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時代)가 만드는 시인의 상(像)
로마의 시인 버질*은 책상 앞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 그 모습은 중세(中世)의 교회법학자(敎會法學者)와 같이 근엄하기만 하다. 13세기 때 고향 만토바에 세웠던 버질의 조상(彫像)이다.
그러나 백년이 지난 뒤, 르네상스기에 만들어진 버질의 모습은 아주 판이하다. 버질은 자랑스럽게 서 있는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그는 광장(廣場)으로 나와 있으며, 글을 쓰고 있던 그는 웅변가 같은 자세로 청중을 향해 무엇인가를 외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중세 (中世)’와 ‘르네상스’의 차이라고 바노프스키는 말하고 있다. 똑같은 시인이지만 중세인이 생각한 버질은 방안에 있었고, 앉아 있었고,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인이 생각한 버질은 밖에 있었고 서 있었고, 말하고 있었다. 중세의 버질은 혼자 있었고 르네상스의 버질은 청중들과 함께 있다. 중세인이 만든 버질은 폐쇄적(閉鎖的)이고 내성적(內省的)이었지만 르네상스인이 그려낸 버질은 개방적이고 행동적이었다.
앉아 있던 버질이 한번 일어서는데 백년이 걸렸고, 방안에 있던 버질이 광장(廣場)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또 몇 백 년이 걸렸고 혼자 글을 쓰던 버질이 대중(大衆)들과 말하는 버질로 변하는데 중세의 이천 년이 지나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도 한 시대 속에서 시인의 모습을 조각하고 있다. 아침마다 끌질을 하고 계절마다 그것을 구어내고 있다. 밀실(密室)에 앉아 있는 시인인가? 광장에 서서 외치는 시인인가?
어느 쪽 시인도 아니다. 우리가 욕심내는 그 시인의 모습은 밀실과 광장을 동시에 살고 있는 시인이며 글을 쓰며 동시에 말을 하는 사람이며, 앉아 있는 것과 서 있는 것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그런 시인이다.
그렇게 해서 시대(時代)의 시각(視角)과 그 특수한 자세(姿勢)에서 풀려나는 영원의 상이어야 한다. 어는 때든지 시인이 한 자세로 조각처럼 굳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삼백육십 도의 둥근 탁 트인 방위(方位) 속에서 꿈틀대며 움직이는 시인의 상, 누워 있거나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기어 다니거나 걷거나 뛰거나, 어느 한 동작(動作)이 아니라 그 모든 동작을 함께 갖는 움직이는 조상(彫像)이 되어야만 한다.
이 시대가 만드는 시인의 상은 중세나 르네상스처럼 한 자세로 상징되는 조각(彫刻)이 아니라 스크린이나 TV 화면(畵面)의 그것처럼 움직이며 꿈틀대는 다양(多樣)한 동작 속에 있는 것이다.
* 버질 (Publius Vergilius Maro, 70-19 B.C.) : 로마의 위대한 시인,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의 영어식 발음. 죽은자들의 세계를 여행하는 순례자로 길잡이. 로마의 건국 신화가 담긴 서사시 ‘아이네이스 The Aeneid’의 저자. 단테는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는다.
『신곡』에서 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지옥에서 연옥까지 안내, 천당은 베아트리체가 안내한다.
* 바노프스키( Erwin Panofsky 1892~1965), 독일 출신의 미술사학자.
미술을 정신사적 배경 속에서 포착하는 이코놀로지 방법을 확립하여 제2차 대전 후 의 미술사 연구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중세 말기에서 르네상스기에 걸친 도상표 현의 의미 해석과 시대정신과의 관련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지은이: 이어령
출천 : 『문학사상』19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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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으셨다. 어머니가 만드신 깍두기나 나박김치 맛은 특히나 일품이었다. 다른 데서 그런 맛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 비결은 특별히 비싼 식재료를 써서가 아니라 식구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랫말 사는 선모 형님은 그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친구였는데 우리 집에 자주 일을 하러 왔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러 해가 지난 어는 날에 술에 취해 아버지 생각이 났는지 우리 집에 와서 말하기를, 다음날 우리 집에 일을 맞추었으면 ‘내일은 하루 종일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겠다’는 생각에 기뻤다고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못 잊어 했다.
어머니는 대부분 우리 밭에서 기른 채소들을 식재료로 하여 음식을 만드셨다. 그랬음에도 식단은 다양하고 풍성했다. 부모님이 원체 부지런한 분들이어서 밭 구석구석에 이것저것 알뜰히 가꾸셨다. 돌담을 따라 길게 정구지 밭이 있었고, 병순이 누나네 집 울타리 옆에는 늘 도라지와 쪽파, 오이, 가지를 심었다. 서쪽 돌담 너머 모시밭 옆에는 토란밭, 그에 잇대어 고추밭이었다. 어머니는 가끔 우리 집 형편이 풍족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셨다. 좀 여유가 있었으면 다양한 음식을 만들 기회를 가져 출가를 앞두고 있던 누님이 안목을 높일 수 있을 거라 하셨다.
막둥이인 나는 자주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었다. 어머니가 음식을 만드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매캐한 연기에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고, 아궁이의 열기로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기도 했다. 평소에 먹을 수 없었던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조청을 골 때가 가장 좋았다. 할머니 제사가 섣달 초여서 그때 조청을 고아 한과와 매자과*를 만들어 설과 할아버지 제사 때까지 썼다. 남들은 조청을 더 고아서 갱엿*을 만들기도 한다는데 우리는 엿을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불만이었으나 조청을 골 때마다 무를 넣어 정과를 만들었다. 가래떡에 찍어 먹는 조청맛도 좋았으나 정과의 맛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여러 음식을 먹으면서 내가 그 맛을 몰랐던 것이 청포묵이다. 도토리나 상수리로 쑨 묵은 떫은 듯 톡 쏘는 맛이 좋았다. 그러나 청포묵은 그와 달리 밋밋하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어쩌다 청포묵을 드실라치면 맛이 좋다는 말씀을 몇 번이나 거듭하셨다. 이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 우선, 그렇게 어떤 것에 대하여 연거푸 찬사를 보낸다는 것이 평소의 어머니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또 내가 먹어 보면 오히려 도토리묵 보다 맛이 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훨씬 뒤에, 내가 지긋이 나이가 들어 달거나 신 것이 썩 달갑지 않게 되어서야 그때의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젊어서는 무엇이든지 강한 맛이 좋았다. 맵고 짠 것, 시고 단 것이 좋았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이런 것에 점점 입맛을 잃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맛이 싫어져서 어머니의 입맛처럼 변해 버렸다. 오래오래 먹고 먹어도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은 짜릿한 맛이 아니라 오히려 심심한 맛이다.
입맛만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옷의 색깔이나 디자인은 젊어서도 점잖은 것을 선회했으니 그렇다 치고,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취향이 변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변한 것은 사람에 대한 것이다. 졸랑거리며 앞장을 서는 사람보다 있는 티가 나지 않게 중간이나 그 뒤에 서는 사람이 좋다. 깔깔대거나 질질 짜는 사람보다 그 감정을 꿀떡 삼키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묵지근한 사람이 좋다. 무엇이고 한번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든지 이루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보다 아니다 싶으면 내려놓을 줄도 아는 사람이 좋다.
젊어서 한때 가깝게 지내던 이가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이라고 말하여 그 뒤로 그와 깊게 틈이 생기고 말았다. 순리를 따르지 않고 지나치게 악착스러운 것이 왠지 싫었다. 그런 사람은 싫기만 한 게 아니라 무서운 생각까지 든다. 나는 가끔 “ 주여,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라는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을 나에게 읊어준다.
이제 내 입맛은 음식이나 사람이나 다 같아졌다. 짜릿한 맛보다는 깊은 맛, 그 여운이 오래가는 음식과 사람이 좋다. 그러고 보니 내 주위에는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다. 참 다행이다.
*매자과:유밀과의 하나. 밀가루를 반죽하여 얇게 밀어 적당한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썬 다음 가운데를 세로로 길게 째서 한쪽 끝을 그 구멍으로 집어넣고 뒤집어 꼰 다음 기름에 튀겨 만든다.
*갱엿: 푹 고아 여러 번 켜지 않고 그대로 굳혀 만든, 검붉은 빛깔의 엿.
지은이:권선옥,『현대시학』 추천. 충남 문화상, 전영택문학상, 신석초 문학상 등 수상.
수필집 『아름다운 식탁』 시집 『감옥의 자유』 『허물을 벗다』 『밥풀 하나』
출 처 : 2024제 1회 『수상작품집』 , 수필과비평 올해의 작품상12 , 수필과비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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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산도화 1~3
山桃花 1
山은
九江山
보랏빛 石山
山桃花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山桃花 2
石山에는
보랏빛 은은한 기운이 돌고
조용한
진종일(盡終日)
그런 날에
山桃花
산마을에
물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묏새소리
山麓을 내려가면 잦아지는데
三月을 건너가는
햇살아씨
山桃花 3
靑石에 어리는
찬물소리
반은 눈이 녹은
산마을의 새소리
靑田 山水圖에
삼월 한나절
山桃花
두어 송이
늠름한
品을
산이 환하게
틔어 뵈는데
한머리 아롱진
韻詩
*靑田:동양화가 이상범
1946년 발표, 1955년 12월 박목월 첫시집, <山桃花>,영웅출판사
동백꽃 노랗게 피어나는 사월입니다. 예년에 비해 꽃소식이 늦어졌지만,
그래도 매화가 피 어난 이후 동백꽃 산수유 진달래 영춘화 개나리 목련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유정독서 모임, 4월 3일 수요일, 18:00부터 커먼즈 필드에서 진행됩니다.
이번에 함께 읽을 작품은 김유정의 < 따라지> 입니다.
꽃들의 향연을 지켜보면서 우리들도 꽃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 사월을 즐겨야 하겠습니다.
수요일 오후에 뵙겠습니다.
2024.3.31 강버들