로가 서로에게 유기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사건은 없다. 그래서 타밈 안사리는 라이프니츠의 단자론, 모나드 개념을 역사에 적용시킨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한때 우주란 모나드들로 구성되었으며, 각 모나드는 특정 관점에서 이해하면 우주 전체이며 각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상을 진리라고 상정했다. 세계사란 그와 같다. 특정 관점에서 보면 인류 전체의 이야기이고, 각 역사는 모든 다른 역사를 포함하며 실제의 모든 사건은 중심 내러티브와 관련되어 어딘가에 자리한다."
이런 까닭에 그는 "단일한 공동의 역사 안에 보편적인 인간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모든 역사를 수집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과업"을 강조한다. 어느 하나의 역사로 인류의 모든 경험을 설명할 수도 없고 또 그 어느 하나의 역사가 그 자신의 역사마저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가령, 한국사를 이해하자고 하면서 중국사나 일본사에 무지하다면 그건 이미 한국사 이해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미국사를 알지 못하면서 한국의 근·현대사의 경험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또한 성립되지 못한다. 그의 말대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과업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두 개의 역사, 그 틀
이 나라의 역사 교육에서 이슬람 역사의 이해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다. 타밈 안사리는 바로 이러한 교육의 틀은 이렇게 짜여 있다고 적시한다.
"1. 문명의 탄생(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2. 고대(그리스와 로마) 3. 암흑 시대(그리스도교의 부상) 4. 부활 : 르네상스와 개혁 5. 계몽(탐험과 과학) 6. 혁명(민주주의, 산업, 기술) 7, 민족 국가의 부상 : 제국을 향한 투쟁 8. 제1, 2차 세계 대전 9. 냉전 10.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승리."
타밈 안사리는 이러한 기존의 서구적 역사관의 틀과는 다른 이슬람 역사의 시선을 이렇게 정리한다.
"1. 고대 :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2. 이슬람의 탄생 3. 칼리프 조 : 보편적 통일체를 향하여 4. 분열 : 술탄 제국의 시대 5. 재앙 : 침략자들과 몽골족 6. 부활 : 3대 제국의 시대(오스만, 사파비, 무굴) 7. 서양의 동방 침투 8. 개혁 운동 9. 세속 근대주의자들의 승리 10. 이슬람주의의 반발."
이 두 개의 역사관은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 또는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경험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역사적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가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다른 이야기가 이미 기존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역사 인식과 대등하게 논의되고 유기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만을 받아들인다 해도 세계사의 그림은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류한원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는 이슬람 문명권의 역사적 탄생과 그 성장, 그리고 변화에 대한 서술이다. 이는 앨버트 후라니의 <아랍인의 역사>(김정명·홍정미 옮김, 심산 펴냄)의 큰 틀과 유사한 시각을 보이면서도 저자가 아프가니스탄 출신이라는 점이 주목되며, 사실 이슬람권 문명이 아랍만이 아니라 페르시아, 투르크를 비롯해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범위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진전된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이슬람, 하나의 거대한 사회 프로젝트
이와 함께 이슬람 문명권의 성장사가 진행되는 동안 유럽은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도 주시하면서 이 두 역사가 하나의 틀 속에 만나고 융합되고 갈등하면서 새로운 역사 전개가 펼쳐지는 것을 잘 정리해내고 있다. 특히 저자는 이슬람 문명의 시작을 설명하면서 이는 단지 어느 특정 지역의 문명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프로젝트"의 가동이라는 시각을 통해 우리에게 그 내용을 들려준다. "히즈라(무함마드가 메카로부터 메디나로 피신한 사건) 이후에 무함마드는 법 제정을 하고 정치 방향을 제시하며 사회 지도를 담당하는 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히브라는 '단절'을 뜻한다. 메디나 공동체에 합류한 사람들은 자기 부족을 포기하고, 이 새로운 공동체를 부족을 초월한 연맹으로 받아들였다. 메디나 공동체는 무함마드가 어린 시절을 보낸 메카의 대안이 될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이는 장대하면서도 종교적인 사회 프로젝트였다."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서구문명이 이해해 온 방식과 전혀 다르다. 9·11 이후 미국이 이슬람에 대한 공격을 가하면서 테러 집단으로 이미지화했던 것과도 또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슬람은 이전의 부족주의가 만든 한계를 극복하고, 유일한 신('알'은 정관사, '라'는 신, 따라서 알라는 유일신)의 존재를 믿는 자들이 하나의 공동체(움마)를 형성해서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새로운 대안적 미래를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타밈 안사리는 서구 자본주의가 이슬람권에 자신의 논리를 강요하는 것을 지목하고 이를 이슬람의 사회프로젝트와 대립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최근에 있었던 도덕을 내세운 캠페인이나 군사 작전들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제 나라(서구) 안에서 무슬림을 약화시키려는 계획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서구식 관습과 법 제도와 민주주의는 사회를 이성적인 자기 이익을 근거로 자율적인 결정을 내리는 개별 경제 단위로 원자화하려는 프로젝트처럼 보인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모두에 맞서서 물질적인 재화를 성취하려는 경쟁에서 모든 남자와 여자, 아이로 하여금 서로 맞붙도록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공동체를 파괴하고 그 안에 남은 개인은 서로 적대적 관계가 되어 싸움 밖에 남지 않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서구의 자본주의 프로젝트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가 이슬람권에 개입해 들어오면서 이른바 문명화시키려는 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한쪽에서는 성별에 상관없이 시민들이 더 큰 권리를 누리게 하려는 운동처럼 보이는 것이, 다른 쪽에서 보면 힘 센 이방인이 가정의 사적인 문제에 끼어들어서 가족과 부족의 네트워크로 공동 사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능력을 잘라내는 것처럼 보이는 셈이다. 요컨대, 한쪽에서는 각 개인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 다른 쪽에서 보자면 전체 공동체의 힘을 빼앗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어떤 역사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는가?
타밈 안사리의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슬람 문명권이 서로 다른 문명을 번역하고 해석하면서 자기 내부의 문명적 자산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다. 그것은 오늘날, 문명 충돌론을 앞세워 서구의 패권을 마치 역사의 정상 상태인 것처럼 인식시키려는 일체의 시도를 비판적으로 검증하게 해준다. 어느 역사도, 어느 문명도 이미 있던 것을 번역하고 해석하면서 자기 것으로 삼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은 없다. 중등 교육 과정에서 세계사가 선택인 나라다. 이래가지고서야 무슨 세계적 시민을 길러낼 수 있을까? 우린 우리 자신도 잘 모르고 세계도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더군다나 세계를 모르면 자신도 잘 모르게 되어있다. 자신이 세계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체당하고 있는지, 세계사가 몇 개나 가능한지, 내 안에 들어온 세계사가 무엇인지 무지한 상태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남들이 알게 모르게 세뇌시키는 역사의 노예가 될 뿐이다.
오랜 세월 무슬림을 움직여온, 전혀 다른 세계사가 펼쳐진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저널리스트인 저자 타밈 안사가 무슬림들이 역사를 배우는 방식인 ‘인생극’ 형식으로 쓴 책으로, 이슬람 눈으로 본 1,500년의 세계사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슬람의 창시 내러티브, 무함마드와 칼리프들의 일생부터 최근 몇 세기 동안 이슬람을 황폐하게 만든 이념 운동의 흐름을 살펴보고, 9.11을 낳은 근대의 복잡한 갈등에 이르는 이슬람 공동체의 진화를 흡입력 있는 문체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이를 통해 이슬람과 서구를 갈라놓은 여러 단절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원인을 추적하고, 이슬람이 민주주의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2011년 5월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은 테러리즘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그리고 이슬람 세계는 과연, 자유와 민주주의 축복을 얻고, 자유 시장경제체제로 편입될 수 있을까? 저자는 이런 생각이 단지 서구의 시각일 뿐, 이슬람의 역사적 흐름에서 보면 잘못된 분석이라고 지적한다. 이 책은 오늘날 서구와 이슬람 사회를 파괴하고 있는 적개심 뒤에 있는 움직임과 사건들을 파헤치고, 이를 이해하는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안내한다.
“타밈 안사리는 이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조망하는, 도무지 눈길을 돌릴 수 없는 유익한 책을 썼다. 그는 매끄럽고 매력적인 문장으로 인습적인 지식에 도전하고, 이슬람과 세계가 서로를 형성해온 역사를 더 깊게 이해하자고 호소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처럼 불안하고 반목을 일삼는 9·11 이후의 세계에서 이 책은 필독서다.” ―칼레이드 호세이니, 『연을 쫓는 아이』,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지은이
“오늘자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지하드주의자의 자살폭탄테러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2011년 봄, 그리고 여름. 재스민혁명의 물결이 아랍 세계 전역을 뒤흔들고 있다. 이제 마침내, ‘자유에 대한 혐오’와 ‘여성 억압’을 원동력 삼아 미 제국주의를 무너뜨리려던 그동안의 극렬 이슬람주의자들과는 달리, 군부독재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성취하려는 새로운 혁명세력이 나타난 것일까? 재스민혁명과 2011년 5월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은 테러리즘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그리고 이슬람 세계는 과연, 자유와 민주주의의 축복을 얻고, 자유 시장경제체제로 편입될 수 있을까? 지은이는 현재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보는 시각은,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빈 라덴에게 집착했던 부시 정부와 마찬가지로, 철저히 서구의 시각, 서구의 내러티브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비판한다. 지구상의 모든 사회가 속도는 다를지언정 결국은 서구의 일부가 된다는 가정에서 나온 내러티브에 현재의 사건을 강제로 끼워맞추려 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현재 무슬림들이 싸우고 있는 대상은 미 제국주의가 아니라 자신들의 과거이며, 그들이 혁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상적인 이슬람 공동체라고 말한다. 따라서 서구에서 이슬람 세계에 주입하려고 애쓰는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무슬림들에게는 자신들의 오랜 공동체 지향적 전통과 부족 네트워크를 잘라내려는 칼로 느껴질 뿐이라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저널리스트인 지은이 타밈 안사리는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에서 무슬림들을 오랫동안 움직여온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그 흐름을 모르고는 무슬림들이 지금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도대체 어쩌다가 전쟁과 테러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무슬림들이 역사를 배우는 방식인 ‘인생극’ 형식으로, 이슬람의 눈으로 본 1,500년의 세계사를 그려낸다. 흥미진진하면서도 결코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서구 중심의 기존의 세계사, 서구 편향의 안팎의 언론보도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매혹적인 세계사’가 펼쳐진다.
적개심으로 가득한 9·11 이후 세계의 필독서
“지난 10년간 아프가니스탄에 안보와 개발, 인도주의적 지원에 힘을 썼지만, 국제사회는 (아프간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자생력을 갖추도록 하는 데에 실패했다.” - 민간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ICG), 2011년 8월 4일 아프간 보고서의 첫 구절 로이터 통신 보도
서구 언론이 그려내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이미지는 자살폭탄테러범, 여성의 머리에 검정 천을 씌우는 문화, 문란한 성문화의 상징인 할렘,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불통 테러리스트들이 만들어내는 모자이크다. 이슬람과 가장 적대적인 이해당사자인 서구와 유대 세력이 추진해온, 이슬람에 폭력의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이 프로젝트는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이슬람 세계에 대한 정보의 대부분을 서구 언론에 의지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사회에서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통로는 무척이나 좁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오늘날 서구와 이슬람 사회를 파괴하고 있는 적개심 뒤에 있는 움직임과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에 풍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보기 드문 책이다. 이 책은 1,500년의 찬란한 역사를 연 이슬람의 창시 내러티브, 무함마드와 초기 칼리프들의 일생에서 출발해 그 뒤로 펼쳐진 광대한 제국들의 시대를 거쳐, 최근 몇 세기 동안 이슬람을 황폐하게 만든 이념운동들과 9.11에 이르게 한 복잡한 갈등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세계를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을 흡입력 있는 문체로 풀어낸다. 이 흐름은 이슬람과 서구를 갈라놓은 여러 단절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슬람이 민주주의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정치와 경제를 포괄하는 완전히 다른 사상이자 사회 프로젝트고, 예술·철학·건축 등 인간의 모든 문화적 성취를 아우르는 또 하나의 문명이며, 시대를 관통하는 공동체의 여러 목표가 한데 어우러진 광대한 복합체인 것이다.
“나의 목표는 무슬림들이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지은이 타밈 안사리는 9·11 직후, 당시의 모든 상황이 자신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해 친구 몇 명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 이메일이 인터넷에서 급속히 퍼져나가면서, 그는 더 많은 대중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는 『카불의 서쪽, 뉴욕의 동쪽』에서 자신의 개인사를 통해 아프가니스탄과 미국 사이에 서 있는 그의 세계를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었고, 이 책에서는 더 커다란 틀로 이슬람 세계가 어떤 경로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몇 천 년에 걸친 역사 중에서도 예언자 무함마드와 초기 칼리프 네 명의 일생을 친근한 인생극 형식으로 전달한다. 학계는 그 ‘이야기’에 회의적이고, 무슬림의 서술이 그다지 객관적이지 않다고 여긴다. 주로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가’를 파헤치는 데에 집중하는,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의 자료를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나의 목표는 무슬림들이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실제로 오랜 세월 무슬림들을 움직여온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생극의 틀을 벗겨버리면 그 이야기가 무슬림들에게 지닌 의미가 변질되고, 그래서 무슬림들이 수세기에 걸쳐 전해온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면서도 지은이는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친척들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철저하게 자료를 수집해 ‘무슬림들의 세계사’를 튼실하게 재구성해냈다. 그 결과가 이 책, ‘서구의 이슬람공포증을 치료하는 완벽한 해독제’이자 ‘반대편의 시각을 활짝 열어주는’ ‘미래 세대의 필독서’다.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오늘자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지하드주의자의 자살 폭탄 테러를 더 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알고 싶다면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읽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이 책은 이방인들에 의해 느닷없이 뒤집혔다가 이제 다시 똑바로 서려고 하는 한 문명의 이야기다. 이 책은 반대편의 시각을 활짝 열어주는 귀중한 도구다.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
결코 변명조로 말하지 않고, 꼼꼼하게 조사해 균형을 맞추며, 재미있지만 절대 경박하지 않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결국 독자를 거대하고도 중요한 세계사의 사건들로 끌어들이는 매혹적인 드라마다. 오늘날 서구와 이슬람 사회를 파괴하고 있는 적개심의 뒤에 있는 움직임과 사건을 이해하려는 독자에게 풍부한 지식과 통찰력을 제공한다. ―『포틀랜드 오레고니언』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에는 무언가 깜짝 놀랄 만한 것을 배우지 않고 지나가는 페이지가 없다. 아름다울 만큼 명쾌하고 한없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 책은 지혜롭고 매력적인 지성과 함께 과학과 시, 정치, 종교를 가로지르며 뛰노는 유희이자, 유럽과 북미를 뒤덮고 있는 이슬람공포증을 치료하는 완벽한 해독제다. ―라즈 파텔, UC버클리 대학교 아프리카학 센터 방문 교수, 『식량전쟁』 지은이
놀라운 책이다. 타밈 안사리는 꼭 필요하지만 서구에서는 너무나 자주 무시당하는 관점에 서서, 지난 1,500년 동안의 역사를 서술했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미래 세대들이 읽을 책이다. - 레자 아슬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도다』, 『어떻게 우주적인 전쟁을 이길 것인가』 지은이
올해 초부터 아랍 세계 전역을 뒤흔든 민주화 혁명의 거센 물결은 이집트, 튀니지의 권위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데 이어 리비아를 40년 넘게 철권통치한 절대 권력자 카다피마저 초라한 도망자 신세로 전락시켰다. '재스민 혁명'으로 불리는 일련의 사태의 원인과 전망에 대한 견해는 엇갈리지만 이를 '민주화 혁명'으로 부르는 데에는 좀처럼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저널리스트인 타밈 안사리는 "아랍인의 봉기를 범지역적인 민주화 운동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지구상 모든 사회가 서로 다른 속도이긴 해도 결국에는 서구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가정에서 나온 내러티브에 이 사건을 맞추려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발 물러나서 보면 더 오래된 내러티브가 보일 것"이라며 "그 내러티브는 오늘날 역사의 기정사실들이 아직은 그리 당연하지 않았던, 유럽 문명이 이슬람 세계로 확장해나가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한다. 안사리가 2009년 출간한 책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뿌리와이파리 펴냄. 원제 'Destiny distrupted')는 번역판 제목 그대로 이슬람 세계의 시각에서 본 1천500년 세계사를 서술한 책이다.
"세계사는 언제나 '우리'가 어떻게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우리'가 누구를 의미하며 '지금 여기'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모양새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전통적으로 서구의 세계사는 '지금 여기'를 민주주의 산업(그리고 탈산업) 문명으로 상정한다." (29쪽)
이 책에 따르면 서구의 시각에 따라, 즉 역사가 지향하는 목표점을 탈산업 시대 서구식 민주주의 사회의 이상적인 미래로 상정할 경우 역사의 내러티브는 이런 식이다.
"1 문명의 탄생(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 2 고대(그리스와 로마) → 3 암흑시대(그리스도교의 부상) → 4 부활: 르네상스와 개혁 → 5 계몽(탐험과 과학) → 6 혁명(민주주의, 산업, 기술) → 7 민족국가의 부상: 제국을 향한 투쟁 → 8 제1ㆍ2차 세계대전 → 9 냉전 → 10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승리"
똑같은 시간대를 이슬람의 눈으로 볼 경우에는 이렇게 달라진다.
"1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 2 이슬람의 탄생 → 3 칼리프조: 보편적 통일체를 향하여 → 4 분열: 술탄 제국의 시대 → 5 재앙 : 침략자들과 몽골족 → 6 부활 : 3대 제국의 시대 → 7 서양의 동양 침투 → 8 개혁 운동 → 9 세속 근대주의자들의 승리 → 10 이슬람주의의 반발"
이슬람 쪽 내러티브가 얼마나 낯선지만 보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서구 중심의 세계사에 익숙해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큰 흐름을 바탕으로 장대한 세계사를 흥미진진하게 서술한다. 서구의 필터를 벗겨낸 '또다른 세계사'는 역사를 보는 열린 시각을 갖게 해준다.
[아프간의 비참한 실상]“수백만명 전쟁 미망인” [동아일보] 2001.09.20
“테러집단을 비호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겠다구요? 이미 그 곳은 철저히 파괴돼 석기시대처럼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35년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타밈 안사리는 최근 아프가니스탄의 비참한 실상을 알리는 메일을 미국인 친구들에게 보냈다. 그 후 그의 글은 인터넷과 e메일 등을 통해 미국 네티즌에게 빠른 속도로 전파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동정론과 함께 무분별한 보복전쟁 자제 여론을 확산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안사리씨는 아프가니스탄은 오랜 전쟁과 가뭄으로 식량도 바닥나고 농장들도 대부분 파괴돼 경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며 굶주리고 지쳐 도망갈 힘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라고 모국의 비참한 상황을 전했다. 더구나 수백만명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이라는 것. 안사리씨는 아프가니스탄을 왕래하는 지인들로부터 늘 모국 소식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고통을 주겠다구요? 그들은 이미 처참하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집과 건물들을 파괴하겠다고요? 전란으로 이미 모두 파괴됐습니다. 폭격을 가한다면 당신들이 원하는 탈레반과 빈 라덴 대신 도망조차 가기 힘든 50만여명의 장애인 고아들만 제물이 될 것입니다. 그는 또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을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라 나라를 일시 점령하고 있는 광신자 집단일 뿐 이라며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치른다면 결국 빈 라덴의 사악한 의도 만 충족시켜주는 꼴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사리씨는 비유하자면 탈레반은 나치, 빈 라덴은 히틀러와 같은 인물 이라며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나치수용소에 갇힌 유태인과도 같은데 왜 이들이 전쟁의 희생자가 돼야하는가 라고 되물었다.
영국 BBC방송도 “최근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던 영국 적십자 요원 캐시 매호니의 말을 빌어 아프가니스탄은 20년 전에 시계가 멈춰버린 중세국가 같은 곳”이라고 전했다.
매호니씨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TV나 라디오도 없기 때문에 고층빌딩의 개념 조차도 잘 모른다 며 따라서 이번 테러참사로 뉴욕 세계무역센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조차 힘들 것 이라고 전했다. 그는 또 “3년째 계속되고 있는 극심한 가뭄으로 씨앗과 가축들도 다 소진되고 이제는 먹을 씨앗조차 없다”고 전했다. 아프가니스탄간에서는 다섯 번째 생일을 넘기지 못하는 어린이가 전체의 3분의 1이나 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탈레반 정권은 반군과의 내전에서 특히 삶의 근거지를 아예 없애버리는초토화 작전을 쓰고 있어 무려 300만명의 사람이 돌아갈 곳도 없이 유랑민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구의 '필터' 벗겨보니…무슬림의 '생얼'은 청렴과 수양 / 강경태 < 한국CEO연구소장 > [한국경제] 2011.08.25
무함마드부터 9·11테러까지…이슬람 입장서 세계사 재조명
9 · 11 테러 이후 하나의 큰 드라마가 세계의 시선을 독차지했다. 미국의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격과 미국 나토 동맹군이 여러 이슬람 국가에서 벌인 전쟁이다. 9 · 11 여파 속에서 부시 행정부는 그날 사건의 주범인 테러리스트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정부'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초기에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단행하면서 일시적으로 오사마 빈 라덴에 집착하더니,그 다음에는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를 조준해 그 나라가 민주화되면 테러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했다. 서구는 서구의 방식에 따르는 이슬람 국가 통치자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주고 그들 사회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도록 돕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무슬림은 도덕을 앞세운 캠페인이나 군사작전들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무슬림을 약화시키려는 계획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쪽에서는 시민들에게 더 큰 권리를 누리게 하려는 운동처럼 보이는 것이,다른 한쪽에서는 힘센 이방인이 가정의 사적인 문제에 끼어들어 가족 · 부족의 공동사회 정체성을 유지하는 능력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는 셈이다. 이슬람 세계를 물리적으로 보면 유럽과 미국을 합친 것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슬람은 '테러,여성인권 문제' 등 몇 가지 키워드로 우리의 시각이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9 · 11 이후로 인식이 달라졌다. 이슬람이 무엇이고 무슬림이 어떤 사람들이며 이슬람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묻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아프가니스탄계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탄생부터 9 · 11 테러까지의 역사를 무슬림의 시각으로 재조명한다. 저자는 무슬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현재 무슬림의 테러,전쟁 및 서구 국가에 대한 그들의 입장과 증오의 이면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서기 6세기 후반,아라비아해를 따라 자리한 도시들이 뜨거운 교역의 현장으로 번성했다. 여러 유대 부족들은 아랍 부족과 어울려 살았는데,그들은 로마인들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아랍인과 유대인 모두 셈족이었으며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둘 다 조상 아브라함에 닿았다. 종교적 신앙의 체계로만 봤을 때 이슬람은 그리스도교와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동의할 분야가 더 많으며,정통파 유대교의 식습관 위생 등에 대한 율법을 살펴보면 정통 이슬람과 거의 정확하게 같은 목록을 볼 수 있다. 책의 첫 장면은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소개에 큰 비중을 둔다. 그는 570년 무렵 홍해 연안의 국제도시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명상하는 습관을 함양코자 정기적으로 산의 동굴로 들어갔는데,어느 날 동굴 안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만난다. 이후 당시 깨달음을 대중에게 설파하기 시작했다. 메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업은 종교였다. 메카에는 후발,마나트,알우자,팔스 등 100여명에 이르는 이교도의 신을 모시는 사원들이 있었다. 메카의 기득권자들은 무함마드가 자신을 위협한다고 느꼈고,그를 암살하기로 결정한다. 무함마드는 암살 전에 메카를 빠져나와 메디나로 피신했다. 무슬림들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을 '히즈라' 즉 무슬림 공동체가 생겨난 해를 의미한다. 이어서 무함마드 사후 차기 지도자인 네 명의 칼리프에 대해 소개하며,우마이야 · 아바스 · 셀주크 왕조를 차례로 설명한다. 십자군 전쟁과 오스만 · 사피비 · 무굴 왕조를 언급하며 당시 유럽의 타국 상황도 전해준다. 이슬람의 근대 산업 형성과 이스라엘과의 분쟁 및 서구 국가와의 갈등에 대해서도 조망한다. 마지막 장면은 9 · 11 테러다. 미국의 역사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소련의 몰락이 냉전의 몰락을 뜻하는 것만 아니라 역사의 끝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어 '자유주의 자본가들의 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뒀으니 이제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덤빌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는 지하드주의자와 와하비파가 아주 다른 결론을 이끌어냈다.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웠던 지하드주의자들은 서구에 대항하는 그들의 작전 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다시 모여 들었다. 지하드주의자들의 첫 번째 단계는 그들 마음 속에 그리는 공동체를 아프가니스탄에 세우는 것이었으며,이런 이유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와하비파의 자금으로 후원을 받는 지하드주의자들은 탈레반이 성장하도록 도왔다. 결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숨어든 과격 지하드주의자 중 일부 무리가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에 있는 국방부 본부에 납치한 항공기를 충돌시킬 계획을 꾸몄다. 2001년 9월11일,두 개의 세계사는 충돌했고 그로써 한 가지 결론이 확실히 내려졌다. 후쿠야마가 틀렸다는 것이다.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 아랍 세계 전역에서 일어난 혁명의 물결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지금 아랍 세계는 '민주화 운동'의 열풍에 휩싸여 있다.
아랍 민주혁명? 서구 시각에 속지마라 [문화일보] 2011.08.26
올해 초부터 이집트에서 시작된 이른바 ‘재스민 혁명’의 물결이 아랍 세계에 노도처럼 밀어닥쳤다. 대중들은 부패한 권력에 정면으로 맞섰고 저항의 열기는 들불처럼 타올랐으며 결국 장기집권해 온 철권 통치자들은 하나둘씩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드는 의문 한 가지. 과연 이슬람 세계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성취하려는 새로운 세력들이 생겨난 것일까.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세계를 무너뜨리려던 극렬 이슬람주의자 세력이 여전한 가운데 ‘서방세계가 이룩한 민주주의’를 이상적인 사회 형태로 보는 대중들이 등장한 것일까. 그렇다면 혁명을 이뤄낸 이슬람 국가의 국민들은 이제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편입하려는 것일까.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인 저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중동 지역 이슬람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보는 시각은 철저히 서구의 시각에 기인한 것이라고 일축한다. ‘지구상의 모든 사회가 속도는 다를지언정 결국 서구의 일부가 된다’는 서구의 시각에서 내린 판단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대중이 혁명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그건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상적인 이슬람공동체’다. 서구가 숭배하는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무슬림에게는 단지 공동체 지향적 전통과 부족네트워크를 잘라 내려는 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서구와 이슬람 세계가 같은 사안을 두고 이렇듯 다른 개념과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은 이슬람이 단순히 종교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를 포괄하는 완전히 다른 사상이자 인간의 모든 문화적 성취를 아우르는 전혀 다른 문명이기 때문이다. 책은 제목 그대로 이슬람의 시점에서 본 세계사를 다루고 있다. 서구의 시각으로 다룬 세계 역사는 이슬람 시각에서 보는 그것과 충격적일 정도로 다르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시대와 르네상스와 개혁, 계몽주의 시대 등을 거쳐 혁명의 시대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서구의 시선에서 본 역사라면 이슬람의 눈으로는 똑같은 기간을 술탄제국의 시대, 침략자들과 몽골족, 서양의 동양 침투 등으로 바라본다. 이 두 세계사는 같은 장소인 고대 이라크의 영토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에서 출발해서 지금은 서구와 이슬람이 벌이는 세계적인 싸움판에 도달해 있는 중이다. 책은 담긴 내용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서술해 가는 전개방식까지도 색다르다. 서구의 역사 기술이 ‘실제로 일어난 일’을 파헤치는 데 집중한다면 이 책은 주로 무슬림들이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지’를 주로 좇는다. 저자는 그게 바로 오랜 세월 무슬림을 움직여온 이야기이며 그것을 알아야 세계사 안에서 무슬림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책은 1500년의 역사를 통해 이슬람 세계가 어떤 경로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됐는지, 이슬람과 서구를 갈라놓는 단절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등을 역사적 맥락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역사를 보는 ‘열린 시선’을 갖게 해주는 것도 이 책이 가진 미덕 중 하나다.
중동에 불어닥친 재스민 혁명은 서구의 민주화 운동과 다르다 [매일경제] 2011.08.26
우리가 배우고 있는 세계사는 엄밀히 말하면 하나의 세계가 온전히 실종된 역사다. 고대 이후 지금까지 세계의 한 축을 차지해온 이슬람 세계가 다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이 인구 중 다수를 차지하거나 통치자가 무슬림인 사회를 이슬람 세계라고 정의한다면, 여러 세기 동안 이슬람 세계는 지구상에서 지리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7세기께에는 아라비아반도의 일부에 불과했으나 끊임없이 성장을 거듭한 결과 오늘날에는 아시아ㆍ아프리카 대륙에 걸쳐 유럽과 미국을 합친 것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과거에 이슬람 세계가 단일 정치 독립체였으며, 지금도 이슬람 세계가 하나이며 정치적으로 통합돼 있다고 느끼는 무슬림 지도자들도 있다. 테러와 전쟁, 민주화 혁명에 이르기까지 현재 우리에게 그들이 미치는 영향의 크기를 고려하면 우리가 지금껏 이슬람을 제쳐두고 세계사를 논해왔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뿌리와이파리 펴냄)는 제목 그대로 이슬람의 시각에서 1500년의 세계사를 돌아보는 책이다.
저자 타밈 안사리는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저널리스트로, 서구 중심의 기존 세계사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 세기 동안 끊임없이 흘러왔으나 지금껏 발견되지 못했던 무슬림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균형 잡힌 시각을 선사할 뿐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로도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저자는 무슬림들을 오랫동안 움직여온 그들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전 세계를 위협하는 듯 보이는 그들의 전쟁과 테러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말한다. 일례로, 9ㆍ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은 테러리스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고 나섰다고 외쳤다. 그러나 9ㆍ11 가해자들도 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에 맞서 반격을 했다고 생각할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들은 대체로 수양 대 퇴폐, 도덕적 청렴 대 도덕적 타락에 초점을 맞춘다. 수 세기 동안 서구가 이슬람 사회를 지배하면서 공동체와 가족이 파편화되고 이슬람의 사회적 가치가 침식되며 술이 확산되고 종교의 자리에 오락이 들어서고 부유한 상류층이 세속화되는 등 이슬람 사회에는 수많은 문제가 생겨났다. 그들은 그 문제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보는 시각 역시 철저히 서구의 시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비판한다. "아랍인의 봉기를 범지역적인 민주화 운동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지구상 모든 사회가 서로 다른 속도이긴 해도 결국 서구의 일부가 되어 간다는 가정에서 나온 내러티브에 이 사건을 맞추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이 혁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상적인 이슬람 공동체라고 말한다.
"세계사는 언제나 '우리'가 어떻게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우리'가 누구를 의미하며 '지금 여기'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모양새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전통적으로 서구의 세계사는 '지금 여기'를 민주주의 산업(그리고 탈산업) 문명으로 상정한다."
역사가 지향하는 목표점이 탈산업 시대 서구식 민주주의 사회의 이상적인 미래라고 상정하는 것이 서구 시각이다. 하지만 이슬람은 전혀 다른 기준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나눈다. 그리스와 로마를 서구 사회의 탄생으로 보듯, 이슬람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겨 무슬림 공동체가 생겨난 해를 '문명화'의 시작으로 보는 식이다. 이후 술탄제국의 시대, 몽골의 침략, 3대 제국의 시대, 서양의 동양 침투 등으로 이어지는 이슬람식 내러티브가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서구 중심의 세계사에 익숙해져 있었던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여기 거대한 세계 둘이 나란히 존재한다. 놀라운 점은 두 세계가 서로를 얼마나 모르는가다." 책은 우리가 보다 열린 자세로 세계사를 볼 수 있게 해준다. '미지의 세계'에 가까웠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이해는 또 다른 수확이다.
서구의 색안경을 벗고 바라본 ‘또 다른 세계사’ [경향신문] 2011.08.26
서구가 쓴 세계사는 이슬람을 편린처럼 취급한다. 유럽과 미국을 합친 것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며 남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 걸쳐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의 거대한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이슬람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며 제국을 경험했지만, 이슬람은 세계사 속의 한 장(章)일 뿐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으로 건너온 ‘미국인’ 타밈 안사리는 이 책에서 유럽 중심주의의 세계사에 맞서 이슬람 관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해석한다. ‘이슬람의 눈’이 책의 줄기에서 여러 차례 반박하고 있는 것은 ‘문명의 충돌’ 개념이다. ‘십자군 원정’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슬림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실감이 없었다.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장대한 싸움이라기보다는 ‘(이슬람)문명 위에 드리워진 참사’로 봤던 게 당시 이슬람 문헌의 기록이다. 실제 이 기간 동안 유럽과 ‘중간세계’의 교역은 오히려 증가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 때 무슬림과 유럽인은 전투를 벌이면서, 전투현장과 멀지 않은 곳에서는 교역을 계속했다. 저자는 “‘우리는 서로 다른 둘 중 하나만 남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면, 현대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갈등을 문명의 충돌로 이해하는 방법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서로 맞지 않는 두 줄기의 세계사가 교차하며 발생한 마찰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는 말이다. 그래서 2011년의 9·11도 두 개의 세계사가 마찰한 사건이다. 소련의 몰락을 두고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또 9·11이다. 이슬람은 애초 미국에 우호적이었다. 무슬림은 미국이 선언한 자유·정의·민주주의라는 가치와 미국 정치체계가 모든 나라를 가난과 압제에서 구하리라는 주장을 존중했다. 하지만 1953년 미국 CIA가 이란 군대의 한 파벌에 군사자금을 대줘 쿠데타를 일으켜 석유통제권을 확보한 사건은 무슬림들의 분노를 일으키며 미국의 실체를 각인시켰다.
‘다른 방향으로 가는 두 세계사’ 중 종교도 마찰의 근원에 놓여 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은 로마교회와 교황에 저항해서 일어났지만, 이슬람에는 애초부터 저항할 교회나 교황이 존재하지 않았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간극이다. 그리스도교는 태생적으로 개인의 구원을 위한 계획이었지만, 이슬람은 공동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에 대한 계획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수양 대 퇴폐’ ‘도덕적인 청렴 대 도덕적 타락’이라는 대 서양 프레임을 예로 든다. “한쪽에서는 각 개인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 다른 쪽에서 보자면 전체 공동체의 힘을 빼앗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정복-합병-확장-퇴락-정복’의 과정으로 서술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슬람제국 확장의 역사뿐만 아니라 왕가와 먼 친척, 기술귀족, 지배정당과 기관원들의 ‘지배클럽’만 부유한, 근대 세속주의에 매몰된 석유산업국의 민주주의 문제까지 세계사를 넓힌다. 최근의 재스민 혁명과 연계해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서구학자들이 성적인 유희가 채워지는 음탕한 공간이라는 함축적 의미를 부여한 ‘하렘’이 실은 암살 계획이 난무하는 권력암투 공간이었다는, 읽을거리 역사도 곳곳에 담겨 있다. 2대 칼리프(이슬람 지도자) 우마르 때 노예는 부리되 학대나 혹사를 금지하고, 주인이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을 줘야 하는 규정이나 후대 칼리프를 자문단인 ‘슈라’가 선택하게끔 한 제도처럼 ‘미처 몰랐던’ 이슬람 세계사를 들여다보는 재미도 크다. ‘이슬람의 눈’이지만, 미국뿐만 아니라 이슬람·무슬림 세계에 대해서도 객관적 거리두기를 한 게 책의 가장 큰 미덕 같다.
서구중심 세계사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다 [한국일보] 2011.08.27
21세기 첫 10년여 세계사는, 최근 몇 년 사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경제 위기를 제외하면 가히 이슬람의 역사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9ㆍ11 테러는 이미 현대사 교과서의 목차에 들어 있고 그 뒤 이어진 미국 등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공격은 관중석에 있어도 될 법한 한국까지 그라운드로 불러 냈다. 9ㆍ11의 충격을 다독였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이슬람 민주화 열풍이다. '이슬람'을 키워드로 한 이 같은 사건을 거의 매일 접하면서도 이슬람을, 특히 이슬람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듯하다. 천년 이상 이슬람 세계와 애증의 관계를 지속해온 서구와 달리 우리는 이해관계가 밀접하지 않은 탓이 클 것이다. 관심을 갖고 사건을 살펴보더라도 주요 해외 언론을 통해서라면 서구의 시각에 치우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9ㆍ11 이후 지금까지 쏟아져 나온 책 중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만큼 포괄적이면서, 서구 편향적이지 않게 정리한 책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10대에 미국으로 이주해 살며 저술 활동을 펴고 있는 저자 타밈 안사리(63)는 6세기 무함마드의 출현부터 이슬람 제국의 건설, 십자군전쟁과 몽골의 침략 등을 거쳐 최근 몇 세기 동안 이슬람을 황폐하게 만든 이념 운동과 9ㆍ11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세계의 거대한 흐름을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가미해 가며 빠른 호흡으로 펼쳐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전까지 긴 역사는 지리적으로 지중해권과 중국 사이에 있어 저자가 '중간세계'라고 부르는 이슬람권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이해하는데 그만이다. 이후의 현대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비롯해 여러 이슬람국가의 독립, 이후 사회변화와 정치운동 상황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다. 9ㆍ11의 토양이 됐던 이슬람 원리주의가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슬람 역사와 함께 일반적으로 서구 시각으로 해석해 왔던 사건을 이슬람 세계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대비해 보여주며 저자는 '무슬림이 싸우는 대상은 미 제국주의가 아니라 자신들의 과거'이며 혁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도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상적인 이슬람공동체'라고 지적한다. '지하드' 역시 서구가 윤색한 것처럼 성스러운 '전쟁'이 아니라 이슬람식 사회정의운동이 본뜻이다. 그리고 옛 소련 붕괴 이후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처럼 서구식 자유와 민주주의가 모든 것의 귀결이라고 믿는 지식인들에게 이렇게 경종을 울린다. 9ㆍ11이 증명한 것은 후쿠야마가 틀렸다는 것이며, 적어도 이슬람에게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라고.
[전문가가 본 이 책/안정국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연구교수]서구가 내친 또다른 세계사를 찾아서 [동아일보] 2011.08.27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명운이 다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겨울 너무도 갑작스럽게 터진 튀니지 민중시위와 독재자 축출은 중동 연구자들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고, 뒤이은 이집트의 같은 사례는 연구자들을 감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 후 리비아 예멘 시리아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변혁운동 과정은 수많은 시민의 희생을 낳고 있지만 이 파장이 어디에까지 미칠지, 사회문화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수반할 것인지는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촌각을 다투며 급변하는 현 이슬람 세계의 정세를 넓은 세계사적 흐름의 안목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도 ‘이슬람의 세계사적 통찰’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면 말이다. ‘세계사’라는 이름을 갖고 나왔으니 이 세계의 역사를 해석한 사람이 누구인지 우선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타밈 안사리, 완벽하게 이슬람적인 이름이다. 그는 아프간계 미국인 작가이자 교사로 저명한 무슬림 집안 출신이다. 어머니가 미국인이며 열여섯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이후 미국에서 줄곧 살면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문화와 미국 서구문화를 두루 경험했다. 그러니 이 책은 ‘타밈 안사리의 눈으로 본 세계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잊혀진 역사’라는 제목으로 아랍어로도 번역 출간된 이 책은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다룬 교양 논픽션에 가깝다. 역사적 사실들을 분석한 학술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학술적 목표를 가지고 구성된 역사서에 건조하게 나열된,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새롭게 읽어낸 것이다. 책의 내용은 서로 맞지 않는 두 줄기의 세계사, 즉 유럽 세계사와 이슬람 세계사가 교차하며 발생한 마찰에 관심을 집중한다.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서구와 이슬람세계는 지난 1500년 동안 지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다. 그럼에도 저자는 “대부분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현재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와 서구는 서로 따로 존재하는 두 개의 우주” 같았고, “17세기 후반에야 두 내러티브가 교차하기 시작”했지만, “양쪽은 각자 별개의 방에서 제각각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독특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판단에 충실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저자는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가’를 파헤치기보다는 무슬림들이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인형극과 같은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니 일면 무척이나 교활한 책략가로 보이는 살라딘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통치자로 등장하고 있다고 해서 특별히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야기이니 읽기가 수월하다. 서문에서 색인까지 600쪽이 넘는 비교적 두툼한 책이지만 일단 읽어가기 시작하면 언제 이 책을 다 읽었는지 의아해질 정도로 쉬이 읽혀진 데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읽어온 세계사 책에서 ‘생략된 이야기’들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니 이 책으로 그동안 독자들이 엮어 놓은 세계사 날줄에 여러 가닥의 씨줄이 잘 먹어들어 가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중세와 근대역사를 다루고 있으나 이야기는 중세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방점은 근대역사에 찍는다. 그러니 ‘지금’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이 있다면 우선 이슬람 세계의 근대 개혁운동을 다루는 부분을 따로 떼어놓고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무함마드 압두, 자말루딘 알아프가니, 하산 알반나, 사이드 쿠틉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이슬람 세계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추천사를 보니 이 책이 ‘이슬람공포증을 치료하는 해독제’가 될 것이라고 한다. 개신교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교세를 가진, 그야말로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종교가 이슬람인데 공포증을 갖는다면 여러모로 불편할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것으로 공포증을 해독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진단시약 정도는 가지게 된 셈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슬람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세대 간에 서로 주고받는 ‘역사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재미가 자못 크다.
'중동'은 서유럽 시각… '중간 세계'라 불러야 [부산일보] 2011.08.27
한국도 이슬람 세계와 꽤 가까워졌다. 이슬람권 국가에 전쟁이나 혁명이 터지면 한국 기업도 손익을 따져야 한다. 이슬람 소식도 잦아졌다. 최근 이슬람 국가의 혁명을 한국 민주화에 견주는 해설 기사도 등장했다. 그런데 이슬람 세계의 소식이 실상과 맞지 않고 그 의미도 다르다면? 물론 국내에도 이슬람 역사가 서구의 시각에 편중되고 있다는 비판적 인식이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이슬람 역사와 가치, 사상은 여전히 낯선 영역이다.
이슬람을 중심에 둔 세계사 흐름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다르다'는 화두를 중심에 놓고 전개되는 책이다. '세계사'라고 하지만 세계 역사가 아닌 이슬람의 역사다. '이슬람의 세계'인 셈인데 이를 이슬람의 눈으로 다루고 있다. 오늘의 일을 알려면 모슬렘들이 어떤 역사를 지나왔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그래서 책은 이슬람 세계를 규정하는 데서 첫걸음을 뗀다. 흔히 말하는 '중동'은 서유럽에서 보는 경우를 가정한 것이다. 하지만 인더스 강에서 이스탄불까지 이르는 전체 영역이며 지중해권과 중국 사이에 있기 때문에 '중간 세계'가 더 적합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슬람에서 본 세계사의 흐름은 서구의 시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도 강조한다. 이슬람의 눈에서 본 세계사는 '고대(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이슬람의 탄생-칼리프조(보편적 통일체를 향하여)-분열(술탄 제국의 시대)-재앙(침략자들과 몽골족)-부활(3대 제국의 시대)-서양의 동양 침투-개혁 운동-세속근대주의자들의 승리-이슬람주의의 반발'로 전개된다.
'문명의 탄생(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고대(그리스와 로마)-암흑시대(그리스도교의 부상)-부활(르네상스와 개혁)-계몽(탐험과 과학)-혁명(민주주의, 산업, 기술)-민족국가의 부상(제국을 향한 투쟁)-제1,2차 세계대전-냉전-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승리'로 이어진 서구식 세계사와 다른 흐름이다.
이슬람의 가치와 의미, 체계를 보는 시각도 흥미롭다. 저자는 이슬람은 종교이면서 사회 운동이자 사회 프로젝트라고 소개하고 있다. 무함마드가 남긴 다섯 가지 의무, 이슬람의 다섯 기둥만 봐도 그렇다. "모슬렘은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하나의 믿음이나 신앙체계가 아니라 식이요법이나 운동 프로그램처럼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다."
책 곳곳에 이슬람 역사와 서유럽 역사를 대비하는 장면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두 세계가 유사하기도, 본질적으로 다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슬람의 사회 체계와 가치의 진실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다. 또 이슬람 역사와 문화가 서유럽 못지 않다는 자부심을 내비치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3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가 남긴 방대한 장서 덕택에 1천200년 전 서유럽 일상보다 소상히 알려졌다는 점이 그렇다. 페르시아가 정복한 땅에 종교와 언어의 자유를 유지하는 정치력도 높이 평가한다. 책은 마지막까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맞부딪히는 상황을 보는 시각을 새롭게 하려고 애쓴다.
"현대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갈등을 '문명의 충돌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 맞지 않는 두 줄기의 세계사가 교차하며 발생한 마찰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모슬렘은 어딘가로 향하는 한 무리다. 유럽인과 유럽에서 분가한 사람들은 다른 어딘가로 향하는 한 무리다. 그런데 두 무리의 사람들이 길이 교차하면서 부딪히고 부서지는 사건들이 벌어졌으며, 그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색안경 벗고 이슬람을 보다 [이데일리] 2011.09.02
기원전 335년.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더는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조그만 도시국가 마케도니아의 왕에 오른다. 그리고 334년 페르시아 원정에 나선다. 이후 승승장구하며 페르시아를 몰락시킨 알렉산더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그러나 이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 알렉산더는 세계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정복했던 페르시아를 이긴 것에 불과하다. 페르시아는 바로 예언자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의 조상들이다. 또 하나의 예가 있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은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의 발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슬림의 눈으로 봤을 때 유럽의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의 발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증기기관의 활용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이미 15세기 이슬람 세계에서는 증기기관으로 쇠꼬챙이를 돌려 양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먹었기 때문이다. 제목 그대로 이슬람의 입장에서 세계사를 조망한 책이다. 저자는 1948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이슬람 집안에서 태어나 1964년 미국으로 이민, 대학을 마쳤다. 아버지는 카불 대학의 교수였고 어머니는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한 최초의 미국 여성이었다. 그만큼 이슬람 사회와 이른바 서구 사회를 동시에 경험하며 두 세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체화할 수 있었다. 책이 나오게 된 데에는 9·11 테러가 원인이 됐다. 9·11로 인해 서구의 언론이나 유대세력들은 이슬람 사회를 폭력집단으로 그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쪽을 모두 경험한 저자로서는 그 상황에 대해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유도한 가장 큰 원인은 서구사회가 이슬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슬람의 역사를 이슬람인들 스스로 서구에 제대로 알리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따라서 저자가 책을 쓰며 가장 중요시한 관점은 역사의 `내러티브`다. 즉 이슬람 세계와 서구는 서로 따로 존재하는 두 개의 우주 같았고 각자 다른 이야기를 갖고 흘러가고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혁명들은 서구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그들의 내러티브를 이슬람에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이 정교한 역사서라고 할 수는 없다. 무슬림들이 역사를 배우는 방식인 인생극 형식으로 1500년 이슬람의 역사를 풀어내서다. 더군다나 내용의 절반이 이슬람교 탄생의 배경과 초기 역사에 대한 이야기라 세계사보다는 이슬람교 개론서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시사하는 바는 많다. 특히 현대 세계를 파괴하는 갈등을 ‘문명의 출동’로 이해하기보다 서로 맞지 않은 두 줄기의 세계사가 교차하며 발생한 마찰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는 저자의 주장은 충분히 공감이 된다. 충돌은 둘 중 하나의 파괴를 뜻하지만 마찰은 상호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2011년, 재스민 혁명이 아랍 세계 전역을 뒤흔들었다. 지은이는 중동의 움직임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보는 시각은 철저히 서구의 내러티브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비판한다. 현재 무슬림들이 싸우고 있는 대상은 자신들의 과거이며 그들이 혁명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은 이상적인 이슬람 공동체라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어쩌다 전쟁과 테러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들이 되찾으려는 공동체 지향의 전통은 무엇인지를 서구 편향의 시각을 벗어나 읽을 수 있다.
"테러의 파괴력 전쟁보다 훨씬 강해… 9·11, 승자는 없었다" [한국일보] 2011.09.05
이슬람 시각으로 본 9·11, 아프간계 미국인 칼럼니스트 안사리 - 무슬림 9·11 의미 몰라 삶의 터전 유린한 외국군대 그저 고통주는 침략자일뿐. 화해해야 평화로운게 아니라 모두가 평화를 원해야 비로소 화해할 수 있다. 9ㆍ11 테러의 고통이 미국인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전쟁이 잦은 무슬림에게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고의 시간을 보낸 이슬람계 미국인에게도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이슬람의 시각에서 본 9ㆍ11 10주년은 어떤 의미일까. 타밈 안사리(63)는 테러와의 전쟁이 한창인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이슬람 이민 1세대다. 이슬람의 역사와 철학을 다루는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그는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9ㆍ11의 교훈은 테러의 파괴력이 전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새로운 힘의 역학구도가 필요한 시점에 서구와 이슬람 세계의 대결구도를 고착화한 것이 9ㆍ11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자는 없었다. 미국은 두개의 전쟁(이라크ㆍ아프간전)을 통해 아랍 세계와 대결했지만 이는 모든 무슬림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오사마 빈 라덴의 의도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대다수 무슬림은 사실 9ㆍ11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삶의 터전을 유린하고 재산을 빼앗는 외국 군대는 아프간을 침탈한 옛 소련처럼 그저 고통을 안겨주는 침략자일 뿐이다. 안사리는 "부시가 원했던 승리도, 오바마가 원하는 종전도 모두 쉽지 않은 문제"라며 "미국은 전쟁의 굴레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테러의 원인을 주로 경제적 관점에서 찾았다. 안사리는 "중동국가들은 서구의 산업화를 따라잡기 위해 엘리트 위주의 경제발전을 추구했다"며 "혜택을 공유하지 못한 하층민이 분노를 표출할 방법은 종교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안사리는 미국인의 의식 속에 잠재된 이슬람에 대한 증오도 단순히 9ㆍ11에서 파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분쟁의 뿌리가 된 경제적 이슈는 이제 피해자인 미국인의 삶도 지배하고 있다. 그는 "지난 10년간 미국의 경제력이 약화하면서 미국인들은 고용 불안감을 상쇄할 목적으로 자신과 남을 구분짓는 동류의식을 키웠고, 유독 서구와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이슬람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분석했다. 반(反)무슬림 감정은 미국의 무슬림, 특히 젊은 세대에게 극심한 혼란을 일으켰다. 그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미국식 문화에 적응하길 원하지만 사회는 이방인으로 취급할 뿐이며, 집에서는 '네 조상들의 삶의 방식을 버린 것이냐.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 친다"고 말했다. 일본인의 차별에 맞서 싸운 재일동포들이 3, 4세대에 이르러 풍화(風化ㆍ정체성 혼란) 현상을 겪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안사리는 "서로 다른 가치가 화해할 때 평화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뒤집는다. 대신 모두가 평화를 원해야 비로소 화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아랍권을 휩쓴 재스민혁명도 특정 가치체계와의 충돌이라기 보다 세속적 관심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며 "이들이 말하는 혁명은 평화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화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타밈 안사리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태어나 16세 때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남동생이 이슬람 근본주의에 심취한 것을 계기로 이슬람 문화와 역사에 천착해 왔다. 9ㆍ11테러 당시 이슬람 시각으로 현상을 풀어 낸 글이 화제가 되면서 명성을 얻었다.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저널리스트인 저자 타밈 안사가 무슬림들이 역사를 배우는 방식인 ‘인생극’ 형식으로 쓴 책으로, 이슬람 눈으로 본 1500년의 세계사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슬람과 서구를 갈라놓은 여러 단절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원인을 추적하고, 이슬람이 민주주의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서구와 다르다고 惡이고 후진국인가? [매일신문] 2011.09.10
9`11 테러 직후 부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리스트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며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2011년 봄, 빈 라덴이 죽었고, 재스민 혁명의 물결이 아랍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빈 라덴이 사살됐을 때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밤새 축제를 벌였다. 9`11 이후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적국의 테러리스트들을 색출하기 위해 용의자를 고문해도 좋다, 적을 감금하고 가족에게 연락하지 못하도록 해도 좋다, 테러리스트를 도운 적국의 시민을 체포해도 좋다는 의견이 크게 늘어났다.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파괴한 세력을 응징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것이다. 지은이 타밈 안사리는 “이것은 단지 서구의 시각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은 공동체 중심의 삶을 살아왔으며, 개인주의적 자유와 민주주의는 전통과 문화를 어지럽히는 이질적인 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슬림이 싸우는 대상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가 아니라 그들의 과거이며, 무슬림이 피를 바치면서까지 얻으려고 하는 것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상적인 이슬람 공동체”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또 현재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을 ‘민주화 운동’으로 보는 시각은 철저히 서구의 시각, 서구의 내러티브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규정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서구인들은 지구상의 모든 사회가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은 서구의 일부가 된다는 가정 아래 현재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강제로 끼워 맞추려 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서구세계가 이슬람 세계에 주입하려고 애쓰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무슬림들에게는 자신들이 지켜온 오랜 전통과 가치, 부족 네트워크를 잘라내는 칼로 느껴질 뿐’이라고 강조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무슬림의 인식은 자유 민주주의 사회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인식과 사뭇 다르다. 어쨌거나 무슬림과 서구인은 인식의 출발이 다르고, 따라서 양자는 (적어도 현재까지는) 상대를 이해하거나 신뢰하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서구 언론에 비친 이슬람주의자들의 이미지는 자살폭탄테러범, 여성의 머리에 검정 천을 씌우는 문화,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불통 테러리스트다. 한국사회 역시 이슬람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매우 제한돼 있고, 이슬람 세계에 대한 정보의 대부분을 서구 언론에 의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인식 역시 상당히 편향돼 있을 수 있다. 책은 ‘오늘날 서구와 이슬람 사회를 파괴하고 있는 적개심 뒤에 숨은 움직임과 사건들을 통찰력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1천500년의 역사를 지닌 이슬람의 창시 내러티브, 예언자 무함마드와 초기 칼리프의 일생에서 출발해 그들이 펼친 광대한 제국의 시대, 최근 몇 세기 동안 이슬람을 황폐하게 만든 이념운동의 흐름, 9`11을 낳은 근대의 복잡한 갈등, 이슬람 공동체의 진화 등을 체계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오랜 세월 무슬림을 움직여온 이야기이며, 서구의 세계사에서는 삭제됐거나 외면됐으며, 때로는 척결의 대상이 된 이야기이지만, 1천500년간 세계사의 하나의 커다란 줄기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는 “지하드주의자의 자살폭탄 테러를 더 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책은 반대편의 시각을 활짝 열어주는 귀중한 도구"라고 평했다. 지은이 타밈 안사리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1948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불 대학교 교수였고, 어머니는 아프간 남자와 결혼해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한 최초의 미국 여성이다. 1964년 미국으로 이민했고, 줄곧 세계사 교과서 편집자로 일했다. 잡지칼럼, 소설, 어린이 책 등을 쓰고 있다. 무슬림들이 역사를 배우는 방식인 '인생극' 형식으로 쓴 책으로, 이슬람 눈으로 본 이슬람의 창시 내러티브, 무함마드와 칼리프들의 일생부터 최근 몇 세기 동안 이슬람을 황폐하게 만든 이념 운동의 흐름을 살펴보고, 9.11을 낳은 근대의 복잡한 갈등에 이르는 이슬람 공동체의 진화를 흡입력 있는 문체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건설회사에 들어가 사우디아라비아와 말레이시아, 이 두 이슬람 국가에서 4년 반을 근무하면서 이슬람 문화와 신앙 태도 등을 직접 보고 무슬림(이슬람교도)들과 친구로 지내기도 하였다. 그들의 최고 성지인 메카(Mecca) 근처에 근무할 때에는 전 세계에서 온 하지(Hajj) 순례 행렬을 직접 목격하는 소중한 경험도 하였다.
이렇게 그 문화를 접촉하고 이해할 기회가 많았지만 그래도 막상 ‘이슬람 세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의 중심에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하긴 나뿐 아니라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이 특히 이슬람에 대해서는 편견을 갖고 있거나 무지에 가까운 상태에서 마구 비판과 비난을 쏟아내고 있을 것이다. 왜? 대부분 서구의 입장에서 들여다보고 그들의 이해관계로 해석한 정보와 지식에 의존하고 있어서, 혹 관심과 사랑을 갖고 그 세계를 깊고 바르게 알고 싶어도 그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 출신 어머니와 카불대학교 교수 출신의 아프간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 10대 후반까지 카불에서 살았던 미국 이민자 타밈 안사리(Tamim Ansary)가 쓴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가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보는 내 시야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한 가지 사례를 보자. 배우 피터 오둘이 영국 첩보원으로 나온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사실(史實)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서국 제국주의의 입장만 있고 그 배경이 되었던 중동 역사의 진실(眞實)은 감추어져 있는 이 영화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잘못 안내하였던 것이다. 로렌스(T. E. Lawrence)와 같은 “영국 첩보원들이 (적대 관계에 있던)양쪽 아랍 가문과 약속을 하던 바로 그 시간, 두 명의 유럽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수와 피코는 비밀리에 만나서 지도와 연필을 앞에 두고 고상하게 차를 들면서,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승리를 거둔 유럽 세력끼리 그 지역을 어떻게 나누면 좋을지를 결정했다. 사이크스가 대표하는 영국은 어느 부분을, 피코가 대표하는 프랑스는 어느 부분을 가지며, 러시아의 이익을 어디에서 묵과해주면 적당할지에 관해 두 외교관은 합의를 봤다. 신기하게도 아랍인이 어느 부분을 가질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물론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주변 지역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펼쳤던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에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우리들의 삶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우리 땅의 지배권을 나눌 때에도 ‘고상하게 차를 마시며 지도위에 선을 쭉 그리는’ 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이 순간에도 세계 지도를 놓고 ‘거대한 장기’ 놀이를 하는 세력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장기판에서 졸(卒)이 되어 아무렇게나 버림을 받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 역사인 국사뿐 아니라 타밈 안사리처럼 세계역사도 우리 눈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슬람 교리는 원래 합리적 중세땐 유럽보다 문명 우월
지난 3일 부산 해운대 추리문학관에 '추리문학관 독서클럽' 회원들이 모였다. 2009년 결성된 이 독서동아리는 매달 첫째, 셋째 수요일에 독서 토론회를 연다. 이날은 타밈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읽고 생각을 나눴다. 부정적으로만 묘사됐던 이슬람의 이미지가 실상과 다르며 서구에 의해 왜곡됐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슬람은 초창기에 만민 평등 공동체를 지향했어요. 교리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이었고, 종교의 자유도 많이 줬다고 합니다.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선한 얼굴을 갖고 있는 듯해요. 일부 세속적이고 과격한 이슬람주의자들이 이슬람 정신을 변질시켜 분열을 가져왔던 것이죠."(한보경)
"제2대 칼리프인 우마르의 시대에 이슬람 공동체에서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았어요. 여자들은 남자들과 함께 일했으며 사회생활에 참여했죠. 심지어 우마르는 메디나 시장의 우두머리로 여자를 임명했어요. 현재의 단면이 아닌 전체를 봐야 역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죠."(김정섭)
"이슬람 이미지는 고집불통, 비이성적, 여성 인권 무시였습니다. 저자가 묘사한 이슬람 초기 4대 칼리프의 모습에서 이런 부분이 편견이었음을 알게 됐어요.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들었어요."(김보현)
토론회를 지켜보고 있던 김성종 소설가가 화두를 던졌다.
"중세에는 이슬람이 유럽보다 문명적으로 더 우월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후진국이 됐을까요? 식민지 정책을 통한 서구 열강의 착취가 큰 영향을 줬다고 봅니다."
"근대로 오면서 이슬람 내부에서 정치적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죠. 이 과정에서 극단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면서 이슬람 세계와 서구의 대결을 부추겨 영향력을 확대했죠."(박종탁)
"서구가 성지 탈환을 위해 감행한 십자군 전쟁에는 유럽인들의 잔악성이 드러나 있어요. 이슬람의 극단적 행동은 이처럼 과거에 침략당하면서 이뤄진 것일 수도 있어요. 초기 이슬람은 대의를 위해 침략자들과 싸우는 전쟁도 지하드(성전)라고 의미를 부여했죠."(김실비아)
"가장 앞선 문명국이었던 이슬람이 산업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한 이유를 생각해 봤어요. 부유층이 모든 것을 가져서 산업혁명과 기계화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아요."(강귀희)
책을 읽은 느낌은 이슬람 세계만큼 다채로웠다.
"서로 다른 문명과 종교를 인정하자"(김혜연), "작가의 스토리텔링이 흡인력 있었다"(김외은), "극 형식을 도입해 역사를 객관적으로 썼다"(문혜정), "이웃 종교에 관대해야 하고 대화와 소통이 필요하다"(고영애), "이슬람 세계가 중세 전까지 이처럼 발달했는지 몰랐다"(이옥조), "스페인 남부 이슬람 문명에 감동받았다"(최애경), "고아 출신인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점이 흥미로웠다"(이기용) 등이었다.
유럽 중심 시각 벗어나기
이번 주 책은 타밈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뿌리와이파리)이다.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이슬람 시각에서 본 1천500년의 세계사를 생생하게 그려 낸 책이다. 추리문학관 독서클럽이 추천했다. 저자는 이슬람 창시 과정, 예언자 무함마드와 칼리프의 일생, 광대한 이슬람 제국들의 시대, 이슬람을 황폐하게 만든 이념운동의 흐름 등을 살펴본다.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그의 이야기는 이슬람과 서구를 갈라놓은 원인을 알려 주고 이슬람이 민주주의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저자는 2011년 아랍 세계 전역을 뒤흔든 '재스민 혁명'을 언급하며 무슬림들이 싸우고 있는 대상은 미 제국주의가 아니라 자신들의 과거이며, 그들이 혁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상적인 이슬람 공동체라고 말한다. 따라서 서구에서 이슬람 세계에 주입하려고 애쓰는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무슬림들에게는 자신들의 오랜 공동체 지향적 전통과 부족 네트워크를 잘라 내려는 칼로 느껴질 뿐이라고 비판한다.
[박상현(선임기자)의 책 세상] 모든 길은 '바그다드'로 통한다 [국제신문] 2015.01.16
2009년 미국에서 출판된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매우 균형 잡힌 이슬람 안내서다. 저자 타밈 안사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미국에 정착한 이슬람 전문가다. 아프가니스탄의 유서 깊은 무슬림 가문에서 태어난 그의 출신 배경, 역사학과 철학으로 잘 다져진 지적 배경은 우리를 이슬람 세계로 편안하게 안내한다. 그의 목소리는 결코 격앙되는 법이 없고 시각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야기는 아라비안나이트처럼 흥미진진하다. 지구본을 돌려가면서 타밈 안사리의 안내를 따라가면 가장 영적이면서 번성했던 한 세계를 만나게 된다. 아라비아 하면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부드럽게 물결치는 모래언덕의 사막이다. 사막의 밤하늘에 명멸하는 별들의 우주쇼는 일찍이 그들을 영적인 삶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이런 환경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유대교가 모두 이곳에서 태어나고 번성하게 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이슬람교는 가장 늦게 출발했지만 가장 빠르게 전파됐다. 첫 50년 동안 이슬람은 인도양 서쪽 모퉁이에서 지중해의 동쪽 끝, 나일강 카스피해 페르시아만까지 확장해나갔다. 저자가 중간세계라고 부르는 지중해에서 벵골만까지의 권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오직 한 분의 신이 계시다. 그분의 뜻에 따르라. 그러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슬람의 목표는 개인의 구원을 넘어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정의로운 공동체 건설이다. 종교와 정치가 일치된 세계라는 말이다. 이는 이슬람이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가장 눈에 띄는 점이다. 또 이슬람교가 가장 빨리 가장 넓게 확산된 요인이기도 하다. 그들은 많은 정복전쟁을 벌였지만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배교는 반역으로 간주했다. 이상적인 공동체 건설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슬람의 적으로 삼았다. 또 이슬람의 적을 무찌르는 투쟁인 지하드에 참여하는 것은 무슬림의 의무다. 이런 종교적 배경 안에는 배타적인 전쟁과 테러의 씨앗을 안고 있는 셈이다.
무슬림들의 종교와 문명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서양 사가들은 아바스 왕조(서기 737~961) 첫 200년을 이슬람의 황금시대로 평가한다. 이 아바스 왕조의 수도였던 바그다드는 서기 765년 완성됐다. 지리학자 야쿠비의 기록에 따르면 바그다드는 거리와 골목을 합쳐 6000개가 있었으며 모스크는 3만 개, 목욕탕은 1만 개였다. 이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 바그다드로 통했다는 말이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남긴 가르침을 깊이 연구하면서 학문이 발전했고, 현대수학과 현대과학의 기반을 만들었다. 이슬람 세계는 1400여 년 역사를 통해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몇 차례 대재앙을 겪었다. 100년 동안 이어진 십자군 전쟁과 칭기즈칸의 침략은 이슬람 세계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이런 참혹한 대재앙보다 더욱 심각한 상처는 제국주의 서방과의 만남에서 생겼다. 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한 유럽은 1850년에 이르러 이슬람 세계 전체를 수중에 넣었다. 식민 지배를 통해 이슬람 세계를 철저하게 수탈했다.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에게 넘겨준 것이나 20세기 내내 이어진 자원 침탈과 내정 간섭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치욕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서방세계의 이슬람 세계 침탈행위는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 자부심까지 짓밟을 만한 것이다. 타밈 안사리의 눈을 따라서 지금까지 잘 몰랐던 한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얼마나 서구적 시각으로 세계사를 보고 있는지도 깨달았다. 그러나 책을 덮으면서 묵직한 아픔도 함께 느낀다. 이슬람의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