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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살다가 마주친 것들에 대한 所懷
- 김동진 시집 (다시 갈 변곡점에서)를 읽고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수필가)
삶은 우연과 필연의 연속이며 때로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만남을 인과관계라는 말로 그 우연의 발화점을 애써 부정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삶에서 마주치는 것들에 대하여 인식론적 세계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른바 사물과 언어의 관계이며 인식과 미인식에 대한 그 경계를 형상화하는 것이 시인의 몫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주치는 것들이라는 것은 관념적인 말이 아니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꽃 한 송이, 옷깃을 스치는 사람들, 겨우내 지친 눈앞에 불 듯 다가온 봄 햇살 한 줌, 불면의 밤을 걷다 마주친 달빛, 이 모든 것들은 나와 나의 인식 앞에서 생명을 얻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저 지나칠 수도 있는 것 앞에서 삶의 변곡점을 고뇌하고, 지나온 삶의 그 경유지마다 남겨놓은 나의 흔적을 보듬어 보는 것과 미래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글로 남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도 수행자가 되는 것이며, 적빈의 가슴에 뭉근한 달빛을 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동진 시인의 시가 그렇다. 지나쳐버릴 것 같은 것에 대하여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눈빛은 삶이라는 것에 대하여 시인이 체득한 진리의 빛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가 보는 세계의 단면에 존재하는 우리 이웃과 지인의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펼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시문학은 사람들의 가슴에 스토리텔링의 한계를 넘어 아릿한 감동의 이미지를 주고 있다. 자음과 모음만으로 이루어진 글자에는 생명이 없다. 하지만 글자에 혼을 불어넣기 시작하면 글은 생동감을 갖는다. 때론 가을날의 전어처럼, 때론 겨울의 숭어처럼 제철을 만난 펄떡 뛰는 것이다. 김동진 시인의 시는 편마다 영혼을 갖고 있다. 그 영혼의 메시지를 듣는 날이며 답답한 가슴 한구석 저 밑에서 다가오는 시원한 바람의 한 줄기를 만날 수 있다. 시인이 부끄러워 한 것에서 나 역시 부끄러워지며 그가 경외한 것에 대하여 나도 같이 경외하게 되는 것을 소통이라고 하며, 공감이라고 한다.
발자국 한 점 세상에 못 남긴 내 발
그 발에 신겨 닳고 해진 신발들에게
회갑(回甲)을 맞아
헌주(獻酒) 한 잔 붓고 싶다『다시 갈 변곡점에서』부분
살다가 지친 날, 김동진 시인의 글귀를 경청해 보자. 행간에 숨 쉬는 그가 본 세상을 엿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겸허해진다. “겸허”라는 단어에 가장 어울리는 시인이 김동진 시인이다. 그가 발자국 한 점 못 남긴 자신의 신발에 헌주 한 잔 붓고 싶다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와 반성, 바로 그것이 시인이 살아온 육십년 넘는 세월에서 그 문맥에서 겸허를 배우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동진 시인이 펼친 몇 편의 시를 때론 문학적인 관점에서 때론 삶의 동반자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며 그가 하고 싶고 남기고 싶은 그만의 알고리즘을 통해 그가 형상화한 언어의 메시지를 공감해 보자. 그 속에 내포된 시문학적 통찰을 내밀하게 볼 좋은 기회이며 우리 삶의 모호한 부분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손이 되고 싶던 날
80세가량의 노부부가
공원길을 산책하고 있습니다
둘 다 하얀 모시옷을 입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앞에서 걷고
두서너 걸음 뒤를 할머니가 따라 걷고 있습니다
잔디밭 풀잎은 투명한 이슬을 구르고 있습니다
여러 새들은 눈썹달을 닮았습니다
나무들은 하늘을 힘차게 밀어 올리고 있습니다
한참을 지난 지금도
흰 모자 할아버지는 앞에서 걷고
흰 치마 할머니는 두서너 걸음 뒤를 따라 걷고 있습니다
학이 걷는 것 같습니다
나는 문득 손이 되고 싶어집니다
노부부 곁으로 바람으로 다가가
서로 손을 살며시 잡게 하고 싶습니다 『손이 되고 싶은 날』전문
여느 날 공원을 걷고 있는 노부부를 보았다. 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앞서거니 정겹게 걷는 어르신의 모습이 허공을 날고 있는 학처럼 보인다. 그저 지나칠 수 있는 풍경이며 일상의 한 장면이지만 시인은 문득, 자신이 어르신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매개체가 되고 싶다는 상상을 한다. 손이 되고 싶고 바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앞서거니 걷는 어르신들의 손을 서로 맞잡게 하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그 속내가 시인의 마음이며 세상을 보는 눈이다. 사회가 분화되고 핵가족시대로 접어들면서 노인에 대한 공경의 마음은 저만치 사라져 가는 사회가 되어간다. 때론 짐으로 때론 나와 상관없는 타인으로 노령화 사회는 그렇게 가족이라는 유대관계를 침탈하고 있다. 손을 잡게 하고 싶다는 말 속에는 가족이라는 말과 유대관계라는 말이 혼합되어있으며 더 나아가 공경과 사랑의 실천이 담겨있을 것이다. 시인의 눈은 情의 불협화음에 대하여 분연히 붓을 들었으며 일상어로 우리 자신을 꾸짖고 반성하게 하는 것이다. 시를 어렵게 쓰기는 쉽다. 하지만 철학을 쉽게 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연스럽게 읽히면서도 쉽게 읽히면서도 성찰의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단단한 사유에 사유를 더한 깊은 사색이 되는 것이다. 김동진 시인의 시가 대부분 일상어로 말하듯이 문맥을 가져가면서도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과 감각의 전이가 된다는 것이 그 증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흰 모자 할아버지는 앞에서 걷고
흰 치마 할머니는 두서너 걸음 뒤를 따라 걷고 있습니다
학이 걷는 것 같습니다『손이 되고 싶은 날』부분
흰 모자와 흰 치마가 연상하는 것은 세상이다, 하늘과 구름과 대지의 순결과 순수의 의미를 수렴하는 것이며 두서너 걸음 뒤는 전통적인 유교사상에서 비롯된 서로에 대한 공경이며 시인은 그 모습을 고고한 학의 걸음에 비유한다. 쉬운 문장이면서 쉽지 않은 배후를 가진 문장은 여러 번 생각하게 하고 생각의 끝에 반성의 기회를 주는 것 같다. 단순한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아닌 조합의 연결고리와 단어의 교집합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를 나도 모르게 내 가슴에 새기게 되는 것이다. 김동진 시인의 소회가 유언의 교훈으로 탈바꿈되어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연에서 그가 발견한 그만의 법칙에 귀 기울여보자.
나무들이 소통하는 법
나무들이 세상을 차질 없이 지배하는 데는
이를 연출하는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계절이 설계한 프로그램에 맞게
각자 맡은 역할을 다 한 역사(役事) 때문이리라
본래 나무들은
서로 소통할 목소리를 가진 것도 아니고
전달을 위해 걸어 다닐 다리도 없다
간혹 나무들이 소리 내며 움직이는 듯 하는 것은
장애가 심한 바람의 장난질이다
나무들은 수화의 달인이다
마주 보이는 사이에는 수화로
산 너머 먼 곳에는 나무 문자로 송. 수신을 한다
철에 맞게 빈틈없이 분장을 하고
기온에 맞게 갈아입은 통일된 옷들을 보라
살기 위해 소리 지르고
먹기 위해 뛰어다니는 장애의 동물들을 위하여
철따라 먹거리를 준비해 주는 일
쉬어갈 품을 만들어 주는 일
그 일들을 완수하기 위해
쉼 없이 수화를 보내는 것이다
밤새 문자 자판을 누르는 것이다. 『나무들이 소통하는 법』전문
시제, 나무들이 소통하는 법에서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는지? 들에 산에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도 생명이 있을 것이며 생명과 생명은 다만 사람의 언어가 아닌 자신들의 언어로 소통하기에 우리가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그들의 소리를 혹 청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동진 시인은 나무들의 소통에 대하여 [役事]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역사의 사전적 의미는 규모가 큰 토목이나 건축 따위의 공사를 말한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하느님이 행하여 이룸, 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섭리라고 한다. 계절이 설계한 프로그램에 맞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한다. 목소리를 가진 것도 아니고, 이동할 다리조차 없는 나무들, 하지만 그들은 목소리 대신 수화를 주고받는다. 시인은 그들의 주고받는 수화에서 나무들의 마음을 읽는다.
살기 위해 소리 지르고
먹기 위해 뛰어다니는 장애의 동물들을 위하여
철따라 먹거리를 준비해 주는 일
쉬어갈 품을 만들어 주는 일
그 일들을 완수하기 위해
쉼 없이 수화를 보내는 것이다
그들이 소통하는 이유는 소리 지르고 먹기 위해 뛰어다니는 장애의 동물들에게 철
따라 먹거리를 준비해 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들의 마음을 독자에게 전이시켜 주는 것이다. 나무는 자연의 일부이지만 달리 보면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조건 없이 대가 없이 모두 내어주는 것이다. 비록 말은 못하지만, 언어라는 수단은 없지만 부단하게 손을 흔들어 저 먼 곳의 다른 나무와 소통하는 이유를 부모에 빗대어 말하는 그의 시선이 참 말갛다. 원인 없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갈대는 움직이는 것이며 부모가 있기에 자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잊어버린다. 소통하는 이유에 대하여, 나무의 언어에 대하여, 쉼 없이 수화를 주고받는 이유에 대하여, 살다 보니 잊게 되는 것이다. 김동진 시인 대부분의 시가 그렇듯 깊이 있는 철학을 쉽게 형상화하는 언어적 연금술이 대단히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흔들리는 나무의 손짓을 그저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시의 발화점으로 인식하고, 그 메시지를 의뭉스럽게,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시가 가진 매력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법정 스님의 말씀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앞모습은 허상이고 뒷모습은 실상이다.” 무엇을 볼 때 허상이든 실상이든 조목조목 바라보는 일, 그것이 시인의 심상이라는 생각이다. 나의 것으로 네 것을 본다는 것은, 본 모습의 본질과 본질의 알맹이 속을 투영해 보는 일이다. 그 속 어딘가에 태초 이전의 생명이 있고, 여전히 팽창하는 우주가 있고, 막다른 골목을 휘돌아 나가는 바람의 끄트머리가 있다. 시는 아주 작은 것에서 출발하여 다시 아주 작은 곳으로 되돌아오는 문학의 한 장르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은 것의 의미를 통찰하기 위하여 우리는 부단하게 시공부에 매진하는지도 모른다. 『시적 대상의 관찰과 통찰- 사유의 확장에 대한 모색/김부회』부분 인용
숨겨진 폭력
화려하게 잘 꾸민 새장 안
관상용 새들은 나는 것 잊은 지 오래다
모양 나게 잘 지은 개(犬) 진열장
강아지들도 이제 달리지도 못한 인형 다 되었다
풍요로 가득 찬 포도밭 같지만
그 포도송이들 하나 같이 철망에 묶여 검게 타들고 있다
수려한 정원 길을 걷다보면
여러 관상수들 이리 잘리고 저리 잘려
하! 조각처럼 잘 다듬어져 있다
우리집 거실에도
분재 한 그루 10년 되었는데도 키는 그대로다
숨겨진 잔인한 폭력들
누가 자행한 짓인지 들추어 봐야한다 『숨겨진 폭력』전문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내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폭력과 조우하게 된다. 폭력의 내면을 잠시 들여다보면 나를 위한 폭력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관상용 새들과 쇼윈도에 진열된 강아지들의 인형 化, 철삿줄에 꽁꽁 묶여있는 포도송이들, 잘 다듬어진 정원의 정원수들, 이 모든 것들의 자연 섭리 가운데 생성되어야 할 자유가 속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새는 허공을 날아야 하며, 강아지들은 뛰어야 한다. 포도송이는 햇살에 제 살점을 달콤하게 익혀야 하며, 나무는 푸른 잎을 한없이 뻗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의 이기적인 이익을 위하여 우린 대부분의 자연적인 생태를 스스럼없이 구속하며 살아간다. 누구 하나 그 구속의 의미가 초래하는 폭력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시인의 망막은 외면되고 소외된 우리의 폭력에 대하여 일갈을 한다. 사회적인 인식은 사소한 것의 현상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의미부여에서 시작한다. 사소하다는 것은 사소하기 때문에 사소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반대로 사소한 것의 이면에 존재하는 중요한 것을 놓치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현상의 반대를 볼 줄 안다는 것은 인식의 확장이며, 그 인식의 확장을 통해 자신만의 메시지를 만들어 내는 세계관의 출발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식의 창을 통해 삶을 반성하는 것이 사람이 갖고 있는 문화이며, 念이라는 생각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파스칼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현상을 본 것에서 멈추거나 스쳐 지나가는 것은 눈동자의 일반적 행위이다. 하지만 현상을 대뇌에 전달하고, 습득된 지식을 통해 현상의 배후를 가늠할 때부터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집 거실에도
분재 한 그루 10년 되었는데도 키는 그대로다
숨겨진 잔인한 폭력들
누가 자행한 짓인지 들추어 봐야한다 『숨겨진 폭력』부분
시인이 본 세상의 구속과 속박, 사람의 이기적인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을 마주치다 결국 시인 역시 10년 된 분재를 바라보며 자신 역시 그 이기적인 사람의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숨겨진 폭력의 배후를 되짚어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기 쉽지 않기에.......
하지만 김동진 시인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 그것도 숨겨진 폭력이라는 위태한 말로 자신을 반성하고 그 반성의 메시지를 독자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이것이 시인이 가져야 할 덕목이다. 타인의 잘못만 질타하고 자신의 잘못은 감추는 것이 보통 사람의 습성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무의식이라는 변명을 하면서도 그 변명에 수긍하게 한다는 것은 깊은 성찰이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질서를 배운다.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성장과 환경에서 사람의 모습을 반추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나 역시 보통사람의 기준에서 한 치도 부합됨 없는 보통사람이라는 점이다. 나와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그들과 전혀 다름없다는 말은 반성의 깊이가 포괄적이며 고백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반성 없는 공감은 공감의 영역을 넓히기가 쉽지 않다. 고발 수준에 묶일 수밖에 없다. 나의 공범 여부를 먼저 밝히고 타인에게 우리의 잘못을 인식하게 하는 글의 힘은 대단히 위대하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진정성을 획득하는 일인 것이다. 진정이 없는 글은 문장을 비만하게 하고 느끼하게 만든다. 기름기 쫙 빠진 담백한 글에서 묻어나오는 담담한 고백이야말로 시를 시답게 만드는 원천인 것이다. 숨겨진 폭력의 배후를 같이 더듬어 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닌 [恣行]의 원인을 선명하게 밝히는 수단인 것이다. 자행은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거나 일을 저지르는 행위를 규정하는 말이다. 과연 누가 자행의 범주 외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한 번쯤 숨겨진 폭력의 범위에 대하여 심도 있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시를 보는 시선이 잘 벼려진 작품이다. 직접적인 은유와 간접적인 은유의 경계선에서 시가 가진 은유의 본질은 자각일 것이다.
‘무늬’와 은유와 신화
문학(文學)은 어원으로는 ‘무늬에 대한 해석’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문양(文樣)이라는 말처럼 현실이라는 바탕위에 의미와 가치를 표현하는 하는 무늬(기호 그림)로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거지요. 이때의 ‘무늬’란 ‘밤하늘에 뜬 별’을 상상하면 됩니다. 인간의 어두운 마음 같은 밤하늘에 별은 ‘무늬’로서 도드라져서 인간의 시선을 끌고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천문(天文)’ 즉 하늘의 문학은 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과 의미를 해석하는 일입니다. 과거에 사용한 해석은 점성술이었습니다. 별자리는 인간에게 은유와 상징으로 풍부한 신화와 우화를 제공합니다. 언어와 신화는 세계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무늬’이며 은유라는 것이 이해되셨을 겁니다. 언어의 본질은 상징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은유의 기능과 속성은 실재(세계의 부분)의 특성을 다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사물을 눈이 보는 대로 보지 않고 은유로(다른 표현으로)보고자 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우리 무의식에는 사물은 우리 오관이 감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이며 관계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정원에 핀 장미를 ‘장미’로 보지 않고 시인은 다른 상황의 장미를 봅니다.
병든 장미
William Blake
오 장미야, 너 병들었구나
울부짖는 폭풍 속에서
밤에 날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벌레가
진홍빛 기쁨의
네 침대를 찾아내어,
그의 검고 비밀한 사랑으로
너의 생명을 파멸시키는구나
『 詩와 '아바타(Avata)' - 김백겸』부분 인용
시의 선택적 은유에 존재하는, 문장의 드러나지 않는 사유의 깊이에 존재하든 그 포괄적 은유가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게 되면 타인의 삶뿐만 아니라 내 삶의 단면 역시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시적 생명력이라는 말로 대신할 뿐이다.
◎맺으며
바퀴의 일상
바퀴는 바퀴벌레처럼 기는 속성이 아닌데
왜 이름이 `바퀴`냐를 따지는 것은
현대의 인간이게는 별 실익이 없는 시비다
바퀴는 서로 다가갈 수 없도록 문명이 만든 간격을 두면서
평행으로 하루를 도로에 다 바르는 것이다
조립되어진 서로의 조여진 몸뚱이를 보면서
시간도 끝이 있음을 눈빛으로 위로하는 것이다
달리는 일이 썰매를 끌고 설원을 달리는 순록의 낭만이 아니다
피부가 닳도록 비벼대야 하는 생존의 질주인 것이다
무참히 밟고 넘었던 도로들의 아픈 몸부림을 기억한다
삶의 무게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몸체의 중량을 느끼면서
거리로 번져 나오는 배기가스의 농도를 측정한다
신호위반 건 수와 사고발생 건 수도 기록한다
소음의 `데시벨` 수치를 확인하고
내다 버린 거리의 오물 배출량을 산출한다
해마다 늘어나는 터널과 교각의 숫자를 파악하고
별빛을 차단하는 도심의 불빛 양과 조도를 체크한다
그리고 하루를 정산한다
바퀴는 휴식이 있는 시간에는
오염되어가는 자연을 쓸어 모아 검게 바른다 『바퀴의 일상』전문
삶은 전진의 연속이다. 오늘이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라는 말은 전진의 방향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말이다. 목적지로 가기까지 우리는 발은 바퀴를 달고 다닌다. 바퀴는 서로 맞물리지 않는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해야 잘 굴러갈 것이며 브레이크와 조합된 서로의 몸통을 보면서 스스로 위안으로 삼거나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겨울의 낭만을 즐기기 이전에 제 피부가 닳도록 바닥을 비벼야 하는 생존을 먼저 담보하는 것이다. 바퀴가 감내해야 할 것은 구멍 난 도로와 바퀴에 얹혀진 몸체의 중량이며, 때론 중병에 들지 않기 위해 배기가스와 데시벨 수치를 수시로 확인해야 하며 피부의 건조 수치와 닮음의 수치를 빼곡하게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수시로 도심을 질주하는 다른 몸체들의 불빛과 난반사에도 신경 써야 하며 주차장에 주차된 순간 숨 가쁜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다.
바퀴는 바퀴벌레처럼 기는 속성이 아닌데
왜 이름이 `바퀴`냐를 따지는 것은
현대의 인간이게는 별 실익이 없는 시비다『바퀴의 일상』부분
우리는 이 시에서 속성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속성은 사물의 특징이나 성질을 일컫기도 하지만 철학적으로 볼 때 어떤 실체에 필연적으로 귀속되는 성질을 말한다. 필연적 귀속은 다른 말로 치환하면 삶에 필연적으로 귀속되는 속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 없이 만들어지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인연이라고 한다. 그 인연의 고리를 가장 낮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 바퀴라고 볼 수 있으며, 어쩌면 바퀴는 [나]라는 본질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나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바퀴가 될 것이며, 되어 줄 것이며, 바퀴 자체에 멈출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본질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 역시 만들어질 것이다. 생은 속성이다. 그것은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에서 보호해 주어야 할 대상인 동시에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시가 그런 것이다. 시는 자신에 대한 부단한 성찰이며 타인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며, 체득한 진리에 대하여 시라는 장르를 빌어 자신만의 글 색으로 말하는 것이다. 낭만인듯하나 낭만이 아닌 현실이며,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나 몸통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바퀴가 비로소 쉴 때는 주차장에 주차되어 완전히 멈춘 때인 것이다. 우리 생의 시계는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세월이 지나고 제 수명을 다한 바퀴가 새로운 바퀴로 갈아 끼워질 때, 구세대는 가고 새로운 세대가 도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 장착될 바퀴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도로를 지나왔는지에 대하여 설명해 줘야 한다. 도로 상황에 대하여, 기상악화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하여, 거리의 변화에 대하여, 생의 도로를 질주하며 느꼈던 것과 마주친 것들에 대한 내 감정과 사유와 철학을 낱낱이 고백하고 새로운 바퀴에게 다음 생의 몸통을 넘겨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라는 것이다. 시는 감각과 오관이 받아들인 경험과 깊이를 남겨두는 일이다. 좀 더 진화될 다음 세대의 도로와 불빛들에 대하여 어린 바퀴들이 수월하게 적응하게 하려고 끊임없이 소회를 남겨줘야 하는 것이다. 김동진 시인의 [다시 갈 변곡점]의 시집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덧 환갑이 되어 인생을 다 살았나 싶었는데 그 접점에 와 보니
다 산 것이 아니고 덤으로 더 살날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 부끄럽게도
감사하고 행복함을 느낀 날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나를 위해 조건 없이 닳아온 신발에게 이제는 내 몸을 주겠다고
굳게 다짐하던 날이 있었습니다.『저자 서문』부분
시인이 시를 쓰는 극명한 이유를 그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그 담담한 말의 배후에 은밀하게 담긴 [내 몸을 주겠다고]의 의미를 되새겨봐야 한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반성과 사랑 후세에 대한 그의 진솔한 메시지를 여백처럼 숨겨두었다는 말이다. 불현듯 시집을 펼치면 아무 곳에서나 아무 때나 시인이 형상화 시킨 알레고리의 단면들에서 진지한 삶을 배우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김동진 시인만의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은 화법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 같다.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 오래 묵혀둔 간장 같은 시집 출간에 따듯한 찬사를 보낸다. 김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