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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전승의 연구
박신배(신학부 구약 조교수)
들어가는 말
오경 연구에 있어서 핵심 주제는 무엇인가. 제사장 전승(P) 연구는 오경 연구의 문제를 여는 열쇠이다. 오경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라는 문제에 학자들은 많은 대답을 내놓았다. 벨하우젠의 문서 가설(J. E. D, P)이 주장된 이래로 오경 연구는 획기적인 발전을 하여 오경의 형성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른 듯하였다. 하지만 오경의 형성 과정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오늘도 오경 형성 이론은 계속 연구되고 있고 그 결과들이 쏟아지고 있다. 오경 연구에 제사장 전승이 중요한 요소로 대두되어 제사장 신학을 이해하여야 비로서 오경 마지막 편집의 과정을 알게 되고, 또 오경의 편집신학을 터득하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최근 야웨이스트(J) 문서와 신명기(D) 신학이 오경 신학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는지 살피며,1) 오경 연구에 있어서 제사장 전승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제사장 전승(P)이 언제 생성되는지, 제사장과 레위인의 상황은 어떤지, 역대기 전승과의 관계와 요시야 시대의 제사장, 포로기와 그 이후의 제사장의 상황은 어떤지 살펴보고자 한다.2) 이 연구를 통하여 오경과 신명기 역사서 전반에서 제사장 전승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찾고, 구약 성서 이해에 제사장 전승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피고자 한다.
1. 제사장 문서
오경 중에 출애굽 사건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창12-50)과 출애굽기의 출애굽 사건을 자세히 읽어보면 불일치하는 장면과 차이점 반복, 문체의 불규칙적인 변화, 삽입 등의 문제로 인해 한 저자가 썼다는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그래서 2세기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수개의 전승과 자료가 합쳐진 구성의 산물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연구자들은 네 가지 중요한 문서의 자료를 찾아냈다. J자료는 유대측 자료로서 왕국 초기에 생성된 것으로 하나님 이름을 야웨(Yahweh)로 쓰고, 연대는 주전 950년경이다. E자료는 에브라임, 북쪽 이스라엘 측의 자료로서, 하나님 이름을 엘로힘(Elohim)으로 사용한다. 주전850년경 기록된 것으로 본다. D자료는 요시아 종교 개혁(주전621년) 기간의 신학과 형식이 반영된 신명기 자료로서 주전650년경 기록되었다. P(Priestly Document, 제사장 문서)자료는 유다의 멸망이후(주전587년) 바빌론 추방기에 생성되어 주로 문체와 형식에 있어 제의적인 관심이 많은 자료이다. 주전 550년에 기록된다.3)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와 같은 오경으로 주전 400년 형성된다.
이 오경은 오랜 기간 구두전승을 통해 내려와서 문서가 생기기 시작한 때에 문서 기록자에 의해 기록되기 시작한다. 이스라엘 초기 설화의 중요한 주제들을 선택하여 편집한다. 1. 족장들의 약속 2.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구출 3. 시내산에서 율법인수 4. 광야에서 방향인도 5. 약속된 땅의 유산 등이다.4) 초기의 이 주제들은 역사적인 서사시로 출애굽기 안에서 J. E, P자료의 원형들과 함께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자료들이 제사법전(P)적 저자에 의하여 오경정경으로 형성되기 까지 오랜 전승의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이다. 족장시대(주전1800-1300년: 구전전승의 시작) 모세 시대(주전1300-1250), 이스라엘 지파 동맹, 여호수아, 사사기(주전1250 -1000: 구전으로 형성된 이스라엘 이야기), 왕국 시대 다윗 왕부터 왕국의 몰락(주전1000-587)-문서 오경전승의 시작, 포로기와 회복기(에스라)시대-주전587-400년 등이다. 앤더슨(B. W. Anderson)은 오경이 P(제사장 전승자)가 최종적으로 편집하였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제사장 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스멘트(R. Smend)도 제사장적인 층이 오경의 최종 편집자로서 전체 저자라고 본다. P는 주전587년의 유다 멸망과 바빌론 포로 후에 페르시아의 정치적 지배하에 제의 공동체로 변화되었고, P는 에스겔의 활동을 전제하며, 에스라의 율법은 P였다고 본다.5)
이스라엘 전승에는 3개의 전승군, 서기관(현인), 제사장, 예언자등이 형성되어 구약의 정경화 과정에서 영향력을 미치었다. 이들은 고대 시대에 제국의 상황에서도 중요한 지적이고 종교적 업적을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형성하였다.6) 우리는 여기서 제사장 전승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제사장 문서(P)와 신명기 역사서의 관계
제사장 문서에 대한 학자들의 이론은 다양하다. 폰라드는 P의 구성을 Pa, Pb로 구분하고, 노트는 포로기의 Pg만으로, 엘리거는 포로기의 Pg(기본 자료)와 Ps(보충 자료)로 구분한다. 프리드 만은 요시야 개혁 이후 포로기 이전에 P1이 구성되었고, 이것을 포로기에 보충 자료인 P2가 첨가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P의 시기에 대해서 벨하우젠 계열은 포로기 이후로, 카우프만 계열은 포로기 이전 시기로 구분한다.7) 김은규는 신명기 역사서(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상하)에 제사장 문서 자료(P1)가 나타난다고 보고, 그 P1과 오경의 P1 자료와 비교하여, 요시야 시대의 제 1신명기 역사서(Dtr1)의 편집 목적을 연구하려 한다. 그는 P1의 시기를 히스기야 시대(카우프만과 하란의 주장)로, P2를 포로기로 구분한다. 신명기 역사서 안에서 제사장 문서를 찾는 작업을 통해 P의 제사장 자료가 신명기 역사와 밀접히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이론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근래의 신명기(D)와 신명기 역사서(Dtr)의 저자가 오경을 통합하여 구경으로 최종적으로 편집했다는 이론과 일맥상통한다.8) 반 시터스는 신명기와 여호수아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여호수아와 사사기 사이의 문학적 연속성과 사무엘과 열왕기의 주제적 통일성을 말한다.9) 이 통일성은 형태와 유비, 공식적 진술의 반복과 예언과 성취, 대조등의 형식이 신명기 역사가의 작품속에서 통합되고 서로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반 시터스는 J와 P의 작품들이 신명기 역사서에 수용되었다고 보고 두 자료와 신명기 역사서와 연결을 시도한다. 노희원은 노트의 단일 저작설(포로기의 신명기 역사가)과 넬슨의 이중 편집이론을 비판하고 펙햄의 Dtr2에 기초하여 창세기에서 열왕기에 나타난 계약 구조를 중심으로 구경의 통합 이론을 주장한다.10)
J(주전950년)자료와 E자료(주전850년)가 통합되고, D자료(주전621년)가 생성되면서 P(Priestly Document, 제사장 문서)자료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남 유다가멸망(주전587년)하여 바빌론에 포로 생활하면서 제의적인 관심이 많은 자료를 중심으로 하여 주전 550년에 오경이 형성되게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와 같은 오경은 주전 400년에 형성된다. 오경의 편집에는 P자료가 중심이 되어 제사장 신학이 주류가 되었고, 후에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 신학이 P신학을 포용하면서 오경을 포함한 확장된 신명기 역사서가 형성되어(9경) 오경과 전기 예언서가 하나로 신학화되는 작업이 정경화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프리드만(R. E. Friedman)의 이론에서 그 논증을 확보할 수 있다.
프리드만은 성막과 제 1성전은 포로기 이전에 P1 설화와 P1의 율법 자료로 구성된 것이라고 보며, P1의 많은 구성이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파멸한 것에 충격으로 유다 왕국의 성장 시기에 구성된 것이라고 한다.11) 프리드만은 P1의 성막이 제 2성전의 모델이 아니라 제 1성전에 세워진 역사적 성막으로 보고, P1의 관심이 성막의 중앙화된 제사에 초점을 두어 Dtr1과 관심이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P1의 시기를 요시야 이후로부터 포로기 이전 시대에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프리드만과 제비트(Z. Zevit)는 P 설화가 Dtr1, 예레미야와 에스겔에서 인용되었다고 보고, P설화는 포로기 이전과 요시야 이전으로 추정한다.12) 김은규는 P1의 자료가 히스기야 개혁 때에 있었고, Dtr1이 요시야 개혁에 참여하면서 히스기야 시대의 P1의 자료를 수용하였다고 주장한다.13) P자료와 Dtr 자료들이 서로 영향을 적게나마 주고받으며 P는 오경의 편집자로서, Dtr은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서의 편집작업을 하면서 최종적으로는 Dtr 편집자가 오경의 P를 수용하면서 전체의 오경과 전기 예언서가 통합되는 과정이 있었다.
3. 제사장과 레위인의 상황
전승자들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벨하우젠은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한 언급에서 에스겔과 P의 자료를 나누어 이야기하는데, 에스겔 보다 P가 더 후대에 기록되었다고 보고, 겔44장에서 예루살렘의 레위인들, 즉 사독 자손들만이 새 예루살렘에서 제사장 직을 계속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른 레위인들은 그 밑에 낮은 위치에서 부속되어 일을 하며 제사장 권은 박탈당하였다. P에서는 레위인들이 제사장권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다만 아론의 자손들만이 제사장 권을 소유했다고 주장한다.14)
벨하우젠은 P가 제일 나중에 편집된 자료라는 가설에 의해 제일 잘 조직화 되고 발전된 문서라고 보는 입장에서 이와 같이 주장한다. 에스겔과 P의 관계를 떠나서 역사적으로 제사장 직의 수행인들이 시대적으로 발전하고, 변화되었다. 인구의 증가와 제사장 권의 변화에 따라 제의 수행인의 역할이 축소되고, 제의 수행인들도 제한된 수로 감소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초기 시대에 레위 지파 사람들 전체가 제의를 맡게 되었던 것이 다윗 시대는 사독, 아비아달 계열의 제사장들이 중심이 된 왕 중심의 제사장 조직이 되었고, 솔로몬 시대에는 사독 계열 제사장 중심의 제사장 권의 그늘 아래 제사장 조직이 개편되었다. 그러다가 분열왕국이 시작되면서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가나안 정착 시대와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제의 전통을 부활하고 다시 복원하였다. 금송아지 상을 만들고, 단과 벧엘에 성소를 세운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의력을 수정하여 1월 15일인 유월절을 2월 15일15)로 바꾼 것은 전통을 재해석하여 북 이스라엘 실정에 맞춘 것이다.16)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제사장 등용의 규칙에서 레위인 전부에게 제사장 권을 주고, 비레위인에게도 제사장직을 주는 파격적인 일을 시행하였다.17) 북 이스라엘은 새로운 제의 문화가 정착되고 발전되었다. 남 유다는 다윗, 솔로몬 전통의 제의 문화가 계속되었다. 시대적으로 시간이 흘러감으로 줄곧 제의 수행인구가 과잉 현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래서 레위인 일부만이 제사장권이 보장되었다. 에스겔 시대 이르러서 레위인 가운데 아론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는 현실이 되었다. 벨하우젠에 따르면 초기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성직자와 일반 백성사이에 구별이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가축을 도살하고 제의를 행할 수 있었다고 말하며, 큰 성소에만 제사장이 있었다고(실로와 단) 주장한다. 그러다가 왕정 시대가 되면서 왕권과 제사장 권이 분리되고 제사장권이 왕권에 비해 열등하였다고 지적하며, 왕이 제사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고 주장한다.18) 이러한 왕 중심의 제의가 분열왕국 시대의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에 의해서 변화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왕의 종들인 제사장이 아닌 수많은 제사장들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제사장권의 형태도 다양하게 되었다. 세습적인 제사장과 비 세습적인 제사장, 사유 재산이 있는 제사장과 사유 재산이 없는 제사장들로 나타난다. 제사장 제도의 발전과 제사장직의 한계는 인력 수급의 문제를 낳게 한다.
이처럼 제사장권의 변화와 제의 수행인의 인구 확대는 제의 수행인 구조를 변화하게 하였다. 따라서 벨하우젠의 지적과 분석은 대체적으로 동의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주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제사장 권의 변화가 히스기야 시대 때는 어떠한 상황이었는가? 벨하우젠은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는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국가와 국가제의는 사라지고, 북 이스라엘의 유형문화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북 이스라엘 제의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서서히 북이스라엘 멸망 전까지 남 유다에 유입되어 내려오게 되었다. 그래서 히스기야 시대에는 왕 중심의 제의 구조 형태가 기본적으로 형성되었지만 다윗, 솔로몬 시대처럼 소규모적이고 왕권이 제사장 권을 장악하는 형태가 아닌 제사장 규모가 커지고 제사장 권과 왕권이 독립된 상태로 분화된 모습을 보인다(왕하18-20; 대하29-32).19)
역대기하 29장의 제의 규모가 히스기야 시대를 반영해준다.20) 제사장과 레위인이 구별되어 사용되고(대하29: 4; 31:2), 아론 자손 제사장들과 모든 레위인들이 주변의 변두리 제사장임을 시사해준다. “각 성읍에서 녹명된 사람이 있어 성읍 가까운 들에 거한 아론 자손 제사장들에게도 나눠 주되 제사장들의 모든 남자와 족보에 기록된 레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더라.” 그러면 제사장권은 사독 계열의 제사장이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대하31.10).21) 따라서 그들이 북 이스라엘 전승을 취합하여 히스기야 개혁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역사적인 전승의 과정이 문학적인 차원의 문서과정으로 들어갔는가? 이 문제를 정확히 규명하기는 힘들다. 다만 문서화된 상태를 놓고, 그 과정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문서 한 조각이 역사적 상황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본다.22) 그러므로 히스기야 자료가 신명기 역사와 역대기 역사, 이사야 예언서에 나타난다. 이것은 히스기야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정보를 많이 보여 준 것이다. 그래서 히스기야 시대의 제사장 전승은 열왕기하18-20장과 역대하29-32장, 이사야 36-39장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 문서의 연대 층을 따져서 히스기야 시대의 정보를 신학화된 정보로만 볼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히스기야 시대의 신명기 역사 전승과 역대기 전승, 이사야 예언자 전승이 역사성이 있음을 전제하고 평면에서 히스기야 시대의 제사장의 상황과 제의 역사를 살필 수 있다.
4. 제사장 문서와 역대기
히스기야 이야기 중 역대기의 신학화된 히스기야 상(像)과 역사적 히스기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역대기가 보도하는 히스기야 개혁과 제사장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역대기 문서의 성격을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대기 역사의 성격에 대하여 역대기 역사를 하나의 신학적 에세이(Essay)로 보는 경우와 역대기 저자가 역사를 제시하거나 해석하기 보다는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신학화 한 작품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역대기의 성격이 제의를 강조하여 신명기 역사보다 P(제사장 문서)에 더 가깝다고 본다. 역대기가 P저작의 영향을 수용하며 역사적 사실을 탈색하여 역대기 현실의 상황에 적합하게 적용하였다고 한다.23)
P저작에서 볼 때 초기 시대는 규범적으로 다룬다. 그것은 현재 경험에 적합한 ‘의미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를 일부 ‘탈역사화’하여 신학적 해석을 가미한다. 이와 비슷하게 역대기 기자도 공동체 과거 역사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들을 탈역사화하여 역대기의 성전 제도와 제사장 제도에 맞게 신학화 한다. 그 이유는 현재의 백성들 상황에 적합한 요소들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역대기 신학에서는 다윗, 예루살렘 전승이 중심이 되었다. 이것은 포로기 후 공동체의 신학적 해석에 중심동기가 되었다. 반면, 이것은 신명기 역사에서는 중요치 않았다. 존스는 역대기 신학이 역사 속에 활동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다윗 왕조, 제의 등의 주제를 다룬다고 보았다.24)
아크로이드나 존스와 같이 역대기 저작의 성격이 P의 성격과 닮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25) 프리드만은 P와 역대기가 밀접히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는 J.E자료는 아론을 경시하고 P는 모세를 경시했다고 본다. J,E는 레위인은 누구나 사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P는 아론의 후손만이 사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다른 성격의 자료를 에스라가 절묘하고 예술적으로 융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4자료를 수집한 사람은 아론계 사제 출신이였다고 보았다. 그것은 제2성전 시대 때 아론계 사제들이 권위를 가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때에 오경이 마지막 편집 되었다고 보았다. P와 에스라, 역대기간의 교류를 통해 P와 역대기 관계성이 밀접한 것을 볼 수 있다. 프리드만은 P와 D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본다. “P작품은 히스기야 시대였다. 이 시대는 사제적 지위가 확립 되었던 시대로 예루살렘 아론계 사제직이 선호되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P는 J.E에 대한 대안물이였다. 한편 이들이 반대자들인 실로 가문의 사제들은 요시야 왕시대에 기회를 포착하였다. D(Dtr1, Dtr2)의 저자는 사제직의 옹호자인 예레미야 혹은 바룩이였다.”26)
그것은 똑같이 신명기 역사에서도 발견된다. 역대기는 한편 제의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역대기 역사가 신학적인 해석이 많이 가미 된 채로 역대기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지마는 히스기야 시대의 역대기 기사는 역대기 전승이 히스기야 시대에 역사적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역대기 역사는 역사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고, 히스기야 기사를 볼 때, 히스기야 시대의 역사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그것은 프리드만은 P가 히스기야 시대에 쓰여 졌다는 주장에서 입증될 수 있다.27)
역대기와 P의 제사장적 요소와 제사장 전승은 히스기야 시대의 역사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대대적으로 유월절 행사를 거행하고, 제의 중앙화 개혁을 행한 것을 알 수 있다(대하29-32장). 또한 히스기야 시대는 초기 신명기 역사가(Dtr0)가 북이스라엘의 전승을 수용하여 종교 개혁과 제의 중앙화 정책을 시행하였다.28) 실로의 제사장들이 이 일의 근본 동력이 되었다. 북이스라엘 전승이었던 청동뱀 느후스단을 제거하고, 산당과 바알 아세라 상을 없애는 개혁에 박차를 가한다. 히스기야 시대는 남쪽의 다윗, 시온 ․ 예루살렘 전승과 북쪽의 느후스단, 호세아, 출애굽기 계약법 전승이 통합되는 때이었다. 실로 제사장의 신명기 전승은 남 유다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후에 어두운 반(反)야웨제의 개혁 시대인 므낫세, 아몬 시대를 거쳐 요시야 시대로 넘어간다.
5. 요시야 시대의 제사장
제사장 문서(P)가 포로기, 포로기 에스라 ․ 느헤미야 시대에 쓰였다는 벨하우젠 학파의 주장에서 전승의 흐름을 추적하여 히스기야 시대에 제사장 전승이 형성되었고,29) 신명기 역사 전승(Dtr1)이 히스기야 시대의 P1 자료를 사용하여 요시야 개혁 운동에 참여하였음을 추정하였다. 요시야 시대에 Dtr1은 히스기야 시대의 P1 자료를 삽입함으로써 요시야 종교 개혁을 넓히고,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충성과 제의 중앙화 개혁을 행하여 이방 예배를 금지하고, 야웨 예배의 철저한 신앙을 강조하는데 집중하였다. 이는 요시야를 통해 다윗 왕국의 회복을 이루며 유다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인 예루살렘과 함께 모든 이스라엘의 통일된 공동체를 이루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요시야 시대의 신명기 역사 전승(Dtr1)과 제사장 전승(P1)이 결합하며 신학적 통합의 과정이 형성된다. 김은규는 민수기 정탐 설화(민수기13-14장)와 여호수아 2장의 내용이 서로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또 여호수아 13-21장의 지파 경계 목록(Dtr1)이 요시야 시대의 P1의 지파 분배와 경계 목록을 취하여 정복과 정착 역사의 한 부분으로 편집하였다고 본다. 셋째, 여호수아 3-4장의 법궤동반 진군(P1)기사와 블레셋 법궤 이야기(삼상 4-6장, Dtr1)를 통하여 요시야 개혁의 중심이 되는 제의 중앙화, 예루살렘 중앙 성소를 강조하고 있다고 보았다. 넷째, 솔로몬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 기사(왕상6장)에 P1(출26장) 자료를 삽입시켜 제의 중앙화 신학, 예루살렘 성전을 나타내고 있다.30)
위의 사실을 통해 신명기 역사 전승(Dtr1)은 요시야 시대에 발견된 율법 문서(D)를 근거로 종교 개혁을 시행하였고, 우상숭배 금지, 산당 철폐, 제의 중앙화 개혁을 하여 예루살렘 중심의 중앙집권 구조를 형성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제사장과 제사장 전승(P1)을 수용하여 제사장 중심의 개혁을 이루어 나갔다. 제사장의 성전, 예루살렘 중심으로 제의 중앙화를 시행하며 제사장 전승의 자료(P1)을 수용하여 개혁 운동을 확대하고 통합하였다.
요시야 개혁은 포괄적인 종교 제의적 개혁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적 권력 구조의 변화를 수반하였다. 요시야의 제사장 제도 개혁이 제의, 사법, 교육 등 기존 권력 구조의 개편을 수반한 개혁이었다(사법-신17:9, 12; 19:17; 20:2; 21:5; 24:8; 교육-신17:18; 27:9-10; 31:9-11, 24-26). 요시야는 제의를 통하여 국가 중앙 집중화 사회를 구축하려고 하였고, 제사장이 중심이 된 개혁을 시행하려고 하였다. 반면 지방 성소와 지방 제사장들의 역할을 약화되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것은 자연히 암 하레츠(땅의 사람)와 지방 제사장이 연관을 갖고 반발하고 있었다.31)
히스기야 시대의 제사장 전승(P1)과 역대기 전승이 생성되어 요시야 시대에 개혁의 주요한 헌장이 되었고 종교 개혁에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의 중앙화 개혁에 히스기야 시대의 제사장 전승(P1)은 중요한 문서가 되었고, 히스기야 시대의 제사장들은 전승의 후예로서 요시야 시대에도 중요한 종교 개혁과 정치 개혁에 핵심적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왕상 21-22장에 나타난 신명기 역사 전승의 개혁 이야기와 역대기 전승을 통하여 알 수 있다(대하34-35). 그러면 이 전승들과 제사장 자료 전승이 완성되는 포로기에는 어떤 형태를 취하며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살펴보자.
6. 포로기 시대와 포로기 이후의 제사장
고대 시대에 제사장은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고대 근동의 문헌과 구약성서 비교를 통해 제사장이 제의적 기능, 신탁을 묻는 기능, 정화 혹은 주술의 기능, 재판과 교육의 기능, 정치적 기능 등을 가졌다.32) 제사장이 제사를 주관하고 제사의 때를 결정하고 백성을 축복하며 법궤를 옮기고, 제사를 준비하는 제의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대의 제사장은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문화와 상징 속에 살아가며, 고유의 세계관 속에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제사장의 역할이 변화를 거듭하였고, 바빌론 포로 시대에는 그 역할이 크게 변화하였고, 성전이 없는 상황에서 제사 업무가 중지된 상태에서 새로운 제사장의 정체성이 요구되었다. 제사장이 이제 회당 종교의 형태에 맞는 업무를 담당하는 역할로 바뀌었다.
바빌론 포로지에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뜻에서 안식일과 햘례 문화를 만들고, 율법책을 만들어 이스라엘 종교를 새롭게 형성하였다.33) 안식일과 햘례를 통하여 이스라엘 신앙 전통을 이어가며 디아스포라 신학이 되었고, 이 종교 문화는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환원(還元)정신과 회복 신학을 보여 준 것이다. 제단에서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주관하던 제사장들은 포로기에는 레위인 중심의 율법사로 바뀌었다. 회당에서 종교적 업무를 담당하며 주로 책의 종교 형태로 변화하였고, 제사장은 율법사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우선시 되었다. 바빌론 포로 귀환 후 제2성전 시대가 되면서 다시 제의적 업무를 맡는 역할이 요구되었다.
주전 539년 바빌론의 몰락 이후 고레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열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주전516(15)년에 제 2성전을 지을 수 있었다(에스라 6:15). 역대기-에스라-느헤미야서를 통해서 나타난 제사장 목록을 통해 사독 중심의 제사장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34)
제사장이 드리는 제물과 희생제사는 여호와께 선물로서의 제물과 신과의 교제, 죄의 전가와 대체의 의미를 가진다. 레위기1-7장, 민수기 18-19장에 나타난 희생제의는 번제물('olah), 소제(minkhah), 기념과 기억(azkarah)을 수반한다. 교제(Communion)의 희생제의(레위기3장)는 화목(shelem, shalom)의 의미를 가진 화목제물을 말하고, 속죄 제물(khattath, asham, 레위기 4-6장)은 속죄와 정결례, 거룩과 축복을 의미한다.35) 유월절의 제의를 통해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의식을 통한 교감, 신과의 교제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제의가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 제2성전 건축건립의 과정을 거치면서 제의 제도의 상실과 회복, 제사장 직무의 변화와 회복이라는 차원을 겪게 되었다. 그러면서 유대교(Jewism) 형성의 길로 접어든다. 이젠 새로운 종교의 나라로서, 나라와 왕조, 예루살렘 성전이 없어도 나라를 잃지 않는 제도가 무엇인지 연구하였다. 그것이 책의 종교, 종교적 나라, 새로운 유대교의 제사장 제도이었다.
바빌론 포로기에 제사장 계열이 정리되어 아론계, 사독출신의 레위인들이 포로기 이후에 성전 제사장권을 가진 중심 제사장들이 되었고, 일반 레위인들은 변두리 제사장으로 권력에서 벗어난 자유 설교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레위기에 제사장 문서에서는 레위인과 제사장을 구별하여 표기하고 있다.36)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의 오경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 왕국 시대에 J, E 자료가 실로 제사장 가문을 옹호하는 모세의 후손들과 다윗 왕조를 옹호하는 유다 출신의 제사장으로부터 기록되었고, 이것이 히스기야 왕 시대에 제사장자료(P), 예루살렘의 아론 제사장 가문이 이 제사장 자료를 만들었고, 실로의 제사장들이 요시야 시대에 토라(D), 신명기 법전을 만들며 요시야 시대의 신명기 역사(Dtr1)를 기록하였고, 포로기 시대에는 신명기 역사서(Dtr2)를 편집하였다. 바빌론 포로 초기에 제사장 자료(P) 전승과 신명기 역사 전승(Dtr1)이 결합하여 오경을 형성하게 되었다.37) 그 후에 바빌론 포로 귀환 후 에스라가 아론 제사장들을 옹호하는 오경의 편집자(R)가 되었다.38) 바빌론 포로 귀환이후의 예루살렘 공동체는 디아스포라의 제의 중심지가 되었고, 에스라, 느헤미야를 통하여 토라의 공동체, 새로운 율법의 공동체가 되었다.39) 이후에 정경화 과정을 거치면서 성서 중심의 제사장과 이름 없는 제사장들, 지방 성소의 제사장들과 자유 설교가는 제사장 전승의 주류에 들지 못하고 하늘의 제사장으로 유리하는 나그네의 신분이었다. 그래서 신명기는 계속 “레위인, 객과 고아와 과부”(신명기12:12,18; 26:11-13)를 배려하라고 하였다.
나가는 말
제사장 전승은 구약의 주류로서 정경화 과정에서 오경의 중요한 문서 층이 되었다. 제사장 문서(P)는 처음 오경의 다른 전승 J. E 자료를 통합하였다. 나중에 바빌론 포로 시대에는 신학적 위기와 대응을 통해 오경 편집화 과정에서 제사장 중심의 신학을 만들었다. 이 최종 제사장 전승의 오경은 정경화 단계에서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 전승과 통합하여 전체 9경이라는 오경과 전기 예언서의 단일한 문서 작업을 이루게 된다.
지금까지 먼저 제사장 문서의 기원적, 개념적 정의를 하고, 제사장 문서와 신명기 역사서의 관계에 대하여 살핀다. 히스기야 시대에 P1, 포로기 시대 P2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요시야 시대에 Dtr1과 상호 영향을 받았고, 히스기야 시대에 P1 자료를 수용하고, 포로기에 P2 자료를 수용하여 9경을 형성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 다음에 제사장의 수적 상황을 초기 시대부터 왕정 시대, 히스기야 시대까지 추정하였다. 레위인의 수적 팽창이 히스기야 시대에는 비 레위인에게도 제사장직이 주어지는 상황이 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제사장 문서와 역대기가 신학적 성격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P는 아론의 후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에스라와 역대기의 관계를 묘사하고, 제2성전 시대의 제사장의 분포를 추정한다.
히스기야 시대에 제사장 전승을 수용하여 개혁의 모토로 삼고, 제의 중앙화 개혁을 한 것을, 요시야 시대에도 신명기 역사 전승(Dtr1)이 제사장 전승(P)을 수용하여 종교, 정치개혁을 수행하였다. 바빌론 포로기라는 암흑의 시대에는 신학적 변화를 겪으면서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율법사의 기능을 담당하며 성전 제의를 안식일과 햘례 의식이라는 새로운 포로기 신학을 수용해야 했다. 이제 회당종교와 책의 종교를 만들며 포로기 이후의 제2성전 종교, 유대교를 준비해야 했다. 그것이 제사장 나라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신학적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사독 출신의 제사장들이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 전승을 담지하며 귀환 공동체의 핵심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제사장권과 대제사장 직을 담당하게 되었다.
우리의 제사장 전승의 연구 결과는 하늘의 제사장직, 만인 제사장이라는 신약의 성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여 한국의 상황에서 역사적으로 제사장 직을 맡아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한국 문화에서 제사장 전승은 무엇인지, 무교의 샤만과 불교의 대사, 유교의 성균관 대학사등이 고대 사회에서 이 직무를 담당하였다. 유교가 제도권의 통치 세력으로 군림하는 전승자라고 하면 민중과 더불어 호흡한 불교의 예언자적 제사장과 민중의 한풀이 샤먼은 독특한 그들의 종교적 사회적 자리를 가지고 지적, 정신적 업적을 이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의 제사장 전통을 담지한 사람들은 누구인지 묻고, 하늘의 뜻이 이 땅에 펼쳐질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몫이며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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