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강을 끼고 아담하게 형성된 잠두봉이다.한양도성 서쪽 벌 서교(西郊)의 주산 안산(鞍山)에서 내려온 맥세가 뭉처 만든 봉우리다.
노량진 새남터에서 한강은 기(氣)를 감싸지 못하고 서북쪽으로 거침없이 직선으로 흐르고 있다.잠두봉에서도 기(氣)는 거침없이
그대로 빠져나가고 있다.바위나 산세는 기운이 양명하고 기운이 넘치는 듯하나 기(氣가 그대로 흘러나가니 허망하기 그지 없다.
우리나라를 사람 몸에 비교해서 말할 때 한양은 풍수에서는 머리부분 바로 수부(首部)에 해당한다고 한다.그때 양화진 잠두봉은
목젓 인후(咽喉)에 해당한다.그래서 한양도성을 방어하는 입장에서 잠두봉은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시 여겼다.
잠두봉은 양화진(楊花津) 동쪽에 있는 봉우리이다.누에가 머리를 든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양화진은 바로 곱고 아름다운 이름 버들꽃나루다.갯버들이 양화진 주변에 참으로 많았다.그래서 버들꽃나루다.
양화진 뒤에는 잠두봉이 버티고 있고 그 앞에는 하야한 모래벌판이고 그리고 서강이 넘실 거렸다.

겸재 정선의 그림 <안현석양(鞍峴夕陽)>이다.양화진의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주산(主山) 안산을 잘 그려내고 있다.
<안현석봉>, 그림에 나오는 산과 물 선박 그리고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 풀이는 최완수선생의 동아일보 연재물을 옮겨왔다.
안현(鞍峴)은 안산(鞍山) 또는 모악산(母岳山)이라 부르는 서울의 서쪽 산이다. 봉원사(奉元寺)와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를
품고 있는 높이 296m의 산이다. 한양의 내백호(內白虎 .명당의 서쪽을 막아주는 안쪽 산줄기)인 인왕산(仁王山)에서 서쪽으로 다시 갈라져 인왕산 서쪽을 겹으로 막아주고 있으니 한양의 외백호(外白虎)에 해당한다. 이 산을 안산(鞍山) 또는 안현(鞍峴)일 부르는 것은 산 모양이 말 안장(鞍裝)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길마'는 안장(鞍裝)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다. 아마 안현(鞍峴)이나 안산(鞍山)은 '길마재'의 한자식 표기일 것이다.

모악산(母岳山) 또는 '모악재'라 부르는 것은 풍수설(風水說)에 의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서울의 조산(祖山, 풍수설에서 명당의 근원이 되는 으뜸산)인 삼각산은 부아악(負兒岳, 등애 아기업은 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를 업고 서쪽으로 달아나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서쪽 끝의 '길마재'를 모악(母岳, 어미산)이라 하고 그 아래 연세대학교 부근 야산을 '떡고개'라 했다고 한다.
어미가 떡으로 아이를 달래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어떻든 이런 길마재 위에는 태조(太祖)때부터 봉수대(熢遂臺)를 설치하여 매일 저녁 봉홧불을 오리게 하였다. 무사하면 봉홧불 하나를 올리고 외적(外敵)이 나타나면 두 개, 국경에 가까이 오면 세 개, 국경을 침범하면
네 개, 싸움이 붙으면 다섯 개를 올리도록 했다.
따라서 평화 시에는 늘 봉홧불 하나가 길마재 상봉에서 타오르기
마련이었다.원래 길마재에는 동서 두 봉우리에 각기 다른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동쪽 봉우리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육지 쪽에서 전해오는 봉홧불 신호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 봉대산(烽臺山)에서 받아서 목멱산(木覓山) 제3봉수대로, 서쪽 봉우리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바다 쪽 봉화 신호를 고양시 일산구 고봉산(高烽山) 봉수대에서 받아 목멱산(남산) 제4봉수대로 전해주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중국 쪽에서 외적이 침입하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이 안현봉수대의 불꽃 수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안현(鞍峴)의 봉홧불이기에 겸재(謙齋)는 1740년(영조 16) 초가을에 양천의 현령(縣令)으로 부임해 가서는 현재 가야동 6번지 일대의 현아(縣衙)에 앉아 틈만 나면 이 길마재의 저녁 봉홧불을 건너다 보고 나라의 안위(安危)를 확인했던 것 같다.그쪽 방향은 바로 자신의 고향집이 있는 한양이기도 했다.
한 가닥 촛불처럼 피어오르는 봉홧불은 오늘도 서북지역이 무사하다는 신호인데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길마재 너머로 인왕산과 북악산이 초저녁 어둠을 안고 더욱 뚜렷이 다가온다. 하늘이 멀어지고 먼 산이 가까워지는 초가을 어느 맑은 날 해거름에 소슬한 가을바람이 수면을 타고 소리없이 들어와 문득 겸재(謙齋)의 그리움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인왕산 아래에는 식솔들이 기다리는 고향집이 있고, 북악산 아래에는 평생 뜻을 같이하는 그리운 친구 '사천 이병연(李秉淵)'이 있었다. 그래서 눈 감고도 그려낼 수 있는 정든 고향 산천의 모습을 먼 경치로 능숙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자신이 앉아 있는 양천 관아 서쪽 소악루(小岳樓) 일대의 한강 이쪽 경치도 서호(西湖)나 소동정호(小洞庭湖)로 부를 만큼 넓어진 한강의 너른 강폭과 함께 대담하게 그려내어 강과 산이 어우러지도록 했다. 돛단배 몇 척을 띄워도 드넓은 강물이 채워지지 않았던지 광주바위와 허가바위를 끌어내어 음양(陰陽)의 조화를 통해 화면 구성을 완성시켰다. 카메라로는 잡히지 않는 구도이다. 시각(視角)의 한계를 초월한 이런 화면
구성이 바로 겸재의 화성(畵城)다운 면모다.

양화진은 천혜(天惠)의 나루터 조건을 갖추고 있다.용산에서 가파른 낭떠러지 단애(斷崖)가 잠두봉 5km까지 이른다.
수심은 5~6m로 비교적 얕고 서호(西湖)로 불릴 만큼 넓고 잔잔했다.그래서 100톤급 이상의 선박이 정박활 수 있었기 때문에
하항의 입지로 적합하였다.나루 양쪽 강안에는 자연적으로 부두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나루에는 배가 드나들면서 정박하여
사람이나 물건을 내려주는 넉넉한 공간이 필요하다.여기에는 언덕배기를 중심으로 비스듬하게 모래사장 모래톱이 형성되어 배를
대기가 용이하였다.
양화진은 한강의 여러 나루 가운데 경관이 가장 빼어났다.그래서 뱃놀이 선유(船遊)의 명소로 유명했다.
양화진 일대의 버드나무 숲 잠두봉의 울창한 송림과 느티나무 그리고 선유봉의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루어 선유(仙遊)의 명성을 얻은 것이다.그래서 조선과 중국의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마음껏 즐긴 풍류의 명소 양화진이었다.
예로부터 잠두봉 일대를 '덜머리'라고 불렀다.덜머리는 들머리가 변형된 말로 머리를 든 형상을 말한다.
"서호는 도성에서 10리도 안되게 떨어져 있는데 산이 푸르고
물이 푸르러 형승이 나라에서 제일 간다. 호수 남쪽이 끊어진 언덕이 있는데
형상이 큰 자라 머리 같으며 혹은 잠두라고 불린다."-동국여지승람 강희맹의 글에서-
양화진은 다른 나루터에 비해 특이한 점이 많다.
첫째 통행의 길목이다.둘째 운송기지였다.셋째 선유의 명소였다.
네째 기찰의 초소였다.다섯째 군사전략의 요충지역이었다.
여섯째 처형의 장소였다. 일곱째 상습 홍수지역으로 주로 밑바닥 백성들이 살았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東)과 서(西)에 양(陽)과 음(陰)의 기능을 분산배치하고 있다.
궁궐도 동쪽에 동궁(東宮) 등과 같은 양(陽)의 시설을 배치하고 서쪽에는 선원전 등과 같은 음(陰)의 시설을 두었다.
한양도성의 경우에도 동서에 양과 음의 공간을 나눠 배치하고 있다.
'골로 간다.'는 말이 있다.옛날에 은평구 신사동에 고택(古宅)골이 있었다.그 고택골에는 화장장이나 공동묘지가 있었다.
그래서 고택골하면 죽음을 떠올렸다.여기서 유래해서 '죽인다'는 속된 말로 '골로 간다'가 쓰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음(陰)의 방향 도성 밖 서쪽에는 형무소 사형장 등이 비교적 많이 몰려있다.
양화진(楊花鎭) 군부대 자리에는 외국인묘지가 들어섰다.잠두봉 절두산에서는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다.
1866년 병인년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잠두봉 앞 백사장을 천주교 신자 처형장으로 결정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풍수지리에 아주 밝은 편이다.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예산으로 옮길 때
풍수상 최고의 명당 음택을 찾아낸 흥선대원 이하응이다.
"흥선대원군은 함부로 터를 잡아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을 겁니다.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서울의 끝자락이고 서울의 한강이 빠져나가는 이른바 파의 방향입니다.이러한 절묘한 위치를
풍수를 잘 아는 흥선대원군이 찾아내지 않았을까 합니다."-풍수학자 최창조교수-
풍수에서 명당을 나가는 물길은 기(氣)가 뭉처있는 혈처에서 볼 때 꼬리를 감추는듯 해야한다.
그런데 한강 물줄기는 새남터에서 시작해서 양화진을 지날 때 그런 원칙을 찾아 볼 수 없다.물길이 직선으로 뻗어있다.
한강의 물길은 새남터에서 북서진으로 직진해 김포반도와 강화도 사이로 그대로 허망하게 빠져나가고 있다.
이 모양을 풍수에서는 기(氣)가 그대로 빠져나갔다고 해서 설기(泄氣)라고 한다.가장 꺼리는 장소로 꼽힌다.
절두산 새남터 서소문 도성 서쪽에 기(氣)가 드센 곳으로 꼽힌다.군사훈련장이나 중죄인 처형장으로 쓰인 곳이다.
이곳 세 순교지는 물가에 있고 철길이 지나고 있다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기가 드센 자리를 육중한 철길이 물러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