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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역사탐방 뚝섬나루길은 한양대역에서 출발한다.그 역 4번 출구 왼쪽에 긴 의자가 놓은 '만남의 공간'에서 만난다.
한양(漢陽)은 양명한 땅 살기좋은 명당(明堂)이란 뜻이다.예로부터 수북산남(水北山南)은 바로 양(陽)의 명당이라고 했다.
여기서 수(水)는 한강이고 산(山)은 북한산이다.한강의 북쪽, 북한산의 남쪽에 자리한 양명한 땅 한양이다.
조선의 도읍지 한양은 초기부터 동서를 축으로 해서 도시와 건축물을 기능에 맞게 배치한다.
도성 동쪽에 넓디 넓은 벌판 살곶이벌에 국립말목장을 두었다.그 일대는 섬이 아니면서 섬으로 여겨 뚝섬이라고 불렀다.
그 뚝섬을 지나는 한강을 건너는 나루 뚝섬나루가 주요 나루로 아주 번성하였다.뚝섬에는 상왕이 머무는 궁궐 낙천정이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오면서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만들고 또 남기고간 이야기는 추억을 넘어 역사가 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다.
동쪽들 동교(東郊) 살곶이벌은 양명한 게 사람들이 살기에 참으로 좋은 땅이다.생기(生氣)가 아주 발랄한 양명한 명당이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도읍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무학대사는 옛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알려진 계룡산으로 내려가
산세와 지세를 살폈으나 아무래도 도읍지로는 적당치 않았다.발길을 북으로 옮겨 한양에 도착한 스님은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쉬었다.이튿날 아침 일찍 뚝섬 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니 넓은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방으로 지세를 자세히 살핀 스님은 그곳이 바로 새 도읍지라고 생각했다.
『음, 땅이 넓고 강이 흐르니 과연 새 왕조가 뜻을 펼 만한 길상지로구나.』
무학대사는 흐믓한 마음으로 잠시 쉬고 있었다. 이때였다.
『이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꼭 무학 같구나.
왜 바른길로 가지 않고 굳이굽은 길로 들어서느냐?』
순간 무학대사의 귀가 번쩍 뜨였다.고개를 들고 돌아보니 길 저쪽으로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이 채찍으로 소를 때리며 꾸짖고 있었다.
스님은 얼른 노인 앞으로 달려갔다.
『노인장, 지금 소더러 뭐라고 하셨는지요?』
『미련하기가 꼭 무학 같다고 했소.』
『그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요?』
『아마 요즘 무학이 새 도읍지를 찾아 다니는 모양인데,
좋은 곳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니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무학대사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공손히 합장하고 절을 올리며 말했다.
『제가 바로 그 미련한 무학이옵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곳이 좋은 도읍지라고 보았는데
노인장께서 일깨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더 좋은 도읍지가 있으면 이 나라 천년대계를 위하여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10리를 더 들어가서 주변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시오.』
『노인장, 참으로 감사합니다.』
무학대사가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순간,
노인과 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스님은 가벼운 걸음으로 서북쪽을 향해 10리쯤 걸었다.
이곳 지명이 갈 왕(往) 열 십(十) 마을 리(里) 왕십리다.
또 밟을 답(踏) 열 십(十) 마을 리(里) 답십리다.걸어서 십리를 더 갔다.
그때 스님이 당도한 곳이 바로 지금의 경복궁 근처였다.
『과연 명당이구나.』
삼각산, 인왕산, 남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땅을 보는 순간
무학대사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만면에 미소를 띤 스님은 그 길로 태조와 만나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여도성을 쌓고 궁궐을 짓기로 했다.
한양대역 4번 출구로 나가 육교를 건너 중랑천쪽으로 걸어가면 행당중학교 정문을 만난다.
행당중 정문 옆에는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민영휴계시설 전관원(箭串院) 표시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루를 건넜으나 도성 문이 닫혀 도성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나그네들이 찾는 여관이었다.
또 도성 문이 열리는 시각보다 더 이른 새벽에 나루를 건너려는 나그네들이 묶어가던 민영숙박시설이다.
"전관원이 살곶이다리 서북쪽에 있다.(箭串院 箭串橋西北)"
<동국여지승람> 권3에 나온 내용이다.살곶이다리 서북쪽 중랑천 북쪽 언덕께 바로 이곳이다.
이곳 전관원은 서대문 밖의 홍제원, 동대문 밖의 보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과 함께 도성 교외 사대원의 하나였다.
조선시대 도로가 발전하면서 역(驛)과 원(院)이 생겼다.역(驛)은 한양도성에서 전국 각 지방에 이르는 30리 길마다
도로가에 설치했다.이 역에서는 중앙과 지방간의 문서전달관문,공세(貢稅)의 수송 또는 관료들의 공무여행 때 마필의
잠자리나 먹이 등을 제공했다.
원(院)은 주로 공용여행자들의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역 가까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원은 고려시대부터 설치 운영되었다. 고려 때는 승려가 원을 지키고운영을 맡았다. 이 원에서는 해가 저물면 길손이
묵어 가게 하고 또 병이 나면 약을 베플기도 하였다.조선 초기에는 원우가 폐지되기도 하고 관리가 철저하지도 못해서
공용여행자의 숙식을 각 관, 역 혹은 민간에서 담당하는 일이 많았다.또 임진왜란 이후 파발제도의 실시와 함께
파발의 매 참마다 참점이 설치되었다.이 참점은 후에 흔히 주점 주막으로 불리는 거리집으로 발전되었다.
서울 성동구 행당동 산 1번지 한양대 캠퍼스 가장 높은 곳이다.살곶이벌과 왕십리벌 두 곳에서 올려봐야하는 산꼭대기다.
예로부터 가장 높은 자리에는 귀한 시설을 배치한다.사찰에서 높은 지대에 본전 건물을 두었고 사대부가에서는 사당을 가장
높은 곳에 배치하였다.동쪽 벌판 동교에서 가장 높은 곳에 마조단(馬祖壇)을 두었다.조선시대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말(馬)이다.
살곶이벌에는 국립말목장을 두었고 살곶이벌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말의 조상에 제사를 올리는 마조단을 둔 것이다.
조선 태조는 서울 동대문 밖에 마조단(馬祖壇)을 설치하고 중춘(仲春)에 길일을 택하여 제사를 지냈다.
마조란 말의 수호신인 방성(房星)의 별칭이다. 방성은 천자를 보위하고 천마를 관장한다. 혼인 풍속에서
신랑은 백마를 타고 가는데 이것은 말과 관련된 태양신화, 천마(天馬)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말은 태양을 나타내고 태양은 남성을 의미한다. 무속에서 말은 하늘을 상징하며 날개 달린 천마는 하느님(上帝)이
타고 하늘을 달린다고 전한다. 마조단은 말(馬)의 돌림병을 예방해 달라는 목적으로 말의 조상인 천사성(天駟星)
즉 선목(先牧). 마사(馬社). 마보(馬步)를 제사지내던 단(壇)으로 살곶이 다리 서쪽 언덕 위에 있었으며
순종(純宗) 2년 (1908)에 폐지되었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배구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던 올림픽체육관이다.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기업과 학교별 스포츠종목을 지정해 육성 지원하였다.한양대는 배구를 맡았다.
정부는 한양대 캠퍼스에 배구경기장을 건설해 양대 국제스포츠행사를 치르도록 했다.
한양대 배구팀은 1970년대 국내 최강이었다.당시 상무팀이 없었다.국가대표급 선수들은 군부대 체육팀 소속으로 군생활을 했다.
한양대 배구선수들은 당시 실업팀에서 최강의 배구단을 두고있는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김연준총장은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과의 인연으로 '윤필용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다.그 전후 사정은 이렇다.
김 총장은 군부 실세인 수도경비사 사령관 윤필용 소장과도 가깝게 지냈다. 당시 구연묵(具然默) 감독이 이끄는 수경사 배구팀은
국내 최강이었다.구 감독과 한양대 체육과의 이돈수(李敦秀) 교수가 가까웠다. 두 사람의 중재로 1971년 10월 김 총장은 윤필용 사령관을 만났다. 그후 구 감독이 수경사 배구팀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기에, 김 총장은 이봉모 비서실장을 대동하고 윤필용 수경사령관을 만나 300만원을 제공했다고 한다.당시 수경사 배구단은 1973년 8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대학생 대회였으므로 구 감독이 선수들을 한양대에 입학시켜달라고 부탁했고 김 총장은 8명을 한양대 체육과에 입학시켜주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윤 사령관이 저녁을 냈는데 이러한 두 사람 관계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72년 10월유신을 단행한 박 정권은 정부가 국회의원 정원의 3분의 1을 임명하는 ‘유정회’ 제도를 도입했다.
1973년 초 박정희 정부는 유정회 의원 명부를 확정했다.이 명단을 본 윤 사령관은 그가 정상배로 본 사람이 많이 포함돼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박 대통령을 찾아가 “유정회 명단에 문제가 있다”고 직언하자, 박 대통령은 “임자가 무엇을 안다고 정치 얘기를 해.
임자 맡은 일이나 잘해”라고 면박을 주었다. 기분이 상한 윤 사령관은 수경사 참모장과 함께 이후락 정보부장, 김시진(金詩珍) 민정수석, 청와대 대변인과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S(작고)씨와 술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윤 사령관은 이후락 부장을 향해 “각하가 망령이 난 게 아닌가. 형님이 각하를 쉬게 하고 다음…”이라고 말했는데, 그 순간 이 부장이 놀라 그의 입을 막으면서 술자리가 깨졌다. 이때부터 S씨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며칠 후 박 대통령, 박종규 경호실장과 골프를 치게 된 S씨는 이어진 술자리에서 “각하, 주변을 조심해야겠습니다”라고 했으나 박 대통령이 “술맛 떨어지는 소리 하지 말아”라고 하는 바람에 입을 닫았다. 그런데 다음날 박종규 실장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묻자, S씨는 윤 사령관이 술자리에서 한 말을 털어놓았다.
박 실장의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즉각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불러 조사케 했다.
3월7일 윤 사령관을 연행한 보안사는 26일 윤 사령관을 구속하고 이어 윤사령관을 따르던 군내 인사들도 구속함으로써 윤필용 사건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때 윤 사령관을 싫어한 정보부의 모 인사가 김 총장도 윤 사령관과 가깝다는 정보를 흘렸다.
그러자 바로 김 총장 주변에 대한 수사가 시작돼 대한일보의 수재의연금 사건으로 그를 걸었다.
대한일보는 적자를 보는 신문사였다. 신문사는 지면을 통해 접수된 수재의연금의 규모를 밝히기 때문에 떼어먹을 수 없다.
대한일보는 회사 자금이 달려 나중에 집어넣을 요량으로 일부를 변통했다. 이것이 윤필용 사건을 둘러싼 권력 실세들의 싸움에
빌미가 되었다. 대한일보는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라는 간단한 경구를 무시했기에 폐간과 더불어 사주가 체포되는 사태를 맞은 것이다.
1973년 5월 서울지검은 대한일보가 이전 해 거둔 수재의연금을 횡령했다며 자진 폐간케 하고 사장인 김연준씨를 구속했다.
언론사 사주와 대학 경영자 자리에 있던 김연준씨는 하루아침에 파렴치범이 됐다. 그러나 운 좋은 김 총장은 이번에도 용케
빠져나왔다. 구속 두 달 후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2심과 3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윤필용 사건은 박정희 정권 후기의 군부 인맥지도를 바꾸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양도성 서쪽에서 시작해 도성 심장부를 관통해 도성 밖 동쪽으로 흘러가는 청계천이다.원래는 단순한 자연하천이었다.
고려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짓고 한양을 남경으로 경영했다.그때만해도 이 자연하천은 크게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태종 이성계는 백악 남산 낙산 인왕산 내사산을 도성으로 둘러싸고 한양 도읍지를 조성한다.이 내사산 안 서쪽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흘러가는 자연하천을 명당내수로 여기고 관심을 쏟았다.태종 때 자연하천 준설작업을 벌인 뒤 개천(開川)이라고 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청계천은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 기능을 맡게된다.
청계천은 내사산에서 흘러 들어오는 지천을 통해서 서울 곳곳에 생명수가 전달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서울 곳곳에서 버려지는
더러운 것이 청계천을 통해서 배설됨으로써 도시 전체가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청계천은 수도 서울의 중요한 배설기관이었다.
개천은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였다.개천주변은 도성 내 대표적인 유흥가였다.시장이 서고 사람이 모여들고 돈이 모여드는 곳에는
자연소비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광통교 주변 시전 행랑 뒤에는 색주가 주사(酒肆) 기방 도박장 등 유흥시설이 밀집되었다.
그 곳은 도성사람들의 놀이터였다.또 아낙네들에게 유용한 빨래터였다.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터였다.
일제강점기에 자연하천 개천(開川)은 오늘의 청계천(淸溪川),아주 예쁜 이름을 얻는다.
청계천은 당시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였다.청계천 주변은 도성 내 대표적인 유흥가였고 또 도성사람들의 놀이터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개천이라는 이름 대신 청계천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또 여러차레 개수작업도 벌였다.
해방과 6.25한국전쟁 이후 청계천 변에는 판자촌이 형성되는 등 크게 변화한다.
1958년부터 시작한 청계천 복원공사는 광교에서부터 마장동까지 청계천을 완전 복개했다.
그 위로는 길이 5.6킬로미터 폭 16미터의 고가도로를 건설하였다.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상징물로 등장한다.
청계천을 덮어버린 콘크리트 구조물은 서울의 흉물로 골치덩어리가 된다.
2002년 7월 청게천 복원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간다.1년동안 각계 의견과 전문가들의 진단 검토를 거쳤다.
마침내 2003년 7월 청계천복원공사를 시작된다.모두 3867억원의 비용을 투입해 2년3개월안에 복원을 마무리한다.
청계천은 서출동류(西出東流)의 명당수였다.서울의 도시팽창으로 서출(西出)의 수원(水源)을 학보하기가 어려웠다.
동쪽 뚝섬 근처 한강에서 물을 전기로 광화문까지 끌어올려 동쪽으로 흘려보내야 했다.동출동류(東出東流)의 청계천이다.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 고가도로가 짓누르고 있던 청계천이었다.그 고가도로 밑에서는 생활하수 등 각종 쓰레기가
쌓여 몹시 썩어가고 있었다.서울의 흉물, 시멘트로 복개된 청계천에 그 고가도로를 걷어내고 물길을 내고 나무와 꽃을 심었다.
서울 도심지 또하나의 명물 공원으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새 물길에는 새들이 찾고 물고기도 몰려 서울의 허파기능을
하고 있는 청계천이다.
청계천 하류는 인체에 비교하면 항문에 해당한다,그 항문에 해당하는 곳이 장안평이다.그곳에 하수종말처리장을 두었다.
장안평은 서울에서 마지막 쓰레기매립장이었다.그 후 서울의 각종 쓰레기는 난지도로 옮겨 처리했다.새로 확장된 장안평에는
대규모 중고차매매장이 들어섰고 지하철차량기지창을 두었다.그 항문을 지나온 청계천은 북에서 내려온 중랑천을 만난다.
두 하천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도성 쪽으로 바라보면 청계천이 꾸불꾸불 흐르면서 잔뜩 감싸고 있어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풍수에서는 이렇게 기(氣)를 감싸주는 걸 속기(束氣)라고 한다.그 속기가 아주 실한 곳은 명당으로 꼽는다.청계천은 그 속기가
제대로 기능을 해 한양의 내명당수로서 출중한 몫을 하고 있다고들 한다.
의정부 쪽에서 발원해서 남행하는 중랑천은 청계천을 만나 응봉과 저자도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 중랑천은 왼쪽 살곶이벌을 끼고 저자도 쪽으로 흘러 저자도 부근에서 한강을 만난다.그 한강은 한양을 외부에서
감돌아 서쪽으로 힘차게 내닫고 있다.한강은 동쪽에서 발원해서 서쪽으로 흐른다.청계천은 서쪽에서 발원해서 동쪽으로
흘러 마침내 한강을 만난 것이다.한강은 동출서류(東出西流)의 흐름이다.청계천은 서출동류(西出東流)의 속성을 안고 있다.
이 두 물길은 서로 역수(逆水)의 기능을 하고 있다.두 역수는 만나면 대단한 생기(生氣)를 분출하는 시너지효과를 낸다고 했다.
이 두 역수의 왕성한 시너지효과 때문인지 서울은 대단한 명품도시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