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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마다 알록달록 화장을 한 초콜릿꾸러미가 젊은이들을 유혹해대고 있다. 발렌타인데이가 가까워졌나 보다.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솔로들에게는 피난처가 필요한 날. 그러거나 저러거나, 담달 화이트데이 때는 여자들이 사탕꾸러미를 사기 위해 쌈짓돈을 풀어야 할 차례다. ‘여친’을 가진 남자들이라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요런조런 기념일을 챙기기 위해 얄팍한 지갑을 꺼내야 한다. 통상 대한민국 여자들은 일 년에 많아봐야 두 번 남짓(‘남친’ 생일 포함) 기념일을 챙기는 편이다. 그러니 세상의 여자들이여, 화이트데이만큼은 부디 망설이지 말고 ‘쿨’하게 팍팍 좀 쏘시라. 딸 없는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이다.
화이트데이가 뭔가? 족보나 좀 살펴보자. 남자가 여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발렌타인데이의 존재 근거는 그런대로 뚜렷하다. 2월 14일은 3세기 후반에 순교한 기독교의 성 발렌티노의 축일(세례 받은 날)이다. 그의 순교를 추모하는 의미로 기독교권에서 오래 전부터 이 날을 기념해 왔으니 족보에 근본이 있다. 이 양반이 순교한 이유는 로마 병사들의 결혼이 금지됐던 시대에 한 병사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는 것 때문이었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의 일이니 기독교인들은 반체제 세력이자 이교도였을 터인 즉 즉 그럴 만도 했다.
그나저나 화이트데이의 족보가 궁금하여 이 시대의 대표적 지식인인 ‘네선생(Naver)'께서 가리키는 대로 이곳저곳 헤엄쳐(web-surfing) 다니다가 겨우 족보를 발견하긴 했는데… 아놔! 근본이 참으로 황당하고 맹랑하다. 화이트데이란 성 발렌타인Valentine 신부가 순교한 한 달 후인 3월14일, 한 젊은 남녀가 로마법에 굴하지 않고 평생 사랑을 맹세했음을 기념하는 날이라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일본 제과조합 간부들이 매출증진과 재고처리를 위해 머리를 짜내 지어낸 공갈(?)이요 사기였다. 아이고, 의미 없다!
‘발렌타인데이’ 하니 문득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이 떠오른다. 재즈 트럼펫 연주가 겸 가수였던 쳇 베이커Chet Baker가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던 도시이다. 쿨재즈Cool Jazz의 대표 주자 쳇 베이커. 쿨재즈가 무언가? 여자한테 채인 남자의 심리상태를 예로 들어 풀이하자면 이렇다. ‘나 죽겠어. 내 맘 좀 알아줘!’ 하고 용천 떠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마음이 서럽고 아파 미칠 노릇이지만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덤덤한 척 폼 잡는 부류가 있는데, 후자의 짓거리를 연상하면 쿨재즈의 이미지와 ‘딱’이다. 노래와 연주에서 ‘뚜비뚜바 뚜뚜바’ 하는 따위의 스캣scat이나 현란한 임프로비제이션improvisation(즉흥연주, ‘애드립’이라고들 하지만 옳은 표현이 아니다)이 배제되는 건 당연하다. 한마디로 폼생폼사 심플하고 ‘쿠∼울’해야 하니까. 그래도 이해가 안 되신다면 나도 어쩔 도리 없다.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었나? 연주면 연주, 보컬이면 보컬, 준수한 외모까지 갖추었던 젊은 시절의 쳇 베이커. ‘재즈계의 제임스딘’이라는 애칭을 가졌을 만큼 많은 여성 ‘빠’들이 그를 보고 무지하게들 오줌을 지렸었다. 그러나 허걱! 사진과 영상으로 남아있는 말년의 몰골을 보고 나면 그의 젊은 시절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얼굴은 가뭄에 말라비틀어진 논바닥처럼 깊게 주름져 있고 앞니는 위아래가 다 빠져 있다. 무려 40년이나 ‘약쟁이’로서 찌든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열광하던 관중들이 빠져나가나면 치명적인 허탈감을 느낀다는 점이 무대에 서는 사람들의 약점이 아니던가. 그는 외로움과 허망함을 채우기 위해 악마와 거래했다.
“The melody. It sounds like saying our story 그 노래 멜로디가 꼭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독일 하노버 공연을 마친 다음 라이브 음반 작업을 하던 날, 국제전화로 이렇게 횡설수설했을 때 그의 애인 다이앤 바브라는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던 쳇 베이커의 운명을 짐작했을 게 분명하다. 그로부터 두 달 뒤 1998년 5월 13일 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호텔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하노버 공연 실황 음반은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 되었고, 다이엔과 통화하면서 마치 자기들 이야기 같다고 했던 곡이 <My funny Valentine>이다. 자칭 타칭 잘 나간다는 가수들 치고 이 곡을 커버하지 않은 이 없을 만큼 대중음악계에서는 명곡으로 통한다. 3옥타브를 넘나드는 가창력과 함께 '재즈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엘라 피츠제럴드Ella Jane Fitzgerald 의 버전도 만만치 않지만 나는 때론 잔잔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절묘하게 전개되는 쳇 베이커의 곡을 단연 으뜸으로 친다.
만일 사탕꾸러미 따위에 돈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호젓한 장소를 물색하여 남친 어깨에 고개를 살짝 올린 채 함께 이 곡을 감상해 보시라. 법적으로 책임질 수는 없지만…, 둘의 관계가 더욱 물 샐 틈 없는 탄탄한 사이가 되리라 내 장담한다.
My funny Valentine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나의 발렌타인
Sweet comic Valentine 달콤하고 유쾌한 발렌타인
You make me smile with my heart 당신은 내 마음까지 미소 짓게 하네요
…중략
But don't change a hair for me 하지만 날 위해 머리스타일은 바꾸지 말아줘요
Not if you care for me, stay little Valentine 날 위해 소녀 발렌타인 그대로 있어줘요
Each day is Valentine's day (우리에겐) 나날이 발렌타인데이랍니다
암스테르담이 쳇 베이커 마니아들의 성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뭐니 뭐니 해도 이 도시의 아이콘은 단연 튤립tulip이다. 네덜란드 국가 수출 총액의 무려 70%를 차지하는 산업이 튤립시장일 정도이다. 세계 최대의 튤립시장이 암스테르담에 있으며, 매년 5월 튤립축제가 열리면 도시 일대가 튤립의 물결을 이룬다. 튤립이 곧 네덜란드요 암스테르담이다.
아시는 것처럼 튤립은 구근식물로 빨간색·노란색 등 여러 빛깔로 꽃을 피운다. 기본 꽃말은 사랑이지만 색깔에 따라 뜻이 조금씩 다르다. 빨강색은 ‘사랑의 고백’이요, 보라색은 ‘영원한 사랑’이다. 노란색은 ‘가망 없는 사랑’, 하얀색은 ‘실연’, 검은색은 ‘짝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튤립을 선물할 때 색을 잘 골라야 한다.
16세기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을 거쳐 유럽으로 건너온 꽃이다. 물 건너온 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네덜란드에 튤립이 들어온 후 방귀깨나 뀐다는 암스테르담 귀족들이 취미 삼아 물 건너 온 이 꽃을 귀히 여기어 심고 가꾸기 시작했다.
지체 높은 양반들이 즐기는 고상한 취미는 아랫것들한테 선망의 대상이 되는 법. 뭐, 사회 풍조라는 게 대개 그렇지 않은가. 중산층 사람들도 슬며시 마음만의 신분 상승을 꿈꾸며 마당에 튤립을 심기 시작했다. 하층민들이라고 그 마음이 다를까? 누추한 판잣집 처마 밑에도 튤립이 자라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꽃 가꾸기가 그럭저럭 고상하고 아름다운 행위였을 게다. 하지만 귀족들의 심사가 불편해진다. 어느 귀족께서 이렇게 중얼거리지나 않았을까?
“빌어먹을, 개나 소나 다 튤립이여.”
더 고귀해지려면 차별화가 필요했고 결국 그들이 찾아낸 것은 돌연변이 구근球根이었다. 하지만 돌연변이가 어디 흔한 존재이던가? 관심을 가지는 부자가 많아지니 슬슬 구근 값이 치솟기 시작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튤립의 명예에 먹칠을 한 몹쓸 존재가 등장했으니 자본의 개입이었다. 수요가 공급을 앞지를 때 가격이 오르는 것은 상식. 너도 나도 달려드는 바람에 구근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하자 발과 눈치가 빠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 이 보물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관상이 아닌 투기 목적으로.
증권거래소는 해가 아니라 자본의 움직임으로 광합성을 한다. 그들이 기회를 놓칠 리 있겠는가. 아예 돈 먼저 받고 물건은 나중에 주는 ‘선물거래’ 형태로 상장 품목에 올렸다. 이제부터는 작전세력들의 시대, 작전의 기본은 가격 조작이 아니던가. 그들은 교묘하게 튤립에 등급을 매겨 증시에 내놓았다. 대중들에게 인기 있던 해군제독들의 이름을 빌려 ‘리프킨 튤립’ ‘반 데르 아이크 튤립’ 등의 이름을 붙여 가격을 높였다. 당시 유럽 제일의 해상강국이던 네덜란드였던 만큼, 이 나라에서 해군 제독의 인기는 오늘날의 방송인 유재석 못지않았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리프킨 튤립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고 구근 한 개가 4천4백 플로린으로 치솟기도 했다. 황소 40마리를 구입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큰돈을 들이고도 어렵사리 구근을 구하고서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 얼간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마구 부풀어 오른 거품은 시간이 지나면 꺼지는 게 당연지사. 한때 소 40마리 값에 달했던 구근 한 뿌리는 알사탕 한 개의 가치로 추락했다.
암스테르담은 바로 난장판이 되었고 투자자들은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튤립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1634년, 네덜란드의 튤립시장 거품현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탐스럽고 아름다운 꽃의 대명사 튤립에게도 알고 보면 그처럼 한때 인간들의 탐심에 의해 ‘추악한 자본주의의 꽃’ 노릇을 했던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이론상으로 투기와 투자의 다른 점은 부가가치 생산 여부에 달려있다. 명절이면 전국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고스톱’. 판이 끝난 다음 잃은 돈과 딴 돈을 셈해 봐야 아귀가 딱 들어맞는 법이 없다. 딴 사람은 주머니에 든 돈을 축소하려 하고, 잃은 사람은 늘 판돈보다 더 많이 잃었다고 징징거린다. 허나 ‘고스톱’ 판에서 10원을 딴 사람이 있으면, 다른 누군가는 반드시 10원을 잃게 마련이다. 이게 제로섬Zero-sum 게임 즉 투기의 법칙이다. 반면에 잘 팔리는 막걸리 공장에 10원을 투자하면 생산자도 투자자도 그 이상의 가치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포지티브 섬Positive-sum 게임인 투자다.
이론이 그렇다는 말이다. 속을 까보면 화이트데이 사탕처럼 ‘투자’로 포장했을 뿐 현대의 주식시장도 여전히 투기가 목적인 사람들의 집합체이다. 현물도 아닌 이미지를 사고팔고를 끊임없이 반복하는데, 포지티브 섬 게임의 근본인 투자 이익금 배당에는 관심도 없다. 그저 미친 여인 널뛰듯 오르내리는 시세를 활용하여 차익을 노리는 데만 눈과 귀가 몰려 있다. 투자가 아닌 고스톱 판이나 다름없는 제로섬 게임이 된 지 오래이다.
개미들은 제 아무리 용을 써보아야 이 게임에서 승산이 없다. 오히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고스톱 판에서의 승산 확률이 높다. 투기꾼들의 교묘한 작전과 거대 세력의 정보력과 그들의 규모경제에 맞설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 돈을 땄다는 사람이 있지만, 그 마당에서 다시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탐심만 더 키웠기 때문이다. 탐심은 벌을 받는다. 자신이 희생되는 경우가 더 많다. 누구나 장밋빛 결과를 꿈꾸고 달려들지만 종래에는 활활 타오르는 불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처럼 그들의 날갯짓은 파멸로 향하게 된다. 탐심을 채우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동반되어야 한다. 장자莊子 말씀이 등장해야 할 때가 되었다.
“사마귀가 눈앞의 매미를 노리느라 등 뒤의 참새를 보지 못한다.”
사마귀는 탐심이요, 참새는 파멸의 메신저이다. 치열한 경쟁을 동반하는 이 시대, 사람들은 다들 영악해지고 이해타산에 밝아져 있다. 공적과 이익을 쫓는 데에 마음을 쓰느라 정작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인 본성을 잊고 산다. 본성이 탐심에 가려지면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된다. 튤립을 꽃으로만 보아야 저도 아름답고 사람도 아름다워진다. 자본으로만 보기 시작하면 둘 다 추악해지고 불행해진다.
튤립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 초콜릿과 사탕에게도 죄가 없다. 죄는 몽땅 탐심을 가진 사람들의 몫이다. <My funny Valentine>에게는 또 뭔 죄가 있겠는가. 성실하게 삶을 영위하지 못했던 쳇 베이커에게 죄가 있을 뿐이다. 그런 즉 ‘약쟁이’의 노래라고 해서 찜찜해 하지 말고 부담 없이 감상해도 좋다.
첫댓글 사람 얼굴은 안보고 음악만 들으면 더 좋겠네. 자주 글올리고 이번 종친회때 보세
처음에는 꽃 이야기, 음악 이야기인 줄만 알고 읽다가 끝에 오니 사람 이야기라 너무 감명 깊게 읽었네. 아름다운 문장으로 물이 흘러가듯이 쓴 글이라 달콤한 쥬스를 마시는 기분이다. 처음 카페에 들어왔을 때 표가 올린 글들에 용기를 얻어 나도 참여를 하였는데 자주 좋은 글 올려서 즐겁게 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