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말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는 반박을 했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왜 예수님께 반박을 하며 항의했을까요? 베드로의 인간적 생각으로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죽는 것을 도대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지체 없이 베드로를 호되게 꾸짖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자신을 비하하거나 혐오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판단이나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길이었습니다.(이사 55,8 참조)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되면 세상 속에서는 고통과 수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인간의 욕심만을 쫓아가면 결국 패망하고 만다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당장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행위가 결국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신앙인이 가야 하는 길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자체가 이미 십자가를 각오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이냐 세속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늘 서 있게 됩니다. 세속의 범주에는 때로는 나 자신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버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세속 안에서 쉽지 않고 힘들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 안에 결과는 분명하게 차이를 드러냅니다.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가치있고 참다운 행복의 삶이 되려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길의 결과는 주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미 증거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나 자신의 욕심을 버리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물론 우리가 겸손하게 하느님께 의지하고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서울주보)
묵상해봅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단호함이 엿보입니다. 맺고 푸는 열쇠까지 받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모습 속에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인간적인 유혹과 욕망을 철저하게 단죄하는 예수님의 결연함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현실의 처지에 따라 적당히 타협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알아봅시다
1.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5년 공동의 집을 돌보는 것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교종께서는 매년 9월 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피조물을 파괴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창조질서를 회복시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훼손된 지구와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이 하늘까지 가닿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피조물을 보호하는 데에 앞장서야 합니다.
교종께서는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을 한 시간 성체조배의 방식으로 거행할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성체 앞에서 우리의 무관심과 욕심으로 파괴된 피조물을 위해 기도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맡겨주신 피조물을 돌보고 가꾸는 삶의 방식을 통하여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기로 다짐합시다. 그리고 피조물을 가꾸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성숙과 완성을 이루도록 노력합시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도록 합시다.
2. 같은 말, 다른 표현
우리나라의 경우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새로 나오는 과정에서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이 달라지면서 일시적으로 혼란을 주기도 한다(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프란치스
코 하비에르). 그리고 영어로는 ‘카톨릭 교회’라고 표기하는 데 반해 굳이 우리나라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더 익숙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는 라틴어를 우리말로 바꿀 때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이 사용하던 외국어-조선말 표기법의 음가를 그대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새 외래어 표기법은 본래 그 단어가 생성된 본토에서의 발음을 그대로 쓰게 되어 있는데, 천주교에서는 주로 라틴어식 발음을 우선해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특히 성경에 나오는 인명이나 지명을 우리말로 표기할 때 많이 보게 되는데, 천주교에서는 공인성경을 ‘대중 라틴어역본(불가타, Vulgata)’ 즉 라틴어 성경을 기준으로 한 데 반해서, 개신교에서는 ‘흠정성경(King James Version)’을 기준으로 영어식 발음을 사용하기 때문이다(나자렛 예수, 나사렛 예수 / 야훼, 여호와 / 알렐루야, 할렐루야).(의점부교구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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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준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